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85화: 그 손의 의도
주차장의 형광등이 준호의 얼굴을 하얀색으로 밀어낸다. 민준은 형의 입술이 움직이는 것을 본다. 움직이지만, 그 이상의 말이 나오지 않는다. 마치 형이 무언가를 결정하고 있는 것처럼. 그 결정이 자신과 누군가 사이의 선을 그으려는 결정인 것처럼.
“넌 이준혁이를 봤어. 촬영장 안에서. 그리고 그 배우가 뭔지 이제 알았어.”
준호가 천천히 말한다. 그의 손은 여전히 민준의 소매를 잡고 있다. 손가락이 셔츠 천을 구겨지게 하지 않으려고 조심스럽게.
“근데 이준혁이는 넌 안 봤어. 넌 단지 그 배우의 손을 느꼈어. 그리고 그 손의 온기가 너한테 뭔가를 전했어. 진정성을 전했거나, 아니면 다른 뭔가를. 그게 뭐든 간에, 그건 충분했어.”
민준의 목이 마른다. 침을 삼키려고 하지만, 그것도 어렵다.
“충분해서 뭐예요?”
“충분해서 그 배우가 다음 단계로 갈 수 있어. 그리고 그 다음 단계는… 넌 예상도 못 할 거야.”
준호가 주차장을 바라본다. 그 너머의 도시. 서울의 불빛들이 멀리서 깜박인다. 마치 누군가가 계속 신호를 보내고 있는 것처럼.
“형,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세요. 그 배우가 뭘 했어요? 내가 뭘 해야 하는데요?”
민준의 목소리가 올라간다. 그것은 질문이 아니다. 그것은 울음이다. 울음을 억누르려고 하는 목소리의 떨림.
준호는 민준의 눈을 본다. 처음으로 완전하게. 마치 자신이 지금부터 말할 것들이 그 눈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확인하려는 것처럼.
“박미라가 너한테 물어본 거 기억해? ‘손의 온기를 느꼈어?’라고.”
“네.”
“그건 단순한 질문이 아니야. 그건 진단이야. 박미라는 그 순간에 너의 방어가 무너졌다는 걸 봤어. 감정이 얼굴에 드러났다는 걸 봤어. 그리고 그걸 본 건 박미라만이 아니야.”
민준의 심장이 다시 빠르게 뛰기 시작한다. 박미라가 뭘 봤고, 그것이 누구에게 전해졌다는 건가.
“이준혁이가 봤어. 아니, 더 정확하게는… 그 배우가 그걸 계획했어. 그 순간을 만들기 위해.”
민준은 이제 준호의 소매를 잡는다. 반대 방향으로. 마치 자신이 무너지려고 할 때 형을 붙잡는 것처럼.
“그게… 무슨 뜻이에요?”
“뜻은… 그 배우가 너를 시험했다는 뜻이야. 신인 배우가 어느 정도까지 ‘미끄러질’ 수 있는지. 어느 정도까지 감정을 노출할 수 있는지. 그리고 넌… 완벽하게 합격했어.”
민준의 다리가 흔들린다. 준호가 재빨리 손을 그의 허리에 댄다. 마치 자신이 지금 던진 폭탄이 누군가를 무너뜨릴 수 있다는 걸 아는 것처럼.
“앉아.”
준호가 말한다. 근처의 벤치를 향해. 주차장 구석에 있는, 거의 아무도 쓰지 않는 벤치.
민준은 앉는다. 천천히. 마치 자신의 몸이 이제 자신의 통제를 받지 않는 것처럼. 준호도 옆에 앉는다. 그들 사이에는 약 30센티미터의 거리가 있다. 하지만 그것은 영원히 다리처럼 느껴진다.
“이준혁이의 패턴을 말해줄게. 넌 알아야 해. 정확하게.”
준호의 목소리는 이제 매우 낮다. 마치 누군가가 듣고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인 것처럼. 아니면 자신이 지금 말하는 것 자체가 너무 위험해서인 것처럼.
“그 배우는 현장에서 신인 배우들—주로 여자 배우들—을 고르지. 그리고 그들과 장면을 할 때, 의도적으로 ‘진정성’을 요구해. 배역 속으로 더 깊이 들어가라고. 그리고 그걸 위해서 육체적 접촉을 이용해. 손이 닿거나, 눈이 마주치거나, 때론 더 많은 것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그 배우는 상대방의 ‘한계’가 어디인지를 본다.”
민준은 자신의 손을 본다. 그 손이 여전히 떨리고 있다. 그것은 이제 연기 때문이 아니다.
“근데 넌… 남자잖아.”
준호가 다시 말한다. 그의 목소리에는 이상한 음색이 있다. 안도? 아니면 뭔가 더 복잡한 것?
“그래서?”
민준이 묻는다.
“그래서… 그 배우의 수법이 달라져. 여자 배우한테는 로맨틱하게 접근하지. 남자 배우한테는… 경쟁이나 지배로. 넌 그 배우보다 못하다는 걸 증명하려는 거야. 그리고 넌 이미 그걸 증명했어.”
민준의 목이 타는 것 같다. 마치 누군가가 자신의 내부에 불을 지른 것처럼.
“그건… 그건 뭔가 다르지 않아요? 그냥… 연기일 수도 있지 않아요?”
민준이 말한다. 하지만 그의 목소리에는 설득력이 없다. 마치 자신도 이미 자신의 말을 믿지 않는 것처럼.
“넌 알고 있어. 그게 연기가 아니라는 걸. 왜냐하면 넌 그 배우의 손을 느꼈으니까. 그리고 그것이 뭔가를 전했으니까. 그것이 진정한 것이라고 믿었으니까.”
준호가 민준의 어깨에 손을 얹는다. 첫 번째로 친근한 제스처. 보호의 제스처.
“그리고 그것이 문제야. 왜냐하면 그 배우는 지금 이 순간에도 다른 곳에서 다른 신인 배우들에게 같은 것을 하고 있을 거니까. 그리고 그들 중 누군가는 너처럼 ‘느낄’ 거고, 그 느낌을 통제하지 못할 거고, 그리고 그 배우는 그것을 자신의 이익으로 바꿀 거야.”
민준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 그냥 앉아 있을 뿐이다. 주차장의 차들이 그들 옆을 지나간다. 누군가는 들어오고, 누군가는 나간다. 모두가 자신의 목적지를 향해 움직인다. 오직 민준만이 그 자리에 멈춰 있다.
“넌 지금부터 뭘 해야 해?”
민준이 마침내 물어본다.
“그냥… 그 배우를 피해. 가능한 한. 장면을 함께 해야 하면, 박미라가 있는 앞에서만 해. 그리고 다른 누구와도 홀로 있지 마. 특히 그 배우와는 절대로.”
준호가 말한다. 하지만 그 말도 충분하지 않다는 걸 둘 다 안다.
“그리고… 넌 지금부터 스스로를 지켜야 해. 연기 안에서뿐만 아니라, 연기 밖에서도. 그 배우처럼 통제되지 않은 감정을 드러내면 안 돼. 넌… 방어해야 해.”
민준은 준호의 손을 바라본다. 그 손은 여전히 그의 어깨 위에 있다. 따뜻한 손. 하지만 그 따뜻함은 이제 다른 의미다. 그것은 보호의 따뜻함이다. 아니면 결별의 따뜻함인가.
“형, 그럼 제가 뭘 해야 해요? 그냥… 배우를 그만둬야 하는 건가요?”
민준의 목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는다.
준호는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그의 손이 민준의 어깨에서 떨어진다. 마치 자신이 지금부터 말할 것들이 그 접촉을 허용하지 않는 것처럼.
“넌… 계속해야 해. 왜냐하면 넌 배우니까. 그리고 넌 좋은 배우가 될 수 있는 사람이니까. 하지만 다르게 해야 해. 그 배우처럼 하지 말고. 그 배우의 손의 온기에 지배당하지 말고. 대신… 박미라가 본 것을 네가 의도적으로 만들어. 연기 안에서만. 그리고 연기 밖에서는… 그냥 아무도 아닌 사람이 되어.”
민준은 이해한다. 이해하는 동시에 그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도 안다. 마치 누군가가 자신에게 “호흡하되 숨 쉬지 말아”라고 말하는 것처럼. 모순적이지만, 그것이 이제 자신의 유일한 길이다.
주차장의 형광등이 다시 윙윙거린다. 그 음성은 이전과 같지만, 이제 그것은 신호가 아니라 경고처럼 들린다.
“형… 그 배우가… 왜 나한테 그런 짓을 하는 거예요? 나는 그 배우를 모르는데.”
민준이 물어본다.
준호는 한참을 생각한다. 마치 이 질문에 답해야 하는지, 아니면 침묵해야 하는지를 판단하고 있는 것처럼.
“왜냐하면… 그 배우도 누군가의 피해자였을 수도 있고, 아니면 단순히 자신보다 약한 사람을 통제하는 것이 쾌감이었을 수도 있고, 또는 그냥… 이 산업이 그렇게 만들었을 수도 있어. 이 업계는 그런 거야. 누군가는 지배하고, 누군가는 지배당해. 그리고 지배당했던 사람이 나중에 지배하는 사람이 되곤 해.”
민준은 이 말을 곱씹는다. 그것은 위로가 아니다. 그것은 현실이다. 그리고 현실은 대개 위로보다 더 깊게 상처를 낸다.
“그럼… 저는? 저는 지배하는 사람이 될 건가요?”
민준의 질문은 매우 작고, 매우 깊다. 마치 자신의 영혼의 바닥에서 나온 질문인 것처럼.
준호는 민준을 본다. 이번에는 진정으로 본다. 마치 자신이 지금 이 사람을 처음 보는 것처럼.
“아니야. 그래서 내가 너한테 이렇게 말해주는 거야. 나는 넌 다를 거라고 믿어. 그리고 넌… 자신을 지킬 수 있는 배우가 될 거야. 그리고 동시에 다른 사람들을 지킬 수 있는 배우가 될 거야.”
민준은 준호의 얼굴을 본다. 그 얼굴에는 피로가 있다. 하지만 그것은 신체적 피로가 아니다. 그것은 누군가를 지켜내려는 영혼의 피로다. 마치 준호가 지금 자신의 일부를 민준에게 주고 있는 것처럼.
“형… 감사합니다.”
민준이 말한다. 그것은 말이 아니라, 울음이다.
준호는 다시 민준의 어깨에 손을 얹는다. 이번에는 더 강하게. 마치 자신이 지금 이 사람을 놓아주지 않겠다고 약속하는 것처럼.
그들은 그렇게 앉아 있다. 주차장의 형광등 아래에서. 서울의 밤하늘 아래에서. 그리고 시간은 계속 흐른다.
민준의 핸드폰이 울린다. 화면에는 “박미라”라고 표시되어 있다. 준호는 민준의 손을 가볍게 누른다. 마치 “답해도 된다”는 신호처럼.
민준은 전화를 받는다.
“PD님.”
“민준아, 너 지금 어디야? 촬영장 밖이지?”
박미라의 목소리는 조용하지만, 명확하다.
“네. 잠깐 바람을 쐬러 나왔어요.”
“그래. 잠깐만 시간이 돼? 내 사무실에 와 줄래?”
민준의 심장이 다시 뛰기 시작한다. 박미라. 그녀가 뭘 봤을까. 그리고 지금 자신에게 뭘 말하려고 할까.
“지금요?”
“응. 지금. 그리고… 혼자 와.”
박미라가 말한다. 그리고 전화는 끊긴다.
민준은 준호를 본다. 준호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분노의 일그러짐이 아니라, 뭔가 더 복잡한 감정의 일그러짐. 마치 그가 이 순간을 예상했던 것처럼.
“그냥… 가. 박미라는 나쁜 사람이 아니야. 그리고 넌… 그녀 앞에서는 진정한 너로 있어도 돼.”
준호가 말한다.
민준은 일어난다. 그의 다리는 여전히 불안정하지만, 그것도 상관없다. 마치 자신의 몸이 이제 자신의 의지와는 별개로 움직이기 시작한 것처럼.
그는 주차장을 떠난다. 그 뒤에는 준호가 남겨져 있다. 홀로. 그리고 그 형의 눈에는 뭔가 매우 오래되고, 매우 깊은 슬픔이 있다. 마치 자신이 지금 막 누군가를 구했지만, 그 과정에서 자신의 일부를 잃어버린 것처럼.
민준이 건물로 향할 때, 준호의 목소리가 뒤에서 들린다.
“민준아.”
민준이 돌아본다.
“넌… 그 손의 온기를 기억해야 해. 그리고 그게 뭐였는지 알아야 해. 그것이 너를 지키는 유일한 방법이야.”
준호의 얼굴은 어두워진다. 주차장의 그림자 속으로.
민준은 다시 돌아서서 건물로 들어간다. 그의 발걸음은 여전히 불안정하지만, 이제 조금 더 강하다. 마치 자신이 지금부터 무언가와 싸워야 한다는 걸 알아버린 것처럼.
박미라의 사무실은 촬영장의 3층에 있다. 민준은 계단을 올라간다. 엘리베이터를 타지 않는다. 마치 자신이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한 것처럼. 또는 자신의 몸이 이 상황에 천천히 적응해야 하는 것처럼.
문 앞에 도착했을 때, 민준의 손은 여전히 떨리고 있다. 그는 먼저 숨을 쉰다. 깊고 긴 숨. 마치 물속에서 나와 처음으로 공기를 마시는 것처럼.
그리고 문을 두드린다.
“들어와.”
박미라의 목소리.
민준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간다. 그 순간, 그의 진정한 시험이 시작된다.
# 그 손의 온기
## 1부: 떨림
주차장의 찬 공기가 민준의 피부를 파고들었다. 10월의 저녁이었지만, 그것이 민준을 떨리게 한 이유는 아니었다.
핸드폰의 진동이 먼저 왔다. 그 다음 울음소리. 비명처럼 들리기까지 했다. 민준은 화면을 내려다봤다. 조명이 그의 얼굴을 비추면서 흰 글씨가 떠올랐다. ‘박미라’.
PD다. 제작진의 중심이자, 이 드라마의 모든 것을 결정하는 사람. 그리고 민준이 가장 조심스러워하는 사람.
민준의 엄지손가락이 화면 위에서 맴돌았다. 답할 것인가, 말 것인가. 그 순간의 고민이 마치 몇 시간처럼 느껴졌다. 벽에 몸을 기대고 있는 자신을 바라봤다. 배우 민준이 아닌, 그저 어떤 남자가 되어 있었다. 불안한 남자.
“…”
그때였다. 준호의 손이 민준의 손등 위에 닿았다. 가볍게. 마치 닿지 않은 것처럼 섬세하게. 하지만 그 손의 온기는 명확했다.
민준은 준호를 바라봤다. 자신의 형의 얼굴을 읽으려고 했다. 준호의 눈빛이 모든 것을 말하고 있었다. ‘괜찮아. 받아도 돼.’
민준은 화면을 위로 밀었다.
“PD님.”
목소리가 떨렸나? 자신의 목소리를 객관적으로 판단하기는 어려웠다. 배우로서의 훈련이 있었지만, 지금 이 순간은 배우가 아닌 한 인간의 목소리였다.
박미라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민준아, 너 지금 어디야? 촬영장 밖이지?”
“네. 잠깐 바람을 쐬러 나왔어요.”
거짓말이었다. 민준은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바람을 쐬러 나온 것이 아니라, 도망친 것이었다. 준호와 함께 촬영장을 빠져나온 이유가 무엇이었는지 자신도 정확히 알 수 없었다. 다만 그 순간, 그 장소에 있을 수 없다는 강렬한 충동이 있었을 뿐이었다.
박미라는 잠시 침묵했다. 그 침묵이 민준의 심장을 더욱 빠르게 뛰게 했다. 그녀가 무엇을 알고 있는 건 아닐까? 무엇을 봤던 것은 아닐까?
“그래. 잠깐만 시간이 돼? 내 사무실에 와 줄래?”
사무실. 그 단어가 민준의 가슴에 납덩이처럼 떨어졌다. 사무실이라는 것은 공식적인 자리라는 뜻이었다. 뭔가 중요한 것을 말하기 위한 자리. 그리고 그것이 좋은 소식일 리 없었다.
“지금요?”
민준의 목소리가 더 떨렸다. 이번에는 숨길 수 없었다.
“응. 지금. 그리고…”
박미라가 일시정지했다. 그 짧은 순간이 영원처럼 느껴졌다.
“혼자 와.”
통화가 끝났다. 박미라는 작별 인사도 하지 않았다. 필요 없었던 것 같다. 이미 모든 것이 말해졌으니까.
민준은 천천히 핸드폰을 내렸다. 화면의 불이 꺼졌다. 자신의 얼굴 반사도 함께 사라졌다.
“준호…”
민준이 형을 봤다. 준호의 얼굴이 변해 있었다. 분노의 일그러짐이 아니었다. 그것은 훨씬 더 복잡한 감정의 변형이었다. 마치 그가 이 순간을 예상했던 것처럼. 아니, 아마 예상했을 것이다. 준호는 항상 한 발 앞에 있었다. 언제나 민준보다 먼저 알고 있었다.
준호가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는 낮았다. 거의 속삭임에 가까웠다.
“그냥… 가. 박미라는 나쁜 사람이 아니야. 그리고 넌…”
준호가 민준의 눈을 바라봤다. 그 눈에는 뭔가 오래된 슬픔이 잠들어 있었다.
“그녀 앞에서는 진정한 너로 있어도 돼.”
진정한 나. 민준은 그 말의 의미를 곱씹었다. 자신의 진정한 모습이란 무엇인가? 배우로서의 자신인가, 아니면 그 안에 숨겨진 누군가인가? 그리고 준호는 그것을 알고 있는가?
민준은 일어났다. 그의 다리는 여전히 불안정했다. 주차장의 차가운 바람 때문일 수도 있고, 아니면 자신의 내면 때문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제 상관없었다. 마치 자신의 몸이 이제 자신의 의지와는 별개로 움직이기 시작한 것처럼, 민준은 준호를 떠나 건물로 향했다.
주차장의 어둠이 등 뒤에서 따라왔다.
## 2부: 기억
“민준아.”
민준이 멈췄다. 준호의 목소리가 뒤에서 들렸다. 민준은 돌아봤다.
준호는 주차장의 그림자 속에 서 있었다. 가로등의 불빛이 그의 얼굴 절반만을 비추고 있었다. 그 절반의 얼굴에는 뭔가 매우 오래되고, 매우 깊은 슬픔이 새겨져 있었다.
“넌… 그 손의 온기를 기억해야 해.”
준호가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더 깊었다. 마치 다른 누군가가 말하고 있는 것처럼 들렸다.
민준은 자신의 손을 바라봤다. 준호가 얼마 전에 닿았던 그 손. 여전히 그 온기가 남아 있는 것 같았다. 아니, 그것은 환상이었을 수도 있다. 자신이 느끼고 싶었던 감각이 만들어낸 착각.
“그리고 그게 뭐였는지 알아야 해. 그것이 너를 지키는 유일한 방법이야.”
준호의 얼굴이 더욱 어두워졌다. 주차장의 그림자가 그를 삼키기 시작했다.
민준은 다시 돌아서서 건물로 들어갔다. 그의 발걸음은 여전히 불안정했지만, 이제 조금 더 강해 보였다. 마치 자신이 지금부터 무언가와 싸워야 한다는 것을 알아버린 것처럼.
## 3부: 계단
촬영장 건물의 계단실은 예상 외로 밝았다. 형광등의 차가운 빛이 콘크리트 벽을 비추고 있었다. 민준은 엘리베이터를 향해 가지 않았다. 엘리베이터의 폐쇄된 공간이 두려웠다. 그 안에서는 자신의 생각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 같았다.
계단을 올라가기로 했다.
한 계단, 두 계단, 세 계단.
발이 딛는 소리가 울렸다. 그 소리가 민준의 심장 박동과 맞춰졌다. 마치 자신의 신체가 어떤 리듬을 가지고 움직이고 있는 것처럼.
3층.
박미라의 사무실은 3층에 있었다. 민준은 계단에 손을 짚으며 올라갔다. 그의 손이 난간에 닿을 때마다, 준호의 손이 떠올랐다. 그 손의 온기. 그 온기가 무엇이었는가?
민준은 자신의 손을 펼쳐 보았다. 손가락들이 약간 떨리고 있었다. 자신의 손이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마치 누군가 다른 사람의 손을 움직이는 것처럼.
계단을 모두 올라갔을 때, 민준의 심장은 축제 북처럼 울리고 있었다. 숨이 가빠왔다. 계단을 빨리 올라간 탓도 있겠지만, 대부분은 불안감 때문이었다.
## 4부: 문 앞
박미라의 사무실 문 앞에 도착했다.
‘박미라 PD’라는 명패가 문 옆에 붙어 있었다. 은색 글씨. 간단하고 명확했다. 마치 박미라라는 인물 자체처럼.
민준의 손이 문에 가까워졌다. 하지만 노크를 하지 못했다. 손이 공중에서 멈춰 있었다. 마치 시간이 정지한 것처럼.
그가 이 문을 열면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까?
자신의 배우 생명의 끝?
아니면 뭔가 더 복잡한 것?
민준은 깊게 숨을 쉬었다. 코로 들이마시고, 입으로 내보냈다. 마치 물속에서 나와 처음으로 공기를 마시는 것처럼. 그 숨이 얼마나 깊었는지, 얼마나 절실했는지 자신도 놀랐다.
손이 문에 닿았다.
세 번 노크했다.
톡, 톡, 톡.
소리가 사무실로 울려 퍼졌다.
“들어와.”
박미라의 목소리.
민준은 심호흡을 한 번 더 했다. 그리고 문을 열었다.
## 5부: 사무실
박미라의 사무실은 예상했던 것보다 따뜻했다.
큰 창문을 통해 서울의 야경이 보였다. 건물들의 불빛이 마치 별처럼 떠 있었다. 창문 아래에는 책장이 있었고, 책장 위에는 각종 상이 놓여 있었다. 박미라가 만든 작품들의 증거들이었다.
박미라는 창문을 등지고 앉아 있었다. 조명이 그녀의 실루엣만을 만들어냈다.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민준아. 앉아.”
박미라가 손짓했다. 민준 앞에는 두 개의 의자가 있었다. 하나는 박미라 앞 책상 옆에 있었고, 다른 하나는 창문 쪽에 있었다. 민준은 창문 쪽 의자를 택했다.
앉으면서 민준은 박미라의 얼굴을 제대로 볼 수 있었다.
박미라는 40대 초반의 여성이었다. 짧은 머리. 화장은 최소한으로만 했다. 그녀의 얼굴에는 배우들을 보는 경험으로 얻은 어떤 안목이 담겨 있었다. 그 눈빛을 피할 수 없었다. 민준이 아무리 배우 같은 표정을 지으려고 해도, 박미라의 눈은 그 아래를 볼 수 있는 것 같았다.
“너 요즘 어때? 촬영.”
박미라가 먼저 입을 열었다. 일반적인 질문이었다. 하지만 민준은 그것이 일반적이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박미라는 이미 자신에 대해 무언가 알고 있는 상태에서 이 질문을 하고 있었다.
“좋습니다. 감사합니다.”
민준이 대답했다. 배우로서의 대답. 안전한 대답.
박미라가 웃음을 흘렸다. “그래? 그럼 다행이네.”
그녀가 책상의 서류를 정리했다. 종이들을 한데 모으고, 그것을 정확하게 정렬했다. 그 행동 하나하나가 마치 의식처럼 느껴졌다.
“민준아, 너 드라마 촬영 시작하기 전에 뭘 했어?”
갑작스러운 질문이었다. 민준은 순간 당황했다.
“무엇을… 말씀이신가요?”
“아니, 그냥. 넌 이 역할을 잡기 전에 뭘 했냐고. 어떤 일을 했고, 어떤 생각을 했고, 어떤 삶을 살았냐고.”
박미라가 의자에 기대앉았다. 그녀의 눈이 더욱 선명해졌다.
민준은 조용해졌다. 그 질문은 단순한 호기심이 아니었다. 그것은 뭔가를 확인하기 위한 질문이었다.
“제… 잘 모르겠습니다.”
민준이 솔직하게 대답했다.
박미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마치 자신의 예상이 맞다는 확인을 한 것처럼.
“그렇지. 넌 그렇지. 그래서 이 배역이 너한테 주어진 거야.”
박미라가 일어섰다. 창문으로 다가갔다. 야경이 그녀의 얼굴을 비추었다. 이제 민준은 그녀의 표정을 더 잘 볼 수 있었다. 그녀의 얼굴에는 깊은 사색의 흔적이 있었다.
“민준아. 너 이 드라마에서 하는 역할이 뭐야?”
“그… 그 남자가 자신의 정체를 찾는 역할입니다.”
“그래. 맞아. 그 남자는 자신이 누구인지 모른다. 자신이 뭘 원하는지도 모르고, 자신이 뭘 해야 하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박미라가 돌아섰다.
“너는 그것을 어떻게 표현했어?”
민준의 심장이 떨렸다. 그 순간, 민준은 자신이 뭘 해왔는지 알았다. 자신이 배역을 어떻게 표현해왔는지, 그리고 그것이 얼마나 거짓이었는지를.
## 6부: 거울
“PD님, 저는…”
민준이 말을 시작했지만, 박미라가 손을 들어 멈추게 했다.
“잠깐. 먼저 이것을 봐.”
박미라가 노트북을 켰다. 화면이 밝아졌다. 그리고 영상이 재생되었다.
그것은 촬영장의 CCTV 영상이었다. 주차장. 그리고 그곳에 있는 두 명의 남자. 준호와 민준.
민준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영상 속의 민준은 배우 민준이 아니었다. 그것은 누군가 다른 사람이었다. 불안에 떠는 사람. 누군가에게 의존하는 사람. 그리고 그것을 숨기려고 애쓰는 사람.
박미라가 영상을 멈추고 민준을 바라봤다.
“이것이 진정한 너야. 저 남자가 넌 거야. 그리고 그 남자가 바로 내가 캐스팅한 배우야.”
민준의 목이 메었다.
“PD님, 저는…”
“너는 뭔가를 숨기고 있어. 누군가를 숨기고 있어. 그리고 그것이 너의 연기를 더 깊게 만들었어. 그런데…”
박미라가 의자 앞에 앉았다.
“그런데 그것을 계속 숨길 수는 없어. 왜냐하면, 이 드라마는 그 정체성을 찾는 것에 관한 거니까.”
박미라의 눈이 민준을 뚫어질 듯이 봤다.
“그래서 나는 너한테 물었어. 뭘 봤냐고. 그리고 넌… 너는 준호라는 형이 있어. 맞지?”
민준은 대답할 수 없었다.
“넌 그 형 때문에 불안해해. 그 형이 뭔가를 알고 있다는 생각에. 그리고 그것이 너를 자유롭게 하지 못하고 있어.”
박미라의 목소리가 부드러워졌다.
“내가 너를 부른 이유는 너에게 자유를 주기 위해서야. 이 드라마를 통해서. 그리고 그렇게 되려면, 넌 그 손의 온기가 뭐였는지 알아야 해.”
민준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그… 그게 뭔데요?”
박미라가 일어섰다. 그리고 민준 앞에 무언가를 내려놨다.
그것은 노트였다. 오래된 노트였다. 표지는 낡아 있었고, 페이지들은 누렇게 변해 있었다.
“읽어봐.”
박미라가 말했다.
민준이 노트를 집어 들었다. 표지에는 이름이 쓰여 있었다. ‘준호’.
준호의 필체였다. 민준은 그것을 알았다. 자신의 형의 글씨를.
## 7부: 기억의 페이지
민준은 노트의 첫 페이지를 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