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61화: 네 이름을 부르기 전까지
세아는 눈을 떴다. 천장이 보였다. 목재로 된 천장. 낯선 천장. 몸을 일으켜 앉았을 때 깨닫는 것들이 연쇄적으로 밀려왔다. 제주도. 강리우의 별장. 침대는 클었고, 침구는 너무 좋았고, 햇빛은 너무 밝았다.
시계를 봤다. 오전 11시 47분.
세아는 자신이 이렇게까지 오래 잔 적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서울에서는 3시간, 많아야 4시간이었다. 밤에 편의점 알바, 새벽에 곡 쓰기, 낮에 버티기. 그 사이클이 너무 깊게 박혀 있어서 9시간을 자는 것은 자신의 몸이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침대에서 일어났다. 바닥이 따뜻했다. 온돌처럼. 아니, 바닥난방이었다. 강리우의 별장 같은 곳이라면 당연히 그럴 것이다. 세아는 그것을 이상하게 생각했다. 제주도의 별장이 왜 온돌을 깔까. 누군가를 위해? 아니면 단순히 돈이 남아서?
침실은 넓었다. 침대, 소파, 책장, 그리고 창. 창 너머는 바다였다. 아침의 제주 해변. 파도가 보였다. 어제의 검은 파도와는 완전히 다른 파도. 이 파도는 파란색이었다. 햇빛에 부서지는, 부스러기처럼 흩어지는 파란색.
세아는 어제를 떠올렸다. 어제 아침. 강리우가 말한 것들. 한준호. 베를린. 자살. 그 단어들은 아직도 세아의 귀에 남아 있었다. 마치 울리는 종소리처럼. 멈추지 않는 음.
물 위에서 강리우가 울었다. 세아는 처음 봤다. 그런 모습. 그의 얼굴이 그렇게 깨지는 것. 마치 빙판이 갈라지듯이. 그리고 그 갈라진 곳으로 무언가 검은 것이 흘러나왔다.
세아는 침실을 나갔다. 복도는 길었다. 목재로 된 복도. 벽에는 사진이 걸려 있었다. 강리우의 어린 시절 사진. 피아노 앞에 앉은 소년. 검은 정장을 입은 소년. 그리고 그 옆에… 또 다른 소년. 비슷한 나이. 비슷한 얼굴. 둘 다 웃고 있었다.
한준호. 그것이 그 소년일까.
세아는 사진을 오래 봤다. 죽은 사람을 처음 본다는 기분이었다. 사진 속 그는 살아 있었다. 웃고 있었다. 아무도 모르게 3년 뒤에 죽을 소년이 지금 이 순간을 향해 웃고 있었다.
“아침을 준비했어.”
강리우의 목소리가 뒤에서 들렸다. 세아는 돌아섰다. 그는 주방 방향에서 나오고 있었다. 앞치마를 하고 있었다. 검은색 앞치마. 그것이 어울리지 않게 보였다. 그가 요리를 하는 모습은 상상이 안 됐다.
“밥 지었어요?”
“간단하게. 계란말이, 된장국, 밥. 그리고…”
강리우가 멈췄다. 세아를 보고 있었다. 그의 눈에는 어제의 눈물이 남아 있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얼굴은 정상이었다. 마스크를 쓴 것처럼.
“뭐?”
“너 사진 봤어?”
사진 앞에 서 있는 세아를 보고 물었다.
“네. 저 소년이…”
“한준호야.”
강리우가 자신이 말해버렸다. 마치 처음부터 말하지 않으면 영원히 말할 수 없을 것처럼.
세아는 다시 사진을 봤다. 한준호. 이제 그 이름이 사진에 붙어 있었다. 생명을 얻었다. 혹은 더 죽어 보였다. 사진은 죽은 것들을 생생하게 만드는 도구니까.
“밥 먹자.”
강리우가 말했다. 끝내려는 톤이었다. 세아는 따라갔다. 질문을 하지 않기로 했다. 어제 밤은 충분했다. 어제 밤은 이미 너무 많은 것을 가져갔다.
주방은 밝았다. 창이 크고, 햇빛이 가득 들어왔다. 테이블에는 음식이 차려져 있었다. 강리우가 말한 대로였다. 계란말이, 된장국, 밥. 그리고 추가로 김, 깍두기, 미역국.
“많네요.”
“너 어제 밤 물밖에 안 먹었잖아.”
세아는 앉았다. 강리우는 이미 앉아 있었다. 반대편. 둘 사이에는 테이블이 있었다. 안전한 거리. 혹은 불안한 거리.
세아는 밥을 먹었다. 된장국을 한 숟가락. 밥 한 숟가락. 계란말이 한 입. 속도는 느렸다. 마치 음식을 음미해야 한다는 의무감 때문인 것처럼. 혹은 이 침묵을 채워야 한다는 의무감 때문인 것처럼.
강리우는 자신의 밥을 먹었다. 역시 속도는 느렸다. 둘 다 먹는 것보다는 앉아 있는 것 같았다. 마치 이것이 식사가 아니라 어떤 의식인 것처럼.
“너 언제 서울로 돌아가야 해?”
강리우가 먼저 말을 끊었다.
“편의점 시프트가…”
세아가 계산했다. 며칠이 더 있나. 어제 새벽 4시에 제주로 떠났다. 그럼 점장에게는 이미 연락이 갔을 것이다. 혹은 가지 않았을 것이다. 세아는 점장에게 연락한 기억이 없었다.
“점장한테 연락 안 했어?”
“네.”
“지금 해.”
강리우가 말했다. 그것은 명령이었다. 하지만 그의 목소리에는 명령의 톤이 없었다. 단순한 제안처럼 들렸다.
세아는 핸드폰을 들었다. 배터리는 15%였다. 얼마나 오래 켜져 있었나. 전원을 켜지 않은 지 얼마나 오래되었나.
카톡이 있었다. 점장. 도현이. 하늘.
점장: “세아 뭐하냐? 어제 시프트 안 나왔는데 연락 없네?”
점장: “응? 답장 안 해줘?”
점장: “좋아 그럼 그냥 다른 애 구하겠다.”
도현이: “누나 뭐해? 서울 없냐?”
도현이: “진짜?”
도현이: “어디 갔어? 혼자 가??”
하늘: “세아야 뭐했냐 진짜 ㅋㅋ 연락 좀 해줘”
하늘: “아 근데 좋은 거야? 내가 봤는데 넌 어제 밤 뭔가 이상했어”
세아는 하늘의 메시지에 멈췄다. 내가 어제 밤 뭔가 이상했어? 하늘이 뭘 봤나. 세아는 어제 밤 아무것도 한 기억이 없었다. 강리우와 해변에 있었고, 물 속에 있었고, 그 다음은?
그 다음은 기억이 없었다.
“뭐가 있어?”
강리우가 물었다. 세아의 표정을 읽은 것 같았다.
“친구 메시지가…”
세아가 말했다.
“뭐라고?”
“어제 밤 제가 이상했대요.”
강리우의 얼굴이 변했다. 아주 미묘하게. 하지만 분명하게. 마치 그가 무언가를 생각난 것처럼. 혹은 무언가를 숨기려고 노력하는 것처럼.
“어제 밤 뭐 했나?”
세아가 물었다. 그것은 자신이 물어야 하는 질문이었다. 자신의 기억이 없으니까.
“내가 말한 거 다 들었어. 그리고…”
강리우가 멈췄다.
“그리고?”
“그리고 넌 울었어.”
그 말을 듣는 순간, 세아의 얼굴이 뜨거워졌다. 울었다. 자신이 울었다. 그것은 기억이 없었다. 하지만 있을 법했다. 한준호라는 이름을 듣고. 자살이라는 단어를 듣고. 그리고 강리우가 자신을 안으면서 무언가를 속삭였을 때.
“그 다음은?”
“그 다음엔 내가 널 집으로 데려왔어. 넌 자고 있었어.”
강리우가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다시 정상이었다. 마스크가 다시 씌워진 것처럼.
세아는 밥을 다시 집었다. 더 이상 물을 것이 없었다. 자신이 울었다는 것. 그것으로 충분했다.
식사를 마친 후, 강리우는 세아를 해변으로 데려갔다. 어제와는 다른 해변. 더 북쪽으로. 사람들이 있는 해변. 하지만 오후 1시였기 때문에 사람은 많지 않았다. 몇몇 가족들. 몇몇 연인들. 그리고 혼자인 사람들.
“여기서 뭐 해요?”
세아가 물었다.
“있어. 아무것도 안 하고. 그냥.”
강리우가 대답했다.
그들은 모래사장에 앉았다. 어제와는 다른 모래. 더 따뜻했다. 햇빛에 데워진 모래. 세아의 발이 그 안에 파묻혔다.
파도가 밀려왔다. 나갔다. 밀려왔다. 나갔다. 그 리듬은 끝나지 않았다. 그것은 영원할 것처럼 보였다. 마치 시간 자체가 파도처럼 흘러가는 것처럼.
“너 미안해 하지 마.”
강리우가 갑자기 말했다.
“뭐가 미안한데요?”
“어제. 울었다고 해서.”
세아는 그를 바라봤다.
“전 미안해 안 해요.”
“그래?”
“네. 울 권리가 있잖아요.”
그 말을 하자 강리우의 얼굴에 뭔가 변화가 있었다. 아주 미묘한 변화. 마치 누군가가 그의 얼굴 아래에 손을 대고 조금 들어올린 것처럼.
“너 뭘 원해?”
강리우가 물었다. 그것은 어제와 같은 질문이었다. 하지만 톤이 달랐다. 어제는 파고드는 톤이었다. 오늘은 진심으로 묻는 톤이었다.
“모르겠어요.”
세아가 대답했다.
“모르겠다고?”
“네. 진짜로.”
세아는 모래를 집었다. 그리고 흘렸다. 모래가 바람에 날렸다. 어디론가.
“너 돈이 필요해?”
“네.”
“얼마?”
세아는 계산했다. 도현이 학비. 엄마의 약값. 월세. 식비. 그 모든 것을 더했을 때 나오는 숫자.
“100만 원이면…”
“100만?”
강리우가 웃었다. 그것은 슬픈 웃음이었다. 아니, 웃음이 아니었다. 표정일 뿐이었다.
“아니에요. 더 많을 것 같아요.”
“얼마?”
“모르겠어요.”
세아가 또다시 그 말을 했다. 그것이 자신의 유일한 진실인 것 같았다. 모르겠다는 것. 확실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 모든 것이 흐릿하고 불분명하다는 것.
강리우는 자신의 핸드폰을 꺼냈다. 그리고 뭔가를 했다. 세아는 무엇을 하는지 봤다. 계좌 이체. 숫자들. 많은 숫자들.
“뭐 하시는 거예요?”
세아가 물었다.
“돈 보내는 중.”
“아니… 그냥…”
세아가 손을 들었다. 멈추라는 뜻으로.
“왜? 받지 마?”
“받을 수 없어요.”
세아의 목소리는 작았다.
“왜?”
“그럼 더 깊어질 것 같아요. 당신한테.”
그 말을 하는 순간, 세아는 자신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깨달았다. 그리고 강리우도 깨달았다. 그의 눈이 변했다. 마치 누군가가 그의 눈을 열어준 것처럼.
“너는 날…”
강리우가 말을 시작했다. 하지만 멈췄다. 말을 완성하지 못했다.
“뭐라고요?”
세아가 물었다.
“넌 날… 좋아하지 않아?”
그 질문은 이상했다. 왜 그렇게 물을까. 왜 그렇게 약한 목소리로.
“좋아하고 싫어하고의 문제가 아닌 것 같아요.”
세아가 대답했다.
“그럼 뭐야?”
“무서워요.”
세아가 말했다. 그것은 진실이었다. 자신의 가장 깊은 진실.
“나를?”
“아니요. 당신이 아니라… 저 자신을요. 당신이 저를 보면서 누군가를 본다는 게. 한준호라는 사람을. 그리고 그걸 구원하려고 한다는 게. 그게 무서워요.”
세아는 파도를 봤다. 파도는 여전히 밀려왔다. 나갔다. 멈추지 않았다.
“난 너한테 미안해. 정말로.”
강리우가 말했다.
“미안하다는 게 뭐예요?”
“너를 내 상처로 본 거. 내 죄책감으로 본 거. 너를 구원의 대상으로 본 거. 그게 미안해.”
강리우는 세아를 바라봤다. 정면으로. 도망치지 않으면서.
“그럼 지금은?”
세아가 물었다.
“지금은…”
강리우가 멈췄다. 오래 멈췄다.
“지금은 뭐예요?”
“지금은 너를 알고 싶어. 너라는 사람을. 내 상처 없이. 내 죄책감 없이. 그냥 너를. 그런데…”
강리우가 다시 멈췄다.
“근데?”
“그럴 수 있을지 모르겠어. 나는 이미 너를 그렇게 본 사람이니까. 그걸 없앨 수 없어.”
그 말을 들을 때, 세아는 무언가를 이해했다. 강리우가 무엇을 원하는지가 아니라, 강리우가 무엇을 두려워하는지.
“그래도 괜찮아요.”
세아가 말했다.
“괜찮아?”
“네. 당신이 제를 구원하려고 했어도, 제가 스스로 일어날 수 있으면 괜찮아요. 당신이 저를 한준호로 봤어도, 저는 나세아니까 괜찮아요. 당신의 죄책감이 제 삶을 지배하지 않으면 괜찮아요.”
강리우는 세아를 보았다. 오래 보았다. 마치 처음 보는 것처럼. 혹은 마지막 보는 것처럼.
“내가 너를 놓을 수 있을까?”
강리우가 물었다.
“뭐라고요?”
“내가 너를 놓을 수 있을까. 진짜로.”
세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것은 자신이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이었다. 그것은 강리우가 스스로 대답해야 하는 질문이었다.
강리우는 일어섰다. 그리고 해변을 걸었다. 혼자. 세아는 그를 따라가지 않았다. 그를 따라가는 것은 또 다른 종속이 될 것 같았다.
세아는 혼자 앉아 있었다. 모래 위에. 파도의 음성을 들으면서. 그리고 자신의 심장소리를 들으면서.
미안해. 강리우가 말했다.
미안하다는 건 뭘까. 세아는 생각했다. 미안하다는 건 뭘까. 진짜로.
그것은 후회일까. 아니면 그것은 변하려는 의지일까. 아니면 그것은 단순히 말일까. 말뿐인 미안함.
세아는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것이 맞는 것 같았다. 알 수 없는 것들. 그것이 세상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살아가는 방식이었다.
강리우는 멀어졌다. 작아졌다. 마침내 그는 파도 속으로 사라졌다. 아니, 사라진 것이 아니라 그냥 거리가 멀어진 것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보였다. 마치 사라진 것처럼.
세아의 핸드폰이 울렸다. 하늘이었다.
“여보세요?”
“세아 뭐해? 미쳤냐고?”
하늘의 목소리는 크고 급했다.
“여기 제주에 있어.”
세아가 말했다.
“제주? 뭐 하러?”
“모르겠어.”
세아가 대답했다.
“모르겠다고? 아 진짜. 그 강리우 남자한테 있지? 그 인간이랑?”
“네.”
“아 진짜 미쳤다. 세아야 들어 봐. 그 남자 아빠가 JYA 대표라는 거 알지?”
세아는 알고 있었다. 강리우가 말했다.
“그리고 그 회사가 박소진을 밀어주고 있다는 것도?”
“네. 알아요.”
“그리고 박소진이 너 곡을 했다는 것도?”
“알아요.”
세아가 모두 알고 있다고 대답했다.
“그럼 왜 여기 있어? 왜 그 남자하고 있어?”
하늘의 목소리는 더욱 높아졌다.
“모르겠어.”
세아가 또다시 그 말을 했다.
“모르겠다고? 진짜 한 번…”
하늘이 말을 멈췄다. 그리고 깊게 숨을 쉬었다.
“세아. 넌 지금 뭘 원해? 정말로.”
그 질문은 강리우가 했던 것과 같은 질문이었다. 하지만 다른 사람이 하니까 느낌이 달랐다.
“모르겠어.”
세아가 대답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조금 다른 톤이었다. 이번에는 진짜로 모른다는 것이 아니라, 모르고 싶다는 톤이었다.
“모르고 싶은 거야?”
하늘이 맞췄다.
“네.”
세아가 인정했다.
“왜?”
“알면 더 아플 것 같아서요.”
세아가 말했다. 그리고 그것은 진실이었다.
“알면 아프면… 모르면 살 수 있어?”
하늘이 물었다.
“네. 아마도.”
세아가 대답했다.
하늘은 한숨을 쉬었다. 긴 한숨. 세아는 그 한숨 안에 많은 것들이 들어 있다는 것을 느꼈다. 걱정. 화. 그리고 무언가 더. 무언가 더 깊은 것.
“내일 서울 와. 혼자. 그 남자 없이.”
“네.”
세아가 대답했다.
“약속해.”
“약속할게요.”
세아가 말했다.
통화가 끝났다. 세아는 핸드폰을 내려놨다. 그리고 다시 파도를 봤다. 파도는 여전히 밀려왔다. 나갔다.
강리우는 아직도 멀리 있었다. 아니, 돌아오고 있었다. 세아는 그를 봤다. 모래 위를 걸어오는 그. 그의 옷은 젖어 있었다. 파도에 잠겼던 것 같았다.
강리우는 세아의 옆에 앉았다. 말을 하지 않았다. 단지 앉았다. 세아도 말을 하지 않았다. 둘 다 파도를 봤다.
“난 너를 놓을 수 없을 것 같아.”
강리우가 마침내 말했다.
“알아요.”
세아가 대답했다.
“그래도 괜찮아?”
“아니요.”
세아가 솔직하게 대답했다.
강리우는 웃었다. 이번에는 슬픈 웃음이 아니었다. 진짜 웃음처럼 들렸다.
“넌 정직해.”
“네.”
세아가 대답했다.
“내일 서울로 가야 해?”
“네.”
“혼자?”
“네.”
세아가 다시 대답했다.
강리우는 자신의 손을 보았다. 손가락들. 여전히 떨리고 있었다. 하지만 어제보다는 적게. 마치 그것이 치유되는 것처럼. 혹은 단지 시간이 그것을 덮어버리는 것처럼.
“내가 너한테 해줄 수 있는 게 뭘까.”
강리우가 물었다.
“뭐도 안 해도 돼요.”
세아가 대답했다.
“뭐도 안 해?”
“네. 그냥 이대로만 있어주세요.”
세아가 말했다.
강리우는 세아의 손을 잡았다. 어제와는 다르게. 이번에는 구하는 손이 아니었다. 단순히 함께 있으려는 손이었다.
파도는 계속 밀려왔다. 나갔다. 그리고 다시 밀려올 것이었다. 그것은 끝나지 않을 것이었다. 그것이 바다였다.
그리고 세아는 생각했다. 자신도 바다처럼일 수도 있다는 것을. 끝나지 않는 것. 계속 흘러가는 것. 그리고 누군가를 삼킬 수 있는 것.
강리우가 자신을 놓을 수 없다면, 자신이 강리우를 놓아야 할 수도 있다. 그것이 사랑일 수도 있다. 혹은 그것이 생존일 수도 있다.
세아는 아직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것이 맞는 것 같았다.
화 끝
# 더 깊은 것
## 제1장
해가 중천에 떠 있을 때, 세아의 핸드폰이 울렸다.
화면에 떠오른 이름을 보는 순간, 그녀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엄마. 서울에 있는 엄마가 왜 이 시간에 전화를 할까. 세아는 한참을 고민했다. 받을까, 말까. 손가락이 화면 위에서 맴돌았다. 끝내 받기로 마음먹었다.
“여보세요?”
목소리는 조심스럽게 나왔다. 세아 자신도 자기가 얼마나 긴장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세아니? 엄마야.”
전화 너머로 들려오는 엄마의 목소리는 평소와 달랐다. 뭔가 다급했다. 아니, 슬펐다. 세아는 그 감정을 정확히 이름 붙일 수 없었지만, 그 목소리에는 분명히 눈물이 배어 있었다.
“네, 엄마. 어떻게 된 일이세요?”
세아는 침대에서 일어나 창문으로 향했다. 바깥은 회색이었다. 흐린 날씨. 마치 자신의 기분을 반영하듯이.
“너… 강리우 있니?”
그 순간, 세아의 몸이 경직되었다. 이름. 그 이름만으로도 가슴이 철렁했다. 강리우. 여전히 그렇게 힘이 있는 이름이었다. 세아는 깊게 숨을 쉬었다. 폐가 무거워지는 느낌. 마치 물에 잠기는 듯한 느낌이었다.
“네… 뭐 어렸어요?”
“그 남자… 너한테 뭐라고 했어?”
엄마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그리고 분노도 섞여 있었다. 세아는 이 목소리를 예전에 들은 것 같았다. 아버지에 대해 말할 때의 그런 목소리.
“엄마… 무슨 일 있으세요?”
“내일 서울 와. 혼자. 그 남자 없이.”
명령처럼 들렸다. 세아의 엄마는 거의 명령조로 말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선택의 여지가 없는 명령이었다.
세아는 한참을 말하지 못했다. 핸드폰을 들고 있는 손이 자꾸 떨렸다. 그녀는 자신이 뭔가를 놓쳐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뭔가 더 깊은 것. 눈에 보이지 않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그 무언가.
“네.”
결국 세아는 그렇게만 대답했다.
“약속해.”
“약속할게요.”
세아가 말했다. 자신의 목소리가 마치 다른 사람의 목소리처럼 들렸다.
통화가 끝났다. 엄마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전화를 끊었다. 세아는 핸드폰을 천천히 내려놨다. 손이 계속 떨리고 있었다.
그녀는 다시 창문으로 나갔다. 바다를 볼 수 있는 창문. 강리우가 묵고 있는 펜션은 바다와 가까웠다. 멀리서 파도 소리가 들렸다. 밀려왔다 나갔다를 반복하는 그 리듬. 그것은 마치 누군가의 숨소리처럼 들렸다.
_내일 서울로 가야 한다. 혼자. 강리우 없이._
세아는 그 명령을 되짚어 봤다. 엄마가 왜 그렇게까지 강하게 말했을까. 그 목소리에 섞여 있던 것은 분노인가, 두려움인가, 아니면 둘 다인가.
강리우와 자신의 관계를 엄마가 어떻게 알았을까. 세아는 지난 몇 주간의 일들을 떠올렸다. 강리우를 만났던 첫 날부터 시작해서. 그의 따뜻한 손. 그의 슬픈 눈. 그리고 그 아래 흐르는, 자신이 아직도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는 뭔가.
_뭔가 더 깊은 것._
그 생각이 자꾸만 떠올랐다.
## 제2장
오후 4시쯤 강리우는 돌아왔다.
세아는 펜션의 거실에서 책을 읽고 있었다. 하지만 책의 글자들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녀는 같은 문장을 세 번, 네 번 반복해서 읽고 있었다. 이해가 안 되는 것이 아니라, 읽을 마음이 없었다.
강리우가 들어올 때, 그녀는 책을 덮었다. 빠르게. 너무 빨리 덮어서 책갈피가 떨어졌다.
그는 젖어 있었다. 옷이 완전히 젖어 있었다. 모래도 몸에 붙어 있었다. 마치 파도에 잠겼다가 나온 사람처럼. 세아는 그를 보면서 뭔가 차가운 것이 척추를 타고 내려갔다.
“안녕. 내가 늦었나?”
강리우가 물었다. 그의 목소리는 평소처럼 부드러웠다. 하지만 그의 눈은 어딘가 멀리를 보고 있었다.
“아뇨. 괜찮아요.”
세아가 대답했다. 하지만 그녀의 목소리는 거짓으로 가득했다.
강리우는 세아 옆에 앉았다. 젖은 옷 그대로. 소파에 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옷 갈아입으세요.”
“나중에.”
그는 그렇게만 말했다.
두 사람은 말을 하지 않았다. 단지 앉아 있었다. 세아는 그의 프로필을 볼 수 있었다. 그의 옆얼굴. 그의 코. 그의 턱. 그리고 그의 눈. 그 눈에는 뭔가가 떠 있었다. 눈물인가, 아니면 단순히 바닷물인가.
“난 너를 놓을 수 없을 것 같아.”
강리우가 마침내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매우 조용했다. 마치 자신에게 말하는 것 같았다.
“알아요.”
세아가 대답했다.
“그래도 괜찮아?”
“아니요.”
세아가 솔직하게 대답했다. 그녀는 거짓말을 할 수 없었다. 특히 지금은 아니었다. 엄마의 전화 이후, 세아는 뭔가 명확한 것을 원하고 있었다. 진실. 솔직함. 그 어떤 것도 아닌 것들.
강리우는 웃었다. 그 웃음은 슬픈 웃음이 아니었다. 진짜 웃음이었다. 가슴에서 나오는 웃음.
“넌 정직해.”
“네.”
“그게 좋아.”
강리우가 말했다.
세아는 그의 옆에 앉아 있었다. 그들 사이의 거리는 10센티미터 정도였다. 충분히 가까워서 서로의 체온을 느낄 수 있는 거리. 그러나 동시에 충분히 멀어서 서로를 온전히 볼 수 있는 거리.
“내일 뭐 할 거야?”
강리우가 물었다.
“서울로 가야 해요. 엄마가…”
세아가 말을 멈췄다.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몰랐다.
“엄마가?”
“엄마가 저 혼자 가라고 하셨어요.”
세아가 말했다.
강리우는 그 말을 들으면서 무언가를 깨달은 듯했다. 그의 얼굴이 변했다. 무언가가 그의 얼굴을 지나갔다. 슬픔인가, 두려움인가, 아니면 인정인가.
“혼자?”
“네.”
“그 남자 없이? 내 없이?”
강리우가 물었다. 그리고 그 질문은 동시에 자신에게 던지는 질문이기도 했다.
“네.”
세아가 대답했다.
강리우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봤다. 손가락들. 그것들은 여전히 떨리고 있었다. 하지만 어제보다는 덜했다. 마치 무언가가 조금씩 치유되는 것처럼. 혹은 단지 시간이 그것을 덮어버리는 것처럼.
그는 자신의 손을 들었다. 그리고 세아를 바라봤다.
“내가 너한테 해줄 수 있는 게 뭘까.”
“뭐도 안 해도 돼요.”
세아가 대답했다.
“뭐도 안 해?”
“네. 그냥 이대로만 있어주세요.”
세아가 말했다. 그 순간 그녀의 목소리에는 간절함이 가득했다. 그것은 요청이 아니었다. 그것은 기도였다.
강리우는 세아의 손을 잡았다. 어제와는 다르게. 어제의 손은 구하는 손이었다. 도움을 청하는 손. 누군가를 붙잡으려는 손.
하지만 이번의 손은 달랐다. 이번 손은 단순히 함께 있으려는 손이었다. 무언가를 하기 위한 손이 아니라, 단지 존재하기 위한 손.
## 제3장
두 사람은 다시 해변으로 나갔다.
해는 이미 중천을 넘어가고 있었다. 오후 5시. 해변은 점점 비어가고 있었다. 저 멀리 몇 명의 사람들이 보였지만, 그들 주변에는 거의 아무도 없었다.
파도는 여전히 밀려왔다. 나갔다. 그리고 다시 밀려올 것이었다. 그것은 끝나지 않을 것이었다. 그것이 바다였다.
세아는 그 파도를 보면서 뭔가를 생각했다.
_나도 이런 건가._
그 생각이 자꾸만 떠올랐다. 자신도 바다처럼일 수도 있다는 것. 끝나지 않는 것. 계속 흘러가는 것. 그리고 누군가를 삼킬 수 있는 것.
강리우가 자신을 놓을 수 없다면, 자신이 강리우를 놓아야 할 수도 있다. 그것이 사랑일 수도 있다. 혹은 그것이 생존일 수도 있다.
세아는 모래 위에 앉았다. 강리우도 그녀의 옆에 앉았다.
“내일 몇 시에 가?”
“아침 일찍요. 9시 버스.”
“혼자?”
“네.”
“왜?”
강리우가 물었다. 그의 목소리에는 비난이 없었다. 단지 이해하려는 노력이 있었다.
세아는 한참을 생각했다.
“뭔가… 정리해야 할 것 같아요.”
“뭔가를?”
“마음. 아니면 그 이상의 것.”
세아가 말했다.
강리우는 그 말을 들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마치 자신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처럼.
“난 너를 잡아두고 싶어.”
강리우가 말했다.
“알아요.”
“근데 할 수 없어. 너를 잡아두면, 넌 죽을 거야. 혹은 나까지 같이 빠져 들어갈 거야.”
강리우가 말했다.
세아는 그 말을 들으면서 뭔가가 명확해졌다. 그것은 강리우도 알고 있다는 것. 자신과 그 사이의 거리. 그 거리의 필요성.
“강리우…”
세아가 그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했다.
“뭐?”
“나는 당신을 좋아해요.”
세아가 말했다.
“알아.”
“근데 이게… 이게 전부는 아닌 것 같아요.”
“알아.”
강리우가 또다시 말했다.
“뭐가 더 필요해?”
“모르겠어요.”
세아가 솔직하게 대답했다.
파도는 여전히 밀려왔다. 나갔다. 그것의 리듬은 변하지 않았다. 마치 세상의 모든 것이 변해도, 이것만은 변하지 않는다는 듯이.
강리우는 세아의 손을 더 세게 잡았다.
“내일 서울 가서… 뭐할 거야?”
“엄마 만나요. 그리고…”
세아가 말을 멈췄다.
“그리고?”
“생각해요. 나는 뭔가를 원하는지. 내가 지금 이 상황에서 뭘 원하는지.”
세아가 말했다.
“나?”
“그리고 당신도요.”
강리우는 미소지었다. 슬픈 미소였지만, 동시에 아름다운 미소였다.
“넌 우리가 어떻게 끝날 거라고 생각해?”
“모르겠어요.”
“아무도 모르겠지.”
강리우가 말했다.
그들은 다시 파도를 봤다. 해는 점점 낮아지고 있었다. 오후 6시. 해변의 온도가 떨어지고 있었다. 세아는 자신의 팔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강리우는 자신의 재킷을 벗어 세아에게 걸쳐 줬다.
“고마워요.”
“아니야.”
그렇게 그들은 해변에 앉아 있었다. 말 없이. 단지 파도를 보면서.
## 제4장
밤은 빠르게 내려왔다.
8시가 되자, 해변은 완전히 어두워졌다. 유일한 빛은 멀리 등대의 불과, 하늘의 달이었다. 그리고 그들의 핸드폰 화면.
강리우는 세아에게 밤하늘을 보라고 했다.
“별이 많아.”
세아가 말했다.
“응. 도시에서는 못 본다.”
강리우가 말했다.
“나 서울 가서 이런 별을 못 볼 거예요.”
세아가 말했다.
“그래. 서울은 밝으니까. 별이 안 보여.”
“그럼 당신은?”
“난 여기 있을 거야. 별을 봐야 하니까.”
강리우가 말했다.
그 말은 심플했지만, 그 안에는 많은 의미가 담겨 있었다. 세아는 그것을 알고 있었다.
“내일 몇 시까지 여기 있어요?”
“버스 시간까지.”
“9시 버스?”
“네.”
“그럼 우리 아침에 다시 만나?”
“네. 버스 타기 전에.”
세아가 말했다.
강리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뭐하고 싶어? 마지막으로.”
강리우가 물었다.
마지막. 그 단어가 세아의 심장을 철렁하게 했다. 정말 마지막일까. 아니면 단지 이 여행의 마지막일까. 아니면 무언가 더 큰 의미의 마지막일까.
“모르겠어요.”
세아가 대답했다.
“그럼 그냥 이렇게 있자. 별을 봐.”
강리우가 말했다.
그들은 해변에 누워서 별을 봤다. 모래는 차가웠다. 바다 내음이 세아의 코를 자극했다. 그것은 생명의 냄새였다. 동시에 죽음의 냄새였다.
“강리우…”
“응?”
“당신은 뭘 원해요?”
세아가 물었다.
강리우는 한참을 대답하지 않았다.
“난… 너를 행복하게 하고 싶어.”
“그건 불가능해요. 제가 당신을 행복하게 할 수 없는 것처럼.”
세아가 말했다.
“알아.”
강리우가 말했다.
“그럼?”
“그럼 뭐… 우리가 함께 있을 수 있는 시간이 있으면 좋을 것 같아. 그게 며칠이든, 몇 주든, 몇 달이든… 상관없어.”
강리우가 말했다.
세아는 그 말을 들으면서 눈물이 났다. 그녀는 왜 우는지도 잘 모르겠다. 슬픈가, 행복한가, 아니면 둘 다인가.
그들은 아무 말 없이 누워 있었다. 손을 잡고. 별을 보면서.
## 제5장
아침은 빠르게 왔다.
세아는 눈을 떴을 때, 강리우가 자신을 보고 있는 것을 느꼈다.
“안녕.”
그가 말했다.
“안녕하세요.”
세아가 대답했다. 그녀는 아직도 경어를 쓰고 있었다.
“남은 시간이 30분이야.”
강리우가 말했다.
“네.”
세아는 그 사실을 받아들였다.
그들은 펜션으로 돌아왔다. 세아는 짐을 챙겼다. 옷, 책, 그리고 강리우가 준 스카프. 그 스카프는 아직도 그의 향기를 지니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