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아닌 것을 위해 불탄 소녀 – 제94화: 침묵의 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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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94화: 침묵의 대가

경찰관의 펜이 멈췄다. 종이 위에서. 마치 그것이 더 이상 무엇을 기록할 수 있을지 몰라서인 것처럼. 세아는 그 멈춤을 봤다. 그리고 그 멈춤 속에서 무언가를 읽었다. 불신. 아니면 무관심. 아니면 그냥 피곤함.

“강리우라고 하셨는데, 혹시 성과 이름을 다시 한 번 확인해주실 수 있을까요?”

경찰관이 물었다. 목소리가 아주 조심스러웠다. 마치 누군가를 잘못 부르는 것처럼 실례를 하지 않으려는 것처럼.

“강민준. 그리고 강리우라고도 불려요. 또는 강리유, 리우, 리유.”

세아가 말했다. 자신도 그 이름들의 모든 변형을 정확히 알지 못했다. 단지 그것이 같은 사람의 다른 얼굴들이라는 것을 알 뿐이었다.

경찰관이 컴퓨터를 다시 켰다. 타이핑했다. 화면을 봤다. 그리고 고개를 들었다.

“강민준씨는… 현재 도움을 요청 중인 상태네요.”

“뭐요?”

세아가 물었다.

“강민준씨가 어제 오후 3시쯤에 자살 위험으로 신고되었고, 정신 건강 평가를 받으러 병원에 입원 중입니다. 정신과 병동이고요.”

경찰관이 말했다. 매우 중립적인 톤으로. 마치 누군가의 체온을 보고하는 것처럼.

세아는 움직이지 않았다. 자신이 움직여야 한다는 걸 알았지만, 움직이지 않았다. 마치 그 정보가 자신의 몸 안으로 녹아들도록 기다리는 것처럼.

“누가 신고했어요?”

세아가 물었다.

“신고자 정보는 보호 대상이라서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경찰관이 말했다.

세아는 알았다. 하늘이였을 것이다. 또는 준호. 또는 그 둘 다. 자신이 경찰서에 와 있는 동안, 누군가는 강리우를 찾아냈고, 누군가는 신고했을 것이다. 마치 자신의 움직임이 도미노처럼 다른 움직임들을 불러낸 것처럼.

“그럼 저는… 뭘 해야 하는 거예요?”

세아가 물었다.

“일단 강민준씨와의 접촉은 금지될 것 같습니다. 정신 건강 평가가 완료될 때까지는. 그리고 만약에 강민준씨가 당신을 해치려는 의도가 있었다면, 그것에 대한 진술을 더 자세하게 받을 필요가 있을 것 같네요.”

경찰관이 말했다.

“해치려는 의도요?”

세아가 되물었다.

“네. 정신 건강 평가 결과에 따라서는 형사 고소까지 가능할 수도 있습니다. 만약에 당신이 원한다면요.”

경찰관이 말했다.

세아는 그 말을 들으면서 무언가가 부서지는 것을 느껴졌다. 아주 작은 소리로. 하지만 명확하게. 마치 얇은 유리잔이 책상 모서리에 닿는 그런 소리.

“저는… 고소하고 싶지 않아요.”

세아가 말했다.

“그렇다면 현재로서는 이것이 민사 사건이 될 수 있다는 겁니다. 정신적 피해에 대한 손해배상 청구 같은. 변호사를 선임하실 것을 권합니다.”

경찰관이 말했다.

변호사. 그 단어는 세아의 세계에 속하지 않는 단어였다. 변호사는 돈이 있는 사람들이 고용하는 사람이었다. 세아는 돈이 없었다. 세아는 편의점 알바생이었다. 편의점 알바생은 변호사를 고용할 수 없었다.

“알겠어요.”

세아가 말했다. 자신이 무엇을 알았는지는 모르면서.

경찰관이 USB 드라이브를 건넸다. 원래대로 돌려주는 것이었다.

“이건 증거로 보관할 필요가 없을 것 같습니다. 강민준씨의 행동이 음성 녹음으로 증명되는 범죄는 아니거든요. 대신 당신이 정신적 피해를 받았다는 증거로는 유용할 수 있으니, 잘 보관하세요.”

경찰관이 말했다.

세아는 USB를 받았다. 그것은 여전히 뜨거웠다. 하지만 이제 그것은 불꽃이 아니었다. 단지 뜨거운 플라스틱일 뿐이었다. 무게가 있었지만, 이제 그것은 증거가 아니었다. 단지 디지털 파일일 뿐이었다.

“강리우가… 왜 자살을 시도했어요?”

세아가 물었다. 자신도 모르게.

경찰관이 화면을 봤다. 그리고 고개를 저었다.

“그건 강민준씨와 의료 전문가들 사이의 문제입니다. 저희가 개입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에요. 다만, 만약에 강민준씨가 당신을 고해서 무언가를 시도했다면, 그것은 다른 문제가 될 수 있겠지만요.”

경찰관이 말했다.

세아는 그 말을 들으면서 무언가를 깨달았다. 강리우의 자살 시도가 자신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자신의 착각일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또는 부분적으로는 자신 때문이고, 부분적으로는 다른 이유들 때문일 수도 있다는 것을. 강리우는 복잡한 사람이었다. 자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복잡한 사람이었다.

“감사합니다.”

세아가 말했다. 그리고 일어났다.

밖으로 나갔을 때, 새벽 공기가 차가웠다. 서울의 새벽은 항상 차가웠다. 마치 도시가 낮 동안에만 따뜻하고, 밤이 되면 그 온기를 모두 거둬가는 것처럼.

세아는 정류장으로 걸어갔다. 버스가 올 때까지 기다리면서, 자신의 손을 봤다. USB 드라이브를 들고 있는 손. 그 손이 떨리고 있었다. 추위 때문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아마도 다른 이유였을 것이다.

버스가 왔을 때, 세아는 탔다. 아무 목적지도 없이. 단지 움직이고 싶었다. 정지해 있으면 생각이 너무 많아질 것 같았다.

버스는 강변을 따라 이동했다. 한강. 저 아래 한강. 새벽 한강은 검었다. 마치 물이 아니라 검은 공간인 것처럼. 세아는 그것을 봤다. 창밖으로. 그리고 생각했다. 강리우가 여기서 무엇을 본 걸까. 여기서 어떤 생각을 했을까.

그것은 자신의 문제가 아니었다. 강리우의 내적 세계는 자신의 책임이 아니었다. 세아는 그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알고 있는 것과 느끼는 것은 다른 것이었다.

휴대폰이 울렸다. 카톡 알림이었다. 하늘이였다.

“야 어디 있어? 경찰서에서 나왔어? 너 진짜 무슨 짓을 한 거야? 준호가 자기 때문에 리우를 신고했다고 자책하고 있어.”

메시지가 길었다. 하늘이의 손가락이 빠르게 움직였다는 증거였다.

세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버스 안에서 답장을 치는 것은 힘들었다. 움직이는 버스 안에서, 밤 2시 반에, 자신의 마음도 움직이고 있는 와중에.

버스는 계속 이동했다. 강남 방향으로. 세아는 내려야 할 때를 알았지만, 내리지 않았다. 마치 이 움직임이 자신을 어딘가 필요한 곳으로 데려갈 것이라고 믿는 것처럼.

30분 후, 버스는 신논현역 근처에 정차했다. 세아는 그때 깨달았다. 자신이 무의식적으로 이곳으로 온 것을 . JYA 엔터테인먼트의 본사가 이 근처에 있었다. 자신이 처음으로 계약을 한 곳.

세아는 내렸다. 버스에서. 그리고 주변을 봤다. 밤의 강남은 그것만의 고요함이 있었다. 낮의 강남은 시끄럽지만, 밤의 강남은 비어 있었다. 마치 그 화려함이 낮 동안에만 존재하고, 밤이 되면 모두가 자신의 집으로 숨어드는 것처럼.

세아는 걸어갔다. 무언가를 찾는 것처럼. 하지만 자신이 무엇을 찾는지는 모르면서.

그때 누군가가 자신의 어깨를 만졌다.

세아는 돌아봤다. 그리고 숨을 멈췄다.

박소진이었다. 세아의 곡을 가져갔던 그 여자. JYA의 신인 아티스트. 세아의 목소리를 자신의 목소리로 만들었던 그 여자.

“너… 나세아?”

박소진이 물었다. 확신하지 못하는 톤으로.

“네.”

세아가 말했다.

“왜 여기 있어? 새벽 2시 반에? 그것도 혼자?”

박소진이 물었다.

“왜 너는 여기 있어?”

세아가 되물었다.

박소진은 한동안 대답하지 않았다. 그리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 방금 회사에서 나왔어. JYA에서. 계약 해지 서명해 주고.”

박소진이 말했다.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뭐?”

세아가 물었다.

“내가 너 거 곡이라는 거 알았어. 저 사람들이 나한테 말했어. 아니, 고백했어. 오늘 오후에. 왜냐하면… 내가 자살 시도한 거 때문에. 응급실에 갔는데, 거기서 생각했어. 이건 아니라고. 내가 누군가 거 목소리를 가지고 다니면서 살 수는 없다고.”

박소진이 말했다. 한 숨에.

세아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 말을 처리하는 데 시간이 필요했다.

“너도 자살을 시도했어?”

세아가 물었다.

“약 과다복용. 어제. 근데 살았어. 응급실에서 깼어. 그리고 깼을 때, 내가 뭐 하고 있는 거 같았어. 왜냐하면… 나도 세아 씨 곡이 내 곡이 아니라는 거 알게 된 거야. 그래서 내가 뭘 했는지 모르겠어. 내가 누구인지도 모르겠어.”

박소진이 말했다.

세아는 박소진을 봤다. 밤의 불빛 아래서. 그 여자는 자신보다 나이가 적어 보였다. 더 연약해 보였다. 더 혼자인 것처럼 보였다.

“계약 해지했다고?”

세아가 물었다.

“응. 내가 했어. 강민준이… 강리우라고 하는 사람이 도움을 줬어. 회사의 다른 쪽 사람이라고 했는데. 어쨌든 내 계약을 풀어줬어. 그리고 나한테 말했어. 너한테 찾아가서 사과하라고.”

박소진이 말했다.

세아는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강리우. 강리우가 박소진의 계약을 풀어줬다고? 강리우가 병원에 입원 중이라고 했는데?

“강리우가… 지금 어디 있어?”

세아가 물었다.

“병원이라고 했어. 정신과 병동이라고. 근데 어제 오후에 잠깐 튀어나왔다고 하더라. 회사에 와서, 내 계약 건을 처리하고. 그리고 다시 들어갔어.”

박소진이 말했다.

세아는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생각했다. 강리우가 자살을 시도했으면서, 동시에 박소진의 계약을 풀어줬다는 것이. 그것이 가능한 일인가.

“너는 지금 뭐 하는 거야?”

세아가 물었다.

“모르겠어. 그냥… 있는 거. 여기에. 당신을 기다렸어. 거의 밤새. 혹시 당신이 나타날까 봐. 왜냐하면… 나는 당신한테 사과하고 싶었어. 제대로.”

박소진이 말했다.

“사과할 필요 없어. 너도 피해자였어.”

세아가 말했다.

“그래도… 미안해. 진짜로.”

박소진이 말했다.

세아는 그 말을 들으면서 자신의 가슴 안에서 무언가가 움직였다. 분노가 아니었다. 이미 분노는 소진되어 있었다. 대신에 피로가 있었다. 깊은, 뼛속까지 파고드는 피로가.

“우리 어디 가서 앉자.”

세아가 말했다.

“어디요?”

박소진이 물었다.

“아무 데나. 밤이 새기 전에.”

세아가 말했다.

두 사람은 길을 따라 걸었다. 신논현역의 밤거리를 따라. 그 위에는 별이 거의 없었다. 서울의 하늘은 별을 숨겼다. 마치 그 별들이 도시에는 필요 없다고 판단하는 것처럼.

편의점을 찾았을 때, 세아는 들어갔다. 그리고 커피를 샀다. 따뜻한 커피. 자신과 박소진을 위해.

박소진과 세아는 편의점의 플라스틱 의자에 앉았다. 밤 3시에. 세상이 가장 어두운 시간에. 그리고 서로를 봤다.

“너는 어떻게… 살고 있어?”

박소진이 물었다.

“모르겠어. 그냥 살아가고 있어. 어떻게 살아가는지는 모르면서.”

세아가 말했다.

“맞아. 나도.”

박소진이 말했다.

그리고 그들은 한동안 침묵했다. 그것은 불편한 침묵이 아니었다. 대신에, 공유된 침묵이었다. 마치 그들이 같은 어둠 속에 앉아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침묵이었다.

세아의 휴대폰이 다시 울렸다. 하늘이였다. 이번에는 전화였다.

세아는 받았다.

“야! 너 어디 있어? 나 미쳐가지고. 너 왜 연락이 없어?”

하늘이의 목소리가 폭발했다.

“괜찮아. 괜찮아.”

세아가 말했다.

“뭐가 괜찮아? 너 경찰서에서 뭐 한 거야? 그리고 강리우가 자살 시도했대? 그게 뭐하는 짓이야?”

하늘이가 물었다. 분노와 걱정이 섞여 있었다.

“하늘이, 듣기만 해줄래?”

세아가 말했다.

하늘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침묵이 대답이었다.

세아는 말했다. 자신이 경찰서에서 한 것들을 . 강리우가 병원에 있다는 것을. 박소진이 계약을 풀었다는 것을. 그리고 지금 자신이 신논현 편의점에서 박소진과 앉아 있다는 것을.

하늘이는 들었다. 그리고 한동안 말하지 않았다.

“세아야.”

하늘이가 마침내 말했다. 아주 천천히.

“뭐예요?”

세아가 물었다.

“넌 지금 살고 있어. 정말로.”

하늘이가 말했다.

세아는 그 말의 의미를 생각했다. 살고 있다. 그렇다. 자신은 살고 있었다. 그것이 좋은지, 나쁜지는 모르겠지만, 살고 있었다.

“응. 살고 있어.”

세아가 말했다.

새벽 3시 20분. 신논현역 근처의 편의점. 세아와 박소진이 앉아 있고, 하늘이의 목소리가 휴대폰 너머에서 울리고 있었다. 그리고 한강 건너편 어딘가에, 강리우가 병원에 누워 있었다. 자신의 손이 떨리는 것을 느끼면서. 자신이 왜 그렇게 되었는지 모르면서.

모두가 불타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도 불을 꺼내지 않고 있었다. 마치 그 불이 어떤 형태의 존재 증명이라는 것처럼.

세아는 자신의 손에서 USB 드라이브를 빼냈다. 주머니에서. 그것은 더 이상 뜨겁지 않았다. 단지 차가운 플라스틱이었다. 하지만 그것 안에는 여전히 자신의 목소리가 있었다. 증거가 아닌 증거로서.

“박소진.”

세아가 말했다.

“네?”

박소진이 대답했다.

“너는 지금부터 누구인데?”

세아가 물었다.

박소진은 한동안 생각했다. 그리고 천천히 말했다.

“모르겠어요. 근데… 누군가를 속인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그게 시작이 될 것 같아요.”

박소진이 말했다.

세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생각했다. 자신도 마찬가지라고. 자신도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누군가를 속인 사람은 아니라고.

휴대폰에서 하늘이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세아야, 너 나한테 와. 지금 바로. 내가 기다리고 있을 게.”

하늘이가 말했다.

“알겠어.”

세아가 말했다.

세아는 박소진을 봤다. 그 여자는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천천히. 마치 그 따뜻함이 자신을 어딘가로 데려갈 것이라고 믿는 것처럼.

“너도 나랑 올래?”

세아가 물었다.

박소진은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웃음이 나왔다. 약한, 깨진 웃음이었다. 하지만 웃음이었다.

“네. 가요.”

박소진이 말했다.

그들은 함께 일어났다. 플라스틱 의자에서. 그리고 밖으로 나갔다. 밤의 서울로. 그곳은 여전히 어두웠다. 하지만 그 어둠 속에서 별들이 천천히 사라지고 있었다. 새벽이 오고 있었다. 그리고 새벽은 항상 밤보다 조금 더 견딜 만했다.

# 새벽의 증명

## 1부: 침묵의 무게

새벽 3시 20분. 신논현역 근처 편의점의 형광등이 울부짖고 있었다.

하늘이의 말이 휴대폰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왔을 때, 세아는 그것을 들었다. 정확히 들었다. 귀로만 아니라 온몸으로. 마치 그 말이 공기 중에 떠도는 미세한 입자처럼 피부에 스며드는 것 같았다.

그리고 세아는 한동안 말하지 않았다.

침묵이 자리를 차지했다. 편의점 안의 모든 소리를 삼켜버리는 침묵. 형광등의 윙윙거리는 소리도, 냉동고에서 새어나오는 차가운 공기의 음성도, 건너편 도로의 가끔씩 지나가는 택시 소리도 모두 그 침묵 앞에서는 무의미했다.

세아의 손은 테이블 위에 놓여 있었다. 손가락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마치 그 손이 독립된 생명체처럼, 자신의 신경계를 무시하고 스스로의 공포를 표현하고 있는 것처럼.

옆에 앉아 있던 박소진이 조심스럽게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눈빛은 불안했다. 세아의 침묵이 뜻하는 바가 무엇인지 알고 싶었지만, 그것을 묻을 용기가 없었다. 대신 그녀는 자신의 커피잔을 양손으로 집었다. 따뜻함을 구하는 몸짓. 마치 그 열기가 자신의 영혼을 녹여낼 수 있다고 믿는 것처럼.

세아는 천천히 호흡을 내쉬었다. 코를 통해 들어온 공기는 차갑고 건조했다. 편의점 냉동고와 외부의 이른 봄 공기가 섞여 만든 이상한 온도. 그것이 폐 깊숙이 들어올 때마다 가슴이 철렁했다.

“세아야.”

하늘이가 다시 말했다. 휴대폰 너머에서. 마치 자신의 침묵을 견딜 수 없다는 듯이. 그 목소리는 낮고, 느렸고, 마치 매 글자를 물속에서 건져 올리는 것처럼 무거웠다.

세아는 여전히 대답하지 않았다.

“뭐예요?”라고 물으려던 순간, 세아는 자신의 목소리가 떨릴 것을 알았다. 그래서 침묵을 지켰다. 침묵은 거짓이 아니었다. 침묵은 적어도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 2부: 말의 의미

“아주 천천히… 뭔가 말해야 할 것 같은데.”

하늘이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이번엔 더 길었다. 마치 문장을 완성해야 한다는 절박함이 있었다. 세아는 그 절박함을 알아챘다. 몇 개월 전, 자신도 같은 감정으로 누군가의 말을 기다린 적이 있었으니까.

“뭐예요?”

세아가 마침내 물었다. 그 말이 나오자마자 자신의 목소리가 기대보다 작고 낯설게 들렸다. 마치 다른 사람이 말하고 있는 것처럼.

“넌 지금 살고 있어. 정말로.”

하늘이가 말했다.

그 말이 세아에게 도달했을 때, 그것은 단순한 문장이 아니었다. 그것은 선언이었다. 아니, 그보다도 간청이었다. 살고 있다는 것의 의미를 깨닫기를 바라는 간청.

세아는 그 말의 의미를 생각했다. 정말로 깊이 생각했다.

살고 있다.

그렇다. 자신은 살고 있었다. 심장이 뛰고 있고, 폐가 공기를 들이마시고 내쉬고 있으며, 눈이 이 형광등 아래의 세상을 보고 있었다. 그것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생물학적 의미에서, 자신은 확실히 살아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세아의 눈이 편의점의 선반을 따라 움직였다. 같은 모양의 라면 박스들, 음료수 병들, 미니 핫도그들. 이 모든 것들도 나름의 방식으로 “살아”있었나? 아니면 살아있다는 것은 오직 움직이고 생각하고 느끼는 것들만의 특권인가?

“응. 살고 있어.”

세아가 말했다.

그 말은 인정이었다. 동시에 항복이었다.

박소진이 세아를 바라봤다. 그 여자의 얼굴에는 무언가가 흐르고 있었다. 눈물인지 그저 건조한 공기에 의한 눈물인지 알 수 없었지만, 분명히 무언가가 흐르고 있었다.

“넌… 정말 강한 사람이야.”

박소진이 속삭이듯 말했다.

“아니야. 그냥…”

세아는 자신의 손을 봤다. 그것은 여전히 떨리고 있었다.

“그냥 살고 있을 뿐이야.”

## 3부: 거리와 거리

한강 건너편 어딘가에, 강리우가 병원침대에 누워 있었다.

그 사실을 세아가 정확히 알 수는 없었지만, 하늘이가 말해주었고, 세아는 그것을 믿었다. 왜냐하면 믿을 수밖에 없었으니까. 믿음은 때때로 선택이 아니라 생존의 방식이었다.

강리우는 아마도 천장을 보고 있을 것이다. 병실의 천장. 그것은 어떤 색깔일까? 흰색? 베이지색? 세아는 한 번도 강리우를 직접 본 적이 없었다. 오직 목소리와 문자와 그리고 마지막에 그 영상만이 있었다.

강리우의 손도 떨리고 있을 것이다.

세아는 그것을 알았다. 왜냐하면 자신의 손이 떨리고 있었으니까. 같은 이유로. 같은 두려움으로. 그들은 한강으로 나뉘어져 있었지만, 그 두려움만큼은 같은 강도로 나뉘어지지 않았다.

강리우는 왜 그렇게 되었을까? 자신이 왜 그렇게 되었는지 모르면서 말이다. 세아는 그 문장을 다시 읽었다. 마음속으로.

자신이 왜 그렇게 되었는지 모르면서.

그것이 가장 끔찍한 부분이었다. 이유 없는 고통. 설명할 수 없는 자멸. 마치 자신이 어떤 프로그램에 의해 움직여지는 인형인 것처럼,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세아, 괜찮아?”

박소진의 목소리가 들렸다. 현재로 돌아오는 목소리.

세아는 고개를 들었다.

“응.”

그것이 거짓말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 4부: 불의 형태

모두가 불타고 있었다.

이것이 세아가 깨달은 것이었다. 명확한 순간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천천히, 마치 물이 끓어오르듯이, 깨달음이 차올랐다.

하늘이는 자신의 불로 타고 있었다. 그 불은 무엇인가? 죄책감? 아니면 사랑? 아니면 그 둘을 구분할 수 없는 상태?

박소진은 자신의 불로 타고 있었다. 그것은 더 복잡했다. 자신이 저질렀던 것들, 그리고 자신이 지켜내지 못했던 것들. 그 두 개의 불이 함께 타오르고 있었다.

강리우는 자신의 불로 타고 있었다. 그것이 최악이었다. 왜냐하면 강리우는 자신의 불의 원인을 모르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세아?

세아도 타고 있었다. 하지만 자신의 불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것은 증거인가? 거짓말인가? 아니면 그 둘 사이의 어딘가?

하지만 아무도 불을 꺼내지 않고 있었다.

이것이 가장 흥미로운 부분이었다. 그들은 모두 불 옆에서 서 있었지만, 손을 뻗어 불을 끄지 않았다. 마치 그 불이 어떤 형태의 증명이라는 것처럼. 자신이 아직 살아있다는 것의 증명. 자신이 아직 느낄 수 있다는 것의 증명.

세아가 이것을 깨달았을 때, 그것은 거의 깨달음이 아니었다. 그것은 더 가까워 보기였다. 자신 안에 이미 있던 것을 다시 인식하기.

“우리가 미쳤어?”

박소진이 갑자기 물었다.

“응.”

세아가 대답했다.

“조금.”

## 5부: USB 드라이브

세아는 자신의 손에서 USB 드라이브를 빼냈다. 주머니에서.

그것이 얼마나 오래 그곳에 있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지금 자신의 손 위에 있다는 것이었다. 차갑고, 단단하고, 부정할 수 없는 물리적 사실로서.

USB 드라이브.

그것은 이전에는 뜨거웠다. 세아의 가슴처럼. 마치 그것이 자신의 일부이고, 자신의 일부가 그것이었던 것처럼. 세아가 그것을 들 때마다, 마치 자신의 영혼의 일부를 들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지금은 차가웠다.

단지 차가운 플라스틱이었다. 회색 플라스틱. 금속 접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것 안에는 여전히 자신의 목소리가 있었다.

세아는 그 사실을 생각했다. 그 작은 물체 안에 자신의 목소리가 저장되어 있다는 것. 말이 되지 않았다. 목소리는 공기의 진동이어야 한다. 그것이 어떻게 0과 1로 변환될 수 있었는가? 어떻게 자신의 감정, 자신의 두려움, 자신의 거짓말이 이 작은 플라스틱 상자 안에 갇혀 있을 수 있었는가?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그것이 증거인가? 아니면 증거가 아닌가?

이것이 세아를 가장 괴롭혔다. 모호성. 회색 영역. 검은색과 하얀색 사이의 무한한 회색.

만약 그것이 증거라면, 그것이 무엇의 증거인가? 거짓말의? 사랑의? 아니면 두 가지 모두를 동시에 증명하는 어떤 신비로운 물체인가?

“그거… 아직도 가져가?”

박소진이 물었다. USB 드라이브를 보며.

“응.”

세아가 대답했다.

“왜?”

“모르겠어. 그냥… 필요해.”

세아는 그것을 다시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것이 무게가 있게 느껴졌다. 이전처럼 불이 아니라, 무게. 책임의 무게.

## 6부: 박소진이라는 이름

“박소진.”

세아가 말했다.

“네?”

박소진이 대답했다. 그 목소리에는 의외성이 있었다. 마치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얼마나 오랜만인지를 깨달은 것처럼.

“너는 지금부터 누구인데?”

세아가 물었다.

이것은 단순한 질문이 아니었다. 이것은 거의 철학적인 질문이었다. 정체성에 관한 질문. 자신이 누구인가에 관한 질문. 지난날의 자신과 지금의 자신 사이에 무엇이 남아있는가에 관한 질문.

박소진은 한동안 생각했다.

그 침묵은 길었다. 정말 길었다. 편의점의 형광등이 그들의 위에서 울부짖고 있었고, 냉동고의 음성이 배경음악처럼 흘렀고, 밖의 서울이 새벽의 마지막 시간을 살아가고 있었다. 하지만 박소진은 여전히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천천히 말했다.

“모르겠어요. 근데… 누군가를 속인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이 말을 할 때, 박소진의 목소리에는 처음으로 무언가 같은 것이 있었다. 결단. 아니면 항복. 아니면 그 둘이 같은 것이라는 인식.

“그게 시작이 될 것 같아요.”

박소진이 계속했다.

세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생각했다.

자신도 마찬가지라고. 자신도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누군가를 속인 사람은 아니라고. 아니, 정확히 말하면, 자신이 속인 사람들은 대부분 이미 알고 있었다. 아니면 알고 싶지 않았다. 무언가를 모르는 것도 일종의 선택이었다.

“그래. 그게 맞는 것 같아.”

세아가 말했다.

## 7부: 전화와 초대

휴대폰에서 하늘이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세아는 이전에 그 전화를 끝내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스피커를 켠 채로, 하늘이는 그들의 침묵을 들었다. 그들의 생각을 들었다. 아니, 들으려고 했다.

“세아야, 너 나한테 와. 지금 바로. 내가 기다리고 있을 게.”

하늘이가 말했다.

그 목소리에는 절박함이 있었다. 하지만 동시에 확신도 있었다. 마치 세아가 올 것을 알고 있는 것처럼. 또는 올 수밖에 없게 만드는 어떤 힘이 자신에게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처럼.

세아는 그것을 느꼈다. 그 소환. 그 초대. 아니, 더 정확히는 그 명령.

“알겠어.”

세아가 말했다.

그 말이 나가기 직전, 세아는 자신의 신체 상태를 점검했다. 손은 여전히 떨리고 있는가? 예. 목소리는 정상인가? 대체로. 마음은? 그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세아는 박소진을 봤다.

그 여자는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아직도. 마치 그 커피가 무한하기라도 한 것처럼. 또는 그 커피를 마시는 동안은 무언가를 결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믿는 것처럼.

실제로, 커피를 마시는 것은 시간을 벌기 위한 행위였다. 세아는 그것을 알았다. 왜냐하면 자신도 많은 시간을 이런 식으로 보냈으니까. 무언가를 하는 척하면서, 실제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너도 나랑 올래?”

세아가 물었다.

박소진은 커피잔을 내려놓았다. 천천히. 마치 그것이 도자기이고, 자신이 그것을 깨뜨리고 싶지 않은 것처럼.

그리고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웃음이 나왔다.

그것은 약한 웃음이었다. 거의 웃음이 아니었다. 마치 깨진 종의 소리 같았다. 또는 음악이 되려다 만 소음. 하지만 그것은 웃음이었다.

“네. 가요.”

박소진이 말했다.

## 8부: 함께 일어나기

그들은 함께 일어났다.

플라스틱 의자에서. 그 의자들은 일반적인 편의점의 의자들이었다. 수백, 수천 번 사람들이 앉았다가 일어나기를 반복했던 의자들. 각각의 사람은 자신의 이야기를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자신의 불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세아가 생각할 수 있었던 것은 오직 자신의 불뿐이었다.

그들은 밖으로 나갔다.

밤의 서울로. 아니, 더 정확히는 밤이 끝나가는 서울로.

신논현역 근처의 거리는 여전히 조용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직 잠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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