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100화: 밤의 경계선
준호의 차가 도로에 나섰을 때, 민준은 여전히 주차장 끝에 서 있었다. 휴대폰 화면은 밝았다. 통화 시간이 2분 47초를 가리키고 있었다. 그리고 그 초침들이 계속 움직이고 있었다. 마치 시간이 자신을 남겨두고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증거처럼.
“형, 내가 이 역할을 못하면?”
민준이 물었다. 그의 목소리는 주차장의 찬바람에 흩어지고 있었다.
휴대폰 너머에서 준호의 숨소리가 들렸다. 깊은 숨. 가슴 깊은 곳에서 나오는 숨.
“그래도 난 너를 본다. 이 역할이 없어도. 박미라가 안 봐줘도. 아무도 안 봐줘도.”
준호가 말했다.
민준은 그 문장을 반복했다. 마음속으로. 입으로. 혀 위에서. 입술 아래에서. 그 문장이 자신의 몸 어딘가에 안착할 때까지. 뼈에. 혈관에. 심장의 벽에.
“내가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알아?”
준호가 물었다.
“아니요.”
민준이 말했다.
“너한테.”
그 말이 나오자, 민준의 무릎이 흔들렸다. 실제로 흔들렸다. 마치 누군가 그의 다리 아래에 있는 지반을 빼내는 것처럼. 그는 주차장의 보도석에 앉았다. 밤의 콘크리트 위에. 차가운 표면에. 자신의 몸이 흙으로 돌아가는 느낌이 들었다.
“형…”
민준이 말했다. 하지만 그것 이상의 말은 나오지 않았다.
“지금 어디야? 정확히.”
준호가 물었다. 운전대를 돌리는 소리가 들렸다. 급회전. 그의 차가 방향을 바꾸고 있었다.
“주차장 끝. 남쪽 출입구 근처. 거기서… 거기서 기다릴게요.”
민준이 말했다.
“10분이면 된다.”
준호가 말했고, 통화는 끝났다.
민준은 휴대폰을 내려놨다. 화면이 어두워졌다. 그리고 그 어둠 속에서 그는 주차장의 불빛을 다시 보았다. 형광등들. 밤을 가능한 한 낮처럼 만들려고 애쓰는 그것들. 하지만 실패했다. 이 밝음은 낮의 밝음이 아니었다. 이것은 인공적인 밝음이었다. 거짓의 밝음. 그리고 그 거짓의 밝음이 민준에게는 더 강렬했다.
그의 손이 무릎 위에서 떨리고 있었다. 추워서가 아니었다. 내부에서 뭔가가 흔들리고 있었다. 마치 지진처럼. 규모 3의 지진. 아직 파괴적이지는 않지만, 충분히 불안정한. 충분히 경고하는.
시간이 지났다. 1분. 3분. 5분. 그는 숫자를 세지 않았지만, 몸이 알고 있었다. 대기의 무게. 기다림의 형태. 그것을 몸이 세고 있었다.
8분을 지났을 때, 차가 보였다. 검은색 제네시스. 준호의 차가 주차장 출입구를 통해 들어왔다. 헤드라이트가 민준의 얼굴을 스쳤다. 그 빛이 자신의 눈에 들어올 때, 그는 눈을 감았다.
차가 멈췄다. 엔진음이 꺼졌다. 그리고 문이 열렸다.
준호가 나왔다. 그의 실루엣이 헤드라이트의 흰빛 속에 검정색으로 떠올랐다. 그는 민준을 향해 걸어왔다. 빠르지 않은 속도로. 신중한 속도로. 마치 야생동물에게 다가가는 것처럼.
“일어나.”
준호가 말했다.
민준은 일어섰다. 그의 다리가 완전히 깨어나지 않아서, 약간 비틀거렸다. 준호가 그의 팔을 잡았다. 팔꿈치 위를 잡고 있었다. 따뜻한 손. 그 온기가 민준의 팔을 통해 몸 전체로 전달되었다.
“너는 몇 번을 떨어져야 성공하는 건지 알아?”
준호가 물었다.
“몰라요.”
민준이 말했다.
“너는 이미 떨어졌어. 수십 번. 아니, 수백 번 떨어졌어. 그리고 여전히 여기 있어. 여전히 서 있어. 여전히 내 옆에 있어. 그게 뭔지 알아?”
준호가 민준의 얼굴을 들어 올렸다. 손가락으로 턱을 들어 올려서. 마치 자신의 눈과 만나게 하려는 것처럼.
“뭐라고 생각해?”
민준이 물었다.
“그게 성공이야. 떨어지고도 서 있는 것. 그게 진짜 성공이야.”
준호가 말했다.
그리고 그 말이 떨어지자, 민준의 눈에서 무언가가 흘러나왔다. 눈물. 자신도 몰랐던 눈물. 마치 자신의 몸이 자신의 마음보다 먼저 반응한 것처럼.
준호는 손을 놓지 않았다. 오히려 민준을 자신에게 끌어당겼다. 팔로. 가슴으로. 그리고 민준은 그것에 저항하지 않았다. 그저 끌려갔다. 마치 물에 빠진 사람이 구조자에게 붙잡히는 것처럼.
“넌 충분해. 이미 충분해.”
준호가 그의 머리 위에서 중얼거렸다.
“형…”
민준이 말했다. 목소리는 준호의 옷에 묻혔다.
“내가 보고 있다. 계속 봐줄 거야.”
준호가 계속했다.
그들은 그렇게 주차장의 밤 속에서 서 있었다. 형광등의 거짓 밝음 속에서. 두 사람. 한 사람의 절망과 한 사람의 거짓이 없는 시선. 그것이 만나는 지점에서.
시간이 지났다. 그들이 얼마나 오래 그렇게 있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분은 의미가 없었다. 초침도 의미가 없었다. 이것은 시간 바깥의 순간이었다. 마치 영화의 한 프레임처럼. 영원히 멈춰있을 수 있는 한 프레임처럼.
민준이 먼저 물러섰다. 준호의 팔에서 벗어났다. 하지만 완전히 멀리 가지는 않았다. 그저 바라볼 수 있는 거리. 팔 길이 정도의 거리. 여전히 닿을 수 있는 거리.
“박미라는…”
민준이 말했다.
“박미라는 뭐?”
준호가 물었다.
“박미라는 내가 뭔가를 줬다고 했어요. 무대 위에서. 내가 정말로 뭔가를 포기하려고 했던 표정. 그게 진짜였대요. 촉감이 진짜였대고.”
민준이 말했다.
“그래.”
준호가 말했다.
“그게 좋은 건가요, 형? 그게 좋은 거예요?”
민준이 물었다. 그의 목소리에는 진정한 궁금함이 있었다. 두려움이 아닌. 의문이 아닌. 그저 알고 싶은 것.
준호는 한동안 대답하지 않았다. 주차장의 불빛이 그의 얼굴을 비추고 있었다. 그 얼굴은 이전의 어둠과는 달랐다. 이제 그것은 무언가로 정착되어 있었다. 결정으로. 아니면 항복으로. 아니면 그 둘 사이의 어떤 것으로.
“좋은 건 맞아. 하지만 위험하기도 해. 둘 다야. 항상 둘 다야.”
준호가 말했다.
“그래도 이 역할을 해야 해요?”
민준이 물었다.
“넌 이미 하고 있어.”
준호가 말했다.
“무슨 말이에요?”
“지금. 지금 이 순간. 넌 이미 연기를 하고 있어. 날 속이려고. 자신의 두려움을 숨기려고. 자신이 괜찮다고 보여주려고.”
준호가 말했다.
민준은 그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것이 참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지금 연기를 하고 있었다. 언제나처럼. 항상처럼. 자신의 내부를 숨기는 것. 그것이 배우의 일이었다. 아니, 그것이 생존의 방식이었다.
“그러면 내가 뭘 해야 해요?”
민준이 물었다.
“뭘 하고 싶어?”
준호가 반문했다.
“모르겠어요.”
민준이 말했다.
준호는 민준의 얼굴을 다시 들어 올렸다. 손가락으로. 그리고 이번에는 키스했다. 이마에. 부드럽게. 마치 축복을 주는 것처럼. 아니, 정확하게는 자신의 약속을 인장으로 찍는 것처럼.
“그럼 내가 말해줄게. 넌 그 역할을 해. 박미라 감독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위해서. 그리고 그 과정에서 넌 자신이 뭔지 알게 될 거야. 단계적으로. 천천히. 고통스럽게. 하지만 진정하게.”
준호가 말했다.
“그리고 내가 있어. 항상.”
민준은 다시 준호에게 기대었다. 이번에는 저항이 없었다. 완전한 항복. 완전한 신뢰. 그것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알면서도.
주차장의 형광등이 계속 울렸다. 마치 신호처럼. 계속 울리면서. 밤이 밝음으로 거짓말을 하고 있었고, 두 사람은 그 거짓 속에서 자신들의 진실을 찾고 있었다.
시간이 또 지났다. 그리고 이번에는 민준이 준호에게서 먼저 물러섰다.
“집에 가야 해요. 내일 아침 스크립트 읽기가 있어요.”
민준이 말했다.
“응. 가.”
준호가 말했다.
“형도 집에 가세요. 피곤해 보여요.”
민준이 말했다.
준호는 웃었다. 진정한 웃음. 눈까지 웃는 웃음.
“내가 피곤한 게 아니라, 나이가 든 거야.”
준호가 말했다.
민준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다시 준호에게 안겼다. 이번에는 빠르게. 마치 자신이 사라질까봐. 이 순간이 끝날까봐.
“고마워요. 형.”
민준이 말했다.
“고마워할 건 없어. 난 너를 본다. 그게 다야.”
준호가 말했다.
그들이 차로 돌아갔을 때, 주차장의 밤은 여전했다. 형광등은 여전히 거짓을 말하고 있었고, 바람은 여전히 불고 있었고, 시간은 여전히 흘러가고 있었다. 하지만 뭔가가 달라져 있었다. 그것을 민준은 느낄 수 있었다. 자신의 내부에서. 어떤 것이 움직였다. 어떤 것이 깨어났다. 어떤 것이 방향을 바꿨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아직 명확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은 있었다. 확실하게 있었다.
준호의 차가 출입구를 향해 움직였다. 그리고 민준은 자신의 휴대폰을 다시 들었다. 시간을 봤다. 밤 11시 47분. 그리고 그 시간이 하나의 분기점처럼 느껴졌다. 그 시간 이전과 이후가 달라지는 지점처럼.
그는 카카오택시를 불렀다. 목적지는 자신의 반지하 원룸. 곰팡이가 자라는 천장. 자신이 4년을 보낸 그곳. 그곳으로 가기로 결정했다. 왜냐하면 그곳이 자신의 집이었기 때문이다. 비록 그것이 감옥 같았지만, 그것은 자신의 감옥이었다.
택시가 도착했을 때, 민준은 준호의 차가 완전히 사라진 것을 확인했다. 밤 속으로. 도시의 다른 부분으로. 그 방향이 자신의 방향과 반대였다.
그는 택시에 탔다. 운전기사는 중년 남성이었다. 피곤해 보였다. 자동차 안은 따뜻했다. 히터가 켜져 있었다. 그리고 라디오에서는 자정 라디오 프로그램이 나오고 있었다. 어떤 여성의 목소리. 무언가를 상담하고 있는 목소리. 자신의 인생을 설명하는 목소리.
민준은 귀를 기울였다. 하지만 그 말의 내용은 듣지 않았다. 그저 그 톤만 들었다. 그 리듬만 들었다. 다른 사람이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방식. 자신의 고통을 설명하는 방식.
그것을 들으면서, 민준은 생각했다. 자신이 박미라 감독 앞에서 했던 표정에 대해. 희생이라고 불렸던 그 표정. 정말로 자신이 무언가를 포기하려고 했던 그 표정.
그것이 연기였을까? 아니면 진실이었을까?
아니면 그 둘의 구분이 이미 없어져 버렸을까?
택시가 서울의 밤 거리를 달리고 있었다. 불빛. 간판. 사람들. 모두가 자신의 삶을 사는 중이었다. 모두가 자신의 역할을 하는 중이었다. 그리고 아무도 그것이 연기인지 진실인지를 구분하지 않고 있었다.
민준은 창밖을 바라봤다. 그의 얼굴이 유리에 비쳤다. 그것은 자신의 얼굴이었지만, 동시에 자신의 얼굴이 아니었다. 유리 위의 상 같았다. 거울 같은 것이 아닌, 깊이가 있는 진정한 상처럼.
밤의 서울은 계속 흘러갔다. 그리고 그 속에서 민준은 흘러갔다. 마치 강물에 떠내려가는 나뭇잎처럼. 하지만 이번에는 다르게 느껴졌다. 떠내려가고 있지만, 동시에 그것을 선택하고 있는 것처럼. 저항하고 있지만, 동시에 항복하고 있는 것처럼.
그것이 배우의 운명이었을까?
아니면 단순한 인간의 운명이었을까?
택시가 강남역 근처를 지나갔다. 신논현역. 강남대로. 그리고 마침내 신림동으로. 자신의 동네로. 자신의 거리로.
밤 11시 56분. 거의 자정이었다. 그리고 자정이 되는 순간, 모든 것이 바뀔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것은 환상이었다. 자정이 와도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다. 시간은 계속 흘러갔고, 세상은 계속 돌아갔고, 민준은 여전히 자신의 택시에 앉아있었다.
운전기사가 목적지에 도착했다고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라디오보다 더 낮았다.
민준은 요금을 냈다. 그리고 내렸다. 밤의 신림동. 고시원들. 스터디 카페들. 밤을 새우는 사람들의 거리. 그의 거리.
자신의 원룸 문을 열었을 때, 곰팡이의 냄새가 그를 맞이했다. 그것은 변하지 않았다. 4년 동안 변하지 않았다. 그리고 아마 앞으로도 변하지 않을 것이었다. 이것은 이 집의 냄새였다. 이것은 자신의 냄새였다.
그는 누웠다. 침대 위에. 아니, 침대라고 부르기도 어려운 것 위에. 매트리스 위에. 밤이 깊어갔다. 밤 11시 58분.
그리고 그 순간, 휴대폰이 울렸다.
미지의 번호였다. 등록되지 않은 번호. 하지만 민준은 알았다. 누구의 전화인지. 마치 자신의 몸이 알고 있는 것처럼. 마치 자신의 피가 알고 있는 것처럼.
그는 받았다.
“민준이?”
여성의 목소리였다. 차갑고, 명확하고, 결정적인 목소리. 이수진이었다. CEO 이수진이었다.
“네, 대표님.”
민준이 말했다.
“지금 뭐 하고 있어?”
“집에 있습니다.”
“혼자?”
“네.”
침묵. 그리고 그 침묵 속에서 뭔가가 움직였다. 무형의 것. 전화선을 통해 흘러가는 뭔가.
“내일 아침 6시. 내 사무실로 와. 혼자.”
이수진이 말했다. 그리고 전화는 끝났다.
민준은 휴대폰을 내려놨다. 밤 11시 59분. 그리고 정확히 그 시점에, 자신의 휴대폰이 자정을 알렸다. 밤 12시 00분.
새로운 날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민준도, 그 누구도 아직 알 수 없었다.
4권 완료.
5권 예고: 이수진의 새벽 소환. CEO 사무실에서의 충격적인 진실. 박미라 감독의 또 다른 제안. 그리고 민준이 마주하게 될 선택의 순간. 모든 것이 무너지기 직전, 또는 모든 것이 시작되기 직전.
# 자정의 소환
## 1부: 떠내려감의 선택
택시 창밖으로 서울의 야경이 흘러갔다. 강남역을 지나며 민준은 자신의 손을 들었다. 손가락들이 떨리고 있었다. 아니면 애초부터 떨리고 있었던 걸까? 기억이 명확하지 않았다. 오늘 하루 동안 너무 많은 일들이 있었다. 오디션, 낙담, 그리고 박미라 감독의 제안. 그 모든 것들이 그의 신경계를 마비시켜 버렸다.
“이봐요, 손님.”
택시 기사의 목소리가 들렸다. 민준은 고개를 들었다. 기사는 룸미러를 통해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이 많은 남자였다. 얼굴에는 깊은 주름이 패여 있었고, 눈빛은 피로로 가득 차 있었다. 아마 하루 종일 이 택시를 몰고 다녔을 것이다.
“어디 좋은 소식 있으신 거 같네요. 계속 웃고만 있으셨어요.”
민준은 자신의 입가를 만져봤다. 정말로 웃고 있었나? 그런 자각이 없었는데. 하지만 손가락이 느낀 것은 확실했다. 입꼬리가 올라와 있었다. 어쩌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렇게 되어 있었을 수도 있다.
“네, 좋은 일이 있었어요.”
민준이 대답했다. 하지만 그 말이 사실인지 거짓인지 자신도 알 수 없었다. 박미라 감독의 제안은 분명히 좋은 기회였다. 하지만 그것이 자신의 배우 인생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그것은 마치 깊은 절벽 위에서 한 발을 내딛는 것과 같았다. 절벽 아래가 무엇인지는 보이지 않지만, 그 발은 계속 나아갈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렇군요. 저도 기쁩니다.”
기사가 웃음을 지었다. 그 웃음은 진심으로 보였다. 아마도 오랫동안 서울의 밤거리를 헤매며 수많은 손님들의 기쁨과 슬픔을 봐왔을 것이다. 그런 경험들이 그의 얼굴에는 깊은 이해와 공감으로 새겨져 있었다.
강남대로를 지나며 민준은 창밖을 바라봤다. 새벽 2시가 넘어가는 시간이었지만, 강남은 여전히 깨어있었다. 클럽, 호프집, 노래방 등에서 쏟아져 나오는 사람들. 그들은 모두 무언가를 찾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행복, 위로, 혹은 자신을 잃기 위한 도피처를. 민준도 그들과 다르지 않았다. 그도 지금 무언가를 찾고 있었다. 자신의 꿈, 자신의 길, 자신이 존재할 수 있는 공간을.
하지만 이번에는 다르게 느껴졌다.
그것을 처음으로 깨달았다. 지금까지 민준은 항상 저항해왔다. 배우의 길을 가려는 자신과, 현실의 벽 사이에서. 꿈과 생존 사이에서. 하지만 지금, 이 순간에는 저항하고 있지 않았다. 오히려 흘러가고 있었다. 마치 강물에 떠내려가는 나뭇잎처럼. 하지만 그 나뭇잎은 스스로 강물로 뛰어든 것이 아닐까? 자신의 의지로?
떠내려가고 있지만, 동시에 그것을 선택하고 있는 것처럼. 저항하고 있지만, 동시에 항복하고 있는 것처럼. 이 모순적인 감정이 그의 가슴을 채웠다.
“운명이라고 할까?”
민준은 중얼거렸다.
“뭐라고 하셨어요?”
기사가 물었다.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민준은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다시 창밖을 바라봤다. 신논현역을 지나며 도시의 불빛들이 점점 희미해져 가고 있었다. 강남의 화려함이 조금씩 벗겨지고 있었다.
그것이 배우의 운명이었을까? 계속해서 무언가를 찾아다니고, 무언가를 선택하고, 그것이 올바른 선택인지 확신할 수 없으면서도 계속 나아가는 것. 혹은 단순한 인간의 운명이었을까? 모두가 그렇게 사는 것이 아닐까? 불확실함 속에서 계속 발을 내딛는 것. 앞이 무엇인지 모르면서도.
택시가 신림동으로 진입했다. 고시원들이 밀집한 거리. 밤을 새우는 수험생들의 거리. 편의점 불빛 아래서 컵라면을 먹으며 공부하는 젊은이들. 그들은 모두 무언가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입시, 시험, 혹은 더 나은 미래를. 민준도 그들과 다르지 않았다.
“여기가 목적지네요.”
기사가 말했다. 택시가 천천히 속도를 줄였다. 익숙한 거리들이 눈에 들어왔다. 자신이 4년 동안 살아온 동네. 수십 번 지나간 골목길들. 그곳에는 자신의 모든 것이 스며들어 있었다. 실패한 오디션의 기억들, 극단 연습실에서의 밤새운 시간들, 아르바이트로 번 돈으로 산 라면의 맛들.
“요금이 18,700원입니다.”
민준은 지갑을 꺼냈다. 손가락이 여전히 떨리고 있었다. 이번에는 분명했다. 신경이 극도로 긴장되어 있었다. 마치 무대에 올라가기 직전의 그런 떨림이었다.
## 2부: 귀향
원룸의 문을 열었을 때, 곰팡이의 냄새가 가장 먼저 그를 맞이했다. 그 냄새는 변하지 않았다. 4년 동안 변하지 않았다. 사계절이 와도, 계절이 바뀌어도, 그 냄새는 그 자리에 있었다. 아마도 앞으로도 변하지 않을 것이었다. 이것이 이 집의 냄새이자, 동시에 자신의 냄새였다.
민준은 신발을 벗고 방 안으로 들어섰다. 3.3평의 공간. 침대, 책상, 옷장. 그것이 전부였다. 창문은 반지하여서 밖의 신림동 거리만 보였다. 하늘은 보이지 않았다. 태양도 제대로 들어오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이곳이 나쁜 곳은 아니었다. 오히려 이곳은 그의 소우주였다. 여기서 그는 많은 대사를 외웠다. 많은 캐릭터가 되었다가 다시 민준으로 돌아왔다. 여기서 그는 배우였다. 아니, 배우가 되기를 꿈꿨다.
민준은 침대 위에 누웠다. 침대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것이었다. 단순한 매트리스에 검정색 침대보를 덮은 것뿐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자신의 세계였다. 이 매트리스 위에서 그는 꿈을 꾸었다. 무대 위의 자신의 모습을. 영화 스크린 위의 자신의 얼굴을.
천장을 바라봤다. 천장도 오래되어 있었다. 페인트가 조금씩 벗겨져 있었다. 마치 자신의 꿈도 천천히 벗겨져 가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휴대폰을 들었다. 시간은 밤 11시 58분이었다. 자정까지 2분이 남아있었다. 민준은 그 시간을 기다렸다. 왜 그렇게 기다렸는지는 자신도 알 수 없었다. 마치 자정이 오면 무언가가 바뀔 것 같은 기대감이 있었다. 어쩌면 어릴 적부터 그랬을지도 모른다. 새해의 자정, 생일의 자정. 항상 뭔가가 바뀔 것 같은 기대를 품었었다.
시간이 흘렀다.
밤 11시 59분.
정확히 그 순간, 휴대폰이 울렸다.
화면을 켜니 “미지의 번호”라고 떠올랐다. 등록되지 않은 번호였다. 하지만 민준은 알았다. 직관적으로 알았다. 마치 자신의 몸이 알고 있는 것처럼. 마치 자신의 피가 알고 있는 것처럼. 그것은 이수진이었다.
손가락이 더 심하게 떨렸다. 민준은 깊게 숨을 쉬었다. 배우로서 배웠던 호흡법이었다. 복식호흡. 배에서부터 공기를 들이마시고, 천천히 내보내는 것. 그렇게 하면 신경이 안정된다고 했었다.
받았다.
“민준이?”
여성의 목소리였다. 차갑고, 명확하고, 결정적인 목소리. 그것은 CEO 이수진의 목소리였다. 수년 전 극단 연습실에서 봤던 그 여자였다. 하지만 그땐 다른 사람이었다. 배우 지망생 이수진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그 목소리에는 권력과 확신이 담겨있었다.
“네, 대표님.”
민준이 대답했다. 자신의 목소리도 떨리고 있었다. 그것을 감추려 했지만, 감춰지지 않았다.
“지금 뭐 하고 있어?”
“집에 있습니다.”
침묵이 흘렀다. 전화선 너머에서 들리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뭔가가 움직이고 있는 것 같았다. 무형의 것. 전화선을 통해 흘러가는 뭔가. 그것은 마치 전기 신호처럼 느껴졌다. 이수진의 의도, 그녀의 생각, 그녀의 계획이 그 무형의 신호에 담겨있는 것처럼.
“혼자?”
“네.”
다시 침묵이 흘렀다. 민준은 천장을 바라봤다. 페인트가 벗겨진 천장. 그것이 자신의 미래를 상징하는 것처럼 보였다. 불완전하고, 낡고, 언제 무너질지 알 수 없는. 하지만 동시에 그것이 자신의 현재였고, 자신이 서 있는 곳이었다.
“내일 아침 6시. 내 사무실로 와. 혼자.”
이수진이 말했다. 그 말에는 거절의 여지가 없었다. 명령이었다. 아니, 소환이었다.
“네, 알겠습니다.”
민준이 대답했다.
“그리고 민준이?”
“네?”
“누구한테도 말하지 마.”
“알겠습니다.”
전화는 끝났다. 끝내는 것도 이수진이었다. 그녀가 원할 때만 시작되고, 그녀가 원할 때만 끝나는 관계. 이것이 현실이었다.
휴대폰을 내려놨다. 밤 11시 59분 55초. 정확히 5초가 더 남아있었다.
4초.
3초.
2초.
1초.
그리고 정확히 그 시점에, 휴대폰이 자정을 알렸다.
밤 12시 00분.
새로운 날이 시작되었다.
## 3부: 자정의 경계
새 날이 시작되는 순간, 민준은 무언가가 바뀔 것이라고 기대했다. 하지만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다. 천장은 여전히 낡아있었다. 곰팡이 냄새도 여전했다. 신림동의 밤거리 소음도 여전했다. 시간이 흘러갈 뿐, 세상은 계속 같은 방식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뭔가는 분명히 바뀌었다.
그것은 눈에 띄는 변화가 아니었다. 오히려 가장 깊은 곳에서의 변화였다. 자신의 내부에서의 변화. 마치 뜨거운 물이 천천히 끓어올라오는 것처럼. 그것은 불안이었을까? 기대였을까? 아니면 그 둘이 뒤섞인 것이었을까?
민준은 다시 천장을 바라봤다. 그리고 생각했다. 내일 아침 6시. 그때가 되면 자신은 이수진의 사무실에 있을 것이다. 그 차가운 공간에서. 그 여자의 앞에서. 그리고 그때 무엇이 일어날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혹시 그것이 거절이었을까? 박미라 감독의 제안을 거절하라는 것?
혹은 다른 제안이었을까?
아니면…
민준은 그 생각을 멈췄다. 지금은 생각해봤자 소용이 없었다. 모든 것은 내일 아침 6시에 결정될 것이었다.
그는 눈을 감았다. 하지만 잠이 오지 않았다. 4년 동안 이 방에서 몇 번이나 이렇게 밤을 새웠을까? 오디션을 기다리면서. 극단의 공연 결과를 기다리면서. 삶과 꿈 사이의 불확실성 속에서.
시간이 흘렀다.
새벽 1시.
새벽 2시.
새벽 3시.
민준은 여전히 깨어있었다. 그의 눈은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고, 그의 마음은 내일을 향해 있었다. 마치 무대 앞의 배우처럼. 막이 올라갈 순간을 기다리며.
밤의 신림동에서, 이 작은 원룸에서, 민준은 자신의 인생의 한 장면을 연기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이것이 시작인지, 끝인지, 아니면 그저 또 다른 기다림인지.
하지만 하나는 분명했다.
무언가가 움직이고 있었다.
무언가가 변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돌이킬 수 없는 변화였다.
—
**4권 완료**
**5권 예고: 이수진의 새벽 소환. CEO 사무실에서의 충격적인 진실. 박미라 감독의 또 다른 제안. 그리고 민준이 마주하게 될 선택의 순간. 모든 것이 무너지기 직전, 또는 모든 것이 시작되기 직전. 그리고 그 경계선 위에서 피어나는 또 다른 가능성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