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트라이트: 제2막 – 제2화: 충고와 침묵

이 포스팅은 쿠팡 파트너스 활동의 일환으로, 이에 따른 일정액의 수수료를 제공받습니다.

Prev2 / 50Next

# 제2화: 충고와 침묵

준호의 커피가 식어가고 있었다. 거품이 사라지고, 표면은 매끄러워졌다. 민준은 그것을 보면서 자신의 커피를 마시지 않았다. 손가락으로 컵의 가장자리를 더듬었다. 따뜻함이 남아있었다.

“이번 배역은 뭐였어?”

“대사가 두 줄인 병사 역할이었습니다.”

준호가 웃음을 흘렸다. 그것은 쓸쓸한 웃음이었다. 마치 자신의 과거를 보는 것 같은 표정으로.

“대사 두 줄이면 많은 거지.”

그 말은 농담처럼 들렸지만, 두 사람 모두 웃지 않았다. 준호는 다시 커피를 마셨다. 잔이 비어가고 있었다. 민준은 준호의 손을 바라봤다. 손가락이 커피잔을 집는 방식. 그것만으로도 얼마나 많은 무언가를 해본 사람인지 느껴졌다. 자신감. 또는 익숙함.

“민준아, 너는 왜 배우를 하고 싶어?”

갑자기 나온 질문이었다. 준호는 커피잔을 내려놓으면서 물었다. 그의 눈은 여전히 창밖을 향해있었다. 마치 민준을 직접 보면 안 될 것 같은 태도로.

민준은 그 질문을 받으면서 자신이 얼마나 준비되지 않았는지 느꼈다. 그는 입을 열었다. 다시 닫았다. 열었다. 다시 닫았다. 세 번을 반복했다.

“모르겠습니다.”

그 대답은 정직했다. 민준은 자신이 왜 배우를 하는지 정말로 모르고 있었다. 아버지가 죽기 전, 라면을 끓이며 자신에게 말했던 것을 기억했다. “민준아, 넌 배우가 되어봐. 아버지는 실패했지만, 넌 다를 수 있어.” 그 말이 모든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을 지금 준호에게 말할 수는 없었다. 죽음에 대해 말하는 것은 약함을 드러내는 것처럼 느껴졌다.

준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정답인 것 같아. 이 업계에서 ‘왜’를 아는 사람은 빨리 나간다. 또는 미쳐버린다.”

준호는 이제 민준을 바라봤다. 그 눈은 깊었지만 동시에 피로해 보였다. 아래 눈꺼풀에 그림자가 있었다. 마치 잠을 오래 못 자본 사람처럼.

“넌 4년을 버텼지. 그게 얼마나 대단한지 알아?”

“네.”

“모를 것 같은데.”

준호가 웃었다. 이번에는 조금 더 따뜻한 웃음이었다.

“내가 너 정도를 해봤을 때, 나는 이미 광고 세 건, 드라마 단역 다섯 건을 했어. 넌? 넌 엑스트라만 4년을 했어. 그런데도 남아있다. 그게 뭔데? 그게 뭐야?”

민준은 대답을 할 수 없었다. 준호의 질문은 수사 질문이 아니었다. 그것은 자기 자신에게 하는 질문인 것 같았다. 준호는 계속 말했다.

“난 처음에는 재능이 있다고 생각했어. 그 다음에는 운이 좋다고 생각했어. 지금은… 지금은 그냥 버티는 것 같아. 매일 같은 얼굴로 거울을 보고, 같은 자리에 앉아서, 같은 말을 반복하고. 변하는 게 없어. 아니, 변하는 게 있지. 나이만 먹고 있어.”

준호의 목소리가 작아졌다. 카페의 배경음악이 더 크게 들렸다. 어딘가 슬픈 재즈 음악. 트럼펫이 길게 우는 소리.

“그래서 넌 더 열심히 해야 돼, 민준아. 지금은 버티는 게 맞아. 하지만 넌 언제가 되면… 어느 순간 ‘이게 맞나?’라는 생각이 들 거야. 그때가 오면, 너는 선택을 해야 한다. 계속할 것인가, 아니면 나가갈 것인가. 난 그 선택을 못 했어. 그래서 지금 여기 앉아있고.”

민준은 준호를 바라봤다. 준호는 지금 자신을 보고 있지 않았다. 다시 창밖을 보고 있었다. 서울의 거리는 오후의 햇살이 옅어지면서 점점 더 차갑게 변해가고 있었다. 사람들은 서둘러 이동하고 있었다. 마치 무언가를 피하려는 듯이.

“이번에 오디션이 또 있어.”

준호가 갑자기 말했다. 목소리가 바뀌었다. 이전의 피로함이 거둬졌다. 대신 뭔가 다른 감정이 들어찼다. 기대. 또는 불안.

“뭐요?”

“넷플릭스 드라마. 요즘 한국 드라마 중에 제일 성공한 프로덕션이야. 그들이 신인을 찾고 있어. 20대 중반 남성. 무해한 얼굴. 조연이지만, 주인공을 보조하는 핵심 역할이야.”

준호가 그 말을 하면서 민준을 바라봤다. 그의 눈은 명확했다. 이것은 제안이었다. 아니, 더 정확히는 기회였다.

“… 나를요?”

“그리고 우리도 있어. 우리라고 하는 뮤지컬 배우. 넌 그 아이를 모를 수도 있지만, 그 아이는 넌 봤어. 라커룸에서. 우리가 추천했어.”

민준의 가슴이 철렁거렸다. 우리. 그 이름이 나왔다. 그 이름이 준호의 입에서 나온 것이다. 준호가 다른 배우를 추천한다는 것 자체가 이상했다. 준호는 항상 말했다. 이 업계는 혼자 살아가는 것이라고. 모두가 경쟁자라고. 그런 준호가 누군가를 추천한다?

“우리는… 어떤…”

“좋은 배우야. 정말로. 넌 그 아이와 함께 일하면서 많이 배울 거야. 그리고 그 아이도 너를 보면서 배울 거고. 그렇게 되는 거야, 이 업계에서 누군가는 성장하고, 누군가는 머물러있고.”

준호의 말이 끝났다. 카페의 시계가 5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오후의 햇살은 이미 반을 차지하지 못했다. 저녁이 가까워오고 있었다.

“오디션은 내일 오전 10시야. 더스타 회의실에서. 이수진 대표님이 직접 지켜볼 거야. 그리고 PD와 캐스팅 디렉터도 있고.”

민준의 손가락이 떨렸다. 그는 손을 테이블 아래로 내렸다. 준호는 그것을 봤을 것이다. 하지만 말하지 않았다.

“감사합니다.”

민준이 말했다.

“감사할 거 아니야. 이건 기회일 뿐이야. 넌 그것을 무언가로 바꿔야 해. 역할로, 또는 경험으로, 또는 뭔가 다른 것으로.”

준호가 일어났다. 그는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냈다. 신용카드를 꺼내서 테이블에 놨다. 그 동작은 빨랐다. 마치 이 장면을 빨리 끝내고 싶은 것처럼.

“그리고 하나 더. 우리와 너는 이미 여러 번 만났어. 라커룸에서, 촬영장에서. 그래서 너희가 친하다는 척을 해. 이 정도면 충분할 것 같아.”

“네, 알겠습니다.”

민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은 지시를 받는 배우의 자세였다. 준호는 그것을 봤다. 그리고 뭔가 말하려다가 멈췄다. 입을 열었다가 다시 닫았다. 마치 민준이 했던 것처럼.

“그리고 민준아. 내일은… 있는 그대로 해. 배우처럼 말고. 그냥 너로서.”

그 말이 준호의 마지막 말이었다. 그는 카페를 나갔다. 빠른 걸음으로. 뒤를 돌아보지 않고. 민준은 혼자 남겨졌다. 테이블 위에는 준호의 신용카드가 아직도 놓여있었다. 그리고 민준의 커피. 이제 완전히 식어있었다.

그냥 나로서라고? 나가 누구인데?

민준은 혼잣말을 했다. 카페의 배경음악이 그것을 삼켰다. 트럼펫이 여전히 길게 우는 소리. 슬픈 곡이었다. 마치 무언가를 떠나보내는 사람의 마음처럼.


더스타 엔터테인먼트의 라커룸은 밤 9시가 넘어가도록 비어있지 않았다. 촬영을 마친 배우들이 돌아오고 있었다. 민준은 로커 앞에 서있었다. 휴대폰을 손에 들고 있었다. 화면에는 내일의 날씨가 떠있었다. 맑음. 기온 12도. 습도 45%.

온도와 습도까지 확인하는 자신이 우스웠다. 마치 이 숫자들이 오디션의 결과를 바꿀 수 있을 것처럼.

“민준이?”

목소리가 들렸다. 민준은 고개를 들었다. 그것은 우리였다. 뮤지컬 배우 우리. 길게 묶은 검은 머리, 검은 눈, 그리고 항상 뭔가 서둘러 움직이는 동작. 그녀는 운동복을 입고 있었다. 라커룸을 지나가다가 민준을 본 것 같았다.

“어제는 못 봤는데, 준호 형이 내일 오디션 있다고 했어. 너도?”

민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순간 우리의 얼굴이 밝아졌다. 정말로 밝아졌다. 마치 무언가를 찾은 사람처럼.

“오, 같이네! 나도 내일 그 오디션이야. 넷플릭스 드라마. 여자 조연 역할. 넌 뭐야?”

“남자 조연입니다.”

민준의 대답은 짧았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충분히 받아들였다.

“오디션 봤어?”

“아뇨. 내일이 처음입니다.”

우리가 웃었다. 그것은 밝은 웃음이었다. 하지만 그 안에는 뭔가 불안한 것이 섞여있었다.

“나도! 준호 형이 추천해줬어. 형이 날 라커룸에서 본 거래. 그래서 나도 너를 봤어. 아, 우리 이전에도 몇 번 만났지? 그 드라마 촬영장에서?”

민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은 거짓이 아니었다. 정말로 여러 번 만났다. 단지 말을 나눈 적은 거의 없었을 뿐이다. 우리는 마치 그것을 알고 있는 듯이 계속 말했다.

“미안해. 나는 좀 많이 말하는 편이야. 신경 안 써도 돼.”

그 말을 하면서 우리는 웃었다. 그것은 자조적인 웃음이었다. 자신을 비판하는 웃음. 민준은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 알았다. 그것은 불안함을 숨기는 방식이었다.

“내일은 뭐 할 거야? 준비?”

“글쎄요. 대사를 읽고 있습니다.”

“어떤 역할이야?”

“아직… 캐스팅 디렉터가 상세히 말해주지 않았습니다. 내일 보는 거라고.”

우리가 다시 웃었다. 이번에는 더 크게.

“그렇지. 그래야지. 오디션이지, 뭐. 대사도 모르고, 역할도 모르고, 그냥 가서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거. 그게 이 업계야.”

그 말이 맞다고 생각했다. 민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너 이름이 뭐야?”

“민준입니다.”

“미, 민준. 나는 우리야. 우리. 좋은 이름이 없어? 우리는 그냥 우리야.”

그 말을 하면서 우리는 웃었다. 그리고 그 웃음 속에서 민준은 뭔가를 느꼈다. 그것이 무엇인지 이름을 붙일 수는 없었지만, 그것은 따뜻한 것이었다.

“내일 봐, 민준. 화이팅!”

우리가 손가락으로 하트를 만들었다. 그리고 빠르게 라커룸을 빠져나갔다. 그녀의 발걸음 소리가 멀어져갔다.

민준은 다시 혼자 남겨졌다. 하지만 이전과는 다른 종류의 혼자였다. 어딘가 따뜻한. 어딘가 불안한. 그 두 감정이 섞여있는 혼자.

그는 휴대폰을 다시 들었다. 화면에는 여전히 내일의 날씨가 떠있었다. 맑음. 12도. 그리고 이제 추가되는 정보. 명일 오전 10시, 더스타 엔터테인먼트 회의실. 넷플릭스 드라마 오디션. 배역: 남자 조연. 함께할 사람: 우리.

있는 그대로 해. 배우처럼 말고. 그냥 너로서.

준호의 말이 다시 떠올랐다. 민준은 로커 문을 닫았다. 그 안에는 여전히 3년 전 입사 때 받은 명함이 들어있었다. 글자는 까맣게 바래있었지만, 여전히 읽을 수 있었다. 더스타 엔터테인먼트. 배우 민준.

라커룸의 형광등이 그 명함을 비추고 있었다.


밤 11시. 민준의 오피스텔은 강북의 낡은 건물에 있었다. 반지하. 월세 38만 원. 그것은 월급의 거의 절반이었다. 하지만 더 싼 곳은 없었다. 아니, 있었지만 그것들은 창문이 없었다.

민준은 침대에 누워있었다. 천장을 보고 있었다. 천장에는 물때가 있었다. 마치 지도처럼. 어딘가의 경계를 그리는 선들. 물때의 패턴을 따라가며 민준은 생각했다.

내일은 뭔가 달라질까? 이 오디션으로 뭔가 바뀔까? 아니면 또 다른 떨어짐일까?

그의 손이 천장의 물때를 따라갔다. 손가락으로 공중에 그렸다. 마치 그것이 현실인 것처럼. 하지만 손가락은 그것을 만질 수 없었다. 공기만 지나갔다.

휴대폰이 울렸다.

민준은 고개를 돌렸다. 화면에는 “엄마”라고 떠있었다. 그는 한 번 울리게 놔뒀다. 그리고 다시 울렸다. 그리고 또 다시. 세 번째에 받았다.

“응.”

“민준아, 밥은 먹었어?”

목소리가 들렸다. 그것은 50대 여성의 목소리였다. 민준의 어머니였다.

“네, 먹었습니다.”

“거짓말. 넌 항상 늦게 먹어. 지금 먹어.”

“네, 알겠습니다.”

“그리고 내일은 뭐 하는 거야? 촬영?”

민준은 잠시 침묵했다. 그것은 거짓을 말할 기회였다. 어머니는 오디션에 대해 알고 싶지 않았다. 어머니는 민준이 배우를 그만두기를 원했다. 직장을 얻고, 정상적인 인생을 살기를 원했다. 아버지처럼 실패하지 말고.

“네, 촬영입니다.”

“고생해라. 감기 조심하고.”

“네.”

“사랑해. 엄마도 피곤해. 내일 보자.”

“네, 안녕히 주무세요.”

전화가 끊겼다. 민준은 휴대폰을 다시 내려놨다. 천장의 물때를 다시 봤다. 그것은 여전히 같은 패턴으로 남아있었다. 어떻게 보든 그것은 선의 집합이었다. 연결된 선들. 마치 누군가의 인생처럼.

그는 일어나 앉았다. 그리고 옷을 벗었다. 샤워를 하기로 했다. 뜨거운 물이 몸에 닿았을 때, 그는 느꼈다. 두려움과 기대가 섞인 감정을.

내일은 있는 그대로 하면 된다. 배우처럼 말고. 그냥 나로서.

그 말이 반복되었다. 수도꼭지를 잠갔다. 수증기가 천천히 빠져나갔다. 거울은 흐려있었다. 그는 손으로 거울을 닦았다. 그 안에는 평범한 얼굴이 있었다.

밤 1시. 민준은 여전히 잠들지 못했다. 침대에서 데이트 앱을 깔았다. 그리고 지웠다. 그 대신 넷플릭스 앱을 켰다. 최근 인기 드라마를 찾아봤다. 거기에는 그런 얼굴의 배우들이 있었다. 평범한 얼굴. 그들도 처음엔 조연이었을 것이다.

그는 한 드라마를 재생했다. 남자 조연이 나오는 장면. 그 배우는 주인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깊은 눈으로. 진심으로. 민준은 그 표정을 따라 했다. 거울 없이. 그냥 천장을 보면서.

밤 3시. 민준은 결국 잠들었다. 꿈을 꾸지 않은 깊은 잠이 아니었다. 얕은 잠. 그 속에서 그는 거울 앞에 서있었다. 거울 속의 얼굴이 자꾸 바뀌었다. 때로는 자신의 얼굴이 되고, 때로는 준호의 얼굴이 되고, 때로는 아버지의 얼굴이 되었다.

모두가 같은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밤 6시. 민준은 깼다. 알람이 울렸다. 어둠은 아직도 창밖에 남아있었다. 겨울은 아침을 늦게 준다. 그는 일어나 앉았다. 손가락이 떨렸다. 아침 떨림. 오디션 떨림.

옷을 입으면서 그는 거울을 봤다. 오늘은 어떤 얼굴이 될까? 배우의 얼굴인가. 아니면 민준의 얼굴인가.

그 둘의 차이가 뭔지, 여전히 몰랐다.


더스타 엔터테인먼트의 회의실은 10층에 있었다. 창문이 크고, 서울의 일부가 보였다. 아침 햇살이 들어오고 있었다. 밝지만 차가운 빛.

민준은 10분 일찍 도착했다. 회의실 밖에 서있었다. 손을 주머니에 넣었다 빼었다를 반복했다. 엘리베이터가 올라오는 소리가 들렸다. 문이 열렸다.

우리가 나왔다. 그녀는 아침 햇살 속에서 다르게 보였다. 더 밝아 보였다. 동시에 더 긴장해 보였다. 그녀의 손도 주머니 안에 들어갔다 나왔다를 반복하고 있었다.

“민준! 어? 넌 왜 여기 있어? 아, 맞다. 넷플릭스.”

그녀의 목소리는 밝았다. 하지만 그 안에는 떨림이 있었다.

“우리는 안 떨려요?”

민준이 물었다. 그것은 자신도 모르게 나온 질문이었다.

우리가 웃었다. 이번에는 그 웃음이 더 크게 들렸다.

“나? 떨려? 미쳤나. 내가 왜 떨려? 난 잘할 거야. 우리 둘 다.”

그 말을 하면서 우리는 민준의 어깨를 톡 쳤다. 그 접촉은 따뜻했다. 인간적인 접촉. 민준은 얼마나 오래 이런 접촉을 받지 못했는지 깨달았다.

“들어갈까?”

우리가 물었다.

민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회의실의 문을 열었다.

그 안에는 이수진 대표가 앉아있었다. 그리고 두 명의 남자. 하나는 50대로 보이는 PD. 다른 하나는 30대로 보이는 캐스팅 디렉터였다. 그들은 모두 민준과 우리를 바라봤다.

“들어오세요.”

이수진 대표가 말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낮았다. 그리고 절대적이었다.

민준과 우리는 들어갔다.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 그들은 아직 몰랐다. 단지 자신들의 얼굴을 숨기고, 있는 그대로를 드러내야 한다는 것만 알고 있었다.

그것이 배우의 역설이었다.

# 배우의 얼굴

## 1부: 밤의 연습

모두가 처음엔 조연이었을 것이다.

민준은 침대에 누워 이 생각을 되풀이했다. 천장의 페인트가 벗겨지는 부분을 바라보면서. 그 벗겨진 부분이 마치 무언가를 말하려는 입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것은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다. 단지 침묵할 뿐이었다.

밤 11시 42분. 민준의 휴대폰 화면에는 시간이 떠 있었다. 그는 손가락으로 화면을 밀었다. 넷플릭스 앱이 열렸다. 이미 몇 번이나 본 드라마였다. 하지만 오늘밤은 달랐다. 오늘밤은 다르게 봐야 했다.

남자 조연이 나오는 장면을 찾아냈다. 제목도 의미 있었다. ‘그 순간’. 딱 3분 47초의 장면. 그 남자 배우는 주인공 여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깊은 눈으로. 진심 어린 눈으로. 마치 그 여자가 우주의 전부인 듯이.

민준은 일어나 앉았다. 침대의 시트가 바스락거렸다. 겨울밤의 고요함을 깨뜨리는 소리였다. 그는 방 한 구석에 놓인 책상으로 갔다. 책상 위에는 노트북이 있었다. 아니, 있어야 했다. 하지만 거울이 없었다. 이 좁은 오피스텔에는 거울이 없었다. 아니, 있었다. 현관문 옆의 작은 거울. 하지만 그것은 너무 높았다.

민준은 다시 침대로 돌아갔다. 그리고 천장을 바라보며 그 배우의 표정을 따라 했다. 깊은 눈. 진심. 절절함. 그 모든 것을 담아서.

얼굴을 움직이지 않고. 목소리도 내지 않고. 단지 눈빛으로만.

그의 눈앞에서 천장이 서서히 변했다. 아니, 변한 것이 아니라 그의 눈이 변했다. 더 이상 천장을 보지 않고, 누군가를 보기 시작했다. 그 누군가는 없었지만,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것이 배우의 마법이었다. 없는 것을 있게 만드는 것.

밤 12시 30분.

민준은 그 장면을 다시 재생했다. 그리고 또 다시. 그리고 또 다시. 마치 그 안에 무언가의 비밀이 숨어있는 것처럼. 마치 그 눈빛의 뉘앙스를 한 번 더 정확하게 캐치할 수 있을 것 같은 착각 속에서.

배우의 눈. 그 눈에는 무엇이 있나?

그것을 따라하기 위해 민준은 다시 천장을 봤다. 눈을 감았다 떴다를 반복했다. 눈빛의 각도를 조절했다. 심지어 숨을 쉬는 방식도 바꿔봤다. 배우처럼 숨을 쉬면 그 눈빛도 나올까?

하지만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오직 민준의 눈만 있었다.

밤 1시 15분.

손가락이 떨리기 시작했다. 추위 때문일 수도 있었다. 이 오피스텔의 난방은 형편없었다. 하지만 손가락은 계속 떨렸다. 마치 그 떨림이 신체적인 것이 아니라 정신적인 것인 것처럼.

민준은 핸드폰을 내려놨다. 화면이 꺼졌다. 어둠이 다시 밀려왔다. 그는 눈을 감았다. 눈을 감으면 더 잘 보인다고 누군가 말했다. 거울 없이도.

밤 2시 47분.

그는 다시 드라마를 틀었다. 이번에는 다른 장면을 찾았다. 같은 배우가 나오는 다른 장면. 이번에는 혼자 있는 장면이었다. 그 배우는 창밖을 보고 있었다.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 표정으로. 아니, 너무 많은 것을 느껴서 그 모든 감정이 중성화되어버린 표정으로.

민준은 그 표정을 따라 했다. 이번에는 더 정확했다. 아니, 더 정확한 것 같았다. 자기 자신이 그렇게 느껴졌다.

그는 손을 들어올렸다. 천천히. 창밖을 가리키는 동작. 아니, 창밖을 향해 손을 뻗는 동작. 무언가를 잡으려는 동작.

손가락이 떨렸다.

밤 3시.

민준은 결국 잠들었다. 하지만 그것은 깊은 잠이 아니었다. 얕은 잠이었다.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에서 흔들리는 그런 잠. 그 속에서 그는 거울 앞에 서있었다.

거울 속의 얼굴이 계속 바뀌었다.

처음에는 자신의 얼굴이었다. 민준의 얼굴. 20대 중반의, 아직 결정되지 않은 얼굴. 하지만 그 얼굴이 점차 변했다.

그 다음에는 준호의 얼굴이 되었다. 고등학교 친구. 아니, 고등학교 친구가 아니라 고등학교 때의 라이벌. 준호는 학교 연극제에서 주인공을 맡았었다. 그리고 민준은 조연을 맡았었다. 그 때 준호는 이렇게 말했었다. “넌 왜 배우가 되려고 해? 넌 주인공 얼굴이 아니잖아.”

그 말이 맞았다. 민준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래서 조연이 되었다. 그래서 지금도 조연이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아버지의 얼굴이 되었다. 아버지는 민준이 배우가 되겠다고 했을 때 이렇게 말했었다. “좋다. 배우가 되거라. 하지만 주인공이 아니면 의미가 없다. 돈도 명예도 없다. 그래도 할 거냐?”

민준은 했다. 했지만 아직도 주인공이 아니었다.

거울 속의 세 얼굴이 모두 같은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깊은 눈. 진심. 절절함.

그것은 실망의 표정이었다.

## 2부: 새벽

밤 6시.

알람이 울렸다. 그것은 온화한 소리가 아니었다. 날카로운 소리였다. 깨어나는 것을 강제하는 소리였다. 민준의 눈이 떠졌다. 하지만 그의 의식은 아직 꿈 속에 남아있었다.

그는 눈을 떴다 감았다를 반복했다. 천장이 보였다. 벗겨진 페인트. 그것은 여전히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다.

겨울의 새벽은 길었다. 창밖은 아직도 어두웠다. 거의 밤과 다를 바 없는 어둠. 이 시간에 일어나는 것은 자연의 흐름을 거스르는 것처럼 느껴졌다.

민준은 일어나 앉았다. 손가락이 떨렸다. 아침 떨림. 아니면 오디션 떨림. 아마도 둘 다.

그는 손가락을 펴 보려고 했지만 펴지지 않았다. 마치 손가락이 자신의 것이 아닌 것처럼. 마치 누군가 다른 사람이 자신의 손을 조종하고 있는 것처럼.

오디션이다. 오늘은 중요한 오디션이다.

그는 몸을 일으켰다. 창밖을 봤다. 어둠. 여전한 어둠. 그 어둠 속에서는 도시의 불빛들이 작은 별처럼 떠있었다. 그 별들은 모두 누군가의 꿈을 담고 있을 것이다. 누군가의 희망을. 누군가의 절망을.

민준의 꿈은 무엇인가?

그는 알고 있었다. 주인공이 되는 것. 하지만 그것이 가능한가? 아버지도 준호도 거울도 모두 같은 표정으로 말했었다. 불가능하다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준비했다.

옷을 입으면서 그는 자신의 움직임을 관찰했다. 이것도 역시 배우의 습관이었다. 자신을 바라보는 것. 자신을 객체화하는 것. 자신의 몸을 도구로 사용하는 것.

셔츠의 단추를 하나씩 채웠다. 각각의 동작이 의도적이었다. 낭만적이었다. 슬펐다.

그리고 바지를 입었다. 벨트를 맸다. 신발을 신었다.

그 모든 동작이 하나의 공연이었다. 아무도 보지 않지만, 자신은 모두가 보고 있다고 느껴지는 그런 공연.

마지막으로 그는 현관의 작은 거울 앞에 섰다. 그 거울은 그의 얼굴의 절반만 비춰줄 수 있었다. 위쪽 절반. 눈과 이마와 머리.

그는 그 거울 속의 눈을 봤다.

오늘은 어떤 얼굴이 될까?

배우의 얼굴인가? 아니면 민준의 얼굴인가?

그 둘의 차이가 뭔지, 여전히 몰랐다.

아니, 그것은 거짓이었다. 그는 알고 있었다. 차이를 알고 있었다. 배우의 얼굴은 누군가를 위한 것이고, 민준의 얼굴은 누구를 위한 것도 아니었다. 배우의 얼굴은 웃음이고, 민준의 얼굴은 절망이었다. 배우의 얼굴은 있었고, 민준의 얼굴은 없었다.

그렇다면 오늘은?

오늘은 배우가 되어야 한다.

그는 거울 속의 눈에게 명령했다. 깊어져라. 진심이 흘러나와라. 절절해져라.

눈이 변했다. 아니, 변한 것 같았다. 아마도 그것은 자기기만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자기기만이 필요했다. 그 자기기만이 그를 앞으로 나아가게 할 것이었다.

## 3부: 아침의 만남

오전 7시 42분.

더스타 엔터테인먼트의 10층 복도는 아직 조용했다. 직원들은 아직 오지 않았다. 오직 청소 직원과 몇몇의 배우들만이 이 공간을 점유하고 있었다.

민준은 회의실 밖에 서있었다. 손을 주머니에 넣었다. 빼었다. 다시 넣었다. 그 반복 속에서 그는 자신이 떨리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창문을 통해 서울의 일부가 보였다. 빌딩들. 도로들. 그 위를 움직이는 자동차들과 사람들. 모두가 자신의 길을 가고 있었다. 누군가는 주인공처럼, 누군가는 조연처럼.

민준은 어느 쪽인가?

엘리베이터의 소리가 들렸다. 그것이 올라오는 소리였다. 민준의 심장이 빨라졌다. 마치 그 엘리베이터가 자신의 운명을 실어 나르고 있는 것처럼.

문이 열렸다.

그것은 우리였다.

우리는 아침 햇살 속에서 다르게 보였다. 더 밝아 보였다. 동시에 더 긴장해 보였다. 그녀의 머리는 완벽하게 스타일링되어 있었고, 옷도 신중하게 선택된 것 같았다. 하지만 그녀의 눈에는 불안이 떠있었다.

그녀의 손도 주머니 안에 들어갔다 나왔다를 반복하고 있었다.

“민준! 어? 넌 왜 여기 있어?”

그녀의 목소리는 밝았다. 하지만 그 안에는 떨림이 있었다. 그것을 숨기려고 노력하는 것이 오히려 더 드러났다. 배우라면 그것을 더 잘 숨겨야 할 텐데.

“아, 맞다. 넷플릭스지. 나도 여기.”

그녀가 다시 말했다. 이번에는 더 자신 있게. 마치 자신에게 말하는 것처럼.

민준은 자신도 모르게 물었다.

“우리는 안 떨려요?”

그 질문은 계획된 것이 아니었다. 그냥 입에서 나온 것이었다. 자신의 불안을 드러내는 것이 누군가와 연결되기를 원하는 것이었다.

우리가 웃었다.

“나? 떨려? 미쳤나. 내가 왜 떨려?”

그녀의 웃음이 더 컸다. 마치 자신의 떨림을 웃음으로 압살하려는 것처럼.

“난 잘할 거야. 우리 둘 다.”

그 말을 하면서 우리는 민준의 어깨를 톡 쳤다. 그 접촉은 따뜻했다. 인간적인 접촉. 그것은 마치 누군가가 자신도 불안하다고, 하지만 함께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민준은 얼마나 오래 이런 접촉을 받지 못했는지 깨달았다. 친구들도, 가족도, 아무도 그렇게 자신을 만지지 않았다. 아니, 자신이 그렇게 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배우는 혼자여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순간, 그는 다르게 생각했다.

배우도 인간이다. 그리고 인간은 혼자가 아니다.

“들어갈까?”

우리가 물었다.

민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회의실의 문을 열었다.

## 4부: 회의실

그 안에는 이수진 대표가 앉아있었다. 50대 초반의 여자. 얼굴에는 권력의 흔적이 새겨져 있었다. 그녀의 눈은 민준과 우리를 재는 저울 같았다.

그리고 두 명의 남자가 더 있었다.

하나는 50대로 보이는 PD. 그의 이름은 박성훈. 그는 이 드라마의 감독이었다. 그의 손가락은 테이블 위에서 계속 움직이고 있었다. 마치 카메라의 버튼을 누르는 것처럼.

다른 하나는 30대로 보이는 캐스팅 디렉터. 그의 이름은 김준호. 그의 눈은 전자 기기처럼 보였다. 정확하고, 감정이 없고, 분석적이었다.

세 사람 모두 민준과 우리를 바라봤다.

그들의 시선은 무겁고 차가웠다.

“들어오세요.”

이수진 대표가 말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낮았다. 그리고 절대적이었다. 마치 신의 목소리처럼.

민준과 우리는 들어갔다. 그들이 앉을 의자가 이미 준비되어 있었다. 탁자 맞은편에. 마치 심판대 앞의 피고인석처럼.

“너희 둘 다 알고 있지? 이건 넷플릭스 드라마야. 예산도 크고, 배우들도 유명할 거야. 그리고 너희 중 하나는 그 드라마의 여주인공을 맡게 될 거다.”

이수진 대표가 계속 말했다.

“하지만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알지? 그것은 너희 중 하나는 선택되고, 다른 하나는 버려진다는 뜻이다. 이 업계에서 ‘거의 합격’이나 ‘아까운 배우’라는 것은 없다. 있거나 없거나. 그것뿐이다.”

민준은 그 말을 들었다. 그의 심장은 더 빨라졌다. 그의 손가락은 더 떨렸다. 하지만 그의 얼굴은 변하지 않았다. 배우이기 때문이었다.

“자, 그럼 시작해보자. 먼저 우리부터 읽어보자. 첫 번째 장면.”

박성훈 PD가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기계적이었다.

우리가 일어섰다. 그녀의 손은 떨렸지만, 그녀의 얼굴은 웃고 있었다. 완벽한 배우의 웃음.

그녀가 대사를 읽기 시작했다.

“나는… 나는 너를 잊을 수가 없어.”

그녀의 목소리는 떨렸다. 하지만 그 떨림은 의

2 / 50

Leave a Comment

Your email address will not be published. Required fields are marked *

Scroll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