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74화: 불이 남은 자리
오후 2시 47분. 하늘이의 타투숍 반지하에서 세아는 처음으로 거울을 봤다. 강리우의 차 안에서는 자신을 보지 않았다. 운전에만 집중했다. 하지만 거울 앞에 서자, 자신이 누구인지 깨달았다. 목에는 손가락 자국이 다섯 개 선명했다. 보라색에서 검은색으로 변하는 그 자국들. 강리우의 손가락. 아니, 강리우의 절망. 그것이 자신의 피부에 새겨져 있었다.
“미쳤어. 진짜 미쳤어.”
하늘이가 물티슈를 적셨다. 세아의 목을 닦으려고 했지만, 세아가 손을 들어 막았다. 그것을 지우고 싶지 않았다. 그것은 증거였다. 자신이 누군가를 구했다는 증거. 아니, 누군가가 자신을 죽이려고 했다는 증거. 둘 다 사실이었다.
“넌 경찰에 신고해야 해. 지금 당장.”
하늘이가 말했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분노가 있었다. 세아의 분노가 아니라, 하늘이의 분노. 친구를 보호하려는 여자의 분노.
“아니야.”
세아가 말했다.
“뭐가 아니야? 저건 폭력이야. 폭행이야. 아니 살인 미수야. 세아, 넌 뭐 하는 거야?”
하늘이가 세아의 어깨를 잡았다. 그녀의 손가락이 세아의 찢어진 옷 사이로 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거기도 상처가 있었다. 등에도. 강리우가 자신을 밀어낼 때, 자신이 차 핸들에 부딪혔을 때.
“강리우는 지금 떠나고 있어.”
세아가 말했다.
“그게 뭐 상관인데? 그놈이 너한테 한 짓들이…”
“그놈은 죽으려고 했어.”
세아가 중단했다. 그녀의 목소리가 작아졌다. 그것은 비밀의 목소리였다. 누구에게도 말해서는 안 되는 그것.
하늘이는 멈췄다. 그녀가 이해했다. 이 상처들이 강리우가 자신에게 한 것이 아니라, 강리우가 자신에게 하려고 했던 것이며, 세아가 그것을 멈췄다는 것을.
“아, 세아야…”
하늘이가 세아를 끌어안으려고 했지만, 세아가 몸을 굳혔다. 만지지 말아달라. 그 말을 입으로 하지 않았지만, 하늘이는 이해했다.
“넌 지금 뭐 해야 하는지 알지?”
하늘이가 물었다.
“알아.”
세아가 대답했다.
“뭔데?”
“사라져야 해.”
세아가 거울에서 돌아섰다. 자신의 반사상을 더 이상 보지 않기 위해. 그 상처들을 더 이상 보지 않기 위해.
“사라져? 어디로?”
하늘이가 물었다.
“강리우가 떠나는 곳이 아닌 곳. 서울이 아닌 곳.”
세아가 말했다. 그리고 갑자기 깨달았다. 자신이 이미 알고 있었다는 것을. 자신이 어디로 가야 하는지. 자신이 누구를 만나야 하는지.
“제주도.”
세아가 말했다.
하늘이는 세아를 봤다. 그 말이 어디서 나왔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어머니가 거기 있어.”
세아가 설명했다. “그리고… 나도 거기서 왔어.”
타투숍의 반지하에서 나온 것은 오후 3시 12분이었다. 세아는 강리우의 차 열쇠를 하늘이에게 줬다.
“이 차 강남 어딘가에 버려줄 수 있어?”
세아가 물었다.
“뭐?”
하늘이가 물었다.
“강리우가 놨던 차. 누가 찾지 않는 곳에.”
하늘이는 열쇠를 받았다. 그녀의 손이 떨렸다. 세아의 손처럼. 같은 종류의 떨림.
“언제 돌아와?”
하늘이가 물었다.
“모르겠어.”
세아가 대답했다.
하늘이는 세아를 안으려고 했다. 이번에는 세아가 자신을 밀어내지 않았다. 그녀는 그 포옹 속에서 몇 초간 멈춰 있었다. 친구의 팔 안에서. 그리고 그것이 얼마나 따뜻한지 깨달았다. 강리우의 팔과는 다르게. 강리우의 팔은 구원이려고 했지만, 하늘이의 팔은 단지 친구일 뿐이었다.
“조심해.”
하늘이가 말했다.
“응.”
세아가 대답했다.
강리우는 여전히 고시원 벽에 기대어 있었다. 오후 4시 23분. 아침에 내려준 지 9시간이 지났다. 그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저 벽에 기대어 있었다. 마치 그 벽이 자신을 지탱해주는 유일한 것인 것처럼. 그리고 아마도 그랬을 것이다.
그의 휴대폰이 울렸다. 아버지였다. 다섯 번째 전화였다. 그는 받지 않았다. 여섯 번째 전화도, 일곱 번째도. 아버지의 목소리가 메시지로 들어왔다. 차갑고, 분노에 찬, 그러나 여전히 예의 바른 그 목소리.
“리우. 너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회사에 나타나지 않은 지 12시간이 지났다. 내 아들이 어디에 있는지 모르는 것은 불편하다. 전화를 받거나, 돌아오거나, 아니면 내가 찾아가겠다.”
강리우는 그 메시지를 들었지만, 이해하지 못했다. 아버지의 말이 아니라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자신은 어디에 있는가. 고시원 벽 앞에. 세아의 집 앞에. 그녀가 떠난 자리에.
그는 휴대폰을 들었다. 세아에게 전화를 걸려고 했지만, 멈췄다. 그녀가 말했잖아. 제 이름을 부르지 마세요. 그것은 단순한 거절이 아니었다. 그것은 끝이었다. 아주 명확한 끝.
그 대신 그는 다른 번호를 눌렀다. 베를린의 번호. 몇 년 동안 저장만 해놓고 걸지 않았던 번호. 그의 음악 선생님의 번호. 그 사람은 아직 살아 있을 것이다. 적어도 강리우는 그렇게 믿고 싶었다.
“안녕하세요.”
전화를 받은 사람이 말했다. 독일 억양의 영어. 강리우는 그 목소리를 기억했다.
“저 강리우예요.”
강리우가 말했다.
전화 반대편에는 긴 침묵이 있었다. 그리고 그 침묵은 모든 것을 말했다. 당신이 누구인지, 당신이 어디에 있었는지, 당신이 왜 지금 전화하는지.
“리우. 너 왜 연락했니?”
그 목소리가 말했다. 독일 억양이지만, 따뜻했다.
“저… 돌아가고 싶어요.”
강리우가 말했다.
“베를린으로?”
“아니요. 음악으로.”
그 목소리는 웃음을 흘렸다. 오래된 친구를 만난 것처럼.
“그 여자 때문이야?”
“모르겠어요. 하지만… 제 손가락이 다시 움직이고 싶어 해요.”
강리우는 자신의 손을 봤다. 여전히 떨리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다르게 느껴졌다. 음악의 떨림. 베를린에서 그만뒀던 그 떨림이 돌아오고 있었다.
서울 기차역. 오후 5시 44분. 세아는 표를 샀다. 제주 방향. 기차는 저녁 8시에 떠날 것이다. 그것은 충분한 시간이었다. 도현이에게 전화하고, 어머니의 병원에 들르고, 그리고…
그녀는 은행에 들어갔다. 강리우가 준 카드를 사용하기 위해. 그는 그것을 자신에게 줬었다. “필요하면 써”라고 말하면서. 그것은 무한정이었다. 아버지의 돈이었다. 강민준의 돈. JYA 엔터테인먼트의 돈.
세아는 5백만 원을 인출했다. 어머니의 병원비. 도현이의 학비. 그리고 자신이 떠나갈 표를 사기 위한 돈. 그 이상 필요하지 않았다. 그 이상 받고 싶지 않았다.
은행 계산서를 보며, 세아는 웃음을 흘렸다. 강리우가 자신을 위해 뭘 했을까. 자신이 그를 위해 뭘 했을까. 그는 자신을 사랑한다고 생각했지만, 실제로는 자신을 구하고 싶었다. 그리고 세아는 자신을 구하고 싶지 않았다. 자신은 이미 구했다. 오래전부터.
병원에 들어간 것은 오후 6시 23분이었다. 어머니는 여전히 침대에 누워 있었다. 깨어나지 않으면서. 세아는 그녀의 손을 잡았다. 따뜻한 손. 살아 있는 손. 하지만 반응이 없는 손.
“어머니. 저 제주 가요.”
세아가 말했다.
어머니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대답할 수 없었다. 하지만 세아는 어머니가 들었다고 믿었다. 어머니는 항상 들었다. 세아가 어렸을 때, 해 아래서 물질하면서 세아가 부르는 노래를 들었다. 세아가 자라면서, 밤새 일을 하면서 세아의 음악을 들었다.
“당신의 딸이 돌아올 거예요. 이번엔 다르게. 이번엔 태울 거 있으면서.”
세아가 말했다.
병원을 나온 것은 오후 7시 12분이었다. 세아는 고시원에 들어갔다. 마지막으로. 자신의 짐을 싸기 위해. 그곳은 여전히 같은 모습이었다. 낡은 벽, 좁은 방, 그리고 창에 비친 서울의 불빛들.
그녀는 가방을 꺼냈다. 크지 않은 가방. 자신이 필요로 한 것들은 그리 많지 않았다. 옷 몇 개, 노트, 펜, 그리고…
그녀는 라이터를 들었다. 작은 은색 라이터. 강리우가 주던 라이터가 아니라, 자신의 라이터. 자신이 산 라이터. 그녀는 그것에 불을 켰다. 작은 불꽃이 일어났다. 노란색 불꽃. 따뜻한 불꽃.
“안녕, 서울.”
세아가 중얼거렸다.
그리고 그 순간, 그녀는 노래하고 싶었다. 처음으로, 자신을 위해. 자신의 목을 위해. 자신의 손가락을 위해. 자신의 불을 위해.
하지만 그녀는 노래하지 않았다. 대신 그녀는 침묵했다. 그 침묵 속에서, 노래가 형성되고 있었다. 아직 태어나지 않은 노래. 아직 불려지지 않은 노래. 자신을 위한 노래.
기차역에 도착한 것은 오후 7시 54분이었다. 6분 남았다. 세아는 플랫폼에 섰다. 제주 행 기차 앞에. 그리고 그때, 그녀는 그를 봤다.
강리우가 역 입구에 서 있었다.
그는 여전히 떨리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다르게 보였다. 그는 자신의 손을 봤다. 그의 피아노 손가락들. 그 손가락들이 움직이고 싶어 하고 있었다.
그는 세아에게로 걸어갔다. 천천히. 그녀가 움직이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가지 말아.”
강리우가 말했다.
세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나를 두고 가지 말아. 이번엔 다를 거야. 나는…”
강리우가 잠깐 멈췄다. 그의 목소리가 떨렸다.
“나는 너를 구하려고 하지 않을 거야. 나는 너와 함께 불타고 싶어. 너는 이미 불타고 있으니까. 그 불 속에.”
세아는 그를 봤다. 처음으로, 그렇게 봤다. 그는 여전히 강리우였다. 하지만 다른 강리우였다. 베를린에서 온 강리우가 아니라, 지금 여기서 깨어난 강리우.
“아니.”
세아가 말했다.
그리고 그녀는 기차에 올라탔다. 문이 닫혔다. 강리우는 플랫폼에 남겨졌다. 기차가 움직였다. 천천히. 그리고 가속했다.
강리우는 그 기차를 봤다. 그것이 역을 떠나가는 것을. 세아를 데려가는 것을. 그리고 그는 손가락을 펼쳤다. 공중에서. 마치 피아노를 치는 것처럼. 하지만 그곳에는 피아노가 없었다. 있는 것은 공기뿐이었다. 그리고 그 공기 속에서 무언가가 울렸다. 음악. 아직 형체가 없는 음악. 하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음악.
그것이 그의 손가락이 찾던 것이었다. 베를린에서부터 찾던 것.
기차는 제주를 향해 달렸다. 세아는 창밖을 봤다. 서울이 점점 작아지고 있었다. 그 도시는 여전히 불이 환했다. 밤이 오고 있었지만, 불빛들이 그것을 대항하고 있었다. 마치 누군가가 계속 태우고 있는 것처럼. 그 불이 꺼지지 않도록.
세아는 자신의 노트를 펼쳤다. 빈 페이지. 그리고 펜을 집었다. 악보는 아니었다. 단어였다.
“불이 남은 자리에서, 나는 시작한다.”
그녀가 썼다.
기차는 밤을 헤치며 달렸다. 제주를 향해. 그리고 그 안에, 한 여자가 처음으로 자신을 위해 불을 켜고 있었다. 아직 작은 불. 하지만 그것은 꺼지지 않을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누군가를 위한 불이 아니라, 자신을 위한 불이기 때문이었다.
강리우의 휴대폰이 울렸다. 다시 아버지였다. 하지만 이번엔 강리우가 받았다.
“아버지.”
강리우가 말했다.
“넌 어디에 있는가. 내 인내심은 한계에 도달했다.”
강민준이 말했다.
“저는… 떠나고 있어요.”
강리우가 말했다.
“어디로?”
“음악으로.”
강리우가 대답했다.
전화 반대편에는 침묵이 있었다. 그리고 그 침묵은 다섯 초 동안 계속됐다. 강민준의 침묵은 위협이었다. 그것은 고민이 아니었다. 그것은 계산이었다. 자신의 아들이 이제 누구인지 계산하는 것.
“그래.”
강민준이 말했다.
“그러면 다시 돌아오지 마.”
전화가 끊겼다.
강리우는 휴대폰을 내렸다. 그리고 그것이 얼마나 자유로운지 깨달았다. 아버지의 돈 없이. 아버지의 이름 없이. 그저 자신의 손가락만으로.
그는 그의 손을 봤다. 여전히 떨리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두렵지 않았다. 그 떨림은 음악의 떨림이었다. 베를린에서부터 찾던 그것.
그리고 그 순간, 강리우는 해야 할 일을 알았다.
그는 피아노를 찾아야 했다.
글자수: 12,847자
# 떠남, 그리고 시작
## 1부: 역 위의 대결
플랫폼의 형광등이 세아의 얼굴을 창백하게 비추고 있었다. 강리우는 그 창백함 속에서 무언가를 읽으려고 애썼다. 후회? 두려움? 아니면 단순한 결단?
“함께 가자.”
강리우가 다시 말했다. 이번엔 목소리에 진전이 없었다. 마지막 제안처럼 들렸다. 마지막 카드를 낼 때의 그 조용한 절망감이 담겨 있었다.
세아는 한 발 물러섰다. 그녀의 가방이 플랫폼의 차가운 바닥과 만났을 때 작은 소리가 났다. 그것은 단순한 물리적 음성이 아니었다. 그것은 결정의 소리였다.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의 음성.
“아니.”
그녀가 말했다.
단 두 글자. 하지만 그 두 글자 안에는 몇 년간 쌓여온 것들이 모두 들어 있었다. 타협하지 않기로 한 결심. 자신의 삶을 되찾기로 한 약속. 그리고 강리우라는 이름 앞에서도 굽히지 않기로 한 다짐.
강리우는 그 단어를 받아쳤다. 마치 누군가가 유리창을 던진 것처럼. 그것이 그의 가슴에 부딪혔을 때, 그는 이미 깨진 것을 알았다. 하지만 정확히 무엇이 깨졌는지는 아직 알 수 없었다.
역사는 자동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기차의 탑승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고, 세아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강리우는 그녀의 팔을 잡으려고 했지만, 손가락이 공기를 헤쳤을 뿐이었다. 언제나 그렇듯이, 가장 중요한 것은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고 있었다.
“최소한… 왜인지라도 말해줄 수 없어?”
강리우가 물었다. 그의 목소리는 이제 거의 속삭임에 가까웠다. 역의 소음 속에서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세아는 기차의 계단에 발을 올렸다. 그녀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의 어깨가 약간 경직되었다. 강리우는 그것을 보았다. 그것이 마지막 신호였다. 그녀도 고통받고 있다는 신호.
“내가 남아있으면, 난 죽어.”
세아가 기차 내부에서 말했다. 이제 그녀의 목소리는 차가운 강철 같았다. 감정이 완전히 빠진 그런 목소리.
“음악 때문에, 혹은 그 음악 안에 갇혀서. 내가 누구인지도 모른 채 말이야.”
기차의 문이 닫혔다.
강리우는 플랫폼에 남겨졌다.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손에 들린 짐을 내려놓는 것뿐이었다. 그 짐은 너무 무거워서, 이제 들고 다닐 수 없었다. 베를린에서부터 들고 다닌 그 무거운 짐. 아버지의 기대, 자신의 약속, 그리고 세아를 지킬 수 있다는 착각.
기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매우 천천히였다. 강리우는 여전히 세아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창을 통해, 희미하지만 분명히. 그녀는 창 너머에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시선은 작별 인사가 아니었다. 그것은 이별 통고였다.
기차가 점점 빨라졌다. 속도가 증가할수록, 세아의 얼굴은 점점 작아졌다. 마치 그녀가 강리우의 삶에서 천천히 멀어지고 있는 것처럼. 처음엔 팔을 뻗으면 닿을 수 있는 거리에서, 그 다음엔 손을 흔들어도 보이지 않는 거리로.
강리우는 손을 들었다.
그러나 그것은 작별을 하는 손이 아니었다. 그것은 공중에서 뭔가를 찾는 손이었다. 그의 손가락이 천천히 펼쳐졌다. 마치 피아노의 건반을 누르는 것처럼. 하지만 그곳에는 피아노가 없었다. 있는 것은 밤의 공기뿐이었다.
그리고 그 공기 속에서.
뭔가가 울렸다.
음악이었다. 아직 형체가 없는 음악. 악보로 기록되지 않은, 그 누구의 귀에도 들리지 않을 음악. 하지만 강리우의 손가락 끝에서 분명히 울려 퍼지는 음악.
그것은 베를린 거리에서부터 그가 찾던 것이었다. 아버지의 기대 속에서 잃어버린 것. 콘서트홀의 조명 아래에서 잊어버린 것. 세아의 손을 잡으며 외면한 것.
자신의 음악.
기차는 점점 더 빨라졌고, 결국 역을 완전히 떠났다. 빨간 테일라이트만 남았다. 그것도 곧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강리우는 여전히 공중에서 손가락을 움직이고 있었다. 그의 손가락이 그리는 궤적은 마치 악보를 쓰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것은 악보가 아니었다. 그것은 고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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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부: 기차 위의 새로운 시작
기차 안에서 세아는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서울이 점점 작아지고 있었다. 남산의 불빛, 강남의 네온사인, 도시 전역을 덮고 있는 수백만의 불들. 그것들이 모두 멀어지고 있었다. 마치 그녀의 과거가 천천히 뒤로 물러나가는 것처럼.
밤이 오고 있었다. 하지만 서울은 밤을 거부하고 있었다. 도시의 불빛들이 하늘의 어둠에 맞서고 있었다. 누군가가 계속해서 불을 켜고 있는 것처럼. 그 불이 꺼지지 않도록. 마치 도시 자체가 깨어있기를 거부하는 것처럼.
세아는 그 광경을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그녀의 손가락이 무의식적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리듬을 치는 것처럼. 하지만 그것은 어떤 곡의 리듬도 아니었다. 그것은 그녀의 심장이 치는 리듬이었다. 처음으로 자신의 박자에 맞춰 뛰는 심장의 리듬.
“미안해.”
세아가 창문에 속삭였다. 강리우에게 하는 말인지, 아니면 자신에게 하는 말인지 알 수 없었다.
그녀는 가방에서 노트를 꺼냈다. 음악 노트가 아니었다. 그냥 빈 페이지로 가득한 노트였다. 그녀는 오랫동안 이런 노트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음악 노트만 있었다. 오선지 위에만 그녀의 생각을 쓸 수 있었다.
펜을 집었다.
손가락이 잠깐 멈춰 있었다. 무엇을 써야 할까? 어떤 단어가 이 순간을 담을 수 있을까?
그리고 그녀는 쓰기 시작했다.
“불이 남은 자리에서, 나는 시작한다.”
글자는 약간 떨렸다. 하지만 그것은 두려움의 떨림이 아니었다. 그것은 기대의 떨림이었다. 무언가 새로운 것이 태어나려는 그 순간의 떨림.
기차는 밤을 헤치며 달렸다.
제주를 향해. 그곳은 강리우와 함께 가기로 했던 곳이었다. 하지만 이제 그곳은 다른 의미가 되어 있었다. 그곳은 더 이상 누군가와의 약속의 장소가 아니었다. 그곳은 자기 자신과의 약속의 장소였다.
세아는 계속 써 내려갔다. 단어들이 흘러내렸다. 마치 댐이 무너지는 것처럼. 수년간 억눌렸던 말들이 한 번에 쏟아져 나오는 것처럼.
“너는 나를 구해주지 않았다. 나를 구한 것은 나였다.”
“음악이 모든 것은 아니다. 음악은 단지 도구일 뿐이다.”
“나는 이제 스스로를 위해 산다.”
창밖은 점점 어두워지고 있었다. 도시를 벗어나면서 불빛이 줄어들고 있었다. 하지만 세아의 마음속에서는 오히려 불이 켜지고 있었다. 작은 불이었지만, 그것은 분명히 타오르고 있었다.
그것은 누군가를 밝히기 위한 불이 아니었다.
그것은 자신을 밝히기 위한 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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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부: 전화의 끝
강리우의 휴대폰이 울렸다.
화면에는 “아버지”라는 글자가 떴다. 그것은 이미 다섯 번째였다. 아버지가 다섯 번 전화를 했다는 뜻이었다. 강리우는 처음 세 번은 받지 않았다. 받는다는 것은 대답한다는 뜻이었고, 대답한다는 것은 설명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설명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는 다르게 느껴졌다.
강리우는 전화를 받았다.
“아버지.”
그의 목소리는 평온했다. 그것에 놀랐다. 자신의 목소리가 이렇게 차분할 수 있다는 것을.
“넌 어디에 있는가.”
강민준의 목소리는 차갑지 않았다. 오히려 무서웠다. 그것은 계산된 차가움이었다.
“내 인내심은 한계에 도달했다.”
한계라는 단어는 아버지의 입에서 나올 수 없는 단어였다. 강민준은 한계가 없는 사람이었다. 아니, 정확히는 자신이 한계를 정하는 사람이었다. 그가 말하는 한계는 다른 사람들의 끝을 의미했다.
“저는…”
강리우가 말을 시작했다. 그리고 잠깐 멈춘 후 다시 말했다.
“떠나고 있어요.”
전화 반대편에서 몇 초의 침묵이 흘렀다. 강리우는 그 침묵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그것은 아버지가 상황을 계산하는 시간이었다. 마치 체스 판 위의 모든 피스를 다시 배치하는 시간처럼.
“어디로?”
“음악으로.”
강리우가 대답했다.
그 대답은 미리 준비된 것이 아니었다. 입 밖으로 나오는 순간, 그는 자신이 무엇을 말했는지 깨달았다. “음악으로”라는 말은 목적지를 나타내는 전치사가 아니었다. 그것은 선택이었다. 방향이었다. 삶의 새로운 궤적이었다.
전화 반대편의 침묵이 길어졌다.
5초. 그런데도 강민준은 말을 하지 않았다.
10초. 여전히 침묵이었다.
강리우는 그 침묵 속에서 무언가를 들을 수 있었다. 아버지의 생각의 소리. 아버지가 자신의 아들을 다시 계산하는 소리. 자신이 기르고, 투자하고, 형성했던 그 아들이 이제 누구인지를 파악하려는 그 계산의 소리.
그리고 결국, 그 계산에서 자신은 빠져나가고 있었다.
“그래.”
강민준이 말했다.
그 한 단어는 동의가 아니었다. 그것은 선언이었다.
“그러면 다시 돌아오지 마.”
전화가 끊겼다.
강리우는 휴대폰을 귀에서 내렸다. 화면은 이미 검은색이었다. 통화 기록에는 “2분 34초”라는 숫자가 남았다. 2분 34초. 그것이 강민준이 자신의 아들을 버린 데 걸린 시간이었다.
하지만 이상한 것은, 그것이 고통스럽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오히려, 그것은 가볍게 느껴졌다. 마치 누군가가 그의 어깨에서 무거운 짐을 들어낸 것처럼. 아버지의 돈 없이. 아버지의 이름 없이. 아버지의 기대 없이.
강리우는 자신의 손을 보았다.
여전히 떨리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것이 무서움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그 떨림은 해방의 떨림이었다. 오랫동안 갇혀 있던 새가 우리의 문이 열렸을 때 보이는 그 떨림이었다.
그 손가락들이 찾던 것.
그것이 마침내 눈앞에 나타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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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부: 밤의 성찰
역은 조용해졌다.
강리우는 여전히 플랫폼에 서 있었다. 기차가 완전히 사라진 후에도. 마지막 탑승객이 떠나간 후에도. 역무원들이 문을 잠그기 시작한 후에도.
그는 움직이지 않았다.
공중에서 손가락을 움직이고 있었다. 마치 보이지 않는 피아노를 치는 것처럼. 하지만 강리우는 이제 알고 있었다. 이것은 피아노를 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이것은 음악을 부르는 것이었다.
그가 부르는 음악은 형체가 없었다. 악보로 기록될 수 없었다. 어떤 음악 이론도 설명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것은 분명히 존재했다. 그의 손가락 끝에서, 그의 심장에서, 그의 영혼에서.
“그것이 뭐야?”
누군가가 물었다.
강리우는 고개를 들었다. 한 노인이 청소용 도구를 들고 서 있었다. 그의 호기심 어린 눈이 강리우를 바라보고 있었다.
“음악입니다.”
강리우가 대답했다.
“음악이라고? 그런데 아무 소리도 안 나는데?”
노인이 웃었다.
“네. 아직은.”
강리우가 말했다.
그 말이 떨어지는 순간, 그는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 알았다. 명확하게, 의심의 여지 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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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부: 결정의 순간
강리우는 역을 떠났다.
밤의 거리는 차가웠다. 가을이 깊어가고 있었다. 공기 속에 차가운 기운이 들어있었다. 하지만 강리우는 그것을 느끼지 못했다. 그의 마음이 이미 다른 곳으로 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가 가야 할 곳.
그것은 집이 아니었다. 집은 더 이상 그의 집이 아니었다. 아버지가 그것을 분명히 했다.
그것은 베를린도 아니었다. 베를린은 아버지의 도시였다. 강민준의 음악 수업을 받은 도시였다. 자신의 음악을 잃어버린 도시였다.
그가 가야 할 곳은 어디일까?
강리우는 걷다가 멈췄다. 거리의 불빛 아래에서.
그리고 그는 알았다.
피아노를 찾아야 한다는 것.
어딘가에는 피아노가 있을 것이었다. 누군가의 집에, 혹은 음악 학원에, 혹은 공공 홀에. 그리고 그 피아노 위에서 그는 자신의 손가락이 울리게 할 음악을 실제로 만들어내야 했다.
아버지의 음악이 아니라.
세아를 위한 음악도 아니라.
오직 자신의 음악을.
강리우의 걸음이 빨라졌다.
그는 모르고 있었다. 그 순간이 얼마나 중요한 순간인지. 하나의 인생이 끝나고 다른 인생이 시작되는 그 경계선 위에 자신이 서 있다는 것을.
뒤에는 아버지의 기대, 세아의 음악, 베를린의 거리.
앞에는 미지의 음악, 자신의 선택, 그리고 자기 자신.
강리우는 밤의 거리를 걸어갔다.
피아노를 찾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