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아닌 것을 위해 불탄 소녀 – 제149화: 남겨진 것들의 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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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49화: 남겨진 것들의 무게

도현이의 전화는 새벽 3시 47분에 다시 울렸다.

세아는 고시원의 좁은 침대에서 깨어 있었다. 깨어 있다는 표현이 맞는지도 모르겠다. 눈을 뜬 상태일 뿐, 깨어 있지는 않았다. 마치 물 위에 떠 있으면서도 익사하고 있는 사람처럼. 천장의 곰팡이 자국을 바라보고 있었다. 11월의 습기가 벽을 먹어가고 있었다. 곰팡이는 자신처럼 천천히 자라고 있었다. 아무도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천천히. 그리고 한 번 자라나면 제거하기 어려운 종류의 것들처럼.

휴대폰의 진동이 침대 옆 책상 위에서 울렸다. 도현이. 계속 도현이였다. 어제는 오후 2시부터 밤 11시까지 여섯 번. 오늘은 밤 10시부터 지금까지 여덟 번. 총 14번의 전화. 세아는 그것을 세고 있었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수를 세는 것이 자신을 진정시키는 유일한 방법이 되어 있었다.

그녀는 손을 들었다. 천천히. 침대 옆까지 팔을 뻗었다. 휴대폰을 집었다. 화면에는 도현이의 이름이 떠 있었다. 그리고 화면 아래에는 누적된 미답변 통화 기록이 빨간 숫자로 표시되어 있었다. 14. 그 숫자를 보자 세아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하지만 그 감각도 곧 사라졌다. 마치 파도가 밀려왔다가 빠져나가는 것처럼. 남겨진 것은 축축한 모래뿐이었다.

세아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대신 휴대폰을 다시 침대 위에 던졌다. 화면이 어두워졌다. 그리고 그 어두운 화면 속에서 자신의 얼굴이 반사되어 보였다. 낡은 거울처럼. 거기 있으면서도 없는 얼굴. 누군가의 딸이면서도 아닌 얼굴. 누군가의 누나이면서도 아닌 얼굴.

밤새 내려온 빗소리가 들렸다. 고시원의 얇은 창문을 통해, 벽을 통해, 천장을 통해 들렸다. 이 건물은 빗소리를 차단하지 못했다. 오히려 증폭시켰다. 마치 빗이 자신의 뼈를 두드리고 있는 것처럼. 그런데 그 소리가 싫지 않았다. 오히려 진정되었다. 빗소리는 자신의 침묵을 정당화해 주었다. 빗이 내리면 아무도 말을 걸 수 없다. 빗이 내리면 전화도 들리지 않는다. 아니, 들리지만 대답할 수 없다.

세아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곧 다시 떴다. 자는 것도, 깨어 있는 것도 모두 똑같은 상태였다. 하지만 한 가지는 다르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깨어 있을 때는 자신이 책임이 있다고 느낀다는 것. 도현이에게 답장하지 않은 책임. 엄마의 심장약을 챙기지 않은 책임. 자신의 목소리를 잃어버린 책임.

아침 6시 15분, 세아는 침대에서 일어났다.

동작은 기계적이었다. 다리를 내렸다. 발이 차가운 바닥에 닿았다. 몸을 일으켰다. 벽에 기대어 섰다. 고시원은 여전히 침묵으로 가득했다. 옆방의 누군가는 이미 나간 것 같았고, 아래층의 누군가는 여전히 자고 있는 것 같았다. 세아는 자신의 위치를 정확히 알 수 없었다. 깨어 있는 것도, 자고 있는 것도 아닌 그 중간 어딘가에.

거울 앞에 섰다. 작은 손거울이었다. 하늘이가 준 것이었다. 몇 년 전에. “넌 거울을 봐야 해. 계속 자신을 잊으면 안 돼.” 하늘이의 말이 떠올랐다. 하지만 거울 속의 자신은 누구인지 모르는 누군가였다. 창백한 얼굴. 검은 눈. 입술의 색깔이 바래 있었다.

세아는 손가락으로 자신의 입술을 만졌다. 아직 감각이 남아 있었다. 아주 약하지만. 마치 물 속에서 누군가를 만지는 것처럼. 그래서 더 외로웠다. 감각이 있다는 것은 아직 자신이 살아 있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살아 있다는 것은 계속 무언가를 느껴야 한다는 뜻이었다.

휴대폰이 울렸다. 다시. 도현이였다. 아침 6시 23분.

이번에는 세아가 받았다.

“누나?”

도현이의 목소리에는 놀라움과 안도가 섞여 있었다. 그리고 무언가 더 있었다. 분노. 아니, 절망에 가까운 감정.

“응.”

세아가 대답했다. 자신의 목소리가 낯설었다. 몇 주 동안 사용하지 않은 목소리. 마치 녹슨 악기처럼 떨렸다.

“뭐 했어? 왜 전화 안 받아? 엄마가 또 쓰러졌어. 응급차 타고 병원 갔어. 심장이 안 좋아진 거 같은데…”

도현이가 말을 멈추었다. 숨을 고르고 있었다. 울먹이고 있었다.

세아는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다. 말할 말이 없었다. 아니, 말이 있었지만 입에서 나오지 않았다. 강리우의 손가락들처럼. 움직이고 싶지만 움직일 수 없는 그런 상태.

“누나. 넌 뭐야? 진짜로. 엄마는 넌 공부한다고 서울에 보냈어. 그 형 때문에 공부도 못 하고 이래?”

도현이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지난 몇 달간 세아가 들은 것 중 가장 큰 목소리였다.

“미안해.”

세아가 말했다. 그것이 자신이 할 수 있는 유일한 말이었다. 진실도, 거짓도 아닌. 단지 습관처럼 나오는 말.

“미안하고?”

도현이가 웃었다. 하지만 그것은 웃음이 아니었다. 무너지는 소리였다. “누나가 뭐 때문에 저래? 내가 몰라? 그 형이 누나 힘들게 했다는 거. 그래서 누나가 사라진 거. 근데 누나가 사라지니까 엄마가 아프고, 엄마가 아프니까 내가 힘들어.”

도현이가 숨을 쉬었다. 그 숨소리가 아주 길었다.

“넌 나만 생각해. 엄마만 생각해. 근데 난? 난 뭐야? 누나의 동생이니까 누나 때문에 미안해야 해? 엄마의 아들이니까 엄마 때문에 걱정해야 해?”

세아는 그 말을 들으면서 무언가가 깨지는 소리를 들었다. 그것이 자신의 가슴 속인지, 휴대폰 신호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난…”

세아가 입을 열었다. 하지만 더 이상 말이 나오지 않았다.

“엄마 병원 주소 줄게. 왜냐면 넌 와야 해. 누나가 와야 엄마가 나아. 그게 우리 엄마야. 넌 몰랐나? 엄마는 넌 없으면 약도 안 듣는다고 했어.”

도현이가 주소를 읽어주었다. 번지수, 병원 이름, 병실 번호. 모든 것이 세아의 귀를 통해 들어왔다. 하지만 뇌에는 도달하지 않았다. 마치 물이 체를 통과하는 것처럼.

“알았어?”

세아는 대답했다. “응.”

“진짜?”

“응.”

도현이가 전화를 끊었다. 그 소리도 무언가가 끊어지는 소리였다. 줄이 끊어지는 소리. 또는 목이 조여지는 소리.

세아는 한동안 휴대폰을 들고 있었다. 전화는 이미 끝났는데도. 마치 도현이가 아직 어딘가에 있는 것처럼. 그 목소리가 여전히 흐르고 있는 것처럼.

아침 7시 10분, 세아는 샤워를 했다.

물은 차가웠다. 고시원의 온수 보일러는 오래전부터 고장 나 있었다. 하지만 세아는 온수를 틀지 않았다. 차가운 물이 필요했다. 그것이 자신을 깨우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차가운 물이 피부를 자극할 때, 자신이 아직 몸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샤워를 마친 후, 세아는 옷을 입었다. 검은색 긴팔 티셔츠. 회색 바지. 같은 옷들의 반복. 강리우가 싫어하던 색깔들. 회색과 검은색. “왜 자꾸 죽은 색깔을 입어?”라고 그가 물었었다. 하지만 지금 세아에게는 이 색깔들이 필요했다. 자신을 감추기 위해. 자신을 없애기 위해.

거울 앞에 다시 섰다. 긴 머리를 빗었다. 손가락이 머리를 빗으면서 얽혀 있던 매듭들을 풀었다. 그리고 그것을 보면서 세아는 깨달았다. 자신이 지난 몇 주간 자신의 몸을 얼마나 방치했는지.

손가락 사이에 머리카락이 끼어 있었다. 여러 가닥. 마치 자신이 조금씩 떨어져 나가고 있는 것처럼.

세아는 손을 멈추었다. 그리고 손가락 사이에 끼어 있던 머리카락을 바라봤다. 그것은 자신의 일부였다. 하지만 더 이상 자신의 일부가 아니었다. 떨어져 나간 것. 버려진 것. 또는 흘려버린 것.

아침 8시 30분, 세아는 집을 나갔다.

밖은 여전히 비가 오고 있었다. 아침 햇빛이 없었다. 대신 회색의 하늘. 회색의 공기. 마치 자신이 회색 색깔로 변하고 있는 것 같았다. 천천히. 아무도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지하철역으로 내려갔다. 강남역에서 2호선을 탔다. 병원의 주소는 서초구였다. 강남 남쪽. 자신이 가본 적이 없는 곳. 강리우와 있을 때도 강남은 항상 위쪽이었다. 신논현역, 압구정역. 그보다 아래로는 가지 않았다. 그보다 아래는 자신의 세계가 아니었다.

지하철에서 내린 후, 세아는 병원 방향을 물었다. 누군가가 손으로 가리켜 주었다. 세아는 그쪽으로 걸어갔다. 한 발, 한 발. 계단을 올랐다. 그리고 올라가면서 자신이 아주 천천히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마치 물 속에 있는 것처럼.

병원 로비는 밝았다. 형광등이 가득한 공간. 그곳에는 환자들과 보호자들이 앉아 있었다. 누군가는 울고 있었다. 누군가는 침묵하고 있었다. 누군가는 대기실에 누워 있었다.

세아는 안내데스크로 갔다. “507호 찾고 있어요.”

안내원이 엘리베이터를 가리켜 주었다. 5층. 세아는 엘리베이터에 탔다. 문이 닫혔다. 그리고 자신이 위로 올라가고 있을 때, 세아는 자신의 손가락을 봤다. 떨리지 않고 있었다. 강리우처럼. 아니, 강리우와는 다르게. 강리우의 손가락은 죄책감 때문에 떨렸지만, 자신의 손가락은 감정 때문에 떨리지 않았다. 감정이 없었다.

507호실의 문을 열었다.

엄마는 침대에 누워 있었다. 얼굴이 창백했다. 강리우보다도 창백했다. 마치 이미 다른 세계에 가 있는 것처럼. 도현이는 침대 옆의 의자에 앉아 있었다. 세아를 보는 순간, 도현이의 얼굴이 뭔가로 뒤덮였다. 분노? 안도? 슬픔? 모두인 것 같았다.

“누나.”

도현이가 말했다. 단 한 음절. 하지만 그것 속에 모든 것이 담겨 있었다.

세아는 엄마 침대 옆으로 갔다. 천천히. 엄마의 손을 봤다. 손등에는 수액이 연결되어 있었다. 투명한 튜브.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인공적인 것.

“엄마.”

세아가 말했다. 자신의 목소리가 부서져 있었다. 마치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은 악기처럼. 강리우의 목소리처럼.

엄마의 눈이 떨렸다. 천천히 뜨려고 했다.

그리고 그 순간, 세아는 무언가를 깨달았다. 엄마가 자신을 찾고 있었다는 것. 모든 이 시간 동안. 자신이 사라진 동안. 엄마가 자신을 찾고 있었다는 것. 그리고 자신을 찾지 못했을 때 몸이 아팠다는 것.

강리우가 자신을 구하려고 했던 것처럼, 자신도 누군가를 구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자신이 구할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 강리우를 구할 수 있는가? 엄마를 구할 수 있는가? 도현이를 구할 수 있는가?

아니면 자신이 먼저 자신을 구해야 하는가?

엄마의 눈이 완전히 떴다. 그리고 세아를 봤다. 세아는 그 눈 속에서 자신을 봤다. 창백한 딸. 사라졌던 딸. 돌아온 딸.

그리고 그 순간, 세아의 입에서 뭔가가 나왔다. 목소리가 아니었다. 눈물이었다. 뜨거운 물질. 자신의 몸에서 흘러내리는 뜨거운 것.

“미안해.”

세아가 다시 말했다. 이번에는 진짜로. 이번에는 자신의 목소리로. 강리우의 손가락처럼 떨리지 않는 목소리로.

“미안해. 정말로. 엄마.”

창밖으로는 여전히 빗이 내리고 있었다. 11월의 빗. 그것은 계속 내렸다. 아무도 멈추지 않는 한, 계속 내렸을 것이다. 마치 세아의 눈물처럼.

그리고 세아는 깨달았다. 자신이 지난 몇 주간 불을 붙이려고 했던 것이 무엇인지. 그것은 자신의 음악이 아니었다. 자신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그것은 자신을 태울 불이었다. 완전히 사라지기 위한 불이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엄마의 손을 잡으면서 세아는 알았다. 자신은 이미 충분히 태워졌다는 것을. 그리고 남겨진 것은 재가 아니라 뜨거운 심장이라는 것을. 꺼지지 않는 것. 계속 뛰는 것.

“누나, 엄마가 깼어.”

도현이가 말했다. 세아는 고개를 들었다. 엄마의 입이 움직이고 있었다. 아주 약하게. 마치 물 위에서 숨을 쉬려고 하는 것처럼.

“세아…”

엄마가 속삭였다. 자신의 이름을. 처음으로. 도현이의 엄마가 아니라. 강리우의 엄마가 아니라. 편의점의 누군가가 아니라. 자신이 누군가의 딸이라는 것을 상기시키는 목소리로.

세아는 엄마의 손을 더 꽉 잡았다. 그리고 그것이 자신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약속이라는 것을 알았다. 더 이상 사라지지 않겠다는 약속. 계속 여기 있겠다는 약속. 비록 불완전하고, 상처 입고, 태워졌지만, 계속 살겠다는 약속.

병실의 형광등이 환했다. 창밖의 빗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세아의 가슴이 아팠다. 오랫동안 느끼지 못했던 감각으로. 뜨겁게. 확실하게. 죽지 않은 것 같은 느낌으로.


5권 피날레 설정

이 화는 5권의 마지막(25화)이자, 6권의 문을 여는 장면이다. 세아가 강리우와의 독성적 관계에서 벗어나 가족으로 돌아가는 지점. 하지만 여기서 끝이 아니다. 다음 권에서는 새로운 갈등이 기다리고 있다.

6권을 향한 복선들:

1. 강리우의 소재: 세아가 버린 남자. 하지만 그는 어디에 있는가? 병원에서 나왔는가? 세아를 찾을 것인가?

2. 엄마의 건강: 심장 질환이 만성화되었다. 의료비는? 도현이의 학비는? 여전히 생존의 문제.

3. 세아의 목소리: 울음으로 되찾은 감정. 하지만 노래는? 음악은? 자신을 위한 불꽃은?

4. 하늘이의 부재: 왜 이 모든 시간 동안 하늘이는 나타나지 않았는가? 6권에서 재등장할 것인가?

5. 강민준 회장의 움직임: 1권에서 소개된 JYA의 회장.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 6권의 새로운 적인가?

: 5권을 마무리하면서 희미한 희망을 제시. 세아가 자신을 위해 불타기 시작하는 지점. 하지만 그 길은 여전히 어둡고 험할 것이라는 암시.

# 5권 피날레: 빗 속의 약속

## 1부: 11월의 빗

창밖으로는 여전히 빗이 내리고 있었다.

세아는 병실의 창가에 앉아서 그 빗을 바라보고 있었다. 11월의 빗. 가을이 겨울로 넘어가는 시점에 내리는, 차갑고 집요한 빗. 그것은 계속 내렸다. 이 병실에 들어온 지 3시간 전부터. 아니, 어쩌면 더 오래전부터. 마치 처음부터 내리고 있었던 것처럼, 멈출 줄 모르고.

*아무도 멈추지 않는 한, 계속 내렸을 것이다.*

세아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 빗이 자신의 눈물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자신이 더 이상 흘릴 수 없는 눈물. 그래서 하늘이 대신 흘리고 있는 것처럼. 자신의 감정을 대신 표현해주는 것처럼.

손등이 차가웠다. 병실의 에어컨 때문일까, 아니면 자신의 체온이 떨어진 것일까. 세아는 자신의 손을 들어다봤다. 손가락 끝이 창백했다. 마치 이미 죽어있는 것처럼. 하지만 손가락을 움직이면 반응했다. 아직 살아있다는 신호.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신호.

병실의 형광등은 너무 밝았다. 그 밝음이 오히려 모든 것을 드러내는 것 같았다. 침대 위의 엄마의 창백한 얼굴. 옆의 의자에 비스듬히 앉아있는 도현이의 지친 몸짓. 그리고 자신의 손등에 떨어진 빗소리의 그림자.

세아는 한숨을 쉬었다. 깊고 긴 한숨. 마치 자신의 몸 속에 있던 모든 것을 밖으로 내보내는 듯한.

“누나, 아무것도 안 해? 그냥 앉만 있어?”

도현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12살 소년의 목소리. 피곤함과 불안감이 섞여있는. 세아는 도현이를 바라봤다. 도현이는 자신의 손톱을 깨물고 있었다. 손톱이 거의 남아있지 않을 정도로.

“도현아. 손톱을 깨물지 마.”

세아가 말했다. 목소리가 자신의 것처럼 들리지 않았다. 누군가 다른 사람의 목소리처럼. 더 약하고, 더 부서지기 쉬운.

“그럼 뭐해? 엄마가 깼는데. 의사는 뭐라고 했어? 괜찮대?”

도현이가 물었다. 질문 속에는 자신의 불안감을 누나에게 내려놓으려는 간절함이 있었다. 누나가 모든 것을 해결해줄 것이라는 믿음. 세아는 그 믿음의 무게를 느꼈다. 자신이 이미 부러진 상태인데, 누가 누구를 지탱해야 하는지 혼란스러웠다.

“의사는… 다행이라고 했어. 뇌 손상은 없는 것 같대. 다만 심장이…”

세아는 말을 멈췄다. 심장이 뭐라고? 엄마의 심장은 이미 오래전부터 망가져있었다. 이번 발작은 그저 그 망가짐이 수면 위로 떠오른 것일 뿐. 더 이상 숨길 수 없는 것.

## 2부: 깨어남의 순간

“누나, 엄마가 깼어.”

도현이가 다시 말했다. 이번에는 더 크게. 마치 세아가 듣지 못했다고 생각하는 듯이. 세아는 고개를 들었다.

침대 위의 엄마가 움직이고 있었다.

아주 약하게. 마치 물 위에서 숨을 쉬려고 하는 것처럼. 눈꺼풀이 떨리고. 입이 미미하게 움직이고. 손가락이 침대보를 집으려고 하는 움직임.

세아의 심장이 멈췄다. 그리고 다시 뛰기 시작했다. 부정맥처럼. 아무 규칙 없이.

“엄마!”

도현이가 침대 가까이 달려갔다. 세아도 일어났다. 자신의 다리가 마비된 것처럼 느껴졌지만, 움직였다. 몸은 자신의 의지보다 먼저 반응했다. 엄마에게 가야 한다는 본능으로.

엄마의 눈이 천천히 떨어졌다. 초점이 맞지 않는 눈. 그 눈동자가 천장을 향해 있다가, 천천히 옆으로 돌아왔다. 세아를 향해.

“세아…”

엄마가 속삭였다.

목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약했다. 마치 먼 곳에서 부르는 것처럼. 하지만 그것은 분명히 자신의 이름이었다.

*세아.*

처음으로. 도현이의 누나가 아니라. 누군가의 엄마가 아니라. 편의점의 알바생이 아니라. 자신이 누군가의 딸이라는 것을 상기시키는 목소리로.

세아의 눈이 따뜻해졌다. 눈물이 맺혔다. 하지만 흘러내리지 않았다. 마치 자신의 눈도 깨어나지 못한 것처럼. 아직도 꿈속에 있는 것처럼.

“엄마… 나야. 세아야.”

세아가 말했다. 침대에 앉았다. 엄마의 손을 찾았다. 그 손은 차갑고 가늘었다. 마치 새의 발처럼. 그 손을 자신의 손으로 감쌌다.

“세아…”

엄마가 다시 속삭였다. 이번에는 더 명확하게. 초점이 맞아가는 눈으로. 세아를 보고 있었다. 정말로 세아를 보고 있었다.

“네, 엄마. 나 여기 있어. 도현이도 여기 있어.”

도현이가 엄마의 다른 쪽 손을 잡았다. 작은 손이 엄마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그 순간, 병실 안의 모든 것이 멈춘 것 같았다.

형광등의 윙윙거리는 소리. 복도에서 들리는 의료진의 발걸음. 엘리베이터의 벨 소리. 창밖의 빗소리. 모든 것이 배경이 되고, 오직 이 순간만 남았다.

“다행이야. 다행이야, 엄마.”

세아가 중얼거렸다. 자신에게 말하는 것인지, 엄마에게 말하는 것인지 분간이 안 됐다.

## 3부: 깨달음

그리고 그 순간, 세아는 깨달았다.

지난 몇 주간, 자신이 불을 붙이려고 했던 것이 무엇인지.

그것은 자신의 음악이 아니었다. 아니, 음악이 아니었다기보다는, 자신의 음악을 통해 뭔가를 하려고 했던 것이었다.

그것은 자신의 목소리도 아니었다. 목소리는 단지 도구였을 뿐이었다.

*그것은 자신을 태울 불이었다.*

완전히 사라지기 위한 불. 이 세상에서, 이 가족에서, 이 삶에서 완전히 증발해버리기 위한 불이었다.

세아의 손이 떨렸다. 엄마의 손을 잡은 채로. 자신이 얼마나 위험한 경계에 있었는지, 지금 깨닫고 있었다.

강리우와 함께라면, 자신은 계속 그 불을 붙이고 있었을 것이다. 계속 자신을 태웠을 것이다. 어쩌면 진짜로 꺼져버렸을지도.

그런데 지금, 이 순간, 엄마의 손을 잡고 있으면서 세아는 알았다.

*자신은 이미 충분히 태워졌다.*

가슴이 아팠던 그 모든 날들. 편의점에서 손가락을 까이고도 미소 지어야 했던 날들. 도현이의 밥을 사주기 위해 자신의 밥을 굶었던 날들. 강리우의 손이 자신의 팔을 집을 때마다 참아내야 했던 날들.

그 모든 것이 자신을 태웠다.

*그런데 남겨진 것은 재가 아니었다.*

세아는 자신의 가슴을 느껴봤다. 손가락이 엄마의 손에서 떨어지지 않은 채로. 자신의 가슴 속에서 뭔가가 뛰고 있었다. 뜨겁게. 확실하게.

*뜨거운 심장. 꺼지지 않는 것. 계속 뛰는 것.*

## 4부: 대화

의사가 들어왔다. 중년의 남자 의사. 얼굴에 피곤함이 묻어있었지만, 목소리는 확실했다.

“어머니, 깨셨군요. 다행입니다.”

의사가 엄마의 눈에 손전등을 비추며 말했다. 엄마는 눈을 깜빡였다. 의식이 명확했다.

“심장 발작이 맞습니다. 하지만 다행히 뇌 손상이나 심근 경색은 없는 것으로 보입니다. 다만, 심장의 상태가 좋지 않으니 안정이 필요합니다.”

의사의 설명이 계속되었다. 약물 치료. 정기적인 검사. 스트레스 관리. 식이 요법.

세아는 그 말들을 들으면서도, 자신의 마음은 다른 곳에 있었다. 엄마가 깼다는 사실. 엄마가 자신을 불렀다는 사실. 그것이 전부였다.

의사가 나가고, 간호사가 들어와 엄마의 혈압을 재었다. 도현이는 여전히 엄마의 손을 놓지 않고 있었다. 작은 손가락이 엄마의 손가락과 얽혀있었다.

“엄마, 무서웠어. 정말 무서웠어.”

도현이가 속삭였다. 12살 소년의 목소리에서 어린아이의 울음이 흘러나왔다.

“괜찮아, 우리 도현이. 엄마가 여기 있잖아.”

엄마가 말했다. 목소리가 조금씩 돌아오고 있었다. 여전히 약했지만, 확실했다.

“누나도 여기 있어?”

도현이가 세아를 돌아봤다. 세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말로 대답할 수 없었다. 목이 메인 것 같았다.

“그럼 됐어. 우리 셋이 다 여기 있으면 되는 거야.”

엄마가 말했다. 그것은 단순한 말이 아니었다. 약속이었다. 앞으로도 함께 있겠다는 약속.

세아는 엄마의 손을 더 꽉 잡았다.

## 5부: 불 타오르기

밤이 깊어갔다.

도현이는 침대 옆의 의자에서 자고 있었다. 아이는 피곤함에 못 이겨 깊이 잠들어 있었다. 아직도 엄마의 손을 놓지 않은 채로.

세아는 창가에 앉아있었다. 여전히 내리는 빗을 바라보고 있었다. 11월의 빗. 하지만 이제 그 빗은 차갑지 않게 느껴졌다. 오히려 부드러웠다. 마치 누군가가 자신을 어루만져주는 것처럼.

*지난 몇 주간 자신이 했던 것들을 생각해봤다.*

강리우를 따라다니며 자신의 자존심을 포기했던 일들. 음악으로 자신을 파괴하려고 했던 시도들. 자신을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만들려고 했던 노력들.

*모두 무너졌다.*

그리고 그것이 다행이었다.

세아는 자신의 손을 들어다봤다. 여전히 창백했지만, 따뜻했다. 엄마의 손을 만져서 그런 것일까.

병실의 시계가 밤 11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한 시간 더 있으면 자정이다. 새로운 날의 시작.

*새로운 날에는 뭐가 기다리고 있을까?*

세아는 그 질문이 무섭지 않았다. 오히려 궁금했다.

엄마의 의료비. 도현이의 학비. 자신의 음악. 그리고 강리우. 아직도 해결하지 못한 많은 문제들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지금 이 순간은. 엄마가 깼다. 도현이가 자신의 곁에 있다. 자신도 여기 있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 6부: 복선들의 그림자

창밖의 빗이 조금 약해지고 있었다. 마치 누군가가 수도꼭지를 천천히 닫고 있는 것처럼.

세아는 병실의 불을 껐다. 형광등의 밝음이 사라지고, 오직 복도의 불빛만 병실에 흘러들었다. 그 어두움이 좋았다. 어두움 속에서는 세상이 덜 복잡해 보였다.

*그런데 누가 강리우를 데려갔을까?*

갑자기 그 생각이 들었다. 마지막으로 강리우를 본 것은 언제였던가. 아, 그 날. 자신이 모든 것을 부인했던 날. 강리우가 자신을 때렸던 날. 그리고 자신이 도망쳤던 날.

강리우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 여전히 병원에 입원해있을까? 아니면 이미 나왔을까? 자신을 찾으려고 하고 있을까?

세아는 자신의 핸드폰을 들었다. 배터리가 거의 남아있지 않았다. 켜지지 않을 것 같았다. 하지만 켜졌다. 아주 약하게, 마치 마지막 숨을 쉬는 것처럼.

미수신 전화가 몇 개 있었다. 알 수 없는 번호들. 그리고 강리우의 번호가 5번.

세아의 손이 떨렸다.

*언제 전화했을까? 엄마가 쓰러지고 자신이 병원에 오고, 의식이 없는 와중에?*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도 강리우는 자신을 찾고 있을 것이다. 자신을 다시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

세아는 핸드폰을 끄려고 했다. 하지만 그 순간, 메시지 알림이 울렸다.

*“세아야. 난 포기 안 해. 넌 내 거야. 어디 있는지 알아낼 거야.”*

세아의 가슴이 철렁했다.

*강리우가 자신을 찾아올 것이다.*

병실의 어둠 속에서, 세아는 그것을 알았다. 엄마가 깼다고 해서 모든 것이 끝난 것은 아니라는 것을. 새로운 투쟁이 시작되려고 한다는 것을.

하지만 동시에, 세아는 무섭지 않았다.

*왜냐하면 자신은 이제 혼자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엄마가 있고. 도현이가 있고. 자신이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 안에 불이 있었다. 자신을 태우는 불이 아니라, 자신을 밝히는 불. 계속 뛰는 심장의 불.

## 7부: 새벽의 음악

밤이 더 깊어졌다.

도현이의 잠꼬대가 들렸다. “엄마… 밥…”

세아는 도현이의 머리를 쓸어줬다. 아이의 머리는 따뜻했다. 살아있다는 증거.

그리고 세아는 자신도 피곤한 것을 느꼈다. 3일을 거의 자지 않은 것 같았다. 그 3일 동안 자신은 강리우를 따라다니고, 음악을 하고, 자신을 파괴하려고 했다.

*이제 그것은 끝이었다.*

세아는 조용히 노래를 흥얼거렸다. 마음속으로.

*“나는 여기 있어. 나는 산다. 나는 계속 산다.”*

자신이 만든 가사는 아니었다. 어디선가 들은 말. 누군가의 노래. 하지만 지금은 자신의 노래처럼 들렸다.

엄마가 눈을 떴다. 깨어난 것일까, 아니면 계속 깨어있었던 것일까.

“세아… 노래하니?”

엄마가 속삭였다.

“네. 엄마.”

“좋다. 계속해.”

엄마가 말했다. 그리고 눈을 다시 감았다.

세아는 계속 노래했다. 마음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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