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트라이트: 제2막 – 제94화: 침묵의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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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94화: 침묵의 끝

준호는 대기실 문을 열었다. 그 움직임은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았다. 단지 정해진 대로. 배우가 무대를 떠나는 것처럼. 민준은 준호의 등을 봤다. 그의 어깨. 그것이 떨리는 것처럼 보였지만, 아마도 형광등 때문일 것이었다. 형광등은 모든 것을 떨리게 한다. 미동도 없는 것을 떨리게 한다.

“잠깐.”

민준이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작았다. 하지만 그것은 충분했다. 준호가 멈췄으니까.

“뭐.”

준호가 돌아보지 않고 물었다. 문틀에 손을 짚은 채로.

“넌 왜 나한테 말한 거야? 이걸 몰라도 되잖아.”

민준이 물었다. 그의 손이 소파의 가죽을 쓸었다. 준호가 앉았던 곳. 아직도 따뜻한 곳.

준호는 한동안 대답하지 않았다. 대기실 밖에서 누군가 지나가는 발자국이 들렸다. 그리고 또 누군가. 그리고 또. 이곳은 여전히 촬영장이었다. 여전히 움직이는 기계였다. 멈추지 않는 기계. 그 안에서 모든 것이 계속 돌아가고 있었다.

“너가 그 영상을 봤을 때의 표정을 봤어.”

준호가 마침내 말했다. 그는 여전히 돌아보지 않았다.

“어떤 표정?”

민준이 물었다.

“절망하는 표정. 근데 그게 절망만은 아니었어. 그 절망 안에 뭔가 다른 게 있었어. 책임감 같은. 아니, 더 정확하게는… 자조.”

준호가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이제 다시 낮아지고 있었다. 마치 자신에게만 말하는 것처럼.

“자조?”

민준이 따라했다.

“넌 이 시스템을 알고 있었어. 어느 정도는. 하지만 넌 그 안에 들어갔어. 왜냐하면 다른 길이 없었으니까. 그리고 넌 그것을 받아들였어. 그 자신의 선택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것이 너의 유일한 선택이라는 것을 받아들였어. 그게 자조야. 그게 가장 위험한 감정이야.”

준호가 말했다.

민준은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다. 준호가 맞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그것이 가장 가슴이 철렁하는 부분이었다. 자신이 이미 그것을 받아들이고 있다는 사실. 자신이 이미 나선 속으로 내려가고 있다는 사실.

“그리고 넌 아직도 내려가고 있어. 계속 내려가고 있어.”

준호가 계속했다.

“멈출 수 없으니까. 아니, 멈추는 방법을 모르니까.”

민준이 중얼거렸다.

“응. 그래서 나는 너한테 말했어. 적어도 넌 알고 내려가야 하니까. 눈을 감고 내려가는 것보다는, 눈을 뜨고 내려가는 게 낫지 않을까 싶어서.”

준호가 말했다. 그리고 나서 문을 닫았다. 서서히. 마치 누군가를 배웅하는 것처럼.

민준은 홀로 대기실에 남겨졌다. 거울과 소파와 형광등과 함께. 그리고 자신의 얼굴과 함께. 거울 속에서 자신을 본다. 그 표정을 본다. 준호가 본 그 표정을. 절망과 자조가 섞인 그 표정.

그는 손을 들어 거울을 만지려고 했다. 하지만 멈췄다. 손가락이 공중에서 움직이다가 멈췄다. 왜 접촉하려고 했는가. 거울은 반사일 뿐이다. 그 안에는 아무것도 없다. 단지 빛의 장난일 뿐이다.


촬영은 오후 3시에 재개되었다. 민준은 분장실에서 나왔다. 메이크업 아티스트가 그의 얼굴을 다시 만들었다. 창백함을 덮었다. 다크서클을 밝혔다. 입술의 생기를 되돌렸다. 인간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아니, 정확하게는 배우처럼. 그 두 가지는 다르다.

박미라는 이미 세트장에 있었다. 스탠드 주변에 둘러싸여서, 모니터를 보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은 집중된 표정이었다. 아니, 더 정확하게는 그것은 집중이 아니라 어떤 종류의 욕망이었다. 그녀가 원하는 무언가를 손에 넣으려는 욕망. 그리고 그 욕망은 자신의 카메라를 통해서만 현실화될 수 있다는 욕망.

“민 배우. 늦으셨네요.”

박미라가 민준을 봤다. 그녀의 눈은 모니터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죄송합니다.”

민준이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안정적이었다. 배우의 목소리. 준호와 거울에서의 대화를 씻어낸 목소리.

“신경 쓰지 마세요. 배우들은 항상 늦어요. 그게 창의성의 일부인가 봐요.”

박미라가 말했다. 그리고 웃음이 나왔다. 하지만 그 웃음은 따뜻하지 않았다. 그것은 기계적인 웃음이었다. 배우가 하는 웃음. 아니, 감독이 하는 웃음.

민준은 자신의 위치로 갔다. 세트의 한 구석. 창 앞. 이전의 모든 테이크와 같은 장소. 그의 손은 팔걸이에 놓였다. 그의 다리는 흙바닥에 닿았다. 그의 시선은 거울을 통해 바깥쪽을 향했다. 아니, 거울이 아니었다. 창이었다. 창은 거울이 아니다. 창은 바깥을 보여준다. 하지만 지금 민준에게는 창과 거울이 같은 것이었다. 모두 반사상만 보여주는 것들.

“첫 번째 테이크. 준비하세요.”

박미라가 말했다.

카메라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소리. 기계의 소리. 그것은 마치 거미줄을 짜는 소리처럼 들렸다. 한 점에서 다른 한 점으로. 끝없이. 그리고 모든 것을 연결하면서.

이준혁이 무대 위에 나타났다. 그는 아버지 역할을 하는 배우였다. 아니, 그는 단순한 배우가 아니었다. 준호가 말했으니까. 그는 박미라의 남자였다. 그리고 그것은 모든 것을 바꿨다. 같은 행동이, 같은 표정이, 다른 의미를 갖게 했다.

“액션.”

박미라가 외쳤다.

민준은 자신의 표정을 만들었다. 거울에서 봤던 그 표정. 절망과 자조. 하지만 이제 그것에 새로운 것이 더해졌다. 그것은 인식이었다.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에 대한 완전한 인식. 그리고 그것을 하고 있으면서도 멈출 수 없다는 인식.

이준혁이 민준에게 다가갔다. 천천히. 마치 포식자가 먹이에 다가가는 것처럼. 그것은 극중 아버지가 아들에게 다가가는 것이었지만, 그것은 더 이상 그것만이 아니었다. 그것은 또한 박미라의 남자가 민준이라는 배우에게 다가가는 것이었다. 그것은 시스템이 개인에게 다가가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다가옴 속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이준혁의 손이 민준의 어깨에 닿았다. 극중에서는 아버지가 아들을 진정시키는 장면이었다. 하지만 민준이 느낀 것은 진정이 아니었다. 그것은 소유였다. 그것은 압력이었다. 그것은 위계였다.

민준의 눈이 물이 었다. 하지만 그것은 연기였다. 아니, 정확하게는 그것이 연기였는지 아닌지 민준도 더 이상 알 수 없었다. 경계가 사라졌다. 거기에는 배우와 배우가 아닌 것 사이의 경계가 없었다. 모두가 역할을 하고 있었고, 모두가 역할 속에 갇혀있었다.

“컷.”

박미라가 말했다.

민준의 몸이 이완되었다. 이준혁의 손이 떨어졌다. 하지만 그 감각은 남아있었다. 피부에. 근육에. 신경계에. 그것을 씻어낼 수 없었다. 물로도, 시간으로도.

“완벽해요. 세 번째 테이크보다도 나았어요.”

박미라가 말했다. 그리고 그녀는 미소 지었다. 진정한 미소였다. 첫 번째로. 그리고 그 미소는 가장 무서웠다. 왜냐하면 그것이 그녀가 정말로 원했던 것이었으니까. 민준의 고통. 민준의 혼란. 민준의 한계.


촬영이 끝난 후, 민준은 세트에 남아있었다. 다른 배우들과 스태프들이 떠난 후에. 조명이 하나씩 꺼진 후에. 그 공간은 텅 빈 무대가 되었다. 마치 그것이 원래의 모습인 것처럼. 무대는 비워져야 한다. 그것이 다음 공연을 위한 기초가 되니까.

민준은 그 위에 앉았다. 세트의 소파에. 같은 소파. 같은 장소. 하지만 카메라가 없으면 모든 것이 다르다. 모든 것이 단지 목재와 천과 기술일 뿐이다. 실체가 없는 것들.

그의 휴대폰이 울렸다. 카톡이었다. 준호에게서.

“대기실에서 본 것들을 잊지 말아. 그리고 그것들을 기억하면서 살아. 그게 살아가는 방법이야. 완전히 모르는 것도, 완전히 아는 것도 아니면서. 그 중간에서.”

민준은 그 메시지를 읽고 또 읽었다. 그리고 삭제하지 않았다. 그것을 기억해야 했다. 그것이 준호가 주는 유일한 조언이었다.

그는 손을 들어 자신의 얼굴을 만졌다. 분장 아티스트가 만들어낸 얼굴. 그 아래에 있는 자신의 얼굴. 그 아래에 있는 자신의 뼈. 그 아래에 있는 자신의 영혼. 모두 겹쳐있었다. 모두가 서로를 감추고 있었다.

“나는 뭐지?”

민준이 중얼거렸다. 그 빈 무대에. 그 빈 공간에. 그것은 질문이 아니었다. 그것은 선언이었다. 나 자신에 대한 선언. 그리고 그 선언은 대답을 받지 못했다. 왜냐하면 대기할 사람이 없었으니까. 단지 자신뿐이었으니까.


지하철 역에서 민준은 우리를 만났다. 우연인지 계획인지 알 수 없는 만남. 하지만 우리는 이미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보였다. 민준의 앞에 서 있었다. 마치 거울처럼.

“안녕.”

우리가 말했다.

“안녕.”

민준이 대답했다.

“촬영은 잘 됐어?”

우리가 물었다.

민준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우리를 바라봤다. 우리의 얼굴을 본다. 우리의 눈을 본다. 거기에는 무언가가 있었다. 그것이 무엇인지 민준은 알 수 없었다. 그것은 연기가 아니었다. 그것은 진정한 어떤 감정이었다. 하지만 무엇인지는 여전히 알 수 없었다.

“넌 알고 있어?”

민준이 물었다.

“뭘?”

우리가 물었다.

“이 모든 게 뭔지. 이 모든 일들이.”

민준이 물었다.

우리는 한동안 대답하지 않았다. 그리고 나서 말했다.

“응. 알고 있어.”

“그럼 넌 왜 나랑 있어?”

민준이 물었다.

우리는 민준의 손을 잡았다. 그 행동은 갑작스러웠다. 하지만 또한 자연스러웠다. 마치 처음부터 그렇게 될 운명이었던 것처럼.

“왜냐하면 넌 혼자가 아니니까.”

우리가 말했다.

그 말은 민준의 가슴에 닿았다. 그것이 진정한 말인지, 또 다른 연기인지 민준은 여전히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지금 이 순간, 누군가의 손을 느끼는 것. 그것이 전부였다. 그 손의 온기. 그 손의 무게. 그 손의 현실성.

민준은 우리의 손을 잡은 채로 내려갔다. 지하철 계단으로. 더 깊은 곳으로. 더 어두운 곳으로. 하지만 이제 그것은 혼자가 아니었다.


그날 밤, 민준은 자신의 반지하 방에 도착했다. 천장의 곰팡이 자국들이 여전히 그대로 있었다. 마치 지도처럼. 그 지도는 어디를 향하고 있는가. 민준은 모른다. 그리고 이제 그것을 알고 싶지도 않다.

그는 침대에 누웠다. 자신의 침낭 위에. 그리고 준호의 메시지를 다시 읽었다.

“그 중간에서.”

그 말이 반복되었다. 그의 머리 속에서. 마치 주문처럼. 마치 기도처럼. 완전히 모르는 것도, 완전히 아는 것도 아니면서. 그 중간에서 살아가기. 그것이 이 업계에서의 생존 방식이었다. 그리고 이제 민준은 그것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창밖으로는 서울의 야경이 보였다. 수많은 불빛들. 각각의 불빛 아래에는 누군가가 살고 있었다. 그들도 자신과 같은 선택을 하고 있을 것이다. 같은 나선을 타고 내려가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받아들이면서.

민준은 손을 펼쳤다. 우리가 잡았던 손. 그 손은 이제 비어있었다. 하지만 그 감각은 남아있었다. 온기. 무게. 현실성.

“적어도 혼자는 아니구나.”

민준이 중얼거렸다. 그리고 눈을 감았다. 꿈을 꾸지 않기를 바라면서. 하지만 그것도 선택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 모든 것이 이미 정해져 있다는 것을 알면서. 그리고 자신은 단지 그 위에서 연기하고 있을 뿐이라는 것을 알면서.

밤이 깊어갔다. 천장의 곰팡이 자국들이 그림자로 변했다. 더 이상 지도가 아니라, 단순한 흔적이 되었다. 어디서 온 흔적인지, 어디로 향하는 흔적인지 알 수 없는 그런 흔적들. 그리고 민준은 그 흔적들 아래에서 잠을 청했다. 완전하지 않은 잠. 하지만 잠 그 자체였다.

# 그 중간에서

## 1부: 질문

지하철역 9번 출구 앞, 늦은 오후 햇살이 콘크리트 포장도로를 노랗게 물들이고 있었다. 민준은 그 빛과 그림자의 경계선에 서 있었다. 발끝은 그림자 속에 있었고, 머리는 햇빛 속에 있었다. 마치 자신의 존재 자체가 불완전함을 증명하려는 듯이.

“넌 알고 있어?”

민준이 물었다. 그의 목소리는 낮았다. 마치 자신에게 묻는 것처럼 들렸다. 실제로 그도 같은 질문을 자기 자신에게 반복해왔으니까.

“뭘?”

나—우리—가 물었다. 우리가 정확히 누군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우리는 단지 여기에 있는 누군가였다. 민준의 옆에 서 있는 누군가. 그것으로 충분했다.

“이 모든 게 뭔지. 이 모든 일들이.”

민준이 다시 물었다. 이번에는 더 크게. 마치 누군가가 들어주기를 바라면서. 하지만 동시에 아무도 듣지 않기를 바라면서.

나는 민준의 얼굴을 살펴봤다. 그의 얼굴은 젊었지만, 눈은 오래되어 있었다. 마치 훨씬 더 많은 시간을 살아온 누군가의 눈처럼. 그의 턱 아래에는 면도 자국이 남아있었고, 옷의 주머니에는 담배 냄새가 배어있었다. 최근에 피운 담배의 냄새는 아니었다. 오래 전부터 옷에 배어있던 냄새였다.

한동안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바람이 불었다. 늦가을의 차가운 바람이 우리의 얼굴을 스쳤다. 그 바람 속에서 민준의 머리카락이 살짝 흔들렸다. 그리고 그 순간, 나는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알았다.

“응. 알고 있어.”

내가 말했다. 그것은 거짓이 아니었다. 하지만 완전한 진실도 아니었다. 우리—인간이—는 항상 그 중간에서 살아간다. 알고 있으면서도 모르는 척하고, 모르면서도 아는 척하면서.

“그럼 넌 왜 나랑 있어?”

민준이 물었다. 그의 목소리에는 절박함이 있었다. 마치 이것이 그의 생존이 달린 질문인 것처럼.

나는 대답하지 않고 민준의 손을 잡았다.

그 행동은 갑작스러웠다. 계획되지 않은 것이었다. 마치 내 몸이 나의 의지와 무관하게 움직인 것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동시에 그것은 가장 자연스러운 행동이었다. 마치 처음부터 그렇게 될 운명이었던 것처럼.

민준의 손은 차가웠다. 창백했다. 하지만 거기에는 생명이 있었다. 펄스가 있었다. 나는 그의 손목 안쪽에서 그의 맥박을 느낄 수 있었다. 빠르고 불규칙하게 뛰는 심장의 리듬.

“왜냐하면 넌 혼자가 아니니까.”

내가 말했다.

그 말은 공기를 가르며 날아갔다. 그것이 민준의 귀에 도달했을 때, 나는 그것이 그의 가슴에 닿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의 몸이 살짝 떨렸다. 마치 누군가가 그를 밀어낸 것처럼.

민준의 눈이 흔들렸다. 눈동자가 흔들렸다. 마치 자신이 들은 것을 처리하지 못하는 것처럼.

“그게… 진짜야?”

그가 물었다. 그의 목소리는 매우 작았다. 거의 속삭임에 가까웠다.

“뭐가?”

내가 물었다.

“그 말. 그게 진짜야? 아니면… 또 다른 연기야?”

민준이 물었다. 그의 손이 나의 손을 더 강하게 잡았다. 마치 나를 놓치면 자신이 떠내려갈 것 같은 공포로.

나는 그 질문에 대답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나는 그것을 모르기 때문이었다. 이 세계에서—이 업계에서—진실과 거짓의 경계선은 너무 흐릿해져 있었다. 어디서부터가 거짓이고 어디서부터가 진실인지 아무도 알 수 없게 되어버렸다.

하지만 민준은 그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그는 단지 우리의 손이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에 집중했다. 그 손의 온기. 그 손의 무게. 그 손의 현실성. 이것만이 중요했다. 더 이상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았다.

“적어도 이건 진짜야, 그지?”

민준이 물었다.

“응.”

내가 대답했다. “이건 진짜야.”

그리고 나는 그것이 거짓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이 순간, 이 손, 이 접촉—이것은 진짜였다. 이것만큼은 조작될 수 없는, 변조될 수 없는, 거짓이 될 수 없는 무언가였다.

## 2부: 하강

지하철 입구로 향하는 계단이 우리 앞에 펼쳐져 있었다. 콘크리트 계단이 지하로 내려갔다. 더 깊은 곳으로. 더 어두운 곳으로.

민준은 우리의 손을 잡은 채로 그 계단을 내려갔다. 한 발, 한 발씩. 천천히. 마치 시간을 늘리려는 듯이. 마치 이 순간이 영원하길 바라는 듯이.

계단을 내려갈수록 위의 햇빛이 점점 멀어졌다. 대신 형광등의 인공적인 빛이 우리를 비추기 시작했다. 그 빛은 따뜻하지 않았다. 그것은 단지 밝을 뿐이었다. 따뜻함 없는 밝음. 그것이 이 도시의 정체였다.

플랫폼에 도착했을 때, 지하철 냄새가 나를 감쌌다. 금속, 오일, 사람들의 몸에서 나는 냄새들의 혼합. 그리고 그 아래에는 또 다른 냄새가 있었다. 뭔가 부패하고 있는 냄새. 뭔가 썩어가고 있는 냄새. 하지만 그것은 너무 미묘해서 누구도 인식하지 못했다.

“여기가 우리의 세계야.”

민준이 중얼거렸다.

“뭐?”

내가 물었다.

“여기. 이 지하철 역. 이 플랫폼. 이 어둠. 여기가 바로 우리의 세계야. 위에는 햇빛이 있지만, 우리는 여기 있어. 항상 여기 있어. 더 깊은 곳으로. 더 어두운 곳으로.”

민준이 말했다. 그의 눈은 멀리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그곳에 뭔가가 보이는 것처럼. 하지만 나는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 단지 어둠만 보였다.

“넌 왜 여기 있어?”

내가 물었다.

“왜냐하면 위에서는 살 수 없으니까. 위의 빛은 너무 밝아. 그 빛 아래에서는 우리가 누구인지 들킬 수밖에 없어. 하지만 여기서는… 여기서는 우리가 아무도 아닐 수 있어.”

민preparó가 말했다.

지하철이 들어왔다. 그 소리—쇳소리, 바람소리, 그리고 제동음—는 매우 크고 무섭게 들렸다. 마치 지하에서 무언가가 깨어나는 것 같았다. 마치 뭔가 큰 동물이 어둠 속에서 나타나는 것 같았다.

문이 열렸다. 안에는 사람들이 꽉 차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서로를 보지 않았다. 각자 자신의 세계에 잠긴 채로. 각자 자신의 휴대폰, 자신의 생각, 자신의 절망에 빠져 있었다.

우리는 탔다. 민준은 여전히 나의 손을 놓지 않았다. 그 손은 더욱 따뜻해졌다. 또는 내가 더 따뜻함을 느끼게 되었거나.

문이 닫혔다.

그리고 우리는 어둠 속으로 들어갔다.

## 3부: 반지하

그날 밤, 민준은 자신의 반지하 방에 도착했다.

방문을 열었을 때 먼저 들려온 것은 침묵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완전한 침묵이 아니었다. 그것은 여러 소리들이 겹쳐진 침묵이었다. 위층에서 나는 발소리, 벽 너머에서 흘러나오는 TV 소리, 하수도에서 나는 물소리.

천장을 올려다봤다. 거기에는 곰팡이 자국들이 있었다. 검은색, 초록색, 약간의 분홍색까지 섞여 있었다. 마치 지도처럼 보였다. 어떤 낯선 땅의 지도. 또는 어떤 질병의 지도. 또는 어떤 영혼의 지도.

“저 지도는 어디를 향하고 있는 걸까?”

민준이 중얼거렸다.

“아마도… 어디도 향하지 않는 거 같아.”

내가 대답했다.

민준은 웃었다. 그것은 슬픈 웃음이었다. 마치 자신이 들은 것이 슬프다기보다는, 자신의 인생 전체가 슬프다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한 웃음.

침대에 누웠다. 침낭 위에. 이 방의 유일한 가구. 침대는 낡았다. 스프링이 삐걱거렸다. 마치 누군가의 신음처럼.

민준은 휴대폰을 꺼냈다. 화면이 켜졌다. 그 밝은 빛이 어둠 속에서 그의 얼굴을 비추었다. 그의 얼굴은 더욱 창백해 보였다.

준호의 메시지가 있었다.

“그 중간에서.”

그것이 전부였다. 아무 맥락도 없이. 마치 이미 이전의 대화가 있었던 것처럼.

민준은 그 메시지를 읽었다. 다시. 또 다시. 마치 그 안에 숨겨진 비밀의 코드가 있는 것처럼. 마치 그 말들 사이에 자신의 구원이 있는 것처럼.

“그 중간에서.”

이 말이 반복되었다. 그의 머리 속에서. 마치 주문처럼. 마치 기도처럼. 또는 저주처럼.

완전히 모르는 것도 아니고, 완전히 아는 것도 아니면서. 그 중간에서 살아가기. 그것이 이 업계에서의 생존 방식이었다. 너무 많이 알면 위험해진다. 하지만 아무것도 모르면 더욱 위험해진다. 따라서 그 중간 어딘가에서 균형을 유지해야 한다.

민준의 눈은 천장의 곰팡이 자국을 바라봤다. 그 자국들이 움직이는 것처럼 보였다.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마치 자신도 곧 이것들과 같아질 것 같았다. 천천히 벽을 먹어 들어가면서. 천천히 부패하면서. 누구도 주목하지 않는 어둠 속에서.

창문으로 서울의 야경이 보였다. 반지하라서 창은 거리 높이에 있었다. 사람들의 발이 지나갔다. 검은 구두, 운동화, 슬리퍼. 각각의 발은 자신의 목적지를 향해 가고 있었다. 하지만 민준은 그 목적지가 어디인지 알 수 없었다. 그리고 이제 그것을 알고 싶지도 않았다.

수많은 불빛들. 아파트 창문들. 사무실 조명들. 가로등들. 각각의 불빛 아래에는 누군가가 살고 있었다. 각각의 불빛은 어딘가의 희망을 나타내고 있었다. 또는 절망을. 또는 둘 다.

“저 사람들도… 우리처럼 그 중간에서 살고 있는 걸까?”

민준이 물었다.

“아마도.”

내가 대답했다.

“그럼 우린… 왜 여기 있어?”

민준이 물었다.

나는 대답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나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 4부: 손

민준은 자신의 손을 펼쳤다. 우리가 잡았던 손. 그 손은 이제 비어있었다. 하지만 그 감각은 남아있었다.

온기. 무게. 현실성.

손가락들을 천천히 움직였다. 마치 그 손가락들이 여전히 어딘가와 연결되어 있는 것처럼. 마치 그 연결이 끊어지지 않았다고 믿고 싶은 것처럼.

“적어도 혼자는 아니구나.”

민준이 중얼거렸다.

그것이 사실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것을 믿는 것만 중요했다. 적어도 이 순간에는.

눈을 감았다. 꿈을 꾸지 않기를 바라면서. 하지만 그것도 선택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 모든 것이 이미 정해져 있다는 것을 알면서. 그리고 자신은 단지 그 위에서 연기하고 있을 뿐이라는 것을 알면서.

마음속으로 반복했다. 준호의 메시지를. 그 중간에서. 그 중간에서. 그 중간에서.

## 5부: 밤

밤이 깊어갔다.

천장의 곰팡이 자국들이 그림자로 변했다. 더 이상 지도가 아니라, 단순한 흔적이 되었다. 어디서 온 흔적인지, 어디로 향하는 흔적인지 알 수 없는 그런 흔적들.

그것이 생명의 증거인지, 죽음의 증거인지도 알 수 없었다.

민준은 그 흔적들 아래에서 움직였다. 침낭 속에서. 뒹굴었다. 한 자세에서 다른 자세로. 마치 자신의 몸이 자신에게 맞지 않는 것처럼. 마치 자신의 피부가 자신의 뼈를 거부하는 것처럼.

하지만 천천히 움직임은 줄어들었다.

호흡이 깊어졌다.

그리고 잠이 왔다.

완전하지 않은 잠이었다. 반쯤 깨어있는 상태와 깊은 수면의 경계에서의 잠. 그 사이에서 꿈과 현실이 섞였다. 하지만 그것도 상관없었다. 왜냐하면 어쨌든 모든 것이 혼합되어 있으니까. 어쨌든 더 이상 어디가 끝이고 어디가 시작인지 알 수 없으니까.

밤은 계속됐다.

시간은 흘렀다.

그리고 민준은 거기 있었다. 반지하 방의 침낭 위에서. 천장의 곰팡이 자국 아래에서. 서울의 야경이 흘러가는 작은 창문 아래에서.

혼자가 아니라고 믿으면서.

그 중간에서.

항상 그 중간에서.

**에필로그**

새벽이 되었을 때, 민준의 휴대폰이 울렸다. 준호로부터의 전화였다.

민준은 눈을 뜼 수 없었다. 마치 눈꺼풀이 납으로 봉인되어 있는 것처럼.

전화는 계속 울렸다.

그리고 민준은 여전히 움직이지 않았다.

창밖으로는 새벽의 첫 빛이 들어오고 있었다. 어둠이 조금씩 물러나고 있었다. 하지만 이 반지하 방은 여전히 어두웠다.

마치 그 빛이 여기까지 도달할 수 없는 것처럼.

마치 이 방이 완전히 다른 세계인 것처럼.

그리고 어쩌면 정말 그런 것일지도 몰랐다.

어쩌면 민준은 진작 다른 세계로 넘어갔던 것일지도 몰랐다.

그리고 우리는 단지 그것을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을 뿐일지도.

그 중간에서.

항상 그 중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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