스포트라이트: 제2막 – 제116화: 준호의 목소리, 그리고 침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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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16화: 준호의 목소리, 그리고 침묵

오후 7시 34분. 민준의 휴대폰이 울렸다. 준호.

화면에 떠오른 이름을 보는 순간, 민준은 자신의 호흡이 얕아지는 것을 느꼈다. 스타벅스의 배경음악은 여전히 낮았고, 주변의 사람들은 여전히 자신의 존재를 무시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이 멈춘 것처럼 느껴졌다. 준호의 전화. 그것은 더 이상 단순한 전화가 아니었다. 그것은 하나의 선택지였다. 받거나, 받지 않거나.

민준은 전화를 받았다.

“서명했어?”

준호의 목소리는 예상과 달랐다. 차분했다. 너무나 차분해서 오히려 불안했다. 마치 자신이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의 목소리. 이미 모든 것을 계획한 사람의 목소리.

“네.”

민준이 대답했다. 그의 목소리는 자신이 컨트롤하기 어려운 상태였다. 떨리고 있었다.

“계약서 어디 있어?”

준호가 물었다.

“가방에.”

“누구도 보여주지 말았지?”

“네.”

“PD 박미라한테는?”

“아뇨. PD님은 전화로 스크립트 리딩 일정만 알려주셨어요. 내일 아침 10시. 더스타 스튜디오.”

준호는 침묵했다. 그 침묵은 길었다. 아마도 10초 이상. 민준은 그 침묵 속에서 자신이 뭔가 잘못 말했다고 생각했다. 준호의 침묵은 언제나 위험했다. 그것은 준호가 생각하고 있다는 뜻이었고, 준호가 생각할 때는 언제나 자신이 손해를 보는 결과가 나왔다.

“스크립트 리딩 때 뭐 할 거야?”

준호가 다시 말했다.

“스크립트를 읽을 것 같은데요.”

민준의 대답은 어리석었다. 하지만 자신은 더 이상 똑똑할 에너지가 없었다.

“당신이 그 드라마에서 누구인지 아?”

“아뇨.”

“나중에 알게 될 거야. 하지만 당신이 알아야 할 것은 딱 하나야. 당신은 그 드라마에서 누구도 믿으면 안 된다는 것. 특히 PD 박미라를 믿으면 안 돼. 그 사람은 당신 같은 배우들을 도구처럼 취급하는 사람이야.”

민준은 그 말을 들으면서, 자신이 무언가 깊은 수렁으로 빠져드는 것을 느꼈다. 준호의 말들은 항상 이런 식이었다. 표면 위의 조언처럼 들리면서, 실제로는 자신을 더 깊은 곳으로 끌어당기는 말들. 마치 자신이 수영을 하다가 갑자기 깊은 곳으로 발을 헛디딘 것처럼.

“그런데 준호님, 혹시… 누가…”

민준은 말을 멈췄다. 자신이 묻고 싶었던 것은 명확했다. 누가 자신을 선택했는가. PD 박미라가 자신을 선택했는가, 아니면 준호가 자신을 선택했는가. 하지만 그 질문을 하는 순간, 자신이 알고 싶지 않은 것을 알게 될 것 같았다.

“뭐?”

준호가 물었다.

“아뇨. 아무것도.”

민준이 대답했다.

“그래. 그리고 한 가지 더. 당신은 내일 아침 충분히 자야 돼. 적어도 5시간은. 얼굴에 피로가 보이면 안 돼. 이해해?”

“네.”

“당신의 얼굴은 이제 당신의 것이 아니야. 그건 이수진의 것이고, PD의 것이고, 넷플릭스의 것이야. 그 얼굴에 어떤 흠집도 있으면 안 돼. 이해해?”

민준은 그 말을 들으면서, 자신이 거울을 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자신의 얼굴. 그것이 이제 자신의 것이 아니라는 말. 그렇다면 자신은 누구인가. 자신의 얼굴이 자신의 것이 아니라면, 자신은 어디에 존재하는가.

“네, 알겠습니다.”

민준이 대답했다.

“그리고 민준.”

준호가 말했다. 그것은 처음이었다. 준호가 자신을 이름으로 부른 것. 지금까지는 항상 “당신”이라고 불렀는데, 지금은 “민준”이라고 불렀다. 그 이름 안에는 뭔가 다른 것이 담겨 있었다. 책임감. 혹은 죄책감.

“네?”

“당신이 이 드라마를 잘 해낼 수 있을까 걱정해. 당신은 너무 약해. 당신은 너무 투명해. 그런 사람이 이 업계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계속 들어.”

민준은 그 말에 대해 뭐라고 답해야 할지 몰랐다. 준호는 자신을 믿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불신하고 있는 것인가. 그 두 감정이 동시에 섞여 있는 것 같았다.

“내가 할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민준이 간절하게 말했다.

“내가 도와줄 수 있을까?”

준호가 물었다. 그 질문은 수사 질문이 아니었다. 그것은 진정한 의문이었다. 준호도 자신이 민준을 도와줄 수 있을지 모르고 있었다.

“네. 할 수 있어요.”

민준이 대답했다. 하지만 자신도 그것이 거짓인지 진실인지 모르고 있었다.

“내일 아침 스튜디오 가기 전에 나한테 전화해. 아침 8시. 꼭.”

“네, 알겠습니다.”

“그리고 민준.”

“네?”

“당신이 서명한 계약서. 그것은 당신을 보호하는 거야. 그것을 잊지 말아. 그것은 당신이 이제 중요한 사람이 되었다는 증거야. 그것을 자랑스러워해도 돼.”

민준은 그 말을 들으면서, 자신이 울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울 수 없었다. 스타벅스의 사람들이 자신을 보고 있었다. 아니, 보지 않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울 수 없었다. 보이지 않는 사람은 울 수도 없었다.

“감사합니다, 준호님.”

민준이 말했다.

“당신은 다시 숨을 쉬어야 해.”

준호가 말했다. 그리고 전화를 끊었다.

민준은 휴대폰을 내려놓았다. 그의 손은 떨리고 있었다. 극도로 미세한 떨림. 하지만 그 떨림은 자신이 느낄 수 있을 정도로 명확했다. 마치 자신이 물 위에 떠 있는 나뭇잎처럼, 아주 작은 파도도 자신을 흔들 수 있다는 것을 느껴졌다.

스타벅스의 시간은 오후 7시 47분이었다. 민준은 자신의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바라봤다. 그 잔은 여전히 비어 있었다. 언제부터 비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분명히 비어 있었다. 마치 자신의 마음처럼.

민준은 자신의 가방을 집었다. 계약서가 안에 있었다. 다섯 장. 모두 서명된. 그의 이름이 다섯 번 쓰여 있었다. MIN JUN. 그 이름들이 마치 자신을 증명하는 증거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동시에, 그것이 자신을 지우는 도구처럼도 느껴졌다.

밖으로 나왔을 때는 오후 8시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강남의 밤은 더욱 밝아져 있었다. 네온사인들이 하나 둘 켜지고 있었고, 거리에는 사람들이 가득했다. 모두들 어디론가 가고 있었다. 뭔가를 하고 있었다. 살아 있었다. 하지만 민준은 여전히 서 있었다. 마치 조각상처럼.

지하철 입구로 향했을 때, 민준은 자신의 휴대폰을 다시 꺼냈다. 시간을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실제로는 다른 것을 확인하고 싶었다. 혹시 누군가 자신에게 연락했을까. 누군가가 자신을 필요로 했을까.

하지만 아무도 연락하지 않았다. 다만 한 개의 메시지가 있었다. 준호로부터. 오후 7시 52분.

“당신은 아직도 나한테 빚이 있어. 기억해.”

민준은 그 메시지를 읽으면서, 자신이 얼마나 깊은 구멍에 빠져 있는지를 깨달았다. 준호. 그 사람은 자신을 구원한 사람인가, 아니면 자신을 더 깊은 곳으로 끌어당기는 사람인가. 아마도 둘 다일 것 같았다.

신림역으로 내려가는 계단을 내려가면서, 민준은 자신의 오피스텔을 생각했다. 그곳의 곰팡이 천장. 그곳의 슬리핑백. 그곳의 침묵. 아마도 자신은 그곳에서 5시간을 자야 할 것이었다. 준호의 말대로. 당신의 얼굴에 피로가 보이면 안 된다. 당신의 얼굴은 더 이상 당신의 것이 아니다.

오피스텔에 도착했을 때는 오후 9시였다. 민준은 문을 열었다. 곰팡이의 냄새가 먼저 자신을 맞이했다. 극도로 축축한 냄새. 그것은 마치 자신의 폐 안에 있는 냄새 같았다. 자신의 내부가 밖으로 새어나온 냄새 같았다.

민준은 슬리핑백으로 들어갔다. 그것은 더 이상 편한 곳이 아니었다. 그것은 자신의 무덤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자신은 그 안에서 눈을 감았다. 5시간. 그 시간 동안 자신은 누군가 다른 사람이 되어야 했다. 얼굴에 피로가 없는 사람. 눈이 맑은 사람. 준호가 필요로 하는 그런 사람.

하지만 자신은 잠을 이루지 못했다.

대신, 자신의 머리 위의 곰팡이를 바라봤다. 그것은 마치 누군가의 손가락처럼 보였다. 자신의 가슴을 누르고 있는 손가락. 그 손가락은 점점 조여오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은 그 손가락을 끝낼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 손가락을 끝내면, 자신도 끝나기 때문이다.

밤 11시. 민준의 휴대폰이 울렸다. 이수진. CEO. 그의 모든 것을 쥐고 있는 사람.

민준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대신 벨소리를 들었다. 3번. 그 다음 끊겼다. 그리고 문자가 왔다.

“민 배우, 내일 스크립트 리딩 때 특별히 신경 써야 할 점이 있습니다. 당신의 역할은 이 드라마의 핵심입니다. 실수가 없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한 가지. 당신이 누구와 만나고, 누구와 대화하는지는 조용히 해주세요. 프라이버시 문제가 있을 수 있습니다.”

민준은 그 문자를 읽으면서, 자신이 모든 것을 알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자신은 이제 누구의 것도 아니었다. 자신은 이수진의 것이었고, 준호의 것이었고, PD 박미라의 것이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하게는, 자신은 자신의 것이 아니었다.

밤 중에 민준은 거울을 봤다. 자신의 얼굴. 그것은 여전히 같은 얼굴이었다. 174센티미터의 평범한 남자. 밝은 갈색 눈.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얼굴. 하지만 이제 그 얼굴은 누군가에게는 중요한 얼굴이 되었다. 스크린 속의 얼굴. 배우의 얼굴.

민준은 자신의 얼굴을 손가락으로 만져봤다. 그것은 여전히 따뜻했다. 여전히 살아 있었다. 하지만 그 따뜻함은 더 이상 자신의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누군가 다른 사람의 것이었다.

아침 6시. 민준의 눈이 떠졌다. 자신은 한 번도 잠을 자지 못했다. 5시간의 약속. 그것을 지킬 수 없었다. 하지만 준호의 말이 맞았다. 자신의 얼굴에 피로가 보이면 안 된다. 그래서 민준은 욕실로 들어갔다.

찬 물로 얼굴을 씻었다. 극도로 찬 물. 마치 자신을 깨우기 위해서. 마치 자신을 다시 만들기 위해서. 그리고 거울을 봤다. 여전히 같은 얼굴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다른 사람의 얼굴이었다.

아침 7시 58분. 민준의 휴대폰이 울렸다. 준호.

“준비됐어?”

“네.”

“당신의 얼굴은?”

“괜찮습니다.”

“거짓말하지 마. 당신은 항상 거짓을 잘 못해.”

“네. 졸렸어요. 하지만 괜찮습니다.”

“그래. 그럼 10시에 스튜디오에서 만나.”

“네?”

“내가 갈 거야. 당신 옆에.”

그 말을 들을 때, 민준은 자신이 안도의 숨을 쉬었다. 준호가 옆에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자신은 혼자가 아니다. 그렇다면 자신은 견딜 수 있을 것이다.

“감사합니다.”

민준이 말했다.

“그리고 민준. 당신이 이 스크립트 리딩에서 해야 할 일은 딱 하나야. 누구도 의심하지 말고, 누구도 믿지 말고, 그냥 읽어. 당신의 역할을 읽어. 그게 다야.”

“네, 알겠습니다.”

“당신은 이제 주인공이야. 주인공은 항상 외로워. 그것을 잊지 말아.”

전화가 끊겼다.

민준은 자신의 가방을 집었다. 계약서가 안에 있었다. 다섯 장. 모두 서명된. 그리고 자신의 얼굴. 여전히 같은 얼굴이었지만, 이제는 누군가 다른 사람의 얼굴이었다.

더스타 스튜디오로 향하는 지하철 안에서, 민준은 자신의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마치 자신의 내부처럼. 비어 있었다. 극도로 비어 있었다. 하지만 그 비움 속에 뭔가가 자라나고 있었다. 뭔가 어두운 것. 뭔가 거대한 것.

그것이 무엇인지 민준은 아직 모르고 있었다. 하지만 곧 알게 될 것 같았다. 스크립트 리딩에서. 준호가 옆에 있을 때. 그리고 그것을 알게 되는 순간, 자신은 돌아올 수 없을 것 같았다.

오전 9시 47분. 더스타 스튜디오의 입구에 민준이 도착했다. 회색 건물. 아무 표시도 없는 곳. 하지만 자신은 이 곳을 알고 있었다. 4년 동안 무수히 지나간 곳. 그곳에서 자신은 항상 배경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다를 것이다.

아니다. 변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자신은 여전히 같은 사람이다. 다만 누군가 다른 사람의 이름을 갖고 있을 뿐이다.

민준은 스튜디오 안으로 들어갔다.

# 그날의 얼굴

민준은 한 번도 잠을 자지 못했다.

밤샘이 처음은 아니었다. 촬영장에서 대기하느라, 카페에서 스크립트를 외우느라, 버스에서 다음 날 오디션을 준비하느라 셀 수 없이 많은 밤들을 깨어 있었다. 하지만 이번은 달랐다. 이번 밤은 아예 다른 종류의 깨어있음이었다. 자신의 몸이 침대에 누워 있었지만, 의식은 어딘가 다른 곳으로 떠나 있었던 것이다.

시계를 들었다. 01:23. 다시 놨다. 03:47. 다시 들었다. 05:12.

침대 위에서 뒹굴었다. 침대 밖으로 나왔다. 다시 침대로 돌아갔다. 창밖을 봤다. 서울의 밤은 여전히 까맣고 깊었다. 하지만 그 깊음 속에서 조금씩 무언가가 밝아오고 있었다. 새벽이 오고 있었다.

“5시간. 단 5시간만 자면 된다.”

민준은 스스로에게 중얼거렸다. 준호의 말을 반복했다. 준호는 어제 저녁 전화에서 그렇게 말했다.

“민준, 내 말 들어. 너는 내일 절대로 피곤한 얼굴로 나타나면 안 돼. 이게 뭔지 알아? 이건 그냥 오디션이 아니야. 이건 네 인생이 바뀌는 순간이야. 그리고 감독은 넌 이미 봤어. 그 감독이 보고 싶은 건 너의 피로한 얼굴이 아니야. 그래서 최소한 5시간은 자야 해. 5시간만이라도.”

5시간. 그 약속을 지킬 수 없었다.

시계는 계속 나아갔다. 06:15. 06:47. 07:01.

민준의 눈은 떠져 있었다. 천장을 바라보는 눈. 하지만 천장을 보고 있지 않은 눈. 마치 그 너머의 무언가를 투시하려는 눈. 이 침대 아래, 이 집 아래, 이 서울 아래에 있는 무언가를.

하지만 거기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공허함만 있었다. 자신이 이제까지 살아온 모든 밤들의 공허함. 모든 떨어진 역할들의 공허함. 모든 떨어진 꿈들의 공허함.

‘이번엔 다를 거야. 이번엔…’

그 문장은 완성되지 않았다. 민준 자신도 이번이 다를 것이라는 확신을 가질 수 없었다. 다만 준호가 그렇게 말했을 뿐이다. 그리고 준호의 말은 지금까지 항상 옳았다.

하지만 준호의 말이 맞다는 것이 더 무섭다는 생각이 들었다.

07:15가 되었을 때, 민준은 침대에서 일어났다. 몸이 너무 무거웠다. 마치 자신의 몸 전체가 납으로 변한 것 같았다. 눈꺼풀도 무거웠다. 손가락도 무거웠다. 심지어 생각도 무거웠다.

욕실로 향했다. 거울 앞에 섰다. 거울 속의 자신을 봤다.

“아.”

작은 음성이 입에서 나왔다. 자신의 얼굴이 이렇게까지 망가져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눈 밑에는 검은 자국이 있었다. 마치 누군가가 손가락으로 그어놓은 자국처럼. 광대뼈가 두드러져 보였다. 피부는 칙칙했다. 죽음 같은 창백함이 얼굴 전체를 덮고 있었다.

“이건… 안 돼.”

민준은 수도꼭지를 돌렸다. 찬 물이 나왔다. 극도로 찬 물. 겨울 새벽의 물 같은 그런 찬 물. 손으로 움켜잡아서 얼굴에 들이부었다.

찬물은 마치 벼락처럼 얼굴을 때렸다. 모든 감각이 동시에 깨어났다. 눈이 떠졌다. 호흡이 멈췄다. 심장이 빨라졌다. 이 순간, 민준은 살아 있다는 것을 느꼈다. 자신이 실제로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다시 물을 들이부었다. 그리고 또 다시.

마치 자신을 깨우기 위해서. 아니, 마치 자신을 지우기 위해서. 이 피로한 자신, 이 초라한 자신, 이 떨어진 자신을 모두 씻어내고 누군가 다른 사람이 되기 위해서.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정말 마지막으로 한 번 더.

그리고 거울을 봤다.

여전히 같은 얼굴이었다. 같은 눈. 같은 코. 같은 입. 같은 광대뼈. 같은 턱. 하지만 뭔가가 달랐다. 그건 물리적인 변화가 아니었다. 그건 뭔가 더 깊은 곳에서의 변화였다.

이 얼굴은 여전히 민준의 얼굴이었지만, 동시에 누군가 다른 사람의 얼굴이 되어 가고 있었다.

“좋아. 이제 됐어.”

민준이 중얼거렸다. 거울 속의 자신에게 말했다. 거울 속의 자신은 대답하지 않았다.

욕실을 나왔다. 옷을 입었다. 회색 옷. 회색 셔츠. 회색 바지. 회색 재킷. 자신을 최대한 회색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배경 같이. 혹은 유령처럼. 혹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휴대폰을 들었다. 아침 7시 58분.

정확히 2분 뒤에 전화가 울렸다. 준호였다. 준호는 항상 정확했다. 정확한 시간에, 정확한 말을 하는 사람.

“준비됐어?”

목소리는 밝았다. 하지만 그 밝음 아래에는 뭔가 긴장된 것이 있었다. 마치 얇은 종이 위에 그려진 그림처럼, 그 아래에는 다른 것이 있는 것처럼.

“네.”

“당신의 얼굴은?”

민준은 거울을 다시 봤다. 아직도 자신의 얼굴이었다. 하지만 거기에는 뭔가가 있었다. 마치 면가 위에 씌워진 것처럼. 마치 누군가 다른 사람의 가면처럼.

“괜찮습니다.”

거짓말이었다. 하지만 거짓말이 아닐 수도 있었다.

“거짓말하지 마. 당신은 항상 거짓을 잘 못해.”

준호의 목소리에는 따뜻함이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타협하지 않는 따뜻함이었다.

“네. 졸렸어요. 하지만 괜찮습니다.”

이 문장은 진실이었다. 반은 진실이었다. 아니, 어쩌면 모두 거짓이었다. 민준은 자신도 모르고 있었다.

전화 너머에서 준호가 웃었다. 그것은 슬픈 웃음이었다.

“그래. 그럼 10시에 스튜디오에서 만나.”

“네?”

“내가 갈 거야. 당신 옆에. 처음부터 끝까지. 자, 이제 가.”

전화가 끊어졌다.

민준은 한동안 휴대폰을 들고만 있었다. 준호가 옆에 있을 것이다. 그 말이 자신에게 미친 영향을 민준 자신도 깨달았다. 자신의 어깨가 내려앉았다. 자신의 호흡이 깊어졌다. 자신의 심장이 느려졌다.

준호가 옆에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자신은 혼자가 아니다. 그렇다면 자신은 견딜 수 있을 것이다.

“감사합니다.”

민준이 중얼거렸다. 준호를 향해. 아니, 자신을 향해.

가방을 챙겼다. 검은색 가방. 그 안에는 계약서가 들어 있었다. 다섯 장. 모두 서명된 계약서. 그리고 그 계약서는 자신의 인생을 바꾸려고 하고 있었다. 혹은 자신이 누군가 다른 사람으로 변하는 과정을 기록하고 있었다.

민준은 거울을 한 번 더 봤다. 여전히 같은 얼굴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누군가 다른 사람의 얼굴이었다.

“이제 가자.”

민준이 말했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 지하철

오전 8시 23분. 민준은 지하철 역으로 향했다.

서울의 아침은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 거리에는 사람들이 넘쳐났다. 모두 어딘가로 가고 있었다. 모두 뭔가를 하려고 하고 있었다. 모두 자신의 인생을 살고 있었다.

민준은 그들 사이를 헤쳐나갔다. 혼자가 아니면서도 혼자인 기분으로. 존재하면서도 존재하지 않는 기분으로.

지하철역에 도착했을 때, 시간은 8시 31분이었다. 승강장은 이미 붐비고 있었다. 회사원들. 학생들. 노인들. 아이들. 모든 종류의 사람들이 지하철을 기다리고 있었다. 모두 다른 목적지를 향해. 모두 다른 꿈을 향해.

민준은 그들 사이에 섰다.

지하철이 들어왔다. 굉음과 함께. 바람과 함께. 수천 개의 인생을 담은 채로.

민준은 타고 들어갔다. 창가 자리가 비어 있었다. 그곳에 앉았다.

창밖으로 서울이 흘러가갔다. 건물들. 도로들. 사람들. 모두 정해진 궤도 위에서 움직이고 있었다. 마치 이 지하철처럼. 이 지하철도 정해진 노선 위에서만 움직일 수 있다. 벗어날 수 없다. 옆으로 갈 수 없다. 앞으로만 나아간다.

민준도 그렇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은 이제 정해진 궤도 위에 있다. 이 스크립트 리딩이라는 역에 도착하기 위해. 그리고 도착한 후에는? 도착한 후에는 다음 역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 다음 역으로. 그 다음 역으로.

혹은 이 열차에서 내려야 한다. 그리고는 다시는 올라올 수 없다.

“이 열차에서 내릴 거야.”

민served 스스로에게 말했다. 그리고 그 말이 사실인지 거짓인지는 알 수 없었다.

지하철이 다음 역에 도착했다. 사람들이 내렸다. 사람들이 탔다. 그리고 지하철은 다시 움직였다.

민준은 자신의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단지 천 조각뿐이었다. 빈 주머니. 마치 자신의 내부처럼.

극도로 비어 있었다. 4년 동안 쌓아올린 것이 다 떨어져 나간 듯한 그런 비움. 그 비움 속에는 뭔가가 자라나고 있었다. 뭔가 어두운 것. 뭔가 무거운 것. 뭔가 거대한 것.

그것이 무엇인지 민준은 아직 모르고 있었다.

지하철은 계속 나아갔다.

오전 9시 47분. 더스타 스튜디오.

### 건물 앞

민준은 건물 앞에 섰다. 회색 건물. 정확히는 짙은 회색의 건물. 마치 구름 같은 색. 아니, 마치 죽음 같은 색.

아무 표시도 없었다. 회사 로고도 없었다. 건물 번호도 없었다. 마치 이 건물이 존재하지 않기를 바라는 것처럼. 마치 이 건물에 들어가는 사람들이 존재하지 않기를 바라는 것처럼.

하지만 민준은 이 건물을 알고 있었다. 4년 동안 무수히 지나간 곳. 그 안에서 자신은 무엇이었나.

“배경이었지.”

민준이 중얼거렸다.

배경. 카메라에 잡히지 않으려고 노력했던 존재. 배우의 뒤에서 움직였던 존재. 혹은 움직이지 않으려고 노력했던 존재.

4년 동안 얼마나 많은 스크립트를 읽었나. 얼마나 많은 배우들을 봤나. 얼마나 많은 감독들을 봤나. 하지만 감독이 자신을 본 적은 몇 번이나 되나.

손가락으로 셀 수 있을 정도.

하지만 이제는 다를 것이다. 아니다. 변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민준의 머릿속이 자동으로 자신을 부정했다. 마치 자신의 뇌가 자신을 보호하려고 하는 것처럼. 혹은 자신을 망치려고 하는 것처럼.

자신은 여전히 같은 사람이다. 다만 누군가 다른 사람의 이름을 갖고 있을 뿐이다.

계약서에 적힌 이름. 김민준. 아니, 캐릭터 이름. 그것은 뭐였지? 준호가 말했던 그 이름. 민준은 생각을 시도했지만, 그 이름은 떠오르지 않았다.

“네가 그 이름이 돼야 해.”

준호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민준은 건물로 들어갔다.

### 스튜디오 로비

로비는 예상과 다르지 않았다. 흰색 벽. 회색 바닥. 검은색 소파. 아무 그림도 없는 벽. 마치 병원 같은 공간. 혹은 감옥 같은 공간.

신발을 벗었다. 슬리퍼를 신었다. 검은색 슬리퍼. 준비되어 있는 슬리퍼.

마치 자신을 위해 기다리고 있던 것처럼.

리셉션 데스크 뒤에 여자가 앉아 있었다. 그 여자는 민준을 봤다. 민준을 아는 얼굴이었다. 4년 동안 몇 번은 봤을 얼굴. 하지만 그 여자가 민준을 기억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스크립트 리딩이에요?”

여자가 물었다.

“네.”

“이름이?”

“김민준입니다.”

“음… 잠깐만요.”

여자가 컴퓨터를 봤다. 손가락이 키보드 위에서 움직였다. 그 움직임 자체가 뭔가를 결정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마치 민준의 운명을 타이핑하고 있는 것처럼.

“네, 있네요. 스튜디오 B로 가시면 돼요. 엘리베이터 타고 2층 가시면 돼요.”

“감사합니다.”

민준이 말했다.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엘리베이터는 비어 있었다. 문이 닫혔다. 그리고 2층으로 올라갔다.

올라가면서 민준은 자신의 손을 봤다. 손가락이 떨리고 있었다. 아주 약간. 하지만 분명히 떨리고 있었다.

“진정해. 진정해.”

민준이 자신에게 말했다. 하지만 손가락은 계속 떨렸다.

### 스튜디오 B 앞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복도가 나타났다. 긴 복도. 여러 개의 문. 스튜디오 A. 스튜디오 B. 스튜디오 C.

스튜디오 B 앞에 섰다.

문이 닫혀 있었다. 하지만 안에서 소리가 들렸다. 사람들의 목소리. 웃음소리. 그리고 다른 뭔가. 뭔가 무거운 것.

민준은 손을 들었다. 노크를 하려고 했다. 하지만 손이 문을 두드리지 않았다. 손이 멈춰 있었다.

‘이제 들어가면 돌아올 수 없어.’

마음 한구석에서 목소리가 났다. 그것은 자신의 목소리였는지 다른 누군가의 목소리였는지 알 수 없었다.

‘아니다. 이미 돌아올 수 없었어. 그 순간은 이미 지나갔어. 너는 이미 그 순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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