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39화: 휴대폰 너머의 선택
민준의 손가락이 화면을 향해 움직였다. 천천히. 마치 그것이 자신의 삶을 결정하는 버튼이라도 되는 것처럼. 우리의 휴대폰. 그 안에 있는 메모. “연기를 그만두는 방법”이라는 제목의 글.
손가락이 화면에 닿기 전, 민준은 멈췄다.
카페의 소리가 돌아왔다. 에스프레소 머신의 쉿 소리, 누군가의 웃음, 뒤편 테이블에서의 대화들. 5월의 햇빛이 창문을 통해 들어왔고, 그 빛이 우리의 얼굴을 반으로 나누었다. 빛이 닿은 부분은 피곤해 보였고, 그림자가 진 부분은 더 어두워 보였다.
“읽지 말아요.”
민준이 말했다. 자신도 놀라는 목소리였다. 그 말이 자신의 입에서 나올 줄은 몰랐다.
우리가 고개를 들었다. 놀라움이 얼굴에 드러났다. 마치 자신이 민준의 거절을 예상하지 못했던 것처럼. 아니면 그 거절 자체가 새로운 종류의 충격이었던 것처럼.
“왜?”
우리가 물었다. 그 질문은 단순했지만, 그 안에는 무언가 절박한 것이 담겨 있었다. 마치 우리가 민준의 답을 필요로 하는 것처럼. 우리가 자신의 선택의 정당성을 확인받고 싶은 것처럼.
민준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우리의 눈을 봤다. 그 눈 아래의 검은 자국. 밤을 지새운 사람의 눈. 하지만 그것은 단순한 피로가 아니었다. 그것은 무언가를 잃고 있는 과정에서 나오는 눈빛이었다. 자신의 존재를 천천히 포기하고 있는 사람의 눈.
민준은 자신의 손을 다시 내렸다. 테이블 위에 놓았다. 그리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당신이 그 글을 쓰고 있다면, 당신은 이미 결정했다는 거예요. 당신은 이미 연기를 그만두기로 했다는 거예요. 그런데 왜 나한테 보여줘요?”
우리가 대답하지 않았다. 휴대폰을 다시 집었다. 화면을 껐다. 어둠이 화면을 감싸 안았다.
“왜냐하면…”
우리의 목소리가 매우 작았다. 카페의 소음 속에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왜냐하면 내가 혼자가 아니기를 원했거든.”
그 문장이 공중에 떨어졌다. 마치 무거운 돌처럼. 민준은 그 돌이 자신의 가슴에 떨어지는 것을 느꼈다.
“당신은 혼자가 아니에요.”
민준이 말했다. 자신도 모르게.
“정말?”
우리가 웃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그것은 웃음이 아니었다. 울음에 가까운 무언가. 마치 자신의 몸이 울고 싶어 하는데, 눈에서 눈물이 나오지 않는 사람의 움직임.
“넌 준호를 알지? 우리 회사의 준호.”
민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알았다. 더스타 엔터테인먼트의 준호 배우. 8년 경력의 중견 배우. 드라마의 2번 주인공을 자주 하는 배우. 최근 극영화로 배우상 후보에도 올랐던 배우.
“준호도 나처럼 어려운 시기가 있었어. 약 5년 전. 그때 준호는 주연을 못 받는 것에 대해 극도로 불안해했어. 그래서 자신을 더 드러내려고 했어. 더 화려한 옷을 입고, 더 유명한 감독들과 작업하려고 했어. 그리고 그 과정에서 준호는 자신을 잃어버렸어.”
우리가 커피를 마셨다. 이미 차가워진 커피. 얼굴을 찌푸렸지만, 마시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그때 나는 준호한테 뭐라고 했는지 알아? 나는 준호한테 이렇게 말했어. ‘너는 지금 죽어가고 있다. 멈춰. 멈추고 자신을 찾아봐.’ 라고. 그런데 준호는 나 말을 안 들었어. 계속 달렸어. 그리고 어느 날, 준호는 그 달리기에서 넘어졌어.”
“넘어졌다는 게?”
민준이 물었다.
“준호가 우울증에 걸렸어. 극도의 우울증. 한 달을 거의 침대에서만 지냈어. 그리고 회사는 그런 준호를 버렸어. 몇 달 동안 아무 역할도 주지 않았어. 준호는 자신이 끝났다고 생각했어. 그 정도까지 간 거야.”
우리가 민준을 봤다. 그 눈빛에는 무언가 간청하는 것이 있었다.
“그런데 준호는 다시 일어났어. 왜냐하면 준호는 혼자가 아니었거든. 자신을 지켜주는 사람이 있었거든.”
“누구요?”
“나야. 나는 준호가 침대에 누워 있을 때 매일 그 병실로 찾아갔어. 밥을 챙겨주고, 이야기를 듣고, 같이 울었어. 그리고 준호는 천천히 다시 일어났어. 이제는 아무 역할이나 받지 않아. 자신이 정말로 하고 싶은 역할만 받아. 그리고 그 과정에서 준호는 더 좋은 배우가 됐어.”
민준은 우리의 말을 듣고 있었다. 하지만 자신의 머리 속에서는 다른 생각이 맴돌고 있었다. 우리가 말하고 있는 것이 조언이 아니라, 간청이라는 것. 우리가 자신에게 바라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우리가 자신에게 되어주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당신은 지금 저한테 무엇을 바라고 있어요?”
민준이 직접 물었다. 우리는 웃음을 지었다. 진짜 웃음. 처음으로 진짜 웃음.
“넌 영리해. 정말로.”
“답해주세요.”
우리가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테이블 위에 손을 올렸다. 민준도 자신의 손을 올렸다. 둘의 손이 테이블 위에서 만났다. 만지지는 않았지만, 거의 닿을 정도로 가까워졌다.
“나는 지금 이 결정을 내리고 있어. 연기를 그만두기로. 하지만 나는 혼자가 아니고 싶어. 나는 누군가가 내 손을 잡아주기를 원해. 그리고 그 누군가가 너였으면 좋겠어. 너는 아직도 선택할 수 있잖아. 나처럼 깊게 빠지지 않았으니까. 너는 이 길에서 빠져나갈 수 있어. 그리고 내가 보여줄게. 이 길에서 어떻게 살아남는지를. 내가 이미 그것을 배웠으니까.”
민준은 우리의 손을 봤다. 그 손가락이 테이블 위에서 떨리고 있었다. 불안감. 두려움. 그리고 무언가 절박한 것.
“당신이 연기를 그만두면, 당신은 뭘 할 거예요?”
“모르겠어. 아직은.”
“그럼 그 길이 정말 맞는 길이에요?”
우리가 웃음을 멈췄다. 민준의 질문이 자신의 모든 것을 흔들었다.
“모르겠어. 하지만 지금 내가 하고 있는 길이 죽음의 길이라는 건 확실해. 그래서 나는 빠져나갈 거야. 어디로 가는지 모르지만, 이 길에서는 나갈 거야.”
“혼자요?”
“혼자가 아니길 바라면서.”
민준은 우리의 손을 집었다. 온도를 느꼈다. 따뜻한 손. 하지만 그 손가락은 계속 떨리고 있었다. 마치 추위에 떠는 것처럼.
“당신은 아직도 기회가 있어요.”
민준이 말했다.
“이 뮤지컬을 그만두는 건, 그것이 모든 게 아니에요. 당신은 아직도 배우일 수 있어요. 다른 종류의 배우로. 당신이 정말로 원하는 배우로.”
“그런 건 없어. 이 업계에는 다른 종류의 배우가 없어. 있는 것은 성공한 배우와 실패한 배우뿐이야.”
“그건 거짓이에요.”
민준의 목소리가 강해졌다. 자신도 놀라는 정도로.
“당신을 보고 있으면, 나는 당신이 정말로 배우라는 걸 느껴요. 당신이 무대에서 하는 모든 것들이 거짓이 아니라는 걸 느껴요. 왜냐하면 당신이 지금 내 앞에서 하는 이 모든 행동들도, 당신의 모든 진정한 감정이 드러나 있거든. 당신은 아직도 배우일 수 있어요. 더 나은 배우로.”
우리가 눈을 감았다. 그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마침내. 드디어.
“넌 왜 그렇게 말해줘?”
“왜냐하면 당신이 혼자가 아니니까요.”
민준은 우리의 손을 더 세게 잡았다. 테이블 위에서. 카페의 소음 속에서. 5월의 햇빛 속에서. 둘은 서로의 손을 잡고 있었다.
그때, 민준의 휴대폰이 울렸다.
카톡 알림음. 하지만 그것은 카톡이 아니었다. 전화였다. 전화 벨소리가 계속 울렸다. 민준은 휴대폰을 집으려고 손을 놓았다. 우리도 손을 놓았다.
화면을 봤다. 발신자의 이름이 떠 있었다.
‘준호’
민준이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그 반대편에서 준호의 목소리가 들렸다. 낮고, 침착하지만 무언가 긴장된 목소리.
“민준아, 지금 어디 있어?”
“카페에 있는데…”
“지금 회사로 와. 빨리. 이수진이가 너를 찾고 있어. 그리고 준비해야 할 게 많다고 했어.”
“뭘요?”
“너의 역할이 확정됐대. 대형 영화야. 넷플릭스 드라마에서 나 바로 다음 급의 역할. 촬영은 다음 달부터.”
민준은 대답할 수 없었다. 우리를 봤다. 우리도 민준을 보고 있었다. 그 눈빛이 변했다. 미세하게. 무언가가 깨어나는 것 같은 눈빛.
“민준아? 들려?”
준호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네, 들려요.”
“그럼 지금 와. 이수진이가 너한테 직접 설명하고 싶대. 그리고… 조심해야 할 것도 있다고.”
전화가 끝났다. 민준은 휴대폰을 내려놓았다.
“가야 하나요?”
우리가 물었다. 그 목소리가 매우 작았다.
“네.”
“그럼 가. 그리고…”
우리가 테이블 위의 휴대폰을 들었다. 메모 앱을 열었다. “연기를 그만두는 방법”이라는 제목의 글.
“그리고 그 글을 다시 읽지 마. 내가 쓴 이 글은 내 선택일 뿐이야. 너의 선택은 아니야.”
“그럼 당신은?”
“나는 내 길을 가. 넌 너의 길을 가. 우리는 다른 길을 갈 거야. 하지만…”
우리가 민준의 손을 다시 잡았다.
“하지만 우리는 같은 길에서 만난 사람들이야. 그리고 그것만으로도 충분해.”
민준은 우리의 손을 잡고 있었다. 테이블 위에서.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다.
“당신도 살아남아요. 어떤 길을 가든.”
“약속할게.”
우리가 웃음을 지었다. 이번에는 진짜 웃음. 극도의 슬픔을 담은 진짜 웃음.
민준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리의 손을 놓았다. 카페를 나가려고 했다. 하지만 문 앞에서 멈췄다.
돌아서서 우리를 봤다. 테이블에 앉아 있는 우리. 창밖의 햇빛이 우리의 얼굴을 반으로 나누고 있었다.
“당신이 연기를 그만두든 안 하든, 당신은 훌륭한 배우예요.”
그 말을 남기고, 민준은 카페를 나갔다.
회사로 가는 길. 택시 안에서. 민준은 창밖을 봤다. 서울의 거리. 5월의 햇빛. 사람들. 자동차. 모든 것들이 계속 움직이고 있었다. 세상은 멈추지 않는다. 누군가가 빠져나가도, 누군가가 새로운 길을 가도.
그의 휴대폰이 울렸다. 이번에는 카톡이었다.
발신자: 이수진 대표
메시지: “기다리고 있다. 서둘러.”
민준은 휴대폰을 내려놓았다. 손가락이 떨렸다. 하지만 이번에는 두려움 때문이 아니었다.
뭔가 시작되고 있었다. 자신도 모르게.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택시가 더스타 엔터테인먼트 건물 앞에 멈췄다. 민준은 차에서 내렸다. 건물의 유리 문을 통해 안이 보였다. 사람들. 직원들. 그리고 그 중 어딘가에 이수진 대표가 있을 것이다.
민준은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문으로 들어갔다.
엘리베이터가 올라간다. 1층, 2층, 3층, 4층. 그의 마음도 함께 올라가고 있었다. 두려움과 기대감이 섞인. 무언가 깨어나고 있는 것 같은 느낌.
5층. 임원진이 있는 층.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그리고 그 순간, 민준은 깨달았다. 우리가 말했던 것이 맞다는 것을. 이 업계는 죽음의 길이라는 것. 하지만 동시에, 이 길은 자신이 살아있다고 느끼는 유일한 길이라는 것도. 그 모순 속에서, 그는 계속 걸어가야 할 것이라는 것도.
엘리베이터 문이 닫혔다.
시간이 흘렀다. 몇 분. 아니면 몇 시간. 민준은 회의실 앞에 서 있었다. 이수진 대표의 목소리가 안에서 들렸다.
“들어와.”
민준은 문을 열고 들어갔다.
회의실 안에는 이수진 대표가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준호가 있었다. 준호가 민준을 봤다. 눈빛이 뭔가를 말하고 있었다. 경고인가, 아니면 응원인가.
“앉아.”
이수진이 말했다. 그 목소리는 차분했다. 하지만 그 안에는 무언가 강한 힘이 있었다.
민준은 앉았다. 테이블 위에는 서류가 놓여 있었다. 계약서인 것 같았다.
“너는 우리가 준비한 역할을 받을 거다. 이것은 네 인생을 바꿀 기회다. 또는 네 인생을 완전히 파괴할 기회다. 둘 중 하나야.”
이수진이 서류를 민준 쪽으로 밀었다.
“그리고 너는 지금 선택해야 한다. 이 기회를 받을 건지, 아니면 거절할 건지. 하지만 거절하면, 넌 이 회사에서 끝이다. 알겠지?”
민준은 서류를 봤다. 그것은 계약서였다. 그리고 그 위에는 영화의 제목이 크게 적혀 있었다.
“Spotlight: The Second Act”
민준은 그 제목을 읽었다. 그리고 그 순간, 자신의 모든 것이 변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이 영화에서 넌 2번 주인공을 할 거다. 젊은 배우의 역할. 그리고 이 역할은 준호처럼 너를 중견 배우로 만들어줄 거다. 또는 너를 완전히 망쳐버릴 거다. 왜냐하면 모든 것이 너에게 달렸기 때문이야.”
“왜 저를 선택했어요?”
민준이 물었다.
“왜냐하면 넌 죽음을 아는 배우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역할은 죽음을 표현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수진이 웃음을 지었다. 그것은 친절한 웃음이 아니었다. 비즈니스의 웃음. 사냥꾼의 웃음.
“그래서 넌 할 거지? 이 역할을?”
민준은 대답해야 했다. 하지만 그의 입은 움직이지 않았다. 우리의 말이 귓가에 맴돌았다. “이것도 똑같은 덫이야. 너는 그것을 모를 수도 있지만, 나는 안다.”
그리고 동시에, 다른 목소리도 들렸다. 자신의 목소리. “당신은 훌륭한 배우예요.”
민준은 입을 열었다.
“네. 하겠습니다.”
이수진이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펜을 민준 쪽으로 밀었다.
“그럼 서명해.”
민준은 펜을 집었다. 손이 떨렸다. 하지만 서명했다.
그 순간, 자신의 인생이 다시 시작되는 것 같았다. 아니면 끝나는 것 같았다.
펜이 종이 위에 떨어졌다. 검은 잉크가 흰 종이 위에 자신의 이름을 새겼다.
Min-jun Park.
그것이 끝이었다. 또는 시작이었다. 자신도 모를 일이었다.
준호가 민준을 봤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눈빛이 뭔가를 말하고 있었다. 말이 아닌 다른 언어로.
“잘했어.”
그 말이 들렸을 수도 있고, 안 들렸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민준은 그 말을 들었다.
회의실을 나가는 길. 복도. 엘리베이터. 지하.
민준은 계단을 내려갔다. 3층. 2층. 1층. 그리고 지하.
지하의 연습실. 그곳이 자신의 처음이었다. 엑스트라로 연습하던 그곳.
지하의 스튜디오에는 거울이 있었다. 그 거울 앞에 민준은 섰다.
거울 속의 자신을 봤다. 174cm, 마른 체형, 밝은 갈색 눈. 극도로 평범한 얼굴. 그 얼굴이 거울 속에서 자신을 봤다.
“너는 누구야?”
민준이 거울에 물었다.
거울 속의 자신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극도로 피곤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봤다.
그 순간, 민준의 휴대폰이 울렸다.
발신자: 우리
메시지: “정신 차려. 너는 지금 누군가의 기댓값이 돼버렸어. 그리고 그것이 너를 죽이거나 살릴 거야. 조심해.”
민준은 메시지를 읽었다. 그리고 거울을 다시 봤다.
거울 속에서, 그의 모습이 천천히 변하는 것처럼 보였다. 평범한 배우에서 뭔가 다른 것으로.
혹은 그것은 환상일 수도 있었다.
거울은 여전히 그의 평범한 얼굴을 비추고 있었다.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 오직 시간만 흘렀다.
그리고 이제, 그의 제2막이 시작되려고 하고 있었다.
END OF CHAPTER 39
# 제2막의 시작
## Chapter 39 확장판
회의실의 공기는 차갑고 건조했다. 마치 영화 세트장처럼 인위적으로 조절된 온도 속에서, 민준은 이수진의 마지막 말을 듣고 있었다.
“…그래서 넌 할 수밖에 없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수진의 목소리는 낮고 단호했다. 그녀는 책상 너머에서 민준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그 시선은 마치 현미경 아래의 표본을 관찰하는 과학자의 눈빛 같았다. 민준은 자신의 심장이 가슴 안에서 불규칙하게 뛰고 있음을 느꼈다. 손에서 미세한 땀이 맺혀 있었다.
이수진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것은 친절한 웃음이 아니었다. 민준은 그 웃음의 종류를 정확히 알고 있었다. 그는 연기 학원에서 감정 표현을 배울 때 이런 웃음을 배웠다. ‘비즈니스의 웃음.’ 또는 ‘사냥꾼의 웃음.’ 포식자가 먹이를 발견했을 때 내는 웃음이었다.
“그래서 넌 할 거지? 이 역할을?”
이수진의 질문은 사실 질문이 아니었다. 그것은 선언이었다. 민준은 이미 그녀의 손바닥 위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언제부터였을까? 오디션장에 들어갔을 때? 아니면 그보다 훨씬 전부터? 그의 인생에는 언제부터 이 여자의 손가락이 뻗어있었을까?
민준은 대답해야 했다. 하지만 그의 입은 움직이지 않았다. 목이 말라 있었다. 콜라를 마신 지 2시간이 지났는데도 입술은 종이처럼 바싹 말라 있었다.
그 순간, 여러 목소리들이 그의 귓가를 맴돌기 시작했다. 마치 극장의 여러 배우들이 무대 뒤에서 동시에 대사를 외치는 것처럼.
“이것도 똑같은 덫이야. 너는 그것을 모를 수도 있지만, 나는 안다.”
누구의 목소리였을까? 그의 친구? 아니면 그의 내면의 목소리? 구분이 가지 않았다.
동시에, 다른 목소리도 들렸다. 더 부드럽고, 더 달콤한 목소리.
자신의 목소리였다. 하지만 자신이 말한 것은 아닌, 자신이 말했기를 원하는 말. 자신이 되고 싶은 사람이 할 말.
“당신은 훌륭한 배우예요.”
민준은 입을 열었다. 혀가 입 안에서 무겁게 느껴졌다. 하지만 말은 흘러나왔다. 마치 누군가 다른 사람이 자신의 몸을 조종하고 있는 것처럼.
“네. 하겠습니다.”
그 순간, 뭔가가 그의 내부에서 ‘딱’ 하고 소리를 내며 부러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그는 미소를 지었다. 이수진도 미소를 지었다.
“그럼 서명해.”
이수진이 펜을 밀어냈다. 그 펜은 검은색의 고급 볼펜이었다. 아마도 수천 원대의 펜일 것 같았다. 민준은 펜을 집었다.
손이 떨렸다.
마치 추운 겨울날 밖에서 오래 있었을 때처럼, 그의 손가락들은 떨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손가락을 조종했다. 마치 목각인처럼 자신의 손을 통제했다. 펜을 움직였다. 종이 위에.
서명했다.
그 순간,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펜이 종이와 만나는 소리, ‘긁적거리는’ 소리가 유독 크게 들렸다. 마치 자신의 영혼이 종이 위에 새겨지는 소리처럼.
검은 잉크가 흰 종이 위에 자신의 이름을 새겼다.
Min-jun Park.
세 글자와 한 글자. 그것이 자신의 전부였다. 그리고 그것이 이제 이수진의 소유가 되었다. 아니면 이미 그 전부터 그랬던 걸까?
펜이 종이에서 떨어졌다. 그것은 마치 사형 선고를 받고 마지막 서명을 하는 죄수의 손동작처럼 느껴졌다.
그것이 끝이었다. 또는 시작이었다. 자신도 모를 일이었다.
회의실 내의 공기가 변했다. 아까의 긴장감 어린 공기가 이제는 달성감으로 가득 찬 것처럼 느껴졌다. 이수진의 어깨가 이완되었다. 그녀는 서명된 계약서를 보며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좋아. 그럼 계획대로 진행하자. 첫 촬영은 다음 주 월요일이다. 미리 대본을 읽어두고, 준호에게 물어볼 게 있으면 물어봐.”
준호가 민준을 봤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눈빛이 뭔가를 말하고 있었다. 말이 아닌 다른 언어로.
“잘했어.”
그 말이 들렸을 수도 있고, 안 들렸을 수도 있었다. 아마도 준호는 입술만 움직인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민준은 그 말을 들었다. 그것이 현실인지 환각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는 그 말을 들어야 했으니까.
—
회의실을 나가는 길은 마치 꿈을 깨어나가는 통로 같았다.
복도. 그 복도는 길었다. 너무나 길었다. 마치 시간이 늘어나 있는 것처럼. 한 걸음, 두 걸음, 세 걸음. 발 아래의 카펫이 푹신했다. 그 푹신함이 마치 늪지처럼 느껴졌다. 어디로 가고 있는 건지도 모르면서 자신은 걷고 있었다.
엘리베이터 문이 보였다. 그 문 위의 숫자판이 깜빡거렸다. 5층. 4층. 3층.
민준은 그곳을 지나쳤다. 자신이 가야 할 곳은 지하였다.
계단. 그 계단을 내려갔다. 3층. 2층. 1층. 그리고 지하.
지하는 어두웠다. 형광등이 깜빡거렸다. 그 깜빡거림이 유독 신경에 거슬렸다. 마치 심장 박동처럼.
지하의 연습실. 그곳이 자신의 처음이었다. 엑스트라로 연습하던 그곳. 그 공간은 마치 시간이 정지된 장소 같았다. 언제나 같은 냄새가 났다. 땀과 카펫의 냄새. 그리고 오래된 건물의 냄새.
그 냄새를 맡는 순간, 민준은 자신이 처음 여기에 왔을 때를 떠올렸다. 3년 전. 그때 자신은 얼마나 희망찬 표정이었을까? 얼마나 순수했을까?
지하의 스튜디오에는 거울이 있었다. 그것은 벽 전체를 차지하는 큰 거울이었다. 마치 자신의 영혼을 비추기 위해 만들어진 거울처럼.
그 거울 앞에 민준은 섰다.
거울 속의 자신을 봤다.
174cm. 마른 체형. 갈색 눈. 극도로 평범한 얼굴.
그 얼굴이 거울 속에서 자신을 봤다. 마치 타인을 보는 것처럼. 거리감이 있었다. 거울 너머의 그 사람은 자신이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너는 누구야?”
민준이 거울에 물었다.
거울 속의 자신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극도로 피곤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봤다. 그 표정에는 수많은 감정이 섞여 있었다. 희망, 절망, 두려움, 그리고 무언가 더. 뭔가 자신도 명명할 수 없는 감정.
그 순간, 민준의 휴대폰이 울렸다.
발신자를 확인했다.
‘우리’
그것이 뭐였을까? 누군가의 이름? 아니면 어떤 조직? 민준은 그 메시지를 받을 때마다 혼란스러웠다. 누가 이렇게 메시지를 보내는 걸까?
메시지를 열었다.
“정신 차려. 너는 지금 누군가의 기댓값이 돼버렸어. 그리고 그것이 너를 죽이거나 살릴 거야. 조심해.”
민준은 메시지를 읽고 또 읽었다. 세 번, 네 번, 다섯 번.
그 말이 맞았다. 그는 이제 기댓값이 되어버렸다. 이수진의 기댓값. 준호의 기댓값. 그리고 아직 만나지 않은 누군가의 기댓값.
그것이 그를 살릴 것인가? 아니면 죽일 것인가?
거울을 다시 봤다.
거울 속에서, 그의 모습이 천천히 변하는 것처럼 보였다. 평범한 배우에서 뭔가 다른 것으로. 마치 변신을 하고 있는 것처럼. 그의 얼굴이 조금씩 날카로워졌다. 눈이 더 깊어졌다. 입술이 더 얇아졌다.
혹은 그것은 환상일 수도 있었다.
거울은 여전히 그의 평범한 얼굴을 비추고 있었다.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 오직 시간만 흘렀다. 그리고 시간이 흐르면서 사람은 변한다. 그것이 성장일까, 아니면 부패일까?
민준은 거울에서 시선을 돌렸다. 휴대폰의 메시지를 다시 읽었다.
“조심해.”
그것이 경고였다. 그리고 동시에 축복이었다. 누군가 그를 신경 쓰고 있다는 증거였다. 그것이 누구든 간에.
지하 연습실의 형광등이 또 깜빡거렸다.
그 깜빡거림 속에서, 민준은 자신의 제2막이 이제 시작되려고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제1막은 끝났다. 그리고 제2막은… 훨씬 더 복잡할 것 같았다.
문을 나가면서 민준은 마지막으로 거울을 봤다.
거울 속의 그는 여전히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화이팅,” 거울 속의 그가 입술을 움직인 것처럼 보였다.
민준은 웃음을 지었다. 그것은 쓸쓸한 웃음이었다.
그리고 지하를 나갔다.
계단을 올라갔다. 1층. 2층. 3층. 그리고 위로, 위로.
건물 밖으로 나갔다. 밖의 공기는 지하의 공기와 달랐다. 신선했다. 그리고 가혹했다.
서울의 거리. 저녁 6시. 해가 질 무렵.
사람들이 지나갔다. 그들 중 누군가는 민준의 얼굴을 봤을 수도 있다. 하지만 아무도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 그는 여전히 평범했다.
하지만 이제, 그는 계약이 된 배우였다. 누군가의 기댓값이 된 존재였다.
그리고 이제, 그의 제2막이 시작되려고 하고 있었다.
—
## 그 밤
민준은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대신, 카페에 들어갔다.
카페는 조용했다. 저녁 시간이라 손님도 많지 않았다. 민준은 창가 자리에 앉았다.
아메리카노를 주문했다. 아무 맛도 없는, 검은 커피.
커피가 도착했을 때, 그것은 여전히 뜨거웠다. 김이 피어올랐다. 그 김 속으로 서울의 밤거리가 희미하게 보였다.
민준은 계약서를 다시 꺼냈다.
아니, 계약서는 이수진이 가지고 있었다. 그가 가진 것은 계약서의 사본이었다. 그리고 그 사본 위의 그의 서명.
Min-jun Park.
그 글씨를 보면서, 민준은 생각했다.
이 서명은 뭘까? 그의 약속? 그의 항복? 아니면 그의 시작?
휴대폰을 켰다.
메신저 창을 열었다. 최근 대화 목록이 나타났다. 엄마, 친구들, 그리고…
‘우리’
그 이름을 눌렀다. 대화 기록이 나타났다.
지난 3개월간, 그는 이 정체 모를 누군가와 대화를 해왔다. 처음에는 스팸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메시지들은 정확했다. 마치 자신의 마음을 읽는 것처럼.
“좋은 선택을 했어.”
새 메시지가 들어왔다.
민준은 놀라서 휴대폰을 떨어뜨릴 뻔했다. 마치 누군가가 자신을 지켜보고 있다는 증거처럼 느껴졌다.
“누세요?”
민준은 타이핑했다.
“그건 중요하지 않아. 지금 넌 선택을 했어. 그리고 그 선택은 돌이킬 수 없어. 넌 이제 그들의 기계야.”
“뭐라는 거예요?”
“연기해. 그게 넌 할 수 있는 것의 전부니까.”
메시지는 여기서 끝났다.
민준은 휴대폰을 들었다 놨다를 반복했다. 누구일까? 정말로 누구일까?
커피를 마셨다. 이제는 식어 있었다. 따뜻한 온기를 잃은 커피처럼, 민준도 뭔가 잃어버린 것처럼 느껴졌다.
창밖으로 보이는 서울의 밤.
그 밤은 깊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민준은 그 깊은 밤 속으로 천천히 빠져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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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ND OF CHAPTER 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