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172화: 엄마의 침묵
병원 복도는 형광등 아래에서 흰색이었다. 아니, 정확히는 흰색이 아니라 그 이상의 무언가였다. 마치 색이 모두 빨려나간 공간. 마치 여기에는 감정을 담을 수 있는 어떤 색도 남아 있지 않은 것처럼. 세아는 엘리베이터 앞에 서 있었다. 손가락이 버튼을 누르고 있었지만, 정신은 아직도 하늘의 타투숍에 남아 있었다. 가슴 위에 새겨진 따뜻함. 자신의 이름이 피부 위에 영구적으로 기록되었다는 것. 나세아. 그 이름. 그 존재.
엘리베이터가 내려왔다. 문이 열렸다. 세아는 들어갔다. 혼자였다. 이 시간대에는 병원도 조용했다. 오후 다섯 시. 방문객들도 줄어들고, 의료진도 바뀌는 시간. 세계가 숨을 고르는 순간. 세아는 5층 버튼을 눌렀다. 엄마 병실이 있는 층. 손가락이 흔들렸다. 이제 쯤이면 손가락이 안정적이어야 했는데, 여전히 흔들렸다. 마치 자신의 신체가 자신을 배반하고 있는 것처럼.
엘리베이터가 올라갔다. 세아는 거울 같은 엘리베이터 벽을 봤다. 자신의 모습이 비쳤다. 얼굴이 마르고 눈이 움푹 들어가 있었다. 언제부터 이렇게 됐을까. 자신이 자신이 아닌 것처럼 보이는 얼굴. 거울 속 여자는 세아를 바라보고 있었지만, 세아는 그 여자가 누구인지 알 수 없었다.
5층에 도착했다. 문이 열렸다. 세아는 나갔다. 복도는 더욱 조용했다. 오직 의료기구의 삑—삑 소리와 누군가의 신음이 들렸다. 고통의 소리. 누군가의 고통이. 세아는 복도를 따라 걸었다. 1번 병실, 2번 병실, 3번 병실. 숫자들이 증가했다. 마치 시간이 증가하는 것처럼. 마치 고통도 증가하는 것처럼.
517번 병실. 엄마 병실. 세아는 문 앞에 섰다. 손이 노크할 준비를 했지만, 움직이지 않았다. 마치 자신의 손이 이미 죽어 있는 것처럼. 마치 자신의 신체가 더 이상 자신의 명령을 받지 않는 것처럼.
“들어와.”
엄마의 목소리가 문을 통해 들렸다. 명령이 아니라 그냥 무심한 음성. 마치 누군가 다른 사람의 목소리를 기대하고 있었던 것처럼. 마치 세아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던 것처럼.
세아는 문을 열었다. 병실 안은 어두웠다. 불을 다 켜지 않은 상태. 창문으로 들어오는 저녁 햇빛만으로 밝혀져 있었다. 황금색 빛. 한국 병원에서 가장 서글픈 빛의 종류. 엄마가 침대에 누워 있었다. 점적 주사가 팔에 꽂혀 있었고, 심전도 기계가 옆에서 정기적으로 울음을 내고 있었다. 삑—삑. 삑—삑. 엄마의 심장이 여전히 뛰고 있다는 증거. 엄마가 여전히 이 세상에 있다는 증거.
“앉아.”
엄마가 말했다. 목소리가 약했다. 마치 자신의 목소리가 신체에서 떠나갈 준비를 하고 있는 것처럼. 마치 엄마도 천천히 사라지고 있는 것처럼.
세아는 의자에 앉았다. 침대 옆의 의자. 이 의자에 앉아 있는 동안 얼마나 많은 시간이 흘렀을까. 얼마나 많은 말이 나와야 했을까. 얼마나 많은 눈물이 흘렀어야 했을까.
“도현이가…”
세아가 말을 시작했다.
“도현이는 집에 있어.”
엄마가 말을 끊었다. 목소리에는 책망이 없었다. 그것이 더 끔찍했다. 책망이 있으면 뭔가 말할 여지가 생기는데, 이 차갑고 무심한 톤은 더 이상 말할 것이 없다는 신호였다.
“엄마, 미안해.”
세아가 말했다.
엄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세아를 바라봤다. 그 눈은 세아가 기억하는 엄마의 눈이 아니었다. 마치 누군가 다른 사람의 눈을 빌려 온 것처럼. 마치 엄마의 영혼이 이미 떠나가고 신체만 남아 있는 것처럼.
“너는 뭐가 미안한 거야?”
엄마가 물었다.
그것은 가장 어려운 질문이었다. 세아는 입을 열었다가 다시 닫았다. 여러 번. 뭐가 미안한가. 엄마가 아파서? 자신 때문에? 강리우를 만났던 일? 도현이를 이용했던 일? 자신의 삶 전체?
“전부다.”
세아가 마침내 말했다.
엄마는 한숨을 내쉬었다. 깊은 숨. 마치 자신의 마지막 숨인 것처럼. 그리고 그것이 아마 거의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세아의 뇌를 스쳤다. 엄마가 죽을 수도 있다. 지금. 여기서. 세아 앞에서.
“세아. 너는 그 사람이 누군지 알아?”
엄마가 물었다.
“누구?”
세아가 물었다. 하지만 이미 알고 있었다. 강리우. 그 이름.
“강리우.”
엄마가 말했다. 마치 독약을 삼키는 것처럼 천천히. 마치 그 이름이 자신의 입 안에서 독처럼 작용하는 것처럼.
“아, 그… 그냥…”
세아가 말했다.
“그냥이 아니야. 그 사람은 너 같은 사람을 먹이로 삼는 사람이야.”
엄마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약한 목소리지만, 그 안에는 힘이 있었다. 마치 생의 마지막 힘을 다 쏟아서 말하는 것처럼.
“엄마…”
“넌 왜 들으려고 하지 않아? 내가 뭐라고 했는데? 그 사람한테 가지 말라고. 그 사람은…”
엄마가 말을 마치지 못했다. 기침이 나왔다. 심한 기침. 마치 자신의 폐를 토해낼 것 같은 기침. 세아는 몸을 일으켰다. 엄마에게 물을 건네려고 했지만, 엄마가 손을 흔들었다.
“괜찮아. 앉아.”
엄마가 기침을 멈춘 후 말했다.
세아는 다시 앉았다. 침대 옆의 의자. 여기서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자신은 여기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엄마를 낫게 할 수도 없고, 자신의 잘못을 되돌릴 수도 없고, 시간을 거꾸로 돌릴 수도 없었다.
“그 사람이…”
엄마가 다시 말을 시작했다. 목소리는 더 약해졌다.
“뭐?”
세아가 물었다.
“그 사람이 나한테 와.”
엄마가 말했다.
세아의 심장이 멈췄다. 마치 누군가가 자신의 가슴을 잡아 짜는 것처럼.
“뭐? 언제?”
“어제. 너를 찾아서. 너가 어디 있냐고.”
엄마가 말했다.
“엄마가 뭐라고 했어?”
세아가 물었다. 목소리가 떨렸다.
“말을 안 했지. 뭐라고 말할 수 있겠어. 그 사람한테 뭐라고 말해? 내 딸이 자살하려고 하냐고?”
엄마의 목소리가 부서졌다. 마치 옛 도자기가 떨어져서 깨지는 소리처럼. 마치 이 말을 하면서 엄마 자신도 함께 깨지는 것처럼.
세아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강리우가 엄마를 찾아갔다. 자신을 찾아가서 엄마를 괴롭혔다. 그리고 엄마가 쓰러졌다. 그 사실들이 선형으로 연결되었다. 마치 화학 반응처럼. 마치 누군가가 일부러 일으킨 반응처럼.
“세아. 들어. 그 사람은 너를 사랑하는 게 아니야.”
엄마가 말했다.
“그럼 뭐야?”
세아가 물었다.
“중독. 소유. 그런 거야.”
엄마가 말했다.
세아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하지만 자신이 뭐라고 반박할 수 있을까. 강리우를 사랑한다고? 그것도 거짓이었다. 세아는 강리우를 사랑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강리우를 떠날 수도 없었다. 마치 자신이 중력의 영역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처럼. 마치 자신이 이미 중독되어 있는 것처럼.
“네가 뭔가를 해야 돼.”
엄마가 말했다.
“뭘?”
세아가 물었다.
“그 사람을 떠나. 완전히. 끝내.”
엄마가 말했다.
“엄마…”
“아니. 더 이상 엄마 말을 안 들으려고 하지 마. 넌 들었니? 내가 뭐라고 했는데?”
엄마의 목소리가 더 높아졌다. 의료진이 나타날 정도로. 하지만 세아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자신이 엄마에게 말해야 할 것이 있었지만, 그것을 말할 수 없었다. 강리우를 만났다. 어제 밤. 카페에서. 그리고 그곳에서 무엇이 일어났는지는… 세아도 정확히 알 수 없었다.
“응.”
세아가 대답했다.
“진짜로?”
엄마가 물었다. 마치 세아가 정말로 약속을 지킬 수 있는지 의심하는 것처럼.
“응.”
세아가 다시 대답했다.
거짓이었다. 하지만 진실이기도 했다. 세아는 강리우를 떠나고 싶었다. 하지만 동시에 그럴 수 없었다. 마치 자신이 두 개의 상반된 힘에 의해 동시에 당겨지고 있는 것처럼.
엄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천천히 눈을 감았다. 마치 세아를 보는 것만으로도 너무 힘든 것처럼. 마치 자신의 딸을 바라보는 것이 자신의 마지막 힘까지 소모하는 것처럼.
“가.”
엄마가 눈을 감은 채로 말했다.
“뭐?”
세아가 물었다.
“가. 그리고 생각해. 넌 뭐가 되고 싶은 거야?”
엄마가 말했다.
그것은 가장 어려운 질문이었다. 세아는 답할 수 없었다. 자신이 뭐가 되고 싶은지. 자신이 누가 되고 싶은지. 그런 것들은 이미 포기한 지 오래였다. 자신은 그냥 살아남는 것만 생각했다. 그다음은 없었다.
세아는 침대에서 일어났다. 엄마는 여전히 눈을 감은 채였다. 마치 세아의 존재를 더 이상 인정하고 싶지 않은 것처럼. 세아는 병실을 나갔다. 복도는 여전히 조용했다. 의료기구의 삑—삑 소리만 들렸다. 누군가의 생명을 재는 소리. 누군가의 시간을 세는 소리.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하지만 누르지 않았다. 대신 창문으로 나갔다. 병원의 옥상이 아니라 복도의 창문. 서울이 보였다. 밤이 오고 있었다. 마치 누군가가 천천히 조명을 끄는 것처럼. 마치 세상이 천천히 사라지는 것처럼.
핸드폰이 울렸다. 하늘이었다. 네 번째 전화. 세아는 받지 않았다. 하늘에게 뭐라고 말할 것인가. 엄마가 쓰러졌다? 이미 알 것이다. 강리우가 엄마를 찾아갔다? 그것도 뭐라고 말할 수 없었다.
대신 세아는 핸드폰 화면을 켰다. 메시지 앱. 강리우와의 대화. 어제 밤 메시지들이 남아 있었다.
“만날래?” (강리우)
“어디?” (세아)
“카페. 강남역 근처.” (강리우)
“몇 시?” (세아)
“자정 전에.” (강리우)
그리고 그 이후로는 아무 메시지도 없었다. 세아는 카페에 갔다. 강리우는 이미 와 있었다.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손이 떨리고 있었다. 세아도 앉았다. 둘 다 말을 하지 않았다. 오래 동안. 마치 침묵이 언어인 것처럼. 마치 말하지 않는 것이 유일한 진실인 것처럼.
그리고 그 다음은?
세아는 기억할 수 없었다. 마치 자신의 뇌가 그 부분을 의도적으로 삭제한 것처럼. 마치 어떤 보호 메커니즘이 작동해서 그 기억들을 감춘 것처럼.
핸드폰에 또 다른 메시지가 왔다. 알 수 없는 번호였다.
“세아. 나야. 병원에서 만날래?”
강리우였다.
세아의 손가락이 화면을 스크롤했다. 자동으로. 생각하지 않고. 마치 자신의 손이 이미 여러 번 한 행동을 반복하는 것처럼. 병원 주소를 검색했다. 강리우가 어느 병원인지는 알려주지 않았지만, 세아는 알았다. 마치 자신이 이미 알고 있었던 것처럼. 마치 자신의 뇌가 이미 그 정보를 가지고 있었던 것처럼.
엘리베이터를 눌렀다. 내려가는 방향. 밖으로 나가는 방향. 강리우를 만나는 방향.
창밖으로 서울이 보였다. 밤의 서울. 모든 불이 켜진 서울. 하지만 세아에게는 모든 것이 어두웠다. 마치 자신의 눈이 이미 어둠에 적응해버린 것처럼. 마치 자신이 이미 빛을 볼 수 없는 상태가 된 것처럼.
엘리베이터가 1층에 도착했다. 문이 열렸다.
세아는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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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병원의 밤, 그리고 선택
## 1부: 깨어남
세아의 눈이 떠졌을 때, 천장이 처음 보인 것은 아니었다. 이미 몇 번을 반복한 이 천장을, 이 회색빛의 병실 천장을. 그녀의 의식은 천천히, 마치 물 속에서 떠오르는 것처럼 돌아왔다.
엄마의 얼굴이 먼저 떠올랐다. 창백한 얼굴. 코에 산소 튜브가 꽂힌 얼굴. 그 얼굴은 여전히 세아를 보지 않고 있었다. 눈을 감은 채로. 마치 눈을 뜨는 것만으로도 큰 용기가 필요한 것처럼.
세아는 침대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관절이 삑삑 소리를 냈다. 오래 누워 있었다는 증거.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엄마가 여전히 깨어나지 않았다는 사실뿐이었다.
“엄마.” 세아가 속삭였다. 목소리가 나왔는지도 확실하지 않았다. 마치 자신의 목에 무언가 걸려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공포, 아니면 죄책감. 둘 다일 수도 있었다.
엄마는 반응하지 않았다. 호흡만 계속되었다. 의료기구에 의해 보조되는 그 기계적인 호흡. 세아는 그 소리를 들으면서, 자신이 뭔가 말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엄마에게 뭔가 설명해야 한다고. 하지만 무엇을 말해야 할지 몰랐다.
‘엄마, 내가… 내가 잘못했어요.’
입술이 움직였지만 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대신 눈물이 나왔다. 그것도 예상 밖이었다. 세아는 오래전부터 울지 않았다. 울 수 있는 여유가 없었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감정이 방해가 되었기 때문이다.
언제부터였을까. 언제부터 자신은 이렇게 되었을까. 꿈이라는 것. 희망이라는 것. 그런 것들은 이미 포기한 지 오래였다. 자신은 그냥 살아남는 것만 생각했다. 그다음은 없었다. 그다음은 항상 공백이었다.
세아는 엄마의 손을 잡으려고 했다. 하지만 손이 움직이지 않았다. 마치 자신의 팔이 다른 누군가의 팔인 것처럼. 마치 자신의 몸이 이미 자신의 것이 아닌 것처럼.
결국 손을 내렸다. 침대 옆 의자에서 일어났다. 다리가 떨렸다. 얼마나 앉아 있었던 걸까. 시간감각이 완전히 무너져 있었다.
## 2부: 복도의 소음
병실의 문을 열었을 때, 복도의 소리가 밀려들어왔다. 아니, 사실은 복도도 조용했다. 병원은 항상 조용했다. 특히 밤에는. 하지만 그 조용함이 더 크게 느껴졌다.
의료기구의 삑—삑 소리. 누군가의 생명을 재는 소리. 누군가의 시간을 세는 소리. 세아는 그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 규칙적인 리듬. 그 끝없는 반복. 마치 세상의 맥박처럼.
복도에는 거의 아무도 없었다. 밤 11시쯤이었나. 의사들은 사라졌고, 간호사들만 가끔 지나갔다. 세아가 지나갈 때, 누군가가 그녀를 쳐다봤다. 하지만 세아는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그 눈빛 속에는 질문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질문에 답하고 싶지 않았다.
복도를 따라 걸었다. 발소리도 작았다. 신발이 바닥에 닿는 소리조차 최소화하려는 듯이. 마치 자신이 없는 것처럼 행동하고 싶었다. 마치 자신의 존재를 지워버리고 싶었다.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버튼 위에 손가락을 올렸다. 하지만 누르지 않았다. 뭔가가 나를 멈추게 했다. 직감. 아니면 공포.
대신 창문으로 다가갔다. 병원의 옥상이 아니라 복도의 창문. 강화유리로 된 그 창문. 그 창 너머로 서울이 보였다.
밤이 오고 있었다. 아니, 이미 와 있었다. 서울은 불빛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 무수한 창문들. 각각의 창문 뒤에 있는 누군가의 삶. 누군가의 고통. 누군가의 희망.
세아는 자신의 얼굴을 창에 비쳤다. 거기에는 낯선 여자가 있었다. 창백한 얼굴. 공허한 눈. 누구인가. 자신인가. 아니면 누군가 다른 사람인가.
‘나는 누구인가.’
그 질문은 이미 오래되었다. 중고등학교 때 철학 선생님이 던지던 질문. ‘너는 누구인가?’ 하지만 세아는 그 답을 찾지 못했다. 찾을 수도 없었다. 왜냐하면 자신은 이미 누군가가 되기를 멈췄기 때문이다.
## 3부: 핸드폰의 울음
핸드폰이 울렸다.
세아는 그 소리에 몸을 떨었다. 마치 누군가가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를 들은 것처럼. 마치 자신이 도망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것처럼.
화면을 봤다. ‘하늘’이라고 적혀 있었다. 하늘. 자신의 친구. 아니, 친구였던 사람. 지금도 친구인지는 모르겠지만.
네 번째 전화였다. 세아는 센 것이다. 무의식적으로. 첫 번째 전화. 두 번째 전화. 세 번째 전화. 그리고 지금, 네 번째.
받지 않았다.
대신 핸드폰 화면을 켰다. 메시지 앱. 강리우와의 대화. 그 이름만으로도 가슴이 철렁했다. 강리우. 그 사람. 그 사람이 무슨 짓을 했는지, 세아는 알고 있었다. 아니, 부분적으로는 알고 있었다.
어제 밤 메시지들.
“만날래?” (강리우)
세아는 그 메시지를 다시 읽었다. 몇 번을 읽었는지 모를 정도로. 그 메시지에 숨겨진 의도가 뭐였을까. 단순한 만남인가. 아니면 뭔가 다른 거였나.
“어디?” (세아)
자신이 이렇게 답했었다. 무심하게. 의심하지 않고.
“카페. 강남역 근처.” (강리우)
강남역 근처. 서울의 심장부. 밤 11시를 넘어선 시간에. 왜 그곳이었을까. 왜 그 시간이었을까.
“몇 시?” (세아)
“자정 전에.” (강리우)
자정 전에. 그 메시지를 받았을 때, 세아는 뭔가 불길한 감정을 느꼈을까. 아니면 그냥 무감각했을까.
그리고 그 이후로는 아무 메시지도 없었다.
세아는 메시지를 내렸다. 통화 기록을 봤다. 어제 밤 11시 47분. 강리우와의 통화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12시 34분에 끝났다. 47분간의 통화. 거의 1시간에 가까운 시간.
그 시간에 뭐가 일어났을까.
세아는 기억하려고 했다. 하지만 기억이 나오지 않았다. 마치 자신의 뇌가 그 부분을 의도적으로 삭제한 것처럼. 마치 어떤 보호 메커니즘이 작동해서 그 기억들을 감춘 것처럼.
‘카페에 도착했어. 강리우가 이미 와 있었어.’
그것까지는 기억했다. 테이블에 앉아 있던 강리우. 손이 떨리고 있던 강리우. 그의 얼굴은 창백했다. 마치 자신도 세아의 엄마처럼 중환자실에 있어야 할 것처럼.
‘우리가 앉았어. 둘 다 말을 하지 않았어.’
그것도 맞다. 오래 동안. 몇 분이었나. 10분? 20분?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마치 침묵이 언어인 것처럼. 마치 말하지 않는 것이 유일한 진실인 것처럼.
그 다음은?
그 다음은 없었다. 검은색. 완전한 공백. 그 다음에 뭐가 일어났는지 세아는 알 수 없었다.
핸드폰이 또 울렸다. 이번에는 문자였다.
화면을 봤다. 알 수 없는 번호. 하지만 번호만 봐도 누군지 알았다.
“세아. 나야. 병원에서 만날래?”
강리우였다.
## 4부: 기억의 조각
세아의 손가락이 화면을 스크롤했다. 자동으로. 생각하지 않고. 마치 자신의 손이 이미 여러 번 한 행동을 반복하는 것처럼.
병원을 검색했다. 강리우가 어느 병원인지는 알려주지 않았지만, 세아는 알았다. 마치 자신이 이미 알고 있었던 것처럼. 마치 자신의 뇌가 이미 그 정보를 가지고 있었던 것처럼.
‘한양 대학교 병원. 강동점.’
주소가 떴다. 거리는 15분이었다. 택시로. 버스로는 30분. 걷는다면 1시간.
세아는 전화를 거는 대신 메시지를 썼다.
“OK. 몇 시에?”
답장이 즉시 왔다.
“1시간 뒤. 응급실 근처 카페.”
응급실 근처 카페. 그곳이 뭔가를 의미하는 건가. 강리우가 뭔가 말하고 싶은 건가.
세아는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병실로 돌아가야 했다. 아니,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가야 했다. 엄마의 옆에서. 엄마를 지켜야 했다.
병실로 돌아갔을 때, 엄마는 여전히 깨어나지 않았다. 호흡만 계속되었다. 그 규칙적인 기계음.
세아는 엄마의 손을 잡았다. 이번에는 손이 움직였다. 따뜻한 손. 살아 있는 손.
“엄마, 내가… 내가 나갔다 올게.”
목소리가 떨렸다. 엄마는 듣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세아는 말을 계속했다.
“강리우를 만나야 해. 뭔가… 뭔가 해결해야 할 게 있어.”
세아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이번에는 자신도 눈물이 나는 것을 느꼈다. 따뜻한 액체. 뜨거운 감정.
‘내가 엄마를 버리는 건가. 이 시간에. 엄마가 이런 상태인데.’
그 생각이 자신을 짓눌렀다. 마치 누군가가 자신의 가슴을 누르고 있는 것처럼. 마치 자신이 숨을 쉴 수 없는 것처럼.
하지만 세아는 일어섰다. 손을 놓았다. 병실을 나갔다.
## 5부: 서울의 밤
엘리베이터를 눌렀다. 내려가는 방향. 밖으로 나가는 방향. 강리우를 만나는 방향.
엘리베이터가 내려오면서, 창밖으로 서울이 보였다. 밤의 서울. 모든 불이 켜진 서울. 아파트의 불빛. 자동차의 불빛. 도로의 불빛.
하지만 세아에게는 모든 것이 어두웠다. 마치 자신의 눈이 이미 어둠에 적응해버린 것처럼. 마치 자신이 이미 빛을 볼 수 없는 상태가 된 것처럼.
엘리베이터 안에서, 세아는 자신의 얼굴을 거울에 비쳤다. 여전히 낯선 여자였다. 누군가 다른 사람처럼 보였다.
‘나는 누가 되었을까. 어떻게 이렇게 되었을까.’
그 질문에 답할 수 없었다. 마치 자신의 뇌가 그 답을 거부하는 것처럼.
엘리베이터가 1층에 도착했다. 문이 열렸다.
세아는 나갔다.
병원의 로비는 밝았다. 너무 밝았다. 형광등 아래에서, 세아는 더욱 창백해 보였다. 마치 유령처럼.
응급실 쪽으로 가는 길에, 간호사가 세아를 잡았다.
“혹시 환자 가족이세요? 밤 11시 이후는 방문이…”
“네, 곧 올게요.” 세아가 빠르게 말했다. 거짓말을 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이미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
병원 밖으로 나왔다. 밤공기가 차가웠다. 9월이지만, 밤은 이미 가을이었다. 마치 계절도 빠르게 지나가는 것처럼. 마치 시간도 자신을 버리고 가는 것처럼.
택시를 탔다. 운전사는 세아를 보지 않았다. 그냥 목적지를 듣고 출발했다.
차 안에서, 세아는 핸드폰을 다시 봤다. 강리우의 메시지. ‘1시간 뒤. 응급실 근처 카페.’
‘왜 응급실인가. 왜 꼭 거기인가.’
그 질문에 대한 답이 이미 세아의 마음 속에 있었다. 하지만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차가 강남역 근처에 도착했을 때, 세아는 손가락이 떨리는 것을 느꼈다. 마치 자신의 몸이 뭔가를 알고 있는 것처럼. 마치 자신의 뇌보다 자신의 몸이 먼저 무서워하는 것처럼.
카페로 들어갔다. 밤 11시 45분. 강리우는 아직 오지 않았다.
세아는 창가 자리에 앉았다. 밖을 봤다. 거리는 여전히 사람들로 가득했다. 젊은이들. 연인들. 친구들. 모두 누군가와 함께 있었다. 세아를 제외하고.
‘내가 혼자인 건가. 아니면 누군가와 함께인데도 혼자인 건가.’
그 질문도 이미 오래되었다. 답은 없었다. 아니, 답은 하나였다. 혼자다. 그것이 답이었다.
강리우가 들어왔다. 10분 뒤에. 세아는 그를 봤을 때, 다시 한 번 충격을 받았다. 그의 얼굴. 그의 눈. 뭔가가 완전히 부서져 있었다. 마치 자신의 영혼이 빠져나간 것처럼.
강리우가 세아의 대면에 앉았다. 둘 다 말을 하지 않았다. 오래 동안.
## 6부: 침묵
카페의 음악이 흘러나왔다. 재즈 음악. 누군가의 슬픈 색소폰 소리. 세상의 모든 슬픔이 담겨 있는 그 소리.
“세아.” 강리우가 먼저 입을 열었다. 목소리가 나왔다. 하지만 그것이 강리우의 목소리인지 확실하지 않았다. 마치 누군가 다른 사람이 강리우의 몸을 빌려 말하는 것처럼.
“응…”
“내가… 내가 너한테 뭔가를 말해야 해.”
세아의 가슴이 철렁했다. 그 말. 그 목소리. 그 톤. 모든 것이 절망적이었다.
“뭐… 뭔데?”
“너 엄마… 너 엄마가 왜 입원했는지… 알고 싶어?”
세아의 숨이 멎었다. 엄마가 왜 입원했는지. 그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뇌경색. 뇌졸중. 의사들이 말한 그 의학적 용어들.
“왜… 왜 묻는데?”
“그건… 그건 네가 한 거야.”
단어들이 떨어졌다. 마치 칼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