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아닌 것을 위해 불탄 소녀 – 제207화: 창밖의 침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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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207화: 창밖의 침묵

강리우는 32층 복도의 창문 앞에 서 있었다. 서울이 발 아래에 있었다. 강남역 위쪽으로 청담동과 신논현역의 불빛들이 퍼져 있었고, 더 멀리로는 한강이 검은 띠처럼 흘러가고 있었다. 새벽 4시 무렵. 도시는 아직도 깨어 있었다. 24시간 깨어 있는 도시. 밤이 끝나지 않는 도시.

그의 손가락이 창문에 닿았다. 차가웠다. 마치 이 도시 전체가 자신의 손을 얼려버리려는 것처럼.

34층의 아버지 사무실에서 나온 지 얼마나 되었을까. 시간이 흐르는 방식이 달라졌다. 이제 강리우는 분 단위로 시간을 세지 않았다. 대신 호흡 단위로 셌다. 한 번 숨을 쉬고, 또 한 번 숨을 쉬고, 그리고 또.

폴더는 여전히 자신의 손에 있었다. 검은색 파일 폴더. 그 안에는 두 개의 얼굴이 들어 있었다. 나세아. 나리우. 같은 어머니의 뼈대를 가진 두 개의 아이. 그리고 강민준의 아들도 아닌, 강민준의 딸도 아닌, 강민준의 관계자들.

강리우는 아버지의 말을 다시 들었다. 마치 그 말들이 자신의 뇌에 녹음되어 있던 것처럼.

“다양한 방식으로 돈을 버는 거지. 부동산. 주식. 그리고… 사람.”

사람. 그 단어가 자신을 관통했다. 사람을 돈 버는 방식의 하나로 나열하는 방식. 마치 그것이 주식과 동등한 상품인 것처럼. 마치 사람도 살 수 있고, 팔 수 있고, 이용하고 버릴 수 있는 것인 것처럼.

그리고 세아. 자신이 매일 밤 생각하는 세아. 자신이 손을 잡고 싶어 하는 세아. 자신이 지켜주고 싶어 하는 세아.

그 세아가 어머니를 통해 이 도시와 이 아버지에 연결되어 있었다.

강리우는 눈을 감았다. 창밖의 불빛들이 자신의 눈꺼풀 뒤에서 춤을 추었다. 저 불빛 중 하나가 세아의 방일까. 아니면 도현이가 자고 있는 방일까. 아니면 그냥 누군가의 침실 조명이었을까.

그는 휴대폰을 꺼냈다. 4시 02분. 세아로부터 마지막 연락은 7시간 전이었다. 그것도 문자가 아니라 그냥 통화 기록. 그가 건 전화를 받지 않았다는 것의 증거.

손가락이 떨렸다. 아버지처럼. 세아처럼. 이제는 자신처럼.


병실은 여전히 침묵으로 가득 차 있었다.

세아는 의사를 부르기 위해 복도로 나갔다가 되돌아왔다. 무엇을 해야 할지를 모르고 있었다. 의사를 부르는 것이 맞는지도 모르겠고, 어머니를 깨워두는 것이 맞는지도 모르겠고, 강리우에게 연락을 해야 하는지도 모르겠고.

가장 중요한 것은, 어머니가 지금 어떤 상태인지를 모른다는 것이었다.

어머니의 눈은 다시 감겨 있었다. 하지만 완전히는 아니었다. 속눈썹 아래에서 짧은 눈동자 움직임이 계속되었다. REM. 급속 안구 운동. 의식이 깨어 있지만 몸은 쉬고 있는 상태. 또는 악몽을 꾸고 있는 상태.

도현이는 여전히 어머니의 손을 잡고 있었다. 한 시간을 그렇게 잡고만 있었다. 움직이지 않고. 말도 하지 않고. 단지 손가락 끝으로 어머니의 맥박을 느끼고 있었다.

“엄마가 깨어난 거야?”

도현이가 물었다. 목소리는 아직도 떨리고 있었다.

“모르겠어.”

세아가 대답했다. 정직한 답변이었다. 그것이 유일하게 가능한 답변이었다.

“깨어난 것 같긴 한데, 아직 의식이 완전히 돌아온 건 아닌 것 같아. 의사가 와야 해.”

세아는 다시 일어서려고 했다. 하지만 도현이가 그녀의 팔을 잡았다.

“누나.”

“뭐.”

“강리우 형이 뭐라고 했어? 아버지 사무실에서. 뭐라고.”

세아는 도현이의 눈을 봤다. 17살 남자아이의 눈. 하지만 그 눈에는 17살의 것이 남아 있지 않았다. 그 눈에는 어른의 두려움이 있었다. 무언가를 알아야 한다는 절실함이 있었다.

“아직 못 들었어.”

세아가 거짓말을 했다. 아주 작은 거짓말이었다. 그것도 완전한 거짓말은 아니었다. 강리우가 돌아와서 직접 말하지는 않았으니까.

“강리우 형이 뭐 들고 나왔더라. 검은색 폴더.”

세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도현이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대신 어머니의 손을 더 강하게 잡았다. 마치 그것이 자신을 지탱해주는 유일한 방법인 것처럼.

시간이 흘렀다. 얼마나 흘렀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병실의 형광등은 여전히 무정하게 빛나고 있었고, 심장 모니터는 여전히 규칙적으로 삐 소리를 내고 있었고, 어머니는 여전히 눈을 감은 채로 있었다.

그리고 강리우는 돌아오지 않았다.


강리우는 32층 창문에서 떠나지 않았다.

혼자 서 있었다. 폴더를 들고. 서울의 불빛을 앞에 두고.

그의 휴대폰이 울렸다. 진동. 음소거 상태였다. 화면이 밝혀졌다.

엄마

그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화면이 어두워졌다. 그리고 잠시 후, 다시 울렸다.

엄마

다시 받지 않았다.

세 번째 울림. 네 번째 울림. 다섯 번째 울림.

그는 휴대폰을 바지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울림도 함께. 어머니의 울림도 함께.

강리우는 폴더를 열었다. 다시. 이미 열었지만, 다시 열었다. 마치 내용이 바뀔 수도 있다는 희망을 가지고.

나세아. 흑백 사진. 어린 얼굴. 표정이 없는 얼굴.

그 아래에 통장 기록. 입금. 출금. 입금. 출금.

그리고 또 다른 서류들. 강리우는 그것들을 읽으려고 했다. 진짜로. 각 줄을 읽으려고. 하지만 눈이 글자를 인식하지 못했다. 눈은 열려 있었지만, 뇌는 이 정보를 처리할 수 없었다. 마치 그 정보들이 외국어인 것처럼. 아니, 그것보다 더 낯선 언어인 것처럼.

“뭐 하고 있어?”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렸다. 뒤에서.

강리우는 돌아보지 않았다.

“생각하고 있었어.”

강리우가 대답했다.

“뭘.”

“세아를 놓으면, 내가 뭐가 남을까. 그걸.”

침묵이 있었다. 긴 침묵. 강민준이 답을 생각하는 시간.

“너는 이미 뭘 가진 것도 없어. 그래서 뭘 놓는 것도 쉬워야지.”

아버지가 말했다.

강리우는 웃음이 나왔다. 작은 웃음. 목 아래에서 나오는 웃음이 아니라, 가슴 깊숙한 곳에서 나오는 웃음. 거의 울음에 가까운 웃음.

“세아를 어떻게 해?”

강리우가 물었다.

“그건 이제 너의 문제가 아니야. 나의 문제도 아니고. 그냥… 일의 결과야. 투자가 실패하면, 손실을 받아들이는 거지. 그게 비즈니스야.”

강민준의 목소리에는 여전히 감정이 없었다. 마치 자신이 말하는 것이 날씨에 대한 것이었던 것처럼. 마치 자신이 말하는 것이 자신의 아들이 아닌 다른 누군가의 인생에 대한 것이었던 것처럼.

“그리고 나리우는?”

강리우가 물었다.

침묵.

“나리우는 아직 어려. 아직도 쓸모가 있어. 그래서 계속 가져둘 거야. 혹시 모르니까.”

아버지가 말했다.

강리우는 폴더를 내렸다. 손이 떨렸다. 너무 떨려서 폴더를 잡을 수 없을 정도로.

“내가 너한테 물어볼 게 있어.”

아버지가 계속했다.

“뭐.”

“너는 정말로 그 여자를 좋아하니? 아니면 내가 하는 일을 정당화하기 위해서니? 착한 아들이 되기 위해서니? 아니면 그냥… 외로워서?”

그 질문 앞에서, 강리우는 대답할 수 없었다.

정말로 대답할 수 없었다.

그 이유는, 자신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세아를 사랑하는가. 그렇다. 그는 그것을 안다. 손가락 끝에서부터 가슴까지, 모든 세포가 그것을 말하고 있다.

하지만 그것이 무엇인지는 모른다. 그것이 순수한 감정인지, 아니면 죄책감인지, 아니면 아버지에 대한 반발심인지, 아니면 자신의 외로움을 채우기 위한 욕망인지.

아버지는 그것을 정확하게 꿰뚫어보고 있었다. 강리우의 영혼의 모든 틈을.

“너는 이제 나를 떠날 거야. 알지?”

아버지가 말했다.

“뭐.”

“넌 회사를 나갈 거고, 세아를 찾아갈 거고, 그리고 일시적으로 영웅이 된 것처럼 느낄 거야. 그리고 그것이 오래 지속되지 않을 거야. 왜냐하면 넌 나를 떠날 수 없기 때문이야. 나의 돈을 떠날 수 없기 때문이야. 나의 이름을 떠날 수 없기 때문이야.”

강민준의 목소리는 여전히 차갑고 무감정했다. 하지만 강리우는 그 안에서 뭔가를 들었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명확하지 않았다. 연민인가. 아니면 우월감인가. 아니면 그냥 사실의 진술인가.

“그리고 언젠가, 네가 충분히 지쳤을 때, 넌 돌아올 거야. 그리고 그때 나는 너를 받아들일 거야. 왜냐하면 우리는 같은 사람이니까. 같은 종이니까. 그리고 이 도시에서 우리 같은 종은, 결국 자신의 종으로 돌아가니까.”

강리우는 눈을 감았다. 아버지의 말을 듣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들렸다. 마치 그 말들이 자신의 뼈에 새겨지는 것처럼. 자신의 DNA에 기록되는 것처럼.

“너는 가도 돼. 그 여자를 구해도 돼. 하지만 이걸 명심해. 내가 한 말은 절대 거짓이 아니야. 그것은 단지 미래일 뿐이야. 아직 일어나지 않은 미래일 뿐이야. 하지만 일어날 거야. 왜냐하면 인간은 자신의 본성을 거스를 수 없으니까.”

강리우는 눈을 떴다. 그리고 아버지를 봤다. 처음으로 32층 창 앞에서. 강민준의 얼굴.

그 얼굴에는 자신의 얼굴이 있었다. 같은 눈. 같은 광대뼈. 같은 턱선. 그리고 같은, 깊은 절망.

“세아를 놔. 아버지.”

강리우가 말했다.

“그게 뭔 소리야. 난 아무것도 못 놔. 너도 못 놔. 그래서 우린 이 모양인 거고.”

아버지가 대답했다.

강리우는 폴더를 들었다. 그리고 창문으로 향했다.

“뭐 하는 거야.”

아버지가 물었다.

“문서를 없앨 거야.”

“그건 사본이야. 원본은 안전한 곳에 있어. 그리고 넌 뭘 해도, 나는 그냥 다시 만들면 돼. 또 다른 아이를 찾으면 돼. 또 다른 목소리를 사면 돼.”

아버지가 말했다.

강리우의 손가락이 폴더의 모서리를 창문 틀에 밀어붙였다. 한 손으로 떨리는 팔을 잡으면서.

“넌 뭐가 되고 싶어?”

아버지가 물었다.

“모르겠어.”

강리우가 대답했다.

“그래. 그래서 넌 뭐가 될 수도 없는 거야.”

아버지가 말했다.

강리우는 폴더를 놓았다. 손가락을 떨어뜨렸다. 폴더는 그대로 강리우의 손에 남았다. 창문은 열리지 않았다. 32층 높이에서는, 창문은 절대 열리지 않도록 되어 있었다. 안전을 위해. 또는 절망을 통제하기 위해.

강리우는 돌아섰다. 아버지를 향해. 그리고 말했다.

“내가 너를 떠나는 게 아니라, 너는 이미 나를 떠났어. 오래전에. 내가 태어나기 전에. 그래서 난 너한테서 뭘 가질 것도 없어. 뭘 잃을 것도 없어.”

강민준은 웃음이 나왔다. 깊고, 진지하고, 거의 슬픔에 가까운 웃음.

“그게 뭔 소리를 하는 거야. 넌 내 이름을 가지고 있어. 넌 내 얼굴을 가지고 있어. 넌 내 손가락을 가지고 있어. 그리고 그것들은 절대 없어지지 않을 거야. 넌 떠나도, 넌 항상 내 것이야. 그것이 저주인지 축복인지는 모르겠지만.”

강리우는 사무실을 나갔다. 폴더를 들고. 아버지의 말을 들으면서도.

엘리베이터 앞에서, 그는 폴더를 다시 봤다. 나세아의 사진. 흑백. 표정이 없는.

그리고 그는 결정했다.


병실로 돌아가지 않고, 강리우는 병원 지하주차장으로 갔다.

자신의 차. 검은색 벤츠. 그 안에 앉아서, 그는 처음으로 휴대폰을 꺼냈다.

10개의 부재중 전화. 모두 엄마였다.

그는 엄마에게 전화를 돌렸다. 아버지와의 대화를 마친 후로 처음으로.

“강리우. 지금 어디야. 병원에 왔다고 했잖아. 어머니가 깨어났어. 깨어났다고!”

어머니의 목소리가 울렸다. 기쁨으로. 절망으로.

“엄마. 이거 좀 들어봐. 세아의 어머니가 뭐라고 했어?”

강리우가 물었다.

“뭐? 뭐 하는 소리를.”

“세아의 어머니가 깨어난 뒤로 뭐라고 했어. 정확하게.”

강리우가 반복했다.

휴대폰 너머에서, 그는 어머니가 생각하는 소리를 들었다.

“글쎄… 아직 말을 잘 못하는데… 세아의 이름을 계속 부르고 있었어. 그리고…”

“그리고?”

“그리고… 뭔가를 찾는 것 같았어. 손이 계속 움직여. 도현이를 밀어내려는 것처럼.”

강리우는 침을 삼켰다.

“엄마. 세아한테 뭐라고 했어? 세아는 뭐라고 대답했어.”

“세아는… 아직 뭐도 대답하지 않은 것 같아. 마치 뭔가를 알고 있지만, 말할 수 없는 것처럼.”

강리우는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다시, 세아에게 전화를 걸었다. 첫 번째 전화. 두 번째 전화. 세 번째 전화.

다 울렸다.

그리고 답이 없었다.

강리우는 차의 키를 켰다. 시동을 걸었다. 그리고 병원을 빠져나갔다.

4시 47분. 새벽. 아직도 새벽이었다.

그리고 서울의 불빛들은 여전히 깜박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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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떠남과 남음의 경계에서

## 1부: 사무실의 대화

강민준의 사무실은 57층의 한 귀퉁이에 있었다. 창밖으로는 서울의 야경이 펼쳐져 있었고, 밤 11시를 넘은 시간이었지만 그곳의 불빛들은 여전히 수천 개의 눈처럼 깜박이고 있었다. 강리우는 그 불빛들을 보지 않았다. 그의 눈은 아버지의 얼굴에만 고정되어 있었다.

“내가 너를 떠나는 게 아니라, 너는 이미 나를 떠났어. 오래전에. 내가 태어나기 전에. 그래서 난 너한테서 뭘 가질 것도 없어. 뭘 잃을 것도 없어.”

강리우의 목소리는 차갑고 명확했다. 감정이 빠져있었다. 마치 누군가 다른 사람의 대사를 읽는 배우처럼. 하지만 내면은 다르게 요동치고 있었다. 그의 가슴 속에서는 뭔가가 불타고 있었다. 분노인지, 슬픔인지, 아니면 그 둘 다의 혼합물인지 알 수 없는 감정이. 손가락들이 무의식적으로 움직였다. 주먹을 쥐었다 폈다를 반복했다.

강민준은 한 순간 침묵했다. 그 침묵은 무거웠다. 마치 공기가 응축된 듯한 무게감이 사무실을 채웠다. 그의 얼굴은 처음으로 흔들렸다. 강철 같던 표정에 금이 가는 것처럼. 그리고 그가 웃음을 터뜨렸을 때, 그것은 강리우를 더욱 놀라게 했다.

깊고, 진지하고, 거의 슬픔에 가까운 웃음이었다.

“그게 뭔 소리를 하는 거야.”

강민준은 천천히 말했다. 마치 매 단어를 신중하게 고르는 것처럼. 그의 손이 책상 위에서 움직여 폴더를 집었다. 나세아의 흑백 사진이 들어 있는 그 폴더를. 그의 손가락이 사진의 가장자리를 만졌다. 마치 그것이 깨질 수 있는 무언가인 것처럼 조심스럽게.

“넌 내 이름을 가지고 있어.”

그의 목소리가 떨렸다. 이제는 감정이 묻어났다. 오래전부터 억눌렀던 것들이 흘러나오는 것처럼.

“강리우. 강씨 성에 리우 자. 내가 너를 낳기 전에 이미 정해두었던 이름이야. 아버지 때부터 내려오는 이름 같은 것들도 있었어. 그런데 넌 그걸 거부했지. 넌 그걸 버렸어. 마치 내가 준 모든 것들을 버리는 것처럼.”

강리우는 반박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아버지의 말을 들으면서 그는 자신의 유년시절을 떠올렸다. 생일 선물로 받은 시계. 학용품들. 그리고 나중에는 돈. 많은 돈. 하지만 그 모든 것들 아래에는 조건이 있었다. 기대가 있었다. 그리고 그 기대에는 사랑이 아니라 소유욕이 깔려 있었다.

“넌 내 얼굴을 가지고 있어.”

강민준이 계속했다. 그는 일어서서 창문으로 걸어갔다. 그의 뒷모습이 야경의 불빛에 비쳐 보였다. 마치 그도 그 수천 개의 불빛 중 하나인 것처럼. 혼자이면서도 다른 무언가와 연결되어 있는 존재.

“넌 내 눈을 가지고 있어. 같은 색깔의 눈. 같은 깊이의 눈. 사람들이 거리에서 우리를 봤을 때, 그들은 우리가 같은 사람의 두 버전이라고 생각했어. 아버지와 아들. 과거와 미래. 그런데 넌 그것도 거부하려고 했지? 넌 그 닮음을 벗어버리고 싶었어. 마치 그것이 저주인 것처럼.”

강리우의 목이 건조해졌다. 침을 삼키려고 했지만, 침도 없었다. 그는 일어서서 아버지 옆에 섰다. 창밖의 야경을 함께 보았다. 그 무수한 불빛들 사이에는 무엇이 있을까. 각각의 불빛 뒤에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그들도 모두 누군가의 아들이거나 딸일 것이다. 그들도 모두 떠나고 싶을까. 아니면 남고 싶을까.

“넌 내 손가락을 가지고 있어.”

강민준이 자신의 손을 들어 보였다. 길고 가느다란 손가락들. 강리우의 손과 거의 같은 모양. 같은 비율. 같은 무언가가.

“이 손가락들로 뭘 해야 할지는 넌 몰라. 그래서 넌 자꾸 떠나려고 해. 넌 자꾸 버리려고 해. 마치 이 손가락들을 떼어낼 수 있을 것처럼. 하지만 그건 불가능해. 이 손가락들은 절대 없어지지 않을 거야.”

그의 목소리가 더 낮아졌다. 거의 속삭임에 가까워졌다.

“넌 떠나도, 넌 항상 내 것이야. 그것이 저주인지 축복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마도 둘 다겠지. 모든 관계가 그렇듯이.”

강리우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럴 수 없었다. 그의 입술이 경직되어 있었고, 목이 무언가로 조여 있는 느낌이었다. 그는 아버지의 말들을 들으면서 동시에 그 말들을 거부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 두 가지를 동시에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마치 두 개의 불빛이 동시에 같은 공간을 밝힐 수 없듯이.

“세아에 대해서 말해줘.”

강민준이 갑자기 물었다.

강리우는 놀라 고개를 들었다. 아버지의 얼굴을 다시 바라봤다. 강민준의 눈에는 뭔가가 있었다. 호기심이 아니라, 확신처럼 보이는 무언가가.

“뭐가… 뭐가 뭐라는 거예요?”

강리우가 물었다. 그의 목소리가 떨렸다. 아버지의 질문에 숨어 있는 의도를 감지한 것처럼.

“세아가 병원에 왔잖아. 엄마가 깨어났으니까. 그 여자가 깨어났으니까. 넌 그 여자를 만났어. 넌 그 여자의 얼굴을 봤어. 그리고 넌 뭔가를 알았어. 알지 않니?”

강민준이 천천히 물었다. 그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그 아래에는 뭔가가 끓고 있었다.

강리우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아버지 옆에서 다시 창밖으로 눈을 돌렸다. 저 아래의 불빛들 중 어디에 세아가 있을까. 그 여자가 어디에 있을까. 그리고 그 여자는 지금 뭘 하고 있을까. 자고 있을까. 아니면 자신처럼 깨어 있을까.

## 2부: 떠남의 결정

“내가 너를 떠나는 게 아니라, 너는 이미 나를 떠났어.”

강리우가 다시 말했다. 이번에는 더욱 천천히. 마치 자신에게 말하는 것처럼.

“오래전에. 내가 태어나기 전에.”

아버지는 웃음을 멈췄다. 그의 얼굴이 다시 경직되었다. 마치 누군가 그의 얼굴을 손으로 누르는 것처럼.

강리우는 책상 위의 폴더를 집었다. 나세아의 흑백 사진이 들어 있는 그 폴더. 그의 손이 가늘게 떨렸다. 하지만 그의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감사합니다, 아버지. 하지만 난 더 이상 여기에 있을 수 없어요.”

그가 말했다.

“넌 뭘 하려고 하는 거야?”

강민준이 물었다. 그의 목소리가 날카로워졌다.

“제가 해야 할 일을 하려고 해요.”

강리우가 대답했다.

그리고 그는 사무실을 나갔다. 폴더를 들고. 아버지의 말을 들으면서도. 엘리베이터로 향하면서도. 뒤에서 들리는 아버지의 목소리를 들으면서도. 하지만 그는 돌아가지 않았다.

엘리베이터 문 앞에서, 강리우는 폴더를 다시 들어 봤다. 나세아의 사진. 흑백. 표정이 없는 그 사진. 하지만 그 눈에는 뭔가가 있었다. 고통인가. 아니면 비밀인가. 아니면 그 둘 다인가.

그리고 그 순간, 그는 결정했다.

더 이상 도망치지 않기로. 더 이상 거짓을 말하지 않기로. 더 이상 침묵하지 않기로.

엘리베이터가 열렸을 때, 강리우는 그 안으로 걸어들어갔다. 문이 닫혔다. 그리고 그는 내려갔다. 57층에서. 56층으로. 55층으로. 계속해서. 마치 지옥으로 내려가는 것처럼. 아니면 구원으로 내려가는 것처럼. 그 차이를 그는 아직도 알 수 없었다.

## 3부: 지하주차장에서

병실로 돌아가지 않고, 강리우는 병원 지하주차장으로 향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그는 어두운 주차장을 걸어 다녔다. 형광등의 빛이 흰색으로 모든 것을 비추고 있었다. 자동차들의 그림자가 기하학적인 패턴을 만들고 있었다. 그의 발소리가 콘크리트 바닥에서 울렸다. 박, 박, 박. 규칙적인 리듬. 하지만 그의 심장은 규칙적이지 않았다. 마구잡이로 뛰고 있었다.

자신의 차. 검은색 벤츠. 고급스러운 외관. 아버지가 졸업선물로 주었던 차. 강리우는 운전석에 앉았다. 가죽 시트가 그의 몸을 감쌌다. 향수로운 냄새. 비용이 많이 드는 향수. 모든 것이 비용이 많이 드는 것들로만 이루어진 차.

그는 시동을 걸지 않았다. 대신,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화면이 밝혀졌다. 어두운 주차장에서 그 빛은 거의 눈부셨다. 10개의 부재중 전화. 10개 모두 엄마였다.

**엄마. 11:23**

**엄마. 11:31**

**엄마. 11:47**

**엄마. 12:03**

시간들이 나열되어 있었다. 각 전화 사이의 시간 간격이 점점 짧아지고 있었다. 불안감의 증가. 초조함의 증가. 사랑의 증가. 아니면 집착의 증가.

강리우는 엄마의 번호를 눌렀다. 아버지와의 대화를 마친 후로 처음으로. 핸드폰이 울렸다. 한 번. 두 번. 세 번.

“강리우! 지금 어디야!”

엄마의 목소리가 폭발했다. 거의 비명을 지르는 것 같은 목소리. 그 목소리 뒤에는 절박함이 있었다.

“병원에 왔다고 했잖아. 어머니가 깨어났어. 깨어났다고! 리우야, 넌 어디야?”

강리우의 엄마 – 강영미 – 의 목소리가 울렸다. 기쁨으로. 절망으로. 그 두 감정이 섞여 있는 목소리로.

강리우는 침을 삼켰다. 차 안의 공기가 갑자기 너무 가까워 보였다.

“엄마. 이거 좀 들어봐. 세아의 어머니가 뭐라고 했어?”

강리우가 물었다. 그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하지만 그것은 거짓된 차분함이었다. 실제로는 그의 내면이 흔들리고 있었다.

“뭐? 뭐 하는 소리를.”

강영미가 물었다. 혼란 속에서.

“세아의 어머니가 깨어난 뒤로 뭐라고 했어. 정확하게. 엄마가 뭘 들었어?”

강리우가 반복했다. 이번에는 더욱 강하게. 마치 뭔가가 중요한 것처럼.

휴대폰 너머에서, 그는 어머니가 생각하는 소리를 들었다. 침묵 속에서의 호흡음. 그리고 가슴의 고동. 아니면 그것은 자신의 심장음이었을까.

“글쎄… 아직 말을 잘 못하는데… 세아의 이름을 계속 부르고 있었어. ‘세아, 세아, 세아야.’ 이렇게. 마치… 마치 뭔가를 찾는 것 같았어. 손이 계속 움직여. 도현이를 밀어내려는 것처럼.”

강리우는 침을 삼켰다. 그의 손이 핸드폰을 누르고 있었다. 너무 강하게. 마치 그것을 부수려는 것처럼.

도현이. 자신의 어린 형. 아버지와 강영미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 그 아이가 이 모든 일과 관련이 있을까. 그 아이가 뭔가를 알고 있을까.

“엄마. 세아한테 뭐라고 했어? 세아는 뭐라고 대답했어?”

강리우가 물었다. 그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세아는… 아직 뭐도 대답하지 않은 것 같아. 마치 뭔가를 알고 있지만, 말할 수 없는 것처럼. 리우야, 뭐가 뭐라는 거야? 넌 병원에 와야 해. 어머니가… 어머니가 뭔가 이상해. 도현이도 계속 울어. 뭐가 뭐라는 거야?”

강영미의 목소리가 더욱 높아졌다. 거의 부르짖음에 가까워졌다.

강리우는 전화를 끊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아무 설명도 하지 않고. 마치 누군가 그의 목에 칼을 댄 것처럼.

그리고 다시, 세아에게 전화를 걸었다. 첫 번째 전화. 벨이 울렸다. 한 번. 두 번. 세 번. 아무도 받지 않았다.

두 번째 전화. 세 번. 네 번. 다섯 번.

세 번째 전화. 열 번이나 울렸다.

모두 울렸다.

그리고 답이 없었다.

## 4부: 새벽의 길로

강리우는 차의 키를 꺼냈다. 손이 떨렸지만, 그는 엔진에 키를 밀어 넣었다. 차가 시동을 걸었다. 엔진음이 지하주차장을 가득 채웠다. 그 소리가 울려 퍼졌다. 마치 무언가가 깨어나는 소리처럼.

강리우는 기어를 D에 놓았다. 발을 가속 페달에 올렸다. 차가 움직였다. 천천히. 하지만 확실하게. 지하주차장의 좁은 통로를 통해.

형광등들이 차창을 통해 지나갔다. 흰색의 빛들. 그것들이 자동차의 검은색 표면에 반사되었다. 마치 별들이 움직이는 것 같았다.

병원을 빠져나갈 때, 그는 아무도 자신을 멈추려고 하지 않았다. 야간 보안원도 그저 차가 나가는 것을 봤을 뿐이다. 또 다른 사람. 또 다른 차. 또 다른 밤.

거리로 나온 강리우는 핸드폰을 다시 들었다. GPS를 켰다. 세아의 주소를 검색했다. 그녀의 집. 그녀가 살고 있는 곳. 그가 그동안 피해왔던 곳.

도로가 펼쳐졌다. 새벽 시간의 도로. 거의 비어있는 도로. 하지만 완전히 비어있지는 않았다. 가로등들이 켜져 있었다. 그리고 몇몇 택시들이 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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