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아닌 것을 위해 불탄 소녀 – 제144화: 손가락의 약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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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44화: 손가락의 약속

세아는 강남역 8번 출구에 도착했을 때 이미 밤 11시였다. 엄마와의 통화는 30분 전에 끝났다. 엄마는 마지막에 “그 남자를 만나지 마”라고 반복했고, 세아는 “알겠어”라고 대답했다. 거짓이었다. 또는 진실이었다. 자신도 명확하게 알 수 없었다. 강남역의 지하 8층에서 올라오면서 세아는 자신의 손을 봤다. 손가락들이 3초마다 떨렸다. 규칙적이고 정확하게. 마치 누군가 자신의 손 안에 시계를 심어둔 것처럼.

강남의 밤은 홍대와 달랐다. 여기는 조용했다. 너무 조용해서 무서울 정도였다. 사람들은 있었지만, 모두가 목적지를 향해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아무도 거리를 거닐지 않았다. 아무도 그냥 서 있지 않았다. 모두가 정해진 장소로 정해진 시간에 도착해야 한다는 강박 속에 살고 있는 것 같았다. 강남이 그런 곳이었다. 세아는 강리우의 사무실 주소를 검색했다. JYA 엔터테인먼트 본사. 강남역에서 도보 10분. 그곳이 그의 일터였다. 하지만 이미 밤 11시였다. 사무실은 문을 닫았을 것이다.

세아는 강리우에게 문자를 보냈다.

“지금 강남역에 있어. 너 어디야?”

답장이 즉시 왔다. 너무 빨라서 마치 강리우가 자신의 문자만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느껴졌다.

“강남역 근처 카페에 있어. 10분 걸려.”

세아는 강리우가 제시한 카페를 찾아가기로 했다. 그곳은 강남역에서 한 블록 떨어진 조용한 골목에 있었다. 현대식 인테리어, 미니멀한 가구, 조용한 배경음악. 세아가 들어섰을 때 카페는 거의 텅 비어 있었다. 늦은 시간이었기 때문이었다. 창가 쪽에 누군가가 앉아 있었다. 강리우였다.

그는 정확히 10분 후에 도착했다.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또는 이미 그곳에 있었을 가능성도 있었다. 세아를 기다리면서. 자신의 휴대폰을 들었다 놨다를 반복하면서. 손가락을 떨리게 하면서.

“안녕.”

강리우가 말했다. 그 한 마디에는 몇 개월의 시간이 담겨 있었다. 재판. 침묵. 그리고 지금 이 순간. 세아는 강리우의 얼굴을 봤다. 판결이 난 후로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그는 더 늙어 보였다. 눈 밑의 다크서클이 더 진했다. 손가락들도 더 떨렸다. 마치 자신의 몸이 자신의 죄를 나타내고 있는 것처럼.

“너 왜 여기 있었어?”

세아가 물었다. 앉지 않은 채로.

“너를 기다리고 있었어.”

강리우가 대답했다. “도현이가 너한테 전화했다고 했어. 그리고 너 엄마도. 나는 너가 올 거라고 생각했어. 왜냐하면 너는 항상 그렇게 했으니까. 아무리 내가 잘못했어도 너는 나한테 왔어. 나한테 말해줄 거라고 생각했어.”

세아는 여전히 서 있었다. 강리우의 맞은편에 앉지 않았다. 그것이 자신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저항이었다. 앉지 않음으로써 자신이 여기에 머물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표현하는 것. 이것은 만남이 아니라 통과였다.

“엄마가 아버지 얘기를 했어.”

세아가 말했다. 자신도 왜 이 말을 먼저 꺼냈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입에서 나온 말은 되돌릴 수 없었다. 그것이 문장이 되었고, 그것이 공기 중을 떠다니게 되었고, 그것이 강리우의 귀에 도달했다.

강리우의 얼굴이 변했다. 마치 누군가 그의 얼굴에 손을 갖다댄 것처럼. 처음에는 동작을 멈추고, 그 다음에는 천천히 인식하게 되는 그런 표정. 그리고 그 다음에는 고통.

“어떻게… 그걸 알았어?”

강리우가 물었다.

“엄마가 말했어. 아버지가 엄마에게 했던 말들. 나를 구하겠다고. 엄마를 물에서 건져내겠다고. 그리고 그게 거짓이었다고. 엄마는 그 거짓 때문에 30년을 후회했대.”

세아의 목소리는 평탄했다. 감정이 실리지 않은 목소리. 그것이 더 무서웠다. 왜냐하면 그 평탄함 속에는 어떤 감정도 들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단지 사실만 있었다. 말 그대로의 사실들.

강리우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자신의 손을 봤다. 손가락들이 떨리고 있었다. 세아의 손가락처럼. 같은 간격으로. 같은 리듬으로. 마치 두 사람의 몸 안에 같은 시계가 있는 것처럼.

“너도 그렇게 했어, 그지?”

세아가 계속했다. “나를 구하겠다고 말했어. 내가 필요하다고 말했어. 그리고 나는 너를 믿었어. 왜냐하면 내가 너를 필요로 했으니까. 내가 누군가에게 구원받고 싶었으니까. 하지만 그건 거짓이었어. 너는 나를 구하지 않았어. 너는 너 자신을 구하려고 했어.”

강리우의 손이 더 떨렸다. 테이블 위에서 떨렸다. 그 떨림이 마치 신호처럼 느껴졌다. 고통의 신호. 인정의 신호.

“세아, 나는…”

강리우가 입을 열었지만,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것이 가장 진실한 순간이었다. 말을 할 수 없을 때가 가장 진실한 순간이라는 것을 세아는 알고 있었다. 언어는 거짓을 포장하는 방식이었으니까. 침묵만이 진실을 드러냈다.

“엄마가 나한테 물었어.”

세아가 계속했다. 강리우를 보지 않으면서. 카페의 창밖을 보면서. 강남의 밤을 보면서. 그 밤 속의 건물들과 자동차들과 사람들을 보면서. “너 지금 뭐하고 있는 거냐고. 그 남자 때문에 너 자신을 잃어가고 있다고. 그게 사랑이냐고. 그게 책임이냐고.”

“그건 사랑이야.”

강리우가 갑자기 말했다. 목소리가 떨렸다. “나는 너를 사랑해.”

“그건 거짓이야.”

세아가 대답했다. 차갑게. 정확하게. 마치 판사가 판결을 내리듯이. “넌 나를 사랑하지 않아. 넌 너 자신을 사랑해. 너는 내가 너를 필요로 했을 때 너 자신이 필요했던 거야. 내가 너를 구원하는 느낌을 원했던 거야. 그래서 넌 나를 구했어. 그리고 나는 고마워했어. 그리고 넌 그 고마움에 취했어. 하지만 그건 사랑이 아니야.”

강리우는 세아를 봤다. 처음으로. 눈을 마주쳤다. 그 눈 속에는 무언가가 죽어가고 있었다. 세아는 그것을 느낄 수 있었다. 무언가가 강리우의 눈 속에서 천천히 꺼져가고 있었다. 그의 희망. 그의 자기기만. 그의 거짓된 이야기. 모든 것이 꺼져가고 있었다.

“그래.”

강리우가 결국 말했다. 목소리가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았다. “너 말이 맞아. 나는 너를 사랑하지 않았어. 나는 나를 사랑했어. 내가 너를 통해서 나를 사랑했어. 그게 전부야.”

세아는 카페의 의자에 앉았다. 강리우의 맞은편에. 처음으로. 그리고 그 순간, 세아는 자신이 울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소리 없이. 음성 없이. 마치 자신의 몸이 자신의 의지와는 별개로 눈물을 흘리고 있는 것처럼.

“나도 내가 뭘 하는지 모르겠어.”

세아가 말했다. 눈물을 닦지 않으면서. “엄마가 말했어. 너를 만나지 말라고. 그게 처음으로 하는 부탁이라고. 그런데 나는 왔어. 왜?”

“모르겠어.”

강리우가 대답했다. 그것도 진실이었다. 그것도 인정이었다.

두 사람은 침묵 속에서 마주 앉았다. 카페의 배경음악이 흐르고 있었다. 피아노 음악이었다. 클래식. 아마도 쇼팽이었을 것이다. 강리우는 그 음악을 들으면서 손가락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테이블 위에서. 떨리는 손가락들로. 마치 자신이 직접 그 피아노를 연주하고 있는 것처럼. 하지만 손가락들은 떨렸다. 떨렸다. 떨렸다.

세아는 그 손가락들을 봤다. 그 떨림을 봤다. 그 떨림 속에 담긴 모든 것을 봤다. 죄책감. 후회. 절망. 그리고 그것이 모두가 아니라는 것도 봤다. 그 떨림 속에는 또 다른 것이 있었다. 무언가가 살아있다는 증거. 무언가가 아직도 느낀다는 증거. 강리우가 아직도 인간이라는 증거.

“너 지금 뭐 하는 거야?”

세아가 물었다. 강리우의 손가락들을 보면서.

“피아노를 연주하고 있어.”

강리우가 대답했다. 자조적인 웃음이 섞여 있었다. “내 손은 떨려. 항상. 아무것도 할 수 없어. 하지만 이 음악을 들으면 손가락이 움직이고 싶어져. 마치 내 손이 독립적인 의지를 가진 것처럼. 마치 내 손이 내 죄를 표현하려고 하는 것처럼.”

“너 판결이 났잖아.”

세아가 말했다. “3년. 판결문에 써 있었어. 3년.”

“응.”

강리우가 대답했다. “3년이면 충분해. 내 손이 다시 움직일 수 있을까? 모르겠어. 하지만 적어도 그 시간 동안 내가 뭘 했는지 생각할 수 있을 것 같아.”

세아는 강리우의 손을 봤다. 떨리는 손가락들. 그 떨림은 마치 신호였다. 마치 언어였다. 마치 울음이었다. 무성의 울음. 무음의 울음. 그리고 세아는 갑자기 깨달았다. 그것이 자신의 손이 떨렸던 이유라는 것을. 자신의 몸도 말하고 있었다는 것을. 자신의 손도 울고 있었다는 것을.

“엄마가 뭐라고 했는지 알아?”

세아가 물었다. 강리우의 손을 계속 보면서.

“뭐라고?”

“후회는 30년이라고. 엄마는 아버지 때문에 30년을 후회했대. 그리고 지금 엄마가 나한테 부탁했어. 너 때문에 그렇게 되지 말라고. 30년을 후회하지 말라고. 하지만 나는 이미 후회하고 있어.”

세아의 목소리가 흔들렸다. 처음으로. “나는 이미 너 때문에 몇 개월을 후회했어. 그리고 그게 30년이 될까봐 두려워. 그게 내 인생이 될까봐 두려워.”

강리우는 세아를 봤다. 눈물 흘리는 세아를. 그리고 그 순간, 강리우도 울기 시작했다. 소리 없이. 눈물만 흘렸다. 마치 자신의 몸이 자신의 죄를 표현하려는 것처럼.

“나는 너한테 뭐라고 말해야 할까?”

강리우가 물었다. 답을 원하지 않으면서. 단지 물었다. “미안해? 그건 너무 작아. 너무 무의미해. 내가 너한테 미안해라고 말할 자격이 있어? 나는 모르겠어. 하지만 나는 너한테 미안해. 진심으로.”

세아는 답하지 않았다. 대신 자신의 손을 봤다. 강리우의 손이 아니라. 자신의 손. 떨리고 있는 손. 3초마다. 규칙적으로. 마치 자신의 심장이 손가락 끝으로 전달되는 것처럼.

“우리가 뭘 해야 할까?”

세아가 물었다. 자신에게. 강리우에게. 누군가에게.

“나는 모르겠어.”

강리우가 대답했다. “하지만 나는 너한테 하나의 약속을 할 수 있어.”

“뭐?”

“나는 너를 다시 만나지 않을 거야. 너를 다시 접근하지 않을 거야. 너를 다시 부를 거나 문자할 거나 만날 거나 하지 않을 거야. 너는 나를 떠나면 되는 거야. 그리고 나는 여기에 남아있을 거야. 내 손이 떨릴 때마다 너를 생각할 거고. 그 떨림 속에서 내 죄를 느낄 거야. 그게 나의 형벌이야. 그리고 그게 맞아.”

세아는 강리우를 봤다. 마지막으로. 판결이 난 후로 마지막으로. 그가 어떤 모습인지를 기억하려고 하면서. 하지만 기억할 게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이미 죽어 있었다. 판결과 함께 죽었다. 그리고 지금 앉아 있는 것은 죽은 것의 그림자일 뿐이었다.

“알겠어.”

세아가 말했다. 일어났다. 강리우의 테이블에서 떨어졌다. 카페를 향해 걸었다. 출구를 향해. 그 길을 가면서 세아는 자신이 울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돌아보지 않았다. 강리우를 다시 보지 않았다. 왜냐하면 이미 모든 것이 끝났기 때문이었다. 완전하게. 확정적으로. 돌이킬 수 없게.

강리우는 세아가 떠난 후에도 손가락으로 피아노를 연주하고 있었다. 카페의 피아노 음악에 맞춰서. 떨리는 손가락으로. 그리고 그 떨림 속에는 더 이상 아무것도 없었다. 단지 반복만 있었다. 같은 패턴. 같은 리듬. 같은 절망.

세아가 강남역으로 돌아올 때, 그녀의 손은 여전히 떨리고 있었다. 3초마다. 규칙적으로. 마치 자신의 몸이 자신을 위로하려고 하는 것처럼. 또는 자신을 징벌하려고 하는 것처럼. 구분할 수 없었다.

휴대폰이 울렸다. 엄마였다.

“너 강리우 만났어?”

엄마가 물었다.

“응.”

세아가 대답했다.

“그리고?”

“아무것도 없어. 그냥… 끝이야.”

침묵이 흐르고 있었다. 전화 너머의 침묵. 엄마의 침묵. 그 침묵 속에 무언가가 있었다. 안도감. 슬픔. 그리고 또 다른 무언가. 사랑.

“잘했어.”

엄마가 말했다. “이제 집으로 와. 제주로. 도현이가 너를 기다리고 있어.”

세아는 제주행 버스표를 예매했다. 새벽 3시 출발. 강남역에서. 그리고 그 버스를 기다리면서, 세아는 자신이 무엇을 배웠는지 생각했다. 강리우와의 만남을 통해서. 그것은 간단했다. 누군가를 구하려는 것과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은 다르다는 것. 그리고 자신을 사랑하지 않으면서 누군가를 사랑할 수는 없다는 것. 그것이 전부였다.

버스가 도착했다. 세아는 탔다. 창가 자리를 잡았다. 강남의 밤이 뒤로 물러나갔다. 건물들과 불빛들과 사람들이. 그리고 그 자리에 제주의 바다가 들어왔다. 세아의 머릿속에서. 소금 냄새. 파도 소리. 그리고 엄마의 손. 세아는 자신의 손을 펼쳤다. 떨리는 손가락들을 펼쳤다. 그리고 그 손가락들을 자세히 봤다. 3초마다 떨리는 그 손가락들. 그 떨림 속에 무언가가 있었다. 살아있다는 증거. 느낀다는 증거. 그리고 그것으로 충분했다.

버스가 서울을 떠났다. 새벽 3시. 고속도로 위에서. 세아는 창밖을 보면서 자신의 손을 봤다. 떨리는 손. 약한 손. 하지만 자신의 손. 그리고 그것이 가장 중요한 것이었다. 자신의 것이라는 것. 다른 누군가의 것이 아니라. 자신의 것.

고속도로는 길었다. 새벽의 고속도로는 더 길었다. 하지만 세아는 그 길을 가고 있었다. 자신의 손을 펼친 채로. 떨리는 손가락들을 펼친 채로. 제주를 향해. 엄마를 향해. 도현이를 향해. 자신을 향해.

# 끝과 시작 사이에서

## 1부: 작별의 무게

“알겠어.”

세아가 말했다. 그 말이 입 밖으로 나오는 순간, 마치 자신의 목에서 무언가 단단한 것이 빠져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숨이 조금 더 쉬워졌다. 동시에 가슴이 텅 빈 것 같았다.

일어났다.

의자에서 몸을 일으키는 것도 쉽지 않았다. 마치 자신의 몸이 이 카페의 테이블, 이 의자, 강리우의 맞은편 자리에 오래전부터 고착되어 있었던 것 같았다. 몸이 움직이지 않으려고 저항했다. 근육들이 경직되어 있었고, 관절들이 뻣뻣했다. 마치 몇 년을 같은 자세로 앉아만 있었던 사람처럼.

강리우의 테이블에서 떨어졌다.

그 거리가 생각보다 멀었다. 팔 길이 정도의 거리였지만, 그것이 마치 광활한 사막처럼 느껴졌다. 테이블 위에는 여전히 세아가 마시다 만 아메리카노가 있었다. 표면에 얇은 거품이 떠 있었고, 커피는 이미 식어서 차가워졌을 것이다. 한 입도 마시지 않은 채.

카페를 향해 걸었다.

발걸음이 무거웠다. 각 발을 바닥에서 들어올리는 것이 마치 거대한 석상을 옮기는 것처럼 느껴졌다. 왼쪽 다리, 오른쪽 다리. 왼쪽 다리, 오른쪽 다리. 기계적인 반복. 뇌가 지시하면 몸이 따르는 것, 그것이 전부였다. 감정은 어디론가 떨어져 나가버린 것 같았다. 마치 자신이 이미 죽어 있고, 자신의 몸만 아직 살아 움직이고 있는 것 같았다.

출구를 향해.

카페 안은 생각보다 시끄러웠다. 오후 중반이었고, 직장인들이 잠깐의 휴식을 위해 들어와 있었다. 누군가는 노트북 앞에서 일을 하고 있었고, 누군가는 친구와 웃으면서 대화하고 있었다. 커피 머신의 소리, 스팀의 소리, 사람들의 목소리들이 뒤섞여 있었다. 그 모든 소리가 세아에게는 마치 자신을 압박하는 벽처럼 느껴졌다.

그 길을 가면서 세아는 자신이 울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눈물이 나오고 있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눈을 깜빡할 때마다 뜨거운 물기가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음, 그렇구나. 내가 울고 있구나. 그렇게 객관적으로 관찰하듯 자신의 눈물을 바라봤다. 하지만 가슴 속에서 쏟아져 나오는 느낌은 없었다. 눈물만 흘러내릴 뿐, 내면에서는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그것이 더 슬펐다.

하지만 돌아보지 않았다.

강리우를 다시 보지 않았다.

왜냐하면 이미 모든 것이 끝났기 때문이었다. 완전하게. 확정적으로. 돌이킬 수 없게.

뒤돌아보면 자신이 다시 앉을 것 같았다. 다시 그 의자에 앉아서, 다시 강리우의 말을 들을 것 같았다. 또 다른 약속을 받으려고, 또 다른 희망을 구하려고. 그리고 그것은 끝이 아닐 것이었다. 단지 또 다른 시작일 뿐. 또 다른 기다림의 시작. 또 다른 실망의 시작.

아니다. 이제는 충분하다.

세아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출구로 향했다. 출구의 자동문이 열렸다. 차가운 공기가 밀려들어왔다. 강남역의 공기였다. 배기가스와 사람들의 향수, 음식 냄새들이 뒤섞인 그 공기. 서울의 냄새였다.

## 2부: 반복의 악순환

강리우는 세아가 떠난 후에도 손가락으로 피아노를 연주하고 있었다.

테이블 위에서. 손가락을 구부렸다 펼쳤다를 반복하면서. 마치 자신의 손이 피아노 건반을 누르고 있는 것처럼. 카페의 어딘가에서 나오는 배경음악—비긴스의 ‘A Thousand Years’—에 맞춰서. 그 음악이 계속되는 한, 손가락들도 계속 움직였다.

떨리는 손가락으로.

손가락들이 떨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 떨림은 신경증에서 오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진정 맥박이었다. 자신의 심장이 손가락 끝까지 전해져 오는 박동. 그 박동 속에는 무엇이 있었을까? 죄책감? 후회? 아니면 그냥 살아있다는 것의 증거일 뿐?

그리고 그 떨림 속에는 더 이상 아무것도 없었다.

강리우는 자신의 손을 바라봤다. 마치 처음 보는 손인 것처럼. 손가락의 선, 손금, 손톱의 색깔. 모든 것이 낯설었다. 이 손으로 누군가를 안은 적이 있었나? 이 손으로 누군가의 눈물을 닦아준 적이 있었나? 기억할 수 없었다.

단지 반복만 있었다.

같은 패턴. 만남과 헤어짐. 약속과 배신. 기다림과 절망.

같은 리듬. 그것이 자신의 인생이었다. 악보 속의 반복 기호처럼. 단 한 번도 진행되지 않는 음악처럼.

같은 절망. 그것이 끝이었다.

강리우는 손가락을 멈췄다. 피아노 건반을 누르던 손가락들이 마침내 움직임을 멈췄다. 그 순간, 카페의 음악도 끝나갔다. 마지막 음이 사그라지고, 침묵만 남았다.

강리우는 그 침묵 속에서 자신의 호흡음만 들었다. 콧수염 아래로 코가 들었다 나갔다를 반복했다. 자신이 살아 있다는 증거. 하지만 그것도 이제는 충분하지 않았다.

## 3부: 강남역으로의 귀로

세아가 강남역으로 돌아올 때, 그녀의 손은 여전히 떨리고 있었다.

3초마다. 규칙적으로. 마치 생명의 신호처럼. 또는 경고음처럼.

강남역의 지하철 통로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퇴근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검은색과 회색 옷을 입은 사람들이 물고기 떼처럼 흘러다녔다. 모두가 어딘가로 가고 있었다. 집으로, 술집으로, 헬스장으로, 학원으로. 모두가 자신의 목적지를 향해 걷고 있었다.

세아도 걷고 있었다. 하지만 자신의 발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정확히 알지 못했다. 몸이 움직이는 것을 따라가는 것일 뿐이었다.

“지하철 탈까, 버스 탈까?”

세아가 자신에게 물었다. 대답은 나오지 않았다.

강남역의 광장에는 분수가 있었다. 분수 위의 물이 햇빛에 반짝이고 있었다. 아직도 햇빛이 강했다. 세아는 그 분수 옆에 서 있었다. 손을 펼쳤다. 떨리는 손가락들을 펼쳤다. 마치 강리우에게 작별을 고하듯.

사람들이 그녀를 스쳐지나갔다. 아무도 세아를 바라보지 않았다. 모두가 자신의 길을 가고 있었다. 세아도 자신의 길을 가야 했다.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휴대폰이 울렸다.

진동음이 아니라 실제 벨소리였다. 세아가 벨소리를 설정한 것은 오래전이었다. 엄마가 전화할 때만 이 벨소리가 나도록. 그래서 엄마인 것을 알 수 있도록.

“여보세요?”

세아가 받았다. 목소리가 떨렸다.

“너 강리우 만났어?”

엄마가 물었다. 엄마의 목소리도 떨리고 있었다.

“응.”

세아가 대답했다. 짧은 대답. 더 이상의 설명은 없었다.

“그리고?”

엄마가 다시 물었다. 그 질문 속에는 많은 것이 들어 있었다. 어떻게 되었냐는 것. 그가 어떻게 했냐는 것. 너는 어떤 결정을 했냐는 것.

세아는 생각했다. 무엇이라고 대답해야 할까. 강리우가 자신을 도와달라고 했다는 것? 아니면 자신이 다시 한 번 자신을 속였다는 것? 아니면 단순히 모든 것이 끝났다는 것?

“아무것도 없어. 그냥… 끝이야.”

침묵이 흐르고 있었다.

전화 너머의 침묵. 엄마의 침묵. 세아는 엄마의 호흡음을 들을 수 있었다. 엄마도 살아 있다. 엄마도 들었다. 엄마도 반응하고 있다.

그 침묵 속에 무언가가 있었다.

안도감. 딸이 드디어 깨어났다는 안도감. 딸이 드디어 그 남자에게서 벗어났다는 안도감.

슬픔. 딸이 다시 한 번 상처를 받았을 것이라는 슬픔. 딸이 다시 한 번 자신을 속였을 것이라는 슬픔.

그리고 또 다른 무언가. 사랑.

엄마의 사랑. 조건 없는, 판단하지 않는, 그저 딸을 안고 싶은 그런 사랑.

“잘했어.”

엄마가 말했다. 목소리가 조금 떨렸다. 엄마도 울고 있는 것 같았다.

“이제 집으로 와. 제주로. 도현이가 너를 기다리고 있어.”

제주. 엄마. 도현이.

그 단어들이 세아의 가슴을 채웠다. 마치 오래전부터 비어 있던 공간을 채우듯. 서서히. 조심스럽게.

“응. 엄마.”

세아가 말했다.

“응. 가야겠다.”

## 4부: 버스 예매

세아는 제주행 버스표를 예매했다.

강남역 버스 정류소의 매표소가 아니라, 휴대폰으로. 버스 예매 앱을 열고, 목적지를 ‘제주’로 설정하고, 날짜를 오늘로 설정했다. 그리고 시간을 선택했다. 새벽 3시 출발.

왜 새벽 3시였을까? 세아도 모르겠었다. 하지만 그 시간이 맞다고 느껴졌다. 새벽은 어둠이었다. 어둠 속에서 떠나면, 도착할 때는 새 아침일 것이었다. 밤에서 낮으로. 죽음에서 생명으로. 어쩌면 그것은 상징이었을지도 모른다.

강남역에서 출발. 제주도 도착.

예매 완료. 확인 번호가 나타났다. 세아는 그것을 메모장에 복사했다.

## 5부: 기다림 속에서의 성찰

그리고 그 버스를 기다리면서, 세아는 자신이 무엇을 배웠는지 생각했다.

강리우와의 만남을 통해서. 지난 몇 년간을 통해서. 그 모든 기다림과 절망을 통해서.

그것은 간단했다.

누군가를 구하려는 것과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은 다르다는 것.

세아는 강리우를 구하려고 했다. 그의 외로움을 덜어주려고 했다. 그의 슬픔을 치료해주려고 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도 구원받을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마치 자신이 구원자가 되면, 자신도 구원받을 수 있다고. 하지만 그것은 사랑이 아니었다. 그것은 집착이었다. 그것은 의존이었다.

그리고 자신을 사랑하지 않으면서 누군가를 사랑할 수는 없다는 것.

세아가 강리우를 사랑했다면, 왜 그렇게 쉽게 자신을 버렸을까? 왜 그의 말 한 마디에 자신의 모든 것을 내려놨을까? 왜 자신의 꿈을 포기했을까? 왜 자신의 친구들을 멀리했을까?

그것은 강리우 때문이 아니었다. 그것은 세아 자신이 자신을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자신의 가치를 믿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누군가에게 선택받는 것으로만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려고 했기 때문이었다.

그것이 전부였다.

세아는 그 깨달음을 곱씹으며 강남역의 벤치에 앉았다. 아직 버스가 올 시간이 아니었다. 몇 시간 더 기다려야 했다.

강남역은 여전히 바빴다. 퇴근 시간이 지나고, 저녁 시간이 되었다. 사람들이 술집으로, 카페로, 영화관으로 흩어져 갔다. 그들도 각자의 목적지를 향해 가고 있었다. 그들도 각자의 삶을 살고 있었다.

세아도 이제 자신의 삶을 살아야 했다.

그 생각이 들었을 때, 가슴이 조금 가벼워지는 기분이 들었다. 아직도 두렵긴 했지만, 조금은 다른 감정이 섞여 있었다. 희망이었을까? 기대였을까? 아니면 그냥 살아있다는 느낌이었을까?

## 6부: 손가락의 떨림

버스가 도착했다.

새벽 3시. 정확한 시간이었다.

운전기사가 세아에게 인사했다. 세아는 고개를 끄덕했다. 승객들이 버스에 올랐다. 그리 많지 않았다. 새벽의 버스는 항상 한산했다. 야행성 사람들과 새벽을 좋아하는 사람들, 그리고 어딘가로 떠나야 하는 사람들만이 탔다.

세아는 탔다. 창가 자리를 잡았다. 다른 사람들은 관심 없었다. 각자 자신의 자리에 앉아서, 자신의 스마트폰을 보거나 눈을 감았다.

버스가 출발했다.

강남의 밤이 뒤로 물러나갔다.

건물들과 불빛들과 사람들이. 그리고 그 자리에 제주의 바다가 들어왔다. 아직 보이지는 않지만, 세아의 머릿속에서. 세아의 상상 속에서.

소금 냄새. 파도 소리. 그리고 엄마의 손.

세아는 자신의 손을 펼쳤다.

떨리는 손가락들을 펼쳤다. 3초마다 떨리는 그 손가락들. 마치 작은 새의 날개짓처럼.

그 손가락들을 자세히 봤다.

창밖의 가로등 불빛에 비춰지는 자신의 손. 손금이 선명했다. 손톱이 분홍색이었다. 손가락이 떨렸다.

그 떨림 속에 무언가가 있었다.

살아있다는 증거. 느낀다는 증거. 상처를 입었지만, 그래도 살아있다는 증거.

그리고 그것으로 충분했다.

세아는 자신의 손을 다시 한 번 봤다. 그 떨리는 손. 그 약한 손. 하지만 자신의 손.

그리고 그것이 가장 중요한 것이었다.

자신의 것이라는 것. 다른 누군가의 것이 아니라. 자신의 것.

강리우의 손이 아니라. 엄마의 손이 아니라. 도현이의 손이 아니라. 자신의 손.

## 7부: 고속도로 위의 여행

고속도로는 길었다.

새벽의 고속도로는 더 길었다. 거의 모든 차선이 비어 있었다. 자동차들이 드물게 지나갔다. 모두가 같은 목적지를 향해 가고 있었을까? 아니면 서로 다른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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