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트라이트: 제2막 – 제28화: 선택의 가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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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28화: 선택의 가격

준호는 민준의 말을 기다리지 않았다.

“우리가 먼저 연락했어. 그래서 뭐? 넷플릭스 드라마에 뽑혔다는 게 그렇게까지 좋아? 기사가 나왔다고 해서 인생이 바뀌어? 민준아, 넌 아직도 몰라?”

목소리가 낮았지만, 그 안에 들어있는 것은 저음의 울분이었다. 민준은 카페의 시끄러운 음악 속에서도 그것을 분명하게 들을 수 있었다. 우유 거품기음, 누군가의 웃음소리, 의자가 끌리는 소음. 모든 것이 배경이 되고, 준호의 목소리만 선명했다.

“형… 뭐가 문제예요?”

민준이 물었다. 그의 목소리는 조심스러웠다. 마치 자신이 깨진 물건을 다루고 있는 것처럼. 하지만 이미 깨져 있었다. 준호의 목소리 안에 금이 가 있었다.

“문제? 문제가 뭐냐고? 너 아버지 얘기, 기억해?”

준호가 말했다.

민준의 손가락이 멈췄다. 아버지. 그 단어는 민준의 세계에서 가장 깊은 곳에 있는 단어였다. 그것을 꺼내는 것은 마치 지진을 일으키는 것 같았다. 모든 것이 흔들린다. 모든 것이 무너진다.

“아, 그건…”

민준이 말하려고 했지만, 준호가 먼저 말했다.

“넷플릭스 오디션 전날. 넌 기억 안 날 수도 있지만, 나는 기억해. 넌 자기 아버지가 어떻게 죽었는지 얘기했어. 그리고 넌 자기가 아버지처럼 실패하고 싶지 않다고 했어. 그래서 배우를 한다고. 그리고 어제, 넌 그 오디션에서 아버지 역을 하는 배우 앞에서 자기 감정을 터뜨렸지. 그게 PD를 감동시켰고, 기사가 나왔고, 지금 넌 기쁜 거야. 맞지?”

준호의 말이 민준의 가슴을 관통했다. 정확했다. 너무 정확했다.

“그건… 네.”

민준이 작게 대답했다.

“그런데 말이야, 민준아. 넌 아직도 자기 아버지를 위해서 배우를 하고 있는 거 같아. 아버지가 죽었으니까, 이번엔 자신이 성공해서 아버지의 실패를 보상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근데 그게 뭐야? 그게 진짜 배우가 하는 일이야? 아니면 그냥 자기 트라우마를 무대 위에서 재연하는 거야?”

침묵.

그것이 민준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이었다. 카페에서. 라떼가 식어가고 있는 와중에. 창밖으로는 서울의 저녁이 계속되고 있었다. 누군가는 신발을 사러 들어가고, 누군가는 친구와 약속을 잡고, 누군가는 일로 인해 욕을 하고 있었다. 그 모든 것이 계속되는데, 민준의 세계는 정지해 있었다.

“형, 제가 뭘 잘못했는지 모르겠어요.”

민준이 매우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것은 거의 속삭임에 가까웠다.

“잘못한 게 뭐가 있어? 넌 뭐도 못 했어. 그게 문제야. 넌 그냥 기사가 나온 것만 생각하고 있어. 근데 그 기사는 뭐? 그건 시작일 뿐이야. 시작. 이제부터 넌 그 기사의 무게를 짊어져야 해. 사람들은 넘을 기대하기 시작했어. 그 PD의 평가만큼. 그 실시간 검색어만큼. 그리고 나… 나는?”

준호의 목소리가 부러졌다. 민준은 그것을 들었다. 목소리가 부러지는 순간. 그것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알았다. 배우의 목소리가 부러진다는 것은 연기가 끝났다는 뜻이었다. 진정한 감정이 흘러나온다는 뜻이었다.

“형, 죄송해요. 진심으로.”

민준이 말했다.

“죄송? 무슨 죄를 지었어? 넌 너의 기회를 잡은 거야. 그게 뭐가 문제야? 문제는 내가 너를 봐줬다는 거야. 너를 챙겼다는 거야. 넌 혼자가 아니었어. 누군가 너를 봐주고 있었어. 그리고 그 누군가가 나였어. 하지만 지금 봐. 넌 이미 다른 세계로 올라가고 있어. 기사가 하나 나왔다고 해서, 이미 넌 다른 배우가 돼버린 거야. 더 이상 나의 후배가 아니라, 주목받는 신인 배우가 돼버린 거야. 그래서 기쁜 거지? 하지만 그게 진짜 너가 원했던 거야?”

준호의 질문은 화살처럼 날아왔다. 그리고 민준의 가슴에 박혔다.

“제가… 뭘 해야 돼요?”

민준이 물었다. 그것은 질문이 아니었다. 항복이었다.

“모르겠어. 난 이제 상관없어. 너의 길을 가. 그리고 기억해. 이 길이 얼마나 외로운지. 나처럼. 내가 너한테 보여줬던 따뜻함 같은 건 이제 없을 거야. 연예계에서 올라가는 길에는 그런 게 없어. 있다고 생각하면 그건 착각이야. 모든 게 거래고, 모든 게 계산이야. 그리고 넌 지금부터 그 세계 속으로 들어가는 거야.”

준호의 목소리가 더 낮아졌다. 거의 들릴 듯 말 듯한 정도로. 하지만 그 낮은 목소리가 가장 위험했다. 그것은 포기의 목소리였다.

“형, 제발. 그런 말 하지 마세요.”

민준이 간청했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준호는 이미 어딘가 멀리 가 있었다.

“시간 나면 영화관 가. 우리가 나중에 또 만날 수도 있지. 드라마 개봉식이나 시상식에서. 그때 하는 척 인사하자. 배우들끼리. 그게 맞는 방식이야.”

그리고 준호는 전화를 끊었다.

민준은 휴대폰을 귀에서 떨어뜨렸다. 화면은 검은색이 되었다. 통화 시간: 3분 47초. 3분 47초. 그것이 얼마나 긴 시간인지, 그것이 얼마나 짧은 시간인지, 민준은 알 수 없었다.

라떼는 완전히 식어있었다. 민준은 한 모금 마셨다. 쓰디쓴 맛. 혀가 더 이상 데지 않았다. 너무 차갑게 식어버렸기 때문이다.

창밖의 거리를 다시 봤다. 서울. 강남역 근처. 사람들은 여전히 움직이고 있었다. 누군가는 웃고 있었고, 누군가는 화풀이를 하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자신의 삶을 살고 있었다. 그들의 세계가 있었다. 그리고 민준은… 민준은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휴대폰이 울렸다.

이번엔 우리였다.

민준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그냥 화면을 보고만 있었다. 우리의 이름. 그리고 프로필 사진. 그녀는 밝게 웃고 있었다. 뮤지컬 배우답게. 하지만 그 웃음 뒤에는 무엇이 있을까. 민준은 이제 알고 있었다. 웃음 뒤에는 항상 무언가가 있다는 것을. 그것이 두려움이든, 외로움이든, 또는 다른 무언가든.

전화는 자동으로 끊겼다.

카톡이 왔다.

[우리: 민준이 뭐 해? 아까부터 연락이 없네. 너 혼자 있지 말고, 우리 만나자. 카페 가자. 축하해야 하잖아.]

민준은 메시지를 읽고 있었다. 하지만 글자가 흐릿해 보였다. 눈이 마비된 것처럼. 손가락을 움직였다. 글을 쓰기 시작했다.

[민준: 지금은 혼자 있고 싶어. 미안해. 내일 만나자.]

보내기를 눌렀다.

곧 답장이 왔다.

[우리: 혼자 있으면 안 돼. 진짜. 내가 알아. 너 지금 뭔가 생각하고 있지? 그런 생각은 혼자 하면 더 커져. 제발, 약속만 잡아. 우리 카페에서 만나자.]

민준은 다시 메시지를 읽었다. 우리가 맞는지도 모른다. 혼자 있으면 안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 그는 누군가를 마주볼 수 없었다. 그래서 다시 거짓을 썼다.

[민준: 정말 미안해. 근데 지금은 못 가. 내가 먼저 연락할게.]

보내기.

답장 없음.

민준은 휴대폰을 내려놨다. 라떼 잔을 들었다. 이제는 차가운 음료였다. 거의 실온에 가까웠다. 그것을 마시는 것은 이미 죽은 것을 마시는 것과 같았다.

카페의 바리스타는 새로운 주문을 받고 있었다. “아메리카노 한 잔요!” 그 음성은 밝았다. 그 사람은 아직도 그 밝음을 유지하고 있었다. 민준은 그것이 부러웠다. 그 단순함이. 그 확실함이.

휴대폰의 시간을 확인했다. 오후 7시 58분. 기사가 올라온 지 거의 2시간이 되었다. 2시간 만에 무엇이 달라졌을까. 기사는 여전히 있었을 것이다. 댓글도 계속 달리고 있을 것이다. 누군가는 자신의 이름을 검색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민준의 세계에서는 모든 것이 무너지고 있었다.

그가 원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성공? 돈? 유명함? 아버지의 죽음을 보상받는 것?

민준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이제는 그것도 중요하지 않은 것 같았다. 중요한 것은 준호의 목소리였다. 그 부러진 목소리. 그것은 민준이 만든 것이었다. 자신의 성공을 위해 자신이 누군가의 마음을 부러뜨렸다. 그것이 사실이었을까.

아니다. 그것은 연예계의 규칙이었다. 준호 자신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 규칙을 . 하지만 규칙을 알고 있다는 것이 그것을 받아들이게 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더 깊게 상처를 낸다. 왜냐하면 그것이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민준은 카페를 나갔다.

거리는 어두워지고 있었다. 가로등이 켜지기 시작했다. 그 불빛은 따뜻해 보였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그것은 단지 불빛일 뿐이었다. 가짜 따뜻함. 연기처럼 흩어지는 위로.

민준은 강남역 지하철역으로 향했다. 계단을 내려갔다. 신발이 금속 계단과 부딪치는 소리. 그것이 유일한 음악이었다. 역 안은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모두가 어딘가로 가고 있었다. 모두가 자신의 목적지가 있었다. 민준은 자신의 목적지가 어디인지 몰랐다.

지하철 칸에 들어갔다. 사람들 사이에 섰다. 아무도 자신을 보지 않았다. 기사가 나고 실시간 검색어에 올랐어도, 여기서는 여전히 투명했다. 그것이 정상이었다. 그것이 현실이었다.

창밖으로 터널이 흘러갔다. 검은색 터널. 그것을 보고 있으면 마치 자신이 어딘가의 내부를 여행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누군가의 몸 속. 누군가의 마음 속.

민준은 눈을 감았다.

준호의 말이 계속 들렸다. “넌 아직도 자기 아버지를 위해서 배우를 하고 있는 거 같아.” 그 말이 맞는 것 같았다. 그래서 두려웠다. 그것이 맞다면, 자신의 모든 것이 거짓이라는 뜻이었기 때문이다. 거짓된 욕망. 거짓된 성공. 거짓된 자신.

지하철이 다음 역에 도착했다. 승강장에서 사람들이 올라탔다. 그들은 모두 바쁜 표정이었다. 누군가는 휴대폰을 보고 있었고, 누군가는 졸고 있었다. 그들은 각자의 인생을 살고 있었다. 그리고 민준도 그들 중 한 명이었다. 아무도 특별하지 않은, 서울의 지하철에 서 있는 한 사람.

휴대폰이 울렸다. 이번엔 회사였다. 더스타 엔터테인먼트의 관리자였다.

민준은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민 배우. 대표님이 요청하셨어. 내일 오전 10시에 회사 오세요. 계약 관련해서 논의할 게 있다고 하셨어. 가능해요?”

관리자의 목소리는 차갑고 공식적이었다.

“네, 감사합니다. 내일 10시 맞겠습니다.”

민준이 대답했다.

“그럼 내일 뵈겠습니다.”

전화가 끊겼다.

민준은 다시 한 번 창밖의 터널을 봤다. 검은색. 무한한 검은색. 그것이 미래처럼 느껴졌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미래. 아무것도 알 수 없는 길.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내일 아침, 자신은 다시 한 번 선택을 해야 한다는 것. 기사가 나고, 댓글이 달리고, 실시간 검색어에 올랐을 때, 그리고 회사가 자신에게 뭔가를 제시할 때, 자신은 그것을 받아들일 것인가, 아니면 거부할 것인가. 그것을 해야 한다는 것.

그리고 그 선택의 가격이 무엇인지, 이제는 알고 있었다.

준호의 목소리. 우리의 걱정. 자신의 영혼. 그 모든 것들이 그 선택의 대가였다.

지하철은 계속 나아갔다. 터널 속으로. 그리고 민준은 그 안에서, 자신이 점점 더 작아지고 있다고 느꼈다. 마치 누군가 자신을 천천히 지우고 있는 것처럼.

하지만 그것이 배우라는 일이었을 수도 있다.

자신을 천천히 지우고, 다른 누군가가 되는 것. 그것이 배우의 본질이었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자신은 이미 완벽한 배우였다.

왜냐하면 자신은 이미 자신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END OF CHAPTER

# 터널 속의 선택

지하철 4호선 명동역 승강장. 오후 6시 42분.

민준은 자동문 사이로 흘러들어오는 인파 속으로 몸을 밀어 넣었다. 차가운 공기가 얼굴을 스쳤다. 지하철역 특유의 냄새—낡은 철, 누군가의 향수, 그리고 수백 명의 땀과 피로가 섞인 냄새—가 코를 찔렀다. 그는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이 냄새가 현실이다. 이 냄새가 진짜다.

문이 닫혔다. 부드러운 기계음. 그리고 지하철은 움직이기 시작했다.

민준은 손잡이를 잡지 않았다. 대신 몸 전체를 흔들리게 맡겼다. 주변 사람들 사이에서 밀려 흔들리는 것이 마치 자신이 살아있다는 증거인 것 같았다. 누군가의 어깨가 자신의 등을 건드렸고, 누군가의 가방이 자신의 종아리를 스쳤다. 그것들은 모두 물리적 증거였다. 자신이 여기 있다는 증거.

하지만 아무도 자신을 보지 않았다.

지하철 칸의 밝은 형광등 아래에서도, 민준은 투명했다. 어제까지는 달랐다. 어제까지는 거리를 걸을 때마다 누군가가 고개를 돌렸다. 어제까지는 카페에 들어가면 바리스타가 그의 이름을 부르고 싶어 했다. 어제까지는 자신이 존재했다.

오늘은 달랐다.

오늘 아침, 기사가 나왔다. 두 줄짜리 기사였다. 유명 배우 A씨가 준비한 영화 프로젝트가 투자자 부도로 무산되었다는 내용이었다. 별 것 아닌 뉴스였다. 영화사들은 매일 무너진다. 프로젝트들은 매일 사라진다. 하지만 그 기사가 실시간 검색어에 올라간 이유는 다른 데 있었다.

그의 아버지 때문이었다.

아버지의 회사도 그 투자에 포함되어 있었다. 아버지의 돈도 사라졌다. 그래서 뉴스는 단순한 엔터테인먼트 기사에서 경제 스캔들로 변했고, 댓글은 자신을 향한 비난으로 뒤덮였다. ‘아버지 돈으로 연기한다더니’, ‘부자의 자식이 이 정도밖에 못 한다니’, ‘역시 금수저는 다르다’. 이런 것들이었다.

민준은 눈을 감았다.

지하철이 터널 속으로 들어갔다. 창문 너머로는 검은색만 보였다. 무한한 검은색. 깊이를 알 수 없는 어둠. 그것을 보고 있으면 마치 자신이 누군가의 몸 안을 여행하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누군가의 배 속. 누군가의 폐 속. 누군가의 마음 속.

*준호의 말이 계속 들렸다.*

“넌 아직도 자기 아버지를 위해서 배우를 하고 있는 거 같아.”

그 말이 자꾸만 떠올랐다. 준호는 자신의 친구였다. 아니, 친구였다. 과거형이었다. 3년 전만 해도 그들은 함께 연기 수업을 다녔고, 함께 밤샘 영화를 봤고, 함께 꿈을 꿨다. 하지만 민준이 드라마에 캐스팅되고, CF가 들어오고, 영화 주연이 확정되면서, 준호는 서서히 멀어졌다.

아니, 민준이 준호를 밀어냈던 것 같았다. 자신이 올라갈수록, 준호는 자신을 가져오려는 추, 무게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제, 준호는 민준에게 전화를 했다. 2년 만에.

“너 이 기사 봤어? 네 아버지 회사… 큰일이네.”

“응. 알고 있어.”

“그래서 어떻게 할 건데?”

“뭘?”

“영화. 이미 투자받은 거 아냐?”

“아직 제작사랑 얘기하는 중이야.”

“그런데 투자자가 부도났는데?”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준호가 다시 입을 열었다.

“너 정말 이 일을 하고 싶어? 진심으로?”

“응. 왜?”

“넌 아직도 자기 아버지를 위해서 배우를 하고 있는 거 같아. 아버지가 원하는 자신이 되려고, 아버지가 투자한 돈을 빛내려고. 진짜 네가 원하는 게 뭔지, 넌 모르는 거 아닐까?”

민준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할 말이 없었다. 왜냐하면 그 말이 맞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 말이 맞다면, 자신의 모든 것이 거짓이라는 뜻이다.*

거짓된 욕망. 거짓된 야망. 거짓된 열정. 그리고 가장 끔찍한 것은, 거짓된 자신.

지하철이 다음 역에 멈췄다. 역명이 자동 안내 시스템으로 흘러나왔다. ‘을지로입구역입니다. 을지로입구역입니다.’

승강장의 문이 열렸다. 사람들이 밀려 올라탔다. 여름 저녁의 습기를 싣고 온 사람들. 그들은 모두 바쁜 표정이었다. 얼굴을 굳혀 있었다. 그들은 각자의 인생을 살고 있었다.

한 여자가 민준 옆에 섰다. 그녀는 휴대폰을 들었고, 그의 얼굴 쪽으로 화면을 비추고 있었다. 아, 셀카를 찍고 있는 것 같았다. 그녀는 몇 번 화면을 터치했고, 다시 휴대폰을 내렸다. SNS에 올렸을 것이다. 아마도 ‘지하철에서의 일상 감성’ 같은 해시태그와 함께.

아무도 민준을 알아보지 못했다.

기사가 났어도. 실시간 검색어에 올랐어도. 댓글이 수천 개 달렸어도. 여기, 이 지하철 칸에서는 그가 아무도 아니었다. 그가 누군지 아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더 외로웠다. 그리고 동시에, 그것이 정상이라고 느껴졌다.

*이것이 현실이다. 이것이 진짜다. 나는 아무도 아니다.*

지하철은 다시 움직였다. 창문으로 터널이 흘러갔다. 검은색 벽면. 그 위에는 가끔 낡은 광고판들이 떠올랐다. 부동산, 결혼정보회사, 소주 브랜드. 모두 희미했다. 모두 낡았다. 마치 과거에서 나온 것처럼.

민준은 그 광고판 중 하나에 눈을 고정했다. 남자 배우가 소주를 들고 웃고 있는 광고였다. 그의 얼굴은 밝았다. 자신감이 넘쳤다. 그것이 광고의 진짜 목적이었다. 소주를 팔기 위해, 그의 행복을 팔아야 한다. 그의 미소를 팔아야 한다. 그의 존재를 팔아야 한다.

*나도 저렇게 팔리는 건가?*

휴대폰이 울렸다.

민준은 깜짝 놀랐다. 창밖의 광고판에서 눈을 떼고 휴대폰을 꺼냈다. 화면에는 ‘더스타 엔터테인먼트’라는 글자가 떠올랐다. 자신의 소속사였다. 관리자였다.

*이 전화가 모든 걸 결정할 것 같다.*

민준은 깊게 숨을 쉬고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민 배우? 지금 괜찮아요?”

관리자의 목소리였다. 대기업 직원 같은 목소리. 정중하지만 따뜻하지 않은. 감정이 제거된 목소리.

“네, 괜찮습니다.”

“대표님이 요청하셨어요. 내일 오전 10시에 회사 오세요. 계약 관련해서 논의할 게 있다고 하셨어. 가능해요?”

민준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계약 관련. 논의.*

그것은 여러 가지를 의미할 수 있었다. 계약 해제. 새로운 프로젝트. 패널티. 또는…

“네, 감사합니다. 내일 10시. 맞겠습니다.”

민준이 대답했다. 자신의 목소리가 어디서 나왔는지 몰랐다. 그것은 자신의 목소리가 아닌 것 같았다. 그것은 배우의 목소리였다. 항상 적절한 음정으로, 항상 올바른 감정으로, 항상 기대하는 반응을 주는 목소리.

“그럼 내일 뵈겠습니다. 화이팅입니다!”

관리자의 목소리가 너무 밝았다. 그것이 더 무서웠다.

전화가 끊겼다.

민준은 다시 창밖을 봤다. 지하철은 여전히 터널 속을 지나가고 있었다. 검은색 벽면. 무한한 어둠.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길. 아무것도 알 수 없는 미래.

*내일 아침.*

그는 생각했다.

*내일 아침, 나는 대표를 만난다. 그리고 선택을 해야 한다.*

기사가 나고, 댓글이 달리고, 실시간 검색어에 올랐을 때. 아버지가 자신에게 실망한 것 같을 때. 회사가 자신에게 뭔가를 제시할 때.

그때, 자신은 그것을 받아들일 것인가?

아니면 거부할 것인가?

한 가지는 확실했다. 그 선택의 가격은 비쌀 것이라는 것.

아버지와의 관계. 준호와의 우정. 자신의 영혼.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자신이 정말로 누구인지를 알 수 있을 기회. 그 모든 것이 그 선택의 대가였다.

옆에 있던 여자가 다시 휴대폰을 들었다. 이번에는 자신의 사진을 보고 있었다. 화면에서 나오는 빛이 그녀의 얼굴을 밝게 비추었다. 그녀는 미소 지었다. 자신의 사진을 보며 미소 지었다.

*자신을 사랑한다는 건 이런 건가?*

민준은 생각했다.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미소 지을 수 있는 것. 그것이 자신을 사랑한다는 건가? 아니면 그것도 거짓인가?*

지하철은 계속 나아갔다. 터널을 뚫고 나아갔다. 어둠을 뚫고 나아갔다.

그리고 민준은 그 안에서 자신이 점점 더 작아지고 있다고 느꼈다. 마치 누군가가 자신을 천천히 지우고 있는 것처럼. 글자를 지우는 지우개처럼. 그림을 지우는 손가락처럼.

*이게 배우라는 일인가?*

자신을 천천히 지우고, 다른 누군가가 되는 것. 자신의 감정을 버리고, 타인의 감정을 입는 것. 자신의 욕망을 죽이고, 타인의 욕망을 살리는 것.

그것이 배우의 본질이었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자신은 완벽한 배우였다.

왜냐하면 자신은 이미 자신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지하철이 또 다른 역에 도착했다. 을지로3가역. 사람들이 내렸고, 새로운 사람들이 올라탔다. 그들은 모두 낯선 사람들이었다. 모두 자신의 세계 속에서 살고 있었다.

민준은 이 인파 속에서, 자신이 한 명의 유명한 배우도 아니고, 한 명의 평범한 사람도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자신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리고 그것이 가장 현실적인 자신의 모습이었다.

창밖의 터널이 흘러갔다. 검은색. 무한한 검은색. 그 속에서 자신은 계속 지워지고 있었다.

내일 아침 10시.

그때가 되면, 자신은 무엇이 될 것인가?

**END OF CHAP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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