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트라이트: 제2막 – 제96화: 거울의 균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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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96화: 거울의 균열

촬영이 끝난 후, 민준은 세트장을 떠나지 않았다. 다른 배우들과 스태프들이 기재를 정리하고 짐을 챙기는 동안, 그는 그저 창 앞에 서 있었다. 같은 창. 같은 위치. 하지만 이제 조명은 꺼져있었고, 카메라도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전히 자신이 관찰되고 있다는 느낌을 떨쳐낼 수 없었다.

박미라의 말이 계속 맴돌았다. 희생이에요. 그 단어가 그의 피부에 달라붙어 있었다. 마치 페인트처럼. 씻어낼 수 없는 페인트.

“민 배우?”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민준은 돌아섰다. 소품 담당 스태프였다. 젊은 여자, 아마 스무 살 초반쯤. 그녀는 손에 뭔가를 들고 있었다. 창문에 붙인 응결수를 닦는 천.

“네?”

민준이 물었다.

“감독님이 내일 같은 신을 한 번 더 한다고 하셨는데, 혹시 지금 창문을 정소해도 될까요? 응결수가 좀 많아서.”

그녀가 물었다. 그녀의 눈은 민준의 얼굴을 향했지만, 그것은 정중한 시선이었다. 마치 그가 무엇이 아닌 척 대하는 그런 시선.

“아, 네. 괜찮습니다.”

민준이 말했다. 그는 창에서 물러났다. 그의 손이 그 위에 남긴 자국들. 그 응결수들. 그것들이 이제 닦아질 것이다. 마치 그가 여기 있었다는 증거를 지우듯이.

그는 촬영장을 나갔다. 로비로. 로비에서 복도로. 복도에서 계단으로. 움직임만 있고 목적지가 없는 이동. 그의 몸은 자동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뇌는 따라가지 못하고 있었다.

휴대폰이 울렸다. 진동이 아닌 벨소리. 준호가 설정한 대로. 중요한 전화는 항상 벨소리로 울려야 한다고 준호가 말했었다. 민준은 멈춰섰다. 계단의 중간쯤. 위도 아래도 아닌 곳에서.

화면을 봤다. 준호였다. 이름 옆에 작은 아이콘이 있었다. 전화 수신 거절 버튼. 그것을 누르는 것은 쉬웠다. 손가락 하나면 충분했다.

하지만 그는 누르지 않았다. 대신 전화를 받았다.

“네?”

“지금 어디야?”

준호의 목소리가 들렸다. 배경음이 있었다. 자동차 엔진음. 그는 이동 중이었다.

“촬영장입니다. 로비.”

민준이 답했다. 거짓이었다. 그는 이미 로비를 떠나 있었다. 하지만 진실과 거짓의 차이가 이제 중요해 보이지 않았다. 그 모든 것이 같은 종류의 연기였다.

“내가 15분 후에 거기 도착할 거야. 지금 바로 차 앞 주차장으로 나와.”

준호가 명령했다. 그것은 제안이 아니었다. 명령이었다.

“네, 알겠습니다.”

민준이 말했다. 전화가 끊겼다.


주차장은 거의 비어있었다. 해가 지고 있었고, 주차장의 형광등들이 하나둘 켜지고 있었다. 민준은 준호의 차를 알아봤다. 검은색 제네시스. 등록번호가 보였다. 준호는 그의 차의 번호를 외우라고 한 적이 있었다.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서.

준호는 이미 차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운전석 문이 열려있었고, 그는 그 옆에 서 있었다. 그의 얼굴은 어두웠다. 그자체로가 아니라, 형광등의 그림자 때문에.

“들어와.”

그가 말했다. 민준은 조수석 문을 열었다. 그 안으로 들어갔다. 자동차 안의 냄새. 가죽 시트의 냄새와 섬유유연제. 준호의 냄새. 그는 항상 깔끔한 냄새를 풍겼다. 관리되는 냄새. 통제된 냄새.

준호가 운전석에 앉았다. 문을 닫았다. 그리고 시동을 걸지 않았다. 그들은 어둠 속에 앉아있었다. 차 밖의 형광등이 유리를 통해 들어오고, 그것이 그들의 얼굴을 밝혔다.

“박미라가 뭐라고 했어?”

준호가 물었다.

“희생이라고 했습니다.”

민준이 답했다.

“희생?”

“네. 제 표정을 보고, 그것을 희생이라고 했습니다.”

민준이 설명했다.

준호는 한동안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다. 그의 손가락이 운전대를 두드렸다. 리듬이 없는 두드림. 생각하는 사람의 두드림.

“그 여자가 뭘 아나. 희생이 뭔지.”

준호가 마침내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낮고, 위험했다. 민준은 이 톤을 전에 들어본 것 같았다. 언제였더라. 아, 맞다. 지난주 대기실에서. 그때도 준호는 이런 목소리를 냈었다.

“뭐가 문제입니까?”

민준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문제? 문제는 그 여자가 너를 봤다는 거야. 정확하게 봤다는 거. 그리고 그 여자는 카메라를 통해서만 세상을 보는 여자야. 그래서 이제 그 영상은 더 위험해진 거야.”

준호가 설명했다.

“어떻게 더 위험해진다는 말입니까?”

민준이 물었다.

“박미라는 예술가야. 진정한 의미의. 그리고 예술가들은 자신이 발견한 것을 숨기지 못해. 특히 그것이 아름다울 때는 더더욱. 그 영상이 이미 투자자들한테 돌아다니고 있다면, 이제 그건 단순한 드라마 장면이 아니야. 그건 희생의 기록이 돼. 그리고 희생의 기록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여. 그건 위험해. 너를 더 유명하게 만들고, 동시에 너를 더 취약하게 만들어.”

준호가 말했다. 그의 말이 끝났을 때, 민준은 이것이 두려움의 표현임을 깨달았다. 준호는 두려워하고 있었다. 하지만 무엇을 두려워하는지는 명확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 역할을 거절해야 한다는 뜻입니까?”

민준이 물었다.

“거절? 지금?”

준호가 비웃음을 흘렸다.

“계약서에 뭐라고 되어있는데? 거절할 수 있는 조항이 있나?”

준호가 물었다. 그의 목소리는 이제 거의 조롱에 가까웠다.

“없습니다.”

민준이 조용히 말했다.

“그러지. 없지. 그래서 넌 계속해야 해. 그리고 넌 더 잘해야 해. 박미라가 원하는 그 ‘희생’을 매번 더 깊게, 더 진정하게 표현해야 해. 왜냐하면 그게 이제 너의 유일한 자산이 되었으니까.”

준호가 말했다.

민준의 손이 자동으로 주머니로 갔다. 휴대폰. 습관적인 움직임. 하지만 그는 휴대폰을 꺼내지는 않았다. 단지 그것이 거기 있다는 것을 확인했을 뿐이다. 연결의 증거. 외부 세계와의 최소한의 연결.

“박미라의 전화번호를 알고 있나?”

준호가 갑자기 물었다.

“아니요.”

민준이 답했다.

“내일 찾아. 그리고 그 여자한테 전화를 해. 지금 찍은 장면들의 다른 버전이 있는지 물어봐.”

준호가 명령했다.

“다른 버전?”

“테이크. 다른 테이크들. 박미라는 항상 여러 번 찍어. 그리고 그 중에서 가장 좋은 것을 고른다. 그래서 뭐가 좋은지, 뭐가 버려지는지 물어봐.”

준호가 설명했다.

“그걸 물어보는 게 이상하지 않을까요?”

민준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상하면 뭐하냐? 넌 배우야. 배우는 자신의 연기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게 당연하지. 그게 이상한 게 아니라 당연한 거야.”

준호가 말했다.

하지만 민준은 알고 있었다. 이것이 당연함이 아니라는 것을. 이것은 감시였다. 박미라가 뭘 기록했는지, 뭘 남기고 뭘 버릴 생각인지를 알기 위한 정보 수집이었다. 준호는 그것을 알면서도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리고 민준도 그것을 알면서도 이것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거울의 균열. 지난주 대기실에서 거울을 통해 본 준호의 모습. 그것이 지금 현실이 되고 있었다.

“네, 알겠습니다.”

민준이 말했다.

“그리고 또 하나.”

준호가 계속했다.

“뭡니까?”

“수진이에게 이 일에 대해 얘기하지 마. 아무것도.”

준호가 말했다.

민준은 준호의 얼굴을 봤다. 형광등 아래에서. 그 얼굴은 마스크처럼 보였다. 표정이 있는 마스크. 아무리 봐도 안쪽을 볼 수 없는 그런 마스크.

“이사님 말씀입니까?”

민준이 물었다.

“응. 그 여자는 신경 쓸 필요가 없어. 그 여자는… 다른 문제가 있어.”

준호가 말했다. 그의 목소리가 조금 흔들렸다. 처음이었다. 이 대화 중에 처음으로 준호의 목소리가 흔들렸다.

“어떤 문제입니까?”

민준이 물었다. 하지만 준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시동을 걸었다. 엔진이 살아났다. 부드러운 음성. 고급 자동차의 음성. 엔진도 계층을 가진다.

“내가 너를 집에 데려다줄게. 지금 집에 가. 쉬어. 내일 촬영이 오전 8시에 있지?”

준호가 말했다.

“네.”

민준이 답했다.

“그럼 7시에 회사에서 만나. 분장실 앞에서.”

준호가 말했다. 그는 이미 차를 움직이고 있었다. 주차장에서 나가고 있었다. 야간 조명이 그들의 위를 지나갔다. 한 번, 두 번, 세 번.

민준은 창밖을 봤다. 서울의 밤. 불빛들. 수백만의 불빛들. 그리고 그 불빛 뒤에 있는 얼굴들. 모두가 마스크를 쓰고 있었다. 일상의 마스크. 하루의 마스크. 다른 사람의 눈 앞에서 입는 마스크.

“민준이.”

준호가 갑자기 말했다. 이름으로. 성이 아닌 이름으로.

“네?”

민준이 반응했다.

“넌… 이 일들이 싫어?”

준호가 물었다.

그것은 특이한 질문이었다. 왜냐하면 그 답변은 이미 정해져 있었기 때문이다. 싫든 좋든, 민준은 이것을 계속해야 했다. 계약서가 그렇게 되어있었다. 그 답변은 이미 정해진 것이었다.

하지만 준호는 기다리고 있었다. 정답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진실을 원하는 것처럼.

“… 네. 싫습니다.”

민준이 말했다. 그것은 처음이었다. 이것을 직접적으로 말한 것. 누군가에게.

준호는 운전대를 조금 더 세게 잡았다. 손가락이 하얀색으로 변했다. 그리고 나서 천천히 힘을 뺐다.

“맞아. 당연히 싫지. 이건 싫어야 정상이야.”

준호가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이제 다시 낮아졌다. 하지만 이전의 낮음이 아니었다. 이것은 더 깊은 낮음이었다. 피로의 낮음. 항복의 낮음.

“그럼 왜… 계속하는 거죠?”

민준이 물었다.

“왜냐하면 멈출 수 없으니까. 넌 이미 들어왔어. 그리고 한 번 들어온 곳에서는, 나가는 것보다 더 깊이 들어가는 게 낫거든.”

준호가 답했다.

그들은 나머지 운전을 침묵 속에서 했다. 라디오는 켜지 않았다. 음악도 없었다. 단지 엔진음과 타이어음. 그리고 가끔 신호등이 바뀔 때 나는 그 기계음. 모두가 도시의 일부인 소리들.

민준은 창밖의 밤을 계속 봤다. 불빛들이 흐르고 있었다. 마치 강물처럼. 그리고 그들은 그 강물 속에서 떠내려가고 있었다.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면서, 멈출 수도 없으면서.

그의 손이 다시 주머니로 갔다. 휴대폰. 그것을 꺼냈다. 화면을 켰다. 시간은 밤 10시 27분이었다. 새 메시지가 없었다. 누구도 그에게 연락하지 않았다.

그는 연락처를 열었다. 이름들이 줄을 세우고 있었다. 준호. 회사 대표. 박미라. 그리고 몇 개의 다른 이름들. 하지만 그들 중 누구도 정말로 중요하지 않은 것 같았다.

그는 휴대폰을 다시 주머니에 넣었다. 그리고 창밖을 다시 봤다. 밤은 계속되고 있었다. 그리고 도시는 계속 빛나고 있었다. 마치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집에 도착했을 때, 준호는 차를 세웠지만 엔진을 끄지 않았다. 민준이 내릴 때까지 기다리고 있었다.

“내일 7시에.”

준호가 말했다.

“네, 감사합니다.”

민준이 말했다. 그는 차에서 내렸다. 문을 닫았다. 차는 여전히 거기 있었다. 엔진이 켜져있는 채로. 준호는 운전석에서 그를 봤다. 거울을 통해. 백미러에.

그리고 나서 차는 떠났다. 천천히. 거의 조심스럽게. 마치 누군가를 배웅하는 것처럼.

민준은 아파트 건물 앞에 서 있었다. 낡은 건물. 그의 반지하 세입자로서의 집. 천장에는 여전히 곰팡이가 피어있을 것이다. 그가 확인하지 않아도, 그것은 거기 있을 것이다.

그는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계단을 내려갔다. 지하로. 자신의 세상으로. 그리고 문을 열었다. 어둠. 그의 손이 벽을 따라 움직였다. 스위치를 찾으면서. 밝혀야 했다. 항상 밝혀야 했다. 어둠은 너무 많은 것을 드러내었으니까.

조명이 켜졌다. 천장의 곰팡이 자국이 보였다. 마치 지도처럼. 아니면 거울처럼. 자신이 얼마나 깊이 들어왔는지를 보여주는 그런 거울.

그는 침대에 누웠다. 자는 척만 했다. 밤새 천장을 봤다. 곰팡이를 봤다. 그리고 그 곰팡이 지도 속에서 길을 찾으려고 애썼다. 하지만 길은 없었다. 단지 더 깊은 어둠만 있었을 뿐이다.

아침이 왔을 때, 민준은 여전히 깨어있었다. 눈이 감기지 않았다. 수면은 오지 않았다. 그리고 그것이 정상처럼 느껴졌다. 이제는 자는 것이 예외가 되고, 깨어있는 것이 규칙이 되는 시대. 그렇게 적응하면 된다. 사람은 모든 것에 적응할 수 있으니까.

그는 일어났다. 샤워를 했다. 찬물로. 뜨거운 물은 너무 부드러웠다. 너무 친절했다. 그는 그런 것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옷을 입었다. 회사 가는 옷. 준호를 만나는 옷. 배우로서의 옷. 그 모든 것이 같은 옷이었다. 더 이상 구별이 없었다.

그리고 나가갔다. 아직 새벽이었다. 아직 도시가 깨어나기 전이었다. 길은 비어있었다. 그리고 그 비어있는 길을 따라 걸었다. 회사 쪽으로. 분장실 쪽으로. 준호가 있을 곳으로.

거울의 균열은 더 커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균열을 통해, 무언가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아직 명확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은 흘러나오고 있었다. 멈추지 않으면서. 계속.

# 밤의 무게

휴대폰 화면이 밝혀졌다. 시간은 밤 10시 27분. 액정 빛이 얼굴을 창백하게 비추며 민준의 눈동자에 반사되었다. 새 메시지가 없었다. 알림음 하나 울리지 않았다. 누구도 그에게 연락하지 않았다.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가슴 깊숙한 곳에서 올라오는 한숨. 마치 물을 참다가 수면 위로 떠오르는 사람처럼. 휴대폰의 뒷면이 따뜻했다. 손가락이 차갑던 것과 대비되어 더욱 이상하게 느껴졌다. 언제부터 자신의 손가락이 이렇게 차가워졌을까.

연락처를 열었다. 이름들이 줄을 세우고 있었다.

‘준호’ – 회사 대표. 그의 삶의 중심. 아니면 삶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그 무언가의 중심.

‘박미라’ – 고등학교 친구. 몇 년 전 우연히 길에서 만났다. “어, 민준이? 요즘 뭐해?” “네, 잘 지내고 있습니다.” 거짓이었다. 그 때도, 지금도.

그 외에도 여러 이름들이 있었다. 건설사 관계자들. 배우 에이전시 직원들. 동료라고 부를 수 있을까? 그들과는 대사만 나눴다. 실제의 대화는 한 번도 없었다.

그는 휴대폰을 다시 주머니에 넣었다. 화면이 어두워졌다. 그 순간 자신의 얼굴이 화면에 비쳤다. 누군가의 얼굴처럼. 자신의 얼굴인데 낯선 누군가처럼.

창밖을 봤다. 밤이 계속되고 있었다. 도시의 밤은 끝나지 않는다. 누군가는 일어나고, 누군가는 자고, 누군가는 울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도시의 불빛은 그 모든 것을 무시했다. 마치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마치 모든 것이 잘 돌아가고 있는 것처럼.

건물의 불빛들이 격자무늬를 만들었다. 작은 사각형들. 각각 누군가의 삶인 그 사각형들. 민준은 자신이 어느 사각형에 있는지 궁금해했다. 아니, 이미 알고 있었다. 가장 어두운 곳. 가장 밑바닥. 지하.

차는 아파트 단지 앞에서 멈췄다. 고급 주택지. 잔디밭이 있는 곳. 관리사가 있는 곳. 민준이 발을 디딜 수 없는 세상. 엔진음이 낮게 울렸다. 준호는 운전석에 앉아 있었다. 검은 정장, 은빛 시계, 무표정한 얼굴. 그의 얼굴은 항상 이랬다. 감정이라는 것을 사용하지 않는 얼굴.

“내일 7시에.”

준호가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저음이었다. 마치 바이올린의 가장 낮은 현처럼. 무겁고, 위협적이고, 아름다웠다.

“네, 감사합니다.”

민준이 답했다. 자동 반응. 조건반사. 마치 기계가 버튼에 반응하듯 그렇게. 그는 차에서 내렸다. 문을 닫았다. 소리가 작았다. 준호가 좋아하는 방식이었다. 모든 것이 조용해야 한다. 완벽해야 한다.

차는 여전히 거기 있었다. 엔진이 켜져있는 채로. 준호는 운전석에서 그를 봤다. 거울을 통해. 백미러에. 그 거울 속의 민준은 더욱 작아 보였다. 존재감이 없는 것처럼. 마치 유령처럼.

그리고 나서 차는 떠났다. 천천히. 거의 조심스럽게. 마치 누군가를 배웅하는 것처럼. 아니, 누군가를 버리고 가는 것처럼. 그것이 더 정확한 표현이었다.

민준은 한참 동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차의 미등이 사라질 때까지. 도시의 밤에 완전히 삼켜질 때까지.

낡은 아파트 건물. 회색 콘크리트. 창문의 틀이 녹색으로 변해가는 곳. 그의 반지하 세입자로서의 집. 월세 35만 원. 관리비 포함. 그래서 곰팡이도 포함되어 있다.

천장에는 여전히 곰팡이가 피어있을 것이다. 그가 아침에 확인하지 않아도. 그가 저녁에 닦아내지 않아도. 그것은 거기 있을 것이다. 살아있는 것처럼. 자기 자신을 증식하는 것처럼. 마치 욕망처럼.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계단을 내려갔다. 지하로. 자신의 세상으로. 발음이 나지 않는 신발. 누군가가 듣지 못하도록. 누군가를 방해하지 않도록. 항상 작아야 한다. 항상 없는 것처럼 있어야 한다.

문을 열었다. 어둠이 그를 맞이했다. 차갑고 축축한 어둠. 지하의 어둠은 특별했다. 햇빛이 닿지 않는 곳의 어둠은 다른 종류였다. 마치 실체가 있는 것처럼 압도적이었다.

손이 벽을 따라 움직였다. 스위치를 찾으면서. 거친 벽면이 손가락에 닿았다. 곰팡이냄새가 진했다. 흙냄새. 죽음의 냄새. 아니다. 썩음의 냄새. 아직 죽지 않았지만 죽어가는 것의 냄새.

스위치를 찾았다. 누르자 천장의 불이 켜졌다. 형광등. 차갑고 하얀 빛. 그 빛 속에서 세상이 적나라해진다.

천장의 곰팡이 자국이 보였다. 검은색과 갈색의 얼룩들. 마치 지도처럼. 혹은 거울처럼. 자신이 얼마나 깊이 들어왔는지를 보여주는 거울처럼. 민준은 그 지도를 읽으려고 했다. 어디서 왔는지. 어디로 가야 하는지. 하지만 지도는 말해주지 않았다. 지도는 단지 존재할 뿐이었다.

침대가 있었다. 시트가 회색으로 변한 침대. 베개가 있었다. 누런 침대보. 이것이 그의 세상의 전부였다. 6평. 아니, 5평. 정확히 측정해본 적은 없다. 측정할 필요도 없었다. 충분히 좁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니까.

침대에 누웠다. 천장을 봤다. 곰팡이를 봤다. 그 곰팡이 지도 속에서 길을 찾으려고 애썼다. 하지만 길은 없었다. 단지 더 깊은 어둠만 있었을 뿐이다. 어둠 속의 어둠. 밤 속의 밤.

자는 척을 했다. 눈을 감았다. 숨을 천천히 들었다. 마치 자는 사람처럼. 하지만 뇌는 일하고 있었다. 계속 일하고 있었다. 멈추지 않는 기계처럼. 생각이 반복되었다.

‘내일 7시에.’

‘네, 감사합니다.’

‘내일 7시에.’

‘네, 감사합니다.’

이 대사들이 뇌 속에서 맴돌았다. 마치 음악처럼. 아니, 고문처럼. 끝나지 않는 고문.

밤이 지나갔다. 시계를 볼 필요도 없었다. 시간의 흐름을 몸으로 느꼈다. 밤은 길었다. 밤은 항상 길었다. 새벽이 올 때까지 몇 시간이 남았는지 계산했다. 3시간. 2시간. 1시간.

그리고 천천히, 창문의 어둠이 회색으로 변했다. 새벽이 오고 있었다. 세상이 깨어나고 있었다. 하지만 민준은 여전히 깨어있었다.

아침이 왔을 때, 민준은 여전히 깨어있었다. 눈이 감기지 않았다. 수면은 오지 않았다. 그리고 그것이 정상처럼 느껴졌다. 정상이 아닌 것이 정상이 되는 시점이 있다. 그 시점을 민준은 이미 지나왔다.

이제는 자는 것이 예외가 되고, 깨어있는 것이 규칙이 되는 시대. 그렇게 적응하면 된다. 사람은 모든 것에 적응할 수 있으니까. 고통에도. 외로움에도. 존재의 무의미함에도.

일어났다. 몸이 뻣뻣했다. 마치 오래된 기계처럼. 기름칠이 필요한 관절처럼. 샤워를 했다. 찬물로. 수도꼭지를 틀었다. 냉수가 흘러나왔다. 얼음처럼 차가운 물이. 피부에 닿자 반응했다. 소름이 돋았다. 아직 살아있다는 신호. 아직 감각이 있다는 증거.

뜨거운 물은 없었다. 보일러가 고장난 지 한 달째였다. 관리자에게 말했지만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다. 월세를 내고도 이 정도면 충분하다는 뜻이었을까. 아니면 그냥 무시당하는 것이었을까. 둘 다 맞는 말이었다.

찬물이 좋았다. 뜨거운 물은 너무 부드러웠다. 너무 친절했다. 그는 그런 것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고통이 필요했다. 자신이 여전히 살아있다는 고통이. 자신이 존재한다는 고통이.

몸을 닦았다. 타올도 회색이었다. 원래는 흰색이었을 것 같은데. 세탁기가 없어서 손빨래했다. 완벽하게 빨아낼 수 없었다. 그래서 점점 회색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모든 것이 회색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옷을 입었다. 검은색 정장. 흰색 셔츠. 검은색 넥타이. 회사 가는 옷. 준호를 만나는 옷. 배우로서의 옷. 그 모든 것이 같은 옷이었다. 더 이상 구별이 없었다. 일과 삶의 경계가 없듯이. 거짓과 진실의 경계도 없었다.

거울을 봤다. 얼굴이 있었다. 자신의 얼굴. 하지만 낯선 얼굴. 눈 아래 그림자가 깊었다. 마치 검은 페인트를 칠한 것처럼. 광대뼈가 두드러졌다. 살이 빠졌다. 얼마나 빠졌을까. 계산해본 적이 없다.

거울의 표면에 균열이 있었다. 작은 균열. 하지만 보였다. 민준은 그 균열을 따라 손가락을 움직였다. 물론 손가락이 닿지는 않았다. 거울 표면이 매끄러웠으니까. 하지만 균열은 보였다. 그것이 충분했다.

나갔다. 아직 새벽이었다. 6시 30분. 아직 도시가 완전히 깨어나기 전이었다. 하지만 사람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직장 가는 사람들. 배달하는 사람들. 청소하는 사람들. 세상을 움직이는 보이지 않는 사람들.

길을 따라 걸었다. 비어있는 길은 아니었지만 고요했다. 사람들은 있지만 말이 없었다. 모두 자신의 목적지로 향하고 있었다. 마치 자동으로 움직이는 기계들처럼.

회사 쪽으로. 분장실 쪽으로. 준호가 있을 곳으로. 항상 같은 길. 항상 같은 시간. 항상 같은 얼굴로.

거울의 균열은 더 커지고 있었다. 민준은 분장실의 거울을 보며 생각했다. 어제는 저 정도가 아니었다. 분명히. 하지만 오늘은 더 커졌다. 아니다. 변한 것은 거울이 아니라 자신의 시각이었을까.

그리고 그 균열을 통해, 무언가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아직 명확하지 않았다. 분노인가. 절망인가. 아니면 단순히 공허함인가.

그것은 흘러나오고 있었다. 멈추지 않으면서. 계속. 마치 물처럼. 아니, 피처럼. 상처에서 흘러나오는 피처럼.

분장을 했다. 얼굴 위에 다른 얼굴을 그렸다. 화장품으로 만든 가면. 그 가면이 더 실제처럼 느껴졌다. 거울 속의 자신보다. 사람들이 알고 있는 버전이 더 실제처럼 느껴졌다.

“민준이. 준비됐어?”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다. 스텝 중 한 명이었다. 이름을 기억하지 못했다. 이름을 기억할 필요도 없었다.

“네. 준비됐습니다.”

대사를 내뱉었다. 항상 같은 대사. 항상 완벽한 톤으로.

“오늘도 분위기가 좋네. 준호 대표님이 직접 오신다고.”

스텝이 말했다. 민준은 답하지 않았다. 답할 것이 없었다. 준호가 온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으니까. 준호는 항상 온다. 그것이 규칙이다.

촬영장으로 나갔다. 조명이 밝았다. 카메라가 있었다. 감독이 있었다. 그리고 준호가 있었다.

준호는 카메라 뒤에 서 있었다. 검은 정장. 무표정한 얼굴. 마치 심판관처럼. 또는 신처럼. 민준을 보는 눈이 차가웠다. 평가하는 눈. 가치를 매기는 눈.

“액션.”

감독이 외쳤다.

민준이 움직였다. 마리오네트처럼. 줄에 매달린 인형처럼. 대사를 했다. 표정을 지었다. 감정을 표현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이 공허했다. 마치 텅 빈 무덤처럼.

촬영이 끝났다. 열 번의 테이크. 모두 비슷했다. 모두 완벽했다. 모두 공허했다.

준호가 다가왔다. 천천히. 마치 포식자처럼.

“좋았어.”

그가 말했다. 한 단어. 하지만 그 한 단어 속에는 모든 것이 있었다. 칭찬도. 경고도. 위협도.

“감사합니다.”

민준이 답했다.

“내일도 이 정도 수준으로.”

준호가 말했다. 그리고 돌아섰다.

민준은 한참 동안 그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검은 정장의 등. 그것이 자신의 세상의 전부였다. 그 등이 움직이는 한. 그 등이 시선을 주는 한. 자신은 존재할 수 있었다.

밤이 또 왔다. 반복되는 밤. 끝나지 않는 밤. 민준은 다시 차에 타고 있었다. 준호의 옆에. 침묵 속에서.

“내일 7시에.”

준호가 말했다.

“네, 감사합니다.”

민준이 답했다.

이 대사들은 반복될 것이다. 계속. 끝이 없을 때까지. 또는 끝이 있을 때까지. 하지만 끝이 있을까.

민준은 자신의 손을 봤다. 차창의 반사 속에서. 손이 떨리고 있었다. 아주 약하게. 하지만 분명히. 마치 누군가가 매일매일 그의 기초를 파고 있는 것처럼.

거울의 균열은 계속 커질 것이다. 그리고 그 균열을 통해 뭔가가 계속 흘러나올 것이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여전히 명확하지 않다.

하지만 하나는 분명했다.

더 이상 돌아갈 길은 없다는 것.

더 이상 깨어날 수 없다는 것.

더 이상 자신이 아닐 수도 없다는 것.

차는 밤의 도시를 헤쳐 나갔다. 불빛 속으로. 무한한 반복의 밤 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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