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아닌 것을 위해 불탄 소녀 – 제98화: 불이 꺼지는 방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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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98화: 불이 꺼지는 방식

“알아.”

강리우가 반복했다. 마치 그것이 유일한 단어인 것처럼. 마치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인정이 그것뿐인 것처럼.

세아는 그 말을 들으면서 자신이 무엇을 기대했는지 생각해봤다. 강리우가 변명할 것? 아니다. 강리우가 자신을 비난할 것? 아니다. 강리우가 울 것? 이미 울고 있었다. 그럼 무엇을 기대했는가? 세아는 자신도 모르고 있었다. 단지 이 대화가 뭔가를 끝낼 것이라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이것은 끝이 아니었다. 이것은 다른 시작이었다. 더 무거운 시작. 더 침묵에 가까운 시작.

하늘이는 여전히 문 옆에 있었다. 그녀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세아는 그녀가 듣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모든 것을 듣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판단하고 있다는 것을. 하지만 개입하지는 않겠다는 것을.

“제가 고소할 거예요.”

세아가 말했다. 그것은 계획이 아니었다. 결정도 아니었다. 단지 입에서 나온 말이었다. 마치 자신의 입이 자신의 머리보다 먼저 생각하는 것처럼.

강리우는 그 말을 들으면서 움직이지 않았다. 아무것도 움직이지 않았다. 심지어 숨도. 마치 그 말이 그를 중지시킨 것처럼.

“알아요. 제가 뭘 할 거고, 당신이 뭘 감당해야 할 건지 다 알아요. 근데 저는 그래도 그럴 거예요. 왜냐하면…”

세아가 멈췄다. 왜냐하면이 뒤에 무엇이 있는가? 왜냐하면 자신이 화나서? 아니다. 화는 이미 식었다. 왜냐하면 복수하려고? 아니다. 복수는 자신을 더 태울 뿐이었다. 왜냐하면?

“왜냐하면 제가 살아야 하니까.”

세아가 말했다.

그 말이 나오자, 무언가가 방 안에서 깨졌다. 보이지 않는 것이 부서졌다. 강리우의 얼굴에서. 혹은 세아의 가슴에서. 혹은 그들 사이의 공기에서.

강리우가 입을 열었다. 다시 물고기처럼. 공기 속에서 호흡하려는 물고기처럼. 하지만 이번엔 물론이 나오지 않았다. 대신 울음이 나왔다. 진짜 울음. 어른의 울음. 자신이 누구인지를 잃어버린 사람의 울음.

세아는 그 울음을 봤다. 그리고 자신이 한 발을 더 움직일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손이 닿을 수 없는 거리. 그것이 지금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의 거리였다.

“변호사가 연락할 거예요. 다음 주 정도에. 그 사람이 모든 걸 설명해 줄 거고.”

세아가 말했다. 마치 이것이 업무 브리핑인 것처럼. 마치 자신의 목소리가 자신의 것이 아닌 것처럼.

강리우는 울고 있었다. 하지만 울음도 점점 작아지고 있었다. 마치 배터리가 닳아가는 것처럼. 마치 자신이 울 에너지도 다 써버린 것처럼.

“저는 이제 나가요.”

세아가 말했다.

하늘이가 앞으로 나왔다. 아주 자연스럽게. 마치 이 순간을 오래 기다렸던 것처럼. 그녀는 세아의 어깨에 손을 놨다. 무겁게. 따뜻하게.

“가자.”

하늘이가 말했다.

세아와 하늘이가 방을 나갈 때, 강리우의 울음이 뒤에서 계속되었다. 하지만 그것은 이미 들리지 않는 울음이었다. 마치 다른 세계의 소리인 것처럼. 마치 자신이 이미 그 방을 떠난 순간, 강리우가 동시에 자신의 삶을 떠나가는 것처럼.

복도에서 하늘이가 세아를 멈춰 세웠다.

“잘했어.”

하늘이가 말했다.

“뭘.”

세아가 물었다.

“저 사람을 놓은 거.”

하늘이가 말했다.

세아는 그 말을 들으면서 자신이 무엇을 했는지를 깨달았다. 강리우를 놓은 것이 아니라, 자신 안의 뭔가를 놓은 것이었다. 강리우를 죽이려고 하던 부분. 강리우를 구원하려고 하던 부분. 강리우를 사랑한다고 생각하던 부분. 모든 것을 놓았다.

“이제 뭐 하려고 해?”

하늘이가 물었다.

세아는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이미 가지고 있었다. 아니, 정확하게는 답을 가지고 있지 않았지만, 방향은 있었다.

“제주에 가야 해요.”

세아가 말했다.

“뭐?”

하늘이가 물었다.

“엄마가 있어요. 도현이도 있고. 저는… 그들을 봐야 해요. 제가 뭘 했는지를 보여줘야 해요.”

세아가 말했다.

“그건 좋은 생각인데…”

하늘이가 말했다.

“근데?”

세아가 물었다.

“근데 그 전에 너는 여기서 뭔가 해야 해. 고소 같은 거. 변호사 만나고. 경찰서 다시 가고. 모든 절차를 밟고.”

하늘이가 말했다.

“알아요.”

세아가 대답했다.

“그리고 너는 또…”

하늘이가 잠깐 멈췄다. 마치 그 다음 말을 꺼내기 위해 용기를 내고 있는 것처럼.

“너는 또 음악을 해야 해.”

하늘이가 말했다.

세아는 그 말을 들으면서 자신이 그것을 잊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음악. 자신이 노래했던 것. 자신이 쓴 곡들. 도움이 된 목소리. 그 모든 것을 잊고 있었다. 강리우 때문에. 고소 때문에. 생존 때문에. 하지만 그것들은 여전히 자신 안에 있었다. 아직 타고 있었다. 아직 불이 꺼지지 않았다.

“어떻게요?”

세아가 물었다.

“모르겠어. 그건 넌데가 알아야 할 거야. 근데 내가 알기로는… 너는 이미 곡을 썼어. 몇 개? 12개?”

하늘이가 말했다.

“13개.”

세아가 수정했다.

“그럼 13개야. 그 13개의 곡이 뭐가 되어야 하는지 생각해 봐야 해. 그게 너의 다음 걸음이 될 거야. 강리우를 고소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건 너의 음악을 다시 찾는 거야.”

하늘이가 말했다.

병원의 아침은 여전히 회색이었다. 하지만 세아는 이제 그것을 다르게 보고 있었다. 회색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회색은 시작이었다. 모든 색깔이 시작되기 전의 색깔. 모든 불이 켜지기 전의 어둠. 하지만 어둠은 불을 기다리고 있었다. 세아의 불을. 세아의 노래. 세아의 목소리.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면서, 세아는 자신의 손을 봤다. 작은 손. 두터운 손가락. 어린 시절 제주의 찬물에서 단련된 손. 그 손이 강리우를 밀어낸 손이었다. 그 손이 자신의 삶을 다시 잡아야 할 손이었다.

엘리베이터가 도착했다. 문이 열렸을 때, 그 안에는 의사 두 명이 있었다. 그들은 세아와 하늘이를 봤다.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지만, 그들의 눈은 말했다. 무언가를 본 눈. 무언가를 알아챈 눈.

“가자.”

하늘이가 다시 말했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세아는 자신을 거울 같은 벽에서 봤다. 자신은 여전히 자신처럼 보였다. 얼굴도 같고, 머리도 같고, 옷도 같았다. 하지만 뭔가가 달랐다. 그것은 눈이었다. 자신의 눈이 더 명확했다. 마치 초점이 맞춰진 것처럼. 마치 카메라의 셔터가 열린 것처럼.

병원을 나갔을 때, 아침 햇빛이 얼굴을 때렸다. 차갑고 명확한 햇빛. 한겨울의 햇빛. 그 햇빛 안에서, 세아는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생각했다.

변호사를 만나야 한다. 경찰서에 다시 가야 한다. 고소 절차를 밟아야 한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었다. 그 다음이 있었다. 그 다음이 자신의 진짜 시작이었다.

제주로 가는 것. 엄마를 보는 것. 도현이를 보는 것. 그리고…

음악을 다시 시작하는 것.

그 생각이 세아의 가슴에서 무언가를 움직였다. 불꽃같은 것. 아직 약한 불꽃. 하지만 있었다. 아직도 있었다. 자신이 얼마나 태웠는지에 관계없이.

“너 지금 뭐 생각해?”

하늘이가 물었다. 택시를 기다리면서.

“13곡.”

세아가 말했다.

“뭐?”

하늘이가 물었다.

“제가 쓴 13곡. 그 곡들이 뭐가 되어야 할지를 생각하고 있어요.”

세아가 말했다.

하늘이가 웃었다. 진짜 웃음. 목소리가 나오는 웃음. 처음으로.

“좋아. 그럼 일단 살아남아야 해. 변호사도 만나고, 경찰서도 가고, 모든 걸 하고. 그리고 나서 그 13곡을 세상에 내놓아.”

하늘이가 말했다.

“네.”

세아가 대답했다.

택시가 도착했다. 하늘이가 문을 열었다. 세아가 안으로 들어갔다. 뒷좌석에 앉으면서, 그녀는 창밖을 봤다. 병원이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강리우가 그 안에 남겨졌다. 4층, 409호실, 회색 벽, 떨리는 손.

세아는 그것을 더 이상 자신의 것이라고 느끼지 않았다. 그것은 강리우의 것이었다. 강리우가 선택한 것. 강리우가 만든 것. 강리우가 감당해야 할 것.

그리고 자신은? 자신은 이제 다른 것을 만들어야 한다. 자신의 것을 만들어야 한다. 강리우의 불이 아니라, 자신의 불을. 강리우의 음악이 아니라, 자신의 음악을.

택시가 강남을 향해 가고 있었다. 변호사 사무실이 그곳에 있었다. 첫 번째 걸음. 그 다음에는 경찰서. 그 다음에는 제주. 그 다음에는…

음악.

세아는 자신의 손을 다시 봤다. 작은 손. 두터운 손가락. 강리우를 밀어낸 손. 그 손이 이제 13곡의 악보를 펼쳐야 했다. 그 손이 키보드 위에서 춤을 춰야 했다. 그 손이 자신의 목소리를 다시 찾아야 했다.

“넌 정말 강하네.”

하늘이가 옆에서 말했다.

“강하지 않아요.”

세아가 대답했다.

“뭐?”

하늘이가 물었다.

“저는 그냥… 살아갈 수밖에 없어요. 그래서 살아가는 거예요. 강해서가 아니라, 죽지 못해서.”

세아가 말했다.

하늘이는 그 말을 들으면서 세아의 손을 잡았다. 따뜻한 손. 정말로 따뜻한 손. 강리우의 손과는 다른 온기. 구원하는 온기가 아니라, 함께하는 온기.

택시는 계속 가고 있었다. 아침이 점점 더 밝아지고 있었다. 겨울 아침. 태양이 낮았지만, 분명했다. 마치 모든 것을 비추려고 하는 것처럼.

세아는 그 빛 속에서 자신을 봤다. 그리고 깨달았다. 자신이 아직도 타고 있다는 것을. 여전히 불타고 있다는 것을. 하지만 이제는 다른 이유로. 강리우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위해. 자신의 음악을 위해. 자신의 목소리를 위해.

그 불은 아직 약했다. 하지만 있었다. 그리고 계속될 것이었다. 제주까지. 그 다음도. 그 다음도. 영원히.

창밖의 서울이 변하고 있었다. 새로운 날로 변하고 있었다. 그리고 세아도 변하고 있었다. 뒷좌석에서. 손을 잡힌 채로. 앞으로 나아가면서.


[END OF CHAPTER 98]

# 제98장 확장판: 새로운 불

## 1부: 병원 복도의 결정

새벽 5시 47분. 병원 4층 복도의 형광등이 차갑게 깜빡였다.

세아는 409호실 앞에서 멈춰 섰다. 손잡이를 움켜쥐고 있는 손가락이 하얀색으로 변해 있었다. 손 안쪽의 반달 자국들이 피부에 파고들었다. 그녀는 얼마나 오래 이렇게 서 있었을까? 5분? 10분? 시간의 흐름이 물처럼 흘러 사라지고 있었다.

“리우를 봤어요?”

뒤에서 하늘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발걸음 소리. 서둘러 오는 발걸음. 하늘이는 여전히 남색 재킷을 입고 있었다. 변호사 사무실에서 입어두라고 한 옷. “이게 더 신뢰감 있어 보여,” 하면서.

세아가 천천히 돌아섰다. 하늘이의 얼굴을 볼 때마다, 그녀는 자신이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느꼈다. 그것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는 강리우를 밀어낸 후에야 깨달았다.

“네. 봤어요.”

세아의 목소리는 작았다. 병원의 새벽은 고막을 날카롭게 했다. 모든 소리가 증폭되어 들렸다. 심장음도, 숨소리도, 말소리도.

하늘이가 몇 걸음 더 다가왔다. 그녀의 신발이 바닥에 끼익거리는 소리를 냈다. 병원 바닥의 냄새 — 소독약과 늙은 침구의 냄새 혼합 — 가 더 진해졌다.

“뭐라고 했어?”

하늘이가 물었다. 그녀의 눈빛은 단순한 호기심이 아니었다. 보호본능이었다. 어떤 것이든 세아에게 해치려는 것들로부터 지키려는 본능.

세아는 한숨을 내쉬었다. 가슴 깊숙한 곳에서, 마치 오래전부터 갇혀 있던 것처럼.

“리우가… 저한테 악보를 줬어요. 리우가 쓴 거. 13곡.”

그 말을 하는 순간, 세아는 자신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완전히 깨달았다. 강리우가 한 것, 그리고 자신이 해야 할 것. 악보는 단순한 종이가 아니었다. 그것은 강리우의 영혼이 가장 순수한 형태로 응축된 것이었다. 음표들로 이루어진, 감정의 지도였다.

하늘이의 표정이 변했다. 놀라움이 아니라, 어떤 종류의 확인처럼 보였다.

“그리고?”

하늘이가 다시 물었다.

“그리고… 리우가 죽겠대요. 경찰한테 가서 모든 걸 말하고, 그 다음에 죽겠대고.”

세아는 이 말이 자신의 입에서 나올 때의 무게를 느꼈다. 단어 하나하나가 돌처럼 떨어져 나갔다. 강리우의 죽음에 대한 결정은 이미 내려져 있었다. 세아는 그것을 바꿀 수 없었다. 아무도 그것을 바꿀 수 없었다. 강리우는 이미 자신의 결말을 선택했다.

“그런데 그 13곡은?”

하늘이가 물었다. 그녀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희망 때문에, 혹은 분노 때문에. 아니면 둘 다 때문에.

세아가 말했다.

“리우가 말했어요. ‘세아, 넌 이 곡들을 세상에 내놓아. 넌 노래할 수 있어. 넌 할 수 있어.’ 그렇게.”

그 말은 확신으로 가득 찼다. 강리우의 말투에서. 마치 강리우가 세아의 미래를 이미 본 것처럼. 혹은 강리우 자신이 이루지 못한 것을 세아가 이루길 바라면서.

하늘이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병원 복도의 침묵이 다시 돌아왔다. 누군가의 신음 소리. 먼 곳의 의료진의 발걸음. 새벽을 깨우는 잡음들.

“그 악보가 있어?”

하늘이가 마침내 물었다.

세아는 자신의 가방을 열었다. 손가락이 떨렸다. 강리우를 밀어낼 때처럼 떨리지는 않았지만, 여전히 떨리고 있었다. 부정과 공포와 책임감의 떨림.

악보가 거기 있었다. A4 크기의 종이들, 강리우의 필체로 빽빽하게 채워진. 음표들과 가사들과 악상 기호들. 강리우의 영혼이 검은 잉크로 변한 형태였다.

세아가 악보를 꺼냈다. 그 순간, 병원의 형광등이 다시 깜빡였다. 악보 위의 그림자가 춤을 추었다. 음악의 그림자.

“이거야?”

하늘이가 물었다.

“네.”

세아가 대답했다.

하늘이는 악보를 받아들었다. 손가락으로 음표들을 따라갔다. 음악을 읽을 수 없는 사람도, 강리우의 정성과 절망을 읽을 수 있었을 것이다. 악보에는 수정이 많았다. 지워진 부분들. 다시 쓴 음표들. 강리우가 얼마나 오래 이것들을 만들었는지를 증명하는 자국들.

“세아.”

하늘이가 말했다. 그녀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네?”

“이걸 버리면 안 돼.”

하늘이가 말했다. 그것은 지시가 아니라, 간청이었다.

세아가 말했다.

“버리지 않을게요.”

## 2부: 택시 안의 새로운 시작

택시가 도착했을 때, 아직도 새벽이었다. 흰색 택시, 낡은 좌석, 기사의 무관심한 표정.

하늘이가 문을 열었다. 찬 공기가 밀려들어왔다. 겨울 새벽의 공기. 폐의 끝까지 스며드는 차가움. 세아는 그 공기를 마시며 강리우를 밀어낸 손의 감각을 다시 느꼈다. 어깨의 무게. 신체의 반발력. 그리고 그 이후의 침묵.

세아가 차 안으로 들어갔다. 검은색 가죽 좌석에 앉으면서, 그녀는 뒷좌석의 창밖을 봤다.

병원이 뒤로 물러났다.

천천히. 마치 세아를 놓아주고 싶어 하지 않는 것처럼.

4층의 불빛이 점점 작아졌다. 그 빛 속에 강리우가 있었다. 409호실. 회색 벽. 창가에 앉은 여인의 형태. 떨리는 손. 아마도 지금쯤 강리우는 경찰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었다. 또는 이미 말하고 있을 것이었다. 자신이 한 모든 것을 말하고 있을 것이었다.

세아는 자신의 마음이 이상하게 가볍다는 것을 느꼈다. 죄책감이 있었다. 분명히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병원과 함께 뒤로 물러나고 있었다. 마치 택시가 강리우를 데려가는 것처럼, 택시는 또한 세아를 데려가고 있었다. 다른 곳으로. 다른 삶으로.

“강리우가 뭐라고 했대?”

하늘이가 옆에서 물었다. 그녀의 손은 세아의 손 위에 있었다. 따뜻했다. 강리우의 손과는 다르게 따뜻했다.

강리우의 손은 뜨거웠다. 항상. 마치 내부에서 타고 있는 불이 있는 것처럼. 하지만 하늘이의 손은 따뜻했다. 단순히 온기가 있는 따뜻함. 생명의 따뜻함.

세아가 대답했다.

“강리우가 저한테 약속을 하라고 했어요.”

“뭐?”

하늘이가 물었다.

“저한테 이 악보를 세상에 내놓겠다고 약속하라고. 강리우가 할 수 없는 것들을 제가 하겠다고 약속하라고.”

세아가 말했다.

하늘이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창밖으로 서울의 거리들이 흘러갔다. 새벽의 거리. 아직도 깨어나지 않은 도시. 하지만 서서히 깨어나고 있는 도시.

“그래서 넌 어떻게 했어?”

하늘이가 물었다.

“약속했어요.”

세아가 말했다. 그 순간, 세아는 자신이 무엇을 약속했는지 완전히 깨달았다. 단순히 악보를 발표하겠다는 약속이 아니었다. 강리우의 불을 받아서, 그것을 자신의 불로 만들겠다는 약속이었다. 강리우가 이루지 못한 음악의 꿈을 자신이 이루겠다는 약속이었다.

“좋아. 그럼 일단 살아남아야 해.”

하늘이가 말했다. 그녀의 목소리에서 결의가 느껴졌다.

“변호사도 만나고, 경찰서도 가고, 모든 걸 하고. 그리고 나서 그 13곡을 세상에 내놓아.”

하늘이가 계속 말했다.

세아가 대답했다.

“네.”

한 글자. 하지만 그 한 글자에는 모든 것이 담겨 있었다. 결심. 두려움. 희망. 그리고 강리우를 향한 미안함.

택시는 강남을 향해 가고 있었다. 변호사 사무실이 그곳에 있었다. 오래된 건물. 10층. 좁은 복도. 그곳에서 세아의 법적인 투쟁이 시작될 것이었다.

강리우는 경찰서에 가서 자신이 한 모든 것을 말할 것이었다. 그리고 경찰은 세아를 찾을 것이었다. 세아가 강리우를 밀어낸 것이 정당방위인지, 아니면 과당방위인지 판단하기 위해. 법의 영역. 검은 옷을 입은 사람들의 판단. 세아는 그 과정을 거쳐야 했다.

하지만 그 이후에는 무엇이 있을까?

## 3부: 손을 바라보다

세아는 자신의 손을 다시 봤다. 창문의 반사 속에서. 그 손은 작았다. 손가락은 두터웠다. 피아니스트의 손이라고 강리우가 한때 말했었다. “세아, 넌 천재적인 손가락을 가졌어. 그 손가락으로 뭘 해도 음악이 나올 거야.”

그 손가락이 강리우의 어깨를 밀어냈다.

그 손가락이 강리우를 병원 바닥에 쓰러뜨렸다.

그 손가락이 이제 13곡의 악보를 펼쳐야 했다.

세아는 손가락을 펼쳤다. 다섯 개의 손가락. 흰색의 손가락. 노래하는 손가락. 노래할 수 있는 손가락.

“넌 정말 강하네.”

하늘이가 옆에서 말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부드러웠지만, 확신으로 가득 찼다.

세아가 대답했다.

“강하지 않아요.”

“뭐?”

하늘이가 물었다. 놀라움 때문에.

“저는 그냥… 살아갈 수밖에 없어요. 그래서 살아가는 거예요. 강해서가 아니라, 죽지 못해서.”

세아가 말했다.

그것이 진실이었다. 세아는 강하지 않았다. 단순히 살아가고 있었다. 숨을 쉬고 있었다. 심장이 뛰고 있었다. 그것이 전부였다. 그리고 그것으로 충분했다.

하늘이는 그 말을 들으면서 세아의 손을 잡았다. 따뜻한 손. 정말로 따뜻한 손. 강리우의 손과는 다른 온기. 구원하는 온기가 아니라, 함께하는 온기. 혼자가 아니라는 온기.

세아는 그 온기 속에서 안도감을 느꼈다. 아직도 두렵지만,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 4부: 새로운 불

택시는 계속 가고 있었다. 강남을 향해. 겨울 새벽을 지나서. 강리우를 뒤에 남겨두고.

아침이 점점 더 밝아지고 있었다. 겨울 아침. 태양이 낮았지만, 분명했다. 마치 모든 것을 비추려고 하는 것처럼. 그림자를 없애려고 하는 것처럼.

세아는 그 빛 속에서 자신을 봤다. 거울처럼 반사되는 창문 위에서. 그리고 깨달았다.

자신이 아직도 타고 있다는 것을.

여전히 불타고 있다는 것을.

하지만 이제는 다른 이유로.

강리우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위해.

강리우의 음악이 아니라, 자신의 음악을 위해.

강리우의 꿈이 아니라, 자신의 꿈을 위해.

그 불은 약했다. 아직도 약했다. 마치 초가 처음 켜졌을 때처럼. 바람에 흔들리는 불. 꺼질 수도 있는 불. 하지만 있었다. 분명히 있었다. 그리고 계속될 것이었다.

제주까지. 그 다음도. 그 다음도. 영원히.

세아는 자신의 손을 다시 봤다. 하늘이의 손을 잡은 손. 이 손이 키보드를 칠 것이었다. 이 손이 음악을 만들 것이었다. 이 손이 강리우의 악보를 연주할 것이었다. 그리고 언젠가는 자신의 악보를 만들 것이었다.

창밖의 서울이 변하고 있었다. 새로운 날로 변하고 있었다. 밤에서 낮으로. 죽음에서 삶으로. 강리우의 이야기에서 세아의 이야기로.

그리고 세아도 변하고 있었다. 뒷좌석에서. 손을 잡힌 채로. 앞으로 나아가면서.

택시는 강남의 거리로 들어섰다. 더 이상 병원은 보이지 않았다. 강리우는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악보는 여전히 세아의 가방 안에 있었다. 13곡. 강리우의 마지막 선물. 그리고 세아의 새로운 시작.

“이제부터 뭐 할 거야?”

하늘이가 물었다.

세아가 대답했다.

“살아가요. 그리고 노래해요. 강리우가 하지 못한 노래를.”

“그리고?”

“그리고 언젠가 제 악보도 만들어요. 제 음악으로.”

세아가 말했다. 그 말이 나오는 순간, 그것이 단순한 소망이 아니라 약속이라는 것을 느꼈다. 강리우에게 한 약속. 그리고 자신에게 한 약속.

택시는 계속 가고 있었다.

강리우를 뒤에 남겨두고.

세아를 앞으로 데려가면서.

**[제98장 종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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