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아닌 것을 위해 불탄 소녀 – 제85화: 엄마의 침묵, 아들의 울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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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85화: 엄마의 침묵, 아들의 울음

전화기를 귀에 댄 어머니의 얼굴이 천천히 변했다. 먼저 놀라움이 흘렀고, 그 다음 이해가 스며들었다. 마지막에는 그런 모든 것을 초월한 무언가가 남았다. 모성이라고 부르기엔 너무 오래되고, 너무 깊은 어떤 감정. 어머니는 도현이의 말을 듣고 있었지만, 동시에 세아도 보고 있었다. 세아를 바라보는 어머니의 눈은 동시에 두 아이를 품을 수 있는 그런 시선이었다.

“응, 응. 엄마가 들어.”

어머니가 말했다.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마치 아직도 아기인 도현이를 재우려는 그런 톤. 하지만 어머니는 그것이 거짓임을 알고 있었다. 도현이는 아기가 아니었다. 도현이는 이미 아버지를 잃었고, 누나마저 잃을 뻔한 경험을 한 거의 어른이었다. 그런데도 어머니는 아기처럼 달래는 목소리를 썼다. 왜냐하면 때로 진실은 거짓으로만 전달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누나가 제주에 있는 건 누나의 선택이야. 누나가 필요한 시간이 있었던 거야. 그건 너 때문이 아니고, 엄마 때문도 아니야. 그냥… 누나 자신 때문이야.”

어머니가 말을 이었다. 세아는 어머니의 옆얼굴을 바라봤다. 어머니의 입술이 움직일 때마다, 그 입가의 주름들이 깊어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세아가 한 번도 본 적 없는 각도에서, 어머니는 말하고 있었다. 세아를 지키는 말을. 도현이를 안심시키는 말을. 동시에.

“그리고 누나가 돌아올 거야. 충분히 쉬고 나서. 충분히 생각하고 나서.”

이 부분에서 어머니의 목소리가 조금 흔들렸다. 아주 미세하게. 세아가 아니었다면 눈치챌 수 없을 정도로. 하지만 세아는 눈치챘다. 어머니의 불안감을. 어머니도 세아가 돌아올지 확신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어머니도 두려워하고 있다는 것을.

“너는 학교를 다녀야 해. 공부를 해야 해. 그리고 밥을 먹고, 잠을 자고, 살아야 해. 그게 너의 일이야. 누나를 걱정하는 것만이 아니라, 너 자신을 돌보는 것도 너의 일이야. 알겠지?”

도현이가 무언가를 말하려고 했던 것 같았다. 어머니의 목소리는 그것을 묵살했다. 부드럽지만 확실하게.

“엄마가 있어. 항상 여기 있을게. 그리고 누나도… 누나도 여기 있어. 제주에서. 돌아올 때까지.”

전화가 끝났다. 어머니가 핸드폰을 내려놓을 때, 세아는 어머니의 손이 떨리는 것을 봤다. 아주 미세하게. 마치 약한 바람에도 흔들리는 해초처럼. 그런 손이 어머니의 옷자락 위에 내려앉았다.

“엄마…”

세아가 말했다. 하지만 그것도 미완성된 말이었다.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랐다. 어머니를 위로해야 하나. 어머니에게 감사해야 하나. 어머니에게 사과해야 하나.

“너는 돌아가야 해.”

어머니가 말했다. 얼굴을 세아 쪽으로 돌리지 않으면서.

“뭐라고요?”

“서울로. 너는 여기 있어선 안 돼. 여기서 머무르는 건, 결국 도망을 계속하는 거야. 도현이도, 나도, 그리고 너 자신도 포기하는 거야.”

어머니가 이제 세아를 바라봤다. 그 눈은 해였다. 따뜻했고, 동시에 타올랐다.

“너는 가서 노래를 해. 너의 이름으로. 너의 목소리로. 그게 유일한 방법이야. 도현이를 구하는 방법도, 나를 구하는 방법도, 너 자신을 구하는 방법도.”

“근데 강리우가…”

세아가 말했다.

“그 남자는 더 이상 너한테 손을 댈 수 없어. 왜냐하면 이제 넌 혼자가 아니니까. 엄마가 있고, 도현이가 있고, 하늘이가 있고, 그리고…”

어머니가 말을 멈췄다. 뭔가를 더 말하려고 했지만, 그것은 어머니가 말할 수 없는 것이었다. 아마도 “그리고 너 자신이 있다”는 말이었을 것이다.

세아는 어머니의 손을 잡았다. 거칠고, 구부러진, 하지만 따뜻한 그 손을. 그 손은 수십 년을 물속에서 보냈다. 그 손은 아버지를 묻고 나서도 계속 일했다. 그 손은 세아와 도현이를 키웠다. 그 손은 지금 세아를 놓고 있었다. 돌려보내고 있었다. 자기 자신의 길로.

“엄마는 이미 다 알고 있었어요.”

세아가 말했다. 목이 다시 아팠다. 하지만 이번엔 강리우의 손가락 때문이 아니었다. 눈물 때문이었다.

“그럼 엄마는 왜 아까 해변에서…”

“너를 놔주기 전에, 엄마가 너한테 해줄 마지막 일이 뭐냐면, 너한테 말해주는 거야. 살아야 한다는 것. 그리고 혼자가 아니라는 것. 그 두 가지가 엄마가 너한테 줄 수 있는 전부야.”

어머니가 세아의 얼굴을 양손으로 감싸 안았다. 아침 햇빛이 어머니의 뒤편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그 빛 속에서 어머니의 실루엣은 더욱 작아 보였다. 하지만 그 작은 몸 안에는 거대한 뭔가가 담겨 있었다. 결연함. 희생. 그리고 사랑이라고 부르기엔 너무 오래되고, 너무 깊은 어떤 감정.

“제주에서 며칠 더 있어. 그 다음에 올라가.”

어머니가 말했다.

“엄마는요?”

“엄마는 여기 있을게. 해에 나갈 때도 있고, 도현이를 봐줄 때도 있고. 이제 엄마는 너 때문에 살아갈 필요는 없어. 그래서 더 오래 살 수 있어.”

세아는 어머니의 말을 이해했다. 그리고 동시에 이해하기 싫었다. 어머니가 말하는 것은 분리였다. 독립이었다. 그리고 가장 깊은 곳에는, 어머니도 이미 준비를 마친 누군가의 모습이었다.


그날 오후, 세아는 혼자 해변을 걸었다. 어머니는 집에서 쉬고 있었다. 도현이와의 전화 통화 후 어머니는 피곤해 보였다. 아니, 피곤한 것이 아니라 사용된 것 같았다. 마치 모든 에너지를 그 전화 통화에 쏟아부은 것처럼. 그래서 세아는 나왔다. 어머니에게 그 시간을 주기 위해. 그리고 자신도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다.

제주의 바람은 여전히 차가웠다. 11월의 제주는 서울과는 다른 종류의 추위였다. 서울의 추위는 콘크리트와 아스팔트에 반사되어 더욱 거칠어지는 것 같았다면, 제주의 추위는 바다에서 오는 것이었다. 깊음에서 오는 추위. 자극적이지 않지만, 깊게 스며드는 추위.

세아는 어머니와 앉아 있던 그 바위 위에 다시 앉았다. 파도는 여전히 같은 리듬으로 밀려오고 있었다. 아침에 봤던 그 파도와 정확히 같은 것처럼. 아니, 다른 파도일 수도 있다. 같은 바다지만 다른 물이 흘러오는 것처럼. 과학적으로는 그럴 리가 없겠지만, 세아에게는 그렇게 느껴졌다. 모든 것이 흐르고 있다는 것. 아무것도 같은 상태로 머물지 않는다는 것.

휴대폰이 울렸다. 서울에서였다. 번호는 알 수 없었지만, 아마도 하늘일 것 같았다. 세아는 한참을 그 전화를 보기만 했다. 전화를 받아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받으면 모든 것이 현실이 될 것 같았다. 지금은 아직도 구름 속에 있는 것 같은데. 아직도 제주의 바다 위에만 떠 있는 것 같은데.

결국 전화를 받았다.

“야, 나세아! 넌 지금 뭐 하는 거야? 계속 전화를 안 받고, 카톡도 없고, 뭐하는 거냐고!”

하늘의 목소리가 폭발했다. 그 목소리 너머에는 분노도 있었지만, 더 깊은 곳에는 걱정이 있었다.

“제주 있어.”

세아가 말했다. 목은 여전히 아팠다. 하지만 이제 그 통증도 견딜 수 있을 것 같았다. 왜냐하면 그것은 강리우가 주지 않은 통증이 아니라, 자신이 견뎌낼 수 있는 통증이기 때문이었다.

“제주? 왜 제주야? 아, 잠깐. 나 지금 너한테 그 질문할 처지가 아니네. 일단 넌 살아 있냐?”

“살아 있어.”

“정말로? 거짓 말 아니고?”

“거짓 아니야.”

하늘의 호흡이 깊어졌다. 전화 너머에서 하늘이 한숨을 쉬는 것을 들을 수 있었다. 아주 깊은, 한참을 쌓아둔 그런 한숨.

“넌 정말… 정말로 미쳤어. 그놈 강리우 때문에 서울을 떠났어? 진짜로?”

“그게 아니라…”

세아가 말했다. 하지만 그것도 거짓일 것 같았다. 정확히는 그것도 거짓이 아니고, 그것도 진실이 아니었다. 더 복잡한 무언가였다.

“넌 언제 올라와?”

“모르겠어. 아직…”

“아직? 나세아, 넌 지금 뭐 하는 거야? 너는 서울에서 많이 해야 할 일들이 있잖아. 강리우 건도 정리해야 하고, 음악도 해야 하고…”

“하늘…”

세아가 하늘의 말을 끊었다.

“미안해. 진짜로. 전화도 안 받고, 카톡도 안 하고, 그냥… 사라졌어. 나 미쳤어.”

전화 너머에서 침묵이 흘렀다. 그 침묵은 너무 길어서, 세아는 혹시 전화가 끊겼나 싶을 정도였다. 하지만 전화는 끊기지 않았다. 하늘이 세아의 말을 받아들이는 그 침묵이었다. 어떤 말보다도 큰 그 침묵.

“알았어. 그럼 이제 뭐할 거야? 제주에서 계속 있을 거야?”

하늘이 물었다.

“올라갈 거야. 엄마가 그러라고 했어. 올라가서 노래를 해야 한대.”

“노래? 넌 지금 노래를 할 수 있겠어? 목이 그 정도 아파?”

“모르겠어. 아마… 시간이 약이겠지. 엄마가 그랬어.”

세아가 말했다. 그 말을 하면서, 세아는 어머니의 목소리를 들었다. “시간이 약이야. 한두 주면 나아.” 그 단순한 말 속에 담긴, 얼마나 많은 경험이 있는가. 어머니는 자신의 인생 전체로 이 말을 증명했다.

“뭐, 그래. 그럼 올라와. 올라와서 천천히 준비해. 그리고…”

하늘이 말을 멈췄다.

“그리고?”

세아가 물었다.

“그리고… 나랑 마주해. 나는 미안하다고 할 거 많아. 너한테. 그리고 너도 나한테 할 말 있겠지. 우리 그거 다 해. 한 번에.”

하늘의 목소리는 결연했다. 마치 타투이스트가 바늘을 들 때의 그런 결연함. 돌이킬 수 없는 그림을 새길 때의 그런 결단.

“알았어.”

세아가 말했다.

“그리고 나세아. 너 진짜 그 강리우 한테서 완전히 떨어나 있는 거 맞지? 그 남자가 또 뭐라고 할까봐 두렵진 않고?”

하늘의 질문은 날카로웠다. 그리고 필요한 질문이었다.

“완전히… 떨어나 있어. 그리고 두렵지도 않아. 왜냐하면…”

세아가 바다를 봤다. 파도는 여전히 자신의 리듬대로 밀려오고 있었다.

“왜냐하면?”

하늘이 물었다.

“왜냐하면 이제 나한테는 돌아갈 곳이 있거든. 엄마도 있고, 도현이도 있고, 그리고…”

세아가 말을 멈췄다. 그 다음 말은 자신에게 말하는 것이었다. 하늘에게가 아니라.

“그리고 나 자신도 있어.”

전화 너머에서 하늘이 울음을 참는 소리가 들렸다. 아주 미세하게.

“알았어, 나세아. 그럼 올라와. 천천히, 하지만 꼭.”

전화가 끝났다. 세아는 휴대폰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다시 파도를 봤다. 파도는 여전히 같은 소리를 내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 그 소리가 다르게 들렸다. 마치 누군가 세아를 부르는 목소리처럼. 돌아오라고 말하는 목소리처럼. 하지만 동시에, 떠나라고 말하는 목소리처럼.


저녁이 되었을 때, 세아는 집으로 돌아갔다. 어머니는 부엌에서 다시 밥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번엔 누군가 온 것처럼. 밥뿐만 아니라, 여러 반찬들이 식탁에 놓여 있었다. 고등어도 있었고, 미역국도 있었고, 어머니가 직접 담은 깍두기도 있었다.

“누가 오는 거예요?”

세아가 물었다.

“아무도 안 와. 그냥 우리 셋이 밥 먹는 거야.”

어머니가 말했다.

“셋이?”

“응. 넌 여기 있고, 도현이는 학교에서 올 거야. 내일 아침 첫 차로.”

세아의 눈이 커졌다. 도현이가 제주로 온다고?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도현이는 학교가 있고, 친구들이 있고, 서울에 있어야 할 모든 이유들이 있다. 그런데 어머니는 도현이를 제주로 부렸다는 건가.

“엄마, 도현이가 학교를…”

“알아. 그래서 이틀만 있다고 했어. 금토일. 그리고 일요일 저녁 차로 올라가. 근데 그 이틀 동안 우리 넷이 함께 있을 거야.”

어머니가 밥을 담으며 말했다. “넷이”라는 말이 세아에게는 이상했다. 어머니, 자신, 도현이. 그게 셋인데, 넷이라니. 아, 어머니는 아버지를 세고 있었던 건가. 아니면 다른 누군가를 세고 있었던 건가.

세아는 그 질문을 입 밖에 꺼내지 않았다. 대신, 어머니의 옆에 서서 함께 밥을 담는 것을 도왔다. 그 작은 행동 자체가 답인 것처럼 느껴졌다. 이 순간, 이 시간, 이 밥상. 여기 있는 모든 것이 충분했다. 돌아갈 것을 약속하면서, 지금 여기에 있는 것. 그것이 바로 살아가는 것이 아닐까.

밤이 깊어갔다. 세아는 자신의 오래된 방에 누웠다. 천장에는 여전히 그 낡은 스티커들이 붙어 있었다. 어릴 때 자신이 붙인 별들. 별을 좋아해서 붙였던 건 아니었다. 단지 밤하늘을 실내에 만들고 싶었던 것이었다. 어두운 곳에서 빛나는 뭔가가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것이었다.

휴대폰이 울렸다. 이번엔 서울 번호였다. 모르는 번호. 세아는 한참을 그 번호를 보기만 했다. 혹시 강리우가 번호를 바꿨나 싶었다. 하지만 전화를 받기로 했다. 계속 피할 순 없다고 생각했다.

“여보세요?”

세아가 말했다.

“아, 나세아씨?”

전화 너머의 목소리는 낯설었다. 남자의 목소리였지만, 강리우의 목소리는 아니었다.

“네, 누구세요?”

“아, 저는 JYA 엔터테인먼트의 박인철 프로듀서라고 합니다. 한번 뵌 적 있지 않으신가요?”

세아의 심장이 빨라졌다. JYA. 그 회사의 이름만으로도 가슴이 철렁했다.

“네. 기억합니다.”

세아가 말했다.

“그런데 말이죠. 당신이 제주에 계시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혹시… 돌아올 생각이 없으신가요? 회사 쪽에서 당신과 협력하고 싶은 프로젝트가 있거든요.”

박인철의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마치 꿀을 발라놓은 것처럼. 세아는 그 목소리의 위험함을 감지했다.

“프로젝트요?”

“네. 당신이 작곡한 곡이 있잖습니까. 그 곡들을 본격적으로 앨범화하려고 합니다. 당신의 이름으로요.”

세아의 숨이 멎었다. 당신의 이름으로. 그 말이 무슨 뜻인지는 알았다. 하지만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아직 모르고 있었다.

“생각해 보시고 연락주세요. 당신의 음악은 정말 좋거든요. 제가 직접 담당하겠습니다.”

박인철이 말했다. 그리고 전화는 끝났다.

세아는 한참을 휴대폰을 들고 있었다. 그리고 천천히, 천천히 웃음이 나왔다. 아니, 웃음이 아니었다. 울음이었다. 그것도 어떤 감정 때문인지 알 수 없는 울음이었다.

천장의 별들이 세아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릴 때 자신이 붙인 그 별들. 이제 그 별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세아는 알고 있었다. 그것은 희망이 아니었다. 그것은 불이었다. 작은 불. 어두움 속에서 조금씩 타오르는 그런 불. 성냥처럼 작지만, 꺼지지 않는 불.

세아는 일어났다. 그리고 창문을 열었다. 제주의 밤바람이 들어왔다. 짠내 나는, 깊고, 끝없는 그 바람.

“내일 올라가야겠다.”

세아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도현이를 보고, 엄마와 밥을 먹고, 그 다음에…”

세아가 말을 멈췄다. 그 다음은 무엇일까. 그 다음은 자신도 모르고 있었다. 하지만 어머니의 말이 들렸다. “넌 올라가서 노래를 해. 너의 이름으로. 너의 목소리로.”

그렇다. 그 다음은 노래였다. 더 이상 누군가를 위한 노래가 아니라, 자신을 위한 노래. 자신의 이름으로 부르는 노래.

밤은 깊어갔고, 세아의 마음 속에서는 어떤 불이 점점 밝아지고 있었다.

# 제주의 밤, 그리고 시작

휴대폰 화면에 떠오른 번호를 보는 순간, 세아의 손가락이 얼어붙었다. 강리우. 그 이름 석 자가 화면에 떴다가 사라졌다. 아니, 정확히는 강리우의 번호처럼 보이는 것이었다. 같은 지역번호, 같은 뒷자리 패턴. 혹시 강리우가 번호를 바꿨나? 아니면 누군가가 그의 번호를 빌려서 전화를 거는 건 아닐까?

세아는 한동안 휴대폰을 들었다 놨다를 반복했다. 화면의 불빛이 어두운 방 안에서 유일한 빛이었다. 제주의 밤은 깊었고, 창밖으로는 멀리 검은 바다의 소리만 들렸다. 파도가 자갈을 끌어당기는 소리. 그 소리는 마치 누군가가 계속 자신을 부르는 것 같았다.

‘계속 피할 순 없다.’

세아는 그 생각을 떨쳐낼 수 없었다. 서울에서 내려온 지 벌써 8개월. 처음에는 도망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는 달랐다. 이곳이 도망처라기보다는 어딘가 잠시 멈춰서 숨을 고르는 장소 같았다. 그런데 계속 멈춰만 있을 수는 없었다.

휴대폰이 다시 울렸다.

세아는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코를 통해 들어온 공기가 폐 깊숙이 스며들었다. 손가락이 떨렸다. 이건 단순한 전화가 아니었다. 이건 과거로의 통로였다. 서울로의 통로. 자신이 피해왔던 모든 것들로의 통로.

“여보세요?”

세아의 목소리는 생각보다 차분했다. 자신도 놀랐다. 마치 누군가 다른 사람이 이 말을 하고 있는 것처럼 들렸다.

“아, 나세아씨?”

전화 너머의 목소리는 낯설었다. 남자의 목소리였지만, 강리우의 목소리는 절대 아니었다. 강리우의 목소리는 낮고 묵직했다. 마치 바닥에 가라앉은 돌처럼. 하지만 이 목소리는 달랐다. 부드럽고, 신중했고, 계산된 느낌이 있었다.

“네, 누구세요?”

세아는 의자에 앉았다. 왠지 서 있을 수 없을 것 같았다. 무릎이 흔들렸다.

“아, 저는 JYA 엔터테인먼트의 박인철 프로듀서라고 합니다. 한번 뵌 적 있지 않으신가요?”

JYA.

그 이름만으로도 세아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JYA 엔터테인먼트. 서울에서 가장 큰 엔터테인먼트 회사 중 하나. 강리우가 다니던 회사. 아니, 정확히는 강리우가 프로듀서로 일하던 회사.

세아는 기억했다. 박인철. 그 이름도, 그 얼굴도. 2년 전 강리우와 만났을 때, 강리우의 사무실을 방문했었다. 그때 박인철은 복도를 지나가며 자신을 스쳐 지나갔다. 검은색 슈트를 입었고, 손에는 최신형 스마트폰을 들고 있었다. 그의 눈빛은 차가웠다. 마치 모든 것을 계산하는 기계의 눈처럼.

“네. 기억합니다.”

거짓말이었다. 얼굴은 희미하게 기억났지만, 그 사람이 누구였는지는 정확히 모르고 있었다. 하지만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었다. 약간의 예의라고 할까.

“그런데 말이죠. 당신이 제주에 계시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박인철의 목소리는 여전히 부드러웠다. 마치 꿀을 발라놓은 것처럼. 하지만 세아는 그 부드러움 아래에 뭔가 날카로운 것이 숨어있다는 걸 감지할 수 있었다. 마치 벨벳 장갑 안에 숨겨진 쇠주먹처럼.

“혹시… 돌아올 생각이 없으신가요?”

‘돌아올 생각이 없으신가요?’

그 말이 자꾸 맴돌았다. 돌아온다는 게 무슨 뜻일까. 서울로? 아니면 음악으로? 아니면 강리우에게?

“회사 쪽에서 당신과 협력하고 싶은 프로젝트가 있거든요.”

세아는 침을 삼켰다. 목이 메말랐다. 방 안의 공기가 순간 옥죄어오는 것 같았다. 그녀는 창문을 열고 싶었다. 제주의 밤바람을 들이고 싶었다. 하지만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프로젝트요?”

세아의 목소리는 가늘었다. 마치 누군가 그녀의 목을 졸라는 듯한 느낌.

“네. 당신이 작곡한 곡이 있잖습니까. 그 곡들을 본격적으로 앨범화하려고 합니다.”

세아의 숨이 얕아졌다. 작곡한 곡. 그 곡들. 자신이 밤새 만들었던 곡들. 강리우의 앨범을 위해서 만들었던 곡들. 자신의 이름을 알리지 않겠다는 조건으로 강리우에게 건넸던 곡들.

“당신의 이름으로요.”

세아의 숨이 멎었다. 진짜로 멎었다. 마치 심장이 박자를 놓친 것처럼. 당신의 이름으로. 그 말이 무슨 뜻인지는 알았다. 하지만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아직 모르고 있었다.

자신의 이름으로 앨범을 낸다?

자신이 아티스트가 된다?

그건 불가능했다. 아니, 가능했지만, 자신은 그걸 원하지 않았다. 자신이 원했던 것은 그저 음악을 만드는 것이었다. 누군가의 뒤에서, 어둠 속에서. 자신이 앞에 나설 필요는 없었다.

“생각해 보시고 연락주세요. 당신의 음악은 정말 좋거든요. 제가 직접 담당하겠습니다.”

박인철의 목소리는 여전히 부드러웠다. 하지만 그 부드러움은 더 이상 부드러움이 아니었다. 그것은 협박이었다. 예의 바른 협박.

전화는 끝났다.

세아는 한참을 휴대폰을 들고 있었다. 화면은 이미 꺼져있었지만, 그녀는 계속 그것을 쥐고 있었다. 마치 생명줄을 잡고 있는 것처럼.

그리고 천천히, 천천히 웃음이 나왔다.

아니, 웃음이 아니었다.

울음이었다.

어떤 감정 때문인지 알 수 없는 울음. 그 울음은 마치 오래도록 막혀있던 댐이 터지는 것처럼 거칠었고, 거칠었고, 깊었다. 세아는 입을 다물 수 없었다. 눈물이 흘렀다. 그녀는 왜 우는지도 모르면서 계속 울었다.

‘이게 기쁨인가? 아니면 두려움인가? 아니면 그 둘 다인가?’

그녀는 자신의 감정을 분석할 수 없었다. 그저 울었다.

천장을 보았다.

별들이 천장에 붙어있었다. 작은 형광 별들. 어릴 때 자신이 붙인 그 별들. 고등학교 때 이 방에 처음 들어왔을 때, 지루함을 달래기 위해 밤하늘을 만들었던 것이다. 그때는 그 별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었다. 희망. 미래. 꿈.

하지만 이제 그녀는 알고 있었다. 그 별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것은 희망이 아니었다. 그것은 불이었다.’

작은 불. 어두움 속에서 조금씩 타오르는 그런 불. 성냥처럼 작지만, 꺼지지 않는 불. 그 불은 계속 태워왔다. 자신의 마음을 태워왔다. 자신의 밤을 태워왔다.

그리고 이제 그 불이 더 크게 타오르려고 했다.

세아는 일어났다. 움직임이 부자연스러웠다. 마치 누군가 다른 사람의 몸을 조종하는 것처럼. 하지만 그 움직임은 분명 자신의 것이었다.

창문을 열었다.

제주의 밤바람이 들어왔다.

짠내 나는, 깊고, 끝없는 그 바람. 바람은 자신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마치 누군가가 자신의 뺨을 쓸어내리는 것처럼. 세아는 눈을 감았다. 그 바람이 자신을 정화하는 기분이었다. 마치 세례를 받는 것처럼.

그리고 입을 열었다.

“내일 올라가야겠다.”

혼잣말이었다. 하지만 그 말은 확실했다. 어떤 의심도 없었다.

“도현이를 보고, 엄마와 밥을 먹고, 그 다음에…”

세아가 말을 멈췄다. 그 다음은 무엇일까. 자신도 모르고 있었다. 아니, 알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을 말로 꺼내기가 두려웠다.

그때였다.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렸다. 물론 어머니는 옆에 없었다. 하지만 그 목소리는 분명했다. 마치 자신의 영혼 깊은 곳에서 울려 나오는 목소리처럼.

‘넌 올라가서 노래를 해. 너의 이름으로. 너의 목소리로.’

그렇다.

그 다음은 노래였다.

더 이상 누군가를 위한 노래가 아니라, 자신을 위한 노래. 자신의 이름으로 부르는 노래. 자신의 목소리로 세상에 내보내는 노래.

세아는 창문에 기대었다. 밤바람이 자신의 머리칼을 흔들었다. 멀리 바다의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는 마치 박수 같았다. 누군가가 자신을 응원하는 것 같았다.

밤은 깊어갔다.

하지만 세아의 마음 속에서는 어떤 불이 점점 밝아지고 있었다. 그것은 더 이상 성냥 같은 작은 불이 아니었다. 그것은 횃불처럼 크고, 밝고, 뜨거워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불은 자신을 태우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비추고 있었다.

내일, 그녀는 올라갈 것이다.

아버지의 사진 앞에서 절을 할 것이고, 어머니의 손을 잡을 것이고, 도현이를 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다음, 자신은 무대 위에 설 것이다.

자신의 이름으로.

자신의 목소리로.

더 이상 그림자가 아닌, 빛으로.

**에필로그**

새벽 4시.

세아는 짐을 꾸리고 있었다. 손가락이 떨렸지만, 마음은 정해져 있었다. 그녀는 작은 노트북을 챙겼다. 그 안에는 자신이 만든 모든 곡들이 들어있었다. 강리우를 위해 만들었던 곡들. 누군가를 위해 만들었던 곡들. 그리고 자신을 위해 만들고 싶었던 곡들.

이제 그 모든 것들이 빛을 볼 시간이 되었다.

세아는 천장의 별들을 한 번 더 보았다.

“고마워, 별들아.”

그녀는 속삭였다.

“이제 나도 빛이 되어야겠구나.”

창문을 닫았다. 제주는 여전히 검고, 깊고, 조용했다.

하지만 세아의 마음은 더 이상 그렇지 않았다.

그녀의 마음은 노래했다.

자신의 이름으로.

자신의 목소리로.

마침내, 시작되는 새로운 아침을 향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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