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아닌 것을 위해 불탄 소녀 – 제205화: 아버지가 남긴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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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205화: 아버지가 남긴 것들

세아는 병실의 형광등 불빛 속에서 자신의 손을 들었다 내려놨다. 다시 들었다. 마치 그 손이 자신의 것인지 아닌지를 확인하려는 것처럼. 손가락들이 여전히 떨리고 있었다. 아주 미세하게. 밀리미터 단위로. 하지만 분명하게. 누군가 매우 먼 곳에서 그 손을 집어당기는 것처럼.

강리우가 서류를 들고 나간 지 얼마나 지났을까. 시간이 의미를 잃었다. 병실의 벽에 붙은 시계는 3시 47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새벽. 아직도 새벽이었다. 이 밤은 언제 끝날 것인가. 아니, 정말로 끝나야 할 것인가.

도현이는 어머니의 손을 계속 잡고 있었다. 한 번도 놓지 않았다. 세아가 방을 나갔을 때도. 강리우가 나갔을 때도. 지금도. 손가락이 거의 마비될 정도로. 하지만 놓을 수 없었다. 만약 놓으면 어머니가 다시 사라질 것 같았다. 그 깊은 물로 돌아갈 것 같았다. 그 검은 바다로.

세아는 창밖을 봤다. 서울의 밤. 강남의 불빛들이 멀리서 반짝였다. 저 아래에서는 누군가가 살고 있었다. 누군가가 자고 있었다. 누군가가 꿈을 꾸고 있었다. 그들은 자신의 아버지가 누구인지 알고 있을까. 그들은 자신의 아버지의 이름을 말할 수 있을까.

강민준. Kang Min-Jun.

세아는 그 이름을 입 속으로 반복했다. 목소리로 내지 않고. 혀 위에서만. 혀가 그 이름의 형태를 따라하는 것처럼. 강. 민. 준. 세 개의 음절. 세 개의 칼. 자신을 찌르는.

“누나.”

도현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주 약하게. 마치 자신도 자신의 목소리를 듣지 못할 정도로.

“뭐.”

세아가 대답했다.

“엄마가… 엄마가 자꾸 뭔가를 찾는 것 같아. 손가락이 자꾸 움직여. 내 손을 자꾸 밀어내려고 해.”

도현이가 말했다. 그의 목소리에 공포가 섞여 있었다. “이러면 안 되는 건데.”

세아는 일어섰다. 의자에서 천천히. 마치 움직이면 뭔가 깨질 것 같은 조심스러움으로. 어머니의 침대 옆으로 가서, 어머니의 얼굴을 봤다.

어머니의 눈이 떴다. 아주 조금만. 바늘구멍만큼. 하지만 떴다. 그 안에는 무언가가 있었다. 인식. 또는 기억. 또는 공포.

“어머니.”

세아가 속삭였다.

어머니의 입이 움직였다. 말을 하려는 것처럼. 하지만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혀가 마르고 입술이 갈라져 있었다. 14일간의 침묵과 수액의 결과.

“말하지 마세요. 편하게.”

세아가 어머니의 이마에 손을 얹었다. 어머니의 피부는 차가웠다. 죽음과 같은 차가움이 아니라, 그보다는 나은 차가움. 아직도 살아있는 것의 차가움.

어머니의 눈이 세아를 찾았다. 초점이 맞지 않는 눈. 하지만 찾고 있었다. 세아를 찾고 있었다.

그리고 그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아주 천천히. 마치 세아의 어머니가 울 수 있는 능력조차 잃어버린 것처럼. 하지만 눈물은 흘렀다. 눈꼬리에서. 관자놀이를 따라. 베개까지.

“어머니가 뭘 자꾸 찾아?”

도현이가 물었다. 목소리가 떨렸다.

세아는 어머니의 손을 봤다. 여전히 움직이고 있었다. 도현이의 손을 밀어내려는 것처럼. 아니, 자신을 밀어내려는 것처럼. 아니, 누군가를 잡으려는 것처럼.

“어머니.”

세아가 어머니의 손을 잡았다. 도현이의 손 위에. 손가락들이 마주쳤다. 세아의 손가락, 도현이의 손가락, 그리고 그 아래에 어머니의 손가락. 세 개의 손. 한 가족의 손.

“강리우 형이 뭐래? 아버지가… 뭐라고 했어?”

도현이가 물었다.

세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어머니의 눈을 봤다. 그 눈은 이제 열려 있었다. 더 크게. 두 눈 모두. 초점이 맞고 있었다. 세아의 얼굴에. 정확히 세아의 눈에.

“엄마가… 누나를 찾고 있어. 자꾸.”

도현이가 말했다. 깨달음이 목소리에 담겨 있었다.

어머니의 입이 다시 움직였다. 이번에는 소리가 나왔다. 아주 작은 소리. 마치 누군가가 아주 먼 곳에서 부르는 것처럼.

“세… 아…”

그것이었다. 세아의 이름. 어머니가 부르는 세아의 이름. 30년을 침묵 속에서 살아온 어머니가. 마침내. 목소리로.

세아의 손이 더 강하게 떨렸다. 하지만 놓지 않았다. 어머니의 손을.

“여기 있어요. 엄마. 여기 있어.”

세아가 말했다. 자신의 목소리가 자신의 것이 아닌 것처럼 들렸다. 아주 낮게. 아주 부드럽게. 마치 어머니를 깨우는 것이 아니라 다시 자게 하는 것처럼.

어머니의 눈이 감겼다. 하지만 손은 여전히 움직였다. 세아의 손을 찾고 있었다. 도현이의 손을 찾고 있었다. 자신의 아이들을 찾고 있었다.

병실의 형광등이 여전히 밝았다. 차갑고 무감정하게. 그 아래에서 세 개의 손이 마주했다. 이 밤의 유일한 따뜻함으로.


강리우는 32층 사무실을 나가고 있었다. 파일을 들고. 손가락이 떨리면서.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면서. 그리고 기다리지 않고 계단으로 향했다.

34층에서 1층까지의 계단. 600개 이상의 발걸음. 강리우는 세지 않았다. 단지 내려갔다. 아버지의 목소리를 뒤에서 들었을 수도 있고 들리지 않았을 수도 있다. 이미 중요하지 않았다.

“세아를 풀어줘.”

강리우가 아버지에게 마지막으로 한 말이었다. 아버지는 답하지 않았다. 단지 웃음을 흘렸다. 아주 짧은 웃음. 동정의 웃음.

계단을 내려가면서, 강리우는 파일의 무게를 느꼈다. 손가락에. 팔에. 가슴에. 이것이 진짜 무게라면, 세아는 얼마나 무거웠을 것인가. 30년을. 아버지의 사업의 일부로. 아버지의 자산으로.

그리고 자신? 강리우는 자신의 위치를 찾으려 했다. 그 파일 안에서. 하지만 자신의 이름은 그곳에 없었다. 강리우라는 이름은. 아버지의 아들로서의 그의 정체성은. 그곳에 없었다.

오직 두 아이의 사진만 있었다. 두 아이의 이름. 두 아이의 주민등록번호. 두 아이의 통장 기록. 그리고 아버지의 입금 기록. 아버지의 출금 기록. 아버지의 거짓말들.

로비에 도착했을 때, 강리우는 휴대폰을 꺼냈다. 세아에게 전화할 생각을 했다. 하지만 무엇을 말할 것인가. “내 아버지가 너를 팔았다”라고? “내가 몰랐다”라고? “미안하다”라고?

모두 거짓이었다. 거짓이 아니면서도 거짓이었다.

대신 강리우는 병원으로 향했다. 3시 47분. 새벽 4시를 향해가고 있었다. 이 밤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병실 문을 다시 열었을 때, 강리우는 세아를 봤다. 어머니의 손을 잡고 있는 세아. 도현이의 손과 어머니의 손 위에. 세 개의 손이 겹쳐 있었다.

세아는 강리우를 봤다. 파일을 들고 있는 강리우를 봤다.

“뭐 나왔어?”

도현이가 물었다.

강리우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파일을 책상에 내려놨다. 천천히. 마치 폭발물을 다루는 것처럼. 그 위에 자신의 손을 얹었다. 손가락이 파일의 가장자리를 만지면서.

“아버지는?”

세아가 물었다.

“위에 있어. 34층에. 아마도.”

강리우가 대답했다. 그의 목소리에도 이제 떨림이 있었다. “이제 아래로 안 내려올 거 같아.”

도현이가 파일을 바라봤다. 어머니의 손을 여전히 잡고 있으면서.

“뭐가 들어있어?”

도현이가 물었다.

“우리 어머니. 그리고 누나. 그리고 아마도 더 많은 사람들.”

강리우가 대답했다.

세아는 움직이지 않았다. 여전히 어머니의 손을 잡고 있었다. 어머니는 이제 조금 더 깊은 수면 상태에 빠져 있었다. 하지만 손은 여전히 따뜻했다. 세아의 손을 잡은 채로.

“누나. 파일 봐.”

도현이가 말했다.

“안 봐도 돼.”

세아가 대답했다.

“왜?”

도현이가 물었다.

“이미 알고 있으니까.”

세아가 말했다.

그것은 거짓이었다. 하지만 거짓이 아니었다. 세아는 정확히 무엇이 그 파일 안에 있는지 알고 싶지 않았다. 알면 뭔가가 끝날 것 같았다. 뭔가가 시작될 것 같았다. 자신이 돌이킬 수 없는 뭔가.

강리우는 여전히 파일 위에 손을 얹고 있었다. 마치 그것을 누르고 있는 것처럼. 그것을 밀어내고 있는 것처럼. 아니면 그것이 도망치지 않도록 붙잡고 있는 것처럼.

“강리우.”

세아가 말했다.

“응.”

강리우가 대답했다.

“제주로 가. 엄마가 있는 곳으로.”

세아가 말했다.

“뭘 하러?”

강리우가 물었다.

“모르겠어. 하지만 가야 할 것 같아.”

세아가 대답했다.

강리우는 처음으로 세아의 눈을 직접 봤다. 그 눈에는 무언가가 있었다. 슬픔도 아니고, 분노도 아니고, 두려움도 아니고. 그보다는 다른 것. 받아들임. 또는 포기. 또는 그것들이 섞인 무언가.

“같이 가?”

강리우가 물었다.

세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어머니의 손을 더 강하게 잡았다.

도현이는 여전히 파일을 바라보고 있었다. 17살 남자아이가. 자신의 아버지가 누구인지를. 자신의 가족이 무엇인지를. 자신이 누구인지를. 그 파일 속에서 찾으려고.

병실의 형광등은 여전히 밝았다. 차갑고 무감정하게. 새벽 4시를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이 밤이 언제 끝날지 아무도 모르고 있었다. 그리고 이 밤이 끝난 다음, 무엇이 남을지도.


제주의 밤은 서울과 달랐다. 소음이 없었다. 불빛도 적었다. 대신 있었던 것은 바람의 소리. 파도의 소리. 그리고 침묵.

세아의 어머니가 깨어난 밤, 제주에서는 해녀들이 바다에 들어가고 있었다. 새벽의 바다. 차갑고 검고 깊은. 그들은 산소를 버티며 내려갔다. 생계를 위해. 자식을 위해. 자신의 목소리가 아닌 것으로.

세아는 제주에 있지 않았다. 하지만 제주의 밤을 상상하고 있었다. 병실에서. 어머니의 손을 잡으면서. 그곳에서 자신을 낳아준 여자가 마지막으로 숨을 참던 순간을. 마지막으로 물속에서 올라오던 순간을. 자신을 안던 순간을.

그리고 그 이후로는?

그 이후로는 어머니는 무엇을 했을까. 어떻게 살았을까. 어떻게 견딜 수 있었을까.

세아는 그것을 알고 싶었다. 하지만 물어볼 수는 없었다. 어머니는 아직도 깊은 수면 상태였다. 그리고 세아는 자신이 묻는 질문이 어머니를 다시 깊은 곳으로 보낼 것이라고 두려워했다.

강리우는 병실을 나갔다. 파일을 들고. 복도의 밝은 불빛 속으로. 그곳에서 누군가와 전화 통화를 하기 위해. 누군가에게 진실을 알려주기 위해. 아니면 거짓을 하나 더 만들기 위해.

도현이는 여전히 어머니의 손을 잡고 있었다. 한 시간이 또 지나갔다. 시간이 의미를 잃은 지 오래였다. 단지 손의 온기만 남았다. 그것이 사라질 때까지.

새벽 5시. 병실의 벽에 붙은 시계가 가리켰다.

이 밤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하지만 어쩌면, 끝날 필요가 없었다. 이 밤이 계속되는 한, 무언가는 여전히 가능했다. 변화는 가능했다. 고백은 가능했다. 용서는 가능했다.

하지만 새벽이 밝아오면?

그 이후로는 어떻게 될 것인가.

세아는 그것을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대신 어머니의 손의 온기에만 집중했다. 그것이 자신의 것인지 어머니의 것인지 구분하지 않고. 단지 따뜻함. 단지 연결. 단지 그것.

강리우는 복도에서 누군가와 말하고 있었다. 목소리가 크지 않았지만 분명했다. “아버지를 경찰에 신고하려고 합니다.”

그 말이 새벽의 공기를 가르고 지나갔다. 그리고 그 말은 돌아올 수 없었다. 한 번 말해진 말은. 한 번 흘러간 말은.

도현이는 여전히 파일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안에 자신의 과거가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것을 열지 않고. 그것을 보지 않고. 단지 어머니의 손을 잡고 있었다.

새벽이 천천히 밝아오고 있었다.

이 밤은 끝나가고 있었다.

그리고 새로운 무언가가 시작되려고 했다.

세아는 그것을 느꼈다. 어머니의 손 안에서. 도현이의 손 안에서. 강리우의 목소리 안에서. 복도의 형광등 아래에서.

변화. 또는 파괴. 또는 그것들이 섞인 무언가.

어쨌든.

뭔가는 끝났다.

그리고 뭔가는 시작되고 있었다.

# 제주의 밤, 그리고 병실의 새벽

## 1부: 침묵의 시간

제주의 밤은 서울과 달랐다.

세아가 병실의 창문을 통해 상상해본 제주의 밤은, 그곳에 실제로 있지 않으면서도 자신의 마음 속에 생생하게 살아 있었다. 소음이 없었다. 불빛도 적었다. 서울의 밤처럼 끝없이 켜져 있는 간판들도, 자동차의 경적음도, 사람들의 목소리도 없었다. 대신 있었던 것은 바람의 소리. 파도의 소리. 그리고 침묵. 깊고 오래되고, 마치 수천 년을 살아온 것처럼 묵직한 침묵이었다.

세아의 어머니가 깨어난 밤—아니, 정확히는 어머니가 깨어날 가능성이라는 희미한 불빛 아래 누워 있는 밤, 제주에서는 해녀들이 바다에 들어가고 있었다. 새벽 4시 30분. 아직 하늘이 검은 시간.

세아는 병실 침대 옆 의자에 앉으면서 그 광경을 떠올렸다. 검정색 잠수복을 입은 여인들, 그들의 나이는 대부분 50대 이상이었을 것이다. 주름진 얼굴, 햇빛에 검게 그을린 피부, 하지만 그 눈은 밝았다. 생존의 눈. 의지의 눈.

차갑고 검고 깊은 바다. 그들은 산소를 버티며 내려갔다. 내려갔다. 또 내려갔다. 생계를 위해. 자식을 위해. 자신의 목소리가 아닌 것으로—그것이 가장 끔찍한 부분이었다. 자신의 목소리로 울부짖을 수 없이, 오직 몸으로만 저항하며, 물속의 침묵 속으로 들어가는 것.

그것이 세아의 어머니가 살아온 방식이었다.

“엄마.”

세아가 작게 중얼거렸다. 아무도 들을 수 없는 목소리로. 병실의 천장을 향해. 기계음의 리듬 위에 얹힌 자신의 목소리가 얼마나 미약한지 알면서도.

“나한테 얘기해 줄 수 있어? 그때가 어땠는지. 마지막으로 물에 들어갔을 때. 마지막으로 나를 안고 올라왔을 때.”

침묵.

침묵만이 응답했다.

병실 안의 침묵은 제주의 밤과 달랐다. 제주의 침묵이 자연스럽고 완성된 것이라면, 여기의 침묵은 부자연스럽고 불완전했다. 기계음이 계속 울렸기 때문이었다. 산소 호흡기의 일정한 음, 심장 모니터의 비프음. 이 소리들이 침묵을 깨뜨리고 또 깨뜨렸다. 마치 누군가가 계속 손가락으로 입술을 튕기며 ‘음음음음’ 하는 소리처럼.

세아는 어머니의 손을 들었다. 피부는 종이처럼 얇았다. 혈관이 파란색으로 떠올라 있었다. 이 손으로 몇 개의 전복을 캤을까. 몇 개의 우렁을 건졌을까. 몇 번이나 물속에서 무언가를 움켜쥐었을까.

세아의 손도 닮았다. 어머니의 손처럼 길쭉했고, 손가락의 마디가 두드러져 있었다. 유전은 이렇게 이어지는 거구나. 불행도 손의 형태로.

“강리우 씨?”

간호사가 들어왔다. 중년의 여인이었다. 이름표에는 ‘박혜진’이라고 적혀 있었다. 그녀는 이미 세아를 여러 번 본 사람이었다.

“엄마 상태는 어떻게 되는 거예요?”

세아가 물었다. 이미 몇 번이나 물었을 같은 질문을.

박혜진 간호사는 세아의 얼굴을 자세히 살펴본 후, 의자에 앉아 있던 도현이를 바라봤다. 도현이는 여전히 창문을 통해 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침이 오기 시작한 하늘을, 자줏빛으로 물들어가는 하늘을.

“의사 선생님이 오실 때 얘기해드릴 거예요. 지금은… 아직 변화가 없는 상태고.”

‘변화가 없다’

그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나아진 것도 없고, 나빠진 것도 없다는 뜻인가. 아니면 실은 계속 나빠지고 있는데, 더 이상 나빠질 곳이 없다는 뜻인가.

세아는 묻지 않았다. 질문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 알았으니까.

박혜진 간호사가 나간 후, 도현이가 비로소 입을 열었다.

“너 뭐 해?”

도현이의 목소리는 낮고 거칠었다. 마치 자갈 위를 끌려가는 것처럼.

“엄마 손 잡고 있어.”

“그 말 아니고. 너는 지금 뭘 하고 있는 거야. 여기 와서. 계속 앉아만 있고.”

세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도현이도 알고 있을 것이다. 자신이 여기 있는 이유를 .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손을 잡는 것뿐이라는 걸.

“강리우는 계속 뭐 하는 거야?”

이번엔 도현이가 스스로 물었다.

“복도에 나갔어. 전화를 받으러.”

“누구랑?”

“모르겠어.”

도현이가 다시 침묵으로 돌아갔다. 침묵의 깊이가 점점 더해져 가는 것처럼 느껴졌다. 마치 그들이 함께 물속으로 가라앉고 있는 것 같았다. 천천히, 하지만 멈추지 않고.

## 2부: 복도의 진실

강리우는 병실을 나갔다. 파일을 들고.

그의 손에 들려 있는 그 파일이 무엇인지 세아는 정확히 몰랐다. 하지만 그것이 무거운 것이라는 건 알았다. 단순한 무게가 아니라, 그 안에 담긴 것의 무거움 때문에.

복도는 형광등으로 가득했다. 한밤중에도 꺼지지 않는 형광등. 서울의 병원 복도는 밤낮이 없었다. 항상 같은 밝기, 항상 같은 온도, 항상 같은 냄새. 소독약과 육체의 쇠락이 뒤섞인 냄새.

강리우는 계단 쪽으로 걸어갔다. 누군가에게 들리면 안 될 전화를 하기 위해.

그의 얼굴은 창백했다. 아니, 창백을 넘어 회색이었다. 마치 모든 피가 얼굴에서 빠져나간 것처럼. 그렇게 빠져나간 피가 어디로 가는지 강리우는 알고 있었다. 가슴으로. 그곳에서 빠르게 펌프질하며 두근거리고 있었다.

휴대폰을 꺼냈다. 손이 떨렸다. 최근 통화 기록을 열었다.

‘아버지’

그 이름 위에서 한참 동안 머물렀다. 얼마나 오래? 10초? 30초? 시간이 압축되어 있었다.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아버지의 목소리가 나왔다. 새벽 5시인데도 깨어 있었다는 뜻이었다.

“아버지, 나 강리우예요.”

“그건 알지. 번호가 뜬 것 봤으니까.”

목소리에는 아무 감정이 없었다. 단지 피로가 있을 뿐. 깊고 오래된 피로.

강리우는 파일을 들었다. 다시 한번. 마치 무게를 확인하듯.

“아버지, 저는 지금 어머니가 있는 병원에 있어요. ICU에.”

침묵.

“어머니가 깨어나지 않으실 것 같아요. 아버지가 한 짓 때문에.”

또 다른 침묵. 이번엔 더 깊었다.

“강리우.”

아버지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위협적인 낮음.

“좋은 말로 경고하는 거다. 그만해. 지금 당장.”

“아버지를 경찰에 신고하려고 합니다.”

그 말이 새벽의 공기를 가르고 지나갔다. 강리우 자신도 깜짝 놀랐다. 자신의 입에서 나온 말이 이렇게도 명확할 수 있다는 게. 이렇게도 차갑고 분명할 수 있다는 게.

전화 너머에서 아버지의 숨소리가 들렸다. 가쁜 숨. 분노의 숨.

“넌 뭘 증명할 수 있는데? 넌 뭘 알아? 너는 아무것도 모르면서—”

강리우가 전화를 끊었다.

손이 더 심하게 떨렸다. 하지만 동시에 무언가 가벼워졌다. 마치 자신의 가슴에서 수십 년 동안 누른 무언가가 빠져나가는 것 같은 느낌. 그 빠져나가는 것이 무엇인지는 몰랐지만, 아무튼 빠져나갔다.

그는 계단 난간에 기대섰다. 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이제 돌아갈 수 없다. 한 번 말해진 말은. 한 번 흘러간 말은.

## 3부: 손의 온기

병실로 돌아왔을 때, 도현이는 여전히 어머니의 손을 잡고 있었다.

한 시간이 또 지나갔다. 강리우가 나간 지 한 시간. 그동안 아무것도 바뀐 게 없었다. 어머니의 호흡은 같은 박자로 계속되었고, 모니터의 파동은 같은 높이로 계속되었다. 시간이 의미를 잃은 지 오래였다.

도현이는 어머니의 손을 자세히 들여다봤다. 손등의 주름들. 손가락 사이의 주름들. 손목의 푸른 혈관들. 이 손이 자신을 안아준 손이다. 이 손이 자신을 때린 손이기도 하다.

둘 다. 동시에.

세아가 병실에 들어오자 도현이가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눈이 초점을 맞추지 못했다. 마치 세아를 보면서도 그 뒤의 벽을 보는 것처럼.

“엄마 깨어났어?”

세아가 물었다. 희망이 목소리에 묻어났다.

“아니.”

도현이가 대답했다.

“그럼… 강리우는?”

“모르겠어. 복도에서 뭐 하는 것 같아.”

세아가 창문 쪽으로 갔다. 새벽 5시 20분. 하늘이 자줏빛에서 연한 주황색으로 변하고 있었다. 하루가 시작되고 있었다. 새로운 하루. 어제의 모든 일들을 받아안은 새로운 하루.

“내가 묻고 싶은 게 있어.”

도현이가 갑자기 말했다.

“뭔데?”

“엄마가 왜 이렇게 됐는지. 정말로.”

세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도현이가 알고 있을 것이다. 어머니가 왜 이렇게 되었는지를.

“아버지 때문이지?”

여전히 대답이 없었다.

“세아, 넌 뭘 알아?”

도현이의 목소리가 올라갔다. 처음으로 감정이 섞였다. 분노인지 슬픔인지 구분할 수 없는 감정.

“뭘 알고 있는데 계속 말을 안 해? 엄마가 이러는 게 누구 때문인데?”

“나도… 정확히 모르겠어.”

세아가 솔직했다.

“근데 그게 중요해? 지금은?”

“뭐가 중요한데?”

“엄마가 깨어나는 게. 그게 중요한 거야.”

도현이는 어머니의 손을 더 세게 쥐었다. 마치 손을 쥐는 힘으로 어머니를 깨울 수 있다고 믿는 것처럼.

하지만 어머니는 깨어나지 않았다.

강리우가 다시 들어왔다. 파일을 들고 있지 않았다. 어딘가에 내려놓은 것 같았다. 그의 눈은 빨갛게 부어 있었다.

세아와 도현이가 그를 바라봤다. 아무도 묻지 않았다. 뭘 한 건지. 누구랑 전화했는지. 무엇을 결정했는지.

어쩌면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누군가가 깨진 것을. 무언가가 끝난 것을.

강리우가 어머니의 발치에 있는 의자에 앉았다.

“엄마… 죄송합니다.”

그의 목소리는 작았다.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

“제가 너무 늦었습니다.”

## 4부: 새벽의 변화

새벽 5시 40분.

병실의 벽에 붙은 시계가 가리켰다. 그 시계는 멈출 줄을 모르는 기계였다. 초침이 계속 움직였다. 똑, 똑, 똑. 마치 누군가의 심장처럼.

세아는 시계를 바라봤다.

이 밤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하지만 어쩌면, 끝날 필요가 없었다. 이 밤이 계속되는 한, 무언가는 여전히 가능했다. 변화는 가능했다. 어머니가 눈을 뜰 수도 있었다. 고백은 가능했다. 아버지가 자신의 죄를 인정할 수도 있었다. 용서는 가능했다. 이 가족이 다시 한번 손을 맞잡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새벽이 밝아오면?

그 이후로는 어떻게 될 것인가.

법원이 개입할 것이다. 경찰이 개입할 것이다. 판사가 판결을 내릴 것이다. 모든 것이 명확해질 것이다. 흐릿했던 것들이 선명해질 것이다. 그리고 그 선명함이 항상 좋은 것은 아니었다.

세아는 그것을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대신 어머니의 손의 온기에만 집중했다.

손. 온기. 연결.

그것들이 전부였다.

도현이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나. 그도 어머니의 손을 놓지 않고 있었다. 처음에는 의무감으로 시작했을 것이다. 아들로서의 의무.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지금은 어떤 감정도 아니었다. 그저 손의 온기. 그것뿐이었다.

강리우는 어머니의 발을 만졌다. 침대 위에서 이불로 덮인 어머니의 발. 그것도 온기가 있었다. 생명이 있었다. 이 손에, 이 발에, 아직도 생명이 있었다.

“엄마, 나 이제 할 거 다 했어요.”

강리우가 중얼거렸다.

“경찰에 신고했어요. 아버지를… 신고했어요.”

세아와 도현이가 그를 바라봤다. 강리우의 얼굴은 흐릿했다. 마치 물 위에 그려진 초상화처럼.

“이제… 뭘 어떻게 되는 거죠?”

세아가 물었다.

강리우는 어깨를 으쓱했다.

“모르겠어요. 그냥… 다음 일만 남은 것 같아요.”

다음 일. 그 다음 일들은 이들의 손에 있지 않았다. 이제는 제도의 손에 있었다. 법의 손에. 시간의 손에.

병실은 조용했다. 기계음만 계속 울렸다. 심장 모니터가 여전히 같은 박자로. 산소 호흡기가 여전히 같은 리듬으로.

어머니는 여전히 깨어나지 않았다.

## 5부: 밝아오는 것들

새벽 6시.

하늘이 완전히 변했다. 검은색에서 파란색으로. 파란색에서 주황색으로. 그리고 이제 연한 노란색으로. 해가 뜨려고 했다.

제주의 해녀들은 이 시간쯤이면 이미 바다에서 올라와 있을 것이다. 물에서 나온 몸을 말리고 있을 것이다. 아침을 먹고 있을 것이다. 또는 집으로 가면서 남편들과 싸우고 있을 것이다. 자식들이 학교 가기 전에 밥을 먹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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