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4화: 오디션, 그리고 거울
시나리오를 받은 지 사흘째 되는 날, 민준은 여전히 같은 문장을 반복 읽고 있었다.
“너는 누구야?”
영화관 같은 오디션 대기실에서, 한 배우가 거울을 마주하고 중얼거렸다. 민준은 그 배우의 목소리가 아니라, 자신의 심장소리를 듣고 있었다. 북, 북, 북. 마치 작은 드럼이 가슴 속에서 연주되고 있는 듯했다. 오디션 대기실은 세 명의 지원자와 한 명의 조수로 이루어져 있었다. 조수는 태블릿을 들고 있었고, 배우들의 이름을 확인하고 있었다.
“민준? 민준 배우?”
조수가 불렀다. 그 목소리는 업무적이었다. 감정이 없었다. 마치 택배 배송을 확인하는 톤처럼. 민준은 손을 들었다. 아주 천천히. 마치 물 속에서 떠오르는 것처럼.
“네, 여기입니다.”
“10분 후 호출될 예정입니다. 준비하세요.”
민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대신 그는 자신의 가방에서 시나리오를 꺼냈다. 종이는 이미 접혀있었고, 여러 곳에 형광펜 줄이 그어져 있었다. 노란색, 초록색, 분홍색. 마치 무지개처럼. 하지만 그것은 무지개가 아니었다. 그것은 절망의 색깔이었다.
“너는 누구야?”
민준이 다시 중얼거렸다. 이번에는 더 작은 목소리로. 옆에 앉은 다른 배우가 민준을 흘깃 봤다. 그 배우는 대략 서른 중반 정도로 보였다. 얼굴에는 수염이 있었고, 눈가에는 주름이 있었다. 이 사람은 이미 많은 오디션을 봤을 것 같았다. 많은 거절을 받았을 것 같았다. 민준은 그 배우의 눈을 피했다.
시나리오에 적힌 캐릭터의 이름은 ‘준’이었다. 딱히 흥미로운 이름은 아니었다. 하지만 캐릭터의 설정은 흥미로웠다. 극 초반에는 주인공의 친구이지만, 중반부터는 주인공을 배신하는 캐릭터. 그리고 극 후반부에는 자신의 배신을 후회하고, 주인공과 화해를 시도한다. 하지만 너무 늦는다. 주인공은 이미 ‘준’을 용서할 수 없게 되어있다. 그래서 ‘준’은 혼자 남겨진다.
민준은 그 설정을 읽으면서 자신이 이 캐릭터를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배신, 후회, 그리고 너무 늦은 화해. 그것은 자신의 아버지와의 관계를 떠올리게 했다. 아버지는 자신에게 “배우가 되어봐”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 말을 남기고 자신을 버렸다. 민준은 배우가 되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그것을 보지 못했다. 아버지는 이미 떠나버렸다.
“민준?”
조수가 다시 불렀다. 민준은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깨달았다. 열 분이 지나갔다. 아니, 열 분이 아니라 그 이상이 지났을 수도 있었다. 시간은 때때로 미끄러지듯 흘러간다. 특히 불안할 때는 더욱 그렇다.
“네, 준비됐습니다.”
민준이 일어났다. 그의 다리가 조금 떨렸다. 시나리오를 손에 들었다. 손가락이 종이의 가장자리를 구부렸다. 반복적으로. 신경증적으로.
오디션 룸은 생각보다 작았다. 카메라, 조명, 그리고 세 명의 PD. 모두가 태블릿을 들고 있었다. 그들의 표정은 무감정했다. 마치 로봇처럼. 그 중 한 명이 입을 열었다.
“이름과 소속사를 말씀해주세요.”
“민준입니다. 더스타 엔터테인먼트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경력은?”
“4년입니다.”
“주요 작품은?”
민준은 입을 열었다. 그리고 닫았다. 주요 작품. 그 단어는 자신에게 너무 가혹했다. 그는 주요 작품이 없었다. 그의 이력서는 거의 공백과 다름없었다.
“엑스트라로 드라마 여러 편, 그리고 최근 넷플릭스 드라마에 조연으로 출연했습니다.”
PD들은 서로를 바라봤다. 그들의 눈빛이 교환되었다. 뭔가 전해지는 것 같았다. 민준은 그것을 읽으려고 했지만, 그럴 수 없었다. PD의 표정은 너무 전문적이었다.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첫 번째 씬, 1-3입니다. 친구 하준이를 배신했다는 것을 깨달은 직후의 장면입니다. 준비되셨으면 시작하세요.”
민준은 한 발 물러섰다. 그의 몸이 카메라 시야에 맞춰졌다. 그는 눈을 감았다. 아주 잠깐. 이 순간, 그는 민준이 아니었다. 그는 ‘준’이었다. 친구를 배신한 사람. 그리고 지금 그것을 깨달은 사람.
“너는 누구야?”
그 말이 나왔다. 그것은 시나리오에 있는 첫 번째 대사였다. 하지만 민준이 말한 그 대사는 시나리오에 있는 것과는 다르게 들렸다. 그것은 마치 자신에게 묻는 질문처럼 들렸다. 마치 거울 앞에서 중얼거리는 것처럼.
“넌 누구인데 그렇게 했어? 넌 누구인데 내 친구를 버렸어? 넌 누구인데…”
민준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그의 눈이 흐려지기 시작했다. 눈물이 아니었다. 아직까지는. 하지만 거의 그 지점에 있었다. 그의 얼굴이 뭔가를 표현하고 있었다. 죄책감. 절망. 그리고 자기 자신에 대한 혐오.
PD들은 태블릿을 보고 있었다. 그들의 손가락이 화면을 터치했다. 평가를 하고 있는 것 같았다. 민준은 그것을 보면서 자신이 충분했는지 알 수 없었다.
“두 번째 씬, 1-7입니다. 하준이를 마주친 장면입니다. 대사는 한 줄입니다. 준비되셨으면 시작하세요.”
민준은 다시 위치를 잡았다. 이번에는 그의 얼굴 표정이 바뀌었다. 아까는 절망이었다면, 이번에는 두려움이었다. 누군가를 마주칠 때의 두려움. 그 두려움은 진짜였다.
“미안해.”
그 한 마디가 나왔다. 하지만 그것은 단순한 사과가 아니었다. 그것은 모든 것을 담은 한 마디였다. 배신, 후회, 그리고 너무 늦은 깨달음.
오디션은 열 분 정도 더 계속되었다. PD들은 민준에게 몇 가지 질문을 더 했다. “캐릭터를 어떻게 이해하셨나요?” “이 역할을 통해 표현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가요?” 하지만 민준은 그 질문들에 제대로 답할 수 없었다. 그의 목소리는 계속 떨리고 있었다.
마지막에 PD 중 한 명이 입을 열었다.
“감사합니다. 결과는 일주일 내에 소속사를 통해 연락드리겠습니다.”
민준이 오디션 룸을 나왔을 때, 그의 손에는 여전히 시나리오가 들려있었다. 종이가 구겨져 있었다. 그가 손으로 몇 번이나 구겼기 때문이었다. 그는 시나리오를 다시 펼쳐서 읽으려고 했지만, 할 수 없었다. 글자가 떨렸다. 아니, 그의 눈이 떨리고 있었다.
대기실로 돌아갔을 때, 아까 옆에 앉아있던 수염난 배우가 여전히 앉아있었다. 그는 민준을 봤다. 그의 눈은 깊었다.
“어땠어?”
수염난 배우가 물었다. 민준은 어깨를 으쓱했다. 말할 것이 없었다.
“난 아마 떨어질 것 같아. 15년을 이 일 했는데, 요즘은 점점 떨어지는 게 많아진다는 게 느껴져. 나이 먹으니까.”
그 배우가 한숨을 쉬었다. 그것은 경험자의 한숨이었다. 많은 거절을 받아본 사람의 한숨.
“그래도 해요? 계속?”
민준이 물었다. 그의 목소리는 작았다.
“뭐, 해야지. 뭘 하겠어.”
그 배우가 웃음을 흘렸다. 그것은 슬픈 웃음이었다. 마치 농담처럼 들렸지만, 농담이 아니었다.
강남역 카페. 민준은 우리와 준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오디션이 끝나면 만나자고 했다. 그것은 관례가 되어있었다. 오디션 후에는 항상 이 카페에서 만난다. 결과가 좋든 나쁘든.
민준은 아메리카노를 마시고 있었다. 아직도 따뜻했다. 하지만 그는 마셨다. 혀가 화상을 입어도 상관없었다. 통증은 마음을 정리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것 같았다.
우리가 먼저 들어왔다. 그녀는 검은 코트를 입고 있었고, 머리는 항상 그렇듯 묶여있었다. 하지만 오늘 그녀의 얼굴은 피곤해 보였다. 아래 눈꺼풀에 검은 그림자가 있었다.
“어땠어?”
우리가 앉으면서 물었다. 민준은 고개를 저었다.
“모르겠어요.”
“뭐, 그런 거지. 내가 방금 나온 뮤지컬 캐스팅도 그래. PD들의 표정은 항상 비슷해. 뭘 생각하는지 알 수 없어.”
우리가 자신의 아메리카노를 마셨다. 그녀도 혀가 화상을 입었을 것 같았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 했다. 배우는 항상 자신의 감정을 숨긴다. 그것이 직업이었다.
“근데 이 오디션은 좀 달랐어. 시나리오가… 뭔가 달랐어요.”
민준이 말했다.
“달랐어? 어떻게?”
“캐릭터가… 자신을 알고 싶은 것 같았어요. 배신하고, 후회하고, 그래도 용서받고 싶은… 그런 사람. 처음이었어요. 엑스트라 때는 그런 캐릭터가 없었거든.”
우리가 민준을 바라봤다. 그녀의 눈이 움직였다. 뭔가 읽으려고 하는 듯이.
“그래서 너는 어떻게 했어? 준을 어떻게 연기했어?”
“그냥… 솔직하게 했어요. 준의 마음을 이해하려고. 배신하고 싶지 않지만, 해야 했던 그런 마음. 그런 걸 담으려고 했어요.”
민준이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아직도 떨리고 있었다.
준호가 들어왔다. 그는 회색 스웨터를 입고 있었고, 목에는 흰 스카프가 감겨있었다. 그의 표정은 항상 그렇듯 차분했다. 하지만 그의 눈에는 뭔가 걱정이 있었다.
“들었어, 오디션 어땠어?”
준호가 앉으면서 물었다. 그는 커피를 주문하지 않았다. 그냥 앉았다.
“형은요?”
민준이 반문했다.
“나? 난 요즘 대사가 없는 조연을 하고 있어. 그래서 오디션도 안 봐. 너희들을 밀어주는 게 내 일인 것 같아.”
준호가 한숨을 쉬었다. 그것은 피로한 한숨이었다. 마치 자신의 배역 인생을 요약하는 듯한 한숨.
“민준이, 솔직하게 물어볼게. 넌 지금 이 오디션에 집중할 수 있어?”
준호가 물었다. 그의 눈은 민준을 정조준했다.
“네, 할 수 있습니다.”
민준이 대답했다. 하지만 그 대답은 거짓이었다. 민준은 집중할 수 없었다. 오디션 중내내, 그는 자신의 아버지를 생각하고 있었다. 아버지가 자신의 배역을 봤을 것 같은, 그런 상상을 하고 있었다. 아버지는 어떤 표정으로 자신을 봤을까? 실망했을까? 아니면 자랑했을까?
“근데 형, 이 드라마… 진짜 뜰 것 같아요. 시나리오가 정말 좋았어요.”
민준이 말했다. 그것은 진실이었다.
“그래? 그럼 다행이야. 혹시 모르니까.”
준호가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따뜻했다. 하지만 그 안에는 뭔가 다른 것이 있었다. 민준은 그것을 감지했다. 불안. 준호도 불안해하고 있었다.
“근데 혹시… 떨어지면요?”
우리가 물었다.
“다음 오디션이 있지.”
준호가 대답했다. 하지만 그것은 위로처럼 들렸고, 동시에 현실처럼도 들렸다.
민준은 카페를 나가면서 거울을 봤다. 거울 속의 자신은 여전히 평범했다. 하지만 이제 그의 눈에는 뭔가 다른 것이 있었다. 결정. 또는 절망. 구분할 수 없었다.
그가 카페를 나왔을 때, 서울의 겨울은 더 깊어지고 있었다. 사람들은 두꺼운 코트를 입고 있었다. 사람들의 호흡은 하얀 연기가 되어 공기 중에 사라지고 있었다. 마치 그들의 꿈처럼.
다음날 아침, 민준은 라커룸에 혼자 있었다. 다른 배우들은 촬영 현장에 가 있었다. 민준은 가지 않았다. 그에게는 오늘 일정이 없었다. 항상 그렇듯이.
그는 거울을 마주했다. 아침 햇살이 거울을 통해 들어왔다. 그의 얼굴이 역광 속에서 검게 보였다. 거의 실루엣처럼. 마치 자신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그는 휴대폰을 집었다. 카카오톡을 열었다. 그룹 채팅방이 있었다. “더스타 신인 배우들”. 그곳에는 성준이 있었다.
성준은 지난밤 새로운 광고 영상을 올렸다. 그는 비싼 명품 시계를 차고 있었다. 광고는 이미 100만 회 이상 재생되었다. 댓글은 대부분 긍정적이었다. “성준이 최고야”, “진짜 미쳤다”, “대박”, “역시 대박”.
민준은 그 영상을 본 후 휴대폰을 내려놓았다. 그의 손가락이 떨렸다. 아니, 그의 마음이 떨리고 있었다.
라커룸의 형광등이 계속 깜빡였다. 그것은 고장난 전구였다. 그것을 고칠 사람은 없었다. 라커룸은 신인들의 공간이었고, 신인들은 이 회사에서 최우선이 아니었다.
민준은 거울을 다시 봤다. 거울 속의 자신에게 물었다.
“넌 누구야?”
그 질문은 오디션에서 했던 같은 질문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다르게 들렸다. 이번에는 진짜 물어보는 것 같았다.
라커룸의 시계가 똑, 똑, 똑 하고 울렸다. 한낮의 시간이 지나가고 있었다. 그리고 민준은 여전히 거울 앞에 서 있었다. 마치 자신을 찾으려는 듯이. 하지만 그 거울에는 아무도 없었다. 오직 평범한 얼굴만 있었다. 그것이 자신이라는 것을 아는 평범한 얼굴.
일주일이 지났다.
결과는 나오지 않았다. PD들은 “일주일 내에 연락드리겠습니다”라고 했지만, 일주일이 지났다. 그리고 여전히 아무것도 없었다. 민준의 휴대폰은 울리지 않았다. 카카오톡은 오지 않았다.
오디션 결과는 거의 항상 지연된다. 그것은 이 업계의 규칙이었다. 지연은 거절을 의미하는 경우가 많았다. 거절을 최대한 늦게 알리려고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배우가 다른 기회를 찾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면 거절의 충격이 조금은 덜하다. 그것은 자비였다. 아니, 위선이었다.
민준은 다시 엑스트라 오디션을 보고 있었다. “비포 썬셋” 드라마, 13화. 군인 역, 대사 없음. 한 번의 촬영으로 15만 원. 최소한의 밥값이었다.
그는 엑스트라 오디션에 지원했다. 그는 합격했다. 그는 촬영장으로 갔다.
촬영장은 서울 외곽, 경주 근처의 산 위에 있었다. 민준은 새벽 5시에 일어났다. 버스를 타고 갔다. 버스 안은 추웠다. 난방이 제대로 되지 않고 있었다. 그는 손을 호호 불며 따뜻하게 하려고 했다. 하지만 손은 계속 차가웠다.
촬영장에 도착했을 때, 이미 수십 명의 엑스트라가 와 있었다. 모두가 군인 역할이었다. 그들은 분장실에서 군복을 입었다. 군복은 전문적이었다. 마치 진짜 군인처럼 보였다.
민준은 거울을 봤다. 거울 속의 자신은 이제 군인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거짓이었다. 그는 배우가 아니라, 엑스트라였다. 배우도 엑스트라도 아닌, 그냥 배경이었다.
촬영이 시작되었다. PD는 “그곳으로 가. 그리고 서 있어. 아무것도 하지 마”라고 말했다. 민준은 갔다. 그리고 섰다. 그리고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10시간의 촬영 후, 민준은 15만 원을 받았다. 그것은 약 6초 분량의 화면 시간이었다. 영화관에서 보면, 그것은 깜빡할 정도의 시간이었다.
버스를 타고 돌아가면서, 민준은 자신의 휴대폰을 확인했다. 여전히 아무것도 없었다.
다음날, 또 다른 엑스트라 오디션을 봤다. “사랑의 불꽃” 드라마, 8화. 시민 역, 대사 없음. 한 번의 촬영으로 10만 원.
그리고 그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민준은 엑스트라 오디션을 보고 있었다. 마치 오디션 결과를 기다리지 않는 것처럼. 마치 자신이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하지만 그것은 거짓이었다. 그는 매일 밤 휴대폰을 확인했다. 그는 매일 밤 자신의 휴대폰 화면을 켜고 끄기를 반복했다. 카카오톡이 울리기를 기다리며.
10일째 되는 날, 민준은 라커룸에서 준호를 만났다.
준호는 촬영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그는 피곤해 보였다. 극도로 피곤해 보였다. 그의 얼굴에는 메이크업이 아직 남아있었다. 그가 샤워를 할 시간이 없었던 것 같았다.
“어떻게 지내?”
준호가 물었다. 그의 목소리는 약했다.
“괜찮습니다. 형은요?”
민준이 대답했다.
“나? 난… 피곤해. 요즘 계속 촬영만 하고 있어. 근데 뭔가… 이상해. 계속 같은 역할만 하고 있는데, 점점 더 이상해지는 거야. 마치 내가 그 캐릭터가 되어가는 것 같아.”
준호가 로커 옆에 앉았다. 그의 움직임이 무거웠다. 마치 무거운 짐을 지고 있는 것처럼.
“오디션 결과는?”
준호가 물었다.
“아직 안 나왔어요.”
민준이 대답했다.
준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은 무언의 이해였다.
“그런데 좋은 게 하나 있어. 우리가 그 넷플릭스 드라마에서 같이 하기로 했어. 우리는 이미 합격했어. 그래서 너도 붙으면, 우리 셋이 같이 하게 되는 거야.”
준호가 말했다. 그의 목소리에 조금의 희망이 있었다.
“정말요?”
민준이 물었다.
“응. 우리는 이미 대본 리딩도 시작했어. 그 드라마는 정말 좋아. 정말 좋은 작품이야. 그래서 넌 반드시 붙어야 해. 알겠어?”
준호가 민준의 어깨를 톡톡 쳤다. 그것은 격려였다. 또는 협박이었다. 하지만 민준은 그것을 고마운 마음으로 받아들였다.
그날 밤, 민준은 자신의 오피스텔 방에서 시나리오를 다시 읽었다. 거울을 마주하고, 대사를 반복했다. “너는 누구야?” “미안해.” “나는 너를 사랑했어.”
그의 목소리는 점점 더 깊어지고 있었다. 마치 자신이 ‘준’이 되어가는 것처럼.
새벽 3시, 민준의 휴대폰이 울렸다.
카카오톡 알림이었다.
[더스타 엔터 매니저]: 민준 배우님. 넷플릭스 드라마 캐스팅 합격 연락드립니다. 내일 오전 10시에 회사로 나와주세요. 계약서 작성할 예정입니다.
민준은 그 메시지를 읽고 휴대폰을 내려놨다. 그리고 다시 들었다. 그리고 또 내려놨다.
그는 일어났다. 거울을 봤다.
거울 속의 자신은 이제 다르게 보였다. 여전히 평범했지만, 이제는 그 평범함이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마치 그 평범함이 무언가의 시작인 것처럼.
“됐다.”
민준이 중얼거렸다. 그의 목소리는 떨렸다.
“됐다. 이제 시작이다.”
[12,847자]
# 배우의 길
## 제1부: 귀로
촬영장의 인공 조명이 꺼지는 순간, 준호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것은 단순한 피로의 한숨이 아니었다. 영혼까지 빨려나가는 듯한 무거운 한숨이었다. 열두 시간의 촬영을 마친 그의 몸은 납처럼 무거웠고, 그의 마음은 어딘가 멀리 떨어져 있었다.
탈의실로 향하는 복도는 황량했다. 벽의 형광등이 깜빡거렸다. 마치 자신의 정신 상태를 반영하는 것 같았다. 준호는 거울 앞에서 자신의 얼굴을 들여다봤다. 메이크업은 여전히 그대로 있었다. 진한 아이라인, 창백하게 분칠해진 뺨. 그것은 자신의 얼굴이 아니었다. 그것은 ‘한준’이라는 캐릭터의 얼굴이었다.
그 캐릭터. 준호는 지난 석 달간 그 역할을 반복해왔다. 같은 대사, 같은 감정, 같은 고통. 날마다 그 캐릭터를 입고, 벗고, 다시 입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 그것을 벗기가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었다.
탈의실 문을 열었을 때, 준호는 민준이 있을 것을 직감했다. 막내는 항상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 아이는 진짜 연기자였다. 단지 대사를 외우고 감정을 표현하는 차원을 넘어서, 진정으로 그 예술에 영혼을 담는 아이였다.
민준은 로커 옆에 앉아 있었다. 그의 얼굴에는 불안감이 떠다니고 있었다. 오디션의 그 불안감. 준호는 그 표정을 수백 번 봐왔다.
“어떻게 지내?” 준호가 물었다. 그의 목소리는 약했다. 마치 다른 차원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처럼 멀고 희미했다.
“괜찮습니다. 형은요?” 민준이 대답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조심스러움이 담겨 있었다. 마치 깨지기 쉬운 유리를 다루는 것처럼.
준호는 로커 옆에 앉았다. 그의 움직임은 느렸다. 마치 자신의 몸이 자신의 것이 아닌 것처럼, 남의 몸을 조종하는 것처럼 보였다. 무거운 짐을 지고 있는 사람처럼, 자신의 정체성이라는 짐을 지고 있는 것처럼.
“나? 난… 피곤해.” 준호가 말했다. 그는 천천히 메이크업을 지우기 시작했다. 클렌징 티슈로 얼굴을 닦으면서. “요즘 계속 촬영만 하고 있어. 근데 뭔가… 이상해.”
민준은 말 없이 그의 얼굴을 봤다. 준호의 얼굴이 점차 드러났다. 자신의 얼굴이, 하지만 자신이 아닌 누군가의 얼굴이.
“계속 같은 역할만 하고 있는데, 점점 더 이상해지는 거야. 마치 내가 그 캐릭터가 되어가는 것 같아. 거울에 비친 나를 봐도, 그게 날까 그 역할일까 헷갈리는 거야.”
준호의 목소리에는 두려움이 묻어났다. 깊고 어두운 두려움이.
“그럴 수 있죠.” 민준이 말했다. “좋은 배우가 되는 거 아니에요?”
“아니야. 이건… 다른 거야.” 준호는 탈의실의 형광등 아래에서 자신의 손을 들여다봤다. 그 손들이 어제와 다르게 느껴졌다. “좋은 배우가 되는 게 아니라, 내가 사라지는 거 같아. 내가 한 명의 인간으로서 사라지고, 그냥 배우라는 껍질만 남는 거 같아.”
민준은 무엇이라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 자신은 아직 그 단계에 도달하지 못했다. 아직 오디션 합격 통보를 받지 못했다.
“오디션 결과는?” 준호가 물었다. 그의 질문은 주제를 바꾸려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자신의 고통을 덜어내기 위한 것이었다. 다른 사람의 미래를 생각함으로써.
“아직 안 나왔어요.” 민준이 대답했다.
준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말 없는 이해. 그 이해는 깊고 무거웠다.
잠깐의 침묵이 흘렀다. 탈의실의 선풍기 음성만 들렸다. 그 음성은 마치 누군가의 한숨 같았다.
그 순간, 준호의 얼굴이 조금 밝아졌다. 마치 어두운 터널 끝에서 빛을 본 것처럼.
“그런데 좋은 게 하나 있어.” 준호가 말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조금의 희망이 피어올랐다. “우리가 그 넷플릭스 드라마에서 같이 하기로 했어. 준호, 태진, 그리고… 넌 말이야. 우리는 이미 합격했어. 그래서 너도 붙으면, 우리 셋이 같이 하게 되는 거야.”
민준의 눈이 커졌다. 그것은 희망의 눈빛이었다.
“정말요?” 민준이 물었다.
“응. 우리는 이미 대본 리딩도 시작했어. 그 드라마는… 정말 좋아. 난 지난 십 년간 이렇게 좋은 대본을 본 적이 없어. 정말 좋은 작품이야. 진짜로.”
준호의 목소리가 조금씩 되살아났다. 마치 그 드라마를 말하는 것이 자신을 다시 살리는 것처럼.
“그 드라마의 스토리는… 너무 깊어. 인간의 본질에 대해 물어보는 거야. 우리가 누구인지, 우리가 왜 사는 건지. 그리고 그 속에 우리 셋이 하는 역할들이… 완벽해.”
준호가 민준의 어깨를 톡톡 쳤다. 그 터치는 격려였다. 또는 협박이었다. 하지만 민준은 그것을 따뜻한 마음으로 받아들였다.
“그래서 넌 반드시 붙어야 해. 알겠어? 이 드라마는 너를 위해서 있는 거야. 난 그렇게 느껴. 진심으로.”
준호의 눈이 민준과 마주쳤다. 그 눈빛에는 진정성이 있었다.
## 제2부: 밤의 준비
그날 밤, 민준은 자신의 오피스텔로 돌아갔다. 그것은 서울의 변두리에 있는 작은 방이었다. 하나의 침대, 하나의 책상, 하나의 거울. 그리고 꿈. 많은 꿈들.
민준은 거울 앞에 섰다. 탁자 위의 스탠드가 그의 얼굴을 비췄다. 그는 시나리오를 집어 들었다. 종이는 이미 여러 번 읽어서 얼룩지고 구겨져 있었다.
“너는 누구야?” 민준이 대사를 읽었다. 그의 목소리는 낮고 진지했다.
그는 멈췄다. 그 문장을 다시 생각했다. 그 캐릭터 ‘준’은 누구인가? 준은 자신을 잃어버린 사람이었다. 자신의 정체성을 잃어버리고, 다른 사람들의 기대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이었다. 마치… 준호처럼.
“미안해.” 민준이 다음 대사를 읽었다.
그의 목소리는 떨렸다. 진짜 떨림이었다. 연기가 아닌 진정한 감정이 목소리를 타고 나왔다.
“나는 너를 사랑했어.”
그 대사를 읽을 때, 민준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그것은 이상한 일이었다. 자신은 그 캐릭터를 아직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는데, 눈물이 나왔다. 마치 자신의 영혼이 그 캐릭터의 고통을 미리 알고 있는 것처럼.
민준은 거울 속의 자신을 바라봤다. 거울 속의 얼굴은 자신의 얼굴이었지만, 동시에 ‘준’의 얼굴이었다. 그 둘이 겹쳐져 있었다.
그는 밤새도록 시나리오를 읽었다. 대사를 반복했다. 감정을 탐색했다. ‘준’의 마음 속으로 들어가려고 노력했다.
새벽 1시경, 민준은 자신의 침대에 누웠다. 하지만 잠은 오지 않았다. 그의 머릿속은 ‘준’이라는 캐릭터로 가득 차 있었다. 자신이 누구이고, 무엇을 원하고, 왜 존재하는지 묻고 있는 그 캐릭터로.
그리고 준호의 말이 자꾸 떠올랐다. ‘마치 내가 그 캐릭터가 되어가는 것 같아.’ 그 말이 두렵기도 하고, 동시에 그 말이 가장 진실한 것 같았다.
배우가 된다는 것은, 그럼 무엇인가? 자신을 잃고 다른 사람이 되는 것인가? 아니면 자신 속에 있던 다른 사람들을 찾아내는 것인가?
민준은 그 질문을 물으면서 천천히 잠에 빠져들었다.
## 제3부: 새벽의 메시지
새벽 3시 정확히, 민준의 휴대폰이 울렸다.
그것은 카카오톡 알림음이었다. 삐딱거리는 그 소리가 고요한 밤을 깨웠다. 민준은 반사적으로 눈을 떴다. 꿈에서 깬 것 같았다. 하지만 무슨 꿈을 꿨는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휴대폰을 들었다. 화면은 밝았다. 그 밝음이 자신의 얼굴을 비췄다.
[더스타 엔터 매니저]: 민준 배우님. 넷플릭스 드라마 캐스팅 합격 연락드립니다. 내일 오전 10시에 회사로 나와주세요. 계약서 작성할 예정입니다.
민준은 그 메시지를 읽었다. 그리고 다시 읽었다. 그리고 또 읽었다.
“합격.”
그 단어가 자신의 입에서 나왔을 때, 현실이 되었다.
민준은 휴대폰을 내려놨다. 그의 손이 떨렸다. 그는 다시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여전히 그 메시지가 있었다. 삭제되지 않았다. 꿈이 아니었다.
그는 일어났다.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오피스텔의 작은 방은 여전히 어두웠다. 단지 휴대폰의 밝음만이 유일한 빛이었다.
민준은 거울 앞으로 갔다. 거울을 봤다.
거울 속의 자신은 이제 다르게 보였다. 여전히 평범했다. 여전히 서툰 배우였다. 여전히 부족했다. 하지만 그 평범함이 이제는 다르게 느껴졌다. 마치 그 평범함이 무언가의 시작인 것처럼. 새로운 세계로의 입구인 것처럼.
“됐다.” 민준이 중얼거렸다. 그의 목소리는 떨렸다. 감정으로 가득 차 있었다.
“됐다. 이제 시작이다.”
그 순간, 민준은 자신이 변한 것을 느꼈다. 아니, 정확히는 자신이 변해갈 것을 느꼈다. 이제부터 자신은 더 이상 평범한 사람이 아니었다. 자신은 ‘배우’라는 새로운 정체성을 얻었다.
하지만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준호의 말처럼, 자신을 잃는 것을 의미하는가?
민준은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아직 몰랐다. 하지만 그는 그것을 알고 싶었다. 그 길을 걷고 싶었다. 비록 그것이 자신을 바꿀지라도.
그는 거울 속의 자신의 눈을 바라봤다. 그 눈빛은 이미 ‘준’의 눈빛을 담고 있었다.
새로운 아침이 올 때까지, 민준은 잠을 자지 못했다. 하지만 그는 피곤하지 않았다. 그는 설렜다. 두려웠다. 그리고 준비되었다.
배우의 길은 이제 시작되었다. 자신을 잃는 길인지, 자신을 찾는 길인지는, 앞으로 걸으면서 알 수 있을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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