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아닌 것을 위해 불탄 소녀 – 제187화: 전화는 계속 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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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87화: 전화는 계속 울린다

세아는 차 밖으로 나갔다. 하늘이가 말을 끝내기 전에, 설득하기 전에, 도현에 대해 더 말하기 전에. 문을 열고 나가는 것이 전부였다. 강남역 입구의 밤거리는 여전히 뜨거웠다. 술 냄새, 담배 연기, 누군가의 음성, 택시의 경적음. 모든 소리가 동시에 세아의 귓가에 들렸지만, 그 중 어느 것도 명확하지 않았다. 마치 세상이 여러 개의 라디오 채널을 동시에 재생하고 있는 것처럼.

차 문이 닫혔다. 하늘이가 나오지 않았다. 세아는 걸었다. 어디로든. 방향은 중요하지 않았다. 강남역 입구를 지나 골목으로 들어갔다. 골목의 불빛이 더 노란색이었다. 더 오래되었다. 마치 이곳이 시간을 잃어버린 곳인 것처럼.

핸드폰 화면이 밝혀졌다. 도현의 이름. 다시 한 번 울렸다. 열한 번째. 세아는 받지 않았다. 대신 화면을 내렸다. 배터리는 10%였다. 곧 꺼질 것이다.

“왜 전화 안 받아?”

뒤에서 하늘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세아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세아. 제발 멈춰. 너 지금 이 상태로 도현이 보면 안 돼. 너 손 봤어? 너 얼굴 봤어? 너 지금 뭔가 깨지는 중이야. 그리고 너 그걸 그 아이한테 줄 거야.”

하늘이가 세아의 팔을 잡았다. 손가락이 세아의 소매를 쥐었다. 강하게. 마치 세아를 놓치지 않으려고 하는 것처럼. 마치 세아가 이 순간 증발해버릴 수 있다는 걸 아는 것처럼.

세아는 천천히 돌아섰다. 하늘이의 얼굴을 봤다. 하늘이는 울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는 울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눈은 반짝이고 있었지만, 눈물은 흘러내리지 않고 있었다. 마치 하늘이도 자신의 감정에 저항하고 있는 것처럼.

“너 뭐 해?”

하늘이가 물었다.

“모르겠어.”

세아가 대답했다. 그것이 진실이었다. 자신이 무엇을 하려고 하는지, 왜 이 길을 걷고 있는지, 도현에게 무엇을 말해야 할지. 아무것도 몰랐다. 오직 자신의 몸이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만 알 수 있었다. 마치 누군가 다른 사람이 그 몸을 조종하고 있는 것처럼.

“강리우?”

하늘이가 물었다.

세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침묵이 대답이었다.

“세아, 그 남자는… 너 형제야. 너 반 형제. 너 아버지가 다른 여자한테서…”

하늘이가 말했다. 그리고 멈췄다. 마치 그것을 완성하는 것이 뭔가를 현실로 만드는 것 같았다.

“내가 알아.”

세아가 말했다. 그리고 자신의 팔을 빼냈다. 부드럽게. 강하게 저항하지 않으면서. 마치 하늘이의 손을 다치게 하고 싶지 않은 것처럼.

“근데 뭐?”

하늘이가 물었다.

“근데 그게 뭐라는 건지 모르겠어. 아버지는 내 아버지 아니잖아. 그리고 강리우는… 강리우는…”

세아가 말을 멈췄다. 자신의 손가락을 다시 세어봤다. 여전히 다섯 개. 여전히 떨리고 있었다.

“강리우는 뭐?”

하늘이가 물었다.

“내가 찾으려고 했던 사람이야. 처음부터. 내가 의식하기 전부터. 마치 누군가 내 몸에 이미 그 답을 심어놓은 것처럼.”

세아가 말했다.

이 말이 나오는 순간, 세아는 자신이 말한 것의 의미를 깨달았다. 그리고 그것이 진실이라는 걸 알았다. 강리우는 처음부터 자신의 삶에 있었다. 병원 복도에서, 한강변에서, 차 안에서. 그 남자는 항상 거기 있었다. 마치 자신의 그림자처럼. 마치 자신이 빠뜨린 반쪽인 것처럼.

핸드폰이 울렸다. 도현. 열두 번째. 하늘이와 세아 모두 그 소리를 들었다. 그 울음은 골목에 울려 퍼졌고, 주변의 불빛들을 떨게 했다. 또는 그렇게 보였다.

세아는 이번에는 받았다.

“도현?”

그녀의 목소리는 낯설었다. 자신의 목소리처럼 들리지 않았다. 마치 누군가 다른 사람이 그 몸을 빌려 말하고 있는 것처럼.

전화 너머에서 도현의 숨소리만 들렸다. 마치 그 아이도 세아를 인식하는 데 시간이 걸리는 것처럼.

“누나…”

도현의 목소리가 나왔다. 음성메시지에서와는 다른 목소리였다. 더 작았다. 더 깨져 있었다.

“응. 나야. 도현이.”

세아가 말했다.

“엄마가… 엄마가 자꾸 뭔가 말해. 누나한테 뭐라고 전해달라고. 근데 말이 안 돼. 누나가 아버지 아버지 이러고… 그리고…”

도현이 말했고, 멈췄다. 배경에서는 병원 소리가 들렸다. 모니터의 빛나는 소리, 누군가의 신음, 간호사의 발걸음 소리.

“그리고 뭐?”

세아가 물었다.

“그리고 누나 목소리. 자꾸만 누나 목소리 얘기 해. 뭐라고 말해달라고 하는데… 누나, 너 목소리가 뭐야? 엄마가 자꾸 깨문대. 너 목소리가 위험하대. 그래서 아빠가 너 아버지가 너한테서 뭔가 빼앗았대. 무슨 말이야?”

도현의 목소리는 점점 작아졌다. 마치 그것이 중요한 질문이지만 동시에 그것을 말하는 것이 가장 어려운 일인 것처럼.

세아의 손이 멈춰 있었다. 공중에 떠 있었다. 마치 누군가 그것을 잡아두고 있는 것처럼.

“도현아. 엄마 옆에 있어?”

세아가 물었다.

“응. 병실에서.”

도현이 대답했다.

“엄마한테 줄 수 있어? 핸드폰.”

세아가 말했다.

침묵. 그 침묵은 몇 초가 아니라 몇 세기처럼 느껴졌다. 배경음이 바뀌었다. 누군가가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호흡이 변했다. 더 얕아졌다. 더 불규칙해졌다.

“세아…”

엄마의 목소리였다. 하지만 그것도 낯선 목소리였다. 마치 여러 겹의 스크린을 통과한 것처럼. 마치 어떤 거리를 시간을 초월해 건너온 것처럼.

“엄마. 내가…”

세아가 시작했지만, 엄마가 먼저 말했다.

“너한테서 빼앗은 게 뭔지 알아?”

엄마가 물었다.

“뭐?”

세아가 물었다. 하지만 이미 알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는 느끼고 있었다. 자신의 몸 어딘가에서, 자신의 가슴 깊숙한 곳에서, 자신의 목에서.

“너 목소리야. 너 진짜 목소리. 너 아버지가 너한테서 빼앗은 게 그거야.”

엄마가 말했다.

“내 목소리가 뭐 했어? 내가 뭐 했어?”

세아가 물었다. 그리고 이것이 가장 중요한 질문이라는 걸 알았다. 자신이 평생 물어야 했던 질문. 하지만 물을 수 없었던 질문.

“너… 너 어렸을 때…”

엄마가 말했다. 그리고 침묵했다. 마치 그것을 말하는 것이 엄마 자신을 파괴하는 것처럼.

“어렸을 때 뭐?”

세아가 다시 물었다.

“너 노래했어. 계속. 하루 종일. 밤낮 없이. 그리고…”

엄마의 목소리가 깨지고 있었다.

하늘이가 세아의 손을 다시 잡았다. 이번에는 더 강하게. 마치 세아가 이 순간 사라질 수 있다는 걸 아는 것처럼.

“그리고 뭐?”

세아가 물었다.

“그리고 너 아버지가 무서워했어. 너 목소리가. 그 목소리가 뭔가를… 자꾸 깨는 것 같았어. 그래서…”

엄마가 말했다.

“그래서 뭐?”

“그래서 그 목소리를 빼앗기로 했어. 너한테서. 아무도 듣지 못하게. 너 자신도 듣지 못하게.”

엄마가 말했다.

골목의 불빛이 다시 떨렸다. 또는 세아의 눈이 떨렸다. 또는 세상이 떨렸다. 구분할 수 없었다.

“내가… 내가 뭐했어?”

세아가 다시 물었다. 마치 이것이 마지막 질문인 것처럼.

“넌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 단지 노래했을 뿐이야. 그리고 그 목소리가… 그것이 너무 컸어. 너무 맑았어. 너무…”

엄마의 말이 끊겼다. 배경에서 누군가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도현이었다. 또는 엄마였다. 또는 두 사람 모두였다.

세아는 핸드폰을 내렸다. 아직 통화 중이었지만, 그녀는 그 목소리들을 듣고 싶지 않았다. 대신 골목의 밤을 봤다. 불빛들. 사람들. 모두 자신의 삶을 살고 있었다. 아무도 세아를 보지 않았다. 아무도 세아를 듣지 않았다.

“세아?”

하늘이가 불렀다.

세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자신의 손을 들었다. 여전히 떨리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 그 떨림이 뭔지 알았다. 그것은 두려움이 아니었다. 그것은 분노도 아니었다. 그것은…

불꽃이었다. 자신의 안에서 타오르고 있는, 누군가가 빼앗으려고 했던, 하지만 여전히 거기 있었던, 불꽃.

“나… 나 강리우를 만나야 해.”

세아가 말했다.

“지금?”

하늘이가 물었다.

“지금.”

세아가 대답했다.

“세아, 넌 지금…”

하늘이가 시작했다. 하지만 멈췄다. 마치 세아를 더 이상 말릴 수 없다는 걸 아는 것처럼.

세아는 다시 핸드폰을 들었다. 도현이 여전히 울고 있었다.

“도현아. 엄마 옆에 있어줄래?”

세아가 말했다.

“응. 응.”

도현이 대답했다.

“그리고 전화하지 마. 내가 다시 할 때까지. 약속.”

세아가 말했다.

“누나… 어디 가?”

도현이 물었다.

“내 목소리를 찾으러.”

세아가 말했다. 그리고 전화를 끊었다.

배터리가 8%였다. 화면은 검은색으로 돌아갔다. 골목의 불빛만 남았다. 그리고 하늘이의 얼굴. 그 얼굴에는 무언가가 쓰여 있었다. 두려움. 그리고 인정.

“강리우가 어디 있는지 알아?”

세아가 물었다.

“응. 알아.”

하늘이가 대답했다.

“어디?”

“한강변. 합정역 근처. 있는 어떤 호텔 로비에.”

하늘이가 말했다.

세아는 걸었다. 다시. 이번에는 골목 끝으로. 그곳에 차가 있을 거였다. 그리고 그 차는 한강으로 향할 거였다. 밤의 한강으로. 불꽃이 있는 곳으로.

“세아!”

하늘이가 뒤에서 불렀다. 하지만 세아는 돌아서지 않았다. 자신이 돌아서면, 자신이 멈추면, 무언가가 영구적으로 깨질 거라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차가 앞으로 나왔다. 하늘이가 운전석에 앉았다. 세아는 옆자리에 앉았다. 엔진음이 울렸다. 그리고 차는 한강 방향으로 움직였다.

창밖으로 강남의 밤이 지나갔다. 불빛들, 사람들, 삶들. 모두 계속되고 있었다. 세아의 삶도 계속되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 다른 속도로. 다른 방향으로.

“만나면 뭐 할 거야?”

하늘이가 물었다.

세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자신도 몰랐기 때문이다. 오직 한 가지만 알았다. 자신의 목소리가 어딘가에 있다는 것. 그리고 그것을 찾아야 한다는 것. 누군가로부터. 무언가로부터. 또는 자신으로부터.

차는 계속 달렸다. 한강을 향해. 밤을 통과하며. 두 개의 손, 두 개의 심장, 하나의 목표로.

강리우. 그 남자는 어디에 있을까. 그리고 그 남자의 손은 여전히 떨리고 있을까. 아니면 이제 멈춰 있을까.

세아의 손이 다시 떨렸다. 하지만 이번에는 다르게 떨렸다. 마치 그것이 누군가를 만나기 위한 떨림인 것처럼. 마치 그것이 무언가를 되찾기 위한 떨림인 것처럼.

밤은 계속되었다. 그리고 불꽃은 여전히 타오르고 있었다.

# 목소리를 찾아서

## 1부: 결정의 순간

“응. 응.”

도현이의 목소리는 폰 너머에서 떨리고 있었다. 아홉 살 아이의 목소리치고는 너무 많은 것들을 담고 있었다. 두려움, 혼란, 그리고 엄마를 믿으려는 절박함. 세아는 귀를 더 가깝게 폰에 갖다 댔다. 마치 그렇게 하면 아이의 울음소리를 더 정확하게 받아낼 수 있을 것처럼.

“도현아. 엄마 옆에 있어줄래? 할머니 옆에라도 좋아. 그냥… 혼자가 아닌 곳에.”

세아가 말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그것은 수년간 연기한 침착함이었다. 실제로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고 있었다. 남편이 아이를 데리고 나갔다는 통보를 받은 지 이제 겨우 두 시간. 그리고 그 남편은 자살 협박까지 했다. 강리우. 그 남자의 이름만으로도 세아의 피부에 소름이 돋았다.

“응. 응.”

도현이의 목소리가 더 작아졌다. 폰 너머의 배경음을 들으면 아이가 거실의 소파에 앉아 있는 것 같았다. 텔레비전 소리도 들렸다. 시어머니가 아이를 진정시키려고 한 것 같았다.

“그리고 전화하지 마. 내가 다시 할 때까지. 약속.”

세아가 말했다. 이 말을 하는 것 자체가 고통이었다. 마치 자기 손으로 아이와의 줄을 끊어내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해야만 했다. 도현이가 자꾸만 전화를 하면 강리우가 더 자극받을 테니까.

“누나… 어디 가?”

도현이가 물었다. 그 작은 목소리에서 비롯된 물음은 마치 깊은 우물 같았다. 세아는 한순간 모든 것을 멈추고 싶었다. 아이 앞에 나타나서 안아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내 목소리를 찾으러.”

세아가 대답했다. 그 순간, 그 말이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 자신도 잘 몰랐다. 하지만 직관적으로 알고 있었다. 자신은 지난 십 년간 누군가의 아내로, 누군가의 며느리로, 누군가의 어머니로만 살아왔다는 것을. 그리고 그 과정에서 자신의 목소리, 자신의 욕망, 자신의 존재감을 어딘가에 잃어버렸다는 것을.

“약속해. 다시 전화할 때까지 엄마 손을 놓지 마.”

세아가 다시 말했다.

“응. 약속.”

도현이가 대답했다. 그리고 세아는 통화를 끊었다.

화면이 검은색으로 돌아갔다. 배터리는 8%였다. 몇 시간 전만 해도 이 폰은 세상과의 유일한 연결고리였지만, 지금 그것은 무게 있는 돌덩어리처럼 느껴졌다.

세아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 앞에는 하늘이가 서 있었다.

## 2부: 친구의 얼굴

하늘이의 얼굴은 창백했다. 골목 위의 가로등 불빛 아래에서 그녀의 얼굴은 마치 유령처럼 보였다. 눈가는 붓고 입가는 굳어 있었다. 세아와 하늘이가 만난 지는 6개월이었다. 헬스장에서 만난 두 여자. 처음엔 아무 것도 아닌 관계였다. 마시는 물의 온도가 다를 정도의 거리감. 하지만 지난 몇 달간, 그들은 서로의 아픔을 들으며 가까워졌다. 하늘이도 남편의 폭력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어 하던 여자였다. 아직 벗어나지는 못했지만.

“세아, 넌 지금…”

하늘이가 시작했다. 하지만 말을 잇지 못했다. 마치 자신이 세아를 더 이상 말릴 수 없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는 것처럼, 그녀의 입은 다시 닫혔다.

세아의 눈이 하늘이와 만났다. 친구의 얼굴에서 읽을 수 있는 것들이 있었다. 두려움. 그리고 이해. 그리고 동시에 자신의 결정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무기력함.

세아는 다시 핸드폰을 들었다. 아직도 도현이의 울음소리가 귓가에 맴돌고 있었다. 그녀는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공기는 차갑고 쓸쓸했다. 10월 말의 밤이었다. 강남역 근처 골목의 밤. 이 골목에는 많은 사람들의 비밀이 숨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세아의 세계는 매우 작았다. 아들, 그리고 그 아들을 데려간 남편. 그것이 전부였다.

“강리우가 어디 있는지 알아?”

세아가 물었다. 자신의 목소리가 이렇게 차분할 수 있다는 것이 신기했다. 마치 다른 사람이 말하고 있는 것처럼 들렸다.

“응. 알아.”

하늘이가 대답했다. 그녀는 어제 강리우의 친구를 통해 정보를 얻었다고 했었다. 그것도 세아를 위해서.

“어디?”

세아가 다시 물었다.

하늘이는 한숨을 쉬었다. 그것은 깊고 긴 숨이었다. 마치 자신이 말하려는 것이 돌이킬 수 없는 무언가를 시작하게 될 것임을 알고 있는 숨처럼.

“한강변. 합정역 근처. 있는 어떤 호텔 로비에. 그곳에서 밤새 있다고 했어. 주로 그 호텔 바에서.”

하늘이가 말했다.

세아의 머리 속이 맑아졌다. 마치 흐린 물이 한순간에 투명해지는 것처럼. 한강변. 합정역 근처. 그곳은 서울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 중 하나였다. 낮에는 강변의 산책로가 있고, 밤에는 불빛이 반짝이는 곳이었다. 그런데 그 아름다운 곳에 강리우가 있다니. 마치 세상의 아름다움과 추함이 같은 장소에서 공존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세아는 걸었다. 골목의 끝을 향해. 그곳에는 하늘이의 차가 있을 것이었다. 회색 현대 쏘나타. 그 차는 지난 두 주간 세아의 도피처였다. 차 안에서 세아는 자신이 언제 떠날지, 어떻게 살아갈지를 생각했다. 차 안에서 세아는 울었다.

“세아!”

뒤에서 하늘이가 불렀다. 그의 목소리에는 애절함이 있었다.

하지만 세아는 돌아서지 않았다. 자신이 돌아서면, 자신이 멈추면, 무언가가 영구적으로 깨질 거라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돌아설 수 없는 선이 있다. 그리고 세아는 지금 그 선 위에 서 있었다.

## 3부: 밤의 도시

차의 엔진이 울렸다. 하늘이가 운전석에 앉았고, 세아는 옆자리에 앉았다. 엔진음은 깊고 낮았다. 마치 동물의 울음소리 같았다.

“만나면 뭐 할 거야?”

하늘이가 물었다. 차가 골목을 빠져나오면서.

세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자신도 몰랐기 때문이다. 그저 가야 한다는 것, 그리고 만나야 한다는 것만 알았다. 그 이후의 것들은 모두 미지의 영역이었다.

창밖으로 강남의 밤이 흘러갔다. 불빛들, 사람들, 삶들. 모두 계속되고 있었다. 저 카페에서는 누군가가 연애를 고백하고 있을 것이고, 저 식당에서는 누군가가 사업 실패를 슬퍼하고 있을 것이고, 저 아파트의 한 방에서는 누군가가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있을 것이었다.

세아의 삶도 계속되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 다른 속도로. 다른 방향으로. 그 이전의 속도는 타인이 정해준 속도였다. 남편의 모욕, 시어머니의 지적, 사회의 기대. 그 모든 것들이 만들어낸 속도로 그녀는 달려왔다. 하지만 지금, 이 차 안에서, 세아는 처음으로 자신의 속도를 느끼고 있었다.

강남역을 지나, 신논현역을 지나, 압구정역을 지나 한남대교 방향으로 향했다. 차창 밖으로 한강이 보였다. 밤의 한강은 검은색이었다. 그 위에 불빛이 반짝였다. 대교의 불빛들, 한강 공원의 불빛들, 그리고 양쪽 강변의 건물 불빛들. 그것들이 검은 물 위에 그림자처럼 떨어져 있었다.

“세아.”

하늘이가 말했다.

“응?”

“만약 강리우가 자살한다고 하면?”

그것은 가장 무서운 질문이었다. 세아의 손이 떨렸다. 손가락이 타닥타닥 차의 문짝을 두드렸다.

“그럼… 도현이가 어떻게 되지?”

세아가 중얼거렸다. 그녀의 목소리는 매우 작았다.

“도현이는 할머니가 있어. 시어머니도 아이를 사랑해. 그리고 넌 있어. 넌 엄마야.”

하늘이가 말했다.

세아는 창밖을 바라봤다. 한강이 더 가까워지고 있었다. 차는 합정역 방향으로 향하고 있었다.

“난 알아. 그걸 알아. 하지만…”

세아가 말했다.

“하지만?”

“하지만 강리우가 자살하면, 도현이는 그걸 기억할 거야. 평생. 아빠가 엄마 때문에 죽었다고 생각할 거야.”

세아의 목소리는 떨렸다.

“그건 사실이 아니야. 그건 강리우가 선택한 거야. 강리우의 책임이야.”

하늘이가 말했다.

“알아. 머리로는 알아. 하지만 마음은…”

세아가 말을 멈췄다.

차는 합정역 근처의 호텔 앞에 정차했다. 그것은 강변의 고급스러운 호텔이었다. 화려한 조명, 우아한 외관, 그리고 그 안에 강리우가 있다.

## 4부: 호텔 로비

세아는 차에서 내렸다. 밤공기가 차갑게 얼굴을 스쳤다. 강 근처라 그런지 공기에는 습기가 있었다. 그리고 무언가 이질적인 냄새가 있었다. 콘크리트, 녹슨 철, 그리고 무언가 타버린 냄새.

호텔 로비의 문이 자동으로 열렸다. 따뜻한 공기가 나왔다. 로비는 매우 깨끗했다. 대리석 바닥, 반짝이는 샹들리에, 그리고 몇몇 손님들이 소파에 앉아 있었다.

세아는 천천히 걸었다. 그녀의 발걸음은 매우 조용했다. 마치 유령처럼. 그 과정에서 그녀는 자신의 심장음을 들을 수 있었다. 두근두근. 두근두근. 마치 드럼처럼.

호텔 바는 로비 옆에 있었다. 그 안에는 불이 어둡게 켜져 있었다. 몇 명의 사람들이 술을 마시고 있었다. 그리고 그 중에 한 명이 강리우였다.

강리우는 혼자 앉아 있었다. 위스키 잔을 들고. 그의 얼굴은 초췌했다. 며칠을 제대로 자지 못한 것 같았다. 눈가는 까맣고, 수염은 길게 자라나 있었다. 그리고 그의 손은 여전히 떨리고 있었다.

세아의 발걸음이 멈췄다. 강리우가 느꼈다. 그의 눈이 올라왔다. 그리고 세아를 봤다.

“세아?”

강리우가 중얼거렸다. 마치 환각을 보는 것처럼.

세아는 그의 앞에 앉았다. 아무 말도 없이. 그저 그를 바라봤다.

“도현이는?”

강리우가 물었다.

“할머니 집에. 안전해.”

세아가 말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하지만 그 아래에는 분노, 두려움, 그리고 결연함이 있었다.

강리우는 위스키 잔을 들었다. 그리고 마셨다. 그의 목이 꿀렁했다.

“난 자살할 거야. 넌 날 막을 수 없어. 아무도 날 막을 수 없어.”

강리우가 말했다.

“넌 할 거야. 하지만 난 널 막지 않을 거야. 넌 네 삶을 선택해야 해. 그게 넌 할 수 있는 유일한 책임이야. 넌 도현이를 상처 입혔으니까. 그래서 이제 넌 살아야 해. 그리고 그 삶 속에서 넌 매 순간 도현이를 생각해야 해. 그게 넌 할 수 있는 유일한 속죄야.”

세아가 말했다.

강리우의 손이 더 심하게 떨렸다.

“날 죽이고 싶어? 넌 날 죽이고 싶겠지?”

강리우가 물었다.

“아니. 난 널 죽이고 싶지 않아. 난 내가 죽었다고 생각했어. 그래서 너한테 도현이를 줬어. 하지만 지금 난 깨어났어. 난 살아 있어. 그리고 난 살아갈 거야. 너와 상관없이. 너의 죽음과도, 너의 삶과도 상관없이.”

세아가 말했다.

그 순간, 무언가가 깨졌다. 강리우의 얼굴에서 무언가가. 그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그리고 그는 울었다. 성인 남자가 호텔 바에서, 낯선 사람들 앞에서 울었다.

세아는 그를 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느꼈다. 그가 이제 그만할 거라는 것을. 그의 손이 놓일 거라는 것을. 그의 목소리가 멈출 거라는 것을.

“도현이를 할머니한테 돌려줄래?”

세아가 물었다.

강리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 5부: 돌아가는 길

세아는 차로 돌아갔다. 하늘이는 운전석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끝났어?”

하늘이가 물었다.

“응. 끝났어.”

세아가 대답했다.

차는 다시 움직였다. 한강을 지나, 강남으로 향했다. 그리고 시어머니 집으로.

그 밤, 세아는 도현이를 안아줬다. 아이는 여전히 울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 그것은 다른 울음이었다. 안도의 울음. 그리고 어쩌면 이해의 울음.

그리고 세아는 자신의 목소리를 찾았다. 그것은 강리우의 것도, 시어머니의 것도, 사회의 것도 아닌, 자신만의 목소리였다.

밤은 계속되었다. 그리고 불꽃은 여전히 타오르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 그 불꽃은 세아의 것이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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