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아닌 것을 위해 불탄 소녀 – 제77화: 어머니의 침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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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77화: 어머니의 침묵

어머니는 세아를 안고 있었지만, 움직이지 않았다. 편의점의 형광등이 그들을 비추고 있었고, 냉동실의 윙윙거리는 소리가 배경음이 되었다. 세아는 어머니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어머니의 옷은 소금기로 딱딱했다. 여전히 해에 나가는 날도 있다는 뜻이었다. 60대 중반인데도, 물속으로.

“앞으로 나와.”

어머니가 말했다.

세아는 어머니의 품에서 나왔다. 어머니는 세아의 얼굴을 양손으로 감싸 들었다. 엄지손가락으로 세아의 뺨을 쓸어내렸다. 언제부터 울고 있었는지 세아는 모르지 못했다. 비행기 안에서부터였을까. 공항에서였을까. 아니면 강리우의 손이 자신의 목을 감쌌 그 순간부터였을까.

“얼굴이 왜 이래. 아파?”

어머니가 물었다.

“응.”

세아가 대답했다. 거짓이었다. 얼굴은 아프지 않았다. 하지만 거짓말하는 것이 더 쉬웠다. 진실을 말하는 것보다.

어머니는 세아의 목을 봤다. 자국들은 여전히 선명했다. 편의점의 밝은 조명 아래서 더욱 그랬다. 어머니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것을 본 순간, 세아는 알았다. 어머니가 이미 알고 있다는 것을. 누군가가 자신의 딸을 했던 일을.

“누가 했어?”

어머니의 목소리는 낮았다. 물속에서 올라올 때 내는 그 숨비소리처럼. 살아있다는 것을 외치는 그런 목소리. 하지만 이번에는 다른 무언가가 섞여 있었다. 분노. 아니, 분노보다 더 깊은 무언가. 어머니의 딸을 해치는 자를 향한 원시적인 적대감.

“모르겠어.”

세아가 말했다.

“모르겠어? 세아야, 이게 뭐 하는 짓이야.”

어머니가 세아의 어깨를 잡았다. “누가 했는지 말해. 엄마한테.”

세아는 어머니의 눈을 봤다. 그 눈은 세아를 본 적이 없었다. 아버지가 죽은 후 이렇게 분노한 적이 없었다. 어머니는 조용한 사람이었다. 해녀들 중에서도 가장 조용한 사람. 물속에서 숨을 참는 것처럼, 지상에서도 말을 참는 사람이었다.

“강리우.”

세아가 말했다.

어머니의 손이 놓였다. 강리우라는 이름은 어머니에게 처음 들리는 이름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이름이 의미하는 바는 충분히 명확했다. 남자. 폭력. 자신의 딸에게 손을 댄 남자.

“저놈은 지금 어디 있어?”

어머니가 물었다.

“서울.”

세아가 대답했다.

“서울에? 지금도?”

어머니가 물었다. 그리고 세아의 팔을 잡아 편의점을 나갔다. 밖은 밤이었고, 바다는 검은색이었다. 방파제에는 가로등이 몇 개 있었고, 그 아래는 어부들의 그물이 놓여 있었다.

“엄마, 어디 가?”

세아가 물었다.

어머니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자신의 집 방향으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집은 포구에서 5분 거리였다. 작은 집. 한 방, 부엌, 화장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공간.

집에 도착했을 때, 어머니는 세아를 욕실로 데려갔다. 거울 앞에 세우고, 목의 자국들을 직접 봤다. 손가락 자국이 다섯 개였다. 강리우의 손가락. 아니, 강리우의 절망.

“이건… 이건 폭력이야.”

어머니가 중얼거렸다. “세아야, 이건 경찰에 신고해야 해.”

“아니야.”

세아가 말했다.

“뭐가 아니야? 저놈이 널 죽이려고 한 거 아니야?”

어머니가 물었다.

세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어머니는 세아의 옷을 들어올렸다. 등에도 자국이 있었다. 멍이 들어 있었다. 어머니의 얼굴이 더 굳어졌다.

“도현이는? 도현이도 알아?”

어머니가 물었다.

“아니야.”

세아가 대답했다.

“왜 말 안 해? 왜 혼자만 이걸 다 안고 있어?”

어머니가 목소리를 높였다. 그것은 세아가 처음 듣는 어머니의 목소리였다. 분노의 목소리. 절망의 목소리.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뭔가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의 목소리.

“그 사람이… 죽으려고 했어.”

세아가 천천히 말했다.

어머니는 멈췄다.

“나는 그 사람을 살렸어. 한강 다리에서. 그 사람이 우리를 다 죽이려고 했을 때, 나는 그 사람을 살렸어.”

세아가 계속했다. “그래서… 그래서 나는 경찰에 신고할 수 없어.”

어머니는 세아를 봤다. 오랜 침묵이 있었다. 욕실의 형광등이 윙윙거렸다. 벽에 남은 물때자국들이 보였다. 예전에는 세아가 봤을 자국들. 어머니가 물에서 올라온 후 씻을 때 남는 그런 자국들.

“세아야.”

어머니가 천천히 말했다. “넌 아무것도 빚진 게 없어.”

“아니야. 나는…”

세아가 말을 시작했지만, 어머니가 손을 들어 멈추게 했다.

“그놈이 죽으려고 한 건 그놈의 선택이야. 그리고 너가 그놈을 살린 건 네 선택이야. 근데 그 때문에 넌 그놈의 폭력까지 받아야 해? 넌 구원자가 아니야, 세아야. 넌 그냥 20대의 여자일 뿐이야.”

세아는 어머니의 말을 들었다. 그 말들이 마치 다른 언어처럼 들렸다. 자신에게 향해진 그런 말들을 처음 들었기 때문이었다. 자신을 옹호하는 말들. 자신을 구하는 말들.

“앉아.”

어머니가 말했다.

세아는 욕실의 바닥에 앉았다. 어머니는 세아의 등과 팔, 목을 자세히 봤다. 마치 의사처럼. 아니, 의사보다 더 정밀하게. 엄마처럼.

“밤새 이걸 다 어떻게 숨겼어?”

어머니가 물었다.

“옷으로.”

세아가 대답했다.

“옷으로? 목은?”

“목도.”

“날씨가 더우데?”

세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어머니는 한숨을 쉬었다. 깊은 한숨. 자신의 딸이 얼마나 아픈 상태인지를 깨닫는 그런 한숨.

어머니는 욕실을 나갔다. 몇 분 후에 돌아왔을 때는 밴드, 연고, 그리고 깨끗한 수건을 들고 있었다. 옛날 것들이었다. 20년 전, 세아가 어렸을 때 어머니가 세아의 상처를 치료하던 그런 물건들.

“이거 써도 돼?”

어머니가 물었다.

세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머니는 천천히 세아의 상처들을 닦기 시작했다. 등부터. 팔. 그리고 목. 손가락이 부드러웠다. 강리우의 손가락과는 완전히 다른 손가락. 해녀의 손. 물속에서 밧줄을 잡고, 해산물을 잡고, 자신의 생명을 건지는 손.

“강리우라고 했지?”

어머니가 물었다. 목에 밴드를 붙이면서.

“응.”

세아가 대답했다.

“그 사람 아버지도 있어?”

“응. 강민준이라고.”

어머니는 계속 밴드를 붙였다. 모든 자국이 사라질 때까지. 그것은 불가능했다. 모든 자국을 밴드로 덮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어머니는 할 수 있는 만큼 했다.

“너 지금 뭐 해야 할지 알아?”

어머니가 물었다.

“모르겠어.”

세아가 대답했다.

“쉬어. 자고, 먹고, 아무 생각 하지 말고.”

어머니가 말했다. “엄마가 있으니까.”

그 말들은 거짓이었다. 어머니도 뭐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강리우는 서울에 있고, 강민준은 더 높은 곳에 있었다. 어머니는 제주의 작은 집에서 해녀로 일하는 사람이었다.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하지만 그 말이 필요했다. 세아에게는. 누군가 자신을 지킬 수 있다는 착각이 필요했다.

어머니는 세아를 자신의 방으로 데려갔다. 작은 방이었다. 창문 하나, 침대 하나, 작은 옷장. 어머니는 침대를 정리하고, 세아를 눕혔다.

“자.”

어머니가 말했다.

“엄마, 미안해.”

세아가 말했다.

“뭐가 미안해. 자.”

어머니가 대답했다.

세아는 눈을 감았다. 하지만 잠은 오지 않았다. 대신 귀에만 민감해졌다. 어머니가 부엌에서 무언가를 하는 소리. 물을 끓이는 소리. 밥을 푸는 소리. 생활의 소리들. 그것들이 세아를 데워주고 있었다.

밤 11시 47분. 어머니는 밥과 국을 들고 다시 방으로 들어왔다.

“먹어.”

어머니가 말했다.

세아는 일어나 앉았다. 밥을 먹기 시작했다. 맛은 없었다. 하지만 그것도 상관없었다. 어머니의 밥이었기 때문이었다. 어머니가 만든 것. 어머니가 손으로 담은 밥.

“도현이는 잘 있어?”

어머니가 물었다.

“응. 학교 다니고 있어.”

세아가 대답했다.

“공부는?”

“잘하는 편이야.”

“그래. 좋아.”

어머니가 말했다. “그 아이는 적어도 너 같은 실수는 안 하겠지.”

세아는 어머니를 봤다. 그 말이 책망인지, 아니면 사실인지 알 수 없었다. 아마 둘 다였을 것이다.

“강리우가… 좋아했어?”

어머니가 물었다.

세아는 숟가락을 놨다.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은 복잡했다. 좋아했나? 아니, 그게 아니었다. 그게 뭐였을까. 필요했나? 의존했나? 구하고 싶었나?

“모르겠어.”

세아가 대답했다.

“모르겠어? 나이 먹어서도 모르는 일이 이렇게 많아. 난 젊었을 때는 다 알 줄 알았는데.”

어머니가 말했다.

“엄마도 그런 사람 있었어?”

세아가 물었다.

어머니는 멈췄다. 오랜 침묵이 있었다. 어머니가 창밖을 봤다. 밤의 제주. 검은 바다. 그 위에 떠 있는 달.

“있었지.”

어머니가 천천히 말했다. “너 아버지 전에.”

세아는 어머니를 봤다. 어머니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을 처음 들었다.

“그 사람은 좋은 사람이 아니었어. 나쁜 사람도 아니었고. 그냥… 틀린 사람이었어. 나한테. 내가 그 사람이 필요했던 것처럼, 그 사람도 뭔가를 내게서 필요로 했어. 하지만 우리가 필요로 한 게 같은 게 아니었어. 그래서… 헤어졌어.”

어머니가 말했다.

“아버지는?”

세아가 물었다.

“너 아버지는… 달랐어. 너 아버지는 자기가 뭘 원하는지 아는 사람이었어. 그리고 그걸 말할 수 있는 사람이었어. 나한테 ‘내가 너를 필요로 해’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었어. ‘내가 너를 원해’가 아니라, ‘내가 너를 필요로 해’라고.”

어머니의 목소리가 잠겨 왔다.

“그 차이가 얼마나 크던지. 세아야, 넌 누군가에게 ‘필요’하면 안 돼. ‘원함’만으로도 충분해. 아니, 그것도 충분하지 않아. 넌 그냥 자신을 위해서만 존재해야 해.”

세아는 어머니의 말을 들었다. 그 말들이 마치 다른 세계에서 온 언어처럼 들렸다. 자신을 위해서만 존재한다? 그게 무슨 의미였을까. 그렇게 산 적이 없었다. 어머니를 위해, 도현이를 위해, 강리우를 위해, 이 세상을 위해. 항상 누군가를 위해 불타고 있었다.

“강리우한테 연락 들어올까?”

세아가 물었다.

어머니는 세아를 봤다. 그 눈은 깊었다. 마치 물속처럼. 깊고, 어둡고, 무거웠다.

“연락 들어올 거야.”

어머니가 말했다. “그 사람은 지금 정신 차렸을 거고, 너를 찾고 있을 거야. 미안하다고 할 거야. 자신을 용서해달라고 할 거야. 그리고 넌 약할 거야. 그 말에 약할 거야. 자신이 그 사람을 구했다는 것 때문에.”

세아는 어머니의 눈을 봤다. 어머니가 자신을 얼마나 잘 알고 있는지에 대해 깨달았다.

“그때 뭐 해야 해?”

세아가 물었다.

“그때는 전화를 끊어.”

어머니가 말했다. “그게 네가 할 수 있는 유일한 힘이야.”

밤 11시 59분. 세아는 어머니의 침대에서 누워 있었다. 어머니는 거실에서 쇼파에 누워 있었다. 벽이 얇아서 어머니의 숨소리가 들렸다. 깊은 숨. 슬픈 숨. 자신의 딸이 이렇게 되었다는 것을 견디는 어머니의 숨.

세아는 자신의 휴대폰을 봤다. 비행기 모드를 풀었을 때 들어온 메시지들. 강민준에게서 다섯 개. 강리우에게서 아무것도. 아마도 강민준이 강리우의 휴대폰을 빼앗았을 것이었다. 아니면 강리우가 자신을 연락할 수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었다.

강민준의 마지막 메시지:

“나세아씨. 계약 위반에 대한 법적 조치를 진행하겠습니다. 위약금 5억 원을 7일 내에 납부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 회사는 모든 법적 수단을 강구할 것입니다. 진심으로, 강민준.”

세아는 그 메시지를 읽고, 지웠다. 그리고 다시 비행기 모드로 돌렸다.

제주의 밤은 깊어가고 있었다. 바다는 여전히 검었고, 달은 여전히 떠 있었다. 그리고 어머니의 숨소리는 여전히 들렸다. 침실의 벽을 통해. 어머니의 슬픔을 통해.

세아는 눈을 감았다. 잠은 여전히 오지 않았지만, 누군가가 자신을 지키고 있다는 감각은 있었다. 어머니의 존재감.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밤 중간쯤, 세아는 깨어났다. 꿈을 꿨기 때문이었다. 강리우가 자신을 찾는 꿈. 그가 제주 바다에 떠 있고, 자신에게 손을 내밀고 있는 꿈. 그리고 세아는 그 손을 잡지 않는 꿈.

세아는 일어나 앉았다. 창밖을 봤다. 여전히 밤이었다. 별들이 떠 있었다. 지구 위에서는 볼 수 없는 별들. 높이 올라가야만 보이는 별들.

그리고 세아는 깨달았다. 자신이 비행기 안에서 본 그 별들이, 지금 자신의 위에 있다는 것을. 자신이 지금 어디에 있든, 그 별들은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밤 3시 15분. 세아는 다시 누웠다. 이번에는 꿈도 없이, 단지 자신의 호흡만 들으면서.

그리고 거실에서는 어머니가 여전히 깨어 있었다. 자신의 딸을 지키는 어머니처럼. 물속에서 산소가 떨어질 때까지 견디는 해녀처럼.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단지 옆에 있으면서.

# 깊은 물

## 제1부: 눈빛

세아가 어머니의 눈을 마주쳤을 때, 그것은 마치 깊은 물속으로 떨어지는 느낌이었다.

그 눈동자는 깊었다. 정말 깊었다. 마치 제주 앞바다의 심연처럼 깊고, 어두웠고, 무언가 무거운 것을 품고 있었다. 세아는 어머니의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봤다. 주름살이 더 깊어진 것 같았다. 아니, 그것은 주름살이 아니라 슬픔의 흔적이었다. 어머니의 이마, 양 눈 사이, 입가에 남겨진 세월의 자국들. 그리고 그 모든 것이 지난 몇 시간 동안 몇 배로 깊어진 것만 같았다.

“연락 들어올 거야.”

어머니의 목소리는 낮고 차분했다. 마치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듯이. 마치 미래를 보는 사람처럼. 어머니는 세아의 손을 잡았다. 손가락과 손가락 사이로 따뜻함이 전해졌다. 그것은 안정감이었고, 동시에 슬픔이었다.

“그 사람은 지금 정신 차렸을 거야. 너를 찾고 있을 거고. 미안하다고 할 거야.”

세아는 어머니의 말을 들으면서 자신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강리우. 그의 이름은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지만, 두 사람 모두 그를 생각하고 있었다. 세아의 눈앞에 떠올랐다. 강리우의 얼굴. 그의 검은 눈. 그의 손.

어머니가 계속했다.

“자신을 용서해달라고 할 거야. 그리고 넌…”

어머니가 잠시 멈췄다. 그 침묵 속에서 세아는 자신의 심장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쿵, 쿵, 쿵. 규칙적이지만 빠르게 뛰는 심장.

“넌 약할 거야. 그 말에 약할 거야. 자신이 그 사람을 구했다는 것 때문에.”

세아는 어머니의 눈을 다시 봤다. 어머니가 자신을 얼마나 잘 알고 있는지에 대해 깨달았다. 그것은 두려웠다. 어떤 비밀도 숨길 수 없다는 것. 어머니 앞에서는 자신이 투명한 유리처럼 보인다는 것.

“엄마, 그때 뭐 해야 해?”

세아의 목소리는 작았다. 거의 속삭이는 수준이었다. 어머니는 세아의 얼굴을 쓸어내렸다. 손가락이 세아의 볼을 지나갔고, 그 터치는 마치 축복 같았다. 아니, 그것은 작별의 인사 같았다.

“그때는 전화를 끊어.”

어머니가 말했다. 목소리에는 철저함이 담겨 있었다. 엄한 어머니의 목소리. 하지만 그 아래에는 진심이 있었다.

“그게 네가 할 수 있는 유일한 힘이야. 너 자신을 구하는 유일한 방법이야.”

세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녀의 마음은 끄덕이지 않았다. 마음은 흔들렸다. 마음은 이미 강리우에게 가 있었다.

## 제2부: 밤 11시 59분

제주도 구도심의 조용한 주택가. 어머니의 집. 세아는 어머니의 침대에 누워 있었다. 천장을 바라봤다. 천장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오직 희미한 어둠만 있었다.

거실에서 어머니의 숨소리가 들렸다. 벽이 얇아서 모든 소리가 전해졌다. 깊은 숨. 그리고 그 숨 속에는 슬픔이 있었다. 어머니의 슬픔. 자신의 딸이 이렇게 되었다는 것을 견디는 어머니의 슬픔.

세아는 자신도 모르게 울음을 참고 있었다. 입술을 깨물었다. 피의 맛이 났다. 철의 맛.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비행기 모드를 풀었을 때 알림이 쏟아졌다. 화면이 번쩍거렸다. 메시지들. 이메일들. 놓친 전화들.

강민준에게서 다섯 개의 메시지.

첫 번째: “나세아씨. 연락 주시기 바랍니다.”

두 번째: “미스 나. 상황이 심각합니다. 즉시 연락 주세요.”

세 번째: “당신이 어디에 있든, 우리는 당신을 찾을 것입니다.”

네 번째: 사진. 계약서. 위약금 조항. 5억 원이라는 숫자가 빨간색으로 강조되어 있었다.

다섯 번째: “나세아씨. 계약 위반에 대한 법적 조치를 진행하겠습니다. 위약금 5억 원을 7일 내에 납부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 회사는 모든 법적 수단을 강구할 것입니다. 진심으로, 강민준.”

강리우에게서는 아무것도 없었다.

세아는 이 현실을 몇 번을 확인했다. 강리우의 메시지를 찾아 위로 스크롤했다. 아래로 스크롤했다. 검색창에 그의 이름을 입력했다.

아무것도 없었다.

아마도 강민준이 강리우의 휴대폰을 빼앗았을 것이다. 혹은 강리우가 자신에게 연락할 수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혹은 더 나쁜 가능성—강리우가 자신을 잊고 있을 것이다.

세아는 강민준의 마지막 메시지를 읽고, 다시 읽고, 또 다시 읽었다. 마치 그 메시지 속에 숨겨진 다른 의미가 있을 것이라 믿으면서. 하지만 그것은 단지 위협이었다. 명백한, 합법적인 위협이었다.

세아는 메시지를 지웠다.

휴지통도 비웠다.

그리고 다시 비행기 모드로 돌렸다.

## 제3부: 바다의 밤

제주의 밤은 깊어가고 있었다.

세아는 어머니의 침대에서 창밖을 바라봤다. 창밖에는 바다가 있었다. 검은 바다. 밤의 바다는 마치 거대한 검은 짐승처럼 보였다. 그것은 숨을 쉬고 있었다. 파도가 밀려왔다가 빠져나갔다. 밀려왔다가 빠져나갔다. 마치 심장 박동처럼.

달이 떠 있었다. 보름달에 가까운 달. 그 달빛이 검은 바다 위에 길을 만들고 있었다. 은빛의 길. 누군가는 그 길을 따라 돌아올 것인가? 누군가는 그 길을 따라 떠날 것인가?

거실에서 어머니의 숨소리가 여전히 들렸다. 침실의 벽을 통해서. 어머니의 슬픔을 통해서. 세아는 그 숨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마치 그것이 자신을 지켜주는 주문이라고 믿으면서.

세아는 눈을 감았다.

잠은 여전히 오지 않았다. 하지만 누군가가 자신을 지키고 있다는 감각은 있었다. 어머니의 존재감. 거실의 소파에 누워 있으면서 자신의 딸을 지키고 있는 어머니.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그것만으로도 견딜 수 있었다.

## 제4부: 꿈

밤 2시 33분쯤, 세아는 꿈을 꾸었다.

그 꿈은 선명했다. 마치 현실보다 더 생생했다.

강리우가 바다에 있었다. 제주 바다의 가운데에. 깊고 검은 물 속에서. 그는 손을 들고 있었다. 세아에게 손을 내밀고 있었다. 그의 입이 움직였다. 뭔가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물이 그의 말을 삼키고 있었다.

세아는 물가에 서 있었다. 수심 모를 정도로 검은 물이 자신의 발을 잠그고 있었다. 차가웠다. 얼음처럼 차가웠다. 강리우가 자신을 불렀다. 여전히 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그의 눈으로 읽을 수 있었다.

‘세아. 도와줘.’

그리고 세아는 손을 내밀었다. 하지만 그 손은 강리우의 손에 닿지 않았다. 계속 닿지 않았다. 마치 사이에 보이지 않는 벽이 있는 것처럼. 그리고 그 벽이 점점 더 높아지고 있었다.

강리우의 얼굴이 물 속으로 사라지기 시작했다. 먼저 입이 물에 잠겼다. 그 다음 코. 그 다음 눈. 마지막으로 머리카락.

그리고 세아는 그것을 보고만 있었다. 손을 내민 채로.

## 제5부: 각성

밤 3시 15분, 세아는 깨어났다.

가슴이 철렁철렁했다. 손에는 땀이 맺혀 있었다. 몸은 경직되어 있었다. 마치 자신이 정말로 물에 빠져 있었던 것처럼.

일어나 앉았다. 창밖을 봤다. 여전히 밤이었다. 하지만 달의 위치가 이동했다. 밤이 계속 흘러가고 있었다. 시간은 멈추지 않는다. 세아도 멈출 수 없다.

별들을 봤다. 지구 위에서는 볼 수 없는 별들. 고도가 높을수록 더 많은 별이 보인다. 비행기 안에서 본 그 별들.

그리고 세아는 깨달았다.

자신이 지금 어디에 있든, 그 별들은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자신이 얼마나 멀리 도망쳤든, 그 별들은 여전히 위에 있다는 것을. 별들은 심판하지 않는다. 별들은 단지 빛을 낸다.

다시 누웠다. 이번에는 창밖을 바라본 채로. 별들을 바라본 채로.

거실에서 어머니의 숨소리가 여전히 들렸다.

## 제6부: 어머니의 밤

거실의 어둠 속에서, 어머니는 깨어 있었다.

소파에 누워 있었지만, 잠을 자지 않았다. 눈을 감았지만, 자지 않았다. 마치 어떤 비상 상황에 대비하고 있는 듯이.

어머니는 한 명의 해녀였다. 예전에. 지금은 나이가 들어 더 이상 바다에 나가지 않지만, 그 시절의 습관은 남아 있었다. 깊게 숨을 참는 습관. 오래 견디는 습관. 산소가 떨어질 때까지 견디는 습관.

지금도 그렇게 하고 있었다. 자신의 호흡을 조절하고 있었다. 깊게 들이마시고, 천천히 내쉬고. 마치 물 속에서처럼.

침실에서 세아의 움직임이 들렸다. 뒹굴었다. 신음했다. 꿈을 꾸고 있었다. 어머니는 그 소리를 들으면서 자신의 가슴이 철렁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제발. 제발 깨어나. 제발 살아나.’

어머니는 속으로 기도했다. 종교가 있거나 없거나, 어머니는 기도했다. 자신의 딸을 위해.

벽시계가 울렸다. 밤 3시 30분. 어머니는 여전히 깨어 있었다. 자신의 딸을 지키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단지 옆에 있으면서.

그것이 어머니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다. 그것이 어머니의 힘이었다.

## 제7부: 새벽

새벽 5시 45분, 하늘이 밝아지기 시작했다.

검은 바다가 점점 더 진한 파란색으로 변했다. 별들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하나, 둘, 셋. 마치 누군가 불을 끄는 것처럼. 아니면 누군가 그들을 데려가는 것처럼.

새들이 울기 시작했다. 제주의 새들. 그들은 새로운 날을 맞이하고 있었다. 무심하게. 판단 없이. 단지 새로운 날이 왔기 때문에.

침실에서 세아는 여전히 자고 있었다. 이번에는 꿈 없이. 거실에서 어머니도 마침내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밤이 끝났다.

새로운 날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세아의 휴대폰은 여전히 비행기 모드였다. 알림음이 울릴 일은 없었다. 강리우의 목소리가 들릴 일은 없었다. 강민준의 위협도 들리지 않았다.

단지 새벽의 고요함만 있었다.

단지 어머니와 딸의 숨소리만 있었다.

단지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에필로그**

며칠 후, 어머니는 세아에게 물었다.

“전화 왔어?”

세아는 고개를 저었다.

“안 와.”

“그래. 그게 좋아.”

어머니는 말했다. 그리고 그것이 거짓말이 아니라는 것을 두 사람 모두 알고 있었다. 안 오는 것이 좋은 일이다. 연락이 없는 것이 구원이다.

세아는 창밖의 바다를 봤다. 낮의 바다였다. 검지 않았다. 파란색이었다. 밝았다.

그리고 그 바다를 건너서, 누군가가 있을 것이다. 강리우가. 자신을 찾고 있을 것이다. 미안하다고 할 것이다. 자신을 용서해달라고 할 것이다.

하지만 그때가 오면, 세아는 전화를 끊을 것이다.

그것이 자신을 구하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에.

그것이 어머니가 가르쳐준 힘이기 때문에.

바다는 여전히 파도치고 있었다. 달과 별들도 여전히 그곳에 있을 것이다.

변하지 않는 것들이 있다.

그리고 그것으로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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