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트라이트: 제2막 – 제55화: 선택의 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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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55화: 선택의 무게

2억 5천만 원.

그 숫자는 카페의 공기 자체를 바꿔놨다. 마치 누군가 갑자기 온도를 떨어뜨린 것처럼. 민준의 손가락이 다시 떨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다른 종류의 떨림이었다. 추위나 피로 때문이 아니라, 순수한 공포. 자신이 얼마나 깊은 곳에 있었는지를 갑자기 깨닫는 공포.

준호는 스마트폰을 내려놨다. 메모장은 여전히 켜져 있었다. 그 숫자가 화면에 박혀 있었다. 마치 낙인처럼.

“형… 이게 정말이에요?”

민준이 물었다. 자신의 목소리가 어린아이처럼 들렸다.

“응. 이게 정말이야. 그리고 이것도 모르고 있었어?”

준호가 물었다. 그의 톤에는 놀라움과 안타까움이 섞여 있었다.

“네. 계약서를 제대로 읽지 않았어요. 첫 페이지… 두 페이지만 봤어요.”

민준이 대답했다. 그것도 진실이었다. 계약서를 받았을 때, 그의 눈은 첫 몇 줄에만 머물러 있었다. ‘넷플릭스 드라마 주연급 역할 보장’, ‘월급 500만 원 상향 조정’, ‘전속 계약 2년’. 그 이후는 읽지 않았다. 읽을 수 없었다. 마치 자신의 눈이 그 이상을 처리할 능력이 없었던 것처럼.

“미안해. 내가 너한테 명확하게 설명해주지 않았어.”

준호가 말했다. 그는 손으로 얼굴을 비볐다. 피로가 갑자기 드러났다. 아마 그도 밤을 샜을 거였다. 우리의 메시지를 받은 후로. 그리고 밤새 무엇을 생각했을까? 민준이 회의실 C에 가는 것을 막아야 할지, 아니면 그냥 놔둬야 할지. 자신의 책임과 민준의 선택 사이에서 흔들리면서.

“회의실 C에는 뭐가 있어요?”

민준이 다시 물었다. 이제 그는 그 장소를 마주할 준비가 되지 않았다. 그저 시간을 벌고 싶었다. 조금이라도 더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을.

“이수진이. 그리고 아마 회사 변호사. 그리고…”

준호가 말을 멈췄다.

“그리고?”

민준이 물었다.

“그리고 아마도 그 사람.”

준호가 대답했다. 그가 누군지 명시하지 않았지만, 민준은 알았다. 우리가 메시지로 보낸 그 기사. ‘전 배우 이수진, 신인 배우 성희롱 혐의로 합의’. 그 사건. 그리고 그 사건 뒤에 있는 사람.

“왜 그 사람이…”

민준이 물었다.

“아마도 이수진이가 너를 그 사건의 증인으로 만들려고 할 거야. 또는 반대로, 그 사건과 관련된 뭔가를 너한테 주려고 할 거야. 어느 쪽이든, 이것은 일반적인 계약 미팅이 아니야.”

준호가 설명했다.

민준은 그 말을 처리하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그의 뇌는 마치 느리게 돌아가는 영상처럼 작동하고 있었다. 모든 것이 서서히, 그리고 불명확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카페의 배경음악이 바뀌었다. 이번에는 더 빠른 템포의 재즈 음악이었다. 트럼펫 소리. 드럼. 베이스. 모든 악기가 동시에 움직이고 있었다. 마치 누군가가 민준의 심장을 악기로 변환해버린 것처럼.

“민준아, 내가 너한테 한 가지 물어보고 싶어.”

준호가 말했다.

“뭐요?”

민준이 물었다.

“너는 지금 이 상황에서, 가장 무서운 게 뭐야?”

준호가 물었다.

민준은 그 질문을 생각했다. 가장 무서운 것. 2억 5천만 원의 위약금? 아니면 회의실 C? 아니면 그 사람?

“제일 무서운 건…”

민준이 천천히 말했다.

“제가 이미 받아들여버린 거예요.”

“뭐가?”

준호가 물었다.

“이 모든 것. 이 계약. 이 드라마. 이 역할. 제가 이미 제 삶의 일부로 만들어버렸다는 거예요. 회의실 C에 가서 무언가를 거절하려고 해도, 제 심장은 이미 그것을 받아들이고 있어요.”

민준이 대답했다.

그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그 속에는 뭔가 깊은 깨달음이 있었다. 마치 물 아래에서 돌부리에 닿은 느낌처럼.

준호는 민준의 얼굴을 오래 봤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넌 이미 답을 알고 있다는 뜻이야.”

준호가 말했다.

“뭐요?”

민준이 물었다.

“넌 그 계약을 받아들일 거야. 그리고 회의실 C에 들어갈 거야. 그리고 그들이 요청하는 것을 할 거야. 왜냐하면 너는 이미 그렇게 하기로 결정했으니까.”

준호가 말했다.

“네. 제가 그렇게 하기로 결정했나요?”

민준이 물었다. 그 질문에는 아이러니가 있었다. 자신이 결정했다고 했는데, 그 결정이 자신의 것이 아닌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었다.

“너는 아버지 때문에 이 길을 걷고 있어. 맞지?”

준호가 물었다.

민준은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침묵이 대답이었다.

“아버지는 실패했어. 그리고 넌 아버지처럼 되고 싶지 않아. 그래서 넌 계속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 거야. 심지어 그것이 너를 파괴하는 방향이라고 해도.”

준호가 계속 말했다.

“형…”

민준이 말했다. 하지만 더 이상의 말은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너는 우리를 걱정하고 있어. 우리가 너 때문에 피해를 입을까봐. 그래서 넌 계속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 거야. 우리를 지키기 위해.”

준호가 계속 말했다.

“제가 형과 우리를 지킬 수 있나요?”

민준이 물었다. 그 질문에는 진정한 의문이 있었다. 자신이 정말로 누군가를 지킬 수 있는 능력이 있는가에 대한.

“아니. 넌 아무도 지킬 수 없어. 왜냐하면 넌 너 자신을 지키지 못하고 있으니까.”

준호가 대답했다.

그 말이 맞았다. 민준은 자신을 지킬 수 없었다. 자신의 몸도, 자신의 마음도, 자신의 미래도. 모든 것이 흘러가고 있었다. 마치 강에 떠내려가는 나뭇조각처럼.

준호는 스마트폰을 들었다. 시간을 확인했다. 오전 10시 47분.

“넌 2시까지 3시간 13분이 있어.”

준호가 말했다.

“뭘 해야 하나요?”

민준이 물었다.

“집에 가. 그리고 거울을 봐. 그리고 생각해봐. 정말로 너는 이것을 원하는가. 계약을 받아들이는 것을 말이야.”

준호가 말했다.

“생각하면 뭐가 달라져요?”

민준이 물었다.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을 거야. 넌 어쨌든 그곳에 갈 거야. 하지만 최소한 너는 자각해야 해. 너가 무엇을 선택하고 있는지를. 그것이 너와 나, 그리고 우리를 위해서 가장 중요한 거야.”

준호가 말했다.

민준은 테이블 위에 놓여 있는 아메리카노를 봤다. 이미 식어 있었다. 김도 나지 않고 있었다. 마치 죽은 것처럼. 그는 그것을 들었다. 입술에 가져갔다. 그리고 마셨다. 쓴 맛이 혀 위에 펼쳐졌다. 하지만 그는 계속 마셨다. 모두 마실 때까지.

잔이 비워졌다. 그리고 테이블 위에 다시 놓였다.

“형, 제 질문에 답해줄래요?”

민준이 말했다.

“뭐?”

준호가 물었다.

“형은 왜 저를 도왔어요? 정말로.”

민준이 물었다.

그것은 카페에서 처음으로 묻는 진정한 질문이었다. 다른 모든 질문들은 상황에 대한 것이었지만, 이 질문은 준호에 대한 것이었다.

준호는 오래 생각했다. 마치 자신의 내면을 들어다보는 것처럼. 그리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너를 봤을 때, 나는 너를 보고 싶었어. 내가 가지지 못한 것을 가진 누군가를 봤으니까. 그것이 뭔지는 모르지만, 뭔가 깨끗한 것. 그래서 나는 너를 도왔어. 하지만 그 과정에서 나는 너를 더 깊은 곳으로 밀어 넣었을 수도 있어. 그리고 그것을 깨달은 지금, 나는 너한테 미안해.”

준호가 말했다.

민준은 그 말을 들었다. 그리고 알았다. 준호도 갇혀 있다는 것을. 자신의 선택 때문에. 자신의 행동 때문에. 그리고 그것을 바꿀 수 없다는 것 때문에.

“형, 저는 형을 원망하지 않아요.”

민준이 말했다.

“왜?”

준호가 물었다.

“왜냐하면 형도 갇혀 있으니까. 저처럼.”

민준이 대답했다.

준호의 얼굴에 뭔가 파열되는 것 같은 표정이 흘렀다. 마치 자신이 오래 숨겨온 것을 누군가가 들춰낸 것처럼.

“나갈까?”

준호가 갑자기 말했다.

“어디로요?”

민준이 물었다.

“아무데나. 카페 밖. 햇빛 아래.”

준호가 말했다.

민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준호가 계산을 했다. 카드를 꺼내서. 웨이터에게 건네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카페 밖의 거리는 밝았다. 정오 근처의 햇빛이 강남역 주변의 콘크리트와 유리를 비추고 있었다. 사람들이 지나가고 있었다. 스마트폰을 들고 있는 사람들. 점심을 향해 걸어가고 있는 사람들. 자신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

“민준이는 배우가 되고 싶어?”

준호가 갑자기 물었다. 그들이 거리를 따라 걸으면서.

“네.”

민준이 대답했다.

“정말로?”

준호가 다시 물었다.

민준은 생각했다. 그것도 진정한 질문이었다. 정말로? 아니면 단지 살아남기 위해 그 길을 걷고 있는 것인가?

“모르겠어요.”

민준이 결국 말했다.

“그럼 그 대답을 가지고 회의실 C에 가. 그리고 기억해. 넌 아직도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을. 이수진이의 계약이 모든 것이 아니라는 것을.”

준호가 말했다.

하지만 그의 목소리에는 신뢰가 없었다. 마치 자신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이미 알고 있으면서도, 말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처럼.

그들은 계속 걸었다. 강남역 입구까지. 그리고 거기서 멈췄다.

“나는 사무실로 가야 해.”

준호가 말했다.

“네.”

민준이 대답했다.

“넌?”

준호가 물었다.

“집으로 가겠습니다.”

민준이 대답했다.

“그리고 거울을 봐.”

준호가 다시 말했다.

“네. 봐겠습니다.”

민준이 대답했다.

준호는 민준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잠깐. 그리고 떼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민준은 준호가 지하철 입구로 내려가는 것을 봤다. 그의 뒷모습이 계단 아래로 사라졌다. 그리고 민준은 혼자 남겨졌다. 강남역 입구에서. 햇빛 속에서. 오후 2시까지 2시간 40분을 남긴 채로.

그는 택시를 탔다. 준호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자신도 그것을 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자신의 반지하 방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을.

택시 안에서, 민준은 자신의 휴대폰을 들었다. 메시지 목록을 열었다. 우리의 메시지가 여전히 거기 있었다. ‘그곳은 이수진이가 중요한 계약이나 처벌이 필요한 직원들을 만나는 곳이야.’ 그리고 그 아래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우리가 더 이상 메시지를 보내지 않았다. 마치 할 말을 다했다는 듯이.

민준은 우리에게 메시지를 보내려고 했다. ‘감사합니다’라고. 또는 ‘죄송합니다’라고. 하지만 아무것도 보내지 않았다. 그냥 화면을 켜고 꺼고, 다시 켜고 꺼둘 뿐이었다.

택시가 시흥동 골목으로 들어섰다. 반지하 건물들이 보였다. 이곳은 서울의 가장자리였다. 강남과 강북의 경계 어딘가. 사람들이 빠르게 지나가지 않는 곳. 시간이 느리게 흘러가는 곳.

민준은 택시에서 내렸다. 그리고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반지하는 여전히 어둡고 차가웠다. 천장의 곰팡이도 여전히 그곳에 있었다. 손가락 크기의 얼룩. 마치 자신의 영혼을 상징하는 것처럼.

민준은 작은 거울을 들었다. 그리고 자신의 얼굴을 봤다.

눈 아래의 검은 자국. 콧대의 작은 여드름 흉터. 턱 아래의 수염. 모든 것이 여전히 그곳에 있었다. 하지만 무언가가 달라졌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뭔가 깊은 것이. 마치 자신이 밤새 무엇인가를 깨달았듯이.

그는 거울 속의 자신을 봤다. 오래.

“너는 뭐야?”

그가 중얼거렸다.

거울 속의 얼굴은 대답하지 않았다. 단지 자신을 바라볼 뿐이었다. 조용히. 깊게.

민준은 거울을 내려놨다. 그리고 침대에 누웠다. 천장의 곰팡이를 봤다. 그리고 생각했다.

오후 2시. 회의실 C.

그곳에서는 무엇이 일어날까? 그리고 그 이후, 자신의 삶은 어떻게 될까?

그는 모르고 있었다. 하지만 한 가지는 알았다. 준호가 말했던 그 말. 너는 선택할 수 있다고. 그것이 거짓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 거짓마저도, 자신에게는 필요하다는 것을.

시간이 흘렀다. 오후 1시. 오후 1시 30분. 오후 1시 45분.

민준은 일어났다. 샤워를 했다. 옷을 입었다. 가장 깔끔한 옷을. 검은 셔츠. 검은 바지. 마치 누군가를 만나러 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장례식에 가는 것처럼.

오후 1시 55분. 민준은 반지하를 나갔다.

회사로 향하는 길은 길었다. 지하철. 강남역. 대로. 그리고 마침내, 더스타 엔터테인먼트 빌딩.

민준은 건물 앞에 섰다. 유리 입구. 로비. 리셉션 데스크. 엘리베이터.

오후 2시 정각. 문자가 들어왔다.

“회의실 C는 지하 2층입니다.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수진이로부터.

민준은 엘리베이터를 눌렀다. 그리고 내려갔다. 지하 2층으로.

도어가 열렸다.

그곳에는 회의실 C가 있었다.

그리고 그 안에는 이수진이가 있었다. 그리고 옆에는 또 다른 사람이 있었다. 여자. 나이는 40대쯤. 민준은 그 얼굴을 본 적이 있었다. 어디서? 뉴스 기사에. 우리가 보여준 그 기사에. ‘전 배우 이수진, 신인 배우 성희롱 혐의로 합의’.

그 사람의 얼굴이었다.

민준은 문을 밀고 들어갔다.

“안녕하세요.”

그가 말했다. 자신의 목소리가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낮게.

“자리에 앉아.”

이수진이가 말했다.

민준은 앉았다.

그리고 그 순간, 모든 것이 시작되었다.

# 경계의 시간

## 제1부: 귀향

북의 경계 어딘가. 사람들이 빠르게 지나가지 않는 곳. 시간이 느리게 흘러가는 곳.

그곳은 서울의 변두리였다. 강변을 따라 늘어선 낡은 빌딩들, 비좁은 골목, 그리고 사람들의 얼굴에 맺힌 피로. 민준은 택시의 뒷좌석에 몸을 파묻고 창밖을 봤다. 회색 빌딩, 회색 하늘, 회색 거리. 마치 이 도시 전체가 흑백사진처럼 느껴졌다.

“여기입니다.”

택시 기사의 목소리가 들렸다. 민준은 돈을 내밀고 차에서 내렸다. 발바닥이 딱딱한 포장도로에 닿는 감각. 그것도 무언가 다르게 느껴졌다. 마치 이전의 자신이 밟던 땅과는 다른 종류의 땅처럼.

반지하 골목으로 향하는 계단을 내려갔다. 한 계단, 또 한 계단. 햇빛이 점점 멀어지고, 습기가 피부에 차근차근 밀려오기 시작했다. 콧속으로 들어오는 그 특유의 냄새. 곰팡이와 오래된 물기. 그리고 자신의 영혼 같은 것.

방문을 열었다.

반지하는 여전히 어둡고 차가웠다. 창문 너머로 보이는 것은 사람들의 발목뿐. 누군가 지나갈 때마다 그림자가 흘러갔다. 마치 자신이 이 도시의 무의식 속에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천장을 봤다. 그곳의 곰팡이도 여전히 있었다. 손가락 크기의 얼룩들이 마치 별자리처럼 흩어져 있었다. 지난 6개월 동안 그것들을 매일 봤다. 아침에 일어나 천장을 보고, 밤에 잠을 자기 전에도 천장을 봤다. 그 얼룩들은 마치 자신의 영혼을 상징하는 것처럼, 점점 더 짙어지고 퍼져가고 있었다.

민준은 책상 위에 놓인 작은 거울을 들었다. 몇 달 전에 편의점에서 사온 것. 가격은 3천 원. 그것도 이제는 변색되었다.

거울 속의 얼굴을 봤다.

눈 아래의 검은 자국. 계속되는 밤샘과 불안감이 새겨놓은 자국들. 콧대의 작은 여드름 흉터들. 고등학교 때부터 있던 것들. 턱 아래의 수염. 5일을 깎지 않은 수염.

모든 것이 여전히 그곳에 있었다. 하지만 무언가가 달라졌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명확하지 않았다. 하지만 뭔가 깊은 것이, 눈의 안쪽에 있었다. 마치 자신이 밤새 무언가를 깨달았듯이. 또는 무언가를 잃어버렸듯이.

“너는 뭐야?”

그가 중얼거렸다. 자신의 목소리가 반지하의 침묵을 깨뜨렸다. 거울 속의 얼굴은 대답하지 않았다. 단지 자신을 바라볼 뿐이었다. 조용히. 깊게. 마치 다른 사람이 자신을 바라보는 것처럼.

거울을 내려놨다.

침대에 누웠다. 침대는 좁았다. 몸을 약간 옆으로 누워야 발이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천장의 곰팡이를 다시 봤다. 그리고 생각했다.

*오후 2시. 회의실 C.*

그곳에서는 무엇이 일어날까? 준호가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을까? 아니면 이수진이? 아니면… 다른 누군가?

그리고 그 이후, 자신의 삶은 어떻게 될까? 더 나빠질까? 그럴 리가 없다. 더 이상 나빠질 수 없다. 자신은 이미 바닥에 있다. 반지하의 바닥에. 삶의 바닥에.

하지만 한 가지는 알았다. 준호가 말했던 그 말. 문자로 보낸 그 짧은 메시지. *너는 선택할 수 있다.*

그것이 거짓이라는 것을. 선택? 자신이 뭘 선택했는가? 자신은 줄곧 선택당했을 뿐이다. 부모님이 선택해준 학교, 학교가 선택해준 길, 회사가 선택해준 직급. 그리고 이수진이가 선택해준 이 상황.

선택? 그런 것은 없다.

그런데도 준호가 말한 그 거짓이, 자신에게는 필요했다. 거짓이어도 좋았다. 거짓이기 때문에 좋았다. 왜냐하면 진실은 너무 무겁고, 거짓은 가볍기 때문이다.

시간이 흘렀다.

오후 1시. 민준은 여전히 천장을 봤다. 곰팡이는 움직이지 않았다. 움직일 리가 없다. 곰팡이는 계속 자라고, 계속 퍼져간다.

오후 1시 30분. 민준은 일어났다. 샤워를 해야 했다. 회의실에 가기 전에. 누군가를 만나기 전에. 자신을 조금이라도 더 정상처럼 보이게 만들기 위해.

욕실은 더욱 좁았다. 샤워 부스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그곳. 물은 찬물이었다. 보일러는 이미 몇 달 전부터 고장 났다. 수리비를 낼 돈이 없었다. 찬물이 피부에 닿는 순간, 온몸이 움츠러들었다. 하지만 그것도 좋았다. 피부의 모든 털이 곤두선다. 자신이 살아있다는 증거.

비누로 몸을 씻었다. 저렴한 비누. 향기는 거의 없었다. 하지만 거품은 났다. 하얀 거품이 몸을 감싸고, 씻겨 내려갔다. 마치 자신이 조금씩 사라지는 것처럼.

거울 앞에서 면도를 했다. 면도기는 이미 세 번째 칼날을 사용 중이었다. 턱 아래의 수염을 조심스럽게 깎아냈다. 한 줄씩. 살갗이 드러났다. 하얀 살갗. 그곳에는 아직 온기가 남아있었다.

옷을 입었다.

옷장에는 많지 않았다. 회사 정장 두 벌, 청바지 세 개, 셔츠 다섯 개. 그 정도였다. 그 중에서 가장 깔끔한 옷을 선택했다. 검은 셔츠. 검은 바지. 검은 구두.

거울을 봤다. 마치 누군가를 만나러 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장례식에 가는 것처럼 보였다.

오후 1시 45분. 민준은 방을 떠났다.

## 제2부: 여정

지하철 역으로 가는 길은 비좁았다. 골목을 지나면서 사람들의 얼굴을 봤다. 대부분 자신처럼 피곤해 보였다. 누군가는 담배를 피웠다. 누군가는 휴대폰을 봤다. 누군가는 그냥 앞만 봤다. 이 도시의 사람들은 모두 어딘가로 향하고 있었다. 하지만 누가 어디로 가는지, 그리고 왜 가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지하철을 탔다. 오후 2시 근처의 지하철은 한산했다. 민준은 앉았다. 맞은편에는 한 할머니가 있었다. 할머니는 창밖을 봤다. 검은 터널이 지나가고, 또 다른 역이 보였다. 할머니의 얼굴에는 표정이 거의 없었다. 아마도 할머니도 어딘가로 향하고 있는 중이었을 것이다. 또는 돌아오고 있는 중이었을 것이다.

강남역에서 내렸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갔다. 한 계단, 또 한 계단. 햇빛이 점점 가까워졌다. 그리고 마침내 지표면에 도달했다.

강남역 주변은 언제나처럼 붐볐다. 사람들의 목소리, 자동차의 경적음, 건설음. 모든 것이 뒤섞여 있었다. 민준은 길을 건넜다. 신호등이 녹색으로 바뀔 때까지 기다렸다. 그리고 건넜다.

대로를 따라 걸었다. 높은 빌딩들이 양옆으로 늘어서 있었다. 유리로 된 빌딩들. 그 안에는 수천 개의 사무실이 있었고, 그 안에는 수만 개의 책상이 있었고, 그 책상 위에는 수십만 개의 꿈과 절망이 쌓여있었다.

더스타 엔터테인먼트 빌딩이 보였다.

민준의 발걸음이 느려졌다. 심장이 빨라졌다. 가슴이 철렁했다. 마치 절벽 앞에 서 있는 것처럼.

건물 앞에 섰다.

유리 입구. 투명한 유리 너머로 로비가 보였다. 사람들이 지나가고 있었다. 모두들 바빴다. 모두들 자신의 일에 몰두하고 있었다. 아무도 민준을 보지 않았다. 아무도 민준이 무엇을 하려고 하는지 궁금해하지 않았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로비는 생각보다 크지 않았다. 하지만 높았다. 천장이 아주 높았다. 마치 성당처럼. 그 높은 천장 아래에서 민준은 아주 작아 보였다. 자신도 그것을 느낄 수 있었다. 자신이 얼마나 작은 존재인지.

리셉션 데스크가 있었다. 직원이 한 명 앉아있었다. 젊은 여자. 아마도 스물다섯, 여섯쯤 될 것 같았다. 그녀는 컴퓨터를 보고 있었다. 민준을 보지 않았다.

“안녕하세요. 회의실 C로 가려고 하는데요.”

민준이 말했다.

여직원은 고개를 들었다.

“이름을 말씀해주실 수 있나요?”

“민준입니다. 김민준.”

여직원은 컴퓨터를 확인했다.

“아, 네. 지하 2층으로 가시면 됩니다. 엘리베이터는 저쪽입니다.”

“감사합니다.”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스테인리스 스틸로 된 엘리베이터. 그 안에 자신의 모습이 반사되었다. 검은 옷을 입은 자신. 창백한 얼굴. 그리고 눈. 그 깊고 어두운 눈.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B2.

문이 닫혔다.

엘리베이터가 내려가기 시작했다.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내려가고 있었다. 지표면 아래로. 지하로. 또 다른 어둠으로.

숫자가 점점 내려갔다. 1, 0, B1, B2.

*띵.*

문이 열렸다.

## 제3부: 만남

회의실 C가 보였다. 복도 끝에. 유리로 된 문.

그 안에는 두 사람이 있었다.

이수진이. 그리고 또 다른 여자. 나이는 40대쯤. 짧은 머리. 검은 옷. 민준은 그 얼굴을 본 적이 있었다.

뉴스 기사에. 인터넷 기사에. 그들이 보여준 그 기사에.

*“전 배우 이수진, 신인 배우 성희롱 혐의로 합의”*

그 기사의 사진. 그 여자의 얼굴. 여기서 만나게 될 줄은 몰랐다.

민준은 문을 밀고 들어갔다.

“안녕하세요.”

그가 말했다. 자신의 목소리가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낮게. 마치 속삭이는 것처럼.

“자리에 앉아.”

이수진이가 말했다. 그 목소리에는 위협이 없었다. 오직 차가움만 있었다. 마치 겨울 바람처럼 차갑고, 마치 죽음처럼 고요한.

민준은 앉았다.

테이블 앞에. 회의실의 불빛 아래. 그 두 사람의 시선 아래.

“이게 뭐 하는 건지 알아?”

이수진이가 물었다.

“…알겠습니다.”

민준이 대답했다.

“알겠다니? 넌 아무것도 모르지.”

이수진이가 몸을 앞으로 숙였다.

“너는 그저 우리가 시킨 대로 할 뿐이야. 넌 선택권이 없어. 처음부터 없었어. 이해했어?”

민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말로 대답해.”

“네. 이해했습니다.”

옆에 앉은 여자가 말했다.

“이 친구가 당신 말이에요?”

이수진이가 대답했다.

“네. 이 친구가 그 기사를 썼던 기자의 정보를 준 사람이에요.”

“아.”

여자가 민준을 다시 봤다. 그 눈빛이 차갑게 변했다. 마치 자신을 보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 혐오스러운 것을 보는 것처럼.

“너 왜 그랬어? 돈을 받았어? 아니면 누군가가 협박했어?”

민준은 대답하지 못했다.

“말해.”

“저… 잘 모르겠습니다.”

“잘 모르다고? 너는 사람의 인생을 망쳤는데?”

여자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당신이 그 기사 때문에 얼마나 많은 것을 잃었는지 알아? 내 경력? 내 명예? 내 돈? 내 삶?”

민준은 침을 삼켰다. 목이 말랐다.

“죄송합니다.”

“죄송하다고? 죄송함이 뭘 하는데? 내 인생을 돌려놔?”

이수진이가 손을 들었다.

“진정해요. 지금 그것 때문에 여기 온 게 아니니까요.”

이수진이가 민준을 봤다.

“우리가 너를 부른 건 다른 이유가 있어. 너는 그 기자를 알지?”

“네. 알겠습니다.”

“그 기자는 지금 다른 기사를 준비하고 있어. 우리에 대한 또 다른 폭로. 더 심각한 것들. 이해했어?”

“네.”

“우리는 그것을 막고 싶어. 그러려면 그 기자가 우리를 협박할 증거를 가져야 해. 그게 뭔지 알아?”

민준은 알았다. 이미 준호가 말해줬으니까. 하지만 말하지 않았다.

“모르겠습니다.”

“사진이야. CCTV 영상. 그 기자가 우리와 뭔가 거래를 하는 듯한. 우리가 그 기자를 협박하는 것처럼 보이는 그런 증거 말이야.”

민준의 심장이 또다시 빨라졌다.

“그런데 문제가 있어. 그런 증거가 없거든. 그래서 우리가 만들기로 했어. 너를 이용해서.”

“…뭘 하라는 건데요?”

“내일 그 기자를 만나. 그리고 우리의 요구를 전달해. 만약 그 기사를 쓰지 않으면, 우리가 알고 있는 그의 불법적인 취재 방법들을 폭로하겠다고. 그리고 그 장면을 CCTV에 찍게 해. 그럼 마치 우리가 그 기자를 협박하는 것처럼 보일 거야. 그리고 그것으로 충분해. 법적으로 대응할 근거가 생기니까.”

민준은 입을 열었다. 하지만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이건 많은 돈이 필요한 일이야. 그래서 우리가 너한테 줄 수 있는 것도 많아. 천만 원. 처음 미션을 완료하면.”

“그런데 만약…”

민준이 간신히 말했다.

“만약 뭔데?”

“만약 제가 거절하면요?”

이수진이와 여자가 서로 눈을 맞췄다. 그리고 웃었다. 차갑게. 무섭게.

“거절? 넌 이미 거절할 수 없어. 넌 우리의 손에 있거든. 넌 기자한테 정보를 줬어. 그건 뇌물죄야. 그리고 그 기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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