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52화: 아버지의 침묵
오후 8시 43분. 세아는 여전히 캐리어 앞에 앉아 있었다.
휴대폰 화면이 계속 켜졌다 꺼졌다를 반복했다. 하늘에게서 온 세 번의 부재중 전화. 도현이에게서 온 카톡. “누나 뭐해? 학원 끝났는데 밥 뭐 사먹지?” 그리고 가장 최근 것은 어머니였다. 세아가 전화를 받지 않자 문자로 온 것. “밤 10시에 다시 전화할게. 밥 꼭 챙겨 먹어라.”
세아는 화면을 터치했다 놨다를 반복했다. 손이 떨렸다. 강리우처럼. 아니, 강리우와는 다른 종류의 떨림이었다. 강리우의 손은 트라우마가 만든 떨림이었다. 세아의 손은 공포가 만드는 떨림이었다.
휴대폰이 울렸다.
강리우였다. 화면에 그의 이름만 뜨고 아무 말도 없었다. 세아는 답답한 마음으로 수신 버튼을 눌렀다.
“응.”
그것이 세아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마치 자신의 목이 잠겨 있는 것처럼.
강리우도 몇 초간 말이 없었다. 그 침묵 속에서 세아는 배경음을 들었다. 자동차 소리. 아니면 건물의 복도인가. 딱딱한 신발 소리가 들렸다. 강리우가 어디론가 가고 있는 중이었다.
“내 아버지와 얘기했어.”
강리우의 목소리가 나왔다. 그 목소리는 평소처럼 부드럽지 않았다. 마치 누군가 그의 목을 조이고 있는 것처럼 긴장해 있었다.
“응.”
세아가 다시 말했다.
“회사를 나가는 게 결정됐어. 내일 아침에 공식 발표가 될 거야. 계약서를 쓰고 있는 중이야. 지금.”
세아는 강리우가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의 목소리로부터 그 장소가 어디인지 추측할 수 있었다. 차갑고, 형식적이고, 법적인 냄새가 나는 곳. JYA 본사. 아니면 변호사 사무실.
“너 정말…”
세아가 말을 시작했지만 끝내지 못했다.
“미쳤다는 거 알아. 근데 더 미친 일도 있어.”
강리우가 계속했다. “내 아버지가 너를 대하는 방식이 완전히 바뀌었어. 처음에는 너를 타깃으로 삼으려고 했는데, 지금은 다른 방식으로 접근하고 있어. 더 위험한 방식으로.”
세아의 심장이 철렁했다. 위험한 방식. 그 표현이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 뉘앙스만으로도 충분히 무섭다는 것을 세아는 알았다.
“무슨 말이야?”
“너한테 직접 얘기하고 싶은데… 이 전화로는 위험할 것 같아. 그래서 다른 방법으로 할 거야. 제주에 가. 지금 바로.”
“지금?”
“응. 공항가. 내가 티켓을 샀어. 너 이름으로. 인천공항에서. 지금 당장 나가.”
세아는 침대 위의 캐리어를 봤다. 반쯤 채워진 캐리어. 마치 이것이 일어날 것을 예상했던 것처럼.
“너는?”
“나는… 내일 아침에 나가. 아버지 일을 정리하고 나면.”
“정말?”
“응. 정말이야.”
강리우의 목소리에 뭔가 흔들리는 것이 있었다. 마치 자신의 결정이 확실하지 않은 것처럼. 하지만 세아는 그것이 불확실함이 아니라 분노라는 것을 알았다. 차분한 분노. 통제된 분노. 그래서 더 무서운 분노.
“비행기 몇 시야?”
“밤 10시 20분. 인천에서 제주로. 티켓 번호는 내가 문자로 보낼 거야. 체크인 시간이 한 시간 반 정도 남았으니까 지금 바로 나가.”
“도현이는?”
세아가 물었다.
“내가 알아봤어. 도현이는 학원 다음에 친구 집에서 숙제를 한다고 했어. 그러니까 지금 당장 나가도 괜찮아. 도현이한테는 내가 전화할 거야. 너 제주에 간다고.”
“뭐라고?”
“어차피 다 알게 될 거야. 빨리보다는 늦게가 나아. 그리고 너는 도현이한테 나중에 전화해. 제주에 가서. 괜찮다고. 모든 게 괜찮다고.”
“강리우, 뭐가…”
“지금은 물어보지 마. 지금 나가. 제주 가서. 거기서 내가 찾을 때까지 기다려.”
강리우가 전화를 끊었다. 아무런 작별 인사도 없이. 마치 자신이 말할 것을 다 말했고, 더 이상 할 말이 없는 것처럼.
세아는 휴대폰을 들었다 놨다를 반복했다. 손이 계속 떨렸다.
오후 8시 52분. 세아는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정신없이. 생각 없이. 자동으로. 마치 누군가 자신의 신경을 원격으로 조종하고 있는 것처럼. 옷, 세면도구, 충전기, 신분증. 무엇을 가져가야 하고 무엇을 남겨야 하는지는 고려하지 않았다. 그냥 손에 잡히는 것을 집어넣었다.
장판이가 세아를 봤다. 고양이의 눈은 여전히 매우 똑똑했다. 마치 자신의 주인이 지금 뭔가 중대한 실수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처럼.
“미안해, 판이. 내일은 못 봐.”
세아가 중얼거렸다. 고양이에게 밥과 물을 다시 채워줬다. 냉장고에 남은 음식도 꺼냈다. 고양이가 하루 이틀 정도는 버틸 수 있도록. 세아는 이웃 방의 할머니가 고양이 상태를 봐주길 바랐다. 할머니는 착한 사람이었다. 말은 많지 않지만, 행동은 빠른 사람이었다.
오후 9시 08분. 세아의 휴대폰에 카톡이 왔다. 강리우였다.
“비행기 번호: KE1847. 탑승권은 휴대폰으로 받을 수 있어. 인천공항 제2터미널. 출발: 22시 20분.”
그리고 몇 초 후, 또 다른 메시지가 왔다.
“너를 미안해. 정말로. 이 모든 게 내 책임이야. 다 끝나면 다시 시작하자. 제대로.”
세아는 회신을 하지 않았다. 뭐라고 회신해야 할지 몰랐다. “미안하지 않아요”, “당신 때문이 아니에요”, “괜찮아요” — 이 모든 것이 거짓말처럼 느껴졌다.
세아는 캐리어를 들었다. 생각보다 무거웠다. 하지만 그 무거움이 현실적이었다. 마치 자신의 결정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증거처럼.
오후 9시 23분. 세아는 고시원을 나왔다.
합정동의 밤거리는 조용했다. 낮에는 바쁜 거리였지만, 밤이 되면 마치 다른 세계가 되는 것처럼 느껴졌다. 소수의 사람들만 다니고, 편의점의 불빛이 거리의 유일한 불이 되는. 세아는 그 불빛을 피해서 걸었다.
택시를 잡기 위해 큰 도로로 나갔다. 밤 9시 반이 넘은 시간이었지만, 택시는 충분했다. 서울은 밤이 되어야 깨어나는 도시였다.
“인천공항 제2터미널.”
세아가 택시 기사에게 말했다. 기사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그냥 고개를 끄덕이고 차를 출발시켰다.
인천공항 가는 길은 길었다. 고가도로를 따라 한강을 건넜다. 밤의 한강은 낮의 한강과는 완전히 달랐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단지 검은 수면이 있을 뿐이었다. 마치 강이 아니라 거대한 입처럼. 세아는 그 검은 입이 자신을 집어삼킬 것 같은 두려움을 느꼈다.
오후 10시 05분. 택시가 인천공항에 도착했다.
세아는 요금을 냈다. 그리고 캐리어를 들고 터미널 안으로 들어갔다. 밤 10시가 넘은 시간이었지만, 공항은 여전히 사람들로 가득했다. 출장객들, 여행객들, 배웅 오는 사람들. 모두가 자신의 목적지를 향해 움직이고 있었다.
세아는 전자 키오스크 앞에 섰다. 강리우가 말한 대로, 휴대폰으로 탑승권을 받을 수 있었다. KE1847. 인천에서 제주로. 출발 22시 20분.
체크인 카운터는 한산했다. 세아는 짐을 맡겼다. 그 과정은 기계적이었다. 여권을 제시하고, 짐을 올리고, 탑승권을 받는다. 모든 것이 이미 정해진 순서였다.
보안 검사를 통과한 후, 세아는 탑승 대기실로 들어갔다.
게이트 B23. 거기가 세아가 가야 할 곳이었다. 아직 30분이 남았다. 세아는 의자에 앉았다. 주변 사람들은 휴대폰을 하거나 신문을 읽거나 졸고 있었다. 세아만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냥 앉아 있었다. 마치 자신의 몸만 여기에 있고, 영혼은 어디론가 날아가 버린 것처럼.
오후 10시 18분. 세아의 휴대폰이 울렸다.
도현이였다. 세아는 전화를 받았다.
“누나?”
도현이의 목소리는 혼란스러웠다. “강리우 형이 전화했어. 누나가 제주에 간다고? 뭔가 있어?”
세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랐다.
“누나, 뭐가 있어? 진짜로. 너 목소리 이상한데.”
“괜찮아. 정말로. 엄마가 제주에 오라고 했어. 그래서 가는 거야.”
거짓말이었다. 하지만 거짓말처럼 들리지 않는 거짓말이었다. 왜냐하면 엄마가 정말로 제주에 오라고 했으니까. 그 이유만 다를 뿐이었다.
“얼마나 있어?”
“3일 정도? 아니면 일주일?”
세아도 정확하게 알 수 없었다. 강리우가 “내가 찾을 때까지”라고 했지만, 그게 정확히 얼마나 걸릴지는 알 수 없었다.
“학교는?”
“빠지고 가.”
“뭐? 그래도 돼?”
“응. 괜찮아.”
도현이는 침묵했다. 그리고 몇 초 후에 말했다.
“누나, 너 진짜 괜찮아? 강리우 형도 이상하던데. 목소리가 뭔가 떨렸어.”
“응. 진짜 괜찮아. 너는 학원 끝나고 집에 가. 밥은 편의점에서 사 먹고. 그리고 내일 아침에 엄마한테 전화해.”
“뭐라고 말해?”
“그냥 내가 제주에 간다고. 엄마가 이미 알고 있을 거야.”
다시 거짓말이었다. 어머니는 모를 것이었다. 하지만 세아는 어머니가 알 것이라고 믿고 싶었다. 어떻게든.
전화를 끝낸 후, 세아는 휴대폰을 내려놨다.
오후 10시 47분. 탑승 시간이 가까워졌다.
세아는 게이트로 향했다. 줄이 길지 않았다. 세아는 탑승권을 제시했다. 스캔되었다. 그리고 세아는 비행기 통로로 들어갔다.
비행기 안은 밝았다. 형광등이 모든 것을 비추고 있었다. 마치 강리우가 말한 편의점의 불빛처럼. 세아는 자신의 자리를 찾았다. 윈도우 시트. 창밖을 볼 수 있는 자리였다.
창밖에는 검은 밤하늘만 있었다. 별도 보이지 않았다. 구름 때문인지, 아니면 공항의 불빛 때문인지 세아는 알 수 없었다.
오후 10시 52분. 비행기의 문이 닫혔다.
승무원들이 안전 수칙을 설명했다. 세아는 듣지 않았다. 마치 자신의 귀도 문을 닫은 것처럼.
오후 11시 03분. 비행기가 활주로로 움직였다.
그리고 오후 11시 21분. 비행기가 이륙했다.
세아는 창밖을 봤다. 서울이 점점 작아지고 있었다. 불빛들이 점처럼 흩어져 있었다. 마치 누군가 거기에 불을 켜두고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하지만 세아는 그 불빛들이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그 불빛들은 다른 누군가를 위한 것이었다.
서울은 점점 멀어졌다. 그리고 마침내, 검은 밤하늘만 남았다.
비행기 안의 형광등이 끝내 꺼졌다. 조명을 낮추는 시간이 된 것이었다. 모두가 자신의 자리에서 눈을 감기 시작했다. 하지만 세아는 눈을 감지 않았다. 그냥 창밖의 검은 하늘을 봤다.
검은 하늘 속에서, 혼자.
비행기가 제주 상공에 도착한 것은 밤중이었다. 정확한 시간은 오전 12시 47분이었다.
세아는 여전히 창밖을 보고 있었다. 이제 검은 하늘 대신 불빛들이 보였다. 제주의 불빛. 낯설고, 낯아프고, 그리고 어딘가 집처럼 느껴지는 불빛.
비행기가 천천히 내려앉았다. 착지할 때의 충격. 그 충격이 세아의 몸을 흔들었다. 마치 세아가 마침내 현실로 돌아왔다는 신호처럼.
세아는 짐을 찾았다. 그리고 공항 밖으로 나갔다.
제주의 밤공기가 세아의 얼굴을 때렸다. 따뜻했다. 서울의 공기와는 다른 종류의 따뜻함이었다. 소금 냄새가 섞여 있었다. 해변의 냄새. 어머니의 냄새.
세아는 휴대폰을 켰다.
강리우로부터 온 메시지가 있었다. 시간은 오전 12시 32분이었다. 아마 비행기가 착지하기 직전에 온 메시지였을 것이었다.
“제주 도착했어? 제주 공항 출구에서 나가. 거기 앞에 빨간 차가 있을 거야. 운전기사가 너를 기다리고 있어. 그 사람을 따라가. 주소는 알려줄 수 없어. 아직은. 안전 때문에.”
그리고 그 아래에 또 다른 메시지가 있었다.
“내 아버지가 너를 찾으려고 할 거야. 절대 아무 정보도 주지 마. 알겠지?”
세아는 그 메시지를 읽었다. 읽고 또 읽었다. 마치 그 문장들이 다른 의미로 변할 것 같은 마음으로.
세아는 공항 출구로 나갔다.
밤중이었지만, 공항 앞은 여전히 사람들로 가득했다. 택시 기사들, 택시를 기다리는 사람들, 짐을 든 여행객들. 세아는 그 사람들 사이에서 빨간 차를 찾았다.
빨간 차가 있었다. 그리고 차 옆에는 중년의 남자가 서 있었다. 그는 무언가를 기다리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세아가 그에게 다가갔다.
“나세아씨?”
남자가 물었다.
세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차를 탑시다. 시간이 좀 걸릴 겁니다.”
남자가 말했다. 그리고 세아의 캐리어를 받아서 트렁크에 넣었다.
세아는 차에 탔다. 뒷좌석에. 앞좌석에는 운전기사만 있었다. 강리우는 없었다.
차가 출발했다. 제주의 밤 도로를 따라. 목적지를 향해.
세아는 창밖을 봤다. 제주의 불빛들이 흘러가고 있었다. 마치 자신이 아니라 세상이 움직이고 있는 것처럼.
그리고 세아는 생각했다.
이제 뭐가 될까. 강리우는 어디에 있을까. 강리우의 아버지는 뭘 할까. 그리고 나는.
세아는 손을 들었다. 손이 떨리고 있었다.
강리우의 손처럼.
# 확장된 화: 검은 하늘에서 빨간 차까지
## 1부: 밤하늘 아래의 고독
시간이 된 것이었다.
객실 조명이 천천히 꺼지면서 승무원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편안한 휴식을 위해 조명을 낮추겠습니다. 필요하신 것이 있으시면 언제든지 호출 버튼을 눌러주세요.” 그 말과 함께 비행기 내부는 어둠으로 물들어갔다.
모두가 자신의 자리에서 눈을 감기 시작했다.
세아의 옆자리에 앉은 중년 여성은 이미 눈을 감은 지 오래였다. 그녀의 머리는 창문 쪽으로 기울어져 있었고, 가끔씩 입에서 나오는 코골음이 세아의 귀를 자극했다. 앞자리의 젊은 남자는 항공사 제공 베개를 목 뒤에 받쳐두고 이미 깊은 수면 속으로 빠져들었다. 뒷자리에서는 아이들의 작은 숨소리가 들렸고, 통로 건너편에서는 누군가 영화를 보고 있었는지 헤드폰에서 희미한 음성이 들렸다.
평화로운 밤. 정상적인 밤.
하지만 세아는 눈을 감지 않았다.
그냥 창밖의 검은 하늘을 봤다.
비행기가 33,000피트 상공에서 날고 있었다. 그 높이에서는 지상의 어떤 불빛도 보이지 않았다. 오직 검은 것뿐이었다. 끝없는, 무한한 검은색. 마치 우주의 일부가 지구 주위를 감싸고 있는 것처럼.
세아의 이마가 차가운 창문에 닿았다. 비행기의 고도 때문에 창밖의 온도는 영하 50도를 넘어섰을 것이다. 그 차가움이 세아의 피부를 통해 뇌까지 전달되었다. 세아는 눈을 깜빡였다. 마치 그 차가움이 자신의 생각을 명확하게 해줄 것처럼.
*검은 하늘 속에서, 혼자.*
그 생각은 마치 누군가 다른 사람의 목소리로 세아의 머릿속에 울려 퍼지는 것 같았다. 세아는 자신의 양손을 들어올렸다. 손가락들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언제부터였을까. 강리우를 만나기 전부터였을까, 아니면 강리우에게서 그 문자를 받은 후부터였을까.
“세아.”
옆자리의 여성이 자는 사이, 세아는 자신의 이름을 입으로만 중얼거렸다. 음성을 내지 않고, 입술만 움직였다. 마치 그렇게 하면 자신이 더 이상 이 비행기에 존재하지 않을 것 같은 마음으로.
나세아. 26세. 회사원. 이틀 전까지만 해도 서울 강남구에 있는 작은 사무실에서 스프레드시트를 들여다보고 있던 평범한 직장인. 그런데 지금 나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창밖의 검은색은 여전히 변하지 않았다. 움직이지도, 변하지도 않는 절대적인 검은색. 세아는 그 검은색 속에서 자신의 모습을 찾으려고 했다. 창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이 희미하게 보였다. 눈이 크고, 입이 굳게 다물어져 있는 얼굴. 낯선 얼굴. 마치 자신이 아닌 다른 누군가의 얼굴처럼.
*강리우. 지금 어디에 있어?*
세아의 핸드폰은 기내 모드로 켜져 있었다. 강리우의 마지막 메시지는 서울을 출발하기 2시간 전에 도착했었다. “비행기 타기 전에 이 메시지를 삭제해. 그리고 절대 아무도 말하지 마. 알겠지?” 세아는 그 메시지를 읽고 즉시 삭제했다. 하지만 그 메시지의 내용은 자신의 뇌에 영구적으로 각인되어 있었다.
*내 아버지가 날 찾으려고 할 거야.*
강리우가 말했던 그 말들이 계속 맴돌았다. 강리우의 아버지. 강리우는 자신의 아버지에 대해 거의 말하지 않았다. 다만, 그의 눈에 나타나는 공포와 분노의 감정으로 보아 그것이 단순한 가정불화 이상의 무언가라는 것을 세아는 알 수 있었다.
“미스, 물 필요하세요?”
승무원의 목소리가 세아를 현실로 돌아오게 했다. 세아는 놀라며 고개를 들었다. 젊은 여성 승무원이 웃으며 서 있었다. 그녀의 유니폼은 하얀색과 파란색이 섞여 있었고, 이름표에는 ‘김민지’라고 쓰여 있었다.
“네, 물 주세요.”
세아의 목소리가 나왔다. 자신의 목소리인지 확신할 수 없었지만, 어쨌든 그것이 나왔고, 승무원은 웃으며 물을 건네주었다. 세아는 물을 마셨다. 찬 물이 목을 통해 내려갔다. 그 감각이 세아를 조금 더 현실에 붙들어 놓았다.
“편한 비행 되세요.”
승무원이 떠나갔다. 그리고 다시, 세아는 혼자였다.
검은 하늘과 함께.
시간은 오전 12시 15분이었다. 서울 시간으로는 오전 12시 15분이었지만, 세아의 내부 시간으로는 이미 밤이 깊었다. 언제 마지막으로 제대로 잤을까. 이틀 전? 아니, 그 이전? 강리우를 만나던 날 밤, 서울의 어느 카페에서 그녀는 밤을 새웠었다. 강리우의 손을 잡고, 강리우의 떠는 목소리를 들으며.
“넌 제주로 가야 해. 지금 바로.”
그때 강리우의 얼굴은 창백했다. 마치 유령처럼. 세아는 강리우의 손을 더 세게 잡았다. 그 손도 떨리고 있었다. 강리우는 자신의 아버지로부터 도망치고 있었다. 그리고 세아를 자신과 함께 도망치게 하려고 했다.
*이게 맞는 일일까?*
세아는 다시 창밖을 봤다. 검은 하늘은 여전했다.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 오직 비행기만 계속 움직이고 있었다. 세아를 제주도를 향해 날라가고 있었다.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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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부: 착지
비행기가 제주 상공에 도착한 것은 밤중이었다.
정확한 시간은 오전 12시 47분이었다.
조종사의 목소리가 스피커를 통해 울려 퍼졌다. “승객 여러분, 제주국제공항 상공에 진입했습니다. 현재 날씨는 맑으며, 기온은 24도입니다. 곧 착륙할 예정이니 안전벨트를 꽉 매주시기 바랍니다.” 그 목소리는 전문적이고 평온했다. 마치 이것이 일상의 일부인 것처럼.
그러나 세아에게는 이것이 일상이 아니었다.
세아의 심장 박동이 빨라졌다. 옆자리의 중년 여성이 눈을 떴다. 여성은 하품을 했고, 자신의 시계를 봤다. 그리고 다시 눈을 감았다. 마치 이 시간, 이 상황이 그녀에게는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하지만 세아는 눈을 떴다. 더 정확히는, 세아는 애초부터 눈을 감지 않았다.
세아는 여전히 창밖을 보고 있었다. 이제 검은 하늘 대신 불빛들이 보였다. 제주의 불빛. 낯설고, 낯아프고, 그리고 어딘가 집처럼 느껴지는 불빛.
제주. 세아는 어렸을 때 여름방학마다 여기 왔었다. 어머니가 살아있을 때. 어머니는 제주 출신이었다. 서울에서 아버지를 만나기 전까지 제주에서 살고 있었다. 그리고 세아가 태어난 후, 어머니는 서울로 왔다. 그 후로 15년이 지났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지 15년이 지났다.
*엄마, 나 이제 집으로 가는 거야.*
세아의 눈가가 뜨거워졌다. 하지만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마치 그것도 감정과 함께 누군가에게 빼앗겨버린 것처럼.
비행기가 고도를 내리기 시작했다. 기압의 변화로 세아의 귀가 먹먹해졌다. 세아는 하품을 했다. 귀가 팍 하고 터지는 느낌이 들었다. 다시 정상으로 돌아왔다. 마치 자신도 곧 정상으로 돌아올 것처럼.
제주의 불빛들이 점점 더 가까워졌다. 세아는 불빛들의 패턴을 분석하려고 했다. 어디가 도시의 중심부인지, 어디가 해변인지. 어렸을 때 엄마와 함께 갔던 곳들을 찾으려고 했다. 하지만 15년이라는 시간은 너무 길었다. 세아의 기억 속의 제주와 지금의 제주가 일치하지 않았다.
*아무것도 변하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데, 모든 게 달라졌다.*
비행기가 더 내려앉았다. 이제 활주로가 보였다. 긴 조명 줄이 비행기를 안내하고 있었다. 마치 길을 잃은 아이를 집으로 데려가는 엄마의 손처럼.
옆자리의 여성이 다시 움직였다. 여성은 창밖을 봤고, 활주로를 본 것 같았다. 그녀는 옷을 정리했다. 곧 내려야 한다는 신호였다.
비행기가 거의 활주로에 닿아 있었다.
“착지 준비 완료,” 조종사가 말했다. “안전벨트를 확인해주세요.”
세아는 안전벨트를 확인했다. 단단히 조여져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이 왔다.
**충격.**
비행기의 바퀴가 활주로에 닿는 순간, 엄청난 충격이 세아의 몸을 관통했다. 비행기 전체가 흔들렸다. 마치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처럼, 아니 사실 그것이 맞다면, 활주로에 박혀 박살나는 것처럼.
세아는 숨을 쉬지 못했다.
그 충격 속에서, 세아는 자신의 모든 것이 흔들리는 것을 느꼈다. 뼈, 근육, 내장, 그리고 영혼. 모든 것이 제 자리를 떠났다가, 다시 돌아왔다. 마치 세아가 마침내 현실로 돌아왔다는 신호처럼.
비행기가 활주로 위에서 천천히 속도를 줄였다. 휠이 타이어를 불태우는 냄새가 기내에 약간 들어왔다. 하지만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모두가 이것이 정상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으니까.
“제주국제공항에 안전하게 도착했습니다.”
조종사가 다시 말했다. “탑승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마침내,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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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부: 공항
게이트에서 내려 터미널을 걸어가는 동안, 세아는 자신의 다리가 제대로 움직이고 있는지 확실하지 않았다. 3시간의 비행은 세아의 몸을 기계처럼 만들어버렸다. 움직이지만 살아있는 느낌이 없는, 그런 기계.
세아는 짐을 찾으러 짐 수취소로 갔다.
회전하는 컨베이어 벨트 위에는 수십 개의 수하물이 있었다. 검은색, 회색, 파란색. 모두 비슷하게 생겼다. 마치 이 공항에 오는 모든 사람들의 인생이 비슷하게 생긴 것처럼.
세아의 캐리어가 나타났다. 빨간색. 군중 속에서 가장 눈에 띄는 색. 세아는 그것을 집어 들었다. 무거웠다. 3일치의 옷과 물품들이 들어있었다. 3일이면 충분할 줄 알았다. 하지만 지금 세아는 그것이 충분하지 않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공항 밖으로 나갔다.
제주의 밤공기가 세아의 얼굴을 때렸다.
따뜻했다.
서울의 공기와는 다른 종류의 따뜻함이었다. 서울의 공기는 건조했다. 콘크리트와 자동차 배기가스의 냄새가 배어있었다. 그러나 제주의 공기는 축축했다. 그리고.
소금 냄새가 섞여 있었다.
해변의 냄새. 세아는 그 냄새를 마셨다. 깊게, 아주 깊게. 마치 그 냄새가 자신의 폐를 채우고 몸 전체에 퍼져야 한다는 강박관념처럼.
어머니의 냄새.
어렸을 때, 어머니는 항상 소금 냄새가 났다. 어머니는 자신이 제주 사람이라는 것이 자랑스러웠다. 자주 제주 이야기를 했고, 제주 방언을 썼다. 아버지는 그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한국말을 제대로 해야지, 왜 방언을 써?”라고 자주 말했다. 그 말을 들을 때마다 어머니의 표정이 흐려졌다.
*엄마, 난 지금 여기야. 제주에 있어.*
세아는 휴대폰을 켰다.
기내 모드를 해제했다. 신호가 들어왔다. 4G. 강한 신호. 현실로 돌아왔다는 신호.
메시지가 있었다.
강리우로부터 온 메시지가 있었다.
시간은 오전 12시 32분이었다. 아마 비행기가 착지하기 직전에 온 메시지였을 것이었다. 세아는 그 메시지를 읽었다.
“제주 도착했어? 제주 공항 출구에서 나가. 거기 앞에 빨간 차가 있을 거야. 운전기사가 너를 기다리고 있어. 그 사람을 따라가. 주소는 알려줄 수 없어. 아직은. 안전 때문에.”
강리우의 목소리가 들렸다. 서툰, 떨리는 목소리. 세아는 강리우를 만나던 날 밤을 다시 생각했다. 강리우의 손이 세아의 손을 쥐고 있었다. 그 손도 떨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아래에 또 다른 메시지가 있었다.
“내 아버지가 너를 찾으려고 할 거야. 절대 아무 정보도 주지 마. 알겠지?”
세아는 그 메시지를 읽었다. 읽고 또 읽었다. 마치 그 문장들이 다른 의미로 변할 것 같은 마음으로. 하지만 문장들은 변하지 않았다. 절대 아무 정보도 주지 마. 그 말이 무슨 의미일까. 강리우의 아버지가 얼마나 위험한 사람일까.
세아는 공항 출구로 나갔다.
밤중이었지만, 공항 앞은 여전히 사람들로 가득했다.
택시 기사들이 손에 종이 팻말을 들고 서 있었다. “Kim”, “Park”, “Lee”.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택시를 기다리는 사람들. 짐을 든 여행객들. 누군가의 부모를 반기는 아이들. 모두가 누군가를 만나기 위해 이곳에 있었다.
세아도 누군가를 만나기 위해 이곳에 있었다.
강리우를. 아니, 강리우의 운전기사를.
세아는 공항 앞 주차장을 살펴봤다. 빨간 차. 강리우가 말한 빨간 차.
거기 있었다.
눈에 띄는 빨간색의 현대 제네시스. 고급 차였다. 강리우의 부유함을 드러내는 차였다. 아니, 강리우의 아버지의 부유함을 드러내는 차였다.
그리고 차 옆에는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