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아닌 것을 위해 불탄 소녀 – 제155화: 도현이의 분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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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55화: 도현이의 분노

도현이는 말을 잇지 못했다. 입을 열었다가 닫았다. 그 과정이 두 번, 세 번 반복되었다. 세아는 남동생의 얼굴에서 뭔가가 부서지는 것을 봤다. 아직 17살인 그의 얼굴에서 마지막 남은 어린 것들이 무너지고 있었다. 심장 모니터의 규칙적인 비프음이 배경음악처럼 흐르는 이 병실에서, 그의 목소리는 자신도 처음 듣는 톤으로 나왔다.

“누나는 자기가 뭔지 알아? 누나는 자기가 누구인지 아는 거야?”

질문이라기보다는 고발이었다. 세아는 그 말을 받아냈다. 맞다. 자신은 몰랐다. 병실을 나가기 전까지는 자신이 누구인지 몰랐다. 지금도 여전히 모른다. 다만 그것을 인정하는 것이 이렇게 어려울 줄은 몰랐다.

도현이가 일어났다. 의자를 뒤로 밀어내며. 그 소리가 컸다. 이 조용한 병실에서는 마치 비명처럼 들렸다.

“누나는 지금 뭐 하는 거야? 정말. 엄마가 이 지경인데, 누나는 자기 남자한테 가 있고, 엄마는 밤새 누나를 찾아다니다가 쓰러져. 그리고 누나는 지금 와서 ‘아 내가 몰랐어’ 이러고? 그게 진짜 누나 할 말이야?”

세아는 대답할 수 없었다. 대답할 말이 없었다. 도현이가 말하는 것이 모두 맞았기 때문이다. 엄마는 밤새 자신을 찾아다녔다. 편의점에도 가봤다고 했다. 하늘이한테도 전화했다고 했다. 그리고 자신은 어디에 있었는가. 강리우와 만나고 있었다. 또 다시. 그 남자와.

“도현아. 미안해.”

세아의 목소리는 가는 실처럼 가늘었다. 그것이 자신의 목소리일 리가 없었다. 누군가 다른 사람의 목소리가 자신의 입을 통해 나오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미안하면 뭐해? 엄마가 쓰러졌잖아. 의사가 뭐라고 했어? 스트레스성 부정맥이라고. 뭔지 알아? 엄마 심장이 불규칙적으로 뛰는 거야. 스트레스 때문에. 누나 때문에.”

도현이의 목소리가 떨렸다. 이제는 분노보다 절망이 더 큰 감정이 되어 있었다. 세아는 자신의 남동생이 울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눈물을 흘리지는 않았지만, 목소리가 그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내가… 내가 뭘 어떻게 해야 하는데?”

세아가 물었다. 그것은 도현이에게 묻는 것이 아니라, 자신 자신에게 묻는 것이었다. 자신의 존재 자체에 묻는 것이었다.

도현이는 침대를 봤다. 엄마가 여전히 자고 있었다. 호흡이 얕아 보였다. 마치 물 속에서 숨을 쉬고 있는 것처럼.

“누나는… 누나는 지금 엄마한테 뭐라고 할 거야? 엄마가 깰 때? 엄마가 또 어떤 말씀을 하시려고 할 때?”

세아는 답하지 못했다.

“엄마는 자기가 누나를 잘못 키웠다고 생각하셨던 거 같아. 그래서 지금 모든 걸 말씀하시는 거 같아. 자기가 실패했다고 생각하셨던 거 같아. 하지만 누나… 누나가 지금 하는 짓들을 보면, 엄마가 뭘 잘못했는지 알겠어.”

그 말이 세아의 가슴에 박혔다. 마치 칼처럼. 도현이가 의도적으로 상처를 주려고 한 것은 아니겠지만, 그 말들이 이미 상처 입은 것들을 더 깊게 파고들었다.

“강리우 그 남자. 누나는 그 남자가 뭔지 몰라? 그 남자가 누나를 뭘 하려던 건지 몰라?”

도현이의 목소리가 더 커졌다. 조용히 하려고 노력하지만, 감정이 그를 압도하고 있었다.

“누나 친구 하늘이가 뭐라고 했는지 알아? 하늘이가 누나더러 그 남자 손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했어. 하늘이가 누나더러 그 남자가 독이라고 했어. 그런데 누나는?”

“도현아.”

세아가 말했다. 그것은 제지였다. 하지만 도현이는 멈추지 않았다.

“누나는 계속 그 남자 쪽으로 가. 마치 불나방처럼. 그리고 엄마는 그걸 봐. 엄마가 얼마나 절망했을지 생각한 적 있어? 엄마가 자신의 딸이 자살하려고 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도현이의 목소리가 끝났다. 그 마지막 문장이 병실의 공기를 채웠다. 자살하려고 하는 것처럼. 그것이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 세아는 알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이미 알고 있었다.

병실이 조용해졌다. 오직 심장 모니터의 비프음만 계속되었다. 규칙적이고, 기계적이고, 생명을 증명하는 그 소리만.

세아는 자신의 손을 봤다. 떨리고 있었다. 마치 강리우의 손처럼. 마치 엄마의 손처럼. 이 가족의 모든 손이 떨리고 있었다. 누군가는 병 때문에, 누군가는 분노 때문에, 누군가는 죄책감 때문에.

창문을 통해 서울의 밤이 보였다. 병원이 위치한 곳이 높았기 때문에, 서울의 불빛들이 별처럼 흩어져 있었다. 그 불빛들 중 하나가 자신의 편의점인가. 다른 하나가 강리우의 오피스인가. 또 다른 하나가 하늘이의 타투샵인가. 서울은 크고, 그 크기 속에서 자신은 너무 작았다. 그리고 그 작은 자신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상처 입히고 있었는지를 지금 깨달았다.

도현이가 의자에 다시 앉았다. 무릎을 꿇은 것이 아니라, 그냥 내려앉은 것이었다. 마치 자신의 다리가 더 이상 자신을 지탱할 수 없다는 것을 아는 것처럼.

“누나가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아? 나는 누나가 그 남자를 사랑한다고 생각해. 근데 그게… 그게 진짜 사랑일까? 아니면 누나가 자기를 파괴하고 싶은 건 아닐까?”

그 질문에 세아는 대답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자신도 그것을 모르기 때문이었다. 강리우를 사랑하는가. 그러면 자신은 왜 그 남자와 함께 있을 때 더 깊이 죽어가는 느낌을 받는가. 왜 자신의 목이 더 메어오는가. 왜 자신의 불이 더 빨리 꺼지는 것 같은가.

“내가… 내가 강리우를 만나지 말아야겠다.”

세아가 말했다. 그것은 약속이 아니라, 그저 문장이었다. 공기 중으로 떨어진 말들. 그것이 의미를 가지는지 아닌지는 알 수 없었다.

도현이는 그 말을 들었지만,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자신의 휴대폰을 다시 들었다. 화면을 켰다. 시간은 오전 6시 47분이었다. 병원의 복도에서는 이미 아침 순회 의사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간호사들이 약을 나르고 있었다. 새로운 하루가 시작되고 있었다.

“엄마가 깨시면, 누나는 뭐라고 할 거야?”

도현이의 질문이 다시 나왔다. 이번에는 분노가 없었다. 대신 깊은 피로가 있었다. 그리고 그 피로 속에는 절망이 있었다.

세아는 모른다. 엄마가 깰 때 자신이 무엇을 말할 것인지. 자신이 해야 할 말이 있는지 아닌지도. 자신이 이 상황에서 말할 수 있는 말이 있는지도.

병실의 형광등이 떨렸다. 마치 자신의 손처럼. 마치 자신의 존재 전체처럼.


아침의 햇빛이 창문을 통해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 햇빛은 차갑고 명확했다. 밤의 어둠이 주는 모호함이 없었다. 모든 것이 명확하게 드러났다. 엄마의 창백한 얼굴, 도현이의 피로한 눈빛, 그리고 자신의 손에 깊이 패인 죄책감.

세아는 병실을 나가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나가는 것이 아니라, 도망치는 것이었다. 도현이는 그것을 알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막지 않았다. 아마도 자신도 더 이상 누나를 막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일 것이다.

복도는 길었다. 그리고 그 복도의 끝에는 계단이 있었다. 엘리베이터가 아니라 계단을 선택했다. 자신이 느낀 무게를 몸으로 감지하기 위해. 한 발 한 발 내려갈 때마다, 자신이 얼마나 많은 것을 짊어지고 있는지를 알기 위해.

1층 로비에 도착했을 때, 햇빛이 눈을 부셨다. 아침이었다. 새로운 하루였다. 하지만 세아는 그 새로운 하루가 어떤 의미가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자신의 삶이 여전히 밤 속에 있는데, 세상만 계속 밝아지고 있었다.

휴대폰이 울렸다. 강리우였다.

세아는 그 전화를 받지 않았다. 대신 그것을 내려놓았다. 마치 뜨거운 것을 떨어뜨리듯이.

그 다음 전화는 하늘이였다.

“세아. 너 어디야? 엄마가 입원했대고. 진짜?”

하늘이의 목소리는 급했다. 그리고 그 급함 속에는 진심의 걱정이 있었다. 세아는 그 걱정을 받으면서 자신이 얼마나 이 친구를 상처 입혔는지를 다시 한 번 깨달았다.

“응. 맞아.”

세아가 대답했다. 그 짧은 대답이 모든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넌 지금 뭐 하는 거야?”

“모르겠어. 그냥… 여기서 나가고 싶어.”

병원에서 나갔다. 병원 앞의 횡단보도를 건너갔다. 아침 출근 인파가 흐르고 있었다. 모두들 자신의 목적지를 향해 움직이고 있었다. 하지만 세아는 자신이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강리우가 또 전화했다. 이번에는 받아야 할 것 같았다. 마치 자신이 이미 그 남자에게 빚을 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에.

“여보세요?”

전화 너머에서 강리우의 숨소리가 들렸다. 그는 숨을 쉬기도 고된 것처럼 들렸다.

“세아. 어디야? 나 너 봐야 해. 지금.”

“안 돼. 도현이 말이… 엄마가…”

세아는 말을 끝내지 못했다. 자신이 무엇을 말하려고 했는지 자신도 모를 정도였다.

“무슨 일 있었어? 뭐 있었어? 말해 봐.”

강리우의 목소리가 더 급해졌다. 하지만 그것은 세아를 향한 관심이 아니라, 자신의 필요에 대한 것처럼 들렸다. 마치 자신이 세아를 필요로 한다는 것이 아니라, 세아가 자신을 필요로 해야 한다는 것처럼.

세아는 전화를 끊었다. 아주 천천히. 마치 자신이 어떤 것을 끝내고 있다는 것을 느끼기 위해.

그리고 하늘이에게 전화했다.

“하늘아. 미안해.”

“뭐가 미안해? 지금 어디야? 내가 가 줄까?”

“타투샵. 가도 돼?”

“당연하지. 지금 와. 너 밥 먹어?”

세아는 밥을 먹지 않았다. 이틀을 먹지 않았다. 아마도 그보다 더 오래 먹지 않았을 수도 있다. 자신의 몸이 언제부터 음식을 거부했는지 알 수 없었다.

“아니.”

“그럼 올 때 편의점 들러. 삼각김밥 사 와. 그리고 핫팩도. 너 또 손이 차갑겠지?”

하늘이의 목소리에는 세아를 아는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친밀함이 있었다. 도현이는 세아의 형제였지만, 하늘이는 세아의 거울이었다. 세아가 누구인지를 가장 정확하게 아는 사람이었다.

세아는 그 길로 편의점으로 향했다. GS25. 자신이 일하던 그 편의점이 아니라, 길을 건너편의 다른 편의점. 익숙하지만 낯선 곳. 그 곳에서 삼각김밥을 샀다. 그리고 핫팩도.

그리고 홍대로 향했다. 골목을 돌고, 또 골목을 돌고. 하늘이의 타투샵이 있는 지하 방향으로. 그 어두운 계단을 내려가면서, 세아는 자신이 얼마나 깊게 내려가고 있는지를 느꼈다. 밝은 세상에서 어두운 곳으로. 자신의 답답한 마음과 같이.

타투샵의 문을 열었을 때, 하늘이는 이미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손에는 따뜻한 음료가 들려 있었다.

“와. 너 진짜 좀 봐.”

하늘이가 세아의 얼굴을 봤다. 그 눈빛에는 심각한 걱정이 가득 차 있었다.

“엄마가 쓰러졌어. 스트레스 때문에. 그리고… 아버지가 없었어.”

세아가 말했다. 모든 것을 한 문장으로 압축해서. 마치 그렇게 하면 그것들이 덜 무거워질 것 같았다.

하늘이는 세아를 안았다. 말 없이. 그저 안았다. 그 따뜻함 속에서, 세아는 자신이 얼마나 춥고 있었는지를 깨달았다.

“내가… 강리우를 만나면 안 될 것 같아.”

세아가 말했다.

“응. 그래. 그게 맞아.”

하늘이가 대답했다. 그리고 그 대답은 모든 것을 해결하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세아가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했다.


병원으로 돌아가는 길. 세아는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돌아가야 한다는 것은 알았다. 엄마가 깰 때까지는 아무것도 끝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도현이의 분노가 정당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가장 중요하게, 자신이 누군가를 사랑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실제로는 자신을 파괴하는 것일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았다.

병실의 문을 열었을 때, 엄마는 여전히 자고 있었다. 도현이는 창문을 통해 바깥을 보고 있었다. 세아는 자신의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침묵이 다시 병실을 채웠다.

하지만 이번 침묵은 다른 것이었다. 도망치는 침묵이 아니라, 견디는 침묵이었다. 그리고 그 견디는 침묵 속에서, 세아는 자신이 처음으로 누군가의 곁에 머물러 있다는 것을 느꼈다.

# 확장된 화: 깊은 곳으로의 하강

## 1부: 전화

휴대폰의 화면이 밝아졌을 때, 세아는 거리의 한 모퉁이에 서 있었다. 사람들이 자신을 지나쳐 가는데, 그들은 모두 목적지가 있는 사람들처럼 보였다. 하지만 세아는 목적지가 없었다. 며칠을 떠돌아다니며 시간을 낭비했다. 밤에는 PC방에, 낮에는 찜질방에, 그 사이사이에는 어디론가 계속 걸어다니며.

“당연하지. 지금 와. 너 밥 먹어?”

하늘이의 목소리는 명령이면서도 질문이었다. 세아는 그 음성 속에 담긴 모든 것을 알아챘다. 걱정, 친밀함, 그리고 자신을 아는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그 특별한 톤. 세아의 귀에는 따뜻했지만, 동시에 그 따뜻함이 자신의 얼어붙은 심장을 녹이려는 시도처럼 느껴져 두려웠다.

세아는 밥을 먹지 않았다. 이틀을 먹지 않았다. 아마도 그보다 더 오래 먹지 않았을 수도 있다. 자신의 몸이 언제부터 음식을 거부했는지 알 수 없었다. 마지막으로 뭔가를 먹은 때가 언제인지, 그 음식이 뭐였는지도 기억나지 않았다. 어쩌면 음식을 먹는 것 자체가 자신의 존재를 인정하는 행위라고 생각했을지도 몰랐다. 그리고 지금 세아는 자신의 존재를 인정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아니.”

세아의 목소리는 작았다. 마치 자신이 작아지고 싶은 것처럼, 어느 순간 완전히 사라져버리고 싶은 것처럼.

“그럼 올 때 편의점 들러. 삼각김밥 사 와. 그리고 핫팩도. 너 또 손이 차갑겠지?”

하늘이는 세아의 손이 차갑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세아가 말하지 않아도, 보이지 않아도. 그것이 바로 하늘이였다. 도현이는 세아의 형제였다. 같은 피를 나눈, 같은 집에서 자란, 법적으로도 형제인 도현이는 세아의 분노를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하늘이는 다신 달랐다. 하늘이는 세아의 거울이었다. 세아가 누구인지를 가장 정확하게 아는 사람이었다. 때로는 세아 자신보다 더 잘 아는 사람.

“응. 알겠어.”

세아가 대답했다. 전화는 끝났고, 세아는 다시 길 위에 서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방향이 있었다.

## 2부: 편의점

GS25로 향하는 길. 세아는 자신이 일하던 그 편의점을 피했다. 그곳에는 너무 많은 것들이 남아있었다. 자신이 계산대 뒤에서 받은 인사들, 손님들의 얼굴들, 그리고 그 모든 평범함 속에서 자신이 느꼈던 그 막연한 답답함. 대신 길을 건너편의 다른 편의점으로 향했다.

편의점의 자동문이 열릴 때, 실내의 따뜻함이 세아의 차가운 피부에 닿았다. 그 온도차로 인해 세아의 눈가가 따끔거렸다. 아니, 사실 눈가가 따끔거린 것은 온도 때문만은 아닐 수도 있었다.

편의점의 형광등 불빛은 너무 밝았다. 세아는 그 밝음이 싫었다. 마치 자신의 모든 것을 드러내는 것 같았다. 자신이 얼마나 초라한지, 얼마나 무너져 있는지, 얼마나 혼자인지. 세아는 빠르게 삼각김밥 코너로 향했다. 김밥, 참치, 해물… 세아는 아무 생각 없이 하나를 집어 들었다. 맛이 중요하지 않았다. 단지 하늘이가 시킨 것이 필요했을 뿐.

다음은 핫팩 코너. 겨울은 이미 한 달 전에 끝났는데, 편의점의 선반에는 여전히 핫팩이 남아있었다. 누군가는 여전히 손이 차가운 모양이었다. 또는 편의점은 언제나 겨울 같은 곳이었다. 형광등 불빛 아래서, 계산을 기다리는 상품들처럼.

세아는 계산대로 향했다. 점원은 20대 초반의 여자였다. 세아는 그 여자의 얼굴을 보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만약 자신의 눈과 마주친다면, 자신이 얼마나 부서진 상태인지 들킬 것 같았다.

“합계 4,200원입니다.”

점원의 목소리는 기계적이었다. 그것이 더 나았다. 그 기계적인 톤 속에는 판단이 없었다. 세아는 돈을 건넸고, 영수증을 받았고, 편의점을 나왔다.

## 3부: 하강

홍대로 향하는 길은 마치 자신의 내면으로 향하는 것 같았다. 골목을 돌고, 또 골목을 돌고. 세아는 자신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하늘이의 타투샵. 그곳은 지하에 있었다.

대로에서 골목으로, 골목에서 더 좁은 골목으로, 그리고 마침내 계단으로. 세아는 그 계단을 내려갔다. 한 발, 또 한 발. 마치 자신이 지하로 내려가는 것만큼, 자신의 마음도 함께 내려가는 것 같았다. 밝은 세상에서 어두운 곳으로. 햇빛이 닿는 곳에서 조명이 만들어낸 인공적인 밝음으로. 자신의 답답한 마음과 같이.

계단은 예상보다 길었다. 또는 자신이 내려오는 것이 예상보다 오래 걸렸다. 세아는 한 발 한 발 내려올 때마다, 자신이 누군가의 손길에서 멀어지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동시에 누군가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도 느꼈다.

계단의 끝. 타투샵의 문이 보였다. 검은색의 문. 그 위에는 영문으로 된 샵 이름이 쓰여있었다. 세아는 그 문을 열었다.

## 4부: 만남

타투샵 내부는 세아가 기억하는 대로였다. 어두웠지만, 어떤 이유에서는 밝았다. 벽에는 타투 디자인들이 붙어있었고, 구석에는 작업대가 있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의 중심에는 하늘이가 있었다.

“와. 너 진짜 좀 봐.”

하늘이가 세아의 얼굴을 봤다. 그 눈빛에는 심각한 걱정이 가득 차 있었다. 하늘이의 눈은 거울이었다. 그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은 세아가 보고 싶지 않은 것이었다. 창백한 얼굴, 초점이 맞지 않은 눈, 어깨까지 축 처진 몸. 그렇게 세아는 자신이 얼마나 무너져 있는지를 봤다.

하늘이의 손에는 따뜻한 음료가 들려 있었다. 종이컵에 담긴 그 음료는 김이 피어올랐다. 커피였을까, 아니면 초콜릿이었을까. 세아는 알 수 없었지만, 그것이 따뜻하다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엄마가 쓰러졌어. 스트레스 때문에. 그리고… 아버지가 없었어.”

세아가 말했다. 모든 것을 한 문장으로 압축해서. 엄마의 모습도, 도현이의 분노도, 아버지의 부재도, 그리고 그 모든 것으로부터 비롯된 자신의 죄책감도. 마치 그렇게 하면 그것들이 덜 무거워질 것 같았다. 마치 말 없이 지나가버린 것들이 되면, 자신이 책임지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하늘이는 세아를 안았다. 말 없이. 그저 안았다.

세아의 몸은 처음에는 경직되어 있었다. 누군가의 손길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위험했다. 누군가의 따뜻함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자신이 춥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었고, 그렇게 인정하는 순간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릴 것 같았다. 하지만 하늘이의 팔은 강했다. 거부할 수 없을 정도로 강했다.

그 따뜻함 속에서, 세아는 자신이 얼마나 춥고 있었는지를 깨달았다. 며칠간 밥을 먹지 않은 추위가 아니라, 영혼 깊숙한 곳에서부터 비어나오는 추위. 누군가로부터 사랑받지 못하고 있다는 그 추위.

“내가… 강리우를 만나면 안 될 것 같아.”

세아가 말했다. 하늘이의 팔 안에서, 목이 메었다. 강리우. 그 이름을 입 밖으로 꺼내기만 해도 세아의 가슴이 철렁했다. 하지만 지금 세아는 그 이름을 마주해야 했다. 그리고 그 이름과 함께 자신의 감정도 마주해야 했다.

“응. 그래. 그게 맞아.”

하늘이가 대답했다. 그 대답은 간단했다. 아무런 설득도, 위로도 아닌. 단지 세아의 결정을 인정하는 것. 그리고 그 인정이 바로 세아가 필요로 하던 것이었다.

“왜… 왜 나는 항상 잘못된 사람을 사랑하는 걸까?”

세아가 물었다. 하늘이에게가 아니라, 자신에게. 또는 우주에게. 또는 자신의 운명에게.

“그건 네가 사랑하는 방식이 잘못된 거 아니라, 너 자신을 사랑하는 방식이 잘못된 거야.”

하늘이가 말했다.

세아는 그 말의 의미를 깨달았다. 그리고 그 깨달음은 칼처럼 예리했다. 자신이 강리우를 사랑했던 방식은, 사실 자신을 파괴하는 방식이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던지고,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결국 자신의 모든 것을 잃게 만드는 방식.

## 5부: 귀환

병원으로 돌아가는 길. 지하철 안에서, 세아는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돌아가야 한다는 것은 알았다. 엄마가 깰 때까지는 아무것도 끝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도현이의 분노가 정당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가장 중요하게, 자신이 누군가를 사랑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실제로는 자신을 파괴하는 것일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았다.

지하철의 의자는 딱딱했다. 밤 11시를 넘긴 시간. 승객들은 대부분 자신들의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들이었다. 모두가 어딘가로 돌아갈 곳이 있었다. 세아도 마찬가지였다. 병실. 그것이 지금 세아의 집이었다.

병실의 문을 열었을 때, 엄마는 여전히 자고 있었다. 얼굴이 창백했다. 마치 자신도 어딘가 깊은 곳으로 내려갔다가 돌아오지 못한 것처럼. 수액 줄이 엄마의 팔에 연결되어 있었다. 기계들이 엄마의 생명을 지키고 있었다.

도현이는 창문을 통해 바깥을 보고 있었다. 밤의 서울. 저 수많은 불빛들 너머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을 것이고, 그들 모두가 자신들의 방식대로 힘들어하고 있을 것이었다.

“엄마가 깼어?”

세아가 물었다.

도현이는 고개를 저었다.

“아직.”

그것이 도현이의 대답이었다. 도현이는 여전히 창밖을 보고 있었다. 그 뒷모습은 세아에게 낯설었다. 자신의 형은 이렇게 약해 보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지금 그는 약해 보였다. 그리고 그 약함이 도현이를 더욱 진실한 사람으로 만들었다.

세아는 자신의 자리에 앉았다. 엄마 침대 옆의 의자. 그곳은 세아가 며칠을 앉아있던 자리였다. 그 의자는 이미 세아의 체온을 기억하고 있었다.

침묵이 다시 병실을 채웠다. 기계의 소리, 복도의 발자국 소리, 그리고 세아와 도현이의 숨소리. 그 모든 것이 섞여서 만들어낸 침묵.

하지만 이번 침묵은 다른 것이었다. 도망치는 침묵이 아니라, 견디는 침묵이었다. 함께 견디는 침묵이었다. 엄마가 깨어날 때까지, 아무리 오래 걸리더라도 함께 견디기로 한 침묵.

그 견디는 침묵 속에서, 세아는 자신이 처음으로 누군가의 곁에 머물러 있다는 것을 느꼈다. 도망치지 않고, 숨지 않고, 사라지지 않고. 단지 거기 있는 것. 그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그리고 동시에 얼마나 필요한 일인지를 깨달으면서.

밤이 깊어갔다. 세아는 여전히 그 의자에 앉아있었다. 엄마의 손을 잡고. 그 손은 따뜻했다. 마치 아직도 세아를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그리고 마침내, 세아는 알았다. 자신이 사랑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자신이 지켜야 할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자신을 사랑하는 방법이 무엇인지.

**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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