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아닌 것을 위해 불탄 소녀 – 제123화: 불이 꺼지는 속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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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23화: 불이 꺼지는 속도

해늘의 기계음이 계속되었다. 타투 바늘의 웅웅거림. 그것은 세아에게는 낯익은 소리였다. 해늘의 타투샵에서 몇 번이고 들었던 소리. 그 소리는 고통의 소리이면서 동시에 변화의 소리였다. 무언가 피부에 영구적으로 새겨지는 순간의 소리.

“너 언제부터 편의점 다시 나가?”

해늘이 물었다. 기계음 사이로.

“안 나갔어. 그냥… 왔어.”

세아가 대답했다.

“왜?”

해늘이 물었다. 그것은 “뭐 하는 거야?”라는 뜻이었다. 그것은 “정신 차려”라는 뜻이었다. 하지만 해늘은 그것을 직접 말하지 않았다. 해늘은 알고 있었다. 세아가 지금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직접적인 비난이 아니라, 조용한 함께함을. 그래서 해늘은 단지 물었을 뿐이다.

세아는 라면 상자들을 다시 봤다. 그것들은 여전히 정렬되어 있었다. 누군가 새로운 알바생이 정렬해놨을 것이다. 세아가 하던 일을 계속하는 누군가가. 세아는 자신의 일이 이미 대체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자신이 떠난 지 얼마나 되었나? 한 주? 아니, 더 오래된 것 같다. 시간이 흐릿하다. 시간이 흘러갈수록 세아는 자신이 이 세상에서 얼마나 작은 존재인지를 깨닫고 있었다. 편의점에서 대체되는 손. 라면을 정렬하는 손. 그것은 누구의 손이든 상관없었다. 모두 같은 일을 했고, 모두 같은 속도로 움직였고, 모두 같은 무표정으로 일했다.

“세아.”

해늘의 목소리가 더 가까워졌다. 기계음이 멈췄다. 아마도 타투를 중단하고 전화에만 집중하는 것 같았다.

“응.”

세아가 대답했다.

“병원에서 뭔가 있었어?”

해늘이 물었다.

세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편의점의 형광등을 봤다. 그 형광등은 계속 울렁거렸다. 마치 숨을 쉬는 것처럼. 들숨. 날숨. 불안정한 호흡. 그 형광등이 언제 꺼질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꺼질 것은 확실했다. 모든 불은 결국 꺼진다. 그것이 불의 숙명이었다. 밝다가 어두워진다. 그렇게 끝난다.

“세아?”

해늘이 다시 물었다.

“음… 강리우를 봤어.”

세아가 말했다. 천천히. 마치 자신이 이 말을 처음으로 하고 있다는 것처럼.

“병원에서?”

해늘이 확인했다.

“응. 그 애… 뭔가 달라졌어.”

세아가 말했다.

“뭐가?”

해늘이 물었다.

세아는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몰랐다. 강리우의 손가락들이 더 이상 떨리지 않는다는 것? 아니다. 그것은 거짓이었다. 그 손가락들은 여전히 떨렸다. 하지만 이제 그 떨림이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더 이상 거부의 떨림이 아니었다. 그것은 항복의 떨림이었다. 자신이 패배했다는 것을 인정하는 떨림.

“손이… 침착해진 것 같아. 아니, 그게 아니라… 포기한 것 같아.”

세아가 말했다.

“포기?”

해늘이 물었다.

“응. 지금까지 강리우는… 뭔가를 붙잡으려고 했어. 자신을 붙잡으려고. 또는 나를 붙잡으려고. 근데 이제는… 더 이상 붙잡지 않는 것 같아. 손가락이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아.”

세아가 말했다.

침묵이 흘렀다. 전화 너머의 긴 침묵. 해늘은 그 침묵을 가득 채우지 않았다. 해늘은 알고 있었다. 때로는 침묵이 말보다 더 큰 의미를 가진다는 것을.

“그게 좋은 거야? 나쁜 거야?”

해늘이 마침내 물었다.

세아는 라면 상자를 한 개 들어올렸다. 신라면. 빨간 상자. 그것의 무게는 가벼웠다. 종이 상자. 그 안에는 스티로폼 컵과 면이 들어 있을 것이다. 그리고 누군가는 이 라면을 끓여 먹을 것이고, 국물을 마실 것이고, 면을 흡입할 것이다. 그러면 이 라면은 사라질 것이다. 대체될 것이다. 또 다른 라면이 이 자리를 차지할 것이다. 그렇게 계속될 것이다.

“모르겠어.”

세아가 대답했다. 라면 상자를 다시 내려놓으면서.

“법정까지 3주 남았어. 그 사이에 넌 뭘 할 거야?”

해늘이 물었다.

“살아야지.”

세아가 말했다. 이전처럼. 마치 그것이 가장 간단한 일인 것처럼.

“살아? 그게 뭐야, 세아? 편의점을 다니는 거? 병원을 방문하는 거? 고시원에서 천장을 보는 거?”

해늘이 목소리를 높였다. 처음으로. 그것은 분노가 아니었다. 그것은 절망이었다. 친구를 잃어가고 있다는 절망.

“응. 그런 거.”

세아가 조용히 말했다.

“세아. 넌 지금 죽어가고 있어. 아직 살아있지만, 죽어가고 있어.”

해늘이 말했다.

세아는 해늘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해늘이 맞았기 때문이다. 세아는 지금 죽어가고 있었다. 천천히. 눈에 띄지 않을 정도로. 마치 곰팡이가 천장을 뒤덮는 것처럼. 마치 형광등이 서서히 어두워지는 것처럼.

“언제 타투샵 와. 집에 있지 말고. 혼자 있지 말고. 우리 타투샵에 와.”

해늘이 명령조로 말했다.

“좀 쉬고 싶어.”

세아가 말했다.

“쉬는 게 아니라 죽는 거야. 그거 모르겠어?”

해늘이 말했다.

전화는 끊겼다. 해늘이 먼저 끊었다. 그것은 화난 것 때문이 아니라, 더 이상 말할 것이 없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세아는 그것을 이해했다. 해늘은 세아를 구하기 위해 손을 뻗고 있었고, 세아는 그 손을 계속 놓치고 있었다. 누구의 잘못도 아니었다. 그것은 단지 두 사람의 손이 만나는 거리가 너무 멀다는 것일 뿐이었다.

세아는 편의점을 나갔다. 합정동의 밤거리로. 밤은 더 진해졌다. 자정이 지났을 것이다. 또는 거의 지났을 것이다. 세아는 시간을 확인하지 않았다. 시간을 확인하는 것도 에너지가 필요했다. 시간을 보고, 읽고, 이해하고, 그것이 자신의 인생에서 무엇을 의미하는지 생각하는 것. 그것은 모두 너무 많은 에너지를 요구했다.

한강변으로 향했다. 합정역 근처의 한강공원. 밤의 한강은 검었다. 물이 검다는 것이 아니라, 빛이 없어서 물이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세아는 난간에 기댔다. 차갑고 딱딱한 철제 난간. 그것은 현실적이었다. 그것은 세아가 여기에 실제로 있다는 것을 증명했다. 고시원이 아닌. 편의점이 아닌. 병원이 아닌. 여기, 한강변에.

“뭐 하는 거야?”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세아는 돌아봤다. 그곳에는 남자가 서 있었다. 나이는 아마도 60대일 것 같았다. 낡은 옷을 입고 있었고, 손에는 캔맥주를 들고 있었다. 아마도 노숙자일 것이었다. 또는 노숙자에 가까운 누군가.

“그냥… 있어.”

세아가 대답했다.

“혼자?”

남자가 물었다.

“응.”

세아가 대답했다.

남자는 세아 옆에 기댔다. 난간에. 그리고 함께 검은 한강을 봤다. 아무도 말을 하지 않았다. 그들은 단지 함께 있었다. 낯선 두 사람이. 한강 위의 검은 물 앞에서.

“저도 혼자예요.”

남자가 말했다. 얼마 후.

“응.”

세아가 대답했다.

“그래도… 여기는 좋아요. 밤의 한강은 기분이 좋아요. 아무것도 안 보이거든. 아무것도 안 보이면… 아무것도 없는 것 같아요.”

남자가 말했다.

세아는 남자의 말을 들었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그것이 가장 명확한 진실처럼 들렸다. 아무것도 안 보이면, 아무것도 없는 것 같다. 그것은 철학이 아니었다. 그것은 단지 사실이었다. 인간의 인식은 그렇게 약했다. 보이지 않으면 없는 것이다. 보이지 않으면 안전하다.

“맥주 마실래요?”

남자가 캔맥주를 세아에게 건넸다.

세아는 그것을 받았다. 차갑고 축축한 캔. 그것의 무게는 가벼웠다. 마시면서 가벼워질 것이다. 세아는 캔을 열었다. “쏴악” 하는 소리. 그것은 밤의 한강에서 가장 큰 소리였다. 그리고 세아는 마셨다. 맥주는 쓰고 차가웠다. 입안에서 혀를 자극했다. 살아있다는 증거. 맛을 느낀다는 증거.

“좋아요?”

남자가 물었다.

“응. 좋아.”

세아가 대답했다. 거짓이 아니었다. 지금 이 순간, 맥주는 정말로 좋았다.

남자는 자신의 캔을 마셨다. 길고 천천히. 마치 그것이 유일한 즐거움인 것처럼. 아마도 그것이 유일한 즐거움일 것이었다.

“저는… 여기서 30년을 살았어요.”

남자가 말했다.

“한강변에?”

세아가 물었다.

“응. 집이 있었어요. 저쪽에. 아파트. 근데 어느 날 갑자기… 없어졌어요.”

남자가 말했다.

“어떻게?”

세아가 물었다.

“재개발. 그것이 서울이거든요. 어디든 재개발은 와요. 그리고 모든 것이 사라져요. 집도, 사람도, 추억도.”

남자가 말했다.

세아는 남자의 말을 들었다. 그리고 자신과 남자가 비슷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남자도 어떤 것을 잃었고, 세아도 어떤 것을 잃었다. 남자는 집을 잃었고, 세아는… 무엇을 잃었나? 목소리? 꿈? 아니면 자신?

“근데 살아야 하잖아요.”

남자가 말했다.

“응. 살아야지.”

세아가 대답했다.

“그래서 여기서 살아요. 한강변. 밤마다 여기 와서 맥주를 마셔요. 그리고 아무것도 안 보일 때, 아무것도 없을 때… 조금 나아져요. 조금.”

남자가 말했다.

세아는 남자를 봤다. 정확히. 처음으로. 남자의 얼굴을 읽으려고 하는 것처럼. 그 얼굴에는 절망이 있었다. 하지만 동시에 뭔가 다른 것도 있었다. 살아가는 방식. 어떤 형태의 저항. 절망하면서도 매일 밤 한강변으로 나오는, 그런 저항.

“저… 법정에 가야 해요.”

세아가 갑자기 말했다.

“왜요?”

남자가 물었다.

“어떤 사람이… 날 다치게 했어요. 그리고 나는… 그것을 증명해야 해요. 법정에서.”

세아가 말했다.

남자는 세아를 봤다. 오래 동안. 마치 그녀의 영혼을 읽으려고 하는 것처럼.

“그럼 해야 해요.”

남자가 말했다.

“근데… 정말로 이겨질까요? 정말로 뭔가 바뀔까요?”

세아가 물었다.

“모르겠어요. 근데… 싸워봐야 알 거 아니에요.”

남자가 말했다.

세아는 남자의 말을 들었다. 그것은 큰 위로는 아니었다. 하지만 솔직했다. 그것은 거짓이 아니었다. 거짓과 약속이 아니었다. 단지 현실이었다. 싸워봐야 알 거다. 그게 전부였다.

밤 2시가 되었을 때, 세아는 남자와 헤어졌다. 남자는 한강변의 벤치로 돌아가갔고, 세아는 고시원으로 향했다. 합정동의 밤거리를 지나면서, 세아는 자신이 여전히 살아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불이 완전히 꺼지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희미하지만, 불은 여전히 타고 있었다.

고시원에 돌아갔을 때, 장판은 여전히 기다리고 있었다. 마치 세아가 떠나지 않았다는 것처럼. 고양이의 세계에서는 시간이 다르게 흐르는 것 같았다. 또는 시간이 흐르지 않는 것 같았다.

세아는 침대에 누웠다. 그리고 천장을 봤다. 곰팡이는 여전히 거기 있었다. 초록색으로. 천천히 자라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 세아는 그것을 다르게 봤다. 곰팡이는 죽음이 아니었다. 곰팡이는 변화였다. 느리지만, 분명한 변화. 어떤 형태의 성장.

휴대폰이 울렸다. 새벽 3시. 도현이었다.

“누나?”

도현의 목소리가 들렸다. 긴장되어 있었다.

“응. 뭐야?”

세아가 물었다.

“엄마가… 아파. 열이 높아. 병원에 가야 할 것 같은데… 돈이…”

도현이 말했다. 말을 마치지 못하고.

세아는 일어났다. 침대에서. 그 순간, 무언가가 변했다. 곰팡이가. 불이. 자신의 심장이. 어떤 것이 움직였다. 도현이 필요했다. 어머니가 필요했다. 그리고 세아는… 돌아가야 했다.

“제주로 가. 내가 가는 길에 만나.”

세아가 말했다.

“근데… 재판?”

도현이 물었다.

“재판은 서울에서 하면 돼. 그 전에… 엄마를 봐야겠어.”

세아가 말했다.

그리고 그 순간, 세아는 처음으로 자신의 인생에서 무언가를 선택한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강요된 것이 아니라. 절박함으로 인한 것도 아니라. 단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선택한 것.

새벽 4시, 세아는 고시원의 짐을 싸기 시작했다. 옷 몇 장. 세렌. 휴대폰 충전기. 그리고 장판. 고양이를 상자에 넣었다. 고양이는 울음을 냈다. 새로운 여행의 시작을 알리는 울음.

공항으로 향하는 택시 안에서, 세아는 자신의 손을 봤다. 손가락들이 떨리지 않았다. 강리우의 손가락들처럼. 대신 그 손은 결정의 손이었다. 선택의 손. 제주로 향하는 손.

비행기는 새벽 6시에 이륙했다. 창문을 통해 서울의 불들이 보였다. 형광등처럼. 희미하게. 하지만 점점 더 멀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불들이 완전히 사라질 때, 무언가가 새롭게 시작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세아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처음으로, 오랫동안, 깊게 잠을 자기 시작했다.

# 확장된 화면

## 1부: 밤의 대화

그것은 큰 위로는 아니었다. 하지만 솔직했다.

세아는 한강변 벤치에 앉아 있는 남자의 얼굴을 다시 한 번 바라봤다. 가로등의 불빛이 그의 얼굴을 반쯤 비추고 있었고, 그 반쯤 밝은 표정에서 세아는 무언가 진실한 것을 감지할 수 있었다. 그것은 거짓이 아니었다. 거짓과 약속이 아니었다. 그저 현실이었을 뿐이다.

“싸워봐야 알 거다,” 남자가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낮고 차분했다. “누구나 처음부터 강한 건 아니야. 강해지려면 먼저 부러져야 해. 그리고 그 과정에서 자신이 얼마나 끈질긴지 알게 되는 거지.”

세아는 그의 말을 천천히 씹고 있었다. 언어를 씹듯이. 그의 단어들이 자신의 입 안에서 맴돌고 있었다. 그것은 희망의 언어가 아니었다. 희망은 너무 가볍고, 너무 쉽게 부서지는 것이었다. 이것은 다른 것이었다. 더 견고한 것. 더 진정한 것.

“그게… 전부야?” 세아가 물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작았다. 거의 속삭임에 가까웠다. “싸워야 하고, 부러지고, 다시 일어나고… 그게 전부라는 거야?”

“응. 그게 전부다.”

남자는 한강을 바라보고 있었다. 강물은 어둠 속에서 검은색으로 보였다. 마치 절대 빛을 반사하지 않을 것 같은, 그런 검은색이었다. 하지만 가끔씩, 가로등의 불빛이 물 위에 닿을 때마다, 강물은 은색의 작은 조각들로 반짝였다.

세아의 손가락들이 벤치의 나무를 더듬고 있었다. 나무의 질감. 울퉁불퉁한 페인트. 햇빛에 바래진 부분들. 그것이 현실이었다. 만질 수 있는 것. 눈으로 볼 수 있는 것. 부정할 수 없는 것.

“너는… 이제 뭘 할 거야?” 남자가 물었다. “재판은?”

“재판은 재판이고… 일단은 싸워야겠지.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전부니까.”

세아가 말했다. 그리고 그 순간, 그녀 자신도 자신의 목소리에 놀랐다. 그 목소리가 이전의 목소리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이전의 목소리는 계산적이고, 전략적이고, 항상 다음 수를 생각하고 있는 목소리였다. 하지만 지금의 목소리는 달랐다. 더 단순했다. 더 직접적이었다. 마치 누군가 다른 사람이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것은 그녀 자신이었다.

남자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의 눈이 세아의 눈을 만났다. 그 눈빛 속에는 어떤 기대도 없었다. 그저 인정만 있었다. 그것이 더 강력했다.

“그럼 충분해. 충분하다고.”

그들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침묵 자체가 대화였다. 침묵 속에는 더 많은 것들이 있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들. 감정의 계층들. 이해와 공감의 미세한 결정체들.

한강에서 부는 바람이 세아의 머리를 헝클었다. 그 바람은 차갑고, 물 냄새를 가지고 있었다. 강의 냄새. 도시의 냄새. 밤의 냄새. 세아는 그 냄새를 깊게 들이마셨다. 자신이 아직 살아있다는 증거처럼.

“내가 이겨야 한다는 생각은… 언제 생겼어?” 세아가 갑자기 물었다. “나는 계속 ‘어떻게 이기지?’만 생각했어. 이길 수 있는지도 모르면서. 그런데 지금은… 이기고 싶어. 진짜로.”

그것은 작은 차이였다. 하지만 세아는 그것이 얼마나 큰 차이인지 알 수 있었다. 이기기 위해 싸우는 것과 살아가기 위해 싸우는 것. 그것은 다른 차원의 싸움이었다.

남자는 웃음을 흘렸다. 작은 웃음이었다. 거의 한숨에 가까운 웃음이었다.

“그럼 이미 반은 이긴 거야.”

## 2부: 밤의 귀로

밤 2시가 되었을 때, 세아는 남자와 헤어졌다.

택시를 탈 때, 세아는 뒤를 돌아봤다. 남자는 여전히 벤치에 앉아 있었다. 가로등의 불빛 아래에서. 마치 그가 그 벤치에서 영원히 앉아있을 것 같은 모습으로. 하지만 세아는 이제 알았다. 그것이 사람의 본질이라는 것을. 모두가 자신만의 벤치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자신만의 어둠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 어둠 속에서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택시는 한강변을 떠나 합정동의 밤거리로 향했다.

합정동의 밤은 이상하게 아름다웠다. 클럽의 네온사인들이 거리를 붉게 물들이고 있었고, 편의점의 형광등이 푸르게 번쩍거렸다. 취한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들렸고, 어딘가에서는 누군가의 울음소리도 들렸다. 밤은 낮의 가면을 벗은 도시의 진짜 모습이었다.

“여기서 내려주세요.”

세아가 택시 기사에게 말했다. 고시원이 있는 골목 입구였다. 택시 기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계미터를 켰고, 세아가 돈을 건넸다. 거스름돈을 받지 않았다. 택시 기사는 그것을 당연하다는 듯이 받아들였다.

골목으로 들어서면서, 세아는 자신이 여전히 살아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것은 별로 대단한 깨달음은 아니었다. 하지만 중요했다. 불이 완전히 꺼지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희미하지만, 불은 여전히 타고 있었다. 세아의 가슴 속에서. 그것은 희망의 불이 아니었다. 그것은 더 근본적인 것이었다. 생존의 불. 계속 나아가려는 욕구의 불.

골목의 벽에는 낙서들이 있었다. 누군가의 이름들. 누군가의 감정들. “I love you”라고 쓰인 낙서가 있었고, “Help me”라고 쓰인 낙서도 있었다. 그 모든 것들이 동시에 존재했다. 사랑과 절망. 희망과 절망. 그것이 인생이었다.

세아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고시원이 보이고 있었다. 그 작은 건물. 그녀의 임시적인 보금자리.

## 3부: 귀환과 재발견

고시원에 돌아갔을 때, 장판은 여전히 기다리고 있었다.

마치 세아가 떠나지 않았다는 것처럼. 고양이는 문을 열자마자 발목에 몸을 비비며 울음을 냈다. 그 울음은 항의의 울음이었다. 외로움의 울음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반가움의 울음이기도 했다. 고양이의 세계에서는 모순이 동시에 존재할 수 있었다.

“미안해. 장판.”

세아가 고양이를 집어 올렸다. 고양이는 가볍고, 부드럽고, 따뜻했다. 생명의 무게였다. 세아는 고양이를 가슴에 안았다. 그리고 그 순간, 뭔가 부드러워지는 느낌을 받았다. 자신의 마음이 조금씩 부드러워지는 느낌.

고시원은 여전히 좁고, 어둡고, 곰팡이 냄새가 났다. 하지만 지금 그것은 세아에게 비난의 대상이 아니었다. 그것은 그저 그녀의 현실이었다. 그리고 현실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어떤 종류의 해방이었다.

침대에 누웠을 때, 세아는 천장을 봤다. 곰팡이는 여전히 거기 있었다. 초록색으로. 천천히 자라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 세아는 그것을 다르게 봤다.

곰팡이는 죽음이 아니었다. 세아가 처음에 생각했던 것처럼 절망의 상징이 아니었다. 곰팡이는 변화였다. 느리지만, 분명한 변화. 어떤 형태의 성장. 곰팡이는 살아있고, 움직이고, 변하고 있었다. 그것은 죽음의 반대였다. 그것은 생명이었다.

세아의 눈이 곰팡이를 따라갔다. 초록색 반점들이 벽을 따라 퍼져나가고 있었다. 무질서해 보이지만, 어떤 논리가 있는 것 같은 패턴으로. 마치 누군가의 꿈처럼. 마치 누군가의 인생처럼.

휴대폰이 울렸다.

새벽 3시. 화면에는 “도현”이라는 글자가 떠올랐다. 그 글자를 보는 순간, 세아의 심장이 철렁했다. 도현이는 절대 새벽 3시에 전화를 걸지 않았다.

세아가 전화를 받았다.

“응. 뭐야?”

그녀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미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형제자매 사이의 그 미묘한 감각. 피의 연결. 영혼의 통신.

“누나?” 도현의 목소리가 들렸다. 긴장되어 있었다. 거의 떨리고 있었다. “엄마가… 아파. 열이 높아. 병원에 가야 할 것 같은데… 돈이…”

도현이 말을 마치지 못했다. 세아는 그 침묵 속에서 모든 것을 들을 수 있었다. 아버지가 떠난 후, 어머니가 혼자 해왔던 것들. 그 모든 무게. 그 모든 짐. 그리고 이제 도현이가 그 무게의 일부를 짊어지고 있다는 것.

“제주로 가. 내가 가는 길에 만나.”

세아가 말했다. 그 순간, 자신도 놀랐다. 그 대답이 자동으로 나왔기 때문이었다. 생각할 시간도 없었다. 계산할 시간도 없었다. 그저 필요한 것이 명확했다. 어머니가 필요했다. 도현이가 필요했다.

“근데… 재판? 서울에서…?”

도현이가 물었다. 그 목소리 속에는 죄책감이 있었다. 누나에게 폐를 끼친다는 죄책감.

“재판은 서울에서 하면 돼. 변호사가 있잖아. 그 전에… 엄마를 봐야겠어. 난 지금 가.”

세아가 말했다. 그리고 그 순간, 세아는 처음으로 자신의 인생에서 무언가를 선택한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강요된 것이 아니라. 절박함으로 인한 것도 아니라. 단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선택한 것. 그것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선택한 것.

“고마워, 누나. 미안해.”

“뭘 미안해. 너는 잘 했어. 내가 지금 간다. 버티고 있어.”

전화를 끊은 후, 세아는 잠시 침대 위에 앉아 있었다. 그리고 그 침묵 속에서, 무언가가 명확해졌다. 그녀가 싸워야 하는 대상이 무엇인지. 그것이 법원이 아니라는 것을. 그것이 강리우도 아니라는 것을. 그것이 과거도 아니라는 것을.

그것은 미래였다. 자신의 미래. 그리고 도현이의 미래. 그리고 어머니의 미래.

## 4부: 새로운 출발

새벽 4시, 세아는 고시원의 짐을 싸기 시작했다.

움직임은 빨랐지만, 마음은 차분했다. 옷 몇 장. 양말. 속옷. 세렌이라고 쓰인 약병. 휴대폰 충전기. 그리고 장판. 모든 것을 여행용 가방에 넣었다.

장판을 상자에 넣을 때, 고양이는 울음을 냈다. 새로운 여행의 시작을 알리는 울음. 그 울음은 두려움의 울음이기도 했고, 기대의 울음이기도 했다.

“우리 제주 가자. 좋은 곳이야. 따뜻하고. 엄마도 있고. 도현이도 있고.”

세아가 상자 속의 고양이에게 말했다. 고양이는 상자 밖으로 튀어나오려고 했다. 하지만 세아는 부드럽게 다시 넣었다. 고양이도 결국 이 여행의 일부였다. 그것은 선택이 아니라 운명이었다. 하지만 세아는 이제 운명도 받아들일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세아는 고시원을 한 번 더 돌아봤다. 그 좁은 공간. 그 낮은 천장. 그 곰팡이. 모든 것이 여전히 그대로였다. 하지만 세아는 다르게 보고 있었다. 이것은 그녀가 부서진 곳이었다. 그리고 그 부서짐 속에서, 그녀는 무언가를 찾았다. 강함의 조각들. 진실의 조각들. 자신 자신의 조각들.

공항으로 향하는 택시 안에서, 세아는 자신의 손을 봤다.

손가락들이 떨리지 않았다. 강리우의 손가락들처럼. 그때는 그녀의 손가락이 항상 약간 떨리고 있었다. 공포의 진동. 불안의 진동. 하지만 지금 그 손은 다른 손이었다.

그것은 결정의 손이었다. 선택의 손. 제주로 향하는 손. 그리고 어머니를 안는 손. 도현이를 토닥이는 손. 고양이를 쓸어주는 손.

“공항으로 가주세요.”

세아가 택시 기사에게 말했다. 그리고 택시 기사는 아무 질문도 하지 않았다. 그저 운전했다. 밤의 서울을 관통하며.

## 5부: 출발

비행기는 새벽 6시에 이륙했다.

그 시간은 밤과 낮의 경계였다. 하늘은 아직 검었지만, 지평선은 조금씩 붉어지고 있었다. 새벽의 색. 변화의 색.

창문을 통해 서울의 불들이 보였다. 형광등처럼. 희미하게. 그 불들은 마치 별처럼 보였다. 지상의 별들. 수백만 개의 사람들이 살고 있는 별들. 각각의 별 속에서 누군가의 이야기가 펼쳐지고 있었다. 누군가의 고통. 누군가의 기쁨. 누군가의 절망과 희망.

세아는 그 불들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강리우도 저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 그리고 변호사도. 그리고 법원도. 그리고 그녀를 판단할 판사도. 모든 것이 저 빛들 속에 있었다. 하지만 지금 그것들은 중요하지 않았다. 지금 중요한 것은 이 비행기였다. 이 상승. 이 변화. 이 이동.

점점 더, 서울의 불들이 멀어지고 있었다. 처음에는 뚜렷했던 불들이 이제는 뭉개져 보였다. 마치 인상주의 그림처럼. 마치 기억처럼.

그리고 그 불들이 완전히 사라질 때, 무언가가 새롭게 시작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비행기가 구름층을 뚫고 올라갔을 때, 위의 하늘이 보였다. 더 밝은 하늘. 더 열린 하늘.

세아의 옆 좌석에는 빈 자리가 있었다. 아니, 빈 자리가 아니었다. 상자 속에서 울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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