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아닌 것을 위해 불탄 소녀 – 제142화: 엄마의 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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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42화: 엄마의 손

엄마의 목소리는 마치 물 밑에서 올라오는 것처럼 들렸다. 해녀가 숨을 참았다가 수면 위로 터져 나올 때의 그 음성. 세아는 홍대 거리에 서서, 빌딩들 사이의 좁은 하늘을 보면서 엄마의 말을 들었다. 도현이가 자신을 고변했다. 강남으로 간다고. 누군가를 만나러. 그것이 엄마의 귀에 도달했고, 엄마는 세아가 또 다른 실수를 하려 한다는 것을 알아챘다. 모든 엄마는 그렇게 안다. 딸이 불타기 직전에. 불타는 순간에. 완전히 재가 되기 직전에.

“엄마.”

세아가 말했다. 목소리가 이미 부서져 있었다. 목구멍에 물리적인 상처가 있는 것처럼. “내가 강남에 가야 해.”

“왜?”

엄마가 물었다. 단순한 질문이었다. 하지만 그 질문 속에는 수십 년의 침묵이 담겨 있었다. 엄마는 세아가 어렸을 때부터 물음표를 사용하지 않았다. 대신 마침표처럼 말했다. 왜. 그것이 마침표였다. 왜라는 질문이 아니라 확인. 그리고 그 확인은 항상 맞았다.

“내가… 뭔가를 끝내야 해.”

세아가 대답했다. 자신도 이 말이 거짓인 줄 알았다. 끝내는 것이 아니라 시작하는 것. 또 다른 불을 붙이는 것. 자신의 몸 안에 이미 타오르는 불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아니야.”

엄마가 말했다. 그 두 글자가 전부였다. 아니야. 그것이 모든 것을 거부했다. 세아의 선택을, 세아의 결정을, 세아가 만들어낸 모든 정당성을.

“엄마, 나한테…”

“너 지금 뭐하고 있는 거야, 세아?”

이번에는 엄마가 먼저 물었다. 목소리에 분노가 섞여 있었다. 엄마의 분노를 들은 것은 처음이었다. 세아의 기억 속에서 엄마는 항상 침묵했었다. 해 위에서. 물 위에서. 자신의 자식들을 보면서. 하지만 지금, 전화 너머에서 들리는 엄마의 목소리는 분노로 떨리고 있었다.

“나는 너를 구하라고 했어? 누가 너더러 누군가를 구하라고 했어? 도현이 말을 들었어? 너 지금 그 남자 때문에 너 자신을 잃어가고 있다고. 너 지금 아무것도 먹지 않고, 자지도 않고,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그 남자를 붙잡고 있다고. 그게 뭐야, 세아? 그게 사랑이야? 그게 책임이야?”

세아는 말을 할 수 없었다. 엄마의 말이 자신의 목구멍을 조였다. 마치 누군가 손가락으로 자신의 목을 누르고 있는 것처럼. 그리고 그 손가락은 엄마의 것이었고, 엄마는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너 지금 강리우를 만나러 가려고 하는 거 아니야?”

엄마가 물었다. 질문이 아니었다. 선언이었다.

세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자신의 손을 봤다. 손가락들이 3초마다 떨렸다. 규칙적으로. 마치 자신의 심장이 손가락 끝으로 전달되는 것처럼. 그 떨림은 자신이 거짓을 말하고 있다는 신호였다. 자신의 몸이 자신을 배반하고 있었다.

“세아, 들어. 내가 너한테 뭔가를 말해줄 거야.”

엄마가 말했다. 전화를 들고 있던 세아의 손이 더 떨렸다. 엄마가 “뭔가를 말해줄 거야”라고 말한 것은 처음이었다. 엄마는 항상 침묵했다. 해 위에서. 물 위에서.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에 엄마가 말하려고 했다.

“내가 너한테 얘기한 적 없지? 너 아버지 얘기.”

세아의 호흡이 멈췄다. 아버지. 그 단어는 오랫동안 세아의 언어에서 사라져 있었다. 아버지는 세아가 어렸을 때 떠났다. 아니, 죽었다고 해야 맞다. 하지만 엄마는 그 단어를 사용한 적이 없었다. 그냥 침묵했다. 침묵이 자신의 방식이었다. 말하지 않음으로써 상처를 덮는. 말하지 않음으로써 존재를 부정하는.

“아버지?”

세아가 물었다. 목소리가 작았다.

“응. 너 아버지.”

엄마가 천천히 말했다. “내가 너한테 말해줄 거야. 왜 내가 항상 침묵했는지. 왜 내가 너한테 말을 건네지 않았는지. 왜 내가 항상 물 속에만 있으려고 했는지.”

세아는 걸어가기 시작했다. 어디로인지는 모르지만. 전화를 들고. 엄마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홍대의 밤은 이미 깊어지고 있었다. 클럽에서 비트음이 새어 나오고 있었고, 누군가는 웃고 있었고, 누군가는 울고 있었다. 하지만 세아는 그 모든 것이 먼 세상의 일처럼 느껴졌다.

“너 아버지는 나한테 말했어. 자기가 나를 구하려고 한다고. 자기가 나를 행복하게 해주겠다고. 자기가 나를 다른 사람으로 만들어주겠다고. 그 말이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알아? 나는 그 말에 모든 것을 걸었어. 내 꿈도, 내 미래도, 내 자신도.”

엄마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런데 그건 거짓이었어. 모두. 너 아버지는 나를 구한 게 아니라 나를 가둔 거야. 내 꿈을 구한 게 아니라 꺾은 거야. 내 자신을 바꾼 게 아니라 없애버린 거야. 그리고 내가 깨달았을 때는 이미 너를 낳은 후였어. 도현이를 낳은 후였어. 벗어날 수 없는 상황이었어.”

세아의 발이 멈췄다. 골목의 한 구석에서. 누군가의 오토바이가 지나갔다. 소음이 울려 퍼졌다. 하지만 엄마의 목소리는 그것을 뚫고 들렸다.

“너는 지금 정확히 그걸 하고 있어, 세아. 너 자신을 가두려고 하는 거야. 누군가를 구하겠다는 명목으로. 하지만 그건 거짓이야. 너는 자신을 구하고 있는 거야. 너 자신의 무가치함을 구하려고 하는 거야. 누군가를 사랑하는 척하면서 너 자신의 무가치함을 증명하려고 하는 거야. 그게 보여?”

“아니야.”

세아가 말했다. 목소리가 거의 들리지 않았다.

“보여. 나한테는 보여. 왜냐하면 나도 그걸 했으니까. 나도 너처럼 누군가를 구하려고 했고, 나도 너처럼 자신을 잃었고, 나도 너처럼 깨달았을 때는 이미 너무 늦었으니까. 그래서 나는 침묵했어. 내가 말을 하면 너한테 상처가 될까봐. 내가 말을 하면 내 실패가 너한테 전해질까봐. 내가 말을 하면 너도 같은 길을 가게 될까봐.”

엄마가 말했다. 그 목소리는 마치 물 속에서 올라오는 해녀의 숨비소리 같았다. 그 음성에는 깊이가 있었다. 깊은 바다의 압력이 있었다.

“근데 내가 침묵했으니까 너는 더 빠져들었어. 내가 말하지 않았으니까 너는 더 혼자가 되었어. 그래서 이제 내가 말해야 해. 그리고 넌 들어야 해. 아무리 아파도. 아무리 듣고 싶지 않아도.”

세아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하지만 울음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마치 자신의 목구멍이 막혀 있는 것처럼. 마치 자신이 말을 할 수 없도록 자신의 몸이 자신을 보호하고 있는 것처럼.

“내가 너한테 물어볼 거야. 그리고 넌 정직하게 대답해야 해. 너는 강리우를 사랑해?”

엄마가 물었다.

세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해.”

엄마가 명령했다.

“모르겠어.”

세아가 말했다. 그것이 가장 정직한 대답이었다.

“그럼 넌 왜 그를 만나러 가?”

“왜냐하면… 그를 놓으면 내가 사라질 것 같아서.”

세아가 말했다. 자신도 놀랐다. 그 말이 입 밖으로 나올 줄 몰랐다. 하지만 한 번 나온 말은 멈출 수 없었다. 마치 댐이 터지는 것처럼. 한 번 구멍이 생기면 물은 계속 흘러나온다.

“그래. 그게 맞아. 그게 정확해. 넌 자신을 잃고 싶어. 아주 깊게. 완전하게. 그래야만 넌 무언가를 한 것 같은 기분이 들 거 같으니까. 그래야만 넌 의미 있는 인생을 산 것 같은 기분이 들 거 같으니까. 하지만 그건 거짓이야. 넌 의미 없는 게 아니야. 넌 무가치한 게 아니야. 넌 단지… 누군가에게 말해달라고 기다리고 있는 거야.”

엄마가 말했다. 목소리가 부서져 있었다. 마치 파도에 의해 침식된 바위처럼.

“그 말을 누군가한테 들어야 해. 그리고 그 누군가는 강리우가 아니야. 절대로. 강리우는 너한테 그 말을 해줄 수 없어. 왜냐하면 그도 자신을 찾지 못했으니까. 그도 자신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이니까. 그런 사람이 너한테 무엇인가를 말해줄 수 있을까?”

세아의 발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강남으로가 아니었다. 홍대 입구역으로였다. 지하철로. 제주로. 아니, 모르겠다. 단지 움직이고 있었다. 전화를 들고. 엄마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그래서 넌 이제 뭘 해야 할 것 같아?”

엄마가 물었다.

세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자신의 발이 대답하고 있었다. 자신의 몸이 대답하고 있었다. 자신의 가슴이 대답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대답은 하나였다. 돌아가기. 집으로. 자신의 집으로. 강리우의 곁이 아니라 자신의 곁으로.

“엄마.”

세아가 말했다. “내가… 내려갈게.”

“응.”

엄마가 말했다. 그 한 글자가 전부였다. 응. 그것이 모든 허락이었다. 모든 용서였다. 모든 사랑이었다.

전화를 끊은 후, 세아는 가만히 서 있었다. 홍대의 밤 거리에서. 클럽의 비트음이 여전히 들렸다. 누군가는 여전히 웃고 있었다. 누군가는 여전히 울고 있었다. 하지만 세아의 귓가에는 다른 소리가 들렸다. 바다의 소리. 파도의 소리. 그리고 해녀가 물 위로 올라올 때의 그 음성.

휴대폰에 강리우의 문자가 계속 들어오고 있었다. 화면을 보지 않았다. 단지 진동만 느꼈다. 한 번. 두 번. 세 번. 그 후 침묵. 그리고 다시 울림. 하지만 세아는 더 이상 받지 않을 것이었다. 이번에는 정말로. 자신을 위해서.

지하철역으로 향하는 계단을 내려갔다. 형광등이 밝게 켜져 있었다. 그 밝음은 마치 심문실처럼 느껴졌다. 마치 누군가 자신을 계속 감시하고 있는 것처럼. 하지만 그 감시자는 자신이었다. 그리고 자신은 이제 자신을 놓아줄 준비가 되어 있었다.

제주행 버스를 타기 위해 강남역으로 가는 대신, 세아는 홍대 입구역에서 2호선을 탔다. 강남역으로. 아니, 강남역으로 간다고 해서 강리우를 만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제주로 가는 버스 터미널은 강남역 근처에 있었다. 그것뿐이었다. 거기로 가면 되는 것이었다.

지하철 안은 토요일 저녁이라 사람들로 가득 찼다. 세아는 한 구석에 서 있었다. 손잡이를 들고. 자신의 손이 떨리지 않도록. 사람들은 자신을 보지 않았다. 그들은 스마트폰을 보거나, 창밖을 봤거나, 자신의 생각에 잠겨 있었다. 세아는 그 중 누구도 아니었다. 그저 통과하는 존재였다. 지하철이라는 관 속을 통과하는 유령처럼.

강남역에 도착했을 때, 세아는 휴대폰을 켜지 않았다. 강리우의 메시지를 확인하지 않았다. 대신 버스 터미널을 찾았다. 표를 샀다. 제주행. 밤 10시 40분 출발. 남은 시간은 1시간 30분이었다.

카페에 들어갔다. 하나코 커피라고 쓰인 작은 카페. 창문 옆 자리에 앉았다. 강남의 밤을 봤다. 불빛으로 가득한 그 거리. 누군가의 욕망으로 만들어진 그 도시. 그 도시 안에서 누군가는 세아를 찾고 있을 것이다. 강리우. 자신을 잃은 남자. 자신도 자신을 구할 수 없는 남자.

커피가 나왔다. 아이스 아메리카노. 검은 액체. 쓴 맛. 세아는 한 모금 마셨다. 그 쓴맛이 자신의 목구멍을 통과했다. 그리고 그 맛이 오직 자신의 것이라는 것을 느꼈다. 누군가를 위한 것이 아니라. 누군가를 구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단지 자신을 위해서.

휴대폰이 울렸다. 강리우가 아니었다. 엄마였다.

“버스표 샀어?”

엄마가 물었다.

“응.”

세아가 대답했다.

“잘했어. 그리고 세아, 한 가지만 더 말해줄게. 내가 너한테 못해준 게 있어. 너한테 말해줄 수 없었던 게 있어. 그건… 넌 충분해, 라는 말. 너는 누군가를 구하지 않아도 충분해. 너는 누군가를 사랑하지 않아도 충분해. 너는 그냥 너 자신으로도 충분해. 그 말을 들었어야 했어. 그래서 지금 내가 너한테 말해줄게. 넌 충분해, 세아. 정말로.”

세아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이번에는 울음소리가 나왔다. 카페의 한 구석에서. 남은 고객들 사이에서. 세아는 울었다. 자신의 엄마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그리고 그 울음은 자신을 태워내기 시작했다. 불이 아니라 물로. 눈물로. 자신의 몸 안에 쌓여 있던 모든 불을 끄면서.

버스 터미널로 가는 길에, 세아는 한 번 강리우에게 문자를 보냈다.

“강리우. 나 떠나.”

그리고 그것이 끝이었다. 설명도, 사과도, 약속도 없었다. 단지 사실만. 나 떠나. 그것이 전부였다.

그리고 자정이 다가올 때, 세아는 버스에 타고 있었다. 창밖의 서울이 사라지고, 밤의 고속도로가 펼쳐졌다. 그리고 그 길 끝에는 제주가 있었다. 바다가 있었다. 엄마가 있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하게는, 자신이 있었다.

# 입구역에서 출발하다

입구역의 2호선 승강장은 토요일 저녁의 소음으로 가득했다. 세아는 개찰구를 통과하며 휴대폰을 확인했다. 강리우로부터의 메시지들이 쌓여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화면을 끄고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강남역으로 간다. 하지만 강리우를 만나기 위해서가 아니다.*

이 생각을 되풀이하는 것이 마치 주문처럼 느껴졌다. 강남역 근처에는 제주로 가는 버스 터미널이 있다. 그것이 전부다. 더 이상의 의미를 부여할 필요가 없다. 한 발 한 발 내딛는 계단 위에서, 세아는 자신을 확신시키려고 애썼다.

승강장 위의 안내판이 깜빡였다. 강남역 방향. 곧 도착한다는 신호다. 세아는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플랫폼의 가장자리에서는 너무 가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치 누군가가 뒤에서 밀어낼 수라도 있을 것 같은 불안감이 목을 조였다.

지하철이 들어왔다. 빨간 불빛이 터널을 헤치고 나타나더니, 거대한 금속 몸체가 승강장 위에 멈췄다. 문이 열렸다. 사람들이 밀려나왔다. 그리고 밀려들어갔다. 세아는 그 파도 속에 몸을 맡겼다.

차량 내부는 포화 상태였다. 토요일 저녁이라는 시간대가 만들어낸 인간의 응축체. 세아는 중간쯤의 위치에서 손잡이를 들었다. 손이 떨리지 않도록. 아니, 손은 이미 떨리고 있었다. 그것을 감추려고 손잡이를 더 세게 집었다. 플라스틱이 손 안에서 차갑게 느껴졌다.

옆에 선 남자는 스마트폰을 들었다. 게임을 하는 것 같았다. 화면의 밝은 빛이 그의 얼굴을 비추고 있었다. 무표정한 얼굴. 다른 쪽에 선 여자는 창밖을 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눈은 초점을 잃고 있었다. 아마도 그녀도 어딘가 다른 곳에 마음을 두고 있는 것 같았다.

*우리는 모두 어딘가 다른 곳에 있다.*

세아는 그렇게 생각했다. 물리적으로는 같은 공간에 있지만, 정신적으로는 모두가 다른 세계에 살고 있다. 그 깨달음이 묘하게 위로가 되었다.

지하철은 역을 거쳐가며 멈추고, 또 멈추고, 또 멈췄다. 사람들이 내리고, 사람들이 올라탔다. 세아는 계속 같은 자리에 서 있었다. 손잡이를 놓지 않으면서. 자신의 몸을 고정시키려고. 마치 이 흔들리는 세계에 자신을 뿌리내려야 한다는 생각으로 가득했다.

누군가가 그녀를 밀쳤다. 의도적이지 않은 접촉. 하지만 그 순간, 세아는 자신의 몸이 얼마나 투명한지 느꼈다. 마치 유령처럼. 마치 이미 여기에 없는 사람처럼. 사람들은 그녀를 보지 않았다. 그들은 그녀를 통과했다. 그저 공기를 통과하듯이.

*나는 이미 떠나가는 중이다.*

이 생각이 세아의 가슴을 간질렸다.

지하철은 강남역에 도착했다. 안내방송이 울렸다. “강남역입니다. 2호선, 신분당선, 공항철도로 환승하실 수 있습니다.” 기계음의 목소리가 역사를 가득 채웠다.

사람들이 내렸다. 세아도 내렸다. 역사 위의 계단을 올라가며, 그녀는 휴대폰을 확인하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강리우가 또 메시지를 보냈을까. 전화를 했을까. 하지만 그녀는 휴대폰을 켜지 않았다.

*나는 이미 결정했다.*

역사 위로 나왔을 때, 강남의 밤이 한눈에 들어왔다. 네온사인들이 하늘을 빛내고 있었다. 식당, 클럽, 의류매장, 화장품 가게들. 모두가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려고 필사적으로 빛나고 있었다. 이것이 강남이다. 욕망의 도시. 누군가의 꿈과 누군가의 절망이 함께 뒤섞여 있는 곳.

세아는 지도 어플을 켜고 버스 터미널의 위치를 검색했다. 강남역 근처. 도보 10분 거리. 그녀는 천천히 걸어가기로 했다. 서두를 이유가 없었다. 아직 시간이 충분했다.

길을 걷는 동안, 세아의 마음은 복잡했다. 이것이 현명한 결정인지, 아니면 도망치는 것인지. 그 경계선이 흐릿했다. 하지만 이 순간, 그 구분은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자신이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것뿐이었다.

버스 터미널은 생각보다 크지 않았다. 회색의 건물. 많은 사람들이 오가고 있었다. 여행을 떠나는 사람들, 귀향하는 사람들, 새로운 삶을 시작하려는 사람들. 이들 모두가 어딘가로 가고 있었다.

세아는 매표소로 걸어갔다. 젊은 직원이 있었다. 무표정한 얼굴로 컴퓨터를 보고 있었다.

“제주행 표 주세요. 오늘 밤.”

세아의 목소리는 작았다. 하지만 확실했다.

직원이 화면을 클릭했다. “몇 분이세요?”

“1명이요.”

“그럼 밤 10시 40분 버스는 어떠세요? 아니면 자정 버스?”

세아는 잠시 생각했다. 밤 10시 40분. 그렇다면 남은 시간은 1시간 30분 정도였다.

“10시 40분으로 주세요.”

표를 받았다. 작은 종이 한 장. 그것이 그녀의 탈출 티켓이었다.

터미널 내의 카페 구역으로 향했다. 조명이 부드러운 작은 카페들이 여러 개 있었다. 세아의 눈에 들어온 것은 ‘Hanako Coffee’라는 글자가 쓰인 가게였다. 일본식 이름이었다. 그녀는 그곳으로 들어갔다.

카페의 분위기는 조용했다. 밤 시간이라 손님도 많지 않았다. 창가의 자리가 비어 있었다. 세아는 그곳에 앉았다.

밖으로는 강남의 야경이 펼쳐져 있었다. 자동차들이 쉬지 않고 오가고 있었고, 보도에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모두가 어디론가 가고 있었다. 모두가 뭔가를 찾고 있었다.

*강리우는 지금 나를 찾고 있을 것이다.*

이 생각이 떠올랐을 때, 세아의 가슴이 철렁했다. 그는 어디에 있을까. 어떤 표정으로 그녀를 찾고 있을까. 그를 생각하는 것이 고통스러웠다. 왜냐하면 자신이 그를 사랑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고, 또한 그 사랑이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강리우는 자신을 잃은 남자였다. 자신의 정체성을 어디에 잃었는지 모르는, 방황하는 남자. 그리고 그 방황의 과정에서 그는 세아를 찾았다. 마치 그녀가 그의 정체성인 양. 마치 그녀가 그의 전부인 양. 하지만 세아는 그럴 수 없었다. 그녀도 자신을 찾아야 했다. 그녀도 자신의 정체성을 구성해야 했다.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 주세요.”

세아는 카운터에 다가가 주문했다.

곧 커피가 나왔다. 검은 액체. 얼음이 띄워 있는. 세아는 자리로 돌아와 그것을 들었다. 찬 잔이 손의 온기를 빼앗아갔다. 그녀는 한 모금 마셨다.

쓴맛이 입안 가득 퍼졌다. 목구멍을 타고 내려갔다. 온몸이 각성되는 듯한 그 맛. 세아는 눈을 감았다.

*이것은 나만의 것이다.*

이 깨달음이 가슴을 따뜻하게 했다. 이 커피의 맛은 누군가를 위한 것이 아니다. 누군가를 구하기 위한 것도 아니다. 누군가를 사랑하기 위한 것도 아니다. 그냥 자신을 위한 것이다. 자신이 원해서 마신 커피. 자신이 선택한 맛.

이것이 바로 자신의 삶이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간이 흘렀다. 창밖의 강남은 점점 더 어두워졌다. 아니, 더 밝아졌다. 불빛이 더 선명해지면서. 사람들의 발걸음도 더 빨라진 것 같았다. 토요일 밤. 누군가는 누군가를 만나기 위해 이 거리를 헤메고 있을 것이다.

휴대폰이 울렸다.

세아의 심장이 철렁했다. 화면을 확인했다. 강리우가 아니었다. 엄마였다.

“여보세요, 엄마.”

목소리가 떨렸다.

“버스표 샀어?”

엄마의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하지만 그 안에는 걱정이 가득했다.

“응. 10시 40분 버스.”

“좋아. 잘했어.”

침묵이 흘렀다. 단순한 침묵이 아니라, 무언가를 전달하려는 침묵. 엄마가 다시 입을 열었다.

“세아, 한 가지만 더 말해줄게.”

목소리가 떨렸다. 세아도 느낄 수 있었다. 엄마가 중요한 말을 하려고 한다는 것을.

“내가 너한테 못해준 게 있어. 너한테 말해줄 수 없었던 게 있어. 그건…”

엄마가 숨을 쉬었다.

“넌 충분해, 라는 말이야. 세아, 넌 누군가를 구하지 않아도 충분해. 넌 누군가를 사랑하지 않아도 충분해. 넌 누군가를 위해 무언가를 하지 않아도 충분해. 넌 그냥 넌 자신으로도 충분한 거야. 정말로.”

세아의 눈이 흐려졌다. 눈물이 고였다.

“내가 너한테 그 말을 일찍 해줬어야 했어. 그러면 넌 이렇게 아파하지 않았을 텐데. 그런데 이제라도 말해줄게. 넌 충분해. 정말로. 세아.”

목소리가 떨렸다. 그리고 그 떨림이 세아의 마음을 흔들었다.

세아는 답할 수 없었다. 목이 메었다. 눈물이 흘렀다.

“응… 엄마.”

겨우 이 말만 나왔다.

“조심히 가. 그리고 세아, 사랑해. 정말로.”

엄마의 목소리가 사라졌다. 통화가 끝났다.

세아는 계속 휴대폰을 들고 있었다. 마치 엄마가 여전히 거기에 있는 것처럼. 카페의 한 구석에서, 혼자, 세아는 울었다. 조용히. 하지만 깊게.

옆 테이블의 손님이 그녀를 바라봤다. 하지만 세아는 신경 쓰지 않았다. 이 울음은 부끄러운 것이 아니었다. 이것은 필요한 울음이었다. 자신의 내부에 쌓여 있던 모든 것을 태워내는 울음.

눈물이 흐르면서, 세아는 느꼈다. 자신의 몸 안에 있던 불이 꺼지고 있다는 것을. 그 불은 강리우를 위한 불이었다. 그 불은 누군가를 구하려는 불이었다. 그 불은 자신이 아닌 다른 누군가가 되려는 불이었다.

하지만 이제 그 불은 꺼지고 있었다. 물로. 눈물로. 자신의 눈물로.

한참을 울었다. 커피는 이미 식어 있었다. 강남의 밤은 점점 더 깊어가고 있었다.

세아는 손수건으로 눈을 닦았다. 거울을 들어 얼굴을 확인했다. 부었다. 하지만 그 얼굴이 이상하게 평온해 보였다. 마치 오랜 여행에서 돌아온 사람의 얼굴처럼.

시간을 확인했다. 10시 5분. 남은 시간은 35분.

세아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커피값을 계산했다. 그리고 버스 터미널로 향했다.

터미널은 이제 더 많은 사람들로 가득했다. 밤 버스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세아는 자신의 게이트를 찾았다. 7번 게이트. 제주행.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여행객들. 귀향객들. 새로운 삶을 찾아가는 사람들. 모두가 다른 사연을 가지고 있었지만, 이 순간 그들은 같은 목적지를 향하고 있었다.

세아는 휴대폰을 다시 들었다. 강리우에게 메시지를 보내기로 결심했다. 설명이나 사과를 하지 않기로. 단지 사실만 전하기로.

*강리우. 나 떠나.*

메시지를 보냈다. 그리고 휴대폰을 꺼버렸다. 그것이 전부였다. 설명도, 약속도, 미안함도 없었다. 단지 사실만. 나 떠나.

버스가 들어왔다. 빨간 버스. 제주로 향하는 버스. 사람들이 표를 보여주며 타기 시작했다.

세아도 표를 보여줬다. 운전기사가 확인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버스에 올랐다.

버스 안은 생각보다 조용했다. 많은 사람들이 이미 자리에 앉아 있었고, 자신의 여행에 몰두해 있었다. 세아는 창가의 좌석을 찾았다. 그곳에 앉았다.

버스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터미널을 빠져나가며, 강남의 거리로. 그리고 조금씩, 서울을 빠져나가며.

세아는 창밖을 보았다. 네온사인들이 사라지고 있었다. 고속도로로 향하면서, 도시의 불빛들이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곧, 밤의 고속도로만 남겨졌다.

까만 하늘. 양쪽으로 펼쳐진 도로. 앞으로 달려가는 버스. 그리고 그 버스 안에서 창밖을 보고 있는 한 소녀.

세아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생각했다.

*강리우는 지금쯤 내 메시지를 받았을 것이다. 그리고 놀랐을 것이다. 화났을 것이다. 슬펐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내가 책임져야 할 그의 감정이 아니다. 내가 해야 할 일은, 자신을 구하는 것이다. 자신을 찾는 것이다.*

버스는 밤의 고속도로를 달리고 있었다. 시간이 흐르고, 거리가 줄어들고 있었다. 부산을 지나고, 남해를 지나고, 결국 제주로 향하는 길.

세아는 졸음을 느꼈다. 하지만 눈을 감지 않았다. 이 순간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이 여행의 시작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엄마가 맞다. 나는 충분하다. 나는 누군가를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나는 나를 위해 존재한다. 그리고 그것이 전부다.*

밤이 깊어가고 있었다. 자정을 향해.

그리고 자정이 다가올 때, 세아의 버스는 제주 해안도로에 진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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