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17화: 무대 위의 침묵
넷플릭스 빌딩 앞 계단에 서 있을 때, 민준은 자신이 이 건물의 유리문을 통과할 수 없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강남 테헤란로. 해가 이미 중천을 지나 서쪽으로 기울어가고 있었다. 오후 3시 정각. 준호의 차에서 내린 지 3분이 지났다. 그 3분 동안 민준이 한 것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손을 씻지도 않았고, 얼굴을 만지지도 않았다. 다만 계단 옆의 현대미술 조각상 앞에 서 있었다. 추상적인 형태의 검은 돌상. 누군가는 그것이 인간의 영혼이라고 했고, 누군가는 그것이 죽음이라고 했다. 민준은 그저 자신처럼 보였다. 굳어진 표정으로, 어디를 봐야 할지 모르는 눈으로.
“민준.”
준호가 불렀다. 그의 목소리에는 명령이 없었다. 단지 존재의 확인만 있었다. 넌 여기 있니, 라는 질문. 넌 아직도 여기 있니, 라는 애원.
민준은 움직였다. 한 발, 그리고 또 한 발. 계단을 올라갔다. 유리문이 자동으로 열렸다. 센서가 그를 인식했다. 기계도 그를 받아주었다.
로비의 공기는 차갑고 깨끗했다. 마치 병원 같았다. 흰 벽, 밝은 조명, 그리고 어딘가 소독약 냄새. 젊은 직원들이 삼삼오오 움직이고 있었다. 모두 자신감 있는 표정이었다. 여기가 꿈의 장소라는 것을 알고 있는 배우들의 표정. 민준은 그들의 반대였다. 자신이 여기 있으면 안 된다는 것을 아는 사람의 표정.
우리가 민준의 팔에 손을 얹었다. 그 손은 매우 가벼웠지만, 무한한 무게로 느껴졌다. 마치 그 손이 자신의 팔뚝뿐 아니라 영혼까지 붙들고 있는 것처럼.
“넷플릭스 오디션이에요?”
리셉션의 직원이 물었다. 검은색 정장을 입은 젊은 여성. 직업적 미소를 짓고 있었다. 하지만 그 미소는 따뜻하지 않았다. 단지 규정이었다.
“네.”
준호가 답했다. 그는 이런 상황에 익숙했다. 몇십 번은 이런 장면을 반복했을 것이다. 신인을 데리고 오디션 장소에 가는 것. 그들의 손을 잡아주고, 숨을 쉬라고 말하고, 무대에 올려 보내는 것.
“배우 이름?”
“민준이에요. 더스타 소속.”
직원이 리스트를 확인했다. 펜으로 어딘가를 가리켰다. 민준은 그 펜이 자신의 이름을 가리키는 것을 봤다. 인쇄된 글자. 검은 잉크. 현실이었다. 이것은 더 이상 꿈이나 환상이 아니었다.
“5층 A 스튜디오에요. 엘리베이터 타고 올라가시면 돼요.”
민준은 감사를 표했다. 존댓말로, 조심스럽게. 마치 자신이 이 빌딩에 들어올 자격이 없다는 것을 인정하면서.
엘리베이터 안은 조용했다. 아까의 엘리베이터와 달리, 이곳의 벽은 거울이 아니었다. 단지 흰색 페인트였다. 인위적인 조명 아래, 세 사람의 그림자만 보였다. 그림자도 민준의 것이 가장 옅었다. 마치 자신이 점차 투명해지고 있는 것처럼.
“아버지 장면이에요?”
우리가 속삭였다. 엘리베이터 안이라 다른 사람을 의식해서인가, 그녀의 목소리는 아주 작았다.
민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시나리오를 다시 떠올렸다. 그것은 그의 가슴팍에 구겨진 채 들어있었다. 주머니 속의 종이. 아버지와의 장면. 그것은 마치 자신의 심장을 베어내라는 명령처럼 느껴졌다.
아버지가 침대에 누워있다. 창밖으로는 도시의 불빛이 보인다. 아들은 아버지의 손을 잡고 있다. 아버지는 죽음 직전이다. 아들은 아버지에게 말한다. “미안합니다. 제가 더 잘했으면… 제가 아버지를 도왔으면… 제가 아버지를 살렸으면… 미안합니다.”
그것이 장면의 전부였다. 대사는 없었다. 단지 침묵과 감정만 있었다. 프로듀서의 지시에는 명확하게 적혀있었다. “배우의 가장 깊은 감정을 드러낼 수 있는 장면. 말이 아닌 존재 자체로 표현할 것.”
5층에서 엘리베이터가 멈췄다. 문이 열렸다.
A 스튜디오로 가는 복도는 길었다. 매우 길었다. 마치 시간이 늘어나는 것처럼. 한 발을 내딛고, 또 한 발을 내딛고. 준호는 여전히 민준 뒤에 서 있었다. 우리는 민준 옆에 있었다. 그들은 마치 경호원 같았다. 혹은 무덤의 관을 메고 가는 사람들 같았다.
A 스튜디오의 문 앞에서 멈췄다.
“들어가기 전에 한 가지만.”
준호가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매우 차분했지만, 그 안에는 무언가 절박함이 숨어있었다.
“넌 아버지를 생각하는 게 아니야. 넌 아버지를 보는 거야. 침대에 누워있는 아버지. 그 아버지의 얼굴을 본다고 생각해. 그리고 그 얼굴에서 눈을 떼지 마. 어떻게 되든지, 카메라가 어디에 있든지, 감독이 뭐라고 하든지. 넌 아버지만 본다. 이해했나?”
민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입을 열 수 없었다. 목이 쨀 것 같았다. 마치 누군가가 자신의 목을 조이고 있는 것처럼.
우리가 민준의 손을 잡았다. 그 손은 차가웠다. 아니, 민준의 손이 차가운 것인지, 아니면 우리의 손이 따뜻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단지 두 손이 만났을 때, 뭔가가 흐르는 것 같았다. 전기처럼. 아니면 영혼의 이동처럼.
“넌 할 수 있어.”
우리의 목소리는 확신으로 가득했다. 하지만 민준은 그 확신이 거짓일 수도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배우들은 거짓을 하는 전문가였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우리의 거짓이 진실처럼 느껴졌다.
민준은 깊게 숨을 쉬었다. 코로 들이마시고, 입으로 내쉬었다. 준호가 가르쳐준 대로. 그 호흡 속에서 자신의 신경이 조금씩 안정되었다. 마치 누군가가 자신의 뇌에서 불안의 케이블을 하나씩 뽑아내는 것처럼.
“들어갈게요.”
민준이 말했다. 자신의 목소리는 매우 작았다. 하지만 확실했다.
A 스튜디오의 문을 열었다.
안에는 세 명이 있었다. 감독, 프로듀서, 그리고 카메라맨. 모두 불필요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이미 수십 명의 배우를 본 사람들의 표정. 흥미 없음이 가득 찬 표정. 하지만 민준은 신경 쓰지 않았다. 우리의 말이 떠올랐다. “넷플릭스는 배우를 보는 게 아니라 진짜 인간을 본다”
스튜디오의 한쪽에는 침대가 놓여있었다. 병원 침대. 흰 시트가 씌워져있었다. 그 침대가 마치 무덤처럼 보였다. 민준은 침대 옆에 무릎을 꿇었다. 감독이 뭔가를 지시했다. 하지만 민준은 그 말을 듣지 않았다. 그 순간, 자신의 귀는 작동을 멈추었다. 시각만 남았다. 그리고 감각. 그리고 기억.
침대는 비어있었다. 아무도 누워있지 않았다. 하지만 민준은 그곳에 누군가를 봤다.
아버지였다.
현수. 그 이름을 부르고 싶었지만, 목이 나오지 않았다. 대신 눈물이 먼저 나왔다. 그것은 연기가 아니었다. 순전히 자신의 감정이었다. 10년간 억눌렀던 감정이 한 순간에 터져나왔다.
침대 위의 아버지는 조용했다. 마치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민준은 아버지의 손을 잡았다. 침대 위의 허공에. 하지만 그 손은 명확하게 느껴졌다. 따뜻했다. 살아있는 손처럼.
“미안합니다.”
민준의 목소리가 나왔다. 하지만 그것은 자신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다른 누군가의 목소리. 혹은 아버지의 목소리가 민준의 입에서 나오는 것처럼.
“제가… 제가 더 잘할 수 있었어요. 아버지 옆에서 더 강할 수 있었어요. 제가 아버지를 지켜낼 수 있었어요.”
민준은 계속 말했다. 시나리오에 없는 말들이 나왔다. 하지만 감독은 멈추라고 하지 않았다. 카메라는 계속 돌아가고 있었다.
“아버지가 왜 그랬는지… 이제야 알 것 같아요. 아버지도 무서웠던 거예요. 내일이 무서웠던 거예요. 자신이 충분하지 못할까봐 무서웠던 거예요. 그래서… 그래서 떠나버리신 거지요.”
눈물이 계속 흘렀다. 그것은 폭력적인 울음이 아니었다. 마치 누군가가 자신의 심장에 구멍을 낸 것처럼, 조용하지만 끝없이 흐르는 울음이었다.
“근데 아버지… 제 말 들어요? 저는… 저는 아직 살아있어요. 아직도 여기 있어요. 아버지가 저한테 주신 것들이 있어요. 그것들이 저한테 아직 남아있어요.”
민준은 아버지의 손을 더 깊게 움켜잡았다. 허공을 움켜잡았다.
“제가 약한 배우가 된 것도 아버지 때문이에요. 제가 자신을 감춘 것도 아버지 때문이에요. 하지만… 하지만 그게 제 힘이었어요. 그것들이 저를… 지금까지 살게 해줬어요.”
침대 위에는 여전히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민준은 그곳에 가장 명확한 누군가를 봤다.
“미안합니다. 아버지. 정말로… 정말로 미안합니다. 하지만 저는 포기하지 않을 거예요. 아버지가 할 수 없었던 것들을 저는 할 거예요. 아버지가 가지 못했던 무대에 제가 올라갈 거예요. 약한 배우로서. 약한 인간으로서.”
그 순간, 민준은 카메라를 본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니, 그는 카메라를 본 것이 아니라, 카메라 너머의 누군가를 봤다. 감독. 프로듀서. 그리고 스튜디오 밖의 누군가. 그 모든 사람들을 본 것이 아니라, 단지 하나의 시선을 본 것이었다.
아버지의 시선. 그것이 자신을 본다고 느꼈다.
“아버지… 제가 잘하고 있나요?”
그 질문은 장면 밖의 질문이었다. 시나리오에 없는 질문이었다. 하지만 가장 진실한 질문이었다. 민준은 그 질문을 마지막 숨결처럼 내뱉었다.
침대 위의 아버지는 여전히 침묵했다. 하지만 그 침묵이 답이었다.
“OK. 컷.”
감독의 목소리가 들렸다.
카메라가 멈췄다. 스튜디오의 불빛이 다시 제대로 들어왔다. 민준은 여전히 침대 옆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그의 손은 여전히 허공을 움켜잡고 있었다.
감독은 뭔가를 적고 있었다. 프로듀서는 자신의 노트북을 보고 있었다. 그들의 표정은 여전히 읽을 수 없었다.
“오디션은 끝났어요. 나가셔도 돼요.”
카메라맨이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친절했다. 하지만 그것은 전문적 친절이었다. 배우를 구별하지 않는 기계적 친절이었다.
민준은 침대에서 손을 떼었다. 그것은 마치 누군가를 떠나보내는 행위처럼 느껴졌다. 아버지를 다시 한 번 떠나보내는 것. 하지만 이번에는 다를 것이라고 민준은 생각했다. 이번에는 자신이 따라가지 않을 것이다.
민준은 일어섰다. 그의 다리는 떨리고 있었다. 마치 저항하는 것처럼.
스튜디오를 나왔다. 복도에는 준호와 우리가 서 있었다. 그들은 민준을 본다는 것을 기다리고 있었다.
민준이 나왔을 때, 우리의 눈이 가장 먼저 움직였다. 그녀는 민준의 얼굴을 봤다. 울음자국이 남아있는 얼굴. 하지만 그 얼굴에는 뭔가 다른 것이 있었다. 무언가 깨진 것이 동시에 새로워진 것처럼.
“어땠어?”
우리가 물었다.
민준은 대답하지 못했다. 대신 준호와 우리의 품으로 안겼다. 그것은 배우 같은 몸짓이 아니었다. 순전한 인간의 몸짓이었다. 약함을 드러내는 몸짓이었다.
“잘했다.”
준호가 민준의 등을 토닥거렸다. 손가락이 그의 등뼈를 따라 내려갔다. 마치 자신의 모든 두려움이 그 손가락과 함께 빠져나가는 것처럼 느껴졌다.
복도는 여전히 길었다. 하지만 이제 그 길이 다르게 느껴졌다. 아까는 무덤으로 가는 길이었다면, 지금은 세상으로 나오는 길이었다.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갔을 때, 민준은 자신의 손을 봤다. 더 이상 떨리지 않고 있었다. 그 손은 다시 자신의 것이 되어있었다.
1층으로 내려가면서, 민준은 생각했다.
이제 뭐가 남아있지?
성공도, 실패도 없었다. 단지 자신이 무언가를 했다는 것만 있었다. 처음으로, 완전히 자신을 드러내고 무대에 섰다는 것만 있었다.
로비를 나갔다.
강남의 햇빛이 얼굴을 비추었다. 따뜻했다. 혹은 뜨거웠다. 민준은 눈을 감았다.
그리고 그 순간, 휴대폰이 울렸다.
그 밤 11시 47분, 더스타 엔터테인먼트의 대표 이수진은 자신의 사무실에 앉아있었다.
화면 앞에는 넷플릭스 프로듀서와의 화상 통화가 연결되어있었다. 영어로 진행되는 대화였다.
“The actor named Min-jun… he’s incredible.”
이수진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He’s very new. You’re sure?”
“I’m completely sure. When can he start?”
이수진은 창밖을 봤다. 서울의 야경이 펼쳐져있었다. 그 어딘가에 민준이 있을 것이다. 아직 자신이 합격했다는 것을 모르는 채로.
“He’ll be ready whenever you need.”
화상 통화가 끝났다.
이수진은 자신의 휴대폰을 들었다. 민준에게 전화를 걸기 전에, 그녀는 한 가지 생각을 했다.
배우는 타이밍이다. 모든 것이 타이밍이다.
그리고 지금이 민준의 타이밍이었다.
# 타이밍
## 1부: 기다림
복도의 형광등이 깜빡였다. 민준은 그 깜빡거림을 세고 있었다. 하나, 둘, 셋. 리듬이 없었다. 불규칙한 깜빡임은 마치 자신의 심장박동을 반영하는 것 같았다.
옆에는 준호가 서 있었다. 준호의 손가락이 자신의 청바지 옆주머니에서 나왔다 들어갔다를 반복했다. 준호도 긴장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민준은 그것을 보고 조금 안심했다. 자신만 떨리는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아직도 안 나왔어?”
민준이 물었다. 자신의 목소리가 자신의 것처럼 들리지 않았다. 마치 다른 사람이 자신의 성대를 통해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얇고, 가늘고, 불안정한 목소리.
준호는 시계를 봤다. 아이폰의 화면을 켰다가 다시 껐다. 그 과정을 반복했다.
“시간이 멈춘 것처럼 느껴져.”
준호의 목소리도 마찬가지였다. 둘 다 불안정했다. 마치 같은 파장에 공명하고 있는 것처럼.
복도의 벽은 회색이었다. 회색의 페인트가 벗겨져 있는 부분도 있었다. 오래된 건물이었다. 서울의 강남역 근처. 더스타 엔터테인먼트의 사무실이 있는 건물이었다. 민준은 이 복도를 수십 번은 지나쳤을 것 같다. 하지만 오늘따라 유독 길게 느껴졌다.
옆에 서 있는 준호를 흘깃 봤다. 준호는 자신의 친구였다. 아니, 매니저였다. 아니, 둘 다였다. 준호는 민준이 처음 사무실에 들어왔을 때부터 함께했던 사람이었다. 6년이 되었나? 아니, 7년? 시간은 이상했다. 어떨 때는 하루가 한 달처럼 길었고, 어떨 때는 한 달이 하루처럼 짧았다.
“민준아.”
준호가 말했다.
“뭐?”
“넌 할 수 있어. 이미 했어.”
민준은 준호의 말을 들었지만, 그 말이 자신에게 닿지 않는 것 같았다. 귀로는 들었지만, 마음으로는 받지 못하고 있었다. 준호의 말은 마치 먼 곳에서 들려오는 목소리 같았다. 물 속에서 누군가를 부르는 목소리처럼.
“이미 했다고?”
민준이 반복했다.
“응. 넌 이미 무대 위에 섰어. 그게 가장 어려운 부분이야. 이제 결과는 상관없어. 넌 이미 이겼어.”
준호의 말은 논리적이었다. 하지만 민준은 논리를 필요로 하지 않았다. 민준은 희망을 필요로 했다. 그리고 준호가 주는 것은 희망이 아니라 현실적인 조언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도움이 되었다.
민준은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 숨을 천천히 내쉬었다. 복도의 회색 벽이 조금씩 명확해지기 시작했다. 형광등의 깜빡거림도 조금은 규칙적으로 느껴지기 시작했다.
“고마워. 준호.”
민준이 말했다.
준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민준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그 손이 가하는 압력은 약했지만, 그 안에는 모든 것이 담겨 있었다. 응원, 신뢰, 그리고 함께한다는 것.
그 순간, 오른쪽 복도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둘 다 고개를 들었다.
## 2부: 출현
민준이 나왔다.
아니, 정확하게는 그 사람이 나왔다. 그런데 그 사람이 정말 민준일까? 민준은 생각했다. 자신을 보는 것 같았지만, 자신을 보는 것이 아닌 것 같았다.
민준의 얼굴은 빨갛게 부어있었다. 울음의 흔적이 선명했다. 눈가는 붓고, 뺨은 축축했다. 마치 방금 전까지 울고 있었다는 것을 모든 사람이 알 수 있도록 하는 그런 얼굴이었다.
하지만 그 얼굴에 있던 또 다른 것이 준호와 자신의 눈을 사로잡았다.
그것은 무엇이었을까?
민준은 생각했다. 패배? 아니었다. 성공? 아니었다. 그것은… 변화였다. 마치 무언가가 깨지고 동시에 새로워지는 그런 느낌. 마치 겨울이 지나고 봄이 오는 그런 느낌. 또는 나비가 번데기에서 나오는 그런 느낌.
그 얼굴은 이전의 민준이 아니었다.
준호가 먼저 말을 꺼냈다.
“어땠어?”
목소리는 조심스러웠다. 마치 깨질 수 있는 유리를 다루듯이.
민준의 입이 움직였다. 하지만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 대신 민준의 몸이 움직였다. 두 팔이 준호와 자신을 향해 움직였다.
안긴다는 것이 무엇인지, 그 순간 민준은 다시 배웠다.
그것은 배우 같은 몸짓이 아니었다. 드라마에서 보던 그런 세련된 포옹이 아니었다. 그것은 순전한 인간의 몸짓이었다. 약함을 드러내는 몸짓이었다. 도움을 청하는 몸짓이었다. 더 이상 강해야 한다는 생각을 내려놓은 몸짓이었다.
준호는 민준의 등을 토닥거렸다. 손가락이 그의 등뼈를 따라 내려갔다. 등뼈 하나하나를 인식하면서 천천히. 마치 그 손가락이 모든 두려움, 모든 불안감, 모든 자책을 빨아내는 것처럼.
“잘했다.”
준호가 말했다.
“정말 잘했어.”
준호의 목소리가 떨렸다. 이제 준호도 울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눈물을 흘리지는 않았다. 다만 목소리가 그 감정을 전달했다.
얼마나 오래 그렇게 서 있었을까?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복도의 형광등도 깜빡거리지 않았다. 세상이 그들을 위해 멈춘 것처럼 보였다.
“가자.”
민준이 말했다. 목소리는 이제 더 안정적이었다.
## 3부: 통로
복도를 걸었다.
아까는 무덤으로 가는 길이었다. 그렇게 느껴졌다. 한 발 한 발이 묘지로 향하는 발걸음 같았다. 하지만 이제는 달랐다. 이제는 세상으로 나오는 길이었다.
민준은 그것을 느낄 수 있었다. 자신의 몸이 공기를 다르게 느끼고 있었다. 아까는 공기가 무겁게 느껴졌다면, 지금은 가볍게 느껴졌다. 마치 공기가 자신을 지탱해주고 있는 것 같았다.
“민준아, 혹시… 어떻게 되었어? 합격했어?”
준호가 물었다.
민준은 대답하지 않았다. 준호가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 알았지만, 자신이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
“모르겠어. 나가봐야 알 것 같아.”
그것이 솔직한 대답이었다.
준호는 웃었다. 조금 이상한 웃음이었지만, 그것이 실제 웃음이었다.
엘리베이터 앞에 도착했다. 민준은 버튼을 눌렀다.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렸다.
## 4부: 강하강
엘리베이터 안은 차갑고 밝았다. LED 조명이 모든 것을 명확하게 비추고 있었다.
민준은 자신의 손을 봤다.
더 이상 떨리지 않고 있었다.
자신의 손이 다시 자신의 것이 되어 있었다. 통제 가능한, 예측 가능한, 자신의 것이었다.
엘리베이터가 천천히 내려갔다. 층수를 나타내는 숫자들이 하나씩 줄어들었다. 12층에서 11층으로. 11층에서 10층으로.
민준은 생각했다.
_이제 뭐가 남아있지?_
성공도 없었다. 합격 통지도 받지 못했다. 실패도 없었다. 떨어졌다는 확정 통지도 받지 못했다. 단지 자신이 무언가를 했다는 것만 있었다.
처음으로.
완전히 자신을 드러내고 무대에 섰다는 것만 있었다.
배우라는 것이 무엇인지, 그제야 민준은 알 수 있었다. 그것은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자신을 노출하는 것이었다. 자신의 약함을, 자신의 두려움을, 자신의 절망을 무대 위에 펼쳐놓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순간, 민준은 자유로워졌다.
6층. 5층. 4층.
엘리베이터가 계속 내려갔다.
## 5부: 로비
1층의 로비는 밝았다.
강남의 햇빛이 유리 문을 통해 들어오고 있었다. 오후 3시 정도의 햇빛이었을 것 같다. 강하고, 따뜻하고, 살아있는 햇빛.
민준이 로비를 나갔다.
햇빛이 얼굴을 비추었다.
따뜻했다. 또는 뜨거웠다. 차이가 무엇인지 민준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 감각이 자신이 살아있다는 것을 증명했다.
민준은 눈을 감았다.
검은색이 세상을 덮었다. 하지만 그 검은색 속에서도 햇빛을 느낄 수 있었다. 눈꺼풀을 통과하는 열과 빛.
그 순간이 영원히 지속되기를 바랐다.
하지만 세상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휴대폰이 울렸다.
## 6부: 야경
그 밤, 11시 47분.
강남역의 더스타 엔터테인먼트 사무실. 14층의 대표 이수진의 사무실.
이수진은 자신의 의자에 앉아 있었다. 그 의자는 매우 비싼 의자였다. 이탈리아 디자이너가 만든 의자. 하지만 그 의자에 앉아 있는 동안에도 이수진의 몸은 긴장으로 경직되어 있었다.
화면 앞에는 화상 통화가 연결되어 있었다.
넷플릭스의 프로듀서였다. 미국의 뉴욕에서 전화를 걸었다. 시차를 무시하고.
“The actor named Min-jun… he’s incredible.”
영어였다. 미국 영어. 약간의 악센트가 있었지만, 확실했다.
이수진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그 미소는 예정된 미소가 아니었다. 진실한 미소였다.
“He’s very new. You’re sure?”
이수진이 물었다.
“I’m completely sure. When can he start?”
프로듀서의 목소리에는 확신이 있었다. 그것은 사업가로서 많은 배우들을 본 사람의 확신이었다.
이수진은 창밖을 봤다.
서울의 야경이 펼쳐져 있었다. 강남역 주변의 건물들이 불을 밝히고 있었다. 네온사인들이 깜빡거렸다. 자동차들의 헤드라이트가 강남의 밤거리를 밝혔다.
그 어딘가에 민준이 있을 것이다.
아직 자신이 합격했다는 것을 모르는 채로.
이수진은 생각했다. 민준이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까? 가족들에게 전화를 했을까? 친구들에게 물었을까? 아니면 혼자 어딘가에 앉아서, 오늘의 촬영을 되새기고 있을까?
배우는 타이밍이다.
이수진은 자신의 좌우명처럼 생각했다.
모든 것이 타이밍이다.
역할, 기회, 운명. 그 모든 것이 타이밍이다.
그리고 지금이 민준의 타이밍이었다.
“He’ll be ready whenever you need.”
이수진이 말했다.
## 7부: 통지
휴대폰이 울렸다.
민준은 로비를 나가서 건물 옆의 작은 공원에 앉아 있었다. 강남의 작은 공원. 많은 사람이 있었지만, 조용했다.
스크린을 봤다.
더스타 엔터테인먼트. 이수진 대표.
손가락이 떨렸다. 아까 엘리베이터 안에서 멈췄던 떨림이 다시 돌아왔다.
“여보세요?”
민준이 대답했다.
“민준아. 축하해.”
이수진의 목소리는 따뜻했다. 하지만 그것은 거짓 따뜻함이 아니었다. 진실한 따뜻함이었다.
“네… 뭘요?”
민준은 아직도 확신할 수 없었다.
“넷플릭스 프로듀서가 너를 봤어. 넌 합격했어. 그들은 너와 함께 일하고 싶대. 국제 프로젝트야. 너는 이제 국제 배우가 되었어.”
그 말이 들렸다.
하지만 민준의 뇌는 그 말을 처리할 수 없었다.
마치 외국어를 듣는 것처럼.
마치 자신의 것이 아닌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 것처럼.
“정말… 정말요?”
“정말이야. 잘했어, 민준.”
전화가 끝났다.
민준은 손에 들려 있는 휴대폰을 봤다.
그 휴대폰이 자신의 인생을 바꾸었다.
하지만 인생은 여전히 같아 보였다. 같은 공원, 같은 건물, 같은 도시.
오직 자신만 달라졌다.
## 에필로그: 새로운 시작
그 밤, 민준은 집에 돌아갔다.
엄마에게 전화했다.
엄마는 울었다.
아빠는 너무 자랑스러워한다고 말했다.
민준은 친구들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모두가 축하했다.
하지만 민준이 느낀 것은 축하의 감정이 아니었다.
느낀 것은 평온함이었다.
마치 오랜 항해를 마치고 항구에 도착한 선원처럼.
마치 오랫동안 걸었던 길의 끝에 도착한 나그네처럼.
민준은 거울 앞에 섰다.
거울 속의 자신을 봤다.
그 얼굴은 이제 울음의 흔적이 사라졌다.
하지만 그 얼굴에는 뭔가 다른 것이 남아 있었다.
무언가 깨진 것이 동시에 새로워진 것.
무언가 죽은 것이 동시에 태어난 것.
민준은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는 배우의 미소가 아니었다.
그것은 민준의 미소였다.
그리고 그 미소 속에는 모든 것이 담겨 있었다.
모든 고민, 모든 두려움, 모든 희망.
그리고 타이밍.
완벽한 타이밍.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