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아닌 것을 위해 불탄 소녀 – 제51화: 제주행 비행기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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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51화: 제주행 비행기표

하늘의 카톡은 계속 왔다.

“야 근데 너 왜 안 봐? 진짜로 뭐 해?”

“오늘 편의점 쉬는 거 맞지?”

“아 진짜 신경 쓰이네. 너 요즘 이상해.”

“답장 좀 해 미친놈.”

세아는 휴대폰을 들었다 놨다를 반복했다. 손가락이 화면을 터치하려다 멈췄다. 뭐라고 말해야 할까. 강리우가 회사를 나간다고? 제주로 가야 한다고? 모든 게 끝난다고? 그런 말들을 하늘에게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자신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오후 3시 12분.

세아는 침대에서 일어났다. 움직임이 기계적이었다. 마치 누군가 자신의 팔다리를 조종하고 있는 것처럼. 옷장을 열었다. 옷이 별로 없었다. 편의점 유니폼 3벌, 검은색 청바지 2개, 회색 티셔츠 몇 개, 그리고 라이브 클럽 무대에 올랐을 때 입던 검은 드레스 하나. 그것이 전부였다.

3일 분.

강리우가 말한 ‘3일 분’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세아는 알 수 없었다. 옷 3일치? 돈 3일치? 아니면 그냥 제주라는 곳에서 3일을 버티기 위한 모든 것?

세아는 작은 캐리어를 꺼냈다. 여행용으로는 너무 낡았지만, 없는 것보다는 낫다고 생각했다. 옷을 집어넣기 시작했다. 기계적으로. 생각하지 않으면서.

휴대폰이 울렸다. 전화였다. 하늘에게서.

“뭐 해? 답장 안 해?”

세아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그냥 계속 옷을 집어넣었다. 한 번, 두 번, 세 번. 하늘의 전화는 세 번 울렸다. 그리고 멈췄다.

몇 초 후 카톡이 왔다.

“아 진짜. 뭐하는 거야? 전화 받아.”

세아는 회신했다.

“지금 좀 바빠. 나중에 전화할게.”

회신을 보내고 나서, 세아는 자신이 거짓말을 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바쁜 것이 아니었다. 단지 말할 수 없는 것이었다. 하늘이 물으면 자신이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모르는 것이었다.

오후 4시 30분.

세아는 세탁소에서 교복을 찾아왔다. 고등학교 때 입던 교복. 동생 도현이의 교복. 세아가 가져온 이유는 단순했다. 제주에 간다는 것을 어머니에게 말하기 위해서였다. 도현이의 학교 때문에. “학교 수학여행이야”라고 말하려고 했다. 거짓말이었다. 하지만 더 쉬운 거짓말이었다.

그런데 도현이의 교복을 만지면서, 세아는 갑자기 현실의 무게를 느꼈다. 도현이. 어머니. 편의점 알바. 계약금 250만 원으로 사준 엄마 약. 모든 것들이 세아의 어깨에 눌렸다.

세아는 교복을 캐리어에 넣지 않았다. 대신 침대 위에 올려놨다. 바라봤다. 그 교복이 자신의 책임을 상징하는 것처럼 보였다.

오후 5시 15분.

휴대폰이 울렸다. 이번엔 어머니였다. 제주에 있는 어머니. 세아는 전화를 받았다.

“엄마.”

“응. 밥 먹었어?”

“응.”

“거짓말. 넌 항상 거짓말해. 밥 먹고 전화 받아.”

세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어머니가 계속했다.

“도현이가 말했어. 넌 요즘 일을 좀 많이 한다고? 괜찮아? 너 몸 조심해.”

“응. 괜찮아.”

또 거짓말이었다. 세아는 자신이 거짓말을 얼마나 많이 했는지 깨달았다. 어머니에게, 도현이에게, 하늘에게. 그리고 가장 많이는 자신에게.

“제주 한 번 내려와. 오래됐다. 너 제주 들어온 지 벌써 6년이야.”

“응. 알았어. 곧 내려갈게.”

“진짜?”

“응. 진짜야.”

이번엔 거짓말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 진실이 어머니를 안심시킬지 아니면 더 걱정하게 만들지, 세아는 알 수 없었다.

통화가 끝난 후, 세아는 다시 캐리어 앞에 앉았다. 손가락이 떨렸다. 아, 이것도 강리우 때문인가. 강리우의 손처럼, 세아의 손도 이제 떨리는 건가. 하지만 세아의 손은 피아노 때문이 아니었다. 두려움 때문이었다.

오후 6시 40분.

세아는 편의점 알바 담당 매니저에게 카톡을 했다. 제목: “급한 일이 생겨서 내일부터 한 주일 정도 못 나올 것 같습니다.”

회신은 5분 후에 왔다. “확인했습니다. 건강 조심하세요.”

그것이 전부였다. 세아는 그 편의점에서 8개월을 일했다. 매일 밤 11시부터 아침 8시까지. 때론 시프트 추가로 더 길게. 하지만 그 누구도 세아의 이름을 정확히 알지 못했다. “편의점 아가씨”였다. 그리고 이제 세아는 그곳에서 사라지고 있었다. 아무도 신경 쓰지 않을 정도로 조용하게.

오후 7시 20분.

하늘이 다시 전화를 했다.

“야. 뭐 하는 거야?”

“뭐라고 말해야 할까.”

세아는 처음으로 진실을 말했다.

“뭔데?”

“…좀 이상한 일이 생겼어.”

침묵이 있었다. 오래 있었다. 그리고 하늘이 물었다.

“강리우?”

세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침묵이 바로 대답이었다.

“아 진짜. 내가 뭐라고 했어. 그 인간 위험하다고.”

“위험한 거 아니야.”

“그럼 뭔데?”

세아는 자신의 손을 봤다. 여전히 떨리고 있었다.

“복잡해.”

“복잡한 게 뭐야. 설명해봐.”

“…지금은 못 해. 나중에 말해줄게.”

“나중? 언제?”

“제주에서.”

침묵이 있었다. 더 길게. 하늘의 목소리가 나왔을 때, 그것은 다른 톤이었다.

“넌 제주 가?”

“응.”

“강리우랑?”

“응.”

“언제?”

“내일 아침 8시 40분.”

또 침묵이 있었다. 이번엔 아주 길었다. 세아는 하늘이 자신을 포기한 건 아닌지 생각했다. 한국 웹소설에서 그런 순간이 있지 않은가. 친구가 침묵하고, 그 침묵이 끝나면 모든 것이 끝난다는 것.

하지만 하늘의 목소리가 나왔다.

“3일?”

“응. 강리우가 3일 분을 준비하라고 했어.”

“3일이 뭐야?”

“…모르겠어.”

또 침묵이 있었다. 그리고 하늘이 웃음을 터뜨렸다. 정말 웃음이었다. 세아는 몇 년 만에 하늘의 그런 웃음을 들었다. 진정한 웃음. 포기한 웃음.

“아 진짜. 넌 정신 좀 차려. 3일이 뭐야, 진짜. 너 지금 뭐 하는 거야?”

“모르겠어.”

“응. 넌 항상 몰라. 그래서 내가 항상 봐주는 거고.”

하늘의 목소리가 부드러워졌다. 화난 톤에서 걱정하는 톤으로 바뀌었다.

“제주 가서 뭐 할 거야?”

“…모르겠어. 강리우가 제주에서 말해줄 거라고 했어.”

“말이 안 돼. 아무것도 말이 안 돼. 그런데 넌 가?”

“응.”

“왜?”

이번엔 세아가 침묵했다. 왜 가는가. 그것은 좋은 질문이었다. 세아는 자신이 왜 가는지 알아야 했다. 강리우가 시켜서? 아니었다. 강리우는 제주를 제안했을 뿐, 강요하지 않았다. 그럼 어머니 때문에? 제주는 세아의 고향이었다. 하지만 6년 만에 돌아가는 것이 그 정도로 강력한 이유는 아니었다.

세아는 자신의 방을 봤다. 6평짜리 반지하. 습기 찬 천장. 창가의 작은 고양이 집. 그리고 자신의 손. 여전히 떨리는 손.

“…모르겠어. 그냥 가야 할 것 같아.”

하늘이 한숨을 쉬었다. 깊은 한숨이었다.

“좋아. 가. 그런데 제주 가서 정신 차려. 강리우 좋다고 자기 다 버리지 말고. 넌 혼자야. 기억해. 넌 혼자야.”

“응.”

“그리고 나한테 매일 연락해. 최소한 사진 하나씩이라도.”

“응.”

“진짜야?”

“진짜야.”

하늘이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그냥 전화를 끊었다. 세아는 한동안 휴대폰을 들고만 있었다.

오후 8시 15분.

세아는 도현이에게 카톡을 했다. “내일 아침에 학교 가는 길에 엄마 병원비 줄 거야. 가방에 넣어놨으니까 챙겨. 그리고 엄마한테는 내가 수학여행 간다고 말해.”

도현이의 회신은 빨랐다. “뭐 하는 거야? 수학여행은 내년이잖아.”

세아가 회신했다. “그건 넌 신경 쓰지 말고. 엄마한테만 그렇게 말해.”

도현이가 또 회신했다. “뭐야, 진짜. 뭐 하는 거야?”

세아는 더 이상 회신하지 않았다.

오후 9시.

강리우의 전화가 울렸다. 정확히 9시. 1초 차이도 없이.

“준비했어?”

그의 목소리는 차갑지 않았다. 하지만 따뜻하지도 않았다. 그냥 필요한 말만 하는 톤이었다.

“응.”

“짐은?”

“응.”

“내일 아침 7시 30분에 내가 데리러 갈게. 그 전에 밥을 먹어. 비행기 안에서는 밥을 못 먹어.”

“응.”

“그리고 핸드폰은 꼭 챙겨. 비행기 안에서도 필요할 수도 있으니까.”

“응.”

강리우가 침묵했다. 그리고 물었다.

“하늘이는?”

세아는 놀랐다. 강리우가 하늘을 알고 있었다는 것에. 아니, 알고 있었다. 회사를 나가겠다는 선언 전에, 강리우는 세아의 모든 것을 알고 있었던 것 같았다.

“…전화했어.”

“뭐라고 했어?”

“진짜로 가지 말라고.”

“그래. 맞아. 가지 말 게 맞아. 그런데 넌 가?”

“응.”

“왜?”

세아는 이 질문을 두 번 들었다. 첫 번째는 하늘에게서. 두 번째는 강리우에게서. 그리고 지금, 세아는 대답할 수 있었다.

“…알고 싶어서. 뭐가 끝나는지.”

강리우가 침묵했다. 오래. 그리고 말했다.

“내일 봐. 고시원 앞에서.”

전화가 끝났다.

오후 9시 45분.

세아는 여전히 캐리어 옆에 앉아 있었다. 움직이지 못했다. 마치 자신이 캐리어의 일부가 되어버린 것처럼. 또는 캐리어가 자신의 일부가 되어버린 것처럼.

창문을 통해 반지하의 창밖이 보였다. 사람들의 다리만. 지나가는 사람들의 다리. 그들은 어디로 가고 있을까. 강리우처럼 차를 타고? 하늘처럼 타투 가게로? 아니면 편의점으로? 세아처럼.

세아는 자신의 손을 다시 봤다. 여전히 떨리고 있었다. 하지만 이번엔 다르게 떨렸다. 마치 누군가를 잡으려고 손가락이 움직이는 것처럼. 아니면, 누군가에게 잡히려고.

밤 10시.

세아는 침대에 누웠다. 천장을 봤다. 습기 찬 천장. 그리고 그 천장 너머, 지상의 세계. 햇빛이 있는 세계. 그곳으로 가는 비행기. 제주로 가는 비행기.

침대 옆 책상에는 작은 라이터가 있었다. 세아의 라이터. 그녀는 때때로 그 라이터를 켰다 껐다 했다. 불을 봤다. 작은 불. 그 불이 자신을 타고 있다고 생각했다.

밤 11시 30분.

핸드폰에 메시지가 왔다. 강민준에게서.

“리우가 나를 찾고 있다. 오늘 밤 회사에 안 나타났다. 자네가 아는 바 있나?”

세아는 회신하지 않았다. 강민준은 강리우의 아버지였다. JYA의 회장. 세아를 가둔 계약의 서명자.

강민준의 메시지가 또 왔다.

“계약서를 다시 읽어보게. 3페이지 7항. 자네가 뭘 서명했는지 알아야지.”

세아는 그 메시지를 읽었다. 3페이지 7항. 저작권 귀속 조항. 세아가 쓴 모든 곡은 JYA의 소유가 된다는 조항. 세아는 그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밤 11시 45분.

세아는 침대에서 일어났다. 캐리어를 다시 확인했다. 옷, 속옷, 양말. 치약, 칫솔. 작은 타월. 그리고… 그리고 뭐가 더 필요한가.

세아는 책상 서랍을 열었다. 그 안에는 작은 노트가 있었다. 검은 표지의 노트. 그 안에는 세아가 쓴 곡들이 있었다. 12곡. 손글씨로. 악보와 가사. 모두 세아의 것.

세아는 그 노트를 캐리어에 넣었다. 주머니에 넣지 않고, 옷 아래에 숨겨서. 마치 그것이 가장 중요한 것이라도 되는 것처럼. 그리고 실제로, 그것이 가장 중요한 것이었다.

밤 11시 59분.

세아는 창가에 앉았다. 반지하 창가. 지상의 다리들을 봤다. 밤 12시가 되면 그 다리들이 더 적어질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누군가는 지나갈 것이다. 밤을 지나는 누군가들.

세아는 자신의 손가락을 펴보았다. 얇고 가는 손가락. 음악을 쓰는 손가락. 그 손가락들이 여전히 떨리고 있었다.

제주행 비행기는 내일 아침 8시 40분이었다.

세아는 그것을 생각했다. 그리고 생각했다. 강리우가 무엇을 보여줄 것인지. 무엇을 말할 것인지. 그리고 “모든 게 끝난다”는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하지만 아무것도 답이 없었다. 단지 내일 아침 7시 30분에 강리우가 나타날 것이라는 것만 있었다. 그리고 그 이후의 모든 것은 알 수 없었다.

세아는 라이터를 들었다. 켰다. 작은 불이 피었다. 파란 불. 따뜻한 불. 그 불을 봤다.

그리고 깨달았다. 자신이 왜 제주로 가고 있는지.

강리우가 시켜서가 아니었다. 어머니가 있어서도 아니었다. 도현이를 위해서도 아니었다.

세아는 제주로 가고 있었다. 자신의 불이 어디서 시작되었는지 알기 위해서. 그 불이 정말로 타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이미 꺼져 있는 것인지 확인하기 위해서.

그리고 가장 중요하게, 자신이 정말로 아무것도 아닌 것을 위해 타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뭔가를 위해 타고 있는 것인지 알기 위해서.

세아는 라이터를 껐다. 불이 사라졌다. 하지만 손가락은 여전히 따뜻했다.

밤 12시 30분.

세아는 마침내 침대에 누웠다. 캐리어는 문 옆에 준비되어 있었다. 내일 아침 7시 30분을 기다리면서.

그리고 세아는 꿈을 꾸었다. 제주의 바다. 어머니가 숨비소리를 내며 물 위로 올라오는 모습. 그리고 자신이 그 소리를 따라 노래하는 모습을.

하지만 그 노래는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았다. 단지 바람만 들을 뿐.


현재 진행 상황

스토리 타임라인: 3권 시작. 강리우가 JYA를 나가겠다는 선언 직후. 세아가 제주행 비행기표를 들고 준비하는 밤. 아침 7시 30분 픽업 대기 중.

캐릭터 현재 상태:

* 세아: 혼란스러움. 강리우의 제안에 동의했지만 그 의미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함. 손가락이 떨림. 하늘과의 우정이 흔들림.

* 강리우: 결정적 행동 직전. 회사 퇴직 예정. 세아와의 관계를 ‘구원’에서 뭔가 다른 것으로 전환하려고 시도 중.

* 강민준: 아들을 찾으려 함. 세아에게 경고성 메시지 전송. 아직 세아의 중요성을 완전히 파악하지 못함.

* 하늘: 걱정과 포기 사이를 오갈 중. 세아를 놓아주되 안전을 확인하려고 함.

* 도현이: 누나의 거짓말을 눈치채기 시작.

복선 심기:

1. 강민준의 메시지 – 3페이지 7항 저작권 조항 재상기. 이것이 3권에서 핵심 갈등이 될 것.

2. 세아의 노트 – 12곡이 담긴 검은 노트. 제주로 가져감. 이것이 제주에서 뭔가를 촉발할 것.

3. “모든 게 끝난다” – 강리우의 모호한 말. 관계의 끝? 계약의 끝? 아니면 새로운 시작?

4. 강리우의 손 – 여전히 떨리고 있음. 아직 치유되지 않음. 제주에서 뭔가 변할 것인가?

5. 세아의 깨달음 – 자신이 왜 가는지 알게 됨. “아무것도 아닌 것을 위해 타고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3권의 중심 테마.

# 불의 진실

## 1부: 밤의 무게

밤 11시 47분.

세아의 손가락이 떨렸다.

라이터의 휠을 누르는 손가락이. 그것도 꽤 심하게. 마치 고열에 시달리는 환자의 손처럼, 통제 불가능한 미세한 진동이 손가락 전체로 퍼져 있었다. 세아는 손을 내려다봤다. 어두운 방 안에서, 스마트폰의 불빛만 의존하던 눈이 천천히 적응하면서 손가락들의 떨림이 더욱 선명하게 보였다.

이게 뭐지? 추위? 아니다. 방 안의 온도는 쾌적했다. 에어컨이 작동하고 있었고, 가벼운 긴팔 셔츠를 입고 있었음에도 따뜻함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럼 이 떨림은?

세아는 손을 움켜쥐었다. 손가락들을 깍지껴서 힘을 주었다. 하지만 떨림은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더 심해진 것 같았다. 마치 내 손이 내 손이 아닌 것처럼, 독립적인 의지로 움직이는 것처럼 느껴졌다.

“진정해. 진정해.”

세아는 자신에게 중얼거렸다. 목소리는 낮았고, 떨렸다. 정말로 진정해야 할 것은 손이 아니라 마음이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마음을 직접 통제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손부터 시작하기로 했다. 손이 떨리지 않으면, 혹시 마음도 함께 진정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런 희망이 있었다.

방 안은 어두웠다. 세아는 불을 켜지 않았다. 밝은 불은 필요 없었다. 오히려 어둠이 좋았다. 어둠 속에서는 생각을 할 수 있었다. 아니, 정확히는 생각을 피할 수 있었다. 밝은 불 아래서는 모든 것이 너무 선명하게 보였다. 하지만 어둠 속에서는 그런 명확함이 필요 없었다.

밤 11시 52분.

세아의 손가락이 여전히 떨리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 그것이 중요하지 않았다. 더 중요한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다. 더 큰 떨림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손이 아니라 가슴에서 비롯된 떨림이었다.

세아는 침대에 앉아 있었다. 침대 옆에는 검은색 캐리어가 놓여 있었다. 이미 짐은 다 쌌다. 옷 세 벌, 가벼운 외출복,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검은 노트. 그 노트는 세아의 모든 것이 담긴 상자였다. 12곡. 12개의 이야기. 12번의 울음.

그 노트는 캐리어의 맨 아래, 옷들 사이에 숨겨져 있었다. 누군가 우연히 발견할 수 없도록. 강리우도, 어머니도, 도현이도. 아무도 알면 안 되는 노트였다.

세아는 캐리어를 바라봤다. 검은 캐리어. 마치 자신의 마음을 담은 상자 같았다. 검고, 무겁고, 무엇이 들어있는지는 밖에서는 알 수 없는.

“왜 가는 거야?”

세아가 스스로에게 물었다. 이것이 지난 몇 시간 동안 자신에게 던진 가장 기본적인 질문이었다.

강리우가 시켜서? 아니다. 강리우는 제안했을 뿐이었다. “세아야, 너 제주에 가봐. 어머니를 만나봐. 그리고 돌아와.”

단순한 제안이었다. 명령이 아니었다. 강요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 제안 속에는 뭔가 있었다. 세아가 감지할 수 없는, 하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어떤 의도가 있었다.

그리고 세아는 그 의도를 따랐다. 이유를 묻지 않으면서.

어머니 때문에? 세아는 고개를 저었다. 어머니를 만나고 싶지 않았다. 어머니는 제주에 있고, 세아는 서울에 있었다. 그 거리가 편했다. 전화로 충분했다. 아니, 전화도 별로 없었다. 어머니는 바빴고, 세아도 바빴다. 서로 바쁘다는 것이 좋은 핑계가 되었다. 연락을 하지 않을 이유가 되었다.

도현이를 위해서? 세아는 웃음을 터뜨렸다. 작고, 쓸쓸한 웃음이었다. 도현이는 자신이 뭘 하든 상관하지 않았다. 도현이에게 필요한 것은 누나가 아니라 아버지였다. 그리고 그 아버지가 떠나려고 하고 있다는 사실을 도현이도 곧 알게 될 것이었다.

그렇다면?

세아는 다시 손가락을 들었다. 여전히 떨리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 그 떨림의 이유를 알았다. 그것은 두려움이 아니었다. 불안이 아니었다.

그것은 갈증이었다.

자신이 무엇인지 알고 싶은 갈증. 자신의 불이 어디서 시작되었는지, 그것이 정말로 타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이미 꺼져 있는 것인지 확인하고 싶은 갈증.

“라이터를…”

세아는 침대 옆 책상을 더듬었다. 서랍을 열었다. 안경, 동전, 휴지 조각, 그리고—라이터. 강리우가 준 라이터였다. 언제였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은 오래전부터 세아의 서랍에 있었다.

## 2부: 불의 의미

밤 12시 정각.

세아는 라이터를 들었다. 손가락이 여전히 떨리고 있었지만, 이제 그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떨림이 라이터의 휠을 더 정확하게 누르도록 도와주었다.

카, 카, 카.

라이터에서 불이 피어올랐다.

파란 불. 정확히는 파란색과 노란색이 섞인 불. 그 불은 작았지만, 강했다. 마치 생명을 가진 생물처럼, 자신의 존재를 알리기 위해 흔들렸다.

세아는 그 불을 바라봤다.

세아의 눈에는 불이 그저 불이 아니었다. 그것은 상징이었다. 아니, 거울이었다. 자신의 마음을 비추는 거울. 그 불이 타오르는 것처럼, 자신도 무언가를 향해 타오르고 있는가? 그 불이 바람에 흔들리는 것처럼, 자신도 누군가의 말에 흔들리고 있지 않은가?

세아는 깊게 숨을 쉬었다. 라이터의 불을 향해.

그 순간, 뭔가가 펼쳐졌다.

마치 구름이 걷히듯이, 마치 눈이 멀었던 사람이 갑자기 시력을 되찾듯이, 세아의 마음에서 뭔가가 선명하게 보였다.

“아.”

세아의 입에서 나온 소리는 거의 신음 같았다.

자신이 왜 제주로 가고 있는지. 그 이유를 알았다.

강리우가 시켜서가 아니었다. 그는 단지 제안했을 뿐이었다. 그리고 세아가 따랐다. 하지만 그것은 강리우의 명령 때문이 아니었다.

어머니가 있어서도 아니었다. 어머니를 보고 싶어서도, 어머니를 피해서도 아니었다. 어머니는 단지 제주의 이유일 뿐이었다. 제주에 가는 방편일 뿐이었다.

도현이를 위해서도 아니었다. 도현이는 이미 자신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아니, 애초에 세아가 도현이를 도울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세아 자신이 이미 물에 잠기고 있었으니까.

“나는…”

세아가 중얼거렸다.

“나는 나 자신을 위해 가고 있구나.”

그 말이 나온 순간, 세아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마치 무거운 돌이 떨어지는 것처럼. 하지만 그것은 슬픔의 무게가 아니었다.

오히려 반대였다.

그것은 해방감이었다.

세아는 라이터를 들었던 손을 더 가까이 가져갔다. 불이 손가락에 거의 닿을 정도로. 따뜻함이 전해졌다. 아프지는 않았다. 따뜻했다. 마치 누군가 손을 잡아주는 것처럼.

“내가 왜 제주로 가는지 알고 싶어서.”

세아가 계속 중얼거렸다. 마치 자신에게 확인시키듯이, 마치 신에게 맹세하듯이.

“내 불이 어디서 시작되었는지 알기 위해서.”

세아는 라이터의 불을 더 자세히 관찰했다. 불의 맨 아래는 파란색이었다. 그 위로는 노란색, 주황색, 빨간색으로 이어졌다. 마치 무지개처럼.

“이 불이 정말로 타고 있는 건가?”

세아가 물었다.

“아니면 이미 꺼져 있는 건가?”

그것이 가장 중요한 질문이었다. 세아는 자신의 불이 실제로 존재하는지, 아니면 자신이 믿고 싶은 환상인지 알고 싶었다. 그 불이 정말로 따뜻한지, 아니면 자신이 따뜻함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것인지 알고 싶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하게.

“내가 정말로 아무것도 아닌 것을 위해 타고 있는 건 아닐까?”

세아는 눈을 감았다. 라이터의 따뜻함을 느끼면서.

만약 자신의 불이 아무것도 아닌 것을 위해 타오르고 있다면? 만약 자신이 누군가의 꼬임에 빠져서, 누군가의 말에 흔들려서 타오르고 있다면?

“그런 건 아니겠지.”

세아가 중얼거렸다. 하지만 확신이 없었다. 목소리가 흔들렸다.

그래서 제주로 가야 했다.

그곳에서 어머니를 만날 때, 그 순간이 오면, 아마도 답이 나올 것 같았다. 어머니의 얼굴을 봤을 때, 어머니의 목소리를 들었을 때, 어쩌면 자신의 불이 어떤 이유로 타오르고 있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왜냐하면, 세아는 어머니 때문이었을지도 모르니까.

## 3부: 깨달음의 순간

밤 12시 13분.

세아는 라이터를 껐다.

카, 하고 가볍게 누르는 소리가 났다. 그리고 불은 사라졌다. 파란 불, 노란 불, 주황 불, 빨간 불. 모든 색깔의 불이 한 순간에 사라졌다.

하지만 손가락은 여전히 따뜻했다.

세아는 손가락을 들었다. 어두운 방 안에서, 손가락이 빛나고 있었다. 라이터의 불이 남긴 열이 손가락에 남아있었고, 그것이 마치 손가락이 스스로 빛을 내는 것처럼 보였다.

“이게 내 불이다.”

세아가 중얼거렸다.

“남은 것도 내 불이다.”

손가락에 남은 열. 그것은 라이터의 불로 인한 것이었지만, 이제는 세아의 것이었다. 라이터를 끈 지금도, 그 열은 사라지지 않았다. 천천히, 천천히 식어가겠지만, 지금 이 순간에는 여전히 따뜻했다.

“이게 바로…”

세아는 손가락을 바라봤다.

“내가 찾던 답이구나.”

그것이 바로 세아가 제주로 가야 하는 이유였다. 남은 것들. 사라지지 않은 열들. 그것들을 확인하기 위해서. 그것들이 정말로 있는지, 정말로 따뜻한지 확인하기 위해서.

세아는 침대에 누웠다.

캐리어는 여전히 침대 옆에 서 있었다. 검은색 캐리어. 그 안에는 옷들과 노트가 들어있었다. 그리고 밤이 새면, 아침이 오고, 아침이 오면 픽업 차량이 올 것이었다. 아침 7시 30분. 그 시간이 오면 모든 것이 시작될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직 밤이었다.

세아는 눈을 감았다. 손가락의 열을 느끼면서. 천천히, 그 열이 식어가는 과정을 느끼면서.

## 4부: 꿈의 경계

밤 12시 30분을 지나서.

세아는 잠에 빠져들었다.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에서, 깨어있음과 꿈의 사이에서.

그리고 세아는 꿈을 꾸었다.

제주의 바다.

파란색이었다. 하늘과 같은 파란색. 아니, 더 진한 파란색. 마치 진정의 색깔처럼, 마치 슬픔을 진정시키는 색깔처럼.

그 바다 위에 어머니가 있었다.

세아의 어머니. 세아는 어머니의 얼굴을 명확하게 볼 수 없었다. 마치 빛이 앞을 가리는 것처럼. 하지만 어머니라는 것은 알았다. 그 목소리로 알았다.

“숨비, 숨비.”

어머니가 물 위에서 숨비를 내고 있었다. 숨비. 제주 해녀들의 숨을 내쉬는 소리. 그 소리는 마치 노래 같았다. 마치 무언가를 부르는 것 같았다. 마치 누군가를 찾는 것 같았다.

그리고 세아는 그 소리를 따라 노래했다.

세아의 목에서 나오는 소리도 처음에는 숨비 같았다. 하지만 점차 달라졌다. 점차 음악이 되었다. 점차 세아의 노트에 담긴 12곡 중 하나가 되었다.

세아는 노래했다. 제주의 바다 위에서. 어머니를 따라 노래했다.

하지만 그 노래는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았다.

세아는 꿈 속에서 깨달았다. 아, 이건 꿈이구나. 그렇기 때문에 아무도 들을 수 없구나. 꿈은 혼자만의 세계이기 때문에.

그래서 세아는 더 크게 노래했다.

하지만 여전히 아무도 들을 수 없었다. 단지 바람만 들었다. 제주의 바람. 강하고, 거친, 하지만 어딘가 부드러운 바람.

그 바람이 세아의 노래를 어디론가 옮겨갔다. 서울로? 아니면 다른 어디로?

세아는 모를 일이었다.

## 5부: 야간의 논리

밤 12시 45분.

세아는 꿈 속에서 깨어났다. 완전히 깨어난 것은 아니었다. 반쯤 깨어난 상태. 그 상태에서 세아는 생각했다.

왜 자신이 제주로 가는지. 왜 어머니를 만나야 하는지. 왜 이 모든 것이 필요한지.

강리우는 “모든 게 끝난다”고 했다. 그 말은 무슨 뜻일까? 관계의 끝? 아니면 계약의 끝? 아니면 강리우 자신의 끝?

세아는 강리우의 손을 생각해봤다. 여전히 떨리고 있던 그 손. 아직도 치유되지 않은 그 손. 그 손이 제주에서 뭔가 변할 것인가?

아니면 자신의 손이 변할 것인가?

세아는 자신의 손을 들었다. 라이터의 열은 이미 다 식었다. 손가락은 이제 차가웠다. 하지만 그 차가움도 하나의 느낌이었다. 하나의 경험이었다. 하나의 기억이었다.

“내일이 오면…”

세아가 중얼거렸다.

“모든 게 달라질 거야.”

그것이 무서웠다. 하지만 동시에 기대했다.

## 6부: 아침을 기다리며

밤 1시 15분.

세아는 침대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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