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62화: 거래의 대가
민준의 몸이 움직이고 있었지만, 자신이 그것을 통제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마치 누군가가 자신의 신경을 조종하고 있는 것처럼. 의자에서 일어서려고 했고, 멈췄다. 다시 앉으려고 했고, 그것도 중간에 멈췄다. 결국 그는 반쯤 떠있는 상태로 고정되었다. 카페의 조명 아래에서, 마치 자신의 몸도 어느 쪽에 속해야 할지 모르는 것처럼.
우리는 계속 말하고 있었다. 마치 멈추면 영원히 멈출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것처럼.
“그래서 이수진이가 당신을 택한 거야. 왜냐하면 당신은 이미 침묵에 익숙했으니까. 4년을 엑스트라로 버티면서, 아무도 당신을 본 적이 없다는 것을 받아들인 사람. 그런 사람이면 한 가지 더를 침묵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거지.”
우리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지고 있었다. 마치 자신이 이 말들을 할 때마다 자신의 생명력이 빠져나가는 것처럼.
“당신의 위약금은 내 친구의 합의금과 같은 금액이야. 그게 우연일까? 아니야. 이수진이가 일부러 그렇게 설정한 거야. 당신이 이 거래의 가치를 알도록. 당신이 받는 것이 얼마나 큰 것인지 알도록. 그리고 그것이 얼마나 큰 대가를 요구하는지도 알도록.”
민준은 우리의 말을 듣고 있었지만, 동시에 듣지 않고 있었다. 마치 자신의 귀가 이 정보를 받아들이기를 거부하고 있는 것처럼. 그의 입술이 움직였다. 뭔가를 말하려고 했지만, 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대신 그의 눈에 물이 맺혔다. 눈물이 아니라, 마치 자신의 눈도 이 현실을 거절하고 있는 것처럼.
준호가 움직였다. 이번에는 하지 말라는 신호 없이. 그는 자신의 손을 민준의 팔 위에 올렸다. 가볍게. 마치 자신이 접촉하고 있다는 것을 민준에게 알려주려는 것처럼. 하지만 민준은 그것을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는 여전히 반쯤 떠있었고, 여전히 움직이지 않았다.
“그 역할을 하면 어떻게 되는 거예요?”
민준이 마침내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마치 누군가 다른 사람의 목소리였다. 매우 낮고, 매우 멀리서 들리는 것처럼.
“당신은 유명해져. 넷플릭스 배우로. 그리고 동시에 당신은 이수진이의 소유물이 돼. 왜냐하면 당신은 내 친구의 죽음을 알고 있으니까. 그리고 만약 당신이 그것을 말한다면, 당신의 경력은 끝나. 이수진이가 당신을 고소할 거야. 명예훼손으로. 합의금을 받은 사람이 다시 기사를 낸 것이라고 말하면서. 그리고 그것은 사실이야.”
우리가 말했다. 마치 자신이 죄수이고, 자신의 말이 유죄 선고인 것처럼.
“그래서 당신은 영원히 침묵해야 해. 당신이 유명해질수록, 당신은 더 침묵해야 돼. 왜냐하면 당신이 말할 수 있는 무게가 점점 커지니까. 당신이 아무도 아니었을 때는 말해도 아무도 믿지 않았을 거야. 하지만 당신이 유명해지면, 당신의 말은 무기가 될 거야. 그래서 이수진이는 당신을 영원히 목줄에 묶어두고 싶어. 당신의 성공으로.”
카페가 조용해졌다. 아니, 더 정확하게는 모든 소리가 멀어졌다. 마치 민준이 누군가 다른 세계에 들어간 것처럼. 그곳에는 음악도, 사람들의 목소리도, 기계음도 없었다. 오직 우리의 말과 자신의 심장박동뿐.
“내가 왜 이걸 말했는지 아세요?”
민준이 물었다. 여전히 그 먼 목소리로.
“왜?”
우리가 물었다.
“왜냐하면 당신이 이미 함정에 빠져있다는 걸 이제 아셨으니까. 그래서 말하는 거죠. 이제 도움이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서. 아니면…”
우리가 멈췄다.
“아니면?”
민준이 물었다.
“아니면 내가 너무 외로워서. 혼자만 이걸 알고 있기가 너무 힘들어서. 그래서 당신에게 이 무게를 함께 나누려고 했어. 미안해.”
우리의 목소리가 완전히 부서졌다. 마치 유리잔이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처럼.
민준은 천천히 자신의 몸을 앉히기로 결정했다. 마치 자신이 이제 영구적으로 무언가에 고정되었다는 것을 받아들인 것처럼.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 테이블 위에 자신의 팔을 올렸다. 손가락이 테이블의 표면을 만졌다. 우리의 손가락과 매우 가까운 곳에.
“그 친구분이 어떻게…”
민준이 말을 시작했다. 하지만 완성하지 못했다.
“베란다에서.”
우리가 완성했다. 마치 자신이 이 말을 하지 않으면 영원히 못할 것처럼.
“응.”
“그래서 경찰은…?”
“자살로 처리됐어. 이수진이의 변호사들이 충분한 압력을 행사했거든. 그리고 내 친구의 부모님은… 이수진이에게서 받은 합의금으로 친구의 장례를 치르고, 조용히 사라지기로 선택했어. 그게 조건이었으니까.”
우리가 말했다.
민준의 손이 떨렸다. 마치 자신의 몸이 이 정보에 대한 반응을 자신의 뇌가 지시할 때까지 기다릴 수 없는 것처럼. 그의 손가락이 테이블 위에서 무언가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탁탁탁. 우리와 같은 리듬. 불안함을 몸 밖으로 내보내는 방식.
“제가 거절하면 어떻게 되는 거예요?”
민준이 물었다.
“그럼 넷플릭스 역할은 다른 누군가에게 가. 그리고 당신은… 당신은 계속 지금처럼 남아있어. 엑스트라로. 조연으로. 아무도 보지 않는 배우로. 그리고 이수진이는 당신에게 위약금을 물리지 않아. 왜냐하면 당신이 계약을 거절했으니까. 그건 당신의 선택이고, 이수진이는 법적으로 문제가 없어.”
우리가 말했다.
“그래서 저는 거래를 받거나, 아무것도 아니거나. 둘 중 하나네요.”
민준이 말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이상한 침착함이 있었다. 마치 자신이 이미 최악을 받아들인 것처럼.
“응.”
우리가 대답했다.
준호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이 대화 내내 침묵하고 있었던 준호가.
“민준이, 넷플릭스 역할 이전에, 당신이 선택할 것이 있다면 뭘 선택했을 거 같아?”
준호가 물었다.
민준은 준호를 바라봤다. 그 질문의 의도를 파악하려고 하는 것처럼. 준호의 얼굴에는 뭔가가 담겨 있었다. 동정심이 아니라, 뭔가 더 강한 것. 마치 자신이 민준에게 뭔가를 제시하려고 하는 것처럼.
“저는…”
민준이 말을 시작했다. 하지만 멈췄다. 자신이 진실을 말할 준비가 되었는지 확인하려고 하는 것처럼.
“저는 배우가 되고 싶었어요. 그냥 그것뿐이었어요. 누군가에게 보여지고 싶었어요. 아무도 안 봐줘도 되지만, 혹시 모르니까. 그런 마음으로 시작했는데…”
민준이 말했다.
“그리고 지금?”
준호가 물었다.
“지금은…”
민준이 말했다. 그리고 침묵했다. 그 침묵은 길었다. 마치 자신이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자신의 전체 인생을 검토해야 하는 것처럼.
“지금은 배우가 되는 게 싫어요. 근데 배우가 아니면 뭐가 되어야 할지 모르겠어요.”
민준이 마침내 말했다.
그 말이 나가는 순간, 카페의 공기가 다시 변했다. 마치 누군가가 윈도우를 열어서 신선한 공기가 들어온 것처럼. 하지만 그것은 신선함이 아니라, 현실이었다. 민준이 자신의 진실을 말했을 때, 자신의 감옥의 벽이 조금 더 명확해진 것.
“그래도 당신은 배우를 계속 할 거야.”
준호가 말했다. 질문이 아니라, 확인처럼.
“네?”
민준이 물었다.
“왜냐하면 당신은 이미 갇혀있으니까. 이수진이의 손에. 아니, 더 정확하게는 당신의 자신의 선택의 손에. 4년을 버티면서 당신이 만든 그 침묵의 습관에.”
준호가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이상하게 부드러웠다. 마치 자신이 매우 냉정한 진실을 매우 따뜻한 목소리로 전달하려고 하는 것처럼.
“그래서 당신이 할 수 있는 선택은 하나밖에 없어. 거기서 빠져나와. 지금. 이 순간에. 거기서 빠져나오지 않으면, 당신은 영원히 갇혀있을 거야.”
준호가 말했다.
“어떻게 빠져나가요?”
민준이 물었다.
“그건 당신이 결정해야 해. 근데 내가 말해줄 수 있는 건, 한 가지야. 당신이 침묵을 선택하는 순간, 당신은 당신의 인생에서 주인공이 아니라 조연이 되는 거야. 영원히. 이수진이의 배우로서. 당신의 배우로서가 아니라.”
준호가 말했다.
민준의 눈이 천천히 우리에게로 향했다. 마치 자신이 이제 우리에게 뭔가를 묻고 싶은 것처럼. 하지만 그 질문은 입에서 나오지 않았다. 대신 그는 자신의 손을 테이블 위에 놓았다. 우리의 손 바로 옆에.
“당신의 친구가…”
민준이 말했다. 매우 천천히.
“응?”
우리가 물었다.
“그 친구가 남긴 게 뭐가 있어요? 당신한테?”
민준이 물었다.
우리의 눈이 흔들렸다. 마치 자신이 오래 숨겨둔 무언가를 드러내려고 하는 것처럼.
“일기장. 그리고…”
우리가 말했다.
“그리고?”
민준이 물었다.
“그리고 이수진이에게 보내려고 했던 편지. 근데 보내지 않은 편지.”
우리가 말했다.
“그 편지에 뭐가 써있어요?”
민준이 물었다.
우리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우리의 손이 자신의 가방으로 향했다. 마치 자신이 이 순간을 위해 항상 그 편지를 들고 다니고 있었던 것처럼.
밤이 깊어졌다. 카페는 여전히 열려 있었지만, 고객들은 거의 없었다. 청소 직원들이 이쪽 테이블 근처를 피해서 다니고 있었다. 마치 자신들이 이 테이블의 무거움을 감각으로 느끼고 있는 것처럼.
민준은 편지를 읽고 있었다. 아니, 읽으려고 하고 있었다. 마치 자신의 눈이 글자를 받아들이기를 거부하고 있는 것처럼. 그의 눈동자가 움직였다. 한 문장에서 다음 문장으로. 하지만 그의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마치 자신이 이미 모든 감정을 소진해버린 것처럼.
“이건…”
민준이 말했다.
“응.”
우리가 대답했다.
“이건 유서예요.”
민준이 말했다.
“응. 그리고 동시에 폭탄이야. 이걸 공개하면, 이수진이는 끝나. 완전히. 경찰도 다시 사건을 열 거야. 자살이 아니라 자해 강요로.”
우리가 말했다.
“그럼 왜 공개하지 않았어요?”
민준이 물었다.
“왜냐하면…”
우리가 말했다. 그리고 멈췄다.
“왜냐하면?”
민준이 다시 물었다.
“왜냐하면 내가 약해서. 그 금액이 너무 컸어서. 250억. 나는 배우도 아니고, 그냥 배우의 친구였어. 그 돈으로 할 수 있는 게 너무 많았어. 근데 친구는 죽었어. 그 친구는 아무것도 못 했어. 그래서 내가 그 친구를 위해 뭔가 해야 한다고 생각했어. 하지만 나는 약했어. 너무 약했어.”
우리가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부서져 있었다.
민준은 편지를 다시 보았다. 마지막 문장이 보였다.
“이수진이가 날 죽이려고 했어. 근데 왜 안 했을까? 왜냐하면 나는 이미 죽어있었으니까. 이 업계에서 1년 전부터. 그래서 이제 정말로 죽기로 했어. 적어도 이렇게 죽으면, 누군가는 기억할 거니까.”
민준이 읽었다.
카페가 완전히 조용해졌다. 배경음악도 끝났다. 에스프레소 머신도 소리를 내지 않았다. 오직 민준의 호흡과 우리의 소리 없는 울음만 들렸다. 준호는 여전히 앉아 있었다. 마치 돌상처럼. 하지만 그의 눈은 움직이고 있었다. 민준에게서 우리에게로. 그리고 다시 민준에게로.
“당신들이 날 불렀어요.”
민준이 말했다. 아니, 깨달았다.
“응. 내가 불렀어. 당신이 이수진이와 미팅을 했다고 들었을 때, 내가 불렀어. 당신이 넷플릭스 역할을 받았다고 들었을 때, 내가 불렀어.”
우리가 말했다.
“왜?”
민준이 물었다.
“왜냐하면 당신은 내 친구가 될 수 있으니까. 아니, 이미 되어있으니까. 당신도 모르지만, 당신도 이수진이의 손에 갇혀있으니까. 그래서 내가 당신을 구해야 한다고 생각했어.”
우리가 말했다.
“그리고 당신은 절대로 할 수 없어요.”
민준이 말했다.
“응. 나는 절대로 할 수 없어.”
우리가 대답했다.
그 말이 나가는 순간, 민준의 몸이 변했다. 마치 누군가가 자신의 내부에서 전기를 흘린 것처럼. 그의 가슴이 올라갔다. 내려갔다. 올라갔다. 그리고 그의 입에서 소리가 나왔다. 울음이 아니라, 뭔가 더 깊은 것. 마치 자신의 몸이 자신의 뇌보다 먼저 절망을 표현하려고 하는 것처럼.
준호가 움직였다. 이번에는 이전의 조심스러운 움직임이 아니라, 명확한 움직임이었다. 그는 자신의 의자를 민준 옆으로 끌었다. 그리고 민준의 등을 손으로 누르기 시작했다. 가볍게. 마치 자신이 민준이 무너지지 않도록 지탱하려고 하는 것처럼.
“숨을 쉬어. 민준이. 숨을 쉬어.”
준호가 말했다.
민준은 숨을 쉬려고 했다. 하지만 자신의 폐가 작동하지 않는 것처럼 느껴졌다. 마치 자신의 몸 전체가 거부 반응을 일으키고 있는 것처럼. 그는 입을 크게 벌렸다. 폐에 공기를 넣으려고 했다. 하나. 둘. 셋. 그리고 조금씩, 아주 천천히, 자신의 호흡이 돌아왔다.
우리는 아직도 손을 민준의 손 위에 올려두고 있었다. 마치 자신이 민준이 자신의 손을 통해 뭔가를 받을 수 있도록 하려는 것처럼. 하지만 그것은 힘이 아니었다. 그것은 그냥 존재였다. 누군가가 자신 옆에 있다는 존재.
“이제 어떻게 되는 거예요?”
민준이 마침내 물었다. 그의 목소리는 매우 낮았다. 마치 자신이 지하에 있는 것처럼.
“그건…”
준호가 말했다.
“그건 당신이 결정하는 거야. 당신의 인생이니까. 당신이 결정해.”
준호가 말했다.
민준은 테이블 위에 있는 편지를 다시 보았다. 우리의 친구가 쓴 글씨. 떨리는 손으로 쓴 글씨. 마지막 메시지. 마지막 울음.
“저는…”
민준이 말을 시작했다.
“저는 아직 모르겠어요.”
그리고 그 순간, 카페의 벽시계가 시간을 알렸다. 자정이 지나서 12시 38분.
한국 연예계의 밤은 항상 깊었다. 하지만 이 밤은 특별히 깊었다. 마치 누군가가 모든 빛을 꺼버린 것처럼.
민준은 카페를 나왔다. 우리와 준호는 아직도 벤치에 앉아 있었다. 밖의 벤치. 강남역 입구의 벤치. 그 위에서 민준은 한 번 더 우리와 준호를 바라봤다.
“당신들이…”
민준이 말했다.
“응?”
준호가 물었다.
“당신들이 날 고르지 말았어야 했어요. 저는 그럴 가치가 없어요.”
민준이 말했다.
“당신은 가치가 있어.”
우리가 말했다.
“어떻게 알아요?”
민준이 물었다.
“왜냐하면 당신은 지금 이 말을 들으려고 했거든. 당신은 누군가가 자신을 구해주길 원했거든. 그리고 당신은 강했거든. 4년을 버텼으니까.”
우리가 말했다.
민준은 그 말을 들었지만, 믿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도 괜찮았다. 믿음은 나중에 올 수도 있는 것이니까.
“저는…”
민준이 말했다.
“저는 갈게요. 집으로. 생각을 좀 해야 할 것 같아요.”
민준이 말했다.
“응. 가.”
준호가 말했다.
“그리고 민준이…”
우리가 말했다.
“응?”
“당신이 뭘 선택하든, 우리는 여기 있을 거야. 그건 기억해 줄래?”
우리가 말했다.
민준은 답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돌아섰다. 그리고 밤의 강남역으로 사라져갔다. 마치 자신이 이미 그곳의 일부였던 것처럼.
뒤에서 우리와 준호는 여전히 벤치에 앉아 있었다. 밤이 깊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여전히 말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지금은 말할 시간이 아니었으니까. 지금은 그냥 함께 있는 시간이었다. 누군가를 구하려고 실패한 사람들이, 누군가를 구하려고 다시 시도하는 사이의 시간. 그리고 그 사이에는 침묵이 있었다. 음성보다 더 큰 침묵.
# 지하실의 빛
## 1부: 선택의 무게
카페의 조명은 너무 밝았다. 민준은 그렇게 생각했다. 마치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모든 어둠을 몰아내려는 것처럼, 천장의 할로겐 조명들이 서로 경쟁이라도 하듯 흰빛을 내뿜고 있었다. 하지만 그 밝음도 민준의 내면을 밝히지는 못했다. 그곳은 여전히 지하실처럼 깜깜했다. 깊고, 습하고, 탈출 불가능한 지하실 말이다.
테이블 위의 편지가 떨렸다. 아니, 편지가 떨린 게 아니다. 민준의 손이 떨렸다. 그가 편지를 집어 들려고 할 때마다 손가락들이 저항했다. 마치 그 종이가 뜨거운 석탄이라도 되는 양. 우리의 친구가 쓴 글씨였다. 떨리는 손으로 쓴 글씨였다. 마지막 메시지였다. 마지막 울음이었다.
준호가 앞에 앉아 있었다. 그의 얼굴은 조명 아래서도 창백해 보였다. 아마 이것이 그의 진짜 색깔일지도 모른다. 민준은 생각했다. 우리 모두의 진짜 색깔은 이미 이 밝은 카페 조명 아래에서 드러났을 것이다. 숨길 수 없는, 벗겨낼 수 없는, 우리의 본질 말이다.
“그건…”
준호가 입을 열었다. 목소리가 쉬었다. 담배 연기로 가득한 술집에서 밤새 이야기를 나눈 사람처럼.
“그건 당신이 결정하는 거야. 당신의 인생이니까. 당신이 결정해.”
민준은 준호를 바라봤다. 준호의 눈이 흔들렸다. 결연함을 유지하려고 애쓰는 눈이었다. 하지만 그 안에는 피로가 묻어났다. 몇 달 동안 누군가를 구하려고 노력해온 사람의 피로 말이다. 그리고 그것이 실패했을 때의 무거운 죄책감.
“저는…”
민준이 말을 시작했다. 하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마치 누군가가 그의 목을 조르고 있는 것처럼. 그는 다시 시도했다.
“저는 아직 모르겠어요.”
그 말이 나오는 순간, 카페의 벽시계가 울렸다. 똑딱거리는 소리가 아니라, 시간을 알리는 전자음이었다. 자정이 지나서 12시 38분. 새벽이 시작된 지 38분이 되었다. 어제와 오늘의 경계, 그 애매한 지점에 민준은 여전히 서 있었다.
## 2부: 밤의 깊이
카페 밖의 공기는 차가웠다. 강남역 입구의 밤 공기는 항상 이렇다. 너무 많은 사람들의 호흡으로 채워져 있으면서도, 동시에 텅 빈 듯한. 서울의 밤은 항상 깊었다. 하지만 이 밤은 특별히 깊었다. 마치 누군가가 모든 별을 꺼버린 것처럼. 마치 하늘 전체가 검은 천으로 덮여진 것처럼.
민준과 준호, 그리고 우리—그들은 카페 입구의 벤치에 앉았다. 강남역 광장의 벤치. 이 벤치는 몇 년 동안 수많은 사람들의 무게를 견뎌냈을 것이다. 이별하는 연인들의 무게, 약속을 기다리는 사람들의 무게, 그리고 지금처럼 절망 속에서 희망을 찾으려는 사람의 무게.
민준은 하나의 벤치에서 다른 벤치로 옮겨가며 생각했다. 벤치들이 이렇게 많은 이유는 뭘까. 서울의 모든 역에서 왜 사람들은 앉기를 원할까. 기차를 타기 전에 한 번 더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서일까. 아니면 이미 가야 할 길을 알고 있지만, 떠나는 것을 미루기 위해서일까.
민준의 시선이 준호와 우리를 향했다.
“당신들이…”
그의 목소리는 벤치에 앉은 몸 전체에서 나오는 것 같았다. 마치 그의 뼈와 살과 혈관, 그 모든 것이 이 한 문장을 위해 진동하고 있는 것처럼.
“응?”
준호가 물었다. 그의 손가락이 담배 연기처럼 허공을 헤매고 있었다.
“당신들이 날 고르지 말았어야 했어요. 저는 그럴 가치가 없어요.”
민준의 말이 밤 공기 속으로 흩어졌다. 광장의 소음—택시의 경적음, 사람들의 발걸음, 어딘가에서 울리는 음악—이 그 말을 삼켜버렸다. 하지만 준호와 우리는 들었다. 분명히 들었다.
“당신은 가치가 있어.”
우리가 말했다. 우리의 목소리는 준호의 목소리보다 차분했다. 오래된 책의 냄새 같은 목소리였다. 마치 수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온 사람의 목소리처럼.
“어떻게 알아요?”
민준이 물었다. 그의 눈이 우리를 찾았다.
우리가 깊게 숨을 쉬었다. 그리고 천천히 말했다.
“왜냐하면 당신은 지금 이 말을 들으려고 했거든. 당신은 누군가가 자신을 구해주길 원했거든. 그리고 당신은 강했거든. 4년을 버텼으니까.”
민준은 그 말을 들었다. 그의 귀가 그 말을 포착했다. 뇌가 그것을 처리했다. 하지만 마음이 믿지 않았다. 마음은 여전히 지하실에 갇혀 있었다.
“믿음은 나중에 올 수도 있는 거야.”
우리가 마치 그의 생각을 읽은 듯이 덧붙였다.
민준은 우리를 바라봤다. 우리의 얼굴은 밤의 그림자 속에 반쯤 가려져 있었다. 벤치 옆의 가로등이 불빛을 내뿜고 있었지만, 그것도 모든 것을 밝히지는 못했다. 어떤 진실은 어둠 속에서만 보인다. 민준은 그렇게 믿기로 했다.
“저는…”
민준이 다시 말했다.
“저는 갈게요. 집으로. 생각을 좀 해야 할 것 같아요.”
그의 목소리는 이전보다 조금 더 단단했다. 마치 그 말을 하는 것 자체가 그를 조금 더 견고하게 만드는 것처럼.
“응. 가.”
준호가 말했다. 그의 손가락이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댔다. 연기가 서서히 흩어졌다.
민준이 일어서려고 했다. 하지만 우리가 말했다.
“그리고 민준이…”
“응?”
“당신이 뭘 선택하든, 우리는 여기 있을 거야. 그건 기억해 줄래?”
그 말은 약속이었다. 조건부 사랑이 아닌, 무조건적인 것. 선택의 결과와 상관없이 계속될 것이라는 약속.
민PreparedStatement준은 답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돌아섰다. 그의 몸이 벤치에서 떨어졌다. 그의 발이 지면을 밟았다. 그리고 그는 걸어갔다. 강남역의 밤 속으로. 지하철 계단 쪽으로. 조명이 더 밝은 곳으로.
## 3부: 침묵의 언어
벤치에 남겨진 사람들은 준호와 우리였다.
민준의 뒷모습이 광장의 어둠 속으로 사라지자, 준호가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것은 담배 연기 같은 한숨이었다. 여러 겹의 감정이 섞여 있었다. 안도감, 죄책감, 그리고 끝나지 않은 무언가에 대한 불안감.
“우리가 충분했을까?”
준호가 물었다. 우리를 바라보지 않고, 광장의 어딘가를 바라보며.
우리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벤치의 차가운 나무를 손으로 쓸어내렸다. 누군가가 새겨놓은 흔적들—이름, 날짜, 사랑의 고백들—이 손가락 위를 지나갔다. 모두 누군가의 절망과 희망의 기록이었다.
“충분했는지 못 했는지는 아무도 모르는 거 같아.”
우리가 말했다.
“그럼 뭐 하려고 했어? 이런 걸 하면서?”
준호의 목소리에는 분노가 섞여 있었다. 자신을 향한 분노. 우리를 향한 분노. 이 세상을 향한 분노.
“누군가를 구할 수 있다는 환상을 버리기 위해서야.”
우리가 말했다.
“우리가 그걸 할 수 없다는 걸 알려주기 위해서야. 최종적으로는 그들의 선택이라는 걸.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그냥 옆에 있는 것뿐이라는 걸.”
시간이 흘렀다. 정확하게 몇 분이 흘렀는지는 알 수 없었다. 벤치에 앉은 사람들에게는 시간이 의미를 잃었다. 이 벤치는 시간 밖의 장소였다. 또는 모든 시간이 동시에 존재하는 장소였다. 과거의 사람들, 현재의 사람들, 미래의 사람들이 모두 이 벤치에 앉아 있었다.
준호는 다시 담배를 피웠다. 세 번째인지 네 번째인지 모를 정도로. 그의 손가락은 이미 담배 냄새로 물들어 있었다. 수년간 그 냄새를 머금고 있었을 것이다. 그것도 일종의 기억 방식이다. 몸에 각인된 기억.
“우리는 실패했어.”
준호가 말했다.
“응.”
우리가 답했다.
“그 사람을… 구하지 못했어.”
“응.”
“그럼 이건?”
준호가 자신의 손을 펼쳐 보였다. 손가락이 떨렸다.
“이것도 실패야.”
우리가 말했다. 목소리는 조용했지만, 명확했다.
“그럼 뭘…”
준호가 말을 시작했다가 멈췄다. 그것도 하나의 대화 방식이었다. 말해지지 않은 것들 사이의 대화. 침묵이 자신의 일부가 되는 경험.
“뭘 뭐해?”
우리가 준호의 말을 마저했다.
준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음악이 들려?”
우리가 갑자기 물었다.
준호가 귀를 기울였다. 광장의 소음들 사이를 헤쳐나갔다. 택시의 경적음, 젊은이들의 웃음소리, 어딘가에서 나오는 K-pop의 비트. 하지만 그 모든 것 아래에는 무언가가 있었다. 더 깊은 리듬이. 더 오래된 박자가.
“심장 소리야.”
우리가 말했다.
“누구의?”
준호가 물었다.
“모든 사람의. 이 광장에 있는 모든 사람의 심장이 함께 뛰고 있어. 너는 그걸 들을 수 있어. 집중하면.”
준호가 다시 귀를 기울였다. 그리고 정말로 들었다. 아니면 그렇게 생각하기로 결정했다. 그것도 충분했다. 우리의 뇌는 우리가 믿는 것을 들을 수 있게 해준다.
시간이 더 흘렀다. 자정이 지나서 1시 가 넘었을 것이다. 강남역의 밤은 끝나지 않고 있었다. 이 도시는 밤을 끝내는 법을 모른다. 또는 끝내고 싶지 않은 것이다.
우리는 여전히 벤치에 앉아 있었다. 준호도. 그들은 말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지금은 말할 시간이 아니었으니까. 지금은 그냥 함께 있는 시간이었다. 누군가를 구하려고 실패한 사람들이, 누군가를 구하려고 다시 시도하는 사이의 시간. 그리고 그 사이에는 침묵이 있었다.
음성보다 더 큰 침묵.
## 에필로그: 지하철 계단
민준은 강남역 지하철 계단을 내려가고 있었다. 계단 아래로 내려갈수록 공기가 달라졌다. 더 따뜻하고, 더 습하고, 더 많은 사람들의 냄새로 가득 찼다. 지하는 또 다른 세계였다. 위의 세상과는 다른 법칙으로 움직이는 세상.
그의 주머니에는 우리의 연락처가 적힌 종이가 있었다. 아직 버리지 않은 종이. 아직 꺼내지도 않은 종이.
민준은 플랫폼에 도착했다. 열차는 떠난 지 얼마 안 된 것 같았다. 다음 열차까지 6분. 그 시간 동안 민준은 벤치에 앉았다. 지하철의 벤치. 또 다른 벤치. 강남역 위의 벤치와 아래의 벤치는 다를까. 아니면 같을까.
민준은 편지를 다시 생각했다. 우리의 친구가 쓴 편지. 그 편지 속에는 무엇이 있었을까. 죄책감? 그리움? 아니면 단순한 안녕?
그 질문의 답은 아직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민준은 알았다. 준호와 우리가 말한 것이 맞다는 걸. 이것은 그의 선택이라는 걸. 그리고 그들은 여기 있을 것이라는 걸. 적어도 지금은. 적어도 이 밤은.
열차가 들어왔다. 문이 열렸다. 민준은 타지 않았다. 다음 열차를 기다렸다.
왜일까. 그 이유를 몰랐다. 하지만 그것도 괜찮았다. 이해할 수 없는 것도 있는 것이다. 이해하지 않고도 살아갈 수 있는 것도 있는 것이다.
위의 벤치에서, 준호와 우리는 여전히 앉아 있었다. 민준이 내려갔을 것이라는 걸 알면서도, 그들은 움직이지 않았다.
“가야 하지 않을까?”
준호가 물었다.
“아직 아니야.”
우리가 말했다.
“아직?”
“응. 아직 여기 있어야 해. 그 사람이 다시 올 때까지.”
“그 사람이 다시 올까?”
“모르지. 하지만 올 수도 있어. 그래서 우리는 여기 있어야 해.”
준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은 논리적이지 않았다. 하지만 올바른 것이었다. 그리고 때로 올바른 것이 논리를 이긴다.
밤은 계속 깊어지고 있었다. 강남역의 밤, 서울의 밤, 그리고 모든 사람의 밤. 그 안에는 수많은 선택이 있었다. 수많은 결정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 모든 결정 뒤에는, 누군가가 벤치에 앉아 기다리고 있었다.
아무 말도 없이, 아무 조건도 없이.
그냥 거기 있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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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