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트라이트: 제2막 – 제11화: 네 발자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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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1화: 네 발자국

민준은 연습실 문 앞에 서 있었다. 손가락이 문고리를 향해 뻗어있었지만, 밀어내지 못했다. 시간은 오전 10시 23분. 회사 내 모든 연습실이 그러하듯, 이곳도 예외는 아니었다. 작은 거울, 나무 바닥, 형광등. 그런데 이번에는 거울 앞에 우리가 서 있을 것이다. 그리고 민준은 그 앞에 나타날 용기가 없었다.

라커룸에서 나온 지 세 시간이 지났다. 그 세 시간 동안 민준은 회사 건물의 여러 곳을 돌아다녔다. 옥상, 지하 주차장, 카페테리아, 화장실. 어디든 우리를 마주치지 않을 수 있는 곳. 준호의 말이 자꾸만 귓가를 맴돌았다. “적어도 그 두 명 앞에서는.” 그 말의 의미가 무엇인지 민준은 알고 있었다. 그것은 단순한 위로가 아니라 명령이었다. 다시 말해서, 나타나라는 뜻. 얼굴을 보여라. 도망치지 말아라.

문을 밀었다.

연습실은 생각보다 밝았다. 아침 햇빛이 창문을 통해 쏟아져 들어와 있었고, 거울은 그 빛을 반사하고 있었다. 우리는 거울 앞에 서 있지 않았다. 대신 바닥에 앉아 있었다. 등을 거울에 기대고 있었다. 무릎을 세우고, 팔을 무릎 위에 올려놓은 채로.

그 모습을 보는 순간, 민준의 호흡이 얕아졌다.

“어.”

우리가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눈은 민준을 바라봤다. 그 눈에는 슬픔이 있었다. 하지만 그것만은 아니었다. 분노도 있었고, 피로도 있었고, 그리고 무언가 더 깊은 것—실망과 희망이 뒤섞인 어떤 것.

“어라고 뭐야. 마치 처음 본 것처럼.”

우리의 목소리는 낮았다. 뮤지컬 배우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그냥 피곤한 한 여자의 목소리였다.

민준은 연습실 안으로 들어갔다. 문을 닫지 않았다. 열린 상태로 두었다.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서. 혹은 그 열린 문이 그들 사이의 거리를 줄여줄 것이라는 희망으로.

“어제밤을 지내셨습니까?”

그렇게 묻는 것 자체가 우스웠다. 민준은 그것을 알고 있었다. 우리는 라커룸에서 밤을 샜을 것이다. 혹은 연습실. 아니면 카페. 어디든 집이 아닌 곳에서. 자신을 기다리다가.

“아, 뭐 이런 질문이 있어.”

우리가 웃었다. 웃음이 아니라 낄낄거림에 가까웠다. 극도의 피로 속에서 나오는 그런 소리.

“나는… 죄송합니다.”

“그 말 또 하는 거야?”

우리가 일어났다. 천천히. 마치 늙은 사람이 일어나는 것처럼. 그녀의 검은 운동복에는 먼지가 묻어있었다. 바닥에서 밤을 샌 증거. 머리는 어제와 같은 방식으로 묶여있었고, 얼굴은 창백했다. 메이크업을 하지 않은 얼굴. 배우들이 가장 보여주고 싶지 않은 얼굴.

“넌 계속 그 말만 해.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그 말이 뭐가 되는 거야? 아무것도 안 되지. 넌 그 말로 뭘 하려고 해?”

민준은 대답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우리의 질문이 정확했기 때문이었다. 죄송합니다. 그 말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것은 단지 자신의 감정을 차단하는 방식이었다. 마치 방탄 유리처럼.

“내가 뭘 원했는데?”

우리가 다시 물었다.

“나는 너의 진짜 마음을 원했어. 너의 진짜 감정을 원했어. 그런데 넌 계속 벽을 세우고 있어. 그 벽 뒤에서 나한테 ‘죄송합니다’라고 말해. 그게 뭐하는 거야?”

민준은 우리를 바라봤다. 정확하게. 피하지 않고. 그 창백한 얼굴, 그 흔들리는 목소리, 그 눈물로 젖은 눈 언저리를 모두 봤다. 그리고 그것은 모두 자신 때문이었다.

“저는…”

민준이 입을 열었다. 이번에는 존댓말이 아니었다.

“나는 너를 상처 입히기 싫어.”

“그래서 날 멀리하는 거야? 그게 상처를 안 입히는 거라고 생각하니?”

우리가 웃음을 터뜨렸다. 진짜 웃음이 아니라 비웃음에 가까웠다.

“넌 정말 이상한 사람이야. 날 상처 입히지 않으려고 날 상처 입혀. 그게 논리가 되니? 이미 날 상처 입혔는데, 넌 지금도 계속 상처 입히고 있어.”

그 말이 맞았다. 민준은 그것을 인정했다. 자신의 거절, 자신의 침묵, 자신의 거리두기. 그 모든 것이 상처였다. 차라리 말하는 것이, 나누는 것이 나았을 것이다. 하지만 민준은 그렇게 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누군가에게 기대는 순간, 자신이 무너질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넌 아직도 아버지 때문에 이러는 거야?”

민준의 몸이 경직되었다.

“뭐?”

“준호 형이 얘기했어. 너 아버지 얘기.”

민준은 준호를 증오했다. 그 순간, 그 생각이 명확했다. 준호가 자신의 비밀을 넘겨주었다. 그것은 배신이었다.

“너 자살한 아버지 때문에 자꾸만 혼자 하려고 하는 거지? 누군가에게 기대면 그 사람도 나처럼 무너질까봐? 그래서 날 밀어내는 거야?”

우리의 분석은 정확했다. 정확하기에 더 상처였다.

“그건…”

“뭐야? 그건 뭐야?”

“그건 당신이 알 수 없는 문제입니다.”

민준이 존댓말로 돌아갔다. 그것은 방어 메커니즘이었다. 존댓말이 되는 순간, 거리가 생기고, 그 거리 너머에서 말할 수 있었다.

우리가 한 발 물러섰다. 마치 누군가가 자신을 때린 것처럼.

“알 수 없는 문제?”

그녀의 목소리는 떨렸다.

“너 정말… 진짜 이상한 사람이야.”

우리가 연습실 문 쪽으로 가려고 했다. 그 순간, 민준이 손을 들었다. 마치 누군가를 잡으려는 것처럼. 하지만 손가락은 공기만 잡았다.

“우리야.”

그렇게 불렀다. 우리의 이름. 처음으로 진정한 음성으로.

우리가 멈췄다. 돌아보지는 않았지만, 멈췄다.

“나는… 내 아버지가 자살했습니다. 내가 고등학교 3학년일 때.”

민준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거짓이 아니었다. 진정한 떨림.

“그 이후로 나는 누군가에게 도움을 받으면, 그 사람도 나처럼 무너질까봐 두렵습니다. 누군가를 좋아하면, 그 감정이 그 사람을 파괴할까봐 두렵습니다. 그래서 나는 혼자 하려고 했습니다. 그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사랑이라고 생각했으니까.”

우리가 천천히 돌아섰다.

“나는 당신이 밤 1시까지 지하 연습실에 있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당신이 아침 일찍 라커룸에서 나를 기다렸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그 모든 것을 느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두려웠습니다. 당신이 나를 위해 그렇게 하면, 언젠가 내가 당신을 실망시킬 날이 올 것이고, 그 날 당신도 무너질까봐.”

민준은 자신이 하는 말을 들으면서 이상한 감각을 느꼈다. 마치 누군가 다른 사람이 말하고 있는 것처럼. 하지만 그것은 자신의 목소리였다. 자신의 진정한 목소리.

“나는 약합니다. 충분하지 않습니다. 좋은 배우도 아닙니다. 그런데 당신은 계속 나를 보려고 합니다. 그것이…”

민준의 목소리가 끊어졌다.

“그것이 무섭습니다.”

우리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이번에는 우는 척하지 않았다. 진짜로 울었다.

“그래서 날 밀어낸 거야?”

“네.”

“정말 바보네.”

우리가 손을 들어 자신의 눈을 닦았다.

“넌 정말 바보야. 나는 날 파괴시킬 준비가 되어 있었어. 만약 넌 내가 무너지게 하면, 그건 내 선택이야. 내가 너를 선택한 거야. 그런데 넌 나한테 그 선택권을 안 준 거야? 그게 뭐하는 거야?”

민준은 우리를 향해 한 발 다가섰다.

“나는…”

“뭐야?”

“나는 당신이 필요합니다.”

그 말이 나왔을 때, 우리의 몸이 움직였다. 마치 그 말이 그녀를 움직이게 한 것처럼. 그녀는 민준 쪽으로 다가왔다. 천천히. 마치 깨질 수 있는 것을 건드리는 것처럼.

“지금 뭐라고 말했어?”

“당신이 필요합니다.”

“또 뭐해? 존댓말로?”

민준은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극도의 피로와 극도의 해방이 섞인 웃음.

“당신이 필요해. 정말 필요해.”

그렇게 말했을 때, 우리는 민준을 껴안았다. 갑자기. 예고 없이. 마치 자신이 사라질까봐 잡아두려는 것처럼.

“진짜 바보야. 정말로.”

우리의 목소리는 민준의 어깨에 묻혔다.

민준은 우리의 등을 쓸어내렸다. 그것은 위로였다. 아니, 더 정확하게는 자신도 위로받고 있다는 신호였다. 누군가가 나를 잡고 있다. 나는 혼자가 아니다. 그런 신호.

얼마나 오래 그들이 그렇게 서 있었는지, 민준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시간의 길이가 아니라, 그 순간의 무게가 중요했다.

우리가 민준에게서 물러섰다. 하지만 손은 놓지 않았다. 민준의 손을 잡은 채로.

“넷플릭스 오디션 내일이지?”

“네.”

“넌 준비했어?”

“모르겠습니다.”

“모르겠다고? 너 지난 일주일을 뭐했어.”

“고민했습니다.”

“고민만 했어? 연습은?”

민준은 대답하지 않았다. 우리가 그것을 알았다. 고민만 했다는 뜻.

“오늘 밤 우리 연습하자. 나랑.”

“네?”

“뭐 문제가 있어? 시나리오 봤어?”

민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거 해석해 봐. 너 지금까지 뭘 하고 있었어?”

민준은 생각해 봤다. 지난 일주일. 자신은 시나리오를 읽었다. 수백 번. 하지만 읽기만 했다. 이해하지 못한 채로.

“저는… 캐릭터를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걸 왜 지금 말해?”

“당신이 물어봤으니까요.”

우리가 손으로 민준의 가슴을 쳤다. 가볍게. 하지만 의미 있게.

“너 정말 이상한 사람이야. 혼자 고민만 하고 있었어? 나한테 물어볼 생각은 없었어? 형한테 물어볼 생각은?”

“폐가 될까봐…”

“그 말 또 하는 거야?”

우리가 다시 민준을 껴안았다. 이번에는 짧게. 하지만 강하게.

“넌 절대 폐가 아니야. 알겠어? 절대로.”

연습실은 오전 10시 45분이 되었다. 두 배우는 시나리오를 펼쳤다. 민준과 우리. 그들은 서로의 캐릭터를 읽기 시작했다.

우리가 맡은 캐릭터는 여자였다. 아내. 남편의 배신을 발견한 여자. 그 장면은 극도로 조용했다. 물건을 부수지도, 소리를 지르지도 않았다. 그저 고요함. 그 고요함이 더 무서운 장면.

민준이 맡은 캐릭터는 남자였다. 배신자. 자신의 행동에 대한 설명을 시도하는 남자. 하지만 어떤 설명도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아는 남자.

“너는 누구야?”

우리가 읽었다. 시나리오의 그 대사. 하지만 그 대사는 이제 연기가 아니었다. 그것은 진정한 질문이었다.

민준이 대답했다.

“미안해. 진짜 미안해.”

그 대사도 시나리오에는 없었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그 순간, 무언가가 연습실에서 변했다. 마치 그들 사이의 공기가 전기로 충전된 것처럼.

“미안하면 뭐 해? 이미 늦었잖아.”

우리가 차분하게 말했다. 배우의 음성으로. 아니, 이제 그것은 배우의 음성이 아니라, 한 여자의 진정한 목소리였다.

“나는 당신을 믿었어. 그 믿음이…”

우리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 믿음이 깨졌어.”

민준은 우리를 바라봤다. 정확하게. 피하지 않고. 그리고 대답했다.

“나는 그 믿음을 다시 얻을 수 없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나는 시도하겠다.”

“그래? 언제부터?”

“지금부터. 이 순간부터.”

연습은 계속되었다. 오전 11시. 오후 12시. 오후 1시. 시간이 지나면서 그들의 읽기는 변했다. 처음에는 시나리오를 읽는 것이었다면, 지금은 그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각각 자신의 캐릭터가 되어 있었다. 민준은 배신자가 되었고, 우리는 상처받은 여자가 되었다.

오후 2시 30분. 라커룸의 문이 열렸다.

성준이 들어섰다. 그는 연습실 문이 열려있는 것을 보고, 그 안을 들여다봤다. 민준과 우리가 시나리오 리딩을 하고 있었다. 성준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마치 누군가가 자신의 것을 빼앗아 간 것처럼.

“어? 넷플릭스 시나리오?”

성준이 물었다.

“응. 민준이 내일 오디션이야.”

우리가 대답했다. 자신들의 리딩을 멈추지 않고.

“어? 그건 내가 준비하는 역할 아니었나?”

성준의 목소리에는 뭔가가 있었다. 분노? 아니면 더 깊은 불안감?

“아니야. 넷플릭스는 여러 명이 오디션을 봐. 너도 다른 역할로 본다고 했잖아.”

우리의 말은 정확했다.

성준은 그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사실이라는 것이 더 자극적이었다. 다시 말해서, 민준도 자신처럼 기회를 받았다. 신인인데.

“그럼 넌 어디서 배우는 거야?”

성준이 우리에게 물었다. 하지만 그의 눈은 민준을 보고 있었다.

“내가 도와주고 있어.”

“도와준다고? 시나리오 리딩?”

성준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것은 좋은 웃음이 아니었다.

“그거 별로 도움이 안 되는데. 차라리 프로덕션 PD와 만나서 그 사람의 스타일을 파악하는 게 더 중요하지. 시나리오 리딩? 그건 뭐 하는 짓이야.”

민준은 성준을 바라봤다. 그리고 그것을 깨달았다. 성준이 두려워하고 있다는 것. 그것은 경쟁이 아니라 공포였다.

“형이 맞습니다.”

민준이 말했다.

“뭐?”

“시나리오 리딩보다는 PD를 파악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그래. 나 잘 알지.”

성준이 라커룸에서 나갔다. 하지만 그의 뒷모습에는 뭔가가 흔들리고 있었다. 마치 댐이 터지려고 하는 것처럼.

연습실에 다시 고요함이 돌아왔다.

“저 애 괜찮을까?”

우리가 물었다.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걱정되네.”

우리가 시나리오를 다시 들었다.

“계속 해 봐. 마지막 장면 한 번 더.”

그렇게 말했을 때, 민준은 자신이 얼마나 행운인지를 깨달았다. 누군가가 자신을 믿고 있다는 것. 누군가가 자신을 위해 시간을 내고 있다는 것. 누군가가 자신을 보려고 한다는 것.

그것은 모두 자신이 처음에 거절했던 것들이었다.

오후 5시. 연습실을 나갈 때, 민준과 우리는 준호를 마주쳤다. 준호는 라커룸으로 들어가려고 하고 있었다.

“어? 너희 여긴 왜?”

준호가 물었다.

“오디션 준비 중이에요.”

민준이 대답했다.

준호의 얼굴에 뭔가가 스쳐 지나갔다. 만족감? 아니면 안도감?

“그래. 잘하고 있어. 계속 그렇게.”

준호가 손으로 민준의 어깨를 쳤다. 어제와 같은 방식으로. 그리고 이번에는 민준이 그 손을 받아들였다.

“감사합니다, 형.”

“뭐하는 말이야. 같은 배우끼리.”

준호가 라커룸 안으로 들어갔다. 그의 뒷모습은 어제보다 더 곧아 보였다.

민준과 우리는 회사 건물을 나갔다. 저녁 햇빛이 서쪽에서 들어오고 있었다. 그들의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졌다. 네 발자국. 민준의 발자국과 우리의 발자국이 나란히 움직였다.

“내일 잘할 거야. 너.”

우리가 말했다.

“네.”

“또 그 대답?”

“네. 당신 덕분에.”

우리가 손으로 민준의 팔을 링크했다. 팔을 끼우는 것이 아니라, 링크하는 것. 마치 둘이 하나가 되는 것처럼.

“나도 뮤지컬 오디션이 있어. 다음 주.”

“그렇군요.”

“그럼 우리 함께 준비하자. 서로 도와주면서.”

“네.”

거리를 걸으면서, 민준은 자신의 발자국을 봤다. 우리의 발자국과 나란히. 그리고 그것은 아름다웠다. 그 단순한 사실이. 혼자가 아니라는 것이.

오후 6시 30분. 민준의 오피스텔. 아주 작은 방. 침대, 책상, 거울, 그리고 시나리오 더미. 민준은 침대에 누워있었다. 천장을 보고 있었다.

내일이면 오디션이다.

그것이 중요한가?

아니다. 더 중요한 것은 다른 것이었다.

누군가가 자신을 위해 밤을 샜다.

누군가가 자신과 함께 시나리오를 읽었다.

누군가가 자신을 믿었다.

그것이 바로 배우로서 필요한 모든 것이었다.

민준은 휴대폰을 들었다. 우리에게 카톡을 보냈다.

오늘 감사합니다. 당신이 없었으면 나는 아직도 거울 앞에서 혼자 말하고 있었을 겁니다.

몇 초 뒤, 우리의 답장이 왔다.

뭐하는 소리. 우린 팀이야. 기억해? 그리고 내일은 반드시 합격. 알겠어?

민준은 그 메시지를 읽으면서 웃음을 터뜨렸다. 조용한 웃음. 하지만 진정한 웃음.

네. 반드시 합격하겠습니다.

오후 7시. 민준은 시나리오를 다시 펼쳤다. 하지만 이번에는 다르게 읽혔다. 마치 그 시나리오가 처음으로 말을 걸어오는 것처럼.

내일. 그 오디션 무대 위에서. 민준은 자신의 진정한 목소리를 낼 것이다. 혼자가 아니라, 누군가의 믿음을 등에 업고.

그것이 바로 배우가 되는 것이었다.

# 그림자 속의 믿음

## 1부: 어깨 위의 손길

라커룸 입구에서 준호가 스쳐 지나갔다. 민준은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준호의 눈동자에서 무언가가 흘러내렸다. 만족감인가? 아니면 안도감인가? 민준은 그 감정을 정확히 읽을 수 없었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어제 밤 준호의 얼굴에 있던 그 깊은 주름이 조금 펴졌다는 것이다.

“그래. 잘하고 있어. 계속 그렇게.”

준호의 목소리는 여전히 낮고 차분했다. 하지만 그 안에는 무언가 다른 톤이 섞여 있었다. 격려. 그것도 순수한, 계산 없는 격려였다.

민준의 어깨가 움찔했다. 준호의 손이 내려앉았기 때문이었다. 어제와 정확히 같은 방식으로. 어제는 그 손을 피했다. 너무 갑작스러웠고, 너무 따뜻했고, 그 따뜻함이 자신이 받을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민준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준호의 얼굴이 역광에 잠겼다. 스튜디오 천장의 조명이 그의 윤곽을 반짝이게 했다. 준호는 말없이 웃고 있었다. 아주 작은 웃음. 하지만 진정한 것.

“감사합니다, 형.”

목이 메였다. 민준은 그 사실을 깨달았다. 자신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다는 것을. 그것을 숨기기 위해 고개를 더 깊이 숙였다.

준호는 한 발 물러섰다. 손이 떨어졌다.

“뭐하는 말이야. 같은 배우끼리.”

그 말은 단순한 인사말이 아니었다. 그것은 선언이었다. 민준과 준호가 이제 같은 위치에 있다는 선언. 더 이상 선후배도 아니고, 경쟁자도 아니고, 피해자와 가해자도 아니라는 선언.

준호가 라커룸 안으로 들어갔다. 그의 뒷모습은 어제보다 훨씬 더 곧아 보였다. 어깨가 펴져 있었다. 마치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사람처럼.

민준은 그 뒷모습을 바라봤다. 그리고 생각했다. *사람은 정말 순식간에 변할 수 있구나.*

## 2부: 석양 속의 발자국

회사 건물을 나가는 길. 저녁 햇빛이 서쪽에서 쏟아져 내렸다. 6월의 햇빛은 강했다. 내리쬐는 것이 아니라 부딪히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민준은 자신의 옆사람을 바라봤다. 이름을 아직도 정확히 부르기가 어려웠다. 시나리오 리딩 파트너. 아니, 그것도 아니었다. 이제는… 뭐라고 불러야 할까?

“내일 잘할 거야. 너.”

옆사람이 말했다. 손을 흔들지 않았다. 목소리도 크지 않았다. 하지만 그 말은 명령이 아니라 확신이었다.

“네.”

민준은 대답했다. 그것이 유일한 대답이었다.

“또 그 대답?”

옆사람이 웃음을 터뜨렸다. 이 사람의 웃음은 준호와 달랐다. 더 밝았다. 더 자유로웠다. 마치 햇빛 자체가 웃는 것처럼.

“네. 당신 덕분에.”

민준의 말에 옆사람이 갑자기 걸음을 멈췄다. 두 사람 모두 멈췄다. 거리의 한복판에서. 저녁 바람이 그들의 머리를 어지럽혔다.

“뭐가 문제야?”

민준이 물었다.

“아니, 그냥… 그 말이 이상해. 당신 덕분에, 라니. 마치 내가 뭔가 대단한 걸 한 것 같잖아.”

“했잖아요.”

“뭘?”

“날 믿었어요.”

옆사람은 말이 없었다. 그저 하늘을 봤다. 석양이 그들의 얼굴을 주황색으로 물들였다. 눈썹 아래로 그림자가 졌다. 코 옆으로도. 얼굴의 모든 선이 더 또렷해 보였다.

“이제 걸어야 해. 더 이상 서 있으면 늦어.”

옆사람이 말했다. 그리고 손을 내밀었다. 팔을 끼우는 것이 아니라, 마치 고리를 만드는 것처럼. 손목과 손목을 연결하는 방식.

민준은 그 손을 잡았다. 손가락이 아니라 팔 위쪽을. 마치 둘이 하나의 사슬을 만드는 것처럼.

“나도 뮤지컬 오디션이 있어. 다음 주.”

옆사람이 걷기 시작했고, 민준도 따라 걸었다. 그들의 발자국이 나란히 찍혔다. 네 발자국이 아니라 두 쌍의 발자국이 아니라, 마치 한 사람의 발자국처럼.

“그렇군요.”

“그럼 우리 함께 준비하자. 서로 도와주면서. 나를 위해 밤을 샜듯이, 나도 너를 위해 밤을 새주고 싶어. 알겠어?”

옆사람의 목소리가 조금 떨렸다. 민준은 그것을 느꼈다. 그 손가락 사이에서 느껴지는 미세한 진동.

“네.”

“또 그 대답?”

“네. 그리고… 정말 감사합니다.”

거리를 걸으면서, 민준은 자신의 발자국을 봤다. 옆사람의 발자국과 나란히. 그리고 그것은 아름다웠다. 그 단순한 사실이 아름다웠다. 혼자가 아니라는 것이. 누군가와 함께 이 길을 걷고 있다는 것이.

저녁 바람이 불었다. 그들의 머리를 흔들었다. 민준은 눈을 감고 그 바람을 느꼈다. 신선했다. 마치 새로운 시작의 바람처럼.

## 3부: 작은 방의 밤

오후 6시 30분. 민준의 오피스텔.

그것을 방이라고 부르기에는 너무 작았다. 침대, 책상, 거울, 그리고 시나리오 더미. 그게 다였다. 벽은 회색이었다. 창문은 작았다. 햇빛이 거의 들어오지 않는 방.

민준은 침대에 누워있었다. 천장을 보고 있었다. 천장의 페인트가 벗겨져 있는 곳이 몇 군데 있었다. 물이 샌 자국이었다. 그는 그 자국들을 세어본 적이 있다. 스물 두 개. 정확히.

내일이면 오디션이다.

그것이 중요한가?

민준은 자신에게 물었다. 정직하게. 거짓 없이.

아니다.

더 중요한 것은 다른 것이었다. 그것은 오디션의 합격 여부가 아니었다. 오디션에서 얼마나 잘 연기하는가도 아니었다.

누군가가 자신을 위해 밤을 샜다.

누군가가 자신과 함께 시나리오를 읽었다.

누군가가 자신의 발음을 고쳐주고, 자신의 감정선을 조정해주고, 자신의 눈빛까지 바꿔주려고 애썼다.

누군가가 자신을 믿었다.

그것이 바로 배우로서 필요한 모든 것이었다. 기술이 아니라. 재능이 아니라. 그것이 바로.

민준은 휴대폰을 집었다. 화면이 켜졌을 때 시간은 오후 6시 47분이었다. 손가락이 떨렸다. 문자를 보낼 때 손가락이 떨렸다.

*오늘 정말 감사합니다. 당신이 없었으면 나는 아직도 거울 앞에서 혼자 말하고 있었을 겁니다.*

보낸 후, 민준은 휴대폰을 들었다 놨다를 반복했다. 답장이 올 때까지 걸리는 시간이 길게 느껴졌다. 몇 초는 몇 시간처럼 느껰다.

3초.

그때 핸드폰이 울렸다.

*뭐하는 소리. 우린 팀이야. 기억해? 그리고 내일은 반드시 합격. 알겠어?*

민준은 그 메시지를 읽으면서 웃음을 터뜨렸다. 처음에는 조용한 웃음이었다. 어깨가 살살 떨리는 정도의 웃음. 하지만 점점 커졌다. 어느 순간 그것은 진정한 웃음이 됐다. 복부에서 나오는 웃음. 영혼에서 나오는 웃음.

*네. 반드시 합격하겠습니다.*

민준이 답장했다. 그리고 다시 웃음을 터뜨렸다.

## 4부: 시나리오와의 대화

오후 7시.

민준은 침대에서 일어났다. 책상으로 걸어갔다. 시나리오 더미 중 맨 위의 것을 집었다. 몇 번을 읽었던 시나리오. 손때가 묻은 시나리오. 어제 옆사람과 함께 읽었던 시나리오.

이번에는 다르게 읽혔다.

어제는 글자였다. 단순한 글자. 검은색 글자가 하얀 종이 위에 인쇄된 것. 그게 전부였다.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마치 그 시나리오가 처음으로 자신에게 말을 걸어오는 것 같았다. 글자 하나하나가 음성을 갖는 것 같았다. 문장 하나하나가 감정을 갖는 것 같았다.

민준은 천천히 읽기 시작했다. 입술을 움직이며. 목소리를 내면서.

그의 목소리는 어제와 달랐다. 더 깊었다. 더 확실했다. 더 진실했다.

그것은 옆사람의 목소리가 자신의 귀에 남아있기 때문이었다. “자, 이렇게 해보세요. 이 장면은 절망이 아니라 희망을 담아야 해요. 이 사람은 죽어가면서도 누군가를 믿고 있거든요.”

그 말이 자신의 몸에 스며들었다. 근육에 스며들었다. 신경에 스며들었다.

민준은 시나리오를 읽으면서 생각했다.

내일. 그 오디션 무대 위에서. 나는 자신의 진정한 목소리를 낼 것이다.

혼자가 아니라. 누군가의 믿음을 등에 업고. 누군가의 밤샜음을 등에 업고. 누군가의 손길을 등에 업고.

그것이 바로 배우가 되는 것이었다.

혼자 무대에 서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와 함께 무대에 서는 것이. 눈에 보이지 않지만 분명히 함께 있는 누군가와.

## 5부: 밤의 소리

밤이 깊어졌다.

오피스텔 벽 너머로 누군가의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TV 음성도 들렸다. 아래층의 냉장고 소리도 들렸다. 이 도시는 밤이 되어도 절대 조용하지 않았다.

민준은 그 소리들을 들었다. 하지만 그 어느 것도 자신을 방해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자신의 내면에는 더 큰 음악이 울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옆사람의 목소리였다.

“우린 팀이야.”

그 말의 울림이 자신을 가득 채웠다. 가슴을 가득 채웠다.

민준은 시나리오를 계속 읽었다. 밤 11시까지. 자정까지. 새벽 1시까지.

그리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웃고 있었다.

혼자가 아니라는 것의 기쁨에.

오디션 당일 아침, 민준이 무대에 올랐을 때, 그의 눈빛은 달랐다. 심사위원들은 그것을 봤다. 그 눈빛에 담긴 절망이 아닌 희망을. 혼자가 아닌 누군가와 함께 있다는 확신을.

그리고 그 확신이 연기를 만들었다. 기술이 아니라 진실이 만드는 연기를.

민준은 합격했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그것이 아니었다.

더 중요한 것은, 그가 더 이상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배우로서 가장 필요한 모든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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