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112화: 계약서의 무게
회의실을 나오는 순간, 민준의 다리가 떨렸다. 그것은 극도로 미세한 떨림이었다. 외부에서는 보이지 않는 떨림. 하지만 자신의 내부에서는 마치 지진처럼 느껴졌다. 엘리베이터 복도로 나왔을 때, 준호는 민준의 팔뚝을 잡았다. 손가락으로 누르는 느낌. 확인하는 느낌. 마치 맥박을 재는 의사처럼.
“잘했어.”
준호가 극도로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엘리베이터 앞. 아무도 없는 복도. 하지만 그는 여전히 조심스럽게 말하고 있었다.
민준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할 말이 없었다. 회의실 안에서 자신이 한 말들이 자신의 것이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마치 자신이 어떤 배우가 되어서, 다른 누군가의 대사를 읽은 것처럼. 자신이 죽음을 이해할 수 있다는 말. 그 말이 자신의 입에서 나왔지만, 자신의 것이 아니었다.
“주인공이야. 넷플릭스 드라마의 주인공.”
준호가 계속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뭔가가 있었다. 기쁨. 혹은 안도감. 아니면 그 무엇.
엘리베이터가 도착했다. 문이 열렸을 때, 사무실 직원 몇 명이 나왔다. 그들은 준호와 민준을 봤다. 그리고 알아봤다. 특히 민준을. 최근 화제의 신인배우. 주인공이 된 배우.
준호는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갔고, 민준도 따라갔다. 문이 닫혔을 때, 그들은 다시 혼자였다. 이번에는 로비로 가는 엘리베이터였다. 준호는 1층 버튼을 눌렀다. 민준이 버튼을 누르지 않아도.
“PD가 뭐라고 했는데, 계약서는 내일 온대. 이수진이 기본 조항들을 정리할 거고.”
준호가 말했다. 그는 민준을 바라보지 않고 있었다. 엘리베이터의 바닥을 보고 있었다.
“형, 아까 회의실에서…”
민준이 말했다.
“지금은 말하지 말아. 밖에 나가자.”
준호가 손을 들었다. 다시. 엘리베이터 위의 카메라. 음성 녹음. 누군가가 들을 수도 있는 공간. 그들의 대화는 여전히 누군가의 기록 속에 있을 수도 있다.
엘리베이터가 로비에 도착했다.
강남역 출구의 카페에서, 준호와 민준은 마주 앉았다. 아이스 아메리카노 두 잔. 그 사이에는 테이블이 있었다. 그리고 그 테이블 위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단지 두 잔의 커피가 있을 뿐이었다.
“당신이 뭘 느꼈는지 알고 싶어.”
준호가 말했다. 카페의 음악은 극도로 낮았다. 피아노 재즈. 그 음악 속에서, 준호의 목소리는 더욱 명확했다.
“무엇을요?”
민준이 물었다.
“회의실에서. PD가 당신을 주인공으로 캐스팅한다고 했을 때.”
준호가 말했다.
민준은 커피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마셨다. 극도로 차가운 커피. 그것이 자신의 식도를 지나갈 때, 극도의 선명함을 느꼈다. 자신이 아직도 살아있다는 것의 증명. 차가운 것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의 증명.
“모르겠어요.”
민준이 말했다.
“기쁜 건 아니고?”
준호가 물었다.
“기쁨이… 뭔지 모르겠어요.”
민준이 대답했다.
준호는 그 말을 들으면서, 자신의 얼굴을 손으로 문질렀다. 극도로 피로해 보이는 동작. 마치 하루를 견디기 위해 자신의 얼굴을 깨우려는 그런 동작.
“당신이 주인공이야. 당신이 주인공이 된 거야.”
준호가 말했다.
“네.”
민준이 대답했다.
“당신이 4년을 견뎠던 그 모든 것. 엑스트라로서의 모든 거절. 모든 초라함. 모든 무시. 그게 끝났어. 이제부터는 다야.”
준호가 계속했다. 그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극도로 미세하게.
“네.”
민준이 다시 대답했다.
“그런데 당신은 기쁨을 못 느껴?”
준호가 물었다. 그리고 자신의 커피를 집어 들었다. 한 모금. 그리고 놨다. 마치 그것이 독약인 것처럼.
민준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자신의 가슴팍을 봤다. 하얀 셔츠. 그 아래에 자신의 심장. 그 심장이 뛰고 있었다. 하지만 그 박동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다.
“형.”
민준이 말했다.
“어제 밤에 형이 내게 한 말들이 있어요.”
“지금은…”
준호가 말했다.
“형이 나를 구한다고 했어요. 형이 나를 놓지 않을 거라고 했어요.”
민준이 계속했다.
준호는 입을 다물었다. 그의 얼굴이 극도로 창백해졌다. 마치 누군가가 그의 얼굴에서 모든 혈색을 빼앗은 것처럼.
“그런데 지금 형은 뭘 하고 있어요? 형이 진짜 나를 원한 거였어? 아니면 형의 계획 속에 나를 맞춰 넣으려고 했던 거예요?”
민준이 물었다.
카페의 음악이 계속 흘러나오고 있었다. 피아노 재즈. 극도로 낭만적인 음악. 하지만 그 음악 속에서, 두 사람의 침묵은 극도로 현실적이었다.
“당신이 주인공이 된 것 자체가 내가 원한 거야.”
준호가 말했다. 극도로 낮은 목소리로. 마치 자신에게 말하고 있는 것처럼.
“그런데 그게 정말인가요? 형이 원한 건 나일까? 아니면 나를 통해서 뭔가를 원한 거일까?”
민준이 물었다.
준호는 자신의 손을 테이블 위에 놨다. 떨리는 손. 그것은 극도로 미세한 떨림이었지만, 민준에게는 명확했다. 그것은 두려움의 떨림이었다. 혹은 분노의 떨림이었다.
“당신은 이제 주인공이야. 그럼 당신이 결정해.”
준호가 말했다. 그리고 자신의 손을 다시 집어 들었다.
오후 3시 47분. 더스타 엔터테인먼트의 이수진 대표실. 민준은 여기에 다시 불려왔다. 준호는 아래층에 있었다. 로비에서 대기 중이었다. 이번에는 혼자 들어가야 했다.
이수진의 대표실은 극도로 넓었다. 한쪽 벽은 전부 유리. 서울의 강남 전경이 보였다. 한낮의 강남. 그 도시 속에서, 자신은 극도로 작아 보였다.
“주인공이 되었다더군.”
이수진이 말했다. 그녀는 책상 뒤에 앉아있었다. 높은 등받이의 의자. 극도로 권위적인 자세.
“네, 대표님.”
민준이 대답했다.
“기분이 어떻게?”
이수진이 물었다.
“감사합니다.”
민준이 대답했다.
“감사? 기분이 아니라 감사라고? 당신은 정말 이상한 배우네.”
이수진이 웃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그것은 즐거운 웃음이 아니었다. 그것은 뭔가를 놓치지 않는 사람의 웃음이었다. 마치 자신의 가설이 맞다는 것을 확인한 그런 웃음.
“계약서를 준비했어.”
이수진이 말했다. 그리고 자신의 책상 위의 폴더를 집어 들었다. 두꺼운 폴더. 그 안에는 여러 장의 종이가 있었다.
“네.”
민준이 대답했다.
“기본 조항들을 봐.”
이수진이 폴더를 민준에게 건넸다. 민준은 그것을 받았다. 손의 무게. 극도로 무거운 무게. 마치 자신의 인생이 그 폴더 안에 들어있는 것처럼.
첫 번째 페이지. 계약 기간. 2년. 극도로 길었다.
두 번째 페이지. 급여. 월 500만원. 극도로 적었다.
세 번째 페이지. 조항들. 그것은 극도로 복잡했다. 문장들이 겹겹이 쌓여있었다. 법적 용어들. 책임. 의무. 제한. 금지.
“보이니?”
이수진이 물었다.
“네. 읽고 있습니다.”
민준이 대답했다.
“특히 주목해야 할 부분은 5번 조항이야.”
이수진이 말했다. 민준은 5번 조항을 찾았다. 그것은 극도로 길었다. 여러 문장이 한 문단을 이루고 있었다.
“배우는 회사의 지시를 따라야 한다. 회사가 정하는 모든 활동에 참여해야 한다. 회사가 정하는 모든 이미지 관리를 따라야 한다. 회사의 승인 없이 어떤 외부 활동도 할 수 없다. 위반 시, 위약금 5억원이 발생한다.”
민준이 읽었다. 극도로 낮은 목소리로.
“당신이 지금부터는 회사의 자산이야.”
이수진이 말했다.
“네?”
민준이 말했다.
“당신의 이미지, 당신의 시간, 당신의 목소리. 모든 것이 회사의 것이 돼. 그 대신, 당신은 주인공 배우가 돼. 이것이 거래야.”
이수진이 말했다.
민준은 계약서를 계속 읽었다. 다른 조항들. 7번 조항. “배우는 회사의 명예를 손상시키는 행동을 할 수 없다. 이에는 연기 활동, 공개 발언, 사적 관계, SNS 활동 등이 포함된다.” 8번 조항. “배우가 회사의 지시를 거부할 경우, 계약은 즉시 해지되며, 위약금이 발생한다.” 9번 조항. “배우의 건강 문제, 정신 건강 문제, 혹은 그 외의 이유로 계약을 이행할 수 없는 경우, 회사는 배우를 교체할 권리를 가진다.”
민준이 마지막 페이지에 도달했을 때, 그의 손이 떨리고 있었다. 극도로 미세한 떨림.
“당신이 사인하면, 당신의 인생은 극도로 바뀔 거야.”
이수진이 말했다.
“이 계약이 당신에게 모든 것을 줄 수도 있고, 모든 것을 빼앗을 수도 있어. 당신이 선택해야 해.”
이수진이 계속했다.
민준은 계약서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마지막 페이지를 봤다. 서명 란. 극도로 큰 빈 공간. 자신의 이름을 쓸 수 있는 공간.
“펜을 줄까?”
이수진이 물었다. 그녀의 손에는 극도로 검은 펜이 들려있었다. 만년필. 극도로 비싸 보이는 만년필.
민준은 펜을 받았다. 손가락으로 펜의 무게를 느꼈다. 극도로 무거운 무게. 마치 자신의 미래의 무게를 담은 그런 무게.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할 수 있어.”
이수진이 말했다.
“네?”
민준이 물었다.
“계약서는 극도로 많은 것을 요구해. 당신이 그것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는지 확인해야 해. 당신이 정말로 주인공이 되고 싶은지, 아니면 자신의 인생이 더 중요한지.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해.”
이수진이 말했다.
민준은 계약서를 다시 봤다. 그리고 펜을 들었다. 펜촉을 종이에 댔다. 극도로 가까이. 마치 자신이 지금 이 순간에 자신의 이름을 쓰면, 모든 것이 끝난다는 것을 알고 있는 그런 거리.
“생각해봐.”
이수진이 말했다.
민준은 펜을 놨다. 극도로 천천히. 마치 자신이 놓고 있는 것이 폭탄인 것처럼.
저녁 6시 12분. 민준은 카페에 앉아있었다. 신림로의 어떤 카페. 준호는 없었다. 이번에는 혼자였다. 계약서는 그의 가방 안에 있었다. 극도로 무거운 무게. 마치 자신의 인생이 그 가방 안에 들어있는 것처럼.
그의 휴대폰이 울렸다. 화면에는 준호의 이름이 떠올라있었다.
“어디야?”
준호의 목소리가 나왔다.
“카페에 있어요.”
민준이 대답했다.
“어느 카페?”
“신림로 근처에요.”
민준이 말했다.
“계약서는?”
“가방에 있어요.”
“사인했어?”
“아니요.”
민준이 대답했다.
극도의 침묵. 준호의 숨소리. 그것이 들렸다.
“집에 가. 그리고 오늘은 아무도 만나지 말고, 아무 말도 하지 말아.”
준호가 말했다.
“형, 나는…”
민준이 말했다.
“내일 봐. 내일 아침에.”
준호가 통화를 끊었다.
민준은 휴대폰을 내려놨다. 그리고 자신의 앞에 있는 커피를 봤다. 아이스 아메리카노. 극도로 차가운 커피. 그것이 극도로 천천히 녹아내리고 있었다. 마치 자신의 결정이 녹아내리는 것처럼.
카페의 벽에는 거울이 있었다. 민준은 그 거울 속에서 자신을 봤다. 창백한 얼굴. 극도로 피로해 보이는 얼굴. 그리고 그 얼굴 속에는 누군가가 있었다. 배우 민준이. 혹은 그렇게 되려고 하는 사람. 혹은 그렇게 되기를 거부하는 사람.
그 사람이 누구인지는 알 수 없었다.
오후 8시 23분. 민준은 자신의 반지하 원룸으로 돌아왔다. 천장의 곰팡이.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극도로 검은 곰팡이. 마치 자신의 인생이 그 곰팡이처럼 번식하고 있는 것처럼.
민준은 침대에 누웠다. 계약서는 가방 안에 있었다. 극도로 가까이. 하지만 닿지 않는 거리.
그의 휴대폰이 울렸다. 이번에는 준호가 아니었다. 화면에는 알 수 없는 번호가 떠올라있었다. 극도로 낯선 번호. 민준은 한참 동안 그 화면을 봤다. 그리고 받지 않았다.
전화는 끝났다. 그리고 문자가 왔다. 극도로 길게.
“민준아. 나다. 너의 어머니야. 뉴스를 봤어. 넷플릭스 드라마에 주인공으로 캐스팅되었다고 했더라. 정말 잘했어. 아버지도 하늘에서 이것을 봤을 거야. 너를 자랑스러워할 거야. 엄마는 너를 정말 자랑스러워. 언제 한 번 만나자. 엄마가 보고 싶어. 제발.”
민준은 그 문자를 읽으면서, 자신의 가슴이 극도로 답답해지는 것을 느꼈다. 어머니. 극도로 오래전에 만난 어머니. 그 어머니가 이제 나타났다. 자신의 성공이 소식으로 전해졌을 때.
민준은 휴대폰을 내려놨다. 그리고 천장의 곰팡이를 봤다. 극도로 검은 곰팡이. 그것이 극도로 천천히 자신을 향해 내려오고 있는 것 같았다.
오후 11시 47분. 민준은 여전히 잠을 자지 못하고 있었다. 계약서를 다시 읽고 있었다. 극도로 여러 번. 마치 그 문장들이 매번 다르게 보이는 것처럼.
5번 조항. “배우는 회사의 지시를 따라야 한다.”
그의 손가락이 그 문장을 따라갔다. 극도로 천천히. 마치 점자를 읽는 맹인처럼.
그리고 극도로 명확한 생각이 들었다.
이 계약을 사인하면, 자신은 더 이상 자신의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자신은 누구인가?
그 답은 계약서에 있었다.
회사의 자산. 회사의 소유물. 회사의 배우.
민준은 계약서를 옆으로 던졌다. 극도로 천천히. 그리고 천장의 곰팡이를 봤다. 그것이 극도로 천천히 자신의 얼굴을 덮어가고 있는 것 같았다.
오후 11시 52분. 문이 두드려졌다. 극도로 빠르게. 극도로 여러 번.
“민준아! 문을 열어!”
준호의 목소리였다.
민준은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문을 열었다.
준호가 안으로 들어왔다. 극도로 거친 숨소리. 극도로 창백한 얼굴. 그의 눈빛은 극도로 예리했다.
“계약서는?”
준호가 물었다.
“침대 옆에 있어요.”
민준이 대답했다.
준호는 계약서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극도로 빠르게 읽기 시작했다. 마치 자신의 인생이 그 안에 있는 것처럼.
“이 계약을 사인하면 안 돼.”
준호가 말했다.
“네?”
민준이 물었다.
“이 계약은 극도로 위험해. 너를 완전히 파괴할 거야.”
준호가 계속했다.
“그런데 형은 아까 나한테 뭐라고 했어요? 이게 기회라고. 이게 새로운 시작이라고.”
민준이 말했다.
준호는 민준의 눈을 바라봤다. 그리고 자신의 얼굴이 극도로 변했다. 마치 자신이 무언가 극도로 중요한 것을 놓쳤다는 것을 깨달은 그런 표정.
“미안해.”
준호가 말했다.
“형이 너를 밀어붙였어. 형이 너를 이 길로 끌어냈어. 형이… 미안해.”
그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극도로 명확하게.
민준은 그 떨림을 봤다. 그리고 그것이 자신의 것인 것처럼 느꼈다.
제112화 끝
# 제112화: 선택의 무게
## 오후 11시 23분
민준의 손가락이 휴대폰 화면 위에서 멈췄다. 문자를 읽고 또 읽었다. 마치 그 글자들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다른 의미로 변할 것이라고 믿는 것처럼.
**“아들아, 너 잘되고 있다고 들었다. 엄마도 참 자랑스럽다. 한번 만날 수 있을까?”**
어머니.
그 단어가 가슴 깊은 곳에서 무언가를 건드렸다. 민준은 가슴팍에 손을 얹었다. 심장이 불규칙하게 뛰고 있었다. 마치 누군가 안에서 빠져나가려고 하는 것처럼. 아니, 그게 아니라 누군가 안으로 들어오려고 하는 것 같았다.
극도로 오래전이었다. 정말로 극도로 오래전. 민준이 아직 어렸을 때, 어머니의 얼굴이 아직 선명했을 때. 그 어머니가 어느 날 갑자기 사라졌다. 아버지는 일만 했고, 할머니가 밥을 지어주셨다. 민준은 그 시간들을 회색으로만 기억했다.
그리고 지금, 성공했다고 들었을 때. 이제야 나타났다.
그것이 상처였을까, 아니면 희망이었을까?
민준은 휴대폰을 침대 옆 탁자 위에 내려놨다. 손가락이 떨리고 있었다. 자신도 모르게 떨리고 있었다. 그는 천장을 바라봤다.
천장 한쪽 모서리에는 검은 곰팡이가 피어 있었다. 극도로 검은 곰팡이.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자신을 향해 천천히, 극도로 천천히 내려오고 있는 것 같았다. 며칠 전에 봤을 때보다 더 커져 있었다. 그 위에 하얀 곰팡이도 피어나고 있었다. 마치 검은 곰팡이를 먹이로 삼는 것처럼.
*이 방도 이제 낡았구나.*
민준은 생각했다. 그리고 곧 깨달았다.
*이 방도 곧 떠날 거야. 새로운 곳으로 가야 하니까.*
어머니의 문자가 다시 떠올랐다. 그리고 준호 형의 말도.
“이건 기회야. 너의 인생을 바꿀 기회야.”
그 말을 몇 번이나 들었는가. 준호 형은 자신을 극도로 미는 사람이었다. 마치 자신이 어떤 높은 곳에 도달해야 한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것처럼. 그리고 그 길 위에 민준을 밀어붙였다. 극도로 부드럽게, 하지만 극도로 확실하게.
## 오후 11시 47분
민준은 여전히 잠을 자지 못하고 있었다. 침대 옆 탁자 위의 계약서를 다시 집어 들었다. 인쇄된 종이가 손 위에서 삐걱거렸다. 극도로 새로운 종이의 냄새가 났다. 뭔가 화학적인, 극도로 인위적인 냄새.
그는 다시 읽기 시작했다. 극도로 여러 번 읽었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그 문장들이 매번 다르게 보이는 것처럼. 아니, 다르게 보이는 게 아니라 자신이 다르게 읽고 싶은 것 같았다. 뭔가 구멍을 찾으려고 하는 것처럼. 빠져나갈 길을.
**5번 조항: “배우는 회사의 모든 지시를 따라야 하며, 회사가 정한 이미지 관리 기준을 준수해야 한다. 이를 위반할 경우 계약금의 2배에 해당하는 위약금을 지불해야 한다.”**
민준의 손가락이 그 문장을 따라갔다. 극도로 천천히. 마치 점자를 읽는 맹인처럼. 손가락이 글자를 따라가면서 뭔가 느껴지기를 바라는 것처럼. 손끝의 미세한 감각으로 이 문장 뒤에 숨겨진 진짜 의미를 읽으려는 것처럼.
침묵이 방을 가득 채웠다. 밖의 도시 소음도 이 높은 층까지는 거의 들려오지 않았다. 오직 자신의 호흡만 들렸다. 극도로 얕은 호흡.
그리고 극도로 명확한 생각이 떠올랐다. 마치 누군가 귓가에 속삭이는 것처럼 명확한 생각.
*이 계약을 사인하면, 자신은 더 이상 자신의 것이 아니다.*
민준의 눈이 계약서 맨 앞으로 돌아갔다. 회사의 로고. 그리고 자신의 이름.
**“배우 민준”**
*그렇다면 자신은 누구인가?*
그 질문이 가슴팍에 구멍을 내렸다. 극도로 작은 구멍. 하지만 그 구멍을 통해 극도로 찬 바람이 불어들어왔다.
민준은 계약서를 다시 읽었다. 1번 조항부터 15번 조항까지. 그리고 깨달았다. 그 답이 계약서 안에 있다는 것을. 자신이 누구인지에 대한 답.
**“회사의 자산. 회사의 소유물. 회사의 배우.”**
계약서는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극도로 법적인 언어로, 극도로 중립적인 톤으로. 하지만 그 의미는 명확했다.
민준은 계약서를 옆으로 던졌다. 극도로 천천히. 마치 무언가 극도로 위험한 것을 다루는 것처럼. 종이가 공중에서 부드럽게 휘날리며 바닥에 떨어졌다.
그리고 다시 천장을 봤다.
검은 곰팡이가 여전히 그곳에 있었다. 극도로 천천히 자신의 얼굴을 덮어가고 있는 것 같았다. 그것이 결국은 무엇인지 생각했다. 곰팡이는 자신의 의지로 피는 게 아니다. 단지 조건이 맞으면 피는 것이다. 습기가 있으면 피고, 어둠이 있으면 번식한다.
*나도 그렇게 되는 건가?*
민준은 생각했다.
*회사가 원하는 조건이 있으면, 나도 그대로 자라나는 건가?*
손가락이 떨렸다. 극도로 미세하게 떨렸다.
## 오후 11시 50분
문이 쾅 하는 소리로 닫혔다. 민준은 벌떡 일어났다. 밖에서 누군가 서둘러 올라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극도로 무거운 발소리.
## 오후 11시 52분
문이 두드려졌다. 극도로 빠르게. 극도로 여러 번. 마치 누군가 안에서 빠져나가려고 하는 것처럼.
“민준아! 문을 열어!”
준호의 목소리였다. 극도로 높아진 목소리. 극도로 다급한 목소리.
민준은 벌떡 일어났다. 가슴이 극도로 빠르게 뛰었다. 준호 형이 이렇게 올 일이 있나? 밤 11시 52분에?
문을 열었다.
준호가 안으로 들어왔다. 극도로 거친 숨소리를 내쉬며. 셔츠의 첫 번째 단추가 풀려 있었다. 얼굴은 극도로 창백했다. 마치 혈액이 모두 어딘가로 흘러나간 것처럼. 그의 눈빛은 극도로 예리했다. 뭔가를 찾으려는 듯이.
민준은 준호의 표정을 봤다. 그리고 본능적으로 알았다. 뭔가 극도로 잘못되었다는 것을.
“계약서는?”
준호가 물었다. 숨을 고르지도 않고.
“침대 옆에 있어요.”
민준이 가리켰다.
준호는 계약서를 집어 들었다. 바닥에 떨어져 있는 종이를 주워서. 그리고 극도로 빠르게 읽기 시작했다. 눈이 페이지를 위아래로 오갔다. 마치 자신의 인생이 그 안에 있는 것처럼. 아니, 자신이 아니라 누군가 다른 사람의 인생이 그 안에 있는 것처럼.
민준은 형의 얼굴을 봤다. 극도로 집중된 표정. 그리고 계속 변해가는 표정. 놀라움, 분노, 그리고 무언가 더 깊은 감정들.
준호가 계약서를 내려놨다. 손이 떨리고 있었다.
“이 계약을 사인하면 안 돼.”
준호가 말했다. 극도로 낮은 목소리로.
“네?”
민준이 물었다.
“이 계약은 극도로 위험해. 너를 완전히 파괴할 거야.”
준호가 계속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극도로 확실한 무언가가 있었다.
민준은 침묵했다. 그의 가슴에는 여전히 어머니의 문자가 있었다. 그리고 준호 형의 말도 있었다.
“그런데 형은 아까 나한테 뭐라고 했어요?”
민준이 천천히 말했다.
“이게 기회라고. 이게 새로운 시작이라고. 형이 제 손을 잡고 이리로 끌어왔잖아요.”
준호는 민준의 눈을 바라봤다. 극도로 길게. 그리고 자신의 얼굴이 극도로 변했다. 마치 자신이 무언가 극도로 중요한 것을 놓쳤다는 것을 깨달은 그런 표정. 그 표정이 천천히, 극도로 천천히 후회로 변했다.
“미안해.”
준호가 말했다.
“미안해, 민준.”
“형…”
“미안해. 형이 너를 밀어붙였어. 형이 너를 이 길로 끌어냈어. 형이 너한테 꿈을 팔았어. 형이…”
준호의 목소리가 떨리기 시작했다. 극도로 명확하게. 마치 누군가 안에서 부르짖는 것처럼.
“미안해.”
그의 목소리는 거의 속삭임이 되어 있었다.
민준은 그 떨림을 봤다. 준호의 어깨가 극도로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자신의 것인 것처럼 느껴졌다. 마치 그 떨림이 준호를 통해 자신에게로 전해지는 것처럼.
“형은 왜 갑자기 이러세요?”
민준이 물었다.
준호는 침묵했다. 오래 침묵했다. 그리고 천천히 계약서를 집어 들었다.
“이 계약사가 누구야?”
“강준석 대표라고 했어요.”
“강준석…”
준호가 중얼거렸다. 그리고 고개를 들었다.
“그 사람을 아니?”
“아뇨. 처음 만났어요. 아주 성공한 사람 같았고…”
“성공?”
준호의 목소리에 극도로 쓸쓸한 웃음이 섞여 있었다.
“민준, 형이 너한테 뭘 알려줘야 할까?”
“뭘 말씀하는 거예요?”
“이 사람이 누군지 알려야 할까? 아니면 이 계약이 얼마나 위험한지 알려야 할까?”
준호는 계약서를 다시 펼쳤다.
“이 5번 조항을 봐. ‘회사의 지시를 따라야 한다’? 이게 뭔 말인지 알아?”
“지시를 따르라는 뜻이잖아요.”
“아니야. 이건 다른 뜻이야.”
준호가 한 글자씩 짚었다.
“이건 ‘회사가 원하는 것이라면 뭐든 해야 한다’는 뜻이야. 너의 얼굴, 너의 몸, 너의 시간, 너의 인생. 모든 게 회사의 것이 된다는 뜻이야.”
민준의 가슴이 극도로 차가워졌다.
“그리고 이 위약금 조항 봐. 계약금의 2배? 너가 번 돈 중에서 2배를 내야 한다는 뜻이야. 너는 벌어도 돈을 못 가져가.”
“형…”
“미안해, 민준. 형이 너를 이 길로 밀어붙였어. 형이 너한테 꿈을 팔았어. 형이…”
준호는 다시 침묵했다. 그의 눈에는 눈물이 맺혀 있었다.
“형이 너를 파괴하려고 했어.”
“뭐라고요?”
민준이 물었다. 자신의 목소리가 극도로 먼 데서 들리는 것 같았다.
“형이 이 계약을 너한테 추천했어. 형이 너한테 이게 기회라고 말했어. 형이 너를 강준석 대표한테 소개했어.”
준호의 목소리가 극도로 낮아졌다.
“그런데 형이 오늘 뭘 알았는지 알아?”
“뭘요?”
“강준석이가 형의 전 회사 사장이야.”
침묵이 방을 가득 채웠다. 극도로 무거운 침묵.
“형이 전에 배우였어. 형도 이 사람한테 계약했었어. 그리고 형은 이 계약에서 나왔어. 극도로 힘들게.”
준호는 계약서를 찢었다. 극도로 천천히. 마치 종이를 찢는 게 아니라 누군가의 인생을 찢는 것처럼.
“너는 이 계약을 사인하면 안 돼. 절대로.”
그의 목소리는 극도로 단호했다.
민준은 찢어진 계약서를 봤다. 종이 조각들이 바닥에 떨어졌다. 그리고 천장의 곰팡이를 봤다.
그것이 더 이상 내려오지 않는 것 같았다.
혹은 자신이 이제 그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 같았다.
왜냐하면 이제 자신은 알았기 때문이다.
자신이 누구인지를.
회사의 자산이 아니라. 회사의 소유물이 아니라.
자신은 민준이었다.
극도로 명확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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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2화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