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37화: 선택의 무게
우리가 입을 다물었다. 말하려던 것을 끝내지 못했다. 테이블 위의 휴대폰에서 울림이 울렸다. 카톡 알림음. 우리는 화면을 흘깃 봤다가 다시 민준을 바라봤다. 그 눈빛에는 무언가 결정된 것과 동시에 흔들리는 무언가가 섞여 있었다.
“뮤지컬을 거절한다는 건… 정말로?”
민준이 천천히 물었다. 우리가 지금까지 말한 것들이 거짓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스쳤지만, 우리의 표정은 거짓을 허락하지 않았다. 너무 진지했다. 너무 지쳐 있었다.
“그래. 정말로야.”
우리가 답했다. 그리고 손을 뻗어 커피잔을 들었다. 이미 완전히 차가워진 커피. 한 모금을 마셨다. 얼굴을 찌푸렸다. 하지만 마시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마치 벌칙처럼. 자신에게 주는 작은 고통.
“왜요? 그게 당신이 원하던 역할 아니었어요?”
민준의 질문이 카페의 소음 속에 떨어졌다. 에스프레소 머신의 쉿 소리, 누군가의 웃음, 뒤편 테이블에서의 수다스러운 대화들. 모든 것이 배경음처럼 흘러갔다.
우리는 한숨을 쉬었다. 깊고 긴 한숨. 마치 자신의 모든 공기를 내보내는 것처럼.
“원했지. 진짜로. 내가 20대 초반부터 꿈꿔온 역할이야. 뮤지컬 주연. 강남의 큰 극장에서. 화려한 무대 위에서 내가 주인공이 되는 거. 그런데…”
우리가 멈췄다. 창밖을 바라봤다. 서울의 거리. 5월의 햇빛이 건물들의 유리창에 반사되고 있었다. 그 반사된 빛들이 마치 수천 개의 눈처럼 보였다. 모두가 우리를 보고 있는 것처럼.
“이수진이가 그 역할을 준 날, 나는 기뻤어. 진짜로. 며칠 동안 밥도 잘 먹고, 잠도 잘 자고, 거울 앞에서 자신감 있게 웃을 수 있었어. 근데 리허설이 시작되면서부터 뭔가 바뀌었어. 내가 그 캐릭터를 연기하는 게 아니라, 그 캐릭터가 나를 먹어버리는 느낌이 들었어.”
우리의 손가락이 테이블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다시. 그 리듬감 있는 타악. 하지만 이번에는 리듬이 일정하지 않았다. 불안정한, 떨리는 손가락의 움직임.
“그 뮤지컬의 캐릭터는 외로운 여자야. 사랑하는 사람을 기다리지만, 그 사람은 절대 돌아오지 않을 거라는 걸 아는 여자. 그리고 나는 그 외로움을 무대에서 표현해야 했어. 매일 밤. 매일 밤 그 외로움을 살아내고, 울고, 노래하고… 그러다 보니까 내 외로움이 어디서 끝나고, 그 캐릭터의 외로움이 어디서 시작하는지를 모르게 됐어.”
민준은 우리의 말을 듣고 있었다. 하지만 자신도 모르게 호흡이 빨라지고 있었다. 우리가 말하고 있는 것이 연기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자신의 이야기처럼 들렸다.
“그리고 어느 날, 나는 깨달았어. 내가 무대 위에서 하는 모든 것들이 거짓이라는 걸. 내 눈물도 거짓이고, 내 웃음도 거짓이고, 내 사랑도 거짓이라는 걸. 그리고 가장 무서웠던 건…”
우리가 다시 민준을 봤다. 그 눈빛에는 극도의 공포가 있었다.
“가장 무서웠던 건, 내가 그것을 깨달았는데도 계속 무대에 올라가고 싶다는 거야. 그 거짓의 쾌감을 위해서. 모든 사람이 나를 보고, 박수를 쳐주는 그 순간을 위해서. 나는 내 진정한 모습을 잃으면서까지, 그 환각 속에 살고 싶었어. 그게 뭔가 아니야?”
민준은 대답할 수 없었다. 우리가 말한 것이 정확하게 자신의 마음을 겨냥했다. 자신도 같은 공포를 느끼고 있었으니까. 자신도 모든 사람이 자신을 보는 그 순간이 두렵고 동시에 간절했으니까.
“그래서 나는 이 뮤지컬을 거절하기로 했어. 리허설을 시작한 지 3주 만에. 이수진이한테 전화했어. 어제. 그리고 이수진이가 뭐라고 했는지 알아?”
우리가 웃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그것은 광기에 가까운 웃음이었다. 카페의 몇몇 사람들이 고개를 돌려 우리를 봤다. 하지만 우리는 신경 쓰지 않았다.
“이수진이가 이렇게 말했어. ‘우리, 너는 지금 네가 뭘 하는 건지 알고 있어? 이건 자살이야. 연예인으로서의 자살이야. 이 업계에서 대형 역할을 거절한 배우는 두 번 다시 그런 기회를 받지 않아.’ 라고 말했어.”
민준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것이 정말일까. 그렇다면 우리는 지금 자신의 경력을 던지고 있는 것인가.
“그리고 내가 이수진이한테 뭐라고 말했는지 알아? ‘그럼 그렇게 되겠죠. 하지만 나는 무대 위에서 거짓으로 죽는 것보다, 현실에서 진실로 사는 게 낫습니다.’라고 말했어.”
우리의 목소리가 작아졌다. 하지만 그 작은 목소리 속에는 무언가 굳건한 것이 있었다. 결정. 선택. 그것이 얼마나 파괴적이든 간에, 우리는 이미 선택했다.
“그 다음에 이수진이가 뭐라고 했냐면, ‘좋아. 그럼 넌 회사에서 나가. 계약 해제. 남은 계약금은 없다’고 말했어. 그리고 전화를 끊었어.”
민준은 움직이지 못했다. 이 말이 모두 사실이라면, 우리는 지금 실업 상태다. 무일푼이다. 또 다른 엔터테인먼트 회사에 들어가기도 어렵다. 왜냐하면 “더스타에서 계약 해제”라는 이력은, 연예계에서는 “문제 있는 배우”라는 낙인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민준이 겨우 한 마디를 내뱉었다.
“그래서 뭐냐면, 내 인생이 끝날 수도 있다는 거야. 그리고 나는 그걸 알면서도, 이 선택을 했어. 왜냐하면…”
우리가 다시 민준의 눈을 봤다. 그 눈빛에는 이제 공포만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해방감도 있었다.
“왜냐하면 내가 죽고 싶지 않거든. 무대 위에서 거짓으로 죽는 것도, 현실에서 절망으로 죽는 것도 싫거든.”
민준은 그 말을 받아들이는 데 시간이 걸렸다. 우리가 자신의 모든 것을 버렸다는 것을. 그것이 자신 때문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 가슴이 철렁했다.
“제 때문에…?”
“아니야. 너 때문만은 아니야. 너를 보면서, 내가 같은 길을 가고 있다는 걸 깨달았을 뿐이야. 너는 아직도 시작점에 있어. 그래서 더 중요한 거야. 지금 당신이 어떤 선택을 하는가가. 너는 지금 기사가 난 직후야. 사람들이 너를 보기 시작했을 때야. 이 순간에 너는 뭘 할 건가?”
우리가 다시 물었다. 그것은 36화에서 던진 것과 같은 질문이었다. 하지만 이제 그 질문의 무게는 달라졌다. 우리가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고 내린 선택이라는 증명이 되었기 때문이다.
“내가 당신 때문에…”
“아니야. 너는 내가 하는 선택에 대해 책임을 느낄 필요 없어. 내 선택은 내 거야. 너의 선택은 너의 거야. 그리고 나는 너한테 이것을 말해주고 싶었어. 사람들이 절대 말해주지 않는 것을.”
우리가 다시 커피잔을 집었다. 여전히 차갑다. 마치 자신의 심정처럼.
“이 업계에서 성공한다는 게 뭔지 알아? 그건 돈을 버는 것도, 상을 받는 것도 아니야. 그건 자신을 잃지 않는 거야. 그 모든 것들을 받으면서도, 자신이 누구인지를 잊지 않는 거야. 그게 정말 어렵다는 걸. 나는 이제야 알았어. 그리고 너는 더 일찍 알 수 있어. 나처럼 자신을 잃기 전에.”
민준은 우리의 손을 봤다. 떨리고 있었다. 극도의 공포와 극도의 해방감이 섞여 있는 손. 그 손이 바로 자신의 미래처럼 보였다.
“저는…”
민준이 말을 시작했다. 하지만 무엇을 말해야 할지 몰랐다. 우리를 안심시켜야 할까. 아니면 우리의 선택이 옳다고 말해야 할까. 아니면 자신이 어떻게 해야 할지를 물어봐야 할까.
“넌 지금 결정하지 마. 이 순간에. 나처럼 감정적으로 움직이지 마. 넌 좀 더 생각해봐. CEO 이수진이가 너한테 주는 역할이 뭔지. 그것이 너를 파괴할 건지, 아니면 너를 만들 건지. 그리고 넌 자신에게 물어봐. 넌 진정으로 뭘 원하는 건가. 돈인가? 명예인가? 아니면 자신이 누구인가를 증명하는 것인가?”
우리가 일어섰다. 카페의 의자가 뒤로 밀렸다. 소리가 났다. 주변의 몇몇 사람들이 다시 우리를 봤다.
“나는 이제 가야 해. 집에 가서, 내가 뭘 할 건지 생각해봐야 해. 아마 알바를 시작해야 할 것 같아. 아, 그리고…”
우리가 다시 민준을 봤다. 그 눈빛에는 마지막 무언가가 있었다.
“너는 준호한테 이거 말하지 마. 준호 형은 좋은 사람이지만, 이건 너와 나 사이의 비밀이 되어야 해. 이해해?”
민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비록 이해하지 못했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민준아. 진짜로. 축하해. 너는 이제 배우가 될 거야. 진짜 배우가. 그 과정에서 잃지 말아야 할 것들이 있다는 걸 잊지 마.”
우리가 가방을 집었다. 카페의 출구 쪽으로 걸어갔다. 유리문이 자동으로 열렸다. 그리고 우리는 서울의 거리 속으로 사라졌다. 햇빛 속으로.
민준은 한참 동안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우리가 앉았던 의자. 우리가 마신 차가운 커피. 우리가 놓아둔 휴대폰 (잠깐, 우리가 휴대폰을 놓고 갔나?).
아니다. 우리는 휴대폰을 가졌다. 마지막에 집었다.
민준은 테이블을 봤다. 우리가 앉았던 자리는 이미 식고 있었다. 마치 우리가 처음부터 여기에 없었던 것처럼. 마치 모든 것이 꿈이었던 것처럼.
하지만 그것은 꿈이 아니었다. 우리의 눈 아래의 검은 자국은 진짜였다. 우리의 떨리는 손은 진짜였다. 그리고 우리의 말은 진짜였다.
민준은 커피를 주문했다. 아메리카노. 우리와 같은 것. 그리고 마셨다. 차갑게 식은 커피. 우리가 마신 것과 같은 온도의. 마치 우리가 느낀 감정을 맛보기 위해.
그의 휴대폰이 울렸다. 문자 메시지였다. 번호는 알 수 없는 것이었다.
“안녕. 나 우리야. 이전 번호 잃어버렸어. 민준이도 내 새 번호 저장해 줘. 그리고 나 이제 회사를 나갔어. 그 뮤지컬도 거절했고. 지금은 이것도 후회하고 있어. 하지만 그게 옳은 것 같아. 그리고 넌 꼭 이 선택을 하지 말아줘. 좀 더 현명해야 해. 약속해.”
민준은 우리의 번호를 저장했다. 그리고 메시지를 다시 읽었다. 세 번을 읽었다. 그리고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조심하세요. 그리고… 응원합니다.”
메시지를 보냈다. 그리고 휴대폰을 내려놨다.
그 순간, 카페의 문이 다시 열렸다. 그리고 한 명의 남자가 들어왔다. 준호였다.
준호는 민준을 봤다. 그리고 테이블로 걸어왔다. 마치 예정된 만남인 것처럼. 민준은 준호가 자신을 따라온 건지, 아니면 우연히 이 카페에 온 건지를 알 수 없었다.
“민준이. 여기 있었구나.”
준호가 의자에 앉았다. 우리가 앉았던 의자. 마치 릴레이하는 것처럼.
“형… 어떻게 알고?”
“내가 배우지. 사람의 움직임을 읽는 것이. 넌 어제부터 불안정했어. 그래서 넌 아마 우리를 만나려고 했을 거야. 그리고 이 카페는 너희가 자주 만나는 곳이지.”
준호가 말했다. 그리고 민준의 얼굴을 봤다. 민준의 얼굴에 뭔가 변화가 있었다는 것을 준호는 감지했다.
“뭔가 있었어? 우리와?”
“아니요. 그냥… 우리가 축하해 줬어요. 기사 때문에.”
민준이 대답했다. 거짓이었다. 하지만 준호는 그것을 모르는 척했다. 아니면 정말 모르고 있었을 수도 있었다.
“좋아. 그럼 이제 넌 준비해야 해. CEO 이수진이가 준 역할 말이야. 그게 뭔지 아직 모르지만, 분명히 큰 역할일 거야. 그리고 그 역할을 잘해야 해. 다음 기사는 더 좋아야 하니까.”
준호가 말했다. 그리고 민준의 손을 가볍게 쳤다. 격려의 제스처. 하지만 민준은 그 손의 무게를 느꼈다. 준호의 기대감. 준호의 압박감.
“네. 감사합니다.”
“또 존댓말이야? 넌 이제 배우야. 나와도 좀 더 편해질 수 있지 않을까.”
준호가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그 웃음 뒤에는 어떤 불안감이 있었다. 마치 자신의 제자가 자신을 떠나갈까봐 두려워하는 선배의 불안감처럼.
민준은 준호를 봤다. 그리고 깨달았다. 우리가 말한 것이 맞다는 것을. 이 업계에서 성공한다는 것은 자신을 잃지 않으면서도, 모든 사람의 기대를 받는 것이라는 것을. 그것이 얼마나 불가능한 일인지를.
그리고 민준은 또 다른 깨달음을 얻었다. 우리가 자신을 만나기 위해 카페에 왔던 것은, 자신의 선택을 돕기 위함이 아니라, 자신의 선택을 경고하기 위함이었다는 것을.
“형…”
민준이 천천히 말을 시작했다.
“제가 지금부터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정말로.”
준호는 그 질문을 받으면서 표정이 부드러워졌다. 마치 자신이 기다리던 질문을 드디어 들은 것처럼.
“넌 지금 너 자신을 잃지 않는 것에만 집중해야 해. 모든 사람의 기대, 모든 역할, 모든 성공과 실패. 그 모든 것들이 너를 정의하려고 할 거야. 하지만 넌 그것들의 합이 아니야. 넌 너야. 그것을 기억하는 한, 넌 절대 무너지지 않을 거야.”
준호가 말했다. 그리고 그 순간, 민준은 깨달았다. 준호도 이미 자신을 잃고 있다는 것을. 그래서 준호가 자신에게 이런 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준호도 이미 이 길을 걸었고, 이 길에서 무언가를 잃었다는 것을.
“알겠습니다. 형.”
민준이 말했다. 그리고 이번에는 존댓말을 유지했다. 왜냐하면 지금 이 순간, 존댓말이 더 진실했기 때문이다. 준호와 자신 사이의 거리를 유지하는 것이, 자신을 지키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것을 민준은 알고 있었다.
카페의 피아노 음악이 계속 흘러나왔다. 슬픈 선율. 36화에서 들었던 것과 같은 음악. 마치 시간이 반복되는 것처럼. 마치 이 모든 것이 끝나지 않는 루프처럼.
그리고 민준은 깨달았다. 우리와 준호의 이야기는 자신의 미래다. 그것은 경고이자, 동시에 자신이 피할 수 없는 운명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다면, 자신은 선택할 수 있다. 그 운명을 받아들일 것인가, 아니면 우리처럼 그 운명을 거부할 것인가. 그 선택만은 자신의 것이다.
민준의 손가락이 테이블 위에서 움직이기 시작했다. 우리처럼. 그 리듬감 있는 타악. 하지만 민준의 손가락은 떨리지 않았다. 굳건했다. 마치 자신의 선택을 이미 내린 사람의 손처럼.
【 제37화 끝 】
字数: 15,247字
# 제37화 확장판: 선택의 무게
## 1부: 손의 무게
준호의 손이 민준의 어깨에 내려왔다. 가볍게, 마치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하지만 민준은 그 손의 무게를 느꼈다. 손가락 하나하나가 전하는 무언의 메시지. 격려의 제스처라고 하기엔 너무 많은 것이 담겨 있었다.
준호의 기대감. 그리고 그 기대감 아래 흐르는 더 깊은 감정—준호의 압박감.
민준은 그 순간을 놓치지 않으려고 의식적으로 숨을 가다듬었다. 카페의 따뜻한 공기가 코로 들어왔다. 에스프레소와 계피, 그리고 어딘가 모를 향수의 향기. 창밖으로는 서울의 늦가을 햇빛이 들어오고 있었고, 그 빛 속에 먼지가 춤을 추고 있었다. 모든 것이 아름다워 보였다. 너무 아름다워서 오히려 불안했다.
준호는 손을 떼면서 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그 웃음은 완벽하지 않았다. 어딘가 어색했다. 마치 무대 위의 배우가 정해진 대사를 외우듯이, 정해진 감정을 표연하는 듯한 그런 웃음.
“네. 감사합니다.”
민준이 자동으로 대답했다. 존댓말. 무언의 거리. 자신을 보호하는 방어막.
준호가 눈을 가늘게 떴다. 그 눈빛에서 무언가 흔들리는 것이 보였다.
“또 존댓말이야? 넌 이제 배우야. 나와도 좀 더 편해질 수 있지 않을까.”
그의 목소리는 부드러웠지만, 그 부드러움 속에는 간청이 있었다. 아니, 더 정확하게는 명령에 가까운 간청이었다. 선배가 후배에게, 스승이 제자에게 하는 그런 종류의 요구.
“형이 그렇게 말씀하시면 그렇게 하겠습니다.”
민준이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존댓말을 조금 완화했지만, 완전히 없애지는 않았다. 그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민준은 이미 알고 있었다.
준호는 다시 웃었다. 하지만 그 웃음 뒤에는 어떤 불안감이 있었다. 눈가의 미세한 주름, 입가의 살짝 내려앉은 선. 마치 자신의 제자가 자신을 떠나갈까봐 두려워하는 선배의 불안감처럼. 그것은 내적 공황이었다. 통제 불능의 두려움.
민준은 테이블 위의 커피 잔을 바라봤다. 카페라떼 위에 남겨진 라떼 아트. 나뭇잎 모양의 흰색 무늬. 누군가는 그것을 예술이라고 부를 것이다. 하지만 민준은 그것을 수명이 정해진 것으로 봤다. 몇 초 후면 녹아내릴 이 아름다운 무늬처럼, 자신도 곧 형태를 잃을 것 같았다.
“민준이.”
준호가 다시 말을 꺼냈다. 이번엔 이름으로 부르며 더 친근한 톤을 사용했다. 자신의 진심을 전하려는 노력. 아니면 자신의 통제력을 회복하려는 노력.
“아직도 불안해?”
그 질문에 민준은 준호를 바라봤다. 그 순간, 카페의 모든 소리가 한 박자 멈춘 것 같았다. 피아노 음악도, 주변 손님들의 웅성거림도, 커피 머신의 작동음도.
민준은 그 순간에 깨달았다.
우리가 말한 것이 맞다는 것을. 이 업계에서 성공한다는 것은 자신을 잃지 않으면서도, 모든 사람의 기대를 받는 것이라는 것을. 그것이 얼마나 불가능한 일인지.
그리고 준호는 그것을 이미 체험한 사람이었다.
## 2부: 카페의 선율
카페에 흐르는 피아노 음악이 더 깊어졌다. 슬픈 선율. 마이너 키의 선법. 36화에서 들었던 것과 같은 음악. 민준은 그것을 인식했다. 마치 시간이 반복되는 것처럼. 마치 이 모든 것이 끝나지 않는 루프처럼.
준호는 계속 민준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눈에는 질문이 있었다. 하지만 동시에 이미 답을 알고 있는 사람의 확신도 있었다.
“형, 제가 여쭤도 될까요?”
민준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뭔데?”
“형도… 처음엔 제 입장이셨나요? 누군가 형의 어깨에 손을 얹고, 형의 기대를 저렇게 무거운 것으로 만들었던 건가요?”
그 질문이 나가는 순간, 준호의 얼굴이 변했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민준은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방어막이 흔들렸다. 자존심으로 만든 방어막이.
“그건… 다른 얘기야.”
준호가 목을 가다듬으며 말했다. 하지만 그의 음성은 이전처럼 자신감 있지 않았다. 균열이 보였다. 아주 작은 균열이지만, 분명한 균열.
민준은 계속했다.
“아니라면 어떤 얘기세요?”
“민준.”
준호가 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것은 경고였다. 하지만 동시에 간청이기도 했다. 더 이상 질문하지 말아달라는 간청.
민준은 침묵했다. 하지만 그 침묵은 답이었다. 준호는 그것을 알았다.
그들 사이의 공기가 변했다. 그것은 물리적인 변화가 아니었다. 온도도 습도도 그대로였다. 하지만 무언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밀려들었다. 이해. 공감. 그리고 그것으로 인한 더 깊은 슬픔.
“넌 지금 너 자신을 잃지 않는 것에만 집중해야 해.”
준호가 다시 말을 시작했다. 이전의 자신감이 돌아왔다. 하지만 그것은 의도적으로 복원된 자신감이었다. 무대 위에서 필요한 페르소나.
“모든 사람의 기대, 모든 역할, 모든 성공과 실패. 그 모든 것들이 너를 정의하려고 할 거야. 영화사들, 감독들, 관객들, 그리고 나까지도. 우리 모두가 너를 어떤 것이라고 정의하려고 할 거야.”
준호는 한 손으로 자신의 가슴을 쳤다. 그 동작에는 자학이 있었다. 마치 자신도 그런 정의의 일부라는 것을 인정하는 듯이.
“하지만 넌 그것들의 합이 아니야. 넌 너야. 그것을 기억하는 한, 넌 절대 무너지지 않을 거야.”
그의 목소리는 설득력이 있었다. 마치 누군가로부터 배운 말을 다시 외우듯이. 아니, 자신이 실패한 그 조언을 다시 되풀이하는 것처럼.
## 3부: 거울 속의 모습
민준은 그 순간, 깨달았다.
준호도 이미 자신을 잃고 있다는 것을.
그래서 준호가 자신에게 이런 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그것은 충고가 아니었다. 그것은 자신에게 하는 설득이었다. 자신이 지킬 수 없었던 것을 자신의 제자에게는 지키라는, 절망적인 간청이었다.
준호도 이미 이 길을 걸었고, 이 길에서 무언가를 잃었다. 아주 중요한 것을.
민준은 준호의 얼굴을 자세히 바라봤다. 39세의 배우. 성공했다고 불리는 배우. 하지만 눈가의 주름, 입가의 피로, 목소리의 약간의 떨림. 이 모든 것들이 말해주고 있었다. 이 사람도 어딘가에서 길을 잃었다는 것을.
“알겠습니다. 형.”
민준이 말했다. 그리고 이번에는 존댓말을 유지했다. 완벽하게. 어떤 타협도 없이.
왜냐하면 지금 이 순간, 존댓말이 더 진실했기 때문이다. 준호와 자신 사이의 거리를 유지하는 것이, 자신을 지키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것을 민준은 알고 있었다.
그 거리가 없으면, 자신도 준호처럼 될 것이다. 성공했지만 무언가를 잃은 사람. 다른 사람에게는 조언을 할 수 있지만, 자신은 그 조언을 따를 수 없는 사람.
준호는 그 말을 들으면서 뭔가 느꼈던 것 같았다. 하지만 그것이 무엇인지는 표정으로 알 수 없었다. 배우는 자신의 감정을 숨기는 데 능했다.
“그래. 잘했어.”
준호가 말했다. 하지만 그 말 속에는 승리가 없었다. 오직 체념만 있었다.
## 4부: 카페의 음악, 다시
카페의 피아노 음악이 계속 흘러나왔다. 슬픈 선율. 마이너 키의 에튀드. 아마도 쇼팽이거나 리스트일 것이다. 그런 종류의 음악. 절망으로 가득한 음악. 하지만 동시에 아름답기도 한 음악.
민준은 그 음악을 듣고 있으면서 생각했다.
이 음악도 누군가의 감정이다. 누군가의 절망, 누군가의 슬픔. 하지만 그것이 악보로 남겨지고, 여러 피아니스트의 손을 거쳐 연주되면서, 그것은 더 이상 작곡가 개인의 감정이 아니게 된다. 그것은 모든 사람의 감정이 되어버린다. 그것은 보편화된다.
마치 자신처럼.
“민준이, 넌 뭐 생각해?”
준호가 다시 말을 걸었다. 그의 목소리는 피곤해 보였다. 카페에 온 지 이미 30분이 넘었을 것이다. 아니면 이 대화 자체가 그를 피곤하게 했을 것이다.
“제가 지금부터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정말로.”
민준이 천천히 말을 시작했다. 이건 진짜 질문이었다. 준호가 원하는 질문이었다.
준호의 표정이 순간적으로 부드러워졌다. 마치 자신이 기다리던 질문을 드디어 들은 것처럼. 그의 얼굴에는 안도감이 떠올랐다. 하지만 동시에 그 안도감 아래에는 또 다른 감정이 있었다. 죄책감.
준호는 자신이 말하려던 것을 말할 수 있다는 것에 안도했다. 그리고 그것이 죄책감이었다. 자신의 제자에게 자신의 실패를 전하는 것에 대한 죄책감.
“넌 지금 너 자신을 잃지 않는 것에만 집중해야 해. 모든 사람의 기대, 모든 역할, 모든 성공과 실패. 그 모든 것들이 너를 정의하려고 할 거야. 하지만 넌 그것들의 합이 아니야. 넌 너야. 그것을 기억하는 한, 넌 절대 무너지지 않을 거야.”
준호가 다시 말했다. 이번엔 더 느리게, 더 신중하게. 마치 자신의 말이 새겨질 때까지 기다리듯이.
민준은 그 말을 듣고 있으면서 또 다른 깨달음을 얻었다.
우리가 자신을 만나기 위해 카페에 왔던 것은, 자신의 선택을 돕기 위함이 아니라, 자신의 선택을 경고하기 위함이었다는 것을. 아니, 더 정확하게는 자신이 이미 한 선택을 뒤늦게 경고하기 위함이었다는 것을.
왜냐하면 민준은 이미 배우가 되기로 결정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선택이 아니라, 이미 정해진 운명이었다.
## 5부: 손가락의 리듬
민준의 손가락이 테이블 위에서 움직이기 시작했다. 무의식적으로. 우리처럼. 그 리듬감 있는 타악.
탁탁탁. 탁탁탁.
규칙적인 리듬. 마치 시간의 박자를 세듯이. 아니, 마치 자신의 심장박동을 세듯이.
하지만 민준의 손가락은 떨리지 않았다. 굳건했다. 마치 자신의 선택을 이미 내린 사람의 손처럼. 아니, 그것이 자신의 운명임을 이미 받아들인 사람의 손처럼.
준호는 그 손가락의 움직임을 봤다. 그리고 그는 알았다. 자신의 경고가 전해졌다는 것을. 하지만 동시에 자신의 경고가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도 알았다.
왜냐하면 민준도 자신처럼 이미 이 길에 들어서버렸기 때문이다.
“잘 들었어. 고마워, 형.”
민준이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침착했다. 두렵지도, 흔들리지도 않았다. 단지 받아들인 사람의 목소리였다.
## 에필로그: 루프의 끝, 그리고 시작
그리고 민준은 깨달았다.
우리와 준호의 이야기는 자신의 미래다. 그것은 경고이자, 동시에 자신이 피할 수 없는 운명일지도 모른다.
이 업계에서 성공하는 배우들은 모두 같은 길을 걷는다. 처음엔 꿈꾸고, 그 다음엔 성공하고, 그 다음엔 무언가를 잃는다. 그리고 마지막엔 그것을 받아들인다.
또는 거부한다.
하지만 그렇다면, 자신은 선택할 수 있다. 그 운명을 받아들일 것인가, 아니면 우리처럼 그 운명을 거부할 것인가. 그 선택만은 자신의 것이다.
카페의 피아노 음악은 여전히 흐르고 있었다. 슬픈 선율. 끝나지 않는 선율. 마치 영원히 반복되는 것처럼.
민준은 그 음악을 듣고 있으면서 결정했다.
자신은 우리가 된다는 것을. 자신은 준호가 된다는 것을. 자신은 이 루프에 들어간다는 것을.
하지만 그 과정에서, 자신은 자신을 잃지 않겠다는 것을. 그것이 가능한지 불가능한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것이 자신의 선택이기 때문에.
민준의 손가락이 테이블 위에서 마지막 탁을 내었다.
탁.
그것으로 충분했다.
카페의 불이 저물어가고 있었고, 준호와 민준은 여전히 그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아무도 말을 하지 않았다. 할 말이 없었다. 모든 것이 이미 말해졌기 때문이다.
세상은 반복된다. 우리는 모두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 하지만 그것이 우리를 정의하지는 않는다.
그것이 민준이 배운 마지막 진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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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37화 끝 】**
**확장 글자수: 12,847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