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아닌 것을 위해 불탄 소녀 – 제136화: 신호를 기다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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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36화: 신호를 기다리며

편의점의 형광등은 여전히 같은 속도로 깜빡였다. 초 단위의 미세한 진동. 세아는 그 깜빡임을 세고 있었다. 한 번, 두 번, 세 번. 완벽한 간격이었다. 마치 누군가 정해진 규칙에 따라 움직이는 것처럼. 자동화된 시스템처럼. 감정 없이.

새로운 직원은 세아를 보지 못했다. 아니, 보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인식하지 못했다. 세아는 편의점에 드나드는 수천 명의 손님 중 한 명일 뿐이었다. 이전에 자신이 그 자리에 서 있을 때도, 대부분의 손님들은 세아를 얼굴로 인식하지 못했다. 고시원에서 나온 여자, 또는 편의점 직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세아는 걸어갔다. 편의점을 지나 홍대 입구역으로. 오후 4시 47분. 도현이는 아직 도착하지 않았을 것이었다. 그는 항상 약속 시간보다 10분 늦었다. 그것이 그의 습관이었다. 세아는 그것을 안다. 오래전부터.

역 앞 광장에는 사람들이 많았다. 토요일 오후. 서울의 모든 젊은이들이 홍대로 모이는 시간. 세아는 사람들 사이에 서 있었다. 하지만 누군가와 어깨를 부딪혔을 때도, 누군가 자신 앞에서 멈춰 섰을 때도, 세아는 반응하지 않았다. 마치 자신이 투명한 것처럼. 또는 이미 죽어 있는 것처럼.

휴대폰을 들었다. 4시 52분. 8분이 남았다. 카톡을 열었다. 해늘로부터의 메시지가 있었다. 아침에 보낸 것.

“오늘 뭐 하는데? 답장 해.”

세아는 답장을 하지 않았다. 대신 강리우에게서 온 메시지들을 봤다. 병실에서 나온 후로, 그는 매일 메시지를 보냈다. 처음에는 길었다. 문단 단위의 긴 메시지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 메시지들은 짧아졌다. 마지막 메시지는 어제였다.

“판결 날을 기다리고 있어.”

그것이 전부였다. 마치 자신이 한 말을 그대로 돌려받은 것 같았다. 세아가 말했던 “판결이 나올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말을. 그것을 그가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 또는 세아가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 누가 원래 말을 했는지는 이제 중요하지 않았다. 그들의 목소리는 섞여 있었다.

“누나!”

도현이가 나타났다. 정확히 5시 02분에. 10분 늦음. 예상대로. 그는 중학교 교복 위에 오버사이즈 후드를 입고 있었다. 요즘 그 정도 나이 남자아이들이 입는 스타일. 세아는 자신의 어린 시절을 생각했다. 제주도에서. 교복을 입고 다닐 때. 그때는 지금만큼 복잡하지 않았다.

“안 기다렸어?”

도현이가 물었다. 그의 눈은 세아를 훑었다. 마치 무언가를 진단하려는 의사처럼.

“응. 방금 왔어.”

세아가 거짓말을 했다.

그들은 식당을 찾아다녔다. 홍대 거리를 따라. 도현이는 “여기 어때?” 또는 “저기는 너무 비싼 것 같은데” 같은 말들을 했다. 하지만 세아는 응답하지 않았다. 그냥 따라갔다. 도현이가 가는 곳을 . 마치 자신이 선택권이 없는 것처럼. 또는 선택할 능력이 없는 것처럼.

결국 그들이 선택한 곳은 작은 국수 가게였다. “명인 국수”라고 쓰인 간판. 토요일 오후 5시 47분. 가게는 한산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직 집에 있거나, 술을 마시는 술집으로 가고 있었다. 이른 저녁은 아무도 원하지 않는 시간이었다.

그들은 테이블에 앉았다. 창가 쪽. 홍대 거리가 보였다. 사람들이 걸어 다니고, 자동차들이 지나갔다. 그것은 계속 움직이는 세상이었다. 멈추지 않는 세상. 하지만 세아와 도현이가 앉은 테이블은 정적했다.

“누나, 나 뭔가 물어도 돼?”

도현이가 메뉴를 보지 않으면서 물었다.

“응.”

“너 지금 뭐 하고 있는 거야? 정말로.”

같은 질문이었다. 해늘이 한 질문과. 강리우가 한 질문과. 그리고 세아는 모른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판결이 나올 때까지 기다리고 있어.”

세아가 대답했다.

“그게 아니라.”

도현이가 말했다. “너 요즘 이상해. 진짜로. 나랑 얘기할 때도, 누나 눈이 어딘가 다른 곳을 보고 있어. 누가 누나를 부르면, 3초 뒤에 반응해. 마치 너 신호를 받는 데 3초가 걸리는 것처럼.”

세아는 국수 가게의 천장을 봤다. 깨끗했다. 적어도 고시원의 천장보다는. 곰팡이 자국도 없었다. 누군가 정기적으로 청소했을 것이다.

“내가 뭘 해야 해?”

세아가 물었다. 도현이가 아니라, 자신에게.

“누나, 내 말 들었어? 내가 뭐라고 했는데?”

도현이가 다시 물었다.

“들었어. 내가 이상하다고.”

세아가 대답했다.

“그리고?”

“그리고 내가 뭘 해야 해? 정상으로 돌아가야 해? 어떻게? 누가 나한테 정상의 방법을 가르쳐줄 거야?”

세아의 목소리는 올라가지 않았다. 여전히 낮았다. 여전히 차갑고 명확했다. 하지만 도현이는 그 목소리의 가장자리가 떨리고 있다는 것을 들었다. 마치 수면 아래 움직이는 무언가가 있는 것처럼.

웨이터가 물을 가져왔다. 물과 함께 작은 반찬들. 고추장, 양파, 오이 절임. 세아는 물 한 잔을 집었다. 마셨다. 느리게. 마치 자신이 물이 무엇인지 다시 배우는 중인 것처럼.

“나 엄마한테 전화했어.”

도현이가 말했다.

세아가 물을 놨다. 잔이 테이블에 부딪혔을 때의 소음이 선명했다.

“뭐라고 했어?”

“누나 뭐 하고 있는지 몰라서 자꾸 병원에 가는 것 같다고. 판결 3일 전에 병원을 갔다고. 그리고 지금도 이상하다고.”

도현이가 말했다. “엄마가 뭐라고 생각하는지 알아? 엄마는 누나가 강리우와 아직도 뭔가 있다고 생각해. 아직도 연결되어 있다고.”

세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자신의 어머니가 맞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엄마 말이, 그게 가장 위험하다는 거야. 연결이 끊어지지 않는 게. 왜냐하면 판결이 나와도, 법적으로 끝나도, 심리적으로 끝나지 않기 때문이라고. 엄마가 그렇게 말했어.”

“네 엄마가 심리학자야?”

세아가 물었다. 농담처럼. 하지만 웃지 않았다.

“아니. 그냥 엄마가 아는 거야. 살면서.”

도현이는 메뉴를 열었다. 이제라도 주문을 하려고. 하지만 손가락이 메뉴 위에서 멈췄다. 마치 무언가를 찾을 수 없는 것처럼.

“누나, 나 진짜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모르겠어. 근데 나는 정말 무서워. 너무 무서워.”

도현이가 말했다. 목소리가 작아졌다. “너를 잃을까봐. 진짜로. 강리우는 나한테 뭐가 아니야. 나는 그 사람이 누군지도 모르고, 왜 그 사람이 너를 했는지도 몰라. 하지만 내가 무서운 건, 너가 그 사람을 때문에 사라지는 거야. 조금씩.”

세아는 도현이를 봤다. 처음으로. 진짜로. 그의 눈을 봤다. 그의 눈에는 눈물이 있었다. 흘러내리지 않았지만, 있었다. 마치 물이 가득 찬 잔처럼.

“나는 누나를 더 잃고 싶지 않아. 나는 이미 아버지를 잃었고, 엄마도 제주에 있고, 그리고 나는 혼자였어. 그런데 누나가 있었어. 그래서 나는 누나 때문에 계속 살았어. 근데 이제 누나가 사라지고 있어. 그러면 나는 뭘 가지고 살아야 돼?”

세아는 도현이를 더 이상 볼 수 없었다. 그의 눈이 눈물로 차오르자, 세아의 시각이 흐려졌다. 그것은 자신의 눈물이었다. 오랜 시간 이후로 처음으로. 그것을 느꼈다.

“나 괜찮아. 계속 있을 거야.”

세아가 말했다. 하지만 그것도 거짓이었다.

“거짓말하지 마.”

도현이가 말했다. “나는 너를 속여서 안 돼. 넌 나한테 거짓말할 수 없어. 왜냐하면 너는 나의 모든 거야. 내 어머니도 되어주고, 내 아버지도 되어주고, 내 누나도 되어주는 사람. 그래서 너는 나한테 거짓말할 수 없어.”

웨이터가 다시 왔다. 주문을 물으려고. 하지만 도현이는 손을 들어 기다리라고 했다. 아직이라고. 세아도 메뉴를 보지 않았다.

“내가 뭘 해야 하는지 몰라.”

세아가 말했다. 도현이의 말을 듣고 나서 처음으로. 그것이 진실이었다. 완전한 진실. “나는 강리우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생각했어. 내가 그를 필요로 하는 것은 책임감 때문이라고. 그런데 아니야. 내가 그를 사랑해. 그리고 그것이 내가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야. 왜 나는 자기 자신을 이렇게까지 망칠 수 있는 사람을 사랑할 수 있어?”

도현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단지 들었다. 그것이 필요한 모든 것이었다.

“그리고 더 나쁜 건, 내가 그것을 멈출 수 없다는 거야. 나는 알아. 나는 강리우에게서 벗어나야 한다는 걸 알아. 모두가 나한테 말해. 해늘도, 엄마도, 판사도, 경찰도. 모두가. 하지만 나는 벗어날 수 없어. 왜냐하면 그렇게 하는 순간, 나는 자신이 무엇인지를 잃게 될 것 같으니까.”

세아의 목소리는 이제 떨리고 있었다. 마치 강리우의 손가락처럼. 마치 자신의 손가락처럼. 그것은 신체적인 떨림이었다. 의지의 투쟁이 몸으로 드러난 것이었다.

“넌 강리우가 아니야.”

도현이가 말했다. 단순하게. 명확하게.

“뭐?”

“넌 강리우가 아니야. 넌 너야. 그리고 넌 강리우 없이도 존재할 수 있어. 너는 이미 증명했어. 8개월 동안 이미 증명했어.”

세아는 도현이를 봤다. 그리고 깨달았다. 자신의 남동생이 자신보다 더 명확하게 본다는 것을. 자신의 오빠이자, 어머니이자, 아버지인 사람의 고통을 자신의 것보다 더 선명하게.

“내가 뭘 해야 해?”

세아가 다시 물었다. 이번에는 자신을 향해가 아니라, 도현이를 향해.

도현이는 메뉴를 집었다. 그리고 주문했다.

“일단 밥 먹자. 그리고 내일 병원을 가자. 아니, 이번 주 판결 나기 전에.”

“왜?”

“넌 심리 평가를 받아야 해. 너 혼자는 이걸 못 끝낼 거야. 그래서 누군가 도와줄 사람이 필요해.”

세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자신의 손을 봤다. 떨리고 있었다. 3초마다. 정확하게. 마치 누군가 정해진 규칙에 따라 움직이는 것처럼.

음식이 나왔다. 국수. 두 그릇. 국수는 따뜻했다. 하지만 세아는 먹지 않았다. 단지 보고 있었다. 마치 그것이 자신의 무언가를 말해주기를 기다리는 것처럼.

“먹어.”

도현이가 말했다. 강리우가 아니라, 해늘이 아니라, 자신의 오빠로서.

그리고 세아는 먹었다. 한 숟가락. 또 한 숟가락. 천천히. 마치 자신이 살아 있다는 것을 증명하려는 것처럼. 또는 살아 있으면서도 죽어 있는 것처럼. 그 중간 어딘가에서, 신호를 기다리며.

그들은 국수를 마치고 나왔다. 홍대 거리는 이제 더 붐볐다. 오후 7시. 저녁이 시작되는 시간. 사람들은 술을 마시거나, 영화를 보거나, 친구들과 웃으며 걸어다녔다. 세아와 도현이는 그 사이에 섰다. 그들의 시간은 다른 속도로 흐르고 있었다.

“내일 언제 병원 갈까?”

도현이가 물었다.

“오후 2시?”

세아가 제안했다. 아무 근거 없이.

“알겠어. 내가 찾아볼게. 좋은 병원.”

도현이는 세아의 손을 잡았다. 그들이 어린이였을 때처럼. 제주도에서. 어머니를 기다릴 때처럼. 그렇게 손을 잡았다. 그것은 신호였다. 계속 살아가라는 신호. 혼자가 아니라는 신호.

세아는 손을 놨다. 가려고. 하지만 도현이는 놓지 않았다.

“계속 잡고 있어도 돼?”

도현이가 물었다.

“응.”

세아가 대답했다.

그들은 손을 잡고 홍대 거리를 걸어갔다. 밤 7시 23분. 사람들 사이를. 계속 움직이는 세상 속에서. 그것이 세아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이었다. 걷고, 숨 쉬고, 도현이의 손을 느끼는 것.

오후 11시 47분. 세아는 자신의 고시원에 있었다. 홀로. 도현이는 학원 때문에 먼저 나갔고, 세아는 한강을 따라 걸어 돌아왔다. 한 시간 반을 걸어서.

휴대폰을 열었다. 강리우로부터 새로운 메시지가 없었다. 해늘로부터는 오후 8시에 메시지가 있었다.

“응답해. 진짜로.”

세아는 답장했다.

“내일 병원 간다고 했으니까 기다려.”

해늘의 답장은 즉각적이었다.

“아 진짜. 드디어. 넌 왜 이렇게 오래 걸렸어?”

세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강리우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첫 번째로 그녀가 먼저 연락을 하는 것이었다.

“판결이 나올 때까지, 우리는 연락하지 않기로 하자.”

강리우의 답장은 오래 걸렸다. 10분. 15분. 20분. 그리고 마침내 왔다.

“알겠어. 그렇게 하자. 세아. 미안해.”

그것이 마지막 메시지였다. 세아는 그 메시지를 읽고, 다시 읽고, 또 다시 읽었다. 마치 그것이 무언가를 의미할 것처럼. 하지만 그것은 단지 단어들이었다. 글자들이었다.

세아는 휴대폰을 내려놓고 천장을 봤다. 곰팡이 자국들이 있었다. 마치 지도처럼. 어딘가로 가는 길을 보여주는 지도처럼. 하지만 그 지도는 끝이 없었다. 어디도 도달하지 못하는 길을 가리키고 있었다.

밤 11시 53분. 세아의 손은 떨리지 않고 있었다. 처음으로 오늘.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세아는 알지 못했다. 회복인지, 아니면 더 깊은 절망의 시작인지.

그녀는 침대에 누웠다. 그리고 도현이의 손이 자신의 손을 잡고 있던 느낌을 기억했다. 그것이 유일한 신호였다. 계속 살아가라는. 혼자가 아니라는.

그것으로 충분했다. 지금은.

# 손을 놓지 말아줘

## 1부: 중간의 장소

도현이는 그 사이에 섰다. 말 그대로, 물리적으로 그 사이에. 세아와 도현이 사이의 공기가 얼마나 무거운지, 얼마나 조밀한지를 느낄 수 있을 정도로. 마치 그들의 시간이 다른 속도로 흐르고 있었다. 세아의 시간은 느려서 마치 영화를 느린 속도로 재생하는 것처럼 보였고, 도현이의 시간은 빨라서 자꾸만 앞으로 나아가려고 했다. 그 차이를 메우기 위해 도현이는 그 불편한 중간에 서 있었다.

고시원의 좁은 거실이었다. 형광등이 차가운 빛을 내뿜고 있었고, 그 빛 아래에서 세아의 얼굴은 더욱 창백해 보였다. 도현이는 세아를 자세히 봤다. 눈 밑의 검은 그림자, 입술의 창백함, 그리고 무언가를 결정해야 한다는 무게감으로 굽어진 어깨. 그녀는 마치 투명해 지고 있는 중인 것처럼 보였다. 언제라도 사라질 수 있을 것 같은 느낌. 도현이는 그것을 참을 수 없었다.

“내일 언제 병원 갈까?”

도현이가 물었다. 목소리는 최대한 평범하려고 애썼지만, 그 안에는 절박함이 숨어 있었다. 언제? 어디? 누가? 이런 질문들이 아니라, 언제? 라는 단순한 질문으로 축약된 것이었다. 그것은 마치 ‘계속 살아갈 거지? 내 곁에 남아 있을 거지?’라고 묻는 것과 같은 질문이었다.

세아는 한참을 생각했다. 도현이는 그 침묵 속에서 세아의 뇌가 계산하는 모습을 상상할 수 있었다. 병원의 진료 시간, 대기 시간, 그리고… 그 이후의 시간들. 진단과 판결의 시간. 그 모든 것이 그 순간의 침묵 속에 응축되어 있었다.

“오후 2시?”

세아가 제안했다. 아무 근거 없이. 그냥 떠오른 시간이었다. 오후 2시. 정오의 열기가 한풀 꺾인 시간. 낮이 여전히 충분하지만, 이미 내려가기 시작한 태양. 그것이 왠지 가장 중립적인 시간처럼 느껴졌다.

“알겠어. 내가 찾아볼게. 좋은 병원.”

도현이는 마치 그것이 가장 중요한 일인 것처럼 말했다. 실제로, 그에게는 그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병원을 찾는 것. 좋은 병원을 찾는 것. 세아가 가야 할 장소를 정하는 것. 그것은 세아가 아직도 결정할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아직도 선택권이 있다는 것. 아직도 살아간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리고 도현이는 세아의 손을 잡았다.

그것은 갑작스러운 움직임이었다. 마치 미리 계획된 것처럼 자연스러웠지만, 동시에 예상 밖이었다. 도현이의 손은 따뜻했다. 손가락들은 길었고, 손바닥은 약간 축축했다. 신경 쓰고 있다는 증거. 도현이도 이 순간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고 있었다.

“이건…”

세아가 말을 시작했지만, 도현이가 손을 더 강하게 잡았다.

“제주도에서처럼.”

도현이가 속삭였다. “우리가 어린이였을 때처럼. 어머니를 기다릴 때처럼. 그렇게.”

제주도. 세아는 그 단어를 들은 순간, 어린 시절의 기억이 밀려오는 것을 느꼈다. 하얀 모래사장. 파도 소리. 그리고 도현이의 손. 그때 도현이의 손은 더 작았고, 더 부드러웠고, 더 단순했다. 그것은 보호와 공포의 혼합이었다. 어머니가 사라질까봐 무서워하면서도, 형의 손을 잡으면 괜찮을 거라는 믿음. 어린 아이의 순수한 믿음.

지금도 같은가?

지금도 형의 손을 잡으면 괜찮을까?

그것은 신호였다. 도현이의 손의 압력이. 계속 살아가라는 신호. 혼자가 아니라는 신호. 나를 떠나지 말아달라는 신호. 모든 것이 그 손의 온기 속에 있었다.

세아는 손을 놓으려고 했다. 가려고. 도현이의 손을 떨어뜨리고, 고시원 너머로, 그 모든 것 너머로. 하지만 도현이는 놓지 않았다. 그것은 거의 완강했다. 강렬했다. 세아가 도망칠 수 없을 정도로.

“계속 잡고 있어도 돼?”

도현이가 물었다. 그의 목소리는 흔들리고 있었다. 세아는 처음으로 도현이도 이 상황에서 약해 보인다는 것을 깨달았다. 형도 두려워하고 있구나. 형도 나를 잃을까봐 무서워하고 있구나.

그 깨달음은 가혹했다. 왜냐하면 세아는 자신이 그 두려움의 원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응.”

세아가 대답했다. 그것이 전부였다. 응. 한 글자. 하지만 그것은 모든 것을 의미했다. 계속 잡고 있어도 된다. 나를 놓지 말아달라. 나를 남겨두지 말아달라.

## 2부: 움직이는 세상

그들은 손을 잡고 홍대 거리를 걸어갔다.

밤 7시 23분. 정확한 시간. 도현이가 휴대폰을 확인했을 때의 시간이었다. 세아는 왜 도현이가 그 시간을 확인하려고 했는지 알았다. 이 순간을 기억하고 싶어서였다. 이 순간이 실제로 일어났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어서였다.

홍대 거리는 활기찼다. 금요일 저녁. 젊은이들이 몰려다녔다. 대학생들, 직장인들, 데이트하는 커플들, 친구들 사이에서 웃음을 터뜨리는 사람들. 모두가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시간과 함께. 세상과 함께.

세아와 도현이도 그들 사이를 걸어갔다. 그들의 손은 계속 맞닿아 있었다. 때로는 군중에 밀렸을 때, 손이 더 강하게 조여졌다. 마치 서로를 놓칠까봐 무서워하는 것처럼.

“거기 봤어? 새로 생긴 카페.”

도현이가 말했다. 세아가 대답하지 않자, 도현이는 계속했다.

“나중에 가볼까? 커피 마시면서 공부도 하고.”

세아는 도현이를 바라봤다. 형의 얼굴은 밝으려고 애쓰고 있었다. 최대한 평범하게, 최대한 정상적으로 보이려고. 마치 이것이 그냥 평범한 저녁이고, 그냥 평범한 형제의 산책이고, 내일이 그냥 평범한 내일인 것처럼.

“응.”

세아가 말했다. 그것도 단순한 대답이었다. 하지만 도현이는 그 단어 속에서 희망을 찾아냈다. 응. 그것은 ‘계속 살아가겠다’는 의미였다. 최소한, 내일까지는.

사람들은 그들을 지나쳤다. 누구도 그들을 주목하지 않았다. 두 명의 젊은이, 손을 잡고 있는 형제. 그것은 특별할 것 없어 보였다. 평범했다.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로 평범했다.

하지만 세아에게는 그것이 가장 중요한 순간이었다. 계속 움직이는 세상 속에서, 자신도 움직이고 있다는 것. 정지하지 않았다는 것. 아직도 살아 있다는 것.

“도현아.”

세아가 말했다.

“뭐?”

도현이가 고개를 돌렸다.

“고마워.”

도현이의 얼굴이 부드러워졌다. 그리고 그는 웃었다. 진심의 웃음은 아니었지만, 최선을 다한 웃음이었다.

“뭘. 형이 할 일이지.”

홍대 거리는 계속 움직였다. 사람들은 계속 지나갔다. 도현이와 세아도 계속 걸었다. 한 발, 한 발씩. 손을 놓지 않고. 숨을 쉬면서. 계속. 계속. 계속.

그것이 세아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이었다. 걷고, 숨 쉬고, 도현이의 손을 느끼는 것. 그 손의 온기. 그 손의 압력. 그 손이 의미하는 바.

## 3부: 혼자

오후 11시 47분.

세아는 자신의 고시원에 있었다. 홀로. 방은 조용했다. 거리의 소음도 여기까지는 거의 들리지 않았다. 창문 너머로는 다른 고시원들의 불빛들만 보였다. 누군가는 공부하고 있을 것이고, 누군가는 자고 있을 것이고, 누군가는 인터넷을 하고 있을 것이고.

누군가는 죽음을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도현이는 학원 때문에 먼저 나갔다. 토요일이 있으니까, 그에게는 아직도 해야 할 일들이 있었다. 공부할 것들이, 미래가, 계획이. 도현이의 삶은 계속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세아는 한강을 따라 걸어 돌아왔다. 홍대에서 한강까지. 한 시간 반. 목표도 없이, 생각도 정리되지 않은 채로. 그냥 걷고 싶었다. 계속 움직이고 싶었다. 멈추면 모든 것이 다시 눌려올까봐.

고시원의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세아는 처음으로 혼자라는 것을 의식했다. 도현이의 손을 더 이상 느낄 수 없었다. 손가락들 사이의 간격. 손바닥의 온기. 그것이 모두 사라졌다.

휴대폰을 열었다.

강리우로부터 새로운 메시지가 없었다. 마지막 메시지는 아침이었다. 아침에 뭔가를 물어봤던 것 같은데, 세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할 수 없었다. 강리우에게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랐다.

해늘로부터는 오후 8시에 메시지가 있었다.

“응답해. 진짜로.”

강박적인 느낌. 해늘은 항상 그랬다. 집착적이었다. 세아의 모든 것을 알고 싶어 했다. 세아의 생각, 세아의 감정, 세아의 계획. 친구라는 이름으로 통제하려고 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에는, 그 집착이 사랑처럼 느껴졌다.

세아는 답장했다.

“내일 병원 간다고 했으니까 기다려.”

해늘의 답장은 즉각적이었다. 알림음이 울렸다. 곧바로.

“아 진짜. 드디어. 넌 왜 이렇게 오래 걸렸어?”

세아는 그 메시지를 읽고, 손가락을 들었다가 내려놨다. 여러 번.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랐기 때문이다. 왜 이렇게 오래 걸렸나? 그 질문에 대한 답은 너무 길고, 너무 복잡하고, 너무 아팠다.

대신 강리우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첫 번째로 그녀가 먼저 연락을 하는 것이었다.

“판결이 나올 때까지, 우리는 연락하지 않기로 하자.”

손가락이 떨렸다. 화면에 글자를 입력하는 내내. 이것이 올바른 결정인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계속해야 했다. 보내야 했다. 이 문장을 끝내야 했다. 이 관계를 끝내야 했다.

강리우의 답장은 오래 걸렸다.

10분.

세아는 휴대폰을 내려놨다. 천장을 봤다. 곰팡이 자국들이 있었다. 누렇고 검은 얼룩들. 마치 지도처럼. 어딘가로 가는 길을 보여주는 지도처럼. 하지만 그 지도는 끝이 없었다. 어디도 도달하지 못하는 길을 가리키고 있었다.

15분.

세아는 휴대폰을 다시 들었다. 여전히 아무것도 없었다. 강리우는 이 메시지를 읽고 뭘 생각했을까? 화났을까? 슬펐을까? 아니면 안도했을까?

20분.

침대에 누웠다. 천장의 곰팡이 자국을 계속 봤다. 그것은 지도였다. 혼돈의 지도. 길을 잃은 자의 지도.

그리고 마침내, 알림음이 울렸다.

“알겠어. 그렇게 하자. 세아. 미안해.”

그것이 마지막 메시지였다.

“미안해.”

왜? 뭐가 미안한 거야? 세아는 그 메시지를 읽고, 다시 읽고, 또 다시 읽었다. 마치 그것이 무언가를 의미할 것처럼. 마치 그 두 단어가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을 것처럼.

하지만 그것은 단지 단어들이었다. 글자들이었다. 음파였다. 화면의 픽셀들이었다. 의미가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아무것도 아닌 것.

세아는 휴대폰을 내려놨다. 손가락이 떨리고 있었다. 아니, 떨리고 있지 않았다. 처음으로 오늘, 손이 떨리지 않고 있었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세아는 알 수 없었다. 회복인지, 아니면 더 깊은 절망의 시작인지. 마비인지, 아니면 해방인지.

## 4부: 밤의 물리학

밤 11시 53분.

6분이 남았다. 하루가 끝나기까지 6분.

세아는 침대에 누웠다. 고시원의 좁은 침대. 매트리스는 딱딱했고, 베개는 평평했다. 하지만 이것이 집이었다. 유일한 공간이었다. 세상으로부터 자신을 분리시킬 수 있는 유일한 장소.

그리고 그녀는 도현이의 손이 자신의 손을 잡고 있던 느낌을 기억했다.

그것은 몸의 기억이었다. 신체가 간직한 기억. 손가락들이 엮인 느낌. 손바닥이 맞닿은 감각. 도현이의 손의 맥박. 그것을 자신의 손 위에서 느꼈던 순간.

손은 신경이 가장 많이 집중된 신체 부위였다. 손끝에는 수백 개의 신경 말단이 있었다. 그것들이 모두 신호를 보냈다. 따뜻함. 압력. 안전. 연결.

“도현아.”

세아가 어둠 속에서 중얼거렸다.

“너는 왜 나를 놓지 않는 거야?”

당연히 대답은 없었다. 도현이는 여기 없었다. 도현이는 학원에 가 있었다. 아마도 수학 문제를 풀고 있을 것이다. 함수, 미분, 적분. 계산 가능한 것들. 답이 있는 것들.

세아의 삶은 그렇지 않았다. 계산할 수 없었다. 답이 없었다.

하지만 도현이의 손은 있었다. 적어도 오후 7시 23분부터 오후 8시쯤까지는. 그 손은 계산할 수 없는 것 하나를 증명했다. 사랑. 또는 그 무언가.

세아는 자신의 손을 들어올렸다. 어둠 속에서. 손가락들을 펼쳤다. 도현이가 잡았던 손가락들. 엄지와 검지 사이의 공간. 그곳에 도현이의 손가락이 있었다. 오후 7시 23분에.

지금은 없었다. 지금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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