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204화: 서류 속의 이름들
강리우의 손가락이 파일 폴더의 모서리를 눌렀다. 종이는 차갑고 무거웠다. 무게가 있는 것은 종이 자체 때문이 아니었다. 그 안에 담긴 것들 때문이었다. 강리우는 그것을 알고 있었다. 아버지가 이 사무실에 그를 부른 이유도 알고 있었다. 이것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 온 것이 아니었다.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단지 확인하기 위해 왔을 뿐이었다. 자신의 상상이 현실보다 작은지, 아니면 현실이 상상보다 끔찍한지를 확인하기 위해.
폴더를 열었을 때, 강리우의 호흡이 얕아졌다. 그는 그것을 느꼈지만 멈추지 않았다. 계속했다. 첫 번째 서류. 한국 이름 나세아. 주민등록번호. 생년월일. 제주도 주소. 그리고 사진. 흑백 사진이었다. 어린 시절의 사진. 얼굴이 작고, 눈이 크고, 표정이 없었다. 마치 누군가가 그 표정을 만들라고 강요한 것처럼. 증명사진처럼. 또는 기록처럼.
그 아래에는 또 다른 서류가 있었다. 같은 형식. 같은 흑백 사진. 그런데 이름이 달랐다. 나리우. 제주도 주소. 다른 주민등록번호. 더 어린 시절의 사진. 이 아이의 눈은 더 컸다. 또는 더 두려워 보였다.
강리우는 멈춰 있었다. 폴더를 들지도, 놓지도 않았다. 단지 서 있었다. 34층의 사무실에서. 검은색 책상 앞에서. 자신의 아버지가 30년간 숨겨둔 것들을 마주하고 있었다.
두 아이의 사진. 같은 어머니의 얼굴 특징을 가진. 같은 제주도 주소를 공유한. 그런데 강리우의 이름은 어디에도 없었다. 강민준의 아들로서의 그의 이름은. 강리우라는 이름은. 이 파일에는 없었다.
대신 다른 것들이 있었다. 통장 사본. 입금 기록. 그리고 그 옆에는 출금 기록. 금액이 점점 줄어드는. 매달. 매년. 10년. 20년. 30년. 시간이 지날수록 금액이 작아졌다. 그리고 어느 시점에서는 0이 되었다. 아무것도 남지 않은.
강리우는 손을 떨리는 것을 느꼈다. 아버지처럼. 세아처럼. 아버지의 모든 아이처럼. 이 도시에서. 이 밤에. 모두가 떨리고 있었다.
“내가 뭐 하는 건지 알아?”
아버지의 목소리가 뒤에서 들렸다. 강리우는 돌아보지 않았다. 이미 안고 있었다. 아버지가 여기 있을 것이라는 것을. 이것을 강리우가 발견하는 것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는 것을.
“돈을 버는 거지.”
아버지가 자신의 질문에 스스로 대답했다.
“다양한 방식으로. 부동산. 주식. 그리고… 사람.”
강민준은 책상에 앉았다. 강리우는 여전히 서 있었다. 그 파일을 들고.
“나세아라는 아이. 좋은 목소리를 가졌어. 정말로. 내가 많은 아이들을 봤지만, 저 정도의 목소리는 드물어. 그 목소리로 돈을 벌 수 있었다. 많은 돈을.”
아버지가 말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감정이 없었다. 마치 자신이 말하는 것이 날씨에 대한 것이었던 것처럼. 또는 주식 시세에 대한 것처럼.
“그런데 문제가 생겼어. 그 아이가 커갈수록, 그 목소리가 약해졌어. 돈을 버는 능력이 떨어졌다는 뜻이야. 그래서 다른 방식이 필요했어. 그 아이를 사용하는 다른 방식이.”
강민준의 손가락이 책상을 두드렸다. 다다다다. 비정상적인 리듬. 강리우는 그 소리를 들으면서, 자신의 손가락이 왜 떨리는지를 이해했다. 이것이 유전인가. 아니면 학습인가. 아니면 그냥 공포인가.
“나리우라는 아이도 있었어. 더 어린. 그 아이는 더 쉬웠어. 아직 뭘 하는지도 몰랐으니까. 마음이 유하니까. 그래서… 음, 어쨌든.”
강민준이 말을 멈췄다. 강리우는 그 침묵에서 더 많은 것을 들을 수 있었다. 아버지가 끝내지 않은 문장들. 아버지가 말하지 않은 것들. 가장 중요한 것들.
“너는 왜 이런 말을 해?”
강리우가 물었다. 그의 목소리는 자신의 것이 아닌 것처럼 들렸다. 낮고 차갑고 어두운.
“네가 알아야 하니까.”
“왜?”
“왜냐하면 이제 내가 너를 밀어낼 차례니까.”
강민준이 대답했다.
강리우는 아버지를 봤다. 처음으로 돌아서서. 아버지의 얼굴을 정면으로. 그곳에는 자신이 예상했던 어떤 감정도 없었다. 죄책감도 없었다. 후회도 없었다. 단지 무감정. 또는 그것을 능숙하게 감추는 능력. 아버지가 30년간 연습한 능력.
“세아를 풀어줘.”
강리우가 말했다.
“풀어준다? 누가 잡아뒀나?”
“아버지가.”
“내가 뭔가를 한 건가? 내가 그 아이에게 서명을 하라고 한 건가? 내가 그 아이의 손을 잡아서 계약서에 쓰게 한 건가? 그 아이가 선택한 거야. 돈이 필요했으니까.”
강민준이 말했다. 그리고 강리우는 그것이 거짓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그것이 부분적인 진실이라는 것을. 세아가 선택했다. 돈이 필요했다. 도현이가 학교를 다니기 위해. 어머니가 병원에 가기 위해. 그래서 세아는 자신의 목소리를 팔았다. 자신의 이름을. 자신의 미래를.
“근데 이제 더 이상 필요 없어. 그 아이의 능력이. 내가 본 계획이 있었는데, 그게 완성됐거든. 아무도 더 이상 그 아이를 기억하지 않을 거야. 음악 산업에서. 그 아이는 그냥 누군가의 목소리였어. 그리고 누군가의 목소리는 그냥 목소리일 뿐이야. 이름 따윈 필요 없어.”
강민준이 스스로 웃었다. 그것은 웃음이 아니라 공기를 내보내는 것이었다. 그의 폐에서. 그의 목에서. 사람이 하는 웃음이 아니라 기계가 하는 것처럼.
강리우는 그 파일을 들고 있었다. 여전히. 두 아이의 사진이 담긴. 그 파일은 매우 얇았다. 몇 장의 종이. 몇 장의 사진. 그런데 그것이 모든 것을 담고 있었다. 세아의 어린 시절. 도현이의 어린 시절. 그들의 아버지가 그들을 버린 방식. 그들의 어머니가 그들을 지키려고 했던 방식. 그리고 자신의 아버지가 그들을 사용했던 방식.
“이 서류들은?”
강리우가 물었다.
“보험이지. 혹시 그 아이들이 뭘 말할 생각을 하면, 이것들로 입을 막을 수 있어. 공개하면 자기 가족이 더 망가진다는 걸 알려주면. 가족의 비밀이 세상에 나간다는 걸 알려주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침묵을 택해. 가족을 보호하기 위해.”
아버지가 말했다.
“그리고 만약 그 아이들이 정말로 미쳐서 말한다고 해도, 내가 이 서류들을 파기할 수 있어. 증거를 없앨 수 있어. 그러면 그건 그냥 누군가의 말일 뿐이야. 누군가의 거짓말일 뿐이야. 내 말에는 변호사들이 있고, 돈이 있고, 시간이 있어. 그 아이들에게는 뭐가 있나?”
강리우는 그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파일을 들었다. 꽉 들었다. 그리고 걸어갔다. 아버지를 지나쳐서. 문으로.
“어디 가?”
아버지가 물었다.
“필요 없어.”
강리우가 대답했다.
“뭐가?”
“이 모든 게.”
강리우는 문을 열었다. 복도로 나왔다. 그리고 엘리베이터를 향해 걸었다. 그의 걸음은 빠르지 않았다. 하지만 멈추지도 않았다. 뒤를 돌아보지도 않았다. 아버지가 뭘 하는지도 보지 않았다. 다만 알았다. 아버지가 다시 앉았을 것이라는 것을. 그리고 또 다른 누군가를 부를 것이라는 것을. 또 다른 계획을 세울 것이라는 것을.
엘리베이터는 내려갔다. 34층에서 1층으로. 강리우는 그 안에서 파일을 들고 있었다. 두 아이의 사진. 그리고 자신의 선택이 뭔지를 생각했다.
병실에서 세아의 휴대폰이 울렸다. 강리우였다. 세아는 그것을 봤지만 받지 않았다. 도현이가 세아를 봤다. 다시. 그 같은 시선으로. 왜 또.
“받아.”
도현이가 말했다. 명령이 아니라 간청처럼 들렸다.
“안 돼.”
세아가 대답했다.
“왜?”
“모르겠어.”
휴대폰의 울림이 멈췄다. 그리고 바로 다시 울렸다. 강리우였다. 또. 다시. 세 번째.
세아는 그 울림을 들으면서, 자신이 뭔가를 놓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중요한 뭔가. 아주 중요한. 하지만 그것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다. 마치 자신이 물 아래에 있는 것처럼. 그리고 누군가가 물 위에서 부르고 있는데, 그 목소리가 왜곡되고 흐릿했다. 들을 수 있지만 이해할 수 없었다.
도현이가 휴대폰을 집었다. 세아의 것을. 그리고 받았다.
“누나 바꿔.”
도현이가 말했다.
세아는 도현이를 봤다. 그 아이의 얼굴은 단호했다. 17살. 너무 어린. 그런데 이미 어른이었다. 자신 때문에. 어머니 때문에. 모든 것 때문에.
세아가 휴대폰을 받았을 때, 강리우의 호흡이 들렸다. 빠르고 얕은.
“세아. 들어. 나는 나야. 강리우야. 너한테 말해야 할 게 있어. 정말로. 너를 해치려는 게 아니야. 반대야. 너를 도와야 해. 이제.”
강리우가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뭐 하는 거야?”
세아가 물었다.
“가고 있어. 너한테. 지금. 병원 주소 줄 수 있어?”
강리우가 물었다. 그리고 세아는 그것이 선택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질문처럼 들렸지만, 그것은 명령이었다. 강민준의 아들이 하는 명령은. 거절할 수 없는 방식으로.
화면이 검게 변했다. 병실의 불이 꺼진 게 아니었다. 세아의 눈이 감긴 것이었다. 그 순간, 어머니의 손가락이 다시 떨렸다. 아주 작은 움직임. 밀리미터 단위의. 하지만 이번엔 다른 의미였다. 이건 깨어나려는 손가락이 아니었다. 이건 경고하는 손가락이었다. 뭔가가 온다는 걸. 뭔가가 바뀐다는 걸. 더 이상 침묵으로 남을 수 없는 뭔가가.
세아의 손이 어머니의 손을 더 세게 잡았다. 그리고 도현이는 그것을 봤다. 누나의 손이 어머니의 손을 놓지 않았다. 마치 물 위에서 딸이 올라오는 어머니의 손을 잡는 것처럼. 마치 자신을 잃지 않기 위해.
강리우는 택시 안에 있었다. 파일은 자신의 가슴에 안겨 있었다. 그리고 그는 병원으로 가고 있었다. 세아에게. 세아의 어머니에게.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들고 가면서.
서울의 불빛이 택시 창을 지나갔다. 강남. 서초. 용산. 그리고 마지막에 한강. 강리우는 그 풍경을 봤지만 보지 않았다. 그저 가고 있을 뿐이었다. 멈출 수 없게. 더 이상 돌아갈 수 없게. 자신이 누군지를 알아버렸으니까. 아버지의 아들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것을 거부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병실의 시계는 2시 47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새벽. 가장 어두운 시간. 가장 외로운 시간. 그런데 이 시간에 무언가가 움직이고 있었다. 어머니의 손가락. 세아의 손. 도현이의 불안. 그리고 강리우의 걸음. 모두가.
세아는 휴대폰을 내려놨다. 그리고 어머니를 봤다. 여전히 눈을 감고 있었다. 하지만 손가락은 떨리고 있었다. 마치 말하고 있는 것처럼. 무언가를 경고하고 있는 것처럼.
“누나.”
도현이가 또 말했다.
“뭐.”
“강리우 형이 온다.”
“알아.”
“그리고 엄마가…”
도현이가 말을 멈췄다.
“뭐?”
“깨어나려고 해.”
도현이가 어머니의 손가락을 봤다. 그것은 더 강해졌다. 떨림이 아니라 움직임. 마치 뭔가를 잡으려고 하는 것처럼. 또는 뭔가를 밀어내려고 하는 것처럼.
세아의 손이 어머니의 손을 놓지 않았다. 그리고 그것이 이 밤의 모든 것이었다. 손. 떨림. 그리고 깨어남을 향한 움직임. 더 이상 침묵이 아닌 뭔가.
강리우의 택시가 병원 입구에 도착했을 때, 하늘이가 병원 밖에 서 있었다. 혼자. 아침이 되려면 아직 멀었는데.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첫 번째 담배가 아니라 여러 번째인 것처럼. 그 주변에는 담배꽁초가 떨어져 있었다.
하늘이는 강리우를 봤다. 그리고 강리우도 하늘이를 봤다. 어떤 인사도 없었다. 단지 서로를 확인하는 것뿐이었다. 세아를 지키려고 하는 또 다른 누군가가 있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뿐이었다.
강리우는 파일을 들고 병원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하늘이는 그것을 봤다. 그 파일의 두께. 그 안에 담긴 것들이 뭘까 하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묻지 않았다. 대신 따라갔다. 뒤에서. 항상 그렇게 했던 것처럼.
병실 문이 열렸을 때, 세아는 여전히 어머니의 손을 쥐고 있었다. 그리고 도현이는 여전히 서 있었다. 그 둘 사이에. 그리고 강리우는 문 앞에서 멈췄다. 그것이 자신이 들어가도 되는 공간인지를 확인하려고. 또는 자신이 들어가면 뭔가가 깨져버릴 것 같아서.
“안 돼.”
세아가 말했다. 강리우를 보지 않으면서.
“뭐가?”
강리우가 물었다.
“이 모든 게.”
세아가 대답했다. 그리고 강리우는 그것이 자신에 대한 거라는 것을 알았다. 또는 자신의 아버지에 대한 거라는 것을. 또는 이 모든 것이 끝나야 한다는 뜻이었다.
강리우는 파일을 들고 있었다. 여전히. 그리고 그것을 내려놨다. 바닥에. 병실 입구에. 아무도 줍지 않을 때까지.
새벽 3시. 병실의 형광등이 깜박였다. 전기 문제가 아니었다. 그냥 깜박인 것이었다. 한 번. 두 번. 그리고 다시 밝아졌다. 그 순간, 어머니의 눈이 떨렸다. 아주 작게. 마치 누군가가 매우 먼 곳에서 그 눈꺼풀을 집어당기는 것처럼.
도현이가 비명을 지르려고 했다. 하지만 참았다. 세아처럼. 침묵 속에서. 기다리면서. 깨어남을 향한 그 마지막 움직임이 정말로 깨어남인지를 확인하면서.
그리고 어머니의 눈이 열렸다. 아주 천천히. 마치 물 아래에서 올라오는 것처럼. 제주의 해에서. 깊은 곳에서. 30년을 물 속에서 보낸 후에. 마침내.
# 깨어남의 시간
## 1부: 밤의 침묵
병실 안의 공기는 정체되어 있었다. 의료기구들의 규칙적인 비프음이 마치 살아있는 생물의 심장박동처럼 들렸고, 산소공급기에서 나오는 미세한 윙윙거림이 배경음으로 깔려 있었다. 도현이는 어머니의 손을 바라보고 있었다. 창백한 손등에 보이는 정맥들, 의료용 밴드로 고정된 수액줄, 그리고 그 아래로 느껴지는 미세한 온기.
“엄마가 움직였어.”
도현이의 목소리는 작았다. 마치 자신의 발견이 너무 소중해서 큰 목소리로는 말할 수 없을 것 같은 그런 목소리였다. 세아는 어머니의 침대 옆에 앉아 있었다. 그녀의 눈은 이미 몇 시간째 어머니의 얼굴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정말?”
세아가 물었다. 그녀의 입술은 건조해 보였다. 밤새 입술을 깨물어온 흔적이 있었다.
“알아.”
도현이가 대답했다. 그의 손가락은 어머니의 손 위에서 움직였다. 손목 근처, 맥박이 뛰는 그곳. 그곳에서 느껴지는 규칙적인 박동이 가장 명확했다. 30년간 깨어나지 않은 어머니의 생명이 그 미세한 떨림으로 표현되고 있었다.
“그리고 엄마가…”
도현이가 말을 멈췄다. 그의 목소리가 떨렸다. 감정을 억누르려고 하는 것처럼.
“뭐?”
세아가 물었다. 침대에서 일어나려고 했다. 하지만 어머니의 손을 잡은 손이 움직일 수 없었다.
“깨어나려고 해.”
도현이가 말했다. 그것은 확신이었다. 의료진이나 의사들이 수개월간 말해온 가능성이 아니라, 오직 이 병실 안에서만 느껴질 수 있는 어떤 변화에 대한 확신이었다.
세아의 시선이 어머니의 손으로 쏠렸다. 도현이가 맞다. 그 손가락이… 정말로 움직이고 있다. 떨림이 아니다. 도현이가 언제나 떨려하던 어머니의 손가락이 아니라, 뭔가를 의도적으로 잡으려고 하는 움직임. 마치 물에 빠진 사람이 물 위로 올라오려고 발버둥치듯이.
“손… 봐.”
세아가 숨을 쉬며 말했다.
도현이의 눈이 반짝였다. 그는 어머니의 손가락 하나하나를 자세히 봤다. 그것은 더 강해졌다. 떨림이 아니라 움직임. 마치 뭔가를 잡으려고 하는 것처럼. 또는 뭔가를 밀어내려고 하는 것처럼. 30년 동안 잠들어 있던 신경이 깨어나면서 근육에 지시를 내리는 순간이 아닐까. 도현이는 그렇게 생각했다.
세아의 손이 어머니의 손을 놓지 않았다. 오히려 더 단단히 잡았다. 마치 그 손을 잡고 있는 것이 어머니를 이 세상에 묶어두는 마지막 줄인 것처럼. 병실 내의 모든 소리들—의료기구들의 비프음, 복도에서 들리는 간호사들의 발소리, 창문 밖 도시의 먼 소음—이 모두 사라진 것처럼 느껴졌다. 이 순간에는 오직 두 자매와 어머니, 그리고 깨어남을 향한 그 미세한 움직임만이 존재했다.
“엄마… 엄마가 정말…”
도현이가 말을 완성하지 못했다. 그의 목소리가 울먹였다. 아직 의료진에게 말해야 할 일도 있고, 의사도 불러야 하고, 검사도 해야 할 텐데. 하지만 지금 이 순간, 그 모든 것이 중요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것이 이 밤의 모든 것이었다. 손. 떨림. 그리고 깨어남을 향한 움직임. 더 이상 침묵이 아닌 뭔가. 30년 동안 두 자매가 기다려온 신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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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부: 아침이 되기 전에
새벽 2시 47분.
강리우의 택시가 병원 입구에 도착했을 때, 하늘이가 병원 밖에 서 있었다. 혼자. 아침이 되려면 아직 2시간은 남아 있었다. 그의 입에는 담배가 물려 있었다.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첫 번째 담배가 아니라 여러 번째인 것처럼. 그 주변에는 담배꽁초가 떨어져 있었다. 4개. 아니, 5개. 강리우는 세어봤다. 하늘이가 얼마나 오래 이 자리에 서 있었는지를 짐작하기 위해.
새벽의 공기는 차가웠다. 강리우가 택시에서 내리며 깊게 숨을 쉬었을 때, 그 차가운 공기가 폐 깊숙이 들어왔다. 병원 앞의 야간 조명이 주변을 희미하게 비추고 있었다. 곳곳의 어두운 그림자와 휘황찬란한 불빛의 대비. 그 불빛 속에서 하늘이의 얼굴이 보였다. 피곤해 보였다. 그리고 걱정이 가득해 보였다.
하늘이는 강리우를 봤다. 그리고 강리우도 하늘이를 봤다. 어떤 인사도 없었다. 악수도, 포옹도, 말도 없었다. 단지 서로를 확인하는 것뿐이었다. 시선이 만났을 때, 그곳에는 이미 모든 것이 담겨 있었다. 세아를 지키려고 하는 또 다른 누군가가 있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뿐이었다.
강리우는 파일을 들고 있었다. 검은색 A4 파일. 그의 손에 꼭 쥐어져 있었다. 마치 그것이 뭔가 중요한 증거인 것처럼. 아니면 뭔가 위험한 것인 것처럼.
강리우는 파일을 들고 병원 안으로 들어갔다. 하늘이는 그것을 봤다. 그 파일의 두께. 그 안에 담긴 것들이 뭘까 하는 생각을 했다. 서류인가. 사진인가. 아니면 더 어두운 뭔가인가. 하지만 묻지 않았다. 대신 따라갔다. 뒤에서. 항상 그렇게 했던 것처럼.
병원 복도를 걸으며 강리우는 자신의 발걸음 소리를 들었다. 딱딱거리는 구두 소리. 뒤에서 하늘이의 발소리도 들렸다. 이 병원을 걸어다니는 것이 이미 몇 번째일까. 강리우는 생각했다. 세아를 찾아다니던 그 많은 밤들. 그리고 지금.
엘리베이터 안에서 두 남자는 말 없이 서 있었다. 엘리베이터의 미러 같은 벽에는 그들의 모습이 비쳤다. 강리우의 얼굴은 피로로 물들어 있었고, 하늘이의 눈은 무언가를 기다리는 듯한 초조함이 담겨 있었다. 엘리베이터가 올라가며 발생하는 기계음이 둘을 둘러쌌다.
병실 문 앞에 도착했을 때, 강리우는 잠시 멈췄다. 그의 손이 파일을 더 단단히 움켜쥤다.
병실 문이 열렸을 때, 세아는 여전히 어머니의 손을 쥐고 있었다. 그리고 도현이는 여전히 서 있었다. 그 둘 사이에. 어머니의 침대 주변에. 그리고 강리우는 문 앞에서 멈췄다. 그것이 자신이 들어가도 되는 공간인지를 확인하려고. 또는 자신이 들어가면 뭔가가 깨져버릴 것 같아서.
이 순간, 이 공간은 신성했다. 강리우는 그것을 느꼈다. 30년 동안 기다려온 재결합의 순간이 이곳에 있다는 것을. 그리고 자신은 그곳에 속하지 않는 누군가일지도 모른다는 것을.
“안 돼.”
세아가 말했다. 강리우를 보지 않으면서. 하지만 그녀의 목소리는 분명했다. 그것은 선언이었다.
“뭐가?”
강리우가 물었다. 그의 목소리는 낮고 조심스러웠다.
“이 모든 게.”
세아가 대답했다. 그리고 강리우는 그것이 자신에 대한 거라는 것을 알았다. 또는 자신의 아버지에 대한 거라는 것을. 또는 이 모든 것이 끝나야 한다는 뜻이었다. 그 파일 안에 담긴 모든 것들이.
강리우는 파일을 들고 있었다. 여전히. 무겁게. 그의 손이 떨렸다. 아주 미세하게. 그리고 그것을 내려놨다. 바닥에. 병실 입구에. 마치 그것이 자신이 가져갈 수 있는 가장 최선의 것이라는 듯이. 아무도 줍지 않을 때까지.
하늘이는 그 파일을 봤다. 그리고 강리우의 뒷모습을 봤다. 그 남자는 돌아서지 않았다. 병실 안을 보지도 않았다. 단지 파일을 바닥에 내려놓고 복도로 나갔다. 하늘이도 따라나갔다.
복도에서 둘은 다시 침묵 속에서 마주했다. 강리우는 하늘이의 눈을 봤다. 그곳에는 뭔가가 묻혀 있었다. 무언의 질문. 하지만 하늘이는 물으려고 하지 않았다. 대신, 병실로 돌아갔다. 혼자가 아니라, 강리우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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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부: 깨어남
새벽 3시 정확히.
병실의 형광등이 깜박였다. 전기 문제가 아니었다. 단순한 고장도 아니었다. 그냥 깜박인 것이었다. 한 번. 두 번. 그리고 다시 밝아졌다.
그 순간, 어머니의 눈이 떨렸다. 아주 작게. 마치 누군가가 매우 먼 곳에서 그 눈꺼풀을 집어당기는 것처럼. 도현이가 그것을 봤다. 그의 호흡이 멈췄다.
비명을 지르려고 했다. 그의 입이 벌어졌다. 하지만 참았다. 세아처럼. 침묵 속에서. 기다리면서. 깨어남을 향한 그 마지막 움직임이 정말로 깨어남인지를 확인하면서.
그의 손이 어머니의 손을 더 단단히 잡았다. 도현이는 기도를 하고 있었다. 특정한 종교의 기도가 아니라, 단순한 간구. 제발, 제발, 제발. 그것뿐이었다.
그리고 어머니의 눈이 열렸다.
아주 천천히. 마치 물 아래에서 올라오는 것처럼. 심해의 깊은 곳에서 천천히, 아주 천천히 떠올라오는 것처럼. 제주의 해에서. 깊은 곳에서. 30년을 물 속에서 보낸 후에. 마침내.
그 눈이 열리는 순간, 세아는 울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소리는 없었다. 눈물만 흘렀다. 마치 그 눈물이 30년을 대신 흘려온 것처럼. 마치 그 눈물이 모든 밤과 모든 기다림을 담고 있는 것처럼.
도현이는 어머니의 손을 놓지 않으면서, 의료진을 부르려고 했다. 하지만 움직일 수 없었다. 이 순간이 깨져버릴까봐. 이 기적이 사라져버릴까봐.
어머니의 눈이 천천히, 아주 천천히 떠졌다. 최면에서 깨어나는 것처럼. 또는 오랜 수술 후에 깨어나는 것처럼.
그리고 그 눈이 완전히 열렸을 때, 어머니의 시선이 흔들렸다. 초점을 찾으려고 하는 것처럼. 그 시선이 천천히 움직였다. 천장의 형광등에서 벽으로. 벽에서 천장으로. 그리고 마침내…
세아와 도현이의 얼굴로.
그 순간, 어머니의 입술이 움직였다. 마치 뭔가를 말하려고 하는 것처럼. 하지만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30년 동안 사용되지 않은 성대. 30년 동안 닫혀 있던 입.
“엄마…”
세아가 속삭였다. 마치 그 음성이 어머니를 다시 깨울 수 있을 것 같은 목소리로.
어머니의 눈이 세아를 찾았다. 초점이 맞춰졌다. 그리고 그 눈에 뭔가가 나타났다. 인식. 기억. 아니면 30년의 꿈에서 깨어난 것에 대한 혼란.
도현이는 어머니의 손이 움직이는 것을 느꼈다. 이번에는 의도적인 움직임이 아니라, 거의 반사적인 움직임. 마치 세아의 목소리에 반응하는 것처럼.
“엄마, 저예요. 세아예요.”
세아가 말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떨렸다. 30년을 기다려온 이 순간을 위해 몇 번을 반복했을까 하는 그 말들. 그 말들이 이제 현실이 되어 있었다.
병실 밖에서, 강리우와 하늘이는 그 모든 것을 들었다. 강리우의 가슴이 철렁했다. 그의 손이 주머니 속으로 들어갔다. 그곳에 있는 또 다른 파일. 또 다른 비밀.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지금은 이 기적의 순간이 모든 것을 잠시 멈추게 해주는 것 같았다.
어머니의 눈이 도현이로 움직였다. 그리고 그 눈에 눈물이 맺혔다. 30년 만의 눈물. 30년 만의 감정. 그것이 천천히, 아주 천천히 뺨을 타고 내려왔다.
“…아…”
어머니가 목소리를 냈다. 말이 아니라, 그저 음성. 하지만 그것이 가장 아름다운 소리였다. 세아와 도현이는 그것을 들었다. 그들은 그 소리를 영원히 잊지 않을 것이었다.
어머니가 깨어났다. 30년의 침묵을 깨고. 30년의 어둠을 뚫고.
그리고 그것이 시작이었다. 새로운 이야기의. 새로운 고통의. 새로운 치유의.
병실의 형광등이 밝게 빛났다. 더 이상 깜박이지 않고. 그저 밝게. 밝게.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