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아닌 것을 위해 불탄 소녀 – 제76화: 돌아온 것들의 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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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76화: 돌아온 것들의 무게

제주 공항의 밤공기는 서울과 달랐다. 소금기와 식물의 냄새가 섞여 있었고, 하늘이 더 낮아 보였다. 세아는 공항 로비를 빠져나와 택시 대기소로 향했다. 손에 든 가방은 가벼웠지만, 그 가벼움이 오히려 무거웠다. 아무것도 없다는 것의 무게. 아무도 붙잡을 것이 없다는 것의 무게.

“어디로 가세요?”

택시 기사가 물었다. 중년 남자였고, 제주 사투리가 짙었다.

세아는 잠깐 멈췄다. 어디로 가야 했을까. 어머니는 여전히 해녀로 일하고 있을까. 아니면 이미 일을 그만뒀을까. 세아는 어머니에게 전화한 지 얼마나 되었는지 생각해봤다. 한 달? 두 달? 더 오래됐을 수도 있었다. 어머니의 목소리를 기억할 수 없을 정도로.

“해녀의 집. 구좌읍.”

세아가 말했다. 정확한 주소는 기억나지 않았지만, 구좌읍이면 충분했을 것이다. 이곳은 작은 섬이었고, 모두가 모두를 알았다. 특히 해녀들은. 그들은 물속에서 숨을 참는 것만큼 비밀도 참는 사람들이었다.

택시는 밤의 제주를 달렸다. 가로등이 드물었고, 바다 냄새는 점점 진해졌다. 창밖으로 보이는 것은 검은 물과 그 물을 비추는 달뿐이었다. 세아는 자신의 반사상을 유리에서 봤다. 목의 자국들은 여전히 보라색이었다. 어머니는 그것을 보고 뭐라고 할까.

택시가 한적한 도로로 들어섰다. 해안가 쪽이었다. 구좌읍의 작은 포구였다. 이곳에 세아의 어머니는 해녀 막사 근처의 작은 집에 살고 있었다. 아버지가 죽은 후, 돈을 벌기 위해 이곳으로 왔었다. 아니, 원래부터 이곳에서 살았던 것이다. 서울로 나간 것이 잠깐의 일탈이었고, 이곳이 자신의 뿌리였다.

밤 10시 13분. 택시가 멈췄다.

“여긴데요. 이 근처에 해녀들이 사는 집들이 많아요. 어느 집인지 알아?”

기사가 물었다.

“모르겠어요. 전화할 수 있을까요?”

세아가 물었다.

기사는 자신의 휴대폰을 건넸다. 세아는 어머니의 번호를 눌렀다. 손가락이 떨렸다. 강리우처럼. 아니, 자신 때문이었다.

신호음이 세 번 울렸다. 그리고 누군가가 받았다.

“누구세요?”

어머니의 목소리였다. 더 늙었다. 세아는 그것을 즉시 알았다. 목소리에 모래주머니 같은 것이 있었다. 물속에서 오래 있었던 사람의 목소리. 숨을 참는 사람의 목소리.

“엄마.”

세아가 말했다.

침묵이 있었다. 긴 침묵. 어머니는 누구인지 깨닫기까지 그 정도의 시간이 필요했다는 것이었다.

“세아?”

어머니가 말했다.

“응.”

“지금 어디야?”

“구좌읍. 해변 근처.”

다시 침묵이 있었다. 이번에는 다른 종류의 침묵이었다. 분노의 침묵. 걱정의 침묵. 아니, 둘 다였을 수도 있었다.

“지금 가. 포구 옆에 편의점이 있어. 거기서 기다려.”

어머니가 말했다.

통화가 끝났다.

세아는 기사에게 휴대폰을 돌려주고, 요금을 냈다. 지갑에는 거의 돈이 없었다. 비행기표와 택시비로 거의 다 썼다. 서울의 계약금 250만 원은 어디에 있을까. 도현의 학비를 내고, 고시원 월세를 내고, 밥을 먹고, 강리우를 만났고, 그리고 이 모든 것이 남았다. 아무것도 남은 것이 없었다.

편의점은 포구 옆에 있었다. 작은 GS25였다. 서울의 GS25와는 다르게 더 낡았고, 더 외로워 보였다. 세아는 그곳으로 들어갔다. 편의점의 불빛은 밤을 더욱 검게 만들었다. 세아는 자신을 봤다. 거울처럼 기능하는 냉동실의 유리에서.

목의 자국들이 선명했다. 누군가 자신을 물었던 것처럼. 아니, 자신을 죽이려고 했던 것처럼.

“세아야?”

누군가가 뒤에서 말했다.

세아는 돌아섰다. 어머니였다. 하지만 세아가 기억하던 어머니가 아니었다. 더 작았고, 더 마르고, 더 구부러져 있었다. 해녀의 일은 몸을 한 조각 한 조각 떼어간다고 누군가 말했었다. 세아는 지금 그것을 이해했다.

어머니는 세아를 봤다. 그리고 세아의 목을 봤다.

입이 열렸다. 말이 나오지 않는 입. 어머니의 손이 올라왔다. 천천히. 마치 물속에서 올라오는 것처럼. 그리고 세아의 목에 닿았다.

“뭐가 일어났어?”

어머니가 물었다.

세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어머니를 안았다. 오랜만에. 아버지가 죽은 후 처음으로. 어머니의 몸은 작았고, 차가웠다. 해의 냄새가 났다. 짠 냄새. 물의 냄새.

“괜찮아.”

세아가 말했다. 거짓이었지만, 그것은 필요한 거짓이었다.

어머니는 세아를 놓지 않았다. 잠깐 후, 그녀가 먼저 안는 것을 멈췄다.

“우리 집 가자.”

어머니가 말했다.

집은 포구에서 걸어서 5분 거리에 있었다. 좁은 골목을 지나, 낡은 건물들 사이로. 합정동의 고시원들처럼 낡은 건물들이었다. 그래도 이곳은 바다가 있었다. 바다와 하늘과 별들이 있었다.

어머니의 집은 두 평 정도였다. 침대가 하나, 작은 책상이 하나. 그리고 창밖에는 바다가 보였다. 밤의 바다였지만, 여전히 아름다웠다.

“밥 먹었어?”

어머니가 물었다.

“응.”

세아가 거짓말했다.

어머니는 그것을 알았지만, 물어보지 않았다. 대신 침대에 앉으라고 손짓했다. 세아는 침대에 앉았다. 어머니는 작은 욕실로 들어가더니, 밴드와 약을 들고 나왔다.

“봐.”

어머니가 말했다.

세아는 목을 노출했다. 어머니가 그곳을 닦기 시작했다. 천천히. 마치 물속에서 무언가를 건져 올리듯이. 그것은 치료라기보다는 의식에 가까웠다. 엄마가 자기를 만지는 것. 자기가 살아있다는 것을 확인하는 의식.

“누가 이랬어?”

어머니가 물었다.

“…누군가.”

세아가 대답했다.

“누군가는 이름이 있지 않아?”

어머니가 말했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분노가 있었다. 세아는 한 번도 어머니를 이렇게 화내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강리우.”

세아가 말했다.

“그놈이 뭐 하는 놈이야?”

“…모르겠어요.”

“모르겠다니? 목을 졸라놓은 놈을 모른다고?”

어머니가 손을 멈췄다. 밴드를 붙이는 손이 떨렸다.

“엄마. 이제 괜찮아. 그놈은 떠났어.”

세아가 말했다.

“떠났다고? 어디로?”

“모르겠어요.”

세아가 대답했다. 그것은 거짓이 아니었다. 정말로 몰랐다. 강리우가 어디로 갔는지. 살아있는지, 죽었는지, 어디서 누구와 있는지. 그것은 더 이상 자신의 책임이 아니었다.

어머니는 밴드를 붙였다. 세아의 목에 밴드가 붙었다. 하얀 밴드가 보라색 자국을 덮었다. 하지만 그것은 여전히 보였다. 밴드 아래에.

“자.”

어머니가 말했다.

세아는 침대에 누웠다. 어머니는 그녀 옆에 누웠다. 침대는 작았다. 두 사람이 누우면 몸이 닿았다. 어머니의 몸은 따뜻했다. 세아는 처음 깨달았다. 강리우의 따뜻한 손과는 다른 따뜻함이 있다는 것을. 그것은 생명의 따뜻함이었다. 자신과 같은 몸의 따뜻함.

“도현이는?”

어머니가 물었다.

세아는 침묵했다.

“학교 다니고 있겠지?”

어머니가 계속 물었다.

“응.”

세아가 대답했다.

“밥은?”

“잘 챙겨먹어.”

거짓이었지만, 필요한 거짓이었다.

어머니는 더 이상 물어보지 않았다. 대신 세아의 머리를 쓸어올렸다. 어린아이를 진정시키듯이. 세아는 이 감각을 기억했다. 어릴 때, 아버지가 죽기 전, 어머니가 자신의 머리를 이렇게 쓸어올렸었다. 그것은 언어보다 더 깊은 소통이었다. 손의 언어. 접촉의 언어.

“내일 하늘이한테 전화하자.”

세아가 말했다.

“하늘이? 누가?”

“친구야. 서울에 있는 친구. 강리우의 차를 처리해달라고 부탁했거든.”

세아가 말했다.

“그 강리우라는 놈의 차?”

어머니가 물었다.

“응.”

“왜 그놈한테 차가 있어? 그리고 왜 그 친구가 차를 처리해?”

어머니의 질문들은 자연스러웠다. 하지만 세아는 그것에 대답할 수 없었다. 아직은. 그것은 너무 복잡했고, 너무 어두웠고, 너무 깊었다.

“내일 얘기할게.”

세아가 말했다.

어머니는 다시 세아의 머리를 쓸어올렸다.

“알았어. 내일 하자.”

밤 11시 47분. 제주의 어두운 집에서 세아는 엄마의 팔 안에서 처음으로 깊게 숨을 쉬었다. 폐에 가득 찬 공기가 빠져나갔다. 그리고 새로운 공기가 들어왔다. 제주의 공기. 소금기와 식물의 냄새가 섞인 공기.

서울은 이미 멀었다. 강리우도, 강민준도, JYA도 멀었다. 여기는 다른 세상이었다. 여기는 어머니의 세상이었다. 여기는 세아가 태어난 세상이었다.

그리고 제주에서 멀지 않은 곳에, 강리우는 어떤 모텔의 방에 앉아 있었다. 낡은 방. 창밖에는 산이 보였다. 서울이 아닌 어딘가. 어머니가 찾을 수 없는 곳. 어머니가 말했던 그곳.

그의 휴대폰에는 메시지들이 가득했다. 아버지에게서. 회사에서. 그리고 세아가 받지 않은 전화들. 열 번의 전화. 스무 번의 메시지. 그러나 세아는 응답하지 않았다.

강리우는 그것을 이해했다. 그는 자신이 가야 할 곳에 가 있었다. 세아는 자신이 가야 할 곳에 가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다시는 같은 곳에 가지 않을 것이었다.

아니면 다시 만날 것이었다. 그것은 불확실했다. 모든 것이 불확실했다.

강리우는 휴대폰을 끼고 창밖을 봤다. 밤의 산. 불이 거의 없는 곳. 도시가 아닌 곳. 사람이 적은 곳.

그리고 그곳에서 그는 처음으로 자신이 누구인지 궁금해했다. 아버지의 아들이 아니라, 강리우로서. 피아노를 칠 수 없는 손으로 무엇을 할 수 있는지 궁금해했다.

그것은 매우 어려운 질문이었다. 하지만 질문을 하는 것 자체가 무언가를 시작하는 것이었다.

오전 8시 22분. 서울에서는 아침이 밝아 오고 있었다. 하늘이는 여전히 강리우의 차를 강남 어딘가에 버렸다. 차키도 버렸다. 누군가는 그것을 찾을 것이고, 누군가는 그것을 가져갈 것이었다. 그것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도현은 학교에 가고 있었다. 어머니에게 아무도 전화하지 않았다. 세아는 나타나지 않았고, 어머니는 질문하지 않았다. 대신 그녀는 밥을 차렸고, 도현은 그것을 먹었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그리고 JYA에서는 강민준이 자신의 아들을 찾기 위해 움직이고 있었다. 경찰에 신고했고, 수색을 시작했다. 하지만 강리우는 이미 찾을 수 없는 곳에 있었다. 아버지의 네트워크가 닿지 않는 곳에.

제주에서 세아는 깨어났다. 어머니는 이미 나갔다. 해녀로 일하러. 새벽 5시에. 여전히. 아직도. 항상. 그것이 어머니의 삶이었다.

세아는 침대에서 일어났다. 목은 아팠다. 몸 전체가 아팠다. 하지만 다르게 느껴졌다. 서울에서의 통증과는 다르게. 서울에서의 통증은 영혼의 통증이었고, 이곳의 통증은 몸의 통증이었다. 몸의 통증은 회복될 수 있었다.

세아는 화장실로 갔다. 거울을 봤다. 목의 밴드가 여전히 붙어 있었다. 그리고 그 아래로 보라색이 노란색으로 변하고 있었다. 치유의 색깔. 시간이 지나면 그것도 사라질 것이었다.

하지만 기억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었다. 강리우의 손. 그의 목소리. 그의 절망. 그것은 세아와 함께 남아 있을 것이었다. 그것이 세아를 만들 것이었다.

세아는 거울에서 돌아섰다. 어머니가 남겨둔 밥이 식탁에 있었다. 국도 있었고, 반찬도 있었다. 세아는 밥을 먹었다. 천천히. 감사하는 마음으로.

그리고 오후가 되자, 세아는 편의점으로 갔다. 휴대폰 충전기를 샀다. 그리고 전화기를 켰다.

메시지들이 폭주했다. 강민준에게서, JYA에서, 그리고 강리우에게서. 수십 개의 메시지. 수십 개의 전화.

하지만 하늘이의 메시지는 없었다. 대신 놓친 전화가 하나 있었다. 하늘이에게서. 오후 12시 47분.

세아는 하늘이에게 전화했다.

“야! 세아야!”

하늘이의 목소리가 비명에 가까웠다.

“응. 괜찮아?”

“너는 괜찮아? 죽지 않았어? 죽었어? 유령으로 전화하는 거야?”

“아니.”

세아가 말했다.

“너 지금 어디야?”

“제주.”

“제주? 진짜로?”

“응. 엄마 있는 곳.”

침묵이 있었다.

“…좋아. 다 처리했어. 강리우 차도 버렸고, 강남 어딘가에 두고 왔어. 누가 찾을 거야. 상관 없고.”

하늘이가 말했다.

“감사해.”

세아가 말했다.

“그놈이 뭐 했어?”

하늘이가 물었다.

세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침묵으로 답했다.

“…아. 알았어. 나중에 얘기해.”

하늘이가 말했다.

“응.”

세아가 대답했다.

“너 잘 지내야 해. 알지? 내가 지켜볼 거야.”

하늘이가 말했다.

“알았어.”

세아가 말했다.

통화가 끝났다.

세아는 편의점 밖으로 나왔다. 제주의 오후 햇빛이 따뜻했다. 여름 햇빛. 강렬하고 명확한 햇빛. 그것은 모든 그림자를 밝혀냈다.

세아는 바다 방향으로 걸었다. 포구까지. 어머니가 일하고 있을 그곳까지.

해녀들은 물속에 있었다. 검은 잠수복을 입은 여자들. 그들은 물 위로 올라왔다 내려갔다. 올라왔다 내려갔다. 그것이 삶이었다. 숨을 참고 올라오고, 숨을 쉬고, 다시 내려가고. 반복. 리듬. 생명의 박자.

세아의 어머니도 그곳에 있었다. 다른 해녀들과 함께. 물에서 나온 그녀는 물을 흔들었다. 그리고 비명 같은 숨소리를 냈다. 숨비소리. 살아있다는 소리.

세아는 그것을 들었다. 어머니의 숨소리. 그리고 깨달았다. 그것이 음악이라는 것을. 가장 원초적인 음악. 생명의 음악.

그것은 강리우의 피아노가 아니었다. 그것은 자신이 쓴 노래도 아니었다. 그것은 더 이상하고, 더 깊고, 더 진실된 것이었다.

세아는 그 소리를 들으면서 처음으로 웃음이 나왔다. 작은 웃음. 슬픈 웃음. 그러나 웃음이었다.

불이 꺼지는 것도 아니고, 불이 남은 것도 아니고, 불의 언어를 배우는 것도 아니었다. 그것은 그보다 더 단순했다. 살아있다는 것. 숨을 쉬고 있다는 것. 그것이 전부였다.

제주 포구에서 세아는 처음으로 자신의 숨이 들렸다. 어머니의 숨과 함께. 해녀들의 숨과 함께. 그것은 합창이었다. 누가 지휘하지 않는 합창. 누가 쓰지 않은 음악.

그리고 세아는 깨달았다. 자신이 찾고 있던 것이 무엇인지. 그것은 타인의 입으로 자신의 노래를 부르게 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자신의 목소리로 자신의 삶을 부르는 것이었다.

그것은 아직 시작이었다. 그것은 아직 매우 멀었다. 하지만 이제 세아는 그 거리가 보였다. 그리고 그 거리를 걸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천천히. 한 발씩. 숨을 쉬면서.

# 제주, 그리고 숨

## 첫 번째 통화

휴대폰의 화면이 떨렸다. 세아는 편의점의 형광등 아래서 그것을 들었다. 콜센터의 기계음이 아니라, 진짜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올 때까지 기다렸다. 하늘이의 호흡음이 전달되어 올 때까지.

“제주? 진짜로?”

하늘이의 목소리는 놀라움으로 가득 차 있었다. 세아는 휴대폰을 귀에 바짝 붙였다. 자신의 심장음이 들리지 않을까 봐서였다. 자신의 불안이 전자파를 타고 전달될까 봐서였다.

“응. 엄마 있는 곳.”

그 말을 꺼내는 데 세아는 얼마나 오랜 시간이 필요했던가. 아니, 그건 시간의 문제가 아니었다. 용기의 문제였다. 강리우와의 모든 것이 무너진 후, 자신을 집어삼킬 수 있는 어둠으로부터 벗어나 어딘가로 향할 수 있다는 생각 자체가, 세아에게는 거의 배신 같은 것이었다.

하지만 제주라는 단어가 입 밖으로 나온 순간, 뭔가가 바뀌었다. 마치 마법 같은 것이었다. 어쩌면 그것은 마법이 아니라 단순한 도망일 수도 있었지만, 이 순간만큼은 그 차이를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침묵이 흘렀다.

세아는 그 침묵 속에서 하늘이의 생각을 들을 수 있을 것 같은 착각에 빠졌다. 하늘이가 자신을 버릴까 봐? 아니면 자신의 도망을 도와줄까 봐? 둘 다였다. 사실은 둘 다였다.

“…좋아. 다 처리했어. 강리우 차도 버렸고, 강남 어딘가에 두고 왔어. 누가 찾을 거야. 상관 없고.”

하늘이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마치 누군가의 범죄를 덮는 것이 일상적인 일인 사람처럼. 아니, 사실 하늘이에게는 그런 일들이 일상이었다. 그것이 하늘이라는 사람의 정체였다. 누군가를 지키는 방식이, 세상의 규칙을 깨뜨리는 것인 사람.

“감사해.”

세아의 목소리는 작았다. 거의 속삭임에 가까웠다. 감사라는 단어가 얼마나 부족한지, 얼마나 무거운지를 알면서도 그것 말고는 할 말이 없었다.

“그놈이 뭐 했어?”

하늘이가 물었다. 그것은 단순한 질문이 아니었다. 확인이었다. 강리우가 정말로 그럴 만한 자격이 있는 놈인지 확인하는 것이었다. 하늘이의 도움이 정의였는지 복수였는지를 판단하기 위한, 자신에게 필요한 확인이었다.

세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 침묵은 모든 것을 말하고 있었다. 침묵의 무게가, 그 무게 자체가 증거였다. 어떤 말도 그 침묵을 채울 수 없었다. 세아가 해야 할 일들, 해야 했을 일들, 할 수 없었던 일들—모든 것이 그 침묵에 담겨 있었다.

“…아. 알았어. 나중에 얘기해.”

하늘이가 부드럽게 말했다. 강압하지 않았다. 강요하지 않았다. 그것이 하늘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친절이었다. 어떤 말도 필요 없다는 것을 아는 사람의 친절.

“응.”

세아가 대답했다.

다시 침묵이 흘렀다. 이번에는 불편하지 않은 침묵이었다. 두 사람의 호흡음이 스피커를 통해 전달되는 침묵. 함께 있다는 것을 확인하는 침묵.

“너 잘 지내야 해. 알지? 내가 지켜볼 거야.”

하늘이의 목소리에는 약속이 담겨 있었다. 그것은 경고처럼 들릴 수도 있었지만, 사실은 맹세였다. 누군가를 지킨다는 맹세.

“알았어.”

세아가 말했다.

그리고 통화가 끝났다.

## 포구로 가는 길

세아는 편의점의 자동문을 밀고 나갔다. 제주의 오후 햇빛이 한 줄기가 되어 그녀를 때렸다.

따뜻했다. 너무나 따뜻했다.

서울의 햇빛과는 달랐다. 서울의 햇빛은 항상 뭔가를 비추려고 애쓰는 것 같았다. 사람들의 얼굴을 비추고, 건물들을 비추고, 그림자마저도 비추려고 하는 그런 햇빛. 하지만 제주의 햇빛은 달랐다. 그것은 비추기보다는 감싸는 것 같았다. 마치 누군가의 손이 뜨거운 물에 담긴 것처럼.

—여름 햇빛이다.

세아는 내심으로 생각했다.

—강렬하고 명확한 햇빛. 그것은 모든 그림자를 밝혀낸다.

자신의 그림자도. 자신이 숨겨온 모든 것들도. 그 햇빛 아래에서는 아무것도 감출 수 없었다. 그리고 그것이, 이상하게도, 편했다.

세아는 바다 방향으로 걸었다. 왜 그 방향인지, 자신도 정확히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발은 이미 그쪽으로 가고 있었다. 마치 무언가가 자신을 끌어당기는 것처럼. 아니, 그것은 무언가가 아니라 누군가였다.

어머니.

세아는 어머니를 얼마나 오랫동안 피해왔던가. 자신의 재능을 보여주지 않기 위해, 자신의 야망을 숨기기 위해, 자신의 삶을 어머니에게 보여주지 않기 위해. 마치 어머니의 눈을 피하는 것이 어머니를 보호하는 방법이라고 생각하면서.

하지만 지금, 이 햇빛 아래에서, 세아는 생각했다.

—어쩌면 그것은 어머니를 피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피하는 것이었을 수도 있다.

자신의 나약함을 마주하지 않으려고, 자신의 실패를 인정하지 않으려고, 자신의 상처를 들킬까 봐 두려워하면서.

포구는 생각보다 가깝지 않았다. 하지만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거리였다. 마치 운명의 거리처럼. 도달할 수 있지만, 도달하기 위해서는 걸어야 하는 그런 거리.

## 해녀들

해녀들은 물속에 있었다.

세아가 포구에 도착했을 때, 태양은 이미 서쪽으로 기울어가고 있었다. 오후의 끝자락. 일어났던 일들이 모두 정리되는 시간. 해녀들도 그 정리의 일부였다.

그들은 검은 잠수복을 입고 있었다. 한때는 그것이 고급 장비였지만, 이제는 누구나 입는 것이 되어 있었다. 나이 많은 여자들도, 젊은 여자들도, 모두 같은 검은색 잠수복 속에서는 구분이 되지 않았다.

그들은 물 위로 올라왔다.

그리고 내려갔다.

올라왔다.

다시 내려갔다.

그것이 리듬이었다. 그것이 생명의 박자였다.

세아는 그 리듬을 바라봤다. 쉬지 않는 리듬. 완벽한 리듬. 누군가가 지휘하지 않아도 저절로 맞춰지는 리듬. 아니, 사실은 누군가가 지휘하고 있었다. 바다가. 파도가. 하늘이. 제주 자체가.

그리고 그 리듬 속에는 숨이 있었다.

올라올 때의 숨. 물을 흔들면서 나오는 숨. 깊고, 크고, 절박한 숨.

세아의 어머니도 그곳에 있었다.

세아는 그녀를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다른 해녀들과 똑같은 모습이었지만, 어머니였다. 그것은 마법이 아니었다. 혈육이었다. DNA였다. 아니, 그것보다는 더 깊은 무언가였다. 오래전부터 자신의 몸에 새겨진, 어머니의 형태.

어머니가 물에서 나왔다.

그리고 물을 흔들었다.

그리고 비명 같은 숨소리를 냈다.

“히이이이익—”

그것이 숨비소리라는 것을 세아는 알았다. 해녀들이 물에서 나올 때, 깊은 물 속에서 참아온 숨을 한꺼번에 내보낼 때 나오는 소리. 살아있다는 소리. 죽음과 삶의 경계에서 돌아온 사람의 소리.

세아는 그것을 들었다.

그리고 깨달았다.

그것이 음악이라는 것을.

## 음악의 재정의

가장 원초적인 음악.

가장 깊은 음악.

가장 진실된 음악.

세아는 지금까지 음악이 무엇인지 잘못 이해하고 있었다. 음악은 피아노의 건반이 아니었다. 음악은 오선지에 쓰인 음표가 아니었다. 음악은 강리우가 만들어낸 것도 아니었고, 자신이 쓴 노래도 아니었다.

음악은 더 이상했다.

더 깊었다.

더 진실했다.

음악은 숨이었다. 살아있는 것의 숨이었다. 죽음과 싸우면서 돌아오는 것의 숨이었다.

세아는 이제 깨달았다. 강리우의 피아노 음악이 왜 그렇게 아름다웠는지. 그것은 피아노가 좋아서가 아니었다. 그 음악 속에 누군가의 숨이 담겨 있었기 때문이었다. 누군가의 죽음을 향한 숨이, 누군가의 집착을 향한 숨이, 누군가의 광기를 향한 숨이 담겨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거짓이었다.

그것은 거짓의 숨이었다. 죽은 음악이었다. 자신을 죽음으로 이끌어가는 음악이었다.

반면 해녀들의 숨비소리는?

그것은 거짓이 아니었다. 그것은 매 순간, 매 호흡, 진실이었다. 살아있으려는 의지. 죽음을 거부하는 몸. 바다에서 돌아오려는 필사의 노력.

그것이 진짜 음악이었다.

그것이 자신이 찾고 있던 음악이었다.

“엄마.”

세아가 입을 벗었다. 목소리는 작았다. 거의 바람 같았다. 하지만 어머니는 들었을 것이다. 해녀들은 깊은 물 속에서도 자신의 아이의 목소리를 듣는다. 그것도 일종의 본능이었다.

어머니가 돌아봤다.

세아와 어머니의 눈이 만났다.

그 순간, 모든 것이 멈췄다. 파도도, 해바람도, 다른 해녀들도. 오직 두 사람의 눈빛만 움직였다.

그리고 어머니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세아?”

어머니의 목소리는 의외로 부드러웠다. 그 목소리에는 놀라움도 없었고, 질책도 없었다. 오직 확인이 있을 뿐이었다. 자신의 딸이 정말로 여기 있는지를 확인하는, 어머니의 목소리.

세아는 대답할 수 없었다.

대신 걸어갔다.

포구의 계단을 내려가면서, 신발을 벗으면서, 엄마 쪽으로 걸어가면서.

물은 차가웠다.

예상보다 훨씬 차가웠다. 하지만 그 차가움이, 이상하게도, 따뜻했다. 마치 깨어나는 느낌이었다. 오랜 악몽에서 깨어나는 느낌이었다.

어머니가 세아를 안았다.

이미 물에 젖은 어머니의 옷이 세아를 더 적셨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이제 세아도 이 물의 일부였다.

“내 딸. 내 딸이 왔다.”

어머니가 속삭였다.

그리고 세아는 처음으로 웃음이 나왔다.

## 웃음의 의미

작은 웃음이었다.

슬픈 웃음이었다.

하지만 웃음이었다.

그것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세아는 이제야 알았다. 자신이 얼마나 오랫동안 웃지 못했는지를 깨닫는 순간, 그 웃음이 얼마나 무거운지도 함께 깨달았다.

하지만 그 무게가 나쁜 것만은 아니었다.

그 무게는 살아있다는 증거였다.

세아는 어머니의 팔 속에서, 다른 해녀들의 숨비소리 속에서, 자신의 것도 들었다.

자신의 숨.

자신의 생명.

자신의 박자.

“불이 꺼지는 것도 아니고.”

세아가 중얼거렸다.

“불이 남은 것도 아니고.”

어머니의 팔이 더 세게 조였다.

“불의 언어를 배우는 것도 아니고.”

세아가 말을 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이해했다.

“그것은 그보다 더 단순했다. 살아있다는 것. 숨을 쉬고 있다는 것. 그것이 전부였다.”

## 합창

제주 포구에서 세아는 처음으로 자신의 숨이 들렸다.

어머니의 숨과 함께.

다른 해녀들의 숨과 함께.

그것은 합창이었다.

누가 지휘하지 않는 합창.

누가 악보를 쓰지 않은 음악.

누가 계획하지 않은 리듬.

세아는 그 합창의 일부가 되고 싶었다. 아니, 이미 되어 있었다. 자신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자신의 숨이 이미 그 음악의 일부였다.

“엄마, 미안해.”

세아가 말했다.

어머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세아의 등을 쓸어내렸다. 포구의 물이 세아의 얼굴에 떨어지고 있었다. 눈물인지 바닷물인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도 상관없었다. 그 모든 것이 이제는 같은 것 같았다.

“그동안 많이 외로웠겠구나.”

어머니가 속삭였다.

“응. 많이 외로웠어.”

세아가 대답했다.

그리고 그것으로 충분했다.

## 깨달음

세아는 깨달았다.

자신이 찾고 있던 것이 무엇인지.

그것은 타인의 입으로 자신의 노래를 부르게 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자신의 노래를 누군가가 부르길 바라는 집착이 아니었다.

그것은 자신의 재능을 증명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것은 세상을 놀라게 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것은 단지.

자신의 목소리로.

자신의 삶을 부르는 것.

그것이 전부였다.

그것이 음악의 진짜 정의였다.

세아는 이제 알았다. 강리우가 왜 그렇게 아름다운 음악을 만들 수 있었는지. 그것은 그의 재능 때문이 아니었다. 그것은 그의 집착 때문이었다. 그의 광기 때문이었다. 그의 죽음을 향한 집착이 음악으로 변환되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결국 죽음으로 이어지는 음악이었다.

반면 해녀들의 숨비소리는?

그것은 죽음을 거부하는 음악이었다. 매 순간 삶을 택하는 음악이었다. 물속의 어둠에서 빛으로 돌아오는 음악이었다.

그것이 진짜였다.

그것이 세아가 배워야 할 음악이었다.

## 시작

“아직 시작이야.”

세아가 어머니에게 말했다.

“응. 시작이지.”

어머니가 대답했다.

“아직 매우 멀었어.”

세아가 다시 말했다.

“그래. 매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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