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95화: 촉각의 거짓말
세트장의 조명이 민준을 집어삼켰다. 그것은 이전의 모든 조명과 같았지만, 이번에는 다르게 느껴졌다. 마치 그가 투명한 어항 안에 갇혀있는 것처럼. 밖의 세상은 명확하게 보이지만, 닿을 수 없는 거리에 있었다. 박미라의 목소리가 스피커를 통해 들렸다.
“민 배우, 이번 신은 그의 절정이에요. 아내가 떠난 걸 깨달은 순간. 넌 여기서 뭘 느껴?”
민준은 대사를 읽지 않았다. 그냥 서 있었다. 창 앞에 선 남자처럼. 아내를 잃은 남자. 아니, 더 정확하게는, 자신이 무엇을 잃었는지 깨달으려고 하는 남자. 그의 손가락이 창유리를 만졌다. 차갑다. 그것은 신체 반응이었다. 배우로서의 선택이 아니었다. 그냥 손가락이 물리적 반응을 했을 뿐이다.
“좋아요. 그 손가락. 그 촉각. 계속 가세요.”
박미라가 말했다. 카메라가 민준의 손을 클로즈업으로 잡았다. 손가락과 창유리 사이의 접촉. 그리고 그 접촉의 미세한 진동. 민준은 자신의 손을 보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볼 수 없어도, 카메라는 본다. 카메라는 항상 본다.
그리고 그것이 문제였다.
“롤.”
박미라의 목소리가 떨어졌다. 세트가 정지했다. 조명은 여전히 켜져있었지만, 그 에너지가 사라졌다. 마치 배터리가 빠진 것처럼. 민준은 창에서 손을 떼었다. 그의 손가락이 남겨둔 자국. 습기. 그의 존재의 증거. 그것도 이내 증발할 것이다.
“좋았어요. 그런데 하나 더 할 수 있을까?”
박미라가 물었다. 그녀는 여전히 모니터를 보고 있었다. 모니터 속의 민준을 본다. 현장의 민준을 보지 않는다. 둘은 다르다. 모니터 속의 것은 더 진정하다. 더 아름답다. 더 거짓이다.
“네, 감독님.”
민준이 답했다.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안정적이었다. 하지만 그 안정성은 이제 다른 종류였다. 이것은 절망적인 안정성이었다. 눈을 감고 절벽을 향해 걷는 사람의 안정성이었다.
“이번엔 돌아보면서 한 번 해보세요. 돌아보면서 누군가를 찾는 느낌으로.”
박미라가 지시했다.
민준은 다시 위치로 돌아갔다. 창 앞. 동일한 장소. 동일한 조명. 동일한 카메라 위치. 하지만 지시는 다르다. 그것은 미세한 차이를 만든다. 그리고 그 미세한 차이는 결국 다른 감정을 낳는다.
그는 창유리를 만졌다. 다시. 같은 방식으로. 하지만 이번에는 그 손가락이 무언가를 찾고 있었다. 투명한 유리 너머의 무언가. 보이지 않는 누군가. 아내일 수도 있고, 자신일 수도 있고, 아무도 아닐 수도 있는 누군가.
그리고 나서 돌아섰다.
천천히. 마치 물 속을 헤엄치는 것처럼. 그의 눈이 카메라를 향했다. 하지만 카메라는 그의 눈을 보지 않는다. 카메라는 그의 얼굴을 보고, 그의 얼굴은 카메라에게 거짓말을 한다.
“컷.”
박미라가 말했다. 그리고 조용히 잠깐 멈췄다.
“그 순간. 돌아설 때. 그게 뭐야?”
박미라가 물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이제 호기심이 가득했다. 그것은 위험한 호기심이었다. 배우의 약점을 발견한 감독의 호기심.
“뭐가요?”
민준이 물었다.
“그 표정. 돌아설 때의 그 표정. 그게 정확히 뭔지 알겠어요?”
박미라가 물었다. 하지만 그것은 진정한 질문이 아니었다. 그것은 명령이었다. 그 표정이 뭔지 말하라는 명령.
민준은 한동안 대답하지 않았다. 대기실의 거울을 생각했다. 준호의 목소리. “절망과 자조가 섞인 그 표정.” 그리고 이제 그 표정이 비디오에 기록되었다. 영구적으로. 지우기 불가능한 형태로.
“모르겠습니다.”
민준이 마침내 말했다.
“그건 희생이에요.”
박미라가 답했다. 그녀는 이제 모니터에서 눈을 떼고 민준을 봤다. 직접. 현장의 민준. 모니터 속의 민준이 아닌.
“희생?”
민준이 따라했다.
“그 남자가 아내를 잃으면서 뭔가를 포기하는 느낌. 단순히 슬픔이 아니라, 자신의 일부를 포기하면서 동시에 그것을 거기에 남기려는 느낌. 그게 희생이에요. 그리고 넌 그걸 완벽하게 표현했어.”
박미라가 말했다. 그녀의 눈은 이제 다르게 빛났다. 욕망의 빛. 사냥꾼이 먹이를 발견했을 때의 그 빛.
민준은 자신의 손을 봤다. 여전히 창 근처에 있었다. 그 손가락. 그 촉각. 그것이 거짓말을 했다. 그것이 배우의 손이라고. 그것이 선택된 반응이라고. 하지만 그것은 거짓이었다. 그 손가락은 정직했다. 그것이 문제였다.
“좋은 일이에요, 민 배우.”
박미라가 말했다.
“감사합니다.”
민준이 답했다. 하지만 감사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그것은 항복의 목소리였다.
촬영이 끝난 것은 저녁 7시였다. 민준은 분장실에서 메이크업을 지웠다. 거울 앞에서. 또 다른 거울. 또 다른 반사. 그는 이제 거울을 혐오했다. 거울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그것이 문제였다. 거울은 자신이 무엇인지를 너무 정확하게 보여준다. 배우가 아닌 것을. 배우가 되려고 하는 실패한 사람이 아닌 것을.
그의 핸드폰이 울렸다. 준호였다. 화면에 그의 이름이 떴다. 준호. 그는 전화를 받았다.
“응.”
민준이 말했다.
“안녕? 촬영 끝났어?”
준호의 목소리는 밝았다. 하지만 그것은 배우의 밝음이었다. 연기된 밝음.
“응. 지금 분장실에 있어.”
민준이 답했다.
“박미라는 뭐라고 했어?”
준호가 물었다.
“…좋다고.”
민준이 말했다.
전화 너머에서 준호가 침묵했다. 그것은 길었다. 마치 그가 무언가를 계산하고 있는 것처럼.
“그거 다 거짓이야.”
준호가 마침내 말했다.
“뭐가?”
민준이 물었다.
“박미라가 너한테 말한 모든 것. 희생이라는 말도, 좋다는 말도. 전부 거짓이야. 그건 너를 좀 더 깊이 들어오게 하려는 거야. 마치 물 속으로 조금씩 끌어당기는 것처럼.”
준호가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이제 낮아졌다.
“그럼 뭐가 사실이야?”
민준이 물었다.
“사실은… 그 영상이 좋다는 거야. 그리고 그 영상이 좋을수록, 넌 더 깊이 빠져. 이해해? 좋은 연기는 좋은 덫이야.”
준호가 말했다.
민준은 거울 속의 자신을 봤다. 메이크업이 완전히 제거되지 않은 얼굴. 어딘가 인공적인 얼굴. 어딘가 거짓된 얼굴.
“그럼 내가 뭘 해야 하는데?”
민준이 물었다.
“지금은 아무것도 할 수 없어. 너는 이미 촬영을 마쳤어. 그리고 박미라는 이미 너를 봤어. 그리고 박미라가 너를 보았다는 것은, 다른 누군가도 너를 볼 거라는 뜻이야.”
준호가 말했다.
“준호형…”
민준이 말을 시작했다.
“나중에 얘기하자. 지금은 분장실을 나와. 그리고 누군가를 만나야 해.”
준호가 말했다.
“누구를?”
민준이 물었다.
“너를 알아야 할 사람. 그리고 너도 알아야 할 사람.”
준호가 답했다.
촬영장을 나갔을 때 이미 밤이었다. 서울의 밤은 빠르다. 하루가 끝나는 데 시간이 별로 걸리지 않는다. 마치 누군가가 빠르게 감아 올리는 것처럼. 민준은 준호가 지정한 장소로 갔다. 강남역 근처의 카페. 그 장소는 특별하지 않았다. 많은 카페 중 하나였다. 하지만 준호가 선택한 장소라는 것 자체가 특별하게 만들었다.
준호는 이미 앉아있었다. 그리고 그와 함께 다른 사람이 있었다. 여자. 민준은 그녀를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그녀의 얼굴에 뭔가 익숙한 것이 있었다. 마치 어디서 본 것 같은. 아니, 정확하게는, 어디서 들은 것 같은. 그의 이름이 있을 것 같은 얼굴.
“앉아.”
준호가 말했다.
민준이 앉았다. 여자의 맞은편. 여자는 민준을 봤다. 그리고 웃음이 나왔다. 하지만 그것은 행복한 웃음이 아니었다. 그것은 슬픔과 인정의 혼합 웃음이었다.
“드디어 만나네.”
그녀가 말했다.
“누세요?”
민준이 물었다.
“나는… 예전에 배우였어. 너처럼.”
그녀가 답했다.
“그리고 지금은?”
민준이 물었다.
“지금은? 지금은 나는 이 시스템에서 나온 사람이야. 그리고 너는 이 시스템으로 들어가고 있는 중이야.”
그녀가 말했다. 그리고 준호를 봤다.
“이제 너한테 얘기해 줄 거야. 진짜 얘기. 박미라가 너한테 말하지 않을 얘기. 준호가 너한테 말할 수 없었던 얘기.”
그녀가 말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차갑게 들렸다. 하지만 그 차가움 속에는 뭔가 따뜻한 것이 있었다. 연민. 아니, 더 정확하게는 동료의식.
“뭔데요?”
민준이 물었다.
“박미라가 누군지를 말해줄 거야. 그리고 그 영상이 어디로 갈 건지를. 그리고 넌 왜 지금 도망칠 수 없는지를.”
그녀가 말했다.
그 순간, 민준은 알았다. 준호가 왜 이 여자를 데려왔는지. 그것은 경고였다. 아니, 더 정확하게는, 거울이었다. 그의 미래의 거울. 그 여자는 자신이 될 수 있는 것이었다. 아니, 더 정확하게는, 자신이 된 것이었다. 만약 자신이 이 길을 계속 간다면.
그리고 그 순간, 민준은 처음으로 명확한 공포를 느꼈다. 그것은 거울 속의 공포가 아니었다. 그것은 매우 현실적인 공포였다. 미래가 존재한다는 공포. 그리고 그 미래가 이미 결정되었을지도 모른다는 공포.
여자는 천천히 커피잔을 들었다. 마시지 않았다. 단지 들었을 뿐이다. 마치 그것이 방어 도구인 것처럼. 아니, 마치 그것이 자신의 손을 유지하려는 도구인 것처럼.
“먼저, 내가 왜 박미라를 아는지부터 시작할게. 나도 한 때 그 여자의 배우였어. 좋은 감독이라고 생각했어. 아, 그리고…”
그녀가 민준을 봤다. 그리고 깊게 숨을 쉬었다.
“그 영상은 이미 투자자에게 가 있어. 그리고 투자자는… 투자자는 매우 특별한 사람이야. 배우의 영상을 모으는 사람. 그리고 그 모으는 이유는…”
그녀가 말을 멈췄다.
“뭐예요?”
민준이 물었다.
“그건… 너도 곧 알게 될 거야.”
그녀가 답했다.
그 순간, 카페의 조명이 갑자기 밝아 보였다. 마치 형광등이 민준을 노출시키려고 하는 것처럼. 모든 것을 드러내려고 하는 것처럼.
민준은 손가락으로 커피잔의 가장자리를 따라 그었다. 그것도 거짓말을 했을 것이다. 그 손가락. 그것도 누군가에게 기록되었을 수도 있다. 카메라에 찍혔을 수도 있다. 아니면 거울에 비쳤을 수도 있다.
그리고 그 생각이 민준을 더욱 깊게 물 속으로 끌어당겼다.
밤 11시 반. 민준은 여전히 그 여자와 카페에 있었다. 준호는 어느 순간부터 자리를 떴다. “너희끼리 얘기하는 게 나을 것 같아”라는 말을 남기고. 그리고 그 여자는 계속 말했다.
“박미라는 2년 전에 투자자와 관계를 맺었어. 처음엔 평범한 제작비 투자였어.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그 투자자는 더 많은 것을 원하기 시작했어. 감독의 작품뿐만 아니라, 배우들의 영상도. 배우들의 일상도. 배우들의… 프라이버시도.”
그녀가 말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이제 완전히 평탄했다. 감정이 없었다. 아마도 이것을 너무 많이 말했거나, 아니면 감정을 느낄 수 없을 정도로 상처를 받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 투자자는 어떤 사람인데요?”
민준이 물었다.
“알려진 이름은 없어. 그냥 ‘투자자’라고 불려. 하지만 모두가 알아. 그 사람이 누군지. 그리고 그 사람이 뭘 하는 사람인지도.”
그녀가 답했다.
“뭘 하는 사람인데요?”
민준이 물었다.
“컬렉터. 배우들을 수집하는 사람이야. 그리고 그 수집의 이유는…”
그녀가 다시 말을 멈췄다.
“뭔데요?”
민준이 다시 물었다.
“그건 내가 말할 수 없어. 너는 스스로 알아야 해. 그렇지 않으면 넌 그것을 믿지 않을 거야. 그리고 믿지 않으면, 너는 계속 그 영상 속에서 희생의 표정을 지을 거야. 계속. 영원히.”
그녀가 말했다.
그리고 나서 일어섰다. 그녀는 카페를 떠났다. 민준에게 이름도 주지 않고. 연락처도 주지 않고. 단지 하나의 문장을 남기고.
“넌 이제 선택할 수 없어. 하지만 넌 알 수 있어. 그리고 아는 것이 모든 걸 바꿀 수도 있어.”
그 여자가 문을 나가면서 말했다.
민준은 혼자 남겨졌다. 반쯤 마신 커피 두 잔과 함께. 그리고 그 여자가 남긴 종이 한 장과 함께. 그 종이에는 한 줄의 텍스트만 있었다.
“투자자의 이름: Park Jung-hoon. CEO, Lumière Entertainment. 그리고 그는 지금 너의 영상을 보고 있을 거야.”
민준의 손이 떨렸다. 커피잔이 미끄러졌다. 거의 떨어질 뻔했다. 하지만 그것을 주워 담았다. 자동으로. 마치 배우가 자신의 감정을 통제하는 것처럼.
그리고 그 순간, 그는 알았다. 준호가 거울 앞에서 말했던 것이 무엇인지. “눈을 감고 내려가는 것보다는, 눈을 뜨고 내려가는 게 낫지 않을까”라는 말이.
눈을 뜬다는 것. 그것은 보인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보인다는 것은, 이제 도망칠 수 없다는 뜻이었다. 왜냐하면 이미 본 것은 지울 수 없으니까. 그리고 지울 수 없는 것은, 계속 반복될 것이니까.
민준은 카페를 나갔다. 밤 11시 47분. 서울의 밤은 여전히 밝았다. 조명이 거리를 밝히고 있었다. 마치 무대처럼.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배우였다. 자신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고, 누가 자신들을 보고 있는지도 모르고, 자신들의 영상이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면서.
그의 핸드폰이 울렸다. 준호였다. 다시.
“응?”
민준이 말했다.
“그 여자가 너한테 뭐라고 했어?”
준호가 물었다.
“투자자의 이름을.”
민준이 답했다.
침묵. 그리고 나서 준호의 숨소리만 들렸다.
“그럼 이제 넌 알아. 그리고 이제부터는… 달라져야 해. 넌 더 이상 평범한 배우가 아니야. 넌 이제 Park Jung-hoon의 배우야.”
준호가 말했다.
“그게 무슨 뜻이야?”
민준이 물었다.
“그건 네가 알아야 할 다음 거야. 내일이야. 아니, 모레야. 그 남자가 너한테 연락할 때까지는.”
준호가 답했다.
그리고 전화가 끊겼다.
민준은 거리에 서 있었다. 밤 11시 52분. 그리고 그의 손가락은 여전히 떨리고 있었다. 그것도 거짓말을 할 것이었다. 배우의 손가락이라고. 선택된 움직임이라고. 하지만 그것은 거짓이었다. 그것은 공포의 손가락이었다. 미래를 본 손가락이었다.
그리고 그 미래는, 이미 시작되었다.
# 선택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하여
그녀가 말했다.
목소리는 차갑고 명확했다. 마치 법정에서 판결을 내리는 판사처럼. 민준은 그녀의 입술 움직임을 따라갔다. 빨간 립스틱이 매 음절마다 정확하게 갈라졌다 다시 모아졌다. 한 번도 흔들리지 않으면서. 그녀의 검은 머리는 어깨 위에서 완벽하게 자리잡고 있었고, 카페의 노란 조명이 그녀의 얼굴에 떨어질 때마다 마치 무대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것처럼 보였다.
민준은 자신의 커피를 들었다가 내려놨다. 손가락이 떨려서였다. 아니, 손가락이 떨린 것은 아니었다. 손가락이 결정했던 것이다. 떨리는 척하기로. 왜냐하면 그것이 더 자연스러웠으니까. 그것이 더 인간적으로 보였으니까.
그리고 나서 그녀가 일어섰다.
의자가 바닥을 스치는 소리가 들렸다. 금속과 나무의 불협화음. 커피샵의 배경음악—재즈 피아노, 너무 부드러운 톤으로 너무 비싼 가격의 원두를 정당화하는 음악—도 그 소리를 완전히 묻을 수 없었다. 민준은 그 소리가 마치 자신의 가슴을 파고드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녀는 카페를 떠났다.
민준에게 이름도 주지 않고. 연락처도 주지 않고. 성이나 전화번호나 SNS 계정 따위는 절대로 주지 않고. 단지 하나의 문장을 남기고. 그 문장은 마치 수수께끼 같았다. 아니, 수수께끼보다는 저주에 가까웠다.
“넌 이제 선택할 수 없어. 하지만 넌 알 수 있어. 그리고 아는 것이 모든 걸 바꿀 수도 있어.”
그 여자가 문을 나가면서 말했다. 문을 열 때 카페의 따뜻한 공기가 바깥의 찬 공기와 만났고, 그 경계에서 한 순간 하얀 수증기가 피어올랐다. 마치 그녀가 연기처럼 사라지는 것처럼. 민준은 그 광경을 멍하니 바라봤다.
그녀의 뒷모습이 거리의 군중 속으로 사라지자, 민준은 비로소 숨을 쉴 수 있었다. 그는 깨닫지 못했었다. 그녀가 말하는 동안 자신이 숨을 참고 있었다는 것을. 폐에 산소가 부족해지면서 생기는 그 아슬아슬한 현기증. 그것이 지금야 사라졌다. 그리고 그 자리에는 다른 종류의 불안감이 자리잡았다.
민준은 혼자 남겨졌다.
반쯤 마신 커피 두 잔과 함께. 하나는 자신의 것이었고, 하나는 그녀의 것이었다. 그녀의 커피에는 입술 자국이 남아 있었다. 빨간 립스틱이 찻잔의 가장자리에 붙어 있었다. 민준은 그것을 바라봤다. 그것은 증거였다. 그녀가 정말 여기 있었다는 증거. 그것이 꿈이 아니었다는 증거.
그리고 그녀가 남긴 종이 한 장과 함께.
종이는 작았다. 손가락으로 집을 수 있을 정도의 크기. 흰색 종이. 매우 평범한 종이. 복사지 같은 종이였다. 그 위에는 한 줄의 텍스트만 있었다. 검은색 볼펜으로 쓰여 있었다. 손글씨였다. 계획적이고 차가운 손글씨.
“투자자의 이름: Park Jung-hoon. CEO, Lumière Entertainment. 그리고 그는 지금 너의 영상을 보고 있을 거야.”
민준의 손이 떨렸다.
이번에는 연기가 아니었다. 진짜 떨림이었다. 혈당이 떨어지는 것 같은 현기증과 함께. 심장이 가슴팍을 두드리는 소리가 귀에 들렸다. 마치 누군가 문을 두드리고 있는 것처럼. 누군가가 밖에서 들어오기를 원하고 있는 것처럼. 또는 누군가가 안에서 나가고 싶어 하는 것처럼.
커피잔이 미끄러졌다.
탁자 위에서 거의 떨어질 뻔했다. 갈색 액체가 찻잔을 넘치려고 했다. 민준은 반사적으로 손을 뻗었다. 자동으로. 의식하지 않고. 마치 배우가 자신의 감정을 통제하는 것처럼. 손가락이 찻잔을 잡았고, 찻잔이 제 자리로 돌아왔다. 한 방울도 흘리지 않고.
그리고 그 순간, 그는 알았다.
준호가 거울 앞에서 말했던 것이 무엇인지. 그 말의 진짜 의미를.
“눈을 감고 내려가는 것보다는, 눈을 뜨고 내려가는 게 낫지 않을까?”
눈을 뜬다는 것. 그것은 보인다는 뜻이었다. 보인다는 것은 알게 된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알게 된다는 것은, 이제 도망칠 수 없다는 뜻이었다. 왜냐하면 이미 본 것은 지울 수 없으니까. 망각이라는 은총마저 더 이상 허락되지 않으니까. 지울 수 없는 것은, 계속 반복될 것이니까. 악몽처럼. 현실처럼.
민준은 그 종이를 다시 들었다.
글씨를 다시 읽었다. 세 번. 아니, 열 번. 마치 글씨가 변할 것이라고 기대하면서. 마치 그것이 모두 착각이기를 바라면서. 하지만 글씨는 변하지 않았다. Park Jung-hoon. CEO, Lumière Entertainment. 그 이름들이 마치 주문처럼 그의 뇌에 각인되었다.
카페의 다른 손님들은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그들은 여전히 자신의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노트북을 열고 있었다. 친구들과 수다를 떨고 있었다. 평온한 일상을 살아가고 있었다. 그들의 세상은 여전히 안전했다. 선택의 여지가 있었다. 내일 무엇을 할지, 어디로 갈지, 누구를 만날지. 그런 선택들이 존재했다.
하지만 민준은 이제 그런 선택권을 잃었다.
정확히는 잃지 않았다. 누군가가 빼앗아갔다. 그 여자가. 그리고 그 여자 뒤에 있는 누군가가. Park Jung-hoon이라는 이름을 가진 누군가가.
민준은 카페를 나갔다.
밤 11시 47분. 휴대폰 화면이 그렇게 말해주고 있었다. 서울의 밤은 여전히 밝았다. 잠들지 않는 도시. 어둠이라는 게 없는 곳. 조명이 거리를 밝히고 있었다. 가로등, 상점의 네온사인, 빌딩의 창문들. 마치 무대처럼. 거대한, 끝이 없는, 지루한 무대처럼.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배우였다.
거리를 걷는 사람들. 택시에서 내리는 사람들. 편의점에 들어가는 사람들. 자신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고, 누가 자신들을 보고 있는지도 모르고, 자신들의 영상이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면서. 마치 처음부터 그렇게 태어난 것처럼. 마치 선택이라는 게 있었던 적이 없었던 것처럼.
민준은 그 중 한 명이 되었다.
거리의 배우 중 한 명. 혹은 관객 중 한 명. 아니면 둘 다. 그게 뭐가 중요한가. 어쨌든 그는 이제 무대 위에 있다. 그리고 무대 위에 있으면, 어쨌든 누군가는 보고 있게 된다.
그의 핸드폰이 울렸다.
진동음이 먼저 나타났다. 주머니 안에서의 그 미세한 떨림. 그것이 신체에 전해지는 데 시간이 걸렸다. 1초. 2초. 그 사이에 온 세상이 변했다. 그의 심장 박동이 가속되었다. 귀가 울렸다. 세상의 소리가 멀어졌다. 오직 진동음만 남았다.
준호였다.
민준은 전화를 받았다. 먼저 말하지 않았다. 그저 들었다. 숨소리도 조절해가며.
“응?”
민준이 말했다. 아주 작은 목소리로. 마치 말하지 않은 것처럼.
“그 여자가 너한테 뭐라고 했어?”
준호의 목소리는 급박했다. 뭔가 알고 있는 것처럼. 하지만 동시에 불안해하는 것처럼. 민준은 그 불안감을 감지했다. 그것이 전염되었다. 그의 몸에.
“투자자의 이름을.”
민준이 답했다. 그 이름을 말하지는 않았다. 그저 그것이 투자자의 이름이라는 것만 말했다.
침묵.
그리고 나서 준호의 숨소리만 들렸다. 빠른 숨. 불규칙한 숨. 마치 누군가 뛰어오고 있는 것처럼. 또는 누군가에게 쫓기고 있는 것처럼. 민준은 그 숨소리를 들으면서 자신이 이미 끝났다는 것을 알았다. 그가 무언가를 알게 되는 순간, 끝나버린 것이다. 되돌릴 수 없게.
“그럼 이제 넌 알아. 그리고 이제부터는… 달라져야 해. 넌 더 이상 평범한 배우가 아니야. 넌 이제 Park Jung-hoon의 배우야.”
준호가 말했다. 목소리에 어떤 감정도 없었다. 마치 판결을 내리는 것처럼. 또는 축도를 빌어주는 것처럼. 둘 사이의 경계는 불분명했다.
Park Jung-hoon의 배우.
그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민준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것은 이제부터 자신의 모든 행동이 누군가에 의해 관찰된다는 뜻이었다. 평가된다는 뜻이었다. 선택된다는 뜻이었다. 아니, 선택되지 않을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 버려질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
“그게 무슨 뜻이야?”
민준이 물었다. 마치 모르는 척하면서. 하지만 자신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준호도 자신이 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건 네가 알아야 할 다음 거야. 내일이야. 아니, 모레야. 그 남자가 너한테 연락할 때까지는.”
준호가 답했다. 그리고 추가했다.
“그때까지는 그냥 평범하게 행동해. 마치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하지만 넌 알아야 해, 민준아. 넌 이제 무대 위에 있어. 모두가 너를 보고 있어. 심지어 넌 그 사실을 모를 수도 있지만, 그건 상관없어. 봐주는 사람이 있으면 충분해.”
민준은 대답하지 않았다.
준호도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그리고 전화가 끊겼다.
신호음이 울렸다. 그리고 침묵이 돌아왔다. 더 깊은 침묵. 더 무거운 침묵. 이전의 침묵과는 다른 침묵.
민준은 거리에 서 있었다.
밤 11시 52분. 5분이 지났다. 5분 동안 뭔가 돌이킬 수 없는 것이 일어났다. 5분 동안 그의 삶이 갈라졌다. Before와 After로. 그리고 그는 이제 After에 속해 있었다.
그의 손가락은 여전히 떨리고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다른 이유였다. 이제 그것은 공포의 떨림이었다. 진짜 공포. 그것도 거짓말을 할 것이었다. 배우의 손가락이라고. 선택된 움직임이라고. 자신이 조절하는 움직임이라고. 하지만 그것은 거짓이었다. 그것은 공포의 손가락이었다. 통제 불가능한 손가락이었다. 미래를 본 손가락이었다.
그 미래는 무엇인가?
민준은 그것을 상상해보려고 했다. Park Jung-hoon이라는 사람을 상상해보려고 했다. 그 남자의 얼굴을 상상해보려고 했다. 하지만 얼굴은 나타나지 않았다. 대신 그 자리에는 어둠이 있었다. 형태 없는 어둠. 그 어둠 속에서 무언가가 움직이고 있었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리고 그 미래는, 이미 시작되었다.
지금, 이 순간에. 그가 거리에 서서 떨고 있는 이 순간에. 어쨌든 누군가는 자신을 보고 있을 거야. 그 여자처럼. 그 여자의 뒤에 있는 누군가처럼. Park Jung-hoon처럼.
민준은 휴대폰을 들었다.
SNS를 열었다. 자신의 계정을 들었다. 그곳에는 자신의 영상들이 있었다. 댄스 영상, 노래 영상, 일상의 영상들. 수천 개의 조회수. 수백 개의 좋아요. 그리고 그 아래의 댓글들. 대부분은 응원의 말이었다. 일부는 악플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 모든 것이 뭔가 다르게 보였다.
마치 그것이 증거 같았다.
그가 존재한다는 증거. 그가 보여진다는 증거. 그리고 그가 보여지면, 어쨌든 누군가는 자신을 고를 것이라는 증거.
민준은 폰을 내렸다.
거리를 바라봤다. 여전히 밝은 밤. 여전히 걷고 있는 사람들. 여전히 살아가고 있는 도시. 하지만 이제 그것이 모두 무대처럼 보였다. 리얼리티가 없었다. 모든 것이 연기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 생각이 들자, 민준은 갑자기 웃음이 나왔다.
작은 웃음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자신이 조절할 수 없는 웃음이었다. 배우가 하는 웃음이 아니라, 인간이 하는 웃음이었다. 광기에 찬 인간이 하는 웃음.
왜냐하면 이제 그는 알았으니까.
준호가 말했던 것이 무엇인지. 그 거울 앞에서의 말이 무엇인지.
“눈을 감고 내려가는 것보다는, 눈을 뜨고 내려가는 게 낫지 않을까?”
그것은 선택지가 아니었다. 그것은 이미 정해진 길이었다. 눈을 뜨든 감든, 어쨌든 내려가야 한다는 뜻이었다. 그저 눈을 뜨고 내려가는 것이 조금 더 정직하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민준은 이제 눈을 떴다.
밤거리를 바라봤다. 모든 사람들을 바라봤다. 모든 불빛을 바라봤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이 그의 것이 되기를 원했다. 아니, 그 모든 것이 자신의 것이라는 것을 알고 싶었다.
잠깐.
그게 아니었다.
그게 아니라, 그 모든 것을 자신이 소유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싶었다. 그리고 동시에, 자신이 그것에 소유되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싶었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상관없었다. 다만 뭔가가 자신을 소유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것을 받아들인다는 것.
민준은 폰을 다시 들었다.
Park Jung-hoon을 검색했다.
CEO, Lumière Entertainment. 그것이 전부였다. 더 이상의 정보는 없었다. 사진도 없었다. 전기도 없었다. 그저 이름과 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