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아닌 것을 위해 불탄 소녀 – 제200화: 어머니의 눈이 열릴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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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200화: 어머니의 눈이 열릴 때

병실의 시간은 다르게 흐른다. 시계의 초침은 같은 속도로 움직이지만, 그것이 측정하는 것은 시간이 아니라 맥박이다. 심전도 모니터의 파형. 숨의 깊이. 눈꺼풀의 미세한 떨림. 세아는 병실의 문을 밀고 들어섰을 때, 강리우가 이미 사라진 지 오래라는 것을 알았다. 창문의 각도로. 형광등의 밝기로. 어머니 옆에 놓인 의자의 온기로. 강리우가 얼마나 오래 거기 앉아 있었는지를 알 수 있었다.

도현이가 침대 옆에 서 있었다. 움직이지 않는 돌상처럼. 손에는 무언가가 쥐어져 있었다. 세아가 가까워지자 도현이는 그것을 열었다. 어머니의 손. 가늘고 창백한. 정맥이 투명하게 보이는. 그 손을 도현이가 쥐고 있었다. 마치 그것을 놓으면 어머니도 함께 사라질까봐.

“깨어났어?”

세아가 물었다.

도현이는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움직임이 있었다고 했다. 간호사가 왔다고 했다. 의사를 불렀다고 했다. 뭔가가 바뀌고 있다고. 세아는 그 말들을 들으면서도, 어머니의 얼굴을 보고 있었다. 여전히 닫혀 있는 눈. 여전히 움직이지 않는 입술. 여전히 기계에 의존하는 숨.

“강리우는?”

세아가 물었다. 그 이름을 입 밖에 내는 것이 이상했다. 오빠. 자신의 오빠. 자신이 지금까지 몰랐던 오빠. 그런데 이미 그 말이 자신의 혀에 익숙해 있었다. 마치 언제나 그 이름을 불러온 것처럼.

“강남으로 갔어. 아버지 집이라고. 서류들을 찾으러. 누나, 우리 아버지가 강민준이래. JYA의 강민준. 그게…”

도현이가 말했다. 하지만 끝내지 못했다. 그 문장의 무게가 너무 컸다.

세아는 침대 반대편에 앉았다. 느리게. 마치 자신의 몸이 유리로 만들어진 것처럼. 부러질 수 있을 것처럼. 어머니의 얼굴을 위에서 아래로 보았다. 이 얼굴. 제주 바다에서 본 얼굴. 해녀의 얼굴. 침묵의 얼굴. 그 얼굴이 정말로 강민준의 것이었을까. 강민준이라는 사람이. 그런 사람이. 그런 세계의 사람이.

“엄마가 말했어?”

세아가 물었다.

도현이가 다시 고개를 저었다. 엄마는 여전히 깨어나지 못했다고 했다. 하지만 움직임이 있다고 했다. 반응이 있다고 했다. 곧 뭔가가 바뀔 것이라고. 의사가 그렇게 말했다고.

병실의 시계가 자정을 향해 가고 있었다. 오전 11시 47분. 세아는 그 시간을 기억하고 싶었다. 나중에. 어머니가 깨어났을 때. 또는 깨어나지 못했을 때. 이 순간을 기억하고 싶었다. 이 침묵. 이 대기. 이 기계 음성들.

“강리우가 뭐라고 했어? 왜 이제 와? 왜 아버지 이름을 숨겼어? 뭐라고?”

세아가 물었다. 질문이 쏟아져 나왔다. 마치 오랫동안 쌓인 것들이.

도현이의 눈이 어머니 쪽으로 갔다. 그리고 다시 세아에게로. 그 사이를 오갔다.

“강리우가 말하기로는… 아버지가 열아홉 살 때 강리우에게 말했대. 자기가 다른 여자와 낳은 아이가 있다고. 제주에 있다고. 엄마는 몰라야 한다고. 그리고 강리우가 나중에 아버지 서류로 엄마를 찾았대. 그런데 우리를 찾지 않았어. 왜냐하면…”

도현이가 멈췄다.

“왜냐하면?”

세아가 몰아붙였다.

“왜냐하면 그렇게 되면 엄마의 고통을 인정하는 거라고. 아버지를 인정하는 거라고. 그래서 할 수 없었대.”

도현이의 목소리가 깨졌다.

세아는 그 말을 들으면서, 자신의 몸이 점점 더 무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무게가 아니었다. 밀도였다. 자신이 점점 더 조밀해지는 것. 공기가 들어올 수 없을 정도로. 투명성이 사라지고, 견고성이 생기는 것. 그런데 견고하면 깨질 수 있다. 세아는 자신이 깨질 위험에 처해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럼 지금은? 왜 지금은?”

세아가 물었다.

도현이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휴대폰을 봤다. 시간을 확인했다. 자신도 모르겠다는 듯이.

강리우가 강남으로 간다고 했을 때, 세아는 그것이 도망이라고 생각했다. 또는 회피.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니, 그것은 무언가를 찾는 것이었다. 또는 무언가를 끝내는 것. 아버지의 서류들. 그 안에 뭐가 있을까. 세아의 이름? 나이? 생년월일? 아니면 그것보다 더 깊은 것. 선택. 아버지의 선택. 어머니를 버린 선택. 세아를 버린 선택. 그리고 강리우를 그 선택의 공범자로 만든 선택.

“강리우 연락이 와?”

세아가 물었다.

도현이가 휴대폰을 들었다. 화면을 켰다. 아무것도 없었다. 아무도 연락하지 않았다. 강남은 먼 곳이었다. 또는 강리우가 거기서 자신을 잊고 있었다. 또는 그곳에서 자신이 누구인지를 다시 만들고 있었다.

세아는 일어섰다. 천천히. 침대를 한 바퀴 돌았다. 어머니의 얼굴 위로. 그리고 어머니의 손 아래로. 그리고 다시 도현이가 서 있는 곳으로. 도현이를 봤다. 자신의 동생. 이제 자신들의 아버지가 누구인지 아는 동생. 그 무게를 혼자 감당해야 했던 동생.

“내가 강리우 찾아갈게.”

세아가 말했다.

“뭐?”

도현이가 물었다.

“강남. 가서 찾아갈 거야. 강리우가. 그리고…”

세아가 멈췄다.

“그리고 뭐?”

도현이가 물었다.

세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자신도 모르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강리우를 찾았을 때 뭘 할 건지도. 그리고 그 이후에 뭘 할 건지도. 세아는 단지 움직여야 한다는 것만 알고 있었다. 멈춰 있으면 자신이 완전히 굳을 것 같았으니까.

“그 전에 엄마 여기 있어야 할 것 같아.”

도현이가 말했다. 그것은 질책이 아니었다. 단순한 사실이었다.

세아는 멈췄다. 도현이의 말이 맞았다. 어머니가 깨어날 수도 있었다. 오늘 밤. 다음 시간. 다음 분. 그리고 세아가 강남에 가면, 그때 어머니가 눈을 떴을 때 누가 거기 있을까. 도현이만. 혼자서 어머니의 눈을 받아야 할 도현이.

“강리우를 기다려.”

도현이가 말했다.

세아는 의자에 다시 앉았다. 침대 옆. 어머니의 손이 닿을 수 있는 거리에. 그리고 기다렸다. 모니터의 파형을 봤다. 심장의 박동. 규칙적인. 계속되는. 살아 있다는 신호. 세아는 그 파형 속에서 무언가를 찾으려고 했다. 메시지. 신호. 어머니로부터의 뭔가. 하지만 그것은 단지 파형이었다.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세아였다.

시간이 흘렀다. 자정이 가까워졌다. 세아는 자신의 전화를 켰다. 하늘이의 메시지들이 있었다. 라면이 식었다는 메시지. 어디냐는 메시지. 다시 하는 건가 하는 메시지. 마지막 메시지는 “알겠어. 혼자 있고 싶은 거지. 괜찮아. 나 여기 있을게. 언제든지.”였다.

세아는 답장을 하지 않았다. 대신 강리우에게 전화를 했다. 울음음이 울렸다. 한 번. 두 번. 세 번. 네 번. 그리고 끊어졌다.

“강리우?”

세아가 물었다. 하지만 강리우는 없었다.

“받지 않은 것 같아.”

도현이가 말했다.

세아는 휴대폰을 내려놨다. 그리고 다시 어머니를 봤다. 어머니의 눈. 여전히 닫혀 있었다. 하지만 세아는 느꼈다. 뭔가가 변하고 있다는 것을. 공기가 다르다는 것을. 병실의 분위기가 다르다는 것을. 마치 어떤 경계가 옅어지고 있는 것처럼. 그 경계가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간호사가 들어왔다. 밤 12시 15분. 모니터를 확인했다. 수치를 기록했다. 어머니의 맥박을 잰 손가락이 가늘었다. 마치 세아의 손처럼.

“변화가 있으신가요?”

세아가 물었다.

간호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의식이 돌아오시고 있는 것 같습니다. 천천히. 하지만 확실하게. 아침쯤이면 반응이 있을 것 같습니다.”

간호사가 말했다.

반응. 그 말이 세아의 가슴을 쳤다. 어머니가 반응할 것이라는 말. 눈을 뜬다는 것. 목소리를 낸다는 것. 또는 그것들이 아니어도, 뭔가가 돌아온다는 것.

간호사가 나갔다. 세아와 도현이는 다시 침묵 속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이번 침묵은 다르게 느껴졌다. 대기의 침묵이었다. 마치 무대 막이 올라가기 직전의 침묵처럼.

세아의 휴대폰이 울렸다. 강리우였다.

“어디야?”

강리우가 물었다. 목소리가 이상했다. 어디에선가 달렸어. 숨을 고르지 못하고 있었다.

“병원에 있어. 엄마가 깨어날 것 같아.”

세아가 말했다.

침묵이 있었다. 긴 침묵. 그리고 강리우의 목소리가 돌아왔다.

“나 아버지 찾았어.”

강리우가 말했다.

세아의 심장이 멈췄다.

“어디에?”

세아가 물었다.

“집에. 펜트하우스에. 혼자. 술을 마시고 있었어. 그리고…”

강리우가 멈췄다.

“그리고?”

세아가 재촉했다.

“그리고 아버지가 우리를 찾고 있었어. 오래전부터. 엄마와 나와 도현이를. 하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대. 그래서…”

강리우가 다시 멈췄다.

“그래서 뭐?”

세아가 물었다.

“그래서 나한테 물었어. 우리를 만날 준비가 되었냐고. 엄마가 아빠를 용서할 준비가 되었냐고. 너희가 준비가 되었냐고.”

강리우의 목소리가 깨지고 있었다.

세아는 강리우의 말을 들으면서, 자신의 손이 떨리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강리우의 손처럼. 강민준의 손처럼. 가족의 떨림이었다. 또는 공포의 떨림이었다. 또는 다가오는 뭔가에 대한 떨림이었다.

“강리우, 돌아와.”

세아가 말했다.

“엄마가 깨어나고 있어. 우리가 필요해. 너도 필요하고. 아버지도.”

세아가 계속했다.

강리우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통화가 끊어졌다.

도현이가 세아를 봤다. 말없이. 세아는 도현이의 눈에서 뭔가를 읽어야 할 것 같았다. 하지만 도현이의 눈은 비어 있었다. 또는 너무 많이 들어차 있었다.

“엄마가 깨어날 때, 강리우가 여기 있어야 해.”

도현이가 말했다.

“응.”

세아가 대답했다.

“그리고 아버지도.”

도현이가 계속했다.

세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것은 자신이 약속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강민준을 병원으로 데려오는 것은. 강리우가 할 수 있는 것이었다. 또는 강민준이 스스로 선택해야 하는 것이었다.

병실의 시계가 오전 12시 47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세아는 이 시각을 기억하고 싶었다. 어머니가 눈을 떠야 할 시간이 가까워지고 있는 이 시각을. 그리고 강리우가 어딘가로 달려가고 있는 이 시각을. 그리고 강민준이 펜트하우스에서 무언가를 결정하고 있을 이 시각을.

세아는 어머니의 손을 잡았다. 조심스럽게. 마치 그것을 잡으면 어머니도 함께 깨어날 것처럼. 그리고 기다렸다.

어머니의 눈이 열리기를.

강리우가 돌아오기를.

강민준이 선택하기를.

그리고 모든 것이 시작되기를.

바깥쪽에서, 서울의 밤이 계속 흘렀다. 불빛들. 누군가의 삶들. 누군가의 가족들. 그리고 지금 이 병실에서, 세아의 가족도 다시 시작되고 있었다. 깨어남으로. 돌아옴으로. 그리고 선택으로.

세아는 자신의 손이 여전히 떨리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그것은 두려움의 떨림이 아니었다. 그것은 불꽃이 타오르기 전의 떨림이었다. 성냥의 끝이 불에 닿으려고 하는 순간의 떨림이었다.

그리고 어머니의 눈이, 아주 천천히, 열리기 시작했다.


END OF CHAPTER 200

# 제200장: 돌아옴

병실의 형광등이 희뿌연 빛을 내뿜고 있었다. 세아는 그 빛이 얼마나 차갑고 무정한지를 이제야 깨달았다. 마치 이 밤 전체를 관통하는 칼날처럼, 부드러움을 거부하는 조명이었다. 심장 모니터가 일정한 리듬으로 신호음을 내고 있었고, 그 소리는 어머니가 아직 살아있다는 증거였다. 어머니가 아직 돌아올 가능성이 있다는 증거였다.

“아버지가 우리를 찾고 있었어.”

강리우의 목소리가 휴대폰을 통해 전달되었다. 그 목소리에는 무언가 낯선 것이 섞여 있었다. 죄책감인가? 아니면 오랫동안 억눌렀던 무언가가 터져 나오려는 음성인가? 세아는 휴대폰을 귀에 더 가까이 가져갔다. 강리우의 숨소리가 들렸다. 거칠고, 불규칙했다.

“오래전부터. 엄마와 나와 도현이를.”

세아의 양손이 식은 병실 공기 속에서 천천히 주먹을 쥐었다. 강리우의 말은 마치 장시간 봉인된 편지를 뜯는 것처럼 들렸다. 차근차근하지만 결연했다. 마지막 장면의 시작이 될 것 같은 그런 느낌이었다.

“하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대.”

강리우가 다시 숨을 쉬었다. 그 사이에 얼마나 많은 시간이 흘렀을까? 세아는 강리우의 입이 움직이는 모습을 상상해 보려 했지만, 그저 목소리만 들렸다. 전자음에 실린 목소리. 거리감이 있으면서도 친밀한 목소리.

“그래서…”

강리우가 말을 멈췄다.

세아는 그 침묵 속에서 무언가를 느낄 수 있었다. 마치 물 위에서 발을 헛디디는 순간처럼, 강리우가 다음 말을 준비하는 동안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병실의 시계는 여전히 흐르고 있었고, 어머니의 숨도 여전히 가쁜 리듬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세아의 세계는 그 침묵 속에서 정지되어 있었다.

“그래서 뭐?”

세아가 물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침착했다. 하지만 가슴은 어떤 기대감으로 팽창하고 있었다. 마치 스프링이 압축되었을 때처럼, 튀어 나올 준비가 된 에너지로 가득했다.

“그래서 나한테 물었어.”

강리우의 목소리가 돌아왔다. 더 조용했다. 더 깊었다.

“우리를 만날 준비가 되었냐고. 엄마가 아빠를 용서할 준비가 되었냐고. 너희가 준비가 되었냐고.”

세아는 어머니의 얼굴을 바라봤다. 어머니의 눈꺼풀 뒤에서 무언가가 움직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혹은 그것이 세아 자신의 바램이 만들어낸 착각이었을까? 어머니, 깨어나세요. 아버지가 돌아오고 있어요. 형이 돌아오고 있어요. 우리는 준비가 되어있어요. 라고 외치고 싶었다. 하지만 어머니의 입술은 움직이지 않았다.

강리우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그 목소리는 깨지고 있었다.

“강리우?”

세아가 물었다. 아무도 답하지 않았다. 단지 호흡음만 들렸다. 강리우의 호흡음이 휴대폰을 통해 전달되었고, 그것은 울음이 될 준비가 된 호흡음이었다. 세아는 자신의 형이 어디서 그런 호흡을 하고 있는지 상상했다. 펜트하우스의 어느 방에서? 계단에서? 아니면 밤거리를 달리면서?

“그래서 나한테 물었어. 우리를 만날 준비가 되었냐고. 엄마가 아빠를 용서할 준비가 되었냐고. 너희가 준비가 되었냐고.”

강리우가 반복했다. 마치 그 말을 한 번 더 말해야 현실이 될 것처럼.

병실의 벽시계가 오전 12시 35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세아는 벽을 향해 눈을 돌렸다. 하얀 벽. 그 위의 검은 숫자들. 숫자들은 시간을 나타내지만, 동시에 시간을 가둬두기도 했다. 이 순간을 영원히 보존하려는 듯이.

“강리우의 목소리가 깨지고 있었다.”

세아는 그것을 명확하게 들었다. 형의 성대에서 나오는 음성이 마치 부러진 현처럼 떨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감염되었다. 세아의 목에도, 그녀의 가슴에도, 그녀의 양손에도.

세아는 자신의 손을 바라봤다. 손가락이 떨리고 있었다. 아주 미세하게. 마치 매우 먼 곳에서 나는 음파가 그녀의 신경을 울리고 있는 것처럼. 가족의 떨림이었다. 또는 공포의 떨림이었다. 또는 다가오는 뭔가에 대한 떨림이었다. 그것이 무엇인지, 세아는 명확하게 알 수 없었다.

“강리우의 손처럼. 강민준의 손처럼.”

세아가 중얼거렸다. 가족의 떨림. 그것이 맞다. 세 사람 모두가 이 밤에 떨리고 있었다. 어딘가에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면서. 무엇을 준비해야 할지 모르면서.

“강리우, 돌아와.”

세아가 말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명령적이었다. 마치 어머니의 목소리처럼. 아니면 이제 자신이 어머니를 대신해서 이 가족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깨달은 어른의 목소리처럼.

“엄마가 깨어나고 있어. 우리가 필요해. 너도 필요하고. 아버지도.”

세아가 계속했다. 그 말이 사실인지 확실하지 않았지만, 그것이 사실이어야 한다고 강하게 원했다. 엄마가 깨어나고 있어야 한다. 형이 돌아와야 한다. 아버지가 선택해야 한다. 그래야만 이 밤이 무언가의 끝이 아니라 시작이 될 수 있다.

휴대폰 너머에서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통화가 끊어졌다.

세아는 휴대폰을 바라봤다. 화면에는 “통화 종료”라는 글자가 떠있었다. 강리우가 끊었을까? 아니면 전파가 닿지 않는 곳으로 가서 자동으로 끊어졌을까? 두 경우 모두 같은 의미였다. 강리우가 가고 있다는 것이었다. 어딘가로.

“세아.”

도현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세아는 고개를 들었다. 도현이가 병실 문 근처에 서 있었다. 어느 순간부터 거기 있었는지 세아는 알 수 없었다. 마치 유령처럼, 아니면 이 병실에 처음부터 있어서 세아의 감각이 그를 놓쳤던 것처럼.

도현이의 얼굴은 창백했다. 밤샘의 피로로 인한 창백함이 아니었다. 어떤 감정이 피부 아래로 물러나면서 만들어진 창백함이었다. 도현이는 무언가를 알고 있었다. 도현이는 무언가를 이미 준비하고 있었다.

도현이가 세아를 봤다. 말없이.

세아는 도현이의 눈에서 뭔가를 읽어야 할 것 같았다. 하지만 도현이의 눈은 비어 있었다. 또는 너무 많이 들어차 있었다. 그 안에는 무언가가 이글거리고 있었지만, 그것이 무엇인지 세아는 알 수 없었다.

“엄마가 깨어날 때, 강리우가 여기 있어야 해.”

도현이가 말했다. 그것은 질문이 아니었다. 명제였다. 현실이 되어야 할 것.

“응.”

세아가 대답했다.

“그리고 아버지도.”

도현이가 계속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거의 아무런 감정이 없었다. 하지만 그 무감정함이 오히려 더 무거웠다.

세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것은 자신이 약속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강민준을 병원으로 데려오는 것은. 강리우가 할 수 있는 것이었다. 또는 강민준이 스스로 선택해야 하는 것이었다. 세아는 이미 충분히 많은 것을 결정했다. 어머니 곁에 남기로. 강리우의 전화를 받기로. 도현이의 말을 들어주기로. 하지만 아버지는?

아버지는 어떤 선택을 하고 있을까?

도현이는 세아의 침묵을 읽은 것 같았다. 그는 어머니의 침대 옆에 앉았다. 세아의 반대편에. 마치 그들이 함께 어머니를 지켜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처럼.

“그렇지?”

도현이가 물었다.

“응.”

세아가 대답했다.

병실의 시계가 오전 12시 47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세아는 이 시각을 기억하고 싶었다. 어머니가 눈을 떠야 할 시간이 가까워지고 있는 이 시각을. 그리고 강리우가 어딘가로 달려가고 있는 이 시각을. 그리고 강민준이 펜트하우스의 어떤 공간에서 무언가를 결정하고 있을 이 시각을.

세아는 어머니의 손을 잡았다. 조심스럽게. 마치 그것을 잡으면 어머니도 함께 깨어날 것처럼. 손가락이 맞닿으면서 세아는 어머니의 피부가 얼마나 차가운지를 느꼈다. 하지만 그 안에는 여전히 맥박이 있었다. 여전히 생명이 흐르고 있었다.

그리고 기다렸다.

어머니의 눈이 열리기를.

강리우가 돌아오기를.

강민준이 선택하기를.

그리고 모든 것이 시작되기를.

병실 밖에서, 서울의 밤이 계속 흘렀다. 불빛들. 누군가의 삶들. 누군가의 가족들. 그리고 지금 이 병실에서, 세아의 가족도 다시 시작되고 있었다. 깨어남으로. 돌아옴으로. 그리고 선택으로.

세아는 자신의 손이 여전히 떨리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그것은 두려움의 떨림이 아니었다. 어머니가 깨어나지 않을까봐 하는 두려움도, 강리우가 돌아오지 않을까봐 하는 두려움도 아니었다.

그것은 불꽃이 타오르기 전의 떨림이었다. 성냥의 끝이 불에 닿으려고 하는 순간의 떨림이었다. 마치 그 순간을 기다리고 있던 모든 것이 한 번에 폭발할 준비가 된 것처럼.

세아는 도현이를 바라봤다. 도현이도 어머니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은 말하지 않았지만, 같은 것을 기다리고 있었다. 같은 것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같은 것을 원하고 있었다.

시계가 오전 12시 48분을 가리켰다.

그리고 어머니의 눈이, 아주 천천히, 열리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눈꺼풀이 미세하게 떨렸다. 마치 어둠 속에서 깨어나려고 몸부림치는 것처럼. 그 떨림은 점점 커졌다. 어머니의 이마에 주름이 생겼다. 그녀의 입술이 움직였다.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았지만, 입술은 움직였다.

세아의 가슴이 멈췄다. 그리고 다시 뛰었다. 빠르게. 매우 빠르게.

“엄마.”

세아가 속삭였다.

그리고 어머니의 눈이 열렸다.

## 제201장: 선택의 순간

펜트하우스의 거실은 조용했다. 너무 조용했다. 강민준은 소파에 앉아 있었고, 그의 양손은 무릎 위에 놓여 있었다. 마치 기도하는 자세처럼. 하지만 강민준은 기도하지 않았다. 그저 앉아있을 뿐이었다.

휴대폰은 탁자 위에 있었다. 화면은 꺼져있었다.

강민준은 그것을 집어들지 않았다. 이미 충분히 많은 말이 오갔다. 강리우와의 대화에서. 강리우의 말을 듣는 순간, 강민준은 무언가를 깨달았다. 깨달음이라는 것이 얼마나 무거운 것인지. 그것이 얼마나 비싼 대가를 요구하는지.

“우리를 만날 준비가 되었냐고.”

강민준이 중얼거렸다. 강리우의 말. 아니, 자신의 말이었다. 자신이 강리우에게 물었던 말이었다.

하지만 이제 그 질문은 자신에게로 돌아와 있었다.

강민준은 준비가 되었을까?

병원으로 가기 위해?

아내를 보기 위해?

그 여인의 눈을 마주보기 위해?

펜트하우스의 창밖으로 서울의 밤이 보였다. 불빛들이 무수히 흐르고 있었다. 누군가의 삶들이 그 아래서 펼쳐지고 있었다. 누군가의 가족들이. 누군가의 선택들이.

강민준의 손이 떨렸다.

바깥쪽에서, 엘리베이터의 음성이 울렸다.

강민준은 귀를 기울였다.

누군가가 온다.

누군가가, 아주 빠르게, 온다.

**제200장 종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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