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33화: 우리가 본 것
기차는 신림역에 도착했고, 민준은 내렸다. 플랫폼의 사람들 사이로 스쳐 지나가며, 그는 자신의 휴대폰 화면을 보고 있었다. 우리의 마지막 카톡이 그대로 떠 있었다.
“민준아. 내일 시간 돼? 카페에서 봤으면 좋겠어.”
시간은 밤 9시였다. 민준은 신림역 지하철 역사를 빠져나와 지면으로 올라갔다. 신림동의 거리는 대학가였다. 노래방, 편의점, 치킨집, 카페. 모두가 밤 9시의 불빛을 내고 있었다. 고시생들의 거리. 비트를 놓친 배우들의 거리. 그곳이 민준의 집이었다. 월세 15만 원짜리 반지하방.
하지만 그는 집으로 가지 않았다. 대신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 편의점에 들어갔다. CU였다. 형광등 아래에서, 그는 라면 한 그릇과 계란 두 개, 그리고 커피 한 캔을 집었다. 계산대 앞에서 돈을 셀 때, 그는 자신의 통장 잔액을 떠올렸다. 약 30만 원. 한 달을 버텨야 할 돈으로는 턱없이 부족했다. 하지만 이제는 달랐다. 기사가 났다. 사람들이 자신을 봤다. 그러면 다음은 뭘까. 콜백? 매니지먼트 제의? 광고 촬영?
너무 많이 생각하지 마. 아직 확정된 게 뭐가 있어.
민준은 편의점을 나왔다. 밤바람이 얼굴을 스쳤다. 신림동의 밤공기는 따뜻하지도 차갑지도 않았다. 중간 정도의 온도. 그것은 자신의 현재 상태와 비슷했다. 성공도 실패도 아닌, 그 사이에 떠 있는 상태.
휴대폰이 울렸다. 준호였다. 또 다른 메시지.
“민준이. 너 요즘 어때? 연락이 없네. 내가 심했어. 진짜로. 다음에 봐서 얘기하자.”
민준은 답하지 않았다. 문자를 읽기만 했다. 그리고 우리의 메시지를 다시 봤다. 내일 카페에서 만난다. 왜 우리는 그렇게 서둘렀을까. 기차에서 내린 지 2분 만에 전화를 했고, 그 다음 카톡을 보냈고, 내일 만나자고 했다. 마치 무언가를 확인해야 하는 사람의 움직임처럼. 아니면 자신의 감정을 빨리 말해야 할 것 같은 사람의 서두름처럼.
민준은 반지하방으로 들어갔다. 계단을 내려가며, 그는 냄새를 맡았다. 지하의 냄새. 곰팡이와 습기, 그리고 누군가의 국밥 끓이는 냄새. 자신의 방에 들어갔을 때, 가장 먼저 한 일은 창문을 열었다. 좁은 창. 거리 수준의 높이에 있는 창. 밤거리의 발걸음 소리와 자동차 소음이 들어왔다.
민준은 라면을 끓였다. 전열 코일이 있는 간이 취사도구에. 물이 끓을 때까지 기다리며, 그는 휴대폰을 들었다. 네이버 연예뉴스. 자신의 이름을 검색했다.
화면에 뜬 것은 자신의 얼굴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자신이 본 자신이 아니었다. 기사 사진 속의 자신은 누군가였다. 더 깊고, 더 슬프고, 더 진정성 있는 누군가였다. 그것이 자신일까. 아니면 단지 좋은 조명과 메이크업, 그리고 감정 표현의 결과일까.
댓글을 읽었다.
“누구야 이 배우?”
“연기 진짜 미쳤네”
“이 배우 다음 작품 뭐예요?”
“눈빛이… 뭔가 다르다”
수백 개의 댓글이 있었다. 낯선 사람들의 말들. 낯선 사람들의 관심. 그들은 자신을 보고 있었다. 정확히는, 기사 속의 자신을 보고 있었다. 그 둘이 같은 사람일까.
물이 끓기 시작했다. 라면 면을 넣었다. 계란을 깨뜨려 넣었다. 냄새가 방을 채웠다. 라면의 냄새. 그것은 자신의 냄새였다. 지난 4년간 자신을 정의한 냄새.
라면을 먹으면서, 민준은 우리의 말을 생각했다. “넌 이제 사람들이 관심 가지는 배우가 된 거야.” 그 말은 축하였을까, 경고였을까. 아니면 둘 다였을까.
휴대폰이 울렸다. 예상 밖의 번호였다. CEO 이수진이었다. 밤 10시가 넘은 시간에.
민준은 받았다.
“여보세요?”
“민 배우. 기사 봤나?”
목소리는 낮고 침착했다. 항상 그랬다. 하지만 무언가 다른 톤이 있었다. 마치 자신의 결정을 이미 내린 사람의 목소리.
“네, 아까 우리… 후배가 보내줬어요.”
“좋은 반응이지? 댓글 봤나?”
“네, 봤습니다.”
“이제 너의 이름이 검색된다. 기자들이 전화할 거다. 인터뷰 요청도 올 거고. 광고 제의도 올 거다. 모두 거절해라.”
민준은 놀랐다. 그것은 축하가 아니라 명령이었다.
“네? 왜요?”
“너는 아직 준비가 안 돼 있다. 지금 너가 할 일은 더 좋은 역할을 잡는 것이다. 광고는 나중이다. 인터뷰도 필요 없다. 너는 지금 신비로운 상태여야 한다. 사람들은 더 보고 싶어 할 것이다. 너가 자꾸 얼굴을 내밀면, 그것은 사라진다. 신비로움이.”
민준은 침묵했다.
“이해했나?”
“네, 이해했습니다.”
“내일 회사에 와. 오후 2시. 미팅이 있다.”
통화가 끝났다. 민준은 라면 그릇을 내려놨다. 음식이 목을 넘어가지 않았다. CEO의 말들이 자신의 식도를 막고 있었다. 더 좋은 역할. 신비로움. 준비가 안 돼.
민준은 휴대폰을 들었다. 우리에게 답했다.
“네, 내일 뵐 수 있어요. 어디에요?”
곧 답이 왔다.
“강남이야. 가로수길에 있는 ‘더블 샷’이라는 카페. 오후 3시? 그 시간 괜찮아?”
민준은 계산을 했다. 회사 미팅이 오후 2시. 강남까지 가는 데 30분. 3시는 가능할 것 같았다. 하지만 또 다른 불안감이 생겼다. 회사 미팅 후에 강남으로 간다는 것이 뭔가 이상했다. 마치 자신의 인생이 여러 개의 무대를 오가고 있는 것 같았다. 회사의 무대. 우리와의 무대. 그리고 기사 속의 무대. 모두가 자신이지만, 모두가 다른 자신이었다.
“네, 3시 괜찮아요.”
민준이 답했다.
그 밤, 민준은 잠을 잘 수 없었다. 반지하방의 천장을 보며 누워 있었다. 밤거리의 빛이 창을 통해 들어왔다. 자동차 헤드라이트가 천장을 스쳐 지나갔다. 그 빛들이 자신의 얼굴을 비췄다 어두워졌다, 비췄다 어두워졌다를 반복했다.
신비로움이.
CEO의 말이 자신의 뇌에서 맴돌았다. 신비로움. 그것은 뭘까. 자신이 보이지 않는 것이 신비로움일까. 아니면 자신이 진정한 것처럼 보이는 것이 신비로움일까.
아침이 왔을 때, 민준은 피곤했다. 하지만 일어났다. 회사에 가야 했다. 오후 2시의 미팅을 위해.
더스타 엔터테인먼트 건물에 도착했을 때, 시간은 1시 50분이었다. 민준은 엘리베이터를 탔다. CEO의 사무실은 14층에 있었다. 엘리베이터가 올라가면서, 민준은 거울을 봤다. 엘리베이터 벽에 붙은 거울. 자신의 모습이 비쳤다. 어제 기사에 나온 자신과 같을까.
문이 열렸다. 14층. CEO 이수진의 사무실 입구였다.
이수진은 이미 앉아 있었다. 그리고 자신의 옆에는 또 다른 사람이 있었다. 나이는 50대 정도로 보였다. 남성이었다. 정장을 입고 있었고, 표정은 무심했다. 마치 수많은 배우들을 심사하던 프로듀서의 표정.
“민 배우. 왔네. 자리 앉아.”
이수진이 말했다. 그 말은 친절하지도, 불친절하지도 않았다. 단지 사무적이었다.
민준은 앉았다.
“이 분은 유재훈 PD야. OCN의 ‘검은 거울’ 시리즈를 만드는 프로듀서다. 너한테 관심이 있대.”
민준의 심장이 떨었다. OCN. 케이블 채널. ‘검은 거울’. 그것은 자신이 좋아하는 시리즈였다. 어두운 톤. 깊은 감정. 실험적인 연출. 그런 드라마에서 자신이 필요하다는 것일까.
유재훈 PD는 말했다.
“민준이 배우, 반갑습니다. 당신의 넷플릭스 작품을 봤습니다. 좋았어요. 특히 마지막 신. 아버지와의 대면 신. 그 장면에서 당신은 많은 것을 말하지 않았지만, 많은 것을 표현했습니다.”
민준은 말을 할 수 없었다. 그 칭찬이 자신을 위한 것인지, 아니면 단순한 인사인지 몰랐다.
“우리가 준비 중인 새로운 시리즈가 있습니다. 제목은 ‘거울 속’. 한 남자가 자신의 다른 버전들을 마주치는 이야기입니다. 멀티버스가 아니라, 심리적 분열입니다. 그 남자의 역할을 우리는 신인 배우가 맡기를 원합니다. 당신처럼.”
민준은 그 말을 들었다. 하지만 이해하기 어려웠다. 자신의 다른 버전들. 심리적 분열. 그것은 자신의 삶이 아닌가.
“생각해 보세요. 그 역할이 맞다면, 너의 인생은 바뀔 것이다.”
유재훈 PD가 말했다. 그 목소리에는 확신이 있었다.
“감사합니다. 생각해 보겠습니다.”
민준이 말했다. 존댓말이 나왔다. 항상 그랬다.
“스크립트는 내일 줄 거다. 읽어 보고, 이수진 대표한테 얘기해. 그리고 빠르게 결정해야 한다. 다른 제작사도 관심이 있거든.”
유재훈 PD가 일어났다. 미팅이 끝났다는 뜻이었다. 민준도 일어났다.
사무실을 나갈 때, 이수진이 말했다.
“민준아. 이게 너의 다음 기회야. 놓치지 마.”
그 말 속에는 경고가 있었다. 선택지 같은 것이 아니라, 의무 같은 것이.
민준은 회사를 나왔다. 시간은 2시 30분이었다. 강남으로 가는 시간이 충분했다. 택시를 탔다. 가로수길로.
택시 안에서, 민준은 자신의 얼굴을 반사된 창에서 봤다. 그리고 깨달았다. 그 얼굴이 유재훈 PD가 본 얼굴과 다르다는 것을. 여기 있는 자신은 더 피곤해 보였다. 더 불안해 보였다. 더 거짓처럼 보였다.
가로수길의 카페 ‘더블 샷’에 도착했을 때, 시간은 정확히 3시였다. 우리는 이미 앉아 있었다. 창가 자리에서. 그녀의 얼굴은 밝았다. 마치 자신이 무언가 좋은 일을 하려고 하는 사람의 얼굴.
민준은 자리에 앉았다.
“늦지 않아서 다행이다. 어떤 거라도 괜찮아?”
우리가 물었다. 카페 메뉴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아메리카노 하나 주세요.”
민준이 말했다.
“너, 요즘 잘 있어? 진짜 궁금했어.”
우리가 물었다. 그 질문은 단순해 보였지만, 깊은 것들을 담고 있었다.
“네, 잘 있어요.”
민준이 답했다.
“거짓말이지?”
우리가 웃으며 말했다.
“… 네.”
민준이 인정했다.
“내가 맞다니까. 넌 늘 그래. 말로는 괜찮다고 하지만, 눈은 거짓을 못 붙여. 나는 배우니까 안다. 눈의 거짓말 말이야.”
우리가 말했다. 그리고 카페의 소음 속에서, 그녀는 민준의 손을 잡았다. 테이블 위에서. 당연하듯이. 마치 오래전부터 해오던 일처럼.
“너는 지금 뭔가가 두려워하고 있지. 내가 맞지?”
우리가 물었다.
민준은 대답하지 못했다. 손이 따뜻했다. 우리의 손. 그것이 자신을 고정시켜 주었다. 마치 자신이 떠내려가는 것을 막아주는 닻처럼.
“내가 말해 줄게. 넌 너 자신을 모르고 있어. 그 기사에 나온 배우, 그게 너야. 내가 본 것도 그거고, 시청자들이 본 것도 그거야. 넌 그것을 모르고 있는 거야.”
우리가 계속 말했다.
“그럼… 어떻게 해야 돼요?”
민준이 물었다.
“넌 그것을 믿어야 돼. 다른 사람들이 본 너를.”
그 순간, 민준은 깨달았다. 우리가 왜 서둘렀는지를. 왜 기차에서 내린 지 2분 만에 전화를 했는지. 왜 오늘 만나자고 했는지.
우리는 자신을 보고 있었다. 정말로.
창밖으로 가로수길의 오후 햇빛이 들어왔다. 그 빛이 우리의 얼굴을 밝혔다. 그리고 그 순간, 민준은 깨달았다. 자신이 두려워하던 것이 뭔지.
성공이 아니었다. 성공도 두려웠지만, 진짜 두려움은 다른 것이었다. 누군가에게 완전히 보여지는 것. 그것이 자신을 죽일까봐 두려워했던 것이다. 아버지처럼.
하지만 우리는 자신을 봤다. 그리고 자신은 죽지 않았다.
“고마워요.”
민준이 말했다. 존댓말이 나왔지만, 그것은 거리감이 아니었다. 그것은 경외였다.
“뭐가? 그냥 친구잖아.”
우리가 웃으며 말했다.
그들은 카페에 앉아 있었다. 창밖의 강남. 오후 3시의 햇빛. 두 배우가 자신들의 역할을 연기하지 않고, 그저 앉아 있었다.
“내일 오디션이 있어?”
민준이 물었다.
“응. 뮤지컬. 또 떨어질 거 같은데.”
우리가 말했다.
“안 떨어져요. 나는 안다.”
민준이 말했다.
“왜?”
“왜냐하면 넌 자신을 모르니까. 그래서 넌 무언가를 더 준다. 다른 배우들보다.”
그 말을 하면서, 민준은 깨달았다. 자신이 우리에게도 했던 말이었다. 지난 기차 여행에서. 하지만 이제는 다른 의미였다. 이제는 진실이었다.
밤이 되었을 때, 민준은 다시 반지하방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유재훈 PD가 준 스크립트를 읽기 시작했다.
‘거울 속’
첫 페이지. 그리고 그 첫 번째 장면.
“남자는 거울을 본다. 거울 속에는 자신이 있다. 하지만 그것은 자신이 아니다. 그것은 자신이 될 수 있었던 다른 버전이다. 그리고 그 버전은 웃고 있다. 마치 자신을 조롱하듯.”
민준은 스크립트를 읽으며 떨었다. 이것이 우연일까. 아니면 필연일까.
자신의 삶이 거울이 되고 있었다. 그리고 그 거울 속에서, 자신은 누군가를 마주치고 있었다.
그것이 누군지를 알기 위해, 그는 더 깊이 내려가야 할 것 같았다.
END OF CHAPTER 33
# 제33장: 거울 속의 진실
## 1부: 인정의 순간
카페의 오후 햇빛은 거의 절실해 보였다.
우리는 창가 자리에 앉아 있었고, 강남의 번화한 거리는 우리 뒤로 흐릿하게 펼쳐져 있었다. 오후 3시 20분. 정확한 시간이 중요해 보였다. 마치 이 순간을 영영 기억하기 위해서처럼.
“내가 본 것도 그거고, 시청자들이 본 것도 그거야. 넌 그것을 모르고 있는 거야.”
내 목소리가 거울처럼 차갑게 들렸다. 민준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나는 그 말의 무게를 느껴야만 했다. 우리는 계속 말했다. 마치 누군가에게 말하는 것처럼, 아니면 우리 자신에게 말하는 것처럼.
민준의 손이 테이블 위에서 살짝 떨리고 있었다. 나는 그것을 봤다. 그리고 그것이 내 말이 맞다는 증거라고 생각했다.
“그럼… 어떻게 해야 돼요?”
민준이 물었다. 존댓말로. 마치 내가 그보다 높은 곳에 있는 사람인 것처럼. 하지만 우리는 같은 높이에 있었다. 같은 깊이의 구덩이에.
나는 커피잔을 들었다. 아메리카노는 이미 식어 있었다. 그것을 마시면서 나는 시간을 얻었다. 생각할 시간. 올바른 말을 찾을 시간.
“넌 그것을 믿어야 돼. 다른 사람들이 본 너를.”
내가 말했을 때, 내 목소리는 부드러워졌다. 마치 누군가를 깨우는 소리처럼. 그 순간, 나는 깨달았다. 내가 누구에게 말하고 있는 것인지. 민준에게인지, 아니면 나 자신에게인지.
민준의 눈이 변했다. 무언가가 그 안에서 일어났다. 마치 오래된 문이 열리는 소리처럼.
그 순간, 민준은 깨달았다. 우리가 왜 서둘렀는지를. 왜 기차에서 내린 지 2분 만에 전화를 했는지. 왜 오늘 만나자고 했는지.
우리는 자신을 보고 있었다. 정말로.
창밖으로 가로수길의 오후 햇빛이 들어왔다. 그 빛은 거의 황금색이었다. 마치 누군가가 무대 조명을 조절한 것처럼. 그 빛이 우리의 얼굴을 밝혔다. 민준의 얼굴에는 눈물이 맺혀 있었다. 흘러내리지 않은 눈물이.
그리고 그 순간, 민준은 깨달았다. 자신이 두려워하던 것이 뭔지.
## 2부: 두려움의 정체
성공이 아니었다. 성공도 두려웠지만, 진짜 두려움은 다른 것이었다.
누군가에게 완전히 보여지는 것. 자신의 모든 흠과 상처와 약함을 누군가가 보는 것. 그것이 자신을 죽일까봐 두려워했던 것이다. 아버지처럼.
아버지는 완전히 보여지는 순간 죽었다. 아니, 죽은 게 아니라 사라졌다.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사라졌다.
하지만 우리는 자신을 봤다. 그리고 자신은 죽지 않았다. 여전히 여기 있었다. 숨을 쉬고 있었다. 눈물을 흘리고 있었지만, 살아 있었다.
“고마워요.”
민준이 말했다. 존댓말이 나왔지만, 그것은 거리감이 아니었다. 그것은 경외였다. 경외와 감사와 두려움이 뒤섞인 목소리였다.
“뭐가? 그냥 친구잖아.”
우리가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그 웃음은 쉽지 않았다. 왜냐하면 “친구”라는 단어가 이제 전혀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친구는 단순한 사람이 아니었다. 친구는 거울이었다.
민준은 커피를 마셨다. 그것도 이미 식은 커피였다. 마시면서 그는 시간을 벌었다. 생각할 시간. 자신이 변했다는 것을 인정할 시간.
창밖에서 누군가가 웃음소리를 냈다. 젊은 여자들의 웃음소리였다. 하지만 우리는 그 소리를 들었어도 그것이 누구의 웃음인지 알지 못했다. 그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기차에서 넌 나한테 똑같이 말했어.”
민준이 천천히 말했다.
“뭐라고?”
“내가 무언가를 더 준다고. 다른 배우들보다. 왜냐하면 내가 자신을 모르니까.”
나는 그것을 기억했다. 기차 여행에서의 그 순간. 밤하늘 아래서 민준을 보며 내가 한 그 말.
“응. 그랬지.”
“근데 지금 그 말이 다르게 들려요.”
“왜?”
“이제는 진실이니까.”
## 3부: 카페의 진리
그들은 계속 앉아 있었다. 창밖의 강남. 오후 3시 45분. 두 배우가 자신들의 역할을 연기하지 않고, 그저 앉아 있었다.
그것이 가장 어려운 역할이었다.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있는 것. 그냥 인간으로 있는 것.
“내일 오디션이 있어?”
민준이 물었다. 그 질문은 가벼워 보였지만, 우리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았다. 그것은 “계속 가니?”라는 질문이었다. “계속 살아가니?”라는 질문이었다.
“응. 뮤지컬. 또 떨어질 거 같은데.”
나는 말했다. 그것은 거짓이 아니었다. 나는 정말 떨어질 거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나는 여전히 자신을 모르기 때문이었다.
“안 떨어져요.”
민준이 강하게 말했다.
“나는 안다.”
“왜?”
“왜냐하면 넌 자신을 모르니까. 그래서 넌 무언가를 더 준다. 다른 배우들보다.”
나는 그 말을 들으며 웃음이 나왔다. 그리고 동시에 눈물이 나왔다.
그 말을 하면서, 민준은 깨달았다. 자신이 우리에게도 했던 말이었다. 지난 기차 여행에서. 하지만 이제는 다른 의미였다. 이제는 진실이었다.
말은 같았지만, 그 말을 하는 사람이 변했다. 민준은 더 이상 자신의 말을 반복하는 것이 아니었다. 민준은 자신의 말을 자신의 진리로 만들었다.
카페의 바리스타가 “아메리카노 세 잔!”이라고 외쳤다. 하지만 우리는 움직이지 않았다. 우리의 커피는 이미 식어 있었고, 그것으로 충분했다.
“넌 떨어지지 않을 거야.”
민준이 다시 말했다.
“왜 그렇게 확신해?”
“왜냐하면 나는 너를 봤으니까. 그리고 네가 죽지 않았어.”
그 말은 단순해 보였지만, 그것이 가장 깊은 진리였다.
## 4부: 밤, 그리고 새로운 거울
밤이 되었을 때, 민준은 다시 반지하방으로 돌아왔다.
계단을 내려가면서 그는 햇빛을 잃었다. 마치 자신이 바다 속으로 내려가는 것처럼 느껴졌다. 깊이깊이.
반지하방의 불을 켰을 때, 그곳은 여전히 같은 곳이었다. 같은 냄새. 같은 습기. 같은 외로움. 하지만 민준은 다른 사람이 되어 돌아왔다.
유재훈 PD가 준 스크립트가 책상 위에 놓여 있었다. 그는 그것을 손에 들었다. 종이는 차갑고 딱딱했다.
‘거울 속’
제목을 읽은 순간, 민준의 심장이 멈췄다.
첫 페이지. 그리고 그 첫 번째 장면.
*“남자는 거울을 본다. 거울 속에는 자신이 있다. 하지만 그것은 자신이 아니다. 그것은 자신이 될 수 있었던 다른 버전이다. 그리고 그 버전은 웃고 있다. 마치 자신을 조롱하듯.”*
민준은 스크립트를 읽으며 떨었다. 손이 떨렸다. 목소리가 떨렸다. 영혼이 떨렸다.
이것이 우연일까. 아니면 필연일까.
그는 다시 읽었다. 또 읽었다. 마치 그 글귀 속에 자신의 답이 있다고 믿는 것처럼.
자신의 삶이 거울이 되고 있었다. 그리고 그 거울 속에서, 자신은 누군가를 마주치고 있었다.
그것은 자신이었나. 아니면 자신이 될 수 있었던 다른 버전이었나.
“그 버전은 웃고 있다. 마치 자신을 조롱하듯.”
민준은 스크립트를 내려놨다. 그리고 반지하방의 벽에 붙어 있는 낡은 거울을 바라봤다.
거울 속에는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정말 자신인지, 그것이 자신이 될 수 있었던 다른 버전인지, 민준은 알 수 없었다.
그것이 누군지를 알기 위해, 그는 더 깊이 내려가야 할 것 같았다. 거울 속으로. 자신 속으로. 그 깊이 속으로.
밤은 더욱 깊어지고 있었다.
반지하방의 작은 창을 통해 거리의 불빛이 들어왔다. 그것은 거울처럼 반사되었다. 민준의 얼굴 위에, 스크립트 위에, 그의 떨리는 손 위에.
“내일 오디션이 있다.”
민준이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그리고 나는 떨어지지 않을 거다.”
그렇게 말하면서, 그는 웃음을 짓고 있었다. 거울 속의 그 버전처럼. 마치 자신을 조롱하듯.
하지만 이제 그것은 조롱이 아니었다.
그것은 인정이었다.
그 인정 속에서, 무언가가 시작되고 있었다.
—
**제33장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