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아닌 것을 위해 불탄 소녀 – 제41화: 약속이라는 이름의 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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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41화: 약속이라는 이름의 덫

“내 손을 놔.”

세아가 말했을 때, 강리우의 얼굴에는 뭔가가 떠올랐다. 상처와 분노의 경계선. 그것이 어느 쪽인지 세아는 구분할 수 없었다. 둘 다일 수도 있었다. 가장 깊은 상처는 항상 분노를 동반하기 때문이다.

강리우는 세아의 손을 놓지 않았다. 오히려 더 단단히 잡았다. 따뜻함이 압력으로 변했다. 사랑 같던 것이 소유로 드러났다. 세아는 자신의 손이 강리우의 손에 갇혀 있다는 것을 느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갇혀 있을까. 따뜻함의 이름으로. 보호의 이름으로. 약속의 이름으로.

“제발.”

세아가 다시 말했다.

강리우는 천천히 손을 놓았다. 하지만 그의 눈은 여전히 세아를 놓지 않았다. 그 시선은 물리적인 손보다 더 강력했다. 시선은 피할 수 없다. 시선은 어디로든 따라온다.

“너 지금 뭐 하는 거야, 세아?”

강리우가 물었다. 그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그 아래에 흐르는 것은 분명했다. 통제할 수 없는 뭔가. 세아는 그것을 감지했다.

“나 혼자가 되고 싶어.”

세아가 말했다.

“혼자? 너 혼자 뭘 할 거야? 그 형광등 다시 꺼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라이터를 켜고? 손가락을 불꽃에 가까이하고?”

강리우가 말했다. 그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처음이었다. 강리우가 목소리를 높인 것은 처음이었다. 그것은 세아를 더 무섭게 만들었다. 통제된 분노보다 폭발 직전의 분노가 더 무섭다.

“너 휴게실에서 뭐 한 거야?”

“뭘.”

“라이터. 너 라이터를 가지고 있었어. 왜?”

세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할 수 없었다. 자신도 왜인지 몰랐다. 단지 손가락이 떨려서. 단지 누군가를 해치고 싶었으니까. 자신을 해치고 싶었으니까.

강리우가 계산대에서 한 발 뒤로 물러섰다. 그의 손이 주머니로 들어갔다. 휴대폰을 꺼냈다. 화면을 켰다. 뭔가를 조작했다. 세아는 그의 움직임을 봤다. 그것은 의도적이었다. 자신이 뭔가를 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의도.

“뭐 해?”

세아가 물었다.

“파크 소진 영상 봐.”

강리우가 말했다. 그리고 자신의 휴대폰을 세아에게 보였다. 화면에는 여자가 있었다. 20대 초반의 여자. 갈색 머리. 아이돌 같은 얼굴. 파크 소진. 강리우가 보호하겠다고 했던 그 여자.

영상은 뮤직비디오였다. 화려한 세트. 정교한 조명. 그리고 그 중심에 파크 소진. 그녀는 노래하고 있었다. 아름답게. 완벽하게. 마치 이것이 자신의 진정한 삶인 것처럼.

“이거 누가 썼게?”

강리우가 물었다.

“뮤직비디오?”

세아가 물었다.

“곡. 곡을 누가 썼게?”

강리우가 다시 물었다.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낮았지만, 그 아래의 것은 더 깊어지고 있었다.

세아는 화면을 자세히 봤다. 곡 크레딧을 찾았다. 작곡: 파크 소진. 그렇게 되어 있었다.

“파크 소진이라고 되어 있어.”

세아가 말했다.

“근데 이 곡을 누가 썼게?”

강리우가 다시 물었다.

세아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 곡. 세아는 그 곡을 알았다. 그 곡은 자신이 썼다. 정확히는, 자신이 쓴 곡이 어딘가로 갔고, 그것이 파크 소진의 이름으로 나왔다. 하지만 세아는 계약서에 사인했다. 모든 것을 넘기는 계약서에.

“내가…”

세아가 말했다.

“너. 너가 이 곡을 썼어. 근데 어떻게 됐지? JYA가 가져가버렸지. 그리고 파크 소진이 부르고 있어. 너의 노래를. 너의 목소리를.”

강리우가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이제 차분해졌다. 그것이 더 무서웠다. 폭발은 끝났고, 남은 것은 황폐한 풍경뿐이었다.

“왜 이걸 보여줘?”

세아가 물었다.

“너한테 현실을 보여주려고. 넌 지금 뭐를 하고 있어? 편의점에서 라이터를 가지고 손가락을 불꽃에 가까이하면서? 그 사이에 너의 곡이 다른 사람 이름으로 돌아다니고 있어. 그리고 너는? 너는 뭐 해? 아무것도 못 해.”

강리우가 말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분노가 아니라 절망이 있었다. 누군가를 구하고 싶은데, 그 누군가가 자신을 구하려고 하지 않을 때의 절망.

세아는 강리우의 얼굴을 봤다. 처음으로 그의 얼굴에 있는 무언가를 봤다. 상처. 오래된 상처. 아주 깊은 곳에 있는 상처. 그것이 언제부터 있었는지 세아는 몰랐지만, 그것은 확실했다. 강리우도 누군가에게 당했다. 강리우도 자신의 것을 빼앗겼다. 그래서 그는 자신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남을 통제하려고 한다.

“내가 너를 보호해 주겠다고 했어. 진심이었어. 그런데 넌 왜 나한테서 눈을 돌려?”

강리우가 물었다.

“보호와 감옥의 차이를 모르니까.”

세아가 말했다. 자신도 놀랐다. 그 말이 자신의 입에서 나왔다는 것에. 그 말이 이렇게 정확했다는 것에. 마치 누군가가 자신의 목에 손을 얹고 말을 하게 했던 것처럼.

강리우가 휴대폰을 내렸다. 화면이 꺼졌다. 파크 소진의 얼굴이 어둠으로 사라졌다. 그 어둠 속에서 강리우는 세아를 봤다. 그의 눈은 물이 들어가 있는 것 같았다. 오래 참아온 눈물. 하지만 떨어지지 않은 눈물.

“그럼 내가 뭐해야 돼? 그냥 놔두고 있어? 넌 천천히 사라지고, 나는 지켜만 봐?”

강리우가 물었다. 그의 목소리는 이제 간청이었다. 명령도 선언도 아닌, 순수한 간청.

세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그의 눈을 봤다. 그 눈 속에 있는 상처를 봤다. 그리고 그 상처가 자신의 상처와 같다는 것을 깨달았다. 두 사람 모두 누군가에게 버려졌다. 두 사람 모두 누군가를 지키려고 했다. 그리고 그 지킴이 어느 순간부터는 상처가 되었다.

편의점의 형광등이 윙윙거렸다. 새벽 2시 15분. 매니저 김영희가 올 시간까지 15분이 남아 있었다. 그 15분 동안 무엇이 일어날 것인가.

강리우가 계산대에서 한 발 더 물러섰다. 그의 손이 주머니에서 나왔다. 무언가를 집어 들었다. 서류. 여러 장의 서류.

“이게 뭐야?”

세아가 물었다.

“계약서.”

강리우가 말했다.

“어떤 계약서?”

“너 계약서를 다시 읽어봤어? 세 번째 페이지?”

강리우가 물었다.

세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계약서를 다시 읽지 않았다. 한 번 사인한 것은 끝이라고 생각했다.

“JYA와의 계약서에는 ‘음악 제작 관련 모든 저작권은 회사에 귀속된다’는 조항이 있어. 근데 이 조항은 사실 불법이야. 한국 저작권법에 따르면, 작곡자의 권리는 계약으로도 완전히 이전될 수 없어. 크리에이터는 항상 자신의 저작물에 대한 기본 권리를 가져야 해.”

강리우가 말했다. 마치 변호사처럼. 마치 자신이 이것을 이미 수백 번 말해본 것처럼.

“그래서?”

세아가 물었다.

“그래서 이 계약은 무효야. 처음부터 무효였어. 근데 JYA는 그걸 몰랐거나, 알면서도 무시했거나 둘 중 하나야. 그리고 너는 그걸 몰랐어. 하늘이도 모를 수도 있고.”

강리우가 말했다.

“무효라면… 내가 뭐를 할 수 있는 건데?”

세아가 물었다.

“이걸.”

강리우가 서류를 계산대 위에 놓았다. 여러 장의 문서. 세아는 그것을 봤다. 맨 위의 문서에는 제목이 있었다. “저작권 회복 청구 소송장”.

세아의 손이 떨렸다. 다시 떨렸다. 따뜻한 손도, 강리우의 말도 그 떨림을 멈추지 못했다.

“너는 소송을 할 수 있어. JYA를 상대로. 너의 저작권을 되찾기 위해서. 그리고 내가 변호사를 붙여줄 수 있어. 최고의 변호사를.”

강리우가 말했다.

“그럼 내가 JYA와 싸워야 한다는 뜻이야?”

세아가 말했다. 그것은 질문이 아니었다. 그것은 깨달음이었다. 깨달음과 동시에 오는 공포.

“그래. 그리고 넌 할 수 있어. 넌 충분히 강해. 넌 강한 거야.”

강리우가 말했다.

세아는 강리우의 얼굴을 다시 봤다. 그의 눈. 그 눈에 있는 것이 무엇인지 이제 알 것 같았다. 그것은 상처가 아니었다. 그것은 절망이 아니었다. 그것은 집착이었다. 자신이 할 수 없는 것을 다른 누군가가 대신 하기를 바라는 집착.

“강리우.”

세아가 말했다.

“너 지금 뭐 하는 거야? 너 자신의 전쟁을 나한테 옮기려고 하는 거 아니야?”

강리우는 움직이지 않았다. 움직이지 않는 것이 대답이었다.

“나는 너의 대리인이 아니야. 내 목소리를 되찾아야 하는 사람도 나야. 근데 너는 나에게 네 목소리를 내려고 해. 이게 뭐하는 거야?”

세아가 계속 말했다. 자신도 놀랐다. 이렇게 계속 말할 수 있다는 것에. 자신도 몰랐던 말들이 나오고 있었다.

편의점의 형광등이 다시 깜빡였다. 한 번, 두 번. 마치 신호를 보내는 것처럼. 마치 세아에게 말하고 있는 것처럼. “도망쳐. 지금이야. 지금 도망쳐.”

강리우가 입을 열었다. 뭔가를 말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 순간, 편의점 문이 열렸다. 매니저 김영희였다. 새벽 2시 15분. 정확한 시간에.

매니저는 강리우를 봤다. 그리고 세아를 봤다. 둘의 거리. 둘의 표정. 그것을 본 순간, 매니저는 무언가를 깨달았다.

“세아, 라이터 줘.”

매니저가 말했다. 명령이었다.

세아는 주머니에서 라이터를 꺼냈다. 어떻게 알았는지 모르겠지만, 매니저는 알았다.

“이 분이 누구세요?”

매니저가 강리우에게 물었다.

“관계자.”

강리우가 말했다.

“뭐하는 관계자?”

매니저가 다시 물었다.

강리우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서류를 집어 들었다. 저작권 회복 청구 소송장. 그것을 다시 주머니에 넣었다.

“세아. 이 분 말 들을 필요 없어. 이건 너의 인생이니까.”

매니저가 말했다.

세아는 매니저를 봤다. 처음으로 매니저를 제대로 봤다. 그 여자는 자신을 지켜주려고 했다. 왜? 자신은 그저 알바생일 뿐인데.

강리우가 편의점을 나갔다. 검은색 BMW로 돌아갔다. 그의 뒷모습. 그것이 서서히 어둠으로 사라졌다.

매니저가 세아에게 다가왔다.

“너 이 사람이 누군지 알아?”

세아는 고개를 저었다.

“JYA 엔터테인먼트 대표 아들이야. 강리우. 너 계약서는 그 회사와 했지?”

세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아들이 와서 너한테 뭐라고 했어?”

매니저가 물었다.

“계약서가 무효라고. 그리고 소송을 하라고.”

세아가 말했다.

매니저는 한숨을 쉬었다. 깊고 긴 한숨.

“너 뭐라고 대답했어?”

“아무것도.”

세아가 말했다.

“그게 답이야. 아무것도 하지 마. 그 사람 말 들으면 더 복잡해져. 그리고…”

매니저가 말을 멈췄다.

“그리고?”

세아가 물었다.

“그 사람은 너를 좋아하는 게 아니야. 자기 자신을 좋아하는 거야. 너는 그저 그 자신을 투영할 수 있는 대상일 뿐이야.”

매니저가 말했다.

세아는 그 말을 들었다. 그리고 그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알았다. 강리우의 눈 속에 있던 것. 그것은 자신에 대한 사랑이 아니라, 자신이 다시 할 수 없었던 것을 대신 해주기를 바라는 욕망이었다.

편의점의 형광등이 다시 켜졌다. 밝은 빛. 모든 것을 드러내는 빛.

세아는 그 빛 아래에서 자신의 손을 봤다. 더 이상 떨리지 않는 손. 하지만 더욱 무거워진 손. 선택의 무게를 짊어진 손.

“너 지금 뭐할 거야?”

매니저가 물었다.

“모르겠어요.”

세아가 말했다. 그것이 진실이었다. 세아는 정말로 몰랐다.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 강리우를 믿어야 할지, 거부해야 할지. JYA와 싸워야 할지, 아니면 받아들여야 할지.

휴대폰이 울렸다. 카톡이었다. 하늘이였다.

“야 근데 너 진짜로 뭐 해. 강리우한테서 받은 문자 봤어? 뭔가 이상한데…”

세아는 답장하지 않았다. 대신 하늘이에게 전화를 걸었다.

“너 지금 어디야?”

“뭐? 지금?”

“응. 지금 와.”

세아가 말했다.

“편의점? 새벽 2시인데?”

하늘이가 물었다.

“응. 와. 제발.”

세아의 목소리에는 뭔가가 있었다. 하늘이는 그것을 감지했다.

“알았어. 20분이면 갈게.”

하늘이가 말했다.

세아는 전화를 끊었다. 매니저를 봤다.

“제가 20분 동안 휴게실에 가도 괜찮을까요?”

“가.”

매니저가 말했다.

세아는 휴게실로 들어갔다. 형광등이 켜져 있었다. 밝은 빛. 그 빛은 누군가가 고쳐준 것이었다. 낯선 40대 남성이. 그 남성은 아무것도 원하지 않았다. 그저 고쳐줬을 뿐이었다.

세아는 의자에 앉았다. 휴대폰을 들었다. 강리우의 문자를 다시 읽었다.

“내가 너를 지켜줄 게. 약속이야.”

약속. 그 단어가 세아를 무섭게 했다. 약속은 빚이기 때문이다. 약속은 족쇄이기 때문이다. 약속은 아름다운 감옥이기 때문이다.

세아는 문자를 삭제하지 않았다. 하지만 답장도 하지 않았다. 그 대신 도현이에게 문자를 보냈다.

“너 잘 자고 있지? 누나가 뭘 하고 있는지 물어봤던 거, 기억해?”

도현이의 답은 빨랐다.

“응. 왜? 뭐 있는 거야?”

“아무것도 아니야. 그냥… 누나가 너를 위해서만 살았던 것 같아. 그리고 그게 누나를 죽이고 있는 것 같아.”

세아가 답했다.

도현이는 한참 동안 답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나서 카톡이 들어왔다.

“누나. 나 때문에 그럴 필요 없어. 진짜로. 나는 누나를 위해 살고 싶지 않아. 나는 누나가 행복했으면 좋겠어.”

세아는 그 문자를 읽었다. 반복해서. 여러 번. 도현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것은 음악이었다. 세아의 것이 아닌, 도현이의 음악. 누군가를 지키려는 욕망이 아니라, 누군가를 풀어주려는 욕망의 음악.

편의점의 휴게실에서, 새벽 2시 35분에, 세아는 울었다.

손가락이 떨리지 않았다. 대신 눈이 흘렀다.

그 눈물 속에 있는 것은 무엇인가. 절망인가. 희망인가. 아니면 그 둘을 구분할 수 없게 섞여 있는 것인가.

세아는 모르지만, 그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손가락이 더 이상 떨리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손가락이 이제 자신의 손가락이라는 것이었다. 누구의 손도 아닌, 자신의 손.

편의점의 형광등이 윙윙거렸다. 밝은 빛. 그 빛은 계속될 것이었다. 누군가가 다시 고쳐줄 때까지.

# 새벽 2시의 편의점

## 1부: 호출

휴대폰의 진동음은 새벽 2시 3분을 가리키고 있을 때 울렸다.

하늘이는 침대에서 일어나 앉았다. 어둠 속에서 눈을 비비며 화면을 확인했다. 세아. 통화 중이다.

“여보세요?” 목소리가 쉬었다. 방금 깬 사람의 목소리였다.

“너 지금 어디야?”

세아의 목소리는 맑았다. 그런데 그 맑음 속에 무언가가 떠다니고 있었다. 마치 맑은 물 위에 얇은 얼음이 떠 있는 것처럼.

하늘이는 침대에서 내려앉으며 생각했다. *세아가 이 시간에 전화를 거는 건 처음인데?*

“뭐? 지금?” 하늘이가 물었다. 귀에 휴대폰을 들었고, 다른 손으로는 옆에 있던 셔츠를 집어들었다.

“응. 지금 와.”

“편의점? 새벽 2시인데?” 하늘이의 목소리에는 당혹감이 떠있었다. 그러나 동시에 어떤 긴급함도 감지했다. 그것은 경험이 가르쳐준 것이다. 세아가 이렇게 말할 때는 항상 무언가가 있다는 것을.

“응. 와. 제발.”

그 “제발”이라는 단어. 그것은 세아의 목소리에서 거의 들을 수 없는 단어였다. 세아는 보통 명령조로 말했다. 또는 차갑게. 그런데 지금 그 “제발”에는 무언가가 있었다. 마치 얇은 유리잔이 깨어지기 직전의 떨림처럼.

“알았어. 20분이면 갈게.”

하늘이는 전화를 끊지 않은 채로 옷을 입기 시작했다. 잠깐의 침묵. 그 침묵 속에서 하늘이는 세아의 호흡을 들었다. 불규칙한 호흡. 무언가를 참고 있는 호흡.

“세아?”

“응.”

“괜찮아?”

“… 응.”

그 대답은 거짓이었다. 하지만 하늘이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세아가 그 거짓을 깰 때까지.

“20분이야. 편의점 앞에 있어.”

통화가 끝났다.

## 2부: 편의점 휴게실

세아가 휴게실의 문을 열었을 때, 매니저는 이미 그녀를 보고 있었다. 야식 배달 편의점의 매니저는 밤샘 근무를 오래 한 사람답게, 얼굴에 무언가를 읽을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제가 20분 동안 휴게실에 가도 괜찮을까요?” 세아의 목소리는 정상이었다. 하지만 그 정상함이 얼마나 애써서 만들어진 것인지는, 매니저의 경험 많은 눈에 보였다.

“가.”

매니저는 더 이상의 질문을 하지 않았다. 그것도 친절이다. 어떤 상황에서든 모든 사람에게는 조용한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아는 사람의 친절.

세아는 휴게실로 들어갔다.

방은 좁았다. 낡은 소파 하나, 테이블 하나, 그리고 형광등. 그 형광등이 밝았다. 하얀 빛이 온 세상을 드러냈다. 세아의 창백한 얼굴도, 손가락의 떨림도, 가슴의 두근거림도.

그 형광등은 누군가가 고쳐놓은 것이었다. 한 달 전쯤이었다. 서른다섯, 마흔쯤 되 보이는 낯선 남성이 들어와서 사다리를 가져오더니, 아무 말도 없이 고쳐놓았다. 세아가 감사를 표했을 때, 그 남성은 웃으면서 “괜찮아요”라고만 말했다. 그것이 전부였다. 아무것도 원하지 않았다. 그저 고쳐줬을 뿐이었다. 세상에 그런 친절이 존재한다는 것이 세아를 놀라게 했다.

세아는 소파에 앉았다. 소파는 딱딱했다. 누군가의 몸의 무게로 이미 형태가 정해져 있었다. 오래된 것. 많은 사람들이 앉은 것. 많은 사람들의 피로가 스며 있는 것.

휴대폰을 들었다.

강리우의 문자는 여전히 화면에 떠 있었다. 세아는 그것을 몇 번이나 읽었다.

*“내가 너를 지켜줄 게. 약속이야.”*

약속.

그 단어를 바라봤다. 마치 독사를 바라보듯이.

약속은 빚이다. 누군가가 너를 위해 무언가를 하겠다고 약속하면, 너는 그것에 감금된다. 감사라는 이름의 감금. 책임이라는 이름의 족쇄. 그리고 그것이 아름답다는 것이 가장 끔찍한 부분이다. 족쇄도 아름답게 장식되면, 사람들은 그것을 벗으려고 하지 않는다.

강리우의 손. 그 손이 자신의 손목을 잡는 느낌. 따뜻했다. 하지만 세아는 알았다. 따뜻함 속에는 힘이 있다는 것을. 그 힘이 언제든 조여질 수 있다는 것을.

세아는 문자를 삭제하지 않았다. 하지만 답장도 하지 않았다. 대신 화면을 넘겨, 도현이와의 채팅 창을 열었다.

*“너 잘 자고 있지? 누나가 뭘 하고 있는지 물어봤던 거, 기억해?”*

도현이는 이미 깨어 있었다. 아니면 깊은 잠에서 깨어난 것이었다. 답이 곧바로 왔다.

*“응. 왜? 뭐 있는 거야?”*

세아는 한참 동안 화면을 바라봤다. 형광등의 하얀 빛이 화면을 비추었다. 그 빛 속에서 세아는 자신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창백한 얼굴. 낯선 얼굴. 누구의 것인지 모르는 얼굴.

글자를 입력했다.

*“아무것도 아니야. 그냥… 누나가 너를 위해서만 살았던 것 같아. 그리고 그게 누나를 죽이고 있는 것 같아.”*

손가락이 떨렸다. Enter를 누르기 전에 여러 번 읽었다. 이 말이 맞는지, 이 말이 옳은지. 그리고 도현이를 상처 주지는 않을지.

Enter를 눌렀다.

## 3부: 응답

도현이는 한참 동안 답을 하지 않았다.

세아는 휴대폰 화면을 바라봤다. 타이핑 표시. 빨간 점이 깜빡거렸다. 도현이가 뭔가를 쓰고 있다. 지우고 있다. 다시 쓰고 있다. 그 과정이 반복되었다.

세아는 알았다. 도현이도 힘들어하고 있다는 것을. 그것이 더 못견디게 했다.

그러다가 카톡이 들어왔다.

*“누나. 나 때문에 그럴 필요 없어. 진짜로.”*

세아는 그것을 읽었다. 눈이 뜨거워졌다.

*“나는 누나를 위해 살고 싶지 않아. 나는 누나가 행복했으면 좋겠어.”*

도현이의 문자. 그것은 단순한 문자가 아니었다. 그것은 음악이었다. 세아의 음악이 아니라, 도현이의 음악. 누군가를 지키려는 욕망의 음악이 아니라, 누군가를 풀어주려는 욕망의 음악.

세아는 그 문자를 반복해서 읽었다. 여러 번. 수십 번.

*“나는 누나가 행복했으면 좋겠어.”*

그 문장이 세아를 깨웠다. 자신이 얼마나 깊은 구덩이 속에 있었는지를 깨닫게 했다. 그리고 동시에, 그 구덩이에서 나올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했다.

편의점의 휴게실에서, 새벽 2시 35분에, 세아는 울었다.

손가락이 떨리지 않았다. 대신 눈이 흘렀다.

눈물은 따뜻했다. 자신의 것 같았다. 처음으로 자신의 것 같았다.

## 4부: 눈물의 의미

그 눈물 속에 있는 것은 무엇인가.

절망인가. 세아는 자신이 얼마나 많은 것을 잘못했는지를 알았다. 도현이를 위해 산다는 것이, 실제로는 도현이를 감금하는 것이었다는 것을. 강리우의 약속이 얼마나 아름다운 족쇄인지를. 그리고 자신의 삶이 얼마나 비어 있었는지.

희망인가. 그렇다면 그 희망은 어디서 오는가. 도현이의 말에서. 그 말이 가진 힘에서. 누군가를 풀어주려는 욕망의 음악에서.

아니면 그 둘을 구분할 수 없게 섞여 있는 것인가. 절망과 희망. 죽음과 삶. 끝과 시작.

세아는 모르지만, 그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다른 것이었다.

손가락이 더 이상 떨리지 않는다는 것. 그 손가락이 이제 자신의 손가락이라는 것. 누구의 손도 아닌, 자신의 손. 누군가를 위해 움직이는 손도 아닌, 자신을 위해 움직이는 손.

세아는 손가락을 펼쳤다. 형광등의 하얀 빛이 손가락 위를 지나갔다. 그 손가락들은 더 이상 떨리지 않았다.

가슴도 정상이 되어 가고 있었다. 그 빠른 박동이 천천히, 그리고 깊게 변해가고 있었다.

세아는 휴대폰을 다시 들었다. 도현이에게 답장을 했다.

*“고마워. 정말로.”*

그것이 전부였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였기 때문에, 그것이 진짜였다.

## 5부: 하늘이의 도착

편의점의 형광등이 윙윙거렸다. 그 소리는 얼마나 오래되었을까. 그 하얀 빛은 몇 명의 사람을 비추었을까.

세아는 휴게실을 나왔다. 매니저는 여전히 카운터에 앉아 있었다. 그의 눈빛에는 질문이 없었다. 그것도 친절이다.

“감사합니다.”

세아가 말했다.

“괜찮아.”

매니저가 대답했다.

편의점의 유리문을 밀었다. 새벽의 공기가 세아의 얼굴을 스쳤다. 그것은 차가웠지만, 동시에 생생했다. 마치 살아 있다는 증거인 것처럼.

편의점 앞의 주차장은 비어 있었다. 가로등의 주황색 빛이 아스팔트를 적신다. 여기저기에 담배꽁초가 떨어져 있었다. 많은 사람들의 불안이 떨어져 있었다.

그때 차가 다가왔다. 하늘이의 차였다.

차가 멈췄다. 하늘이가 내렸다.

“괜찮아?”

하늘이가 물었다. 그 목소리에는 질문이 아니라, 확인이 있었다. 그리고 준비가 있었다. 무엇이든 받아들일 준비.

세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하늘이를 바라봤다. 새벽 2시 45분. 그는 잠을 깬 지 45분 밖에 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여기에 있었다. 질문 없이. 조건 없이.

“잠깐만.”

세아가 말했다.

세아는 편의점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편의편의점의 매니저에게 물었다.

“여기 전에 형광등을 고쳐주신 분이 왔을 때, 뭐라고 하셨어요?”

매니저는 생각했다.

“아, 그 분? 그냥 ‘괜찮아요’라고 했어. 감사를 하려고 하니까.”

세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다시 밖으로 나왔다. 하늘이가 여전히 서 있었다.

“뭐했어?”

“그냥… 괜찮아 사람들을 생각했어.”

세아가 말했다.

“괜찮아 사람들?”

“응. 이유 없이 누군가를 도와주는 사람들. 감사를 받지 않고. 책임을 지지 않고. 그냥… 괜찮다고만 말하고.”

하늘이는 그 말을 이해했다. 말하지 않았지만, 이해했다.

“나도 괜찮아야 해?”

하늘이가 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세아는 하늘이를 바라봤다. 새벽 2시 45분. 이 시간에도 그는 여기에 있다. 그리고 그것이 자신의 선택이었다. 아무도 강요하지 않았다.

“아니. 넌 계속 나를 지켜줘.”

세아가 말했다.

“왜?”

하늘이가 물었다.

“왜냐하면 넌 내 손을 잡을 때, 족쇄처럼 느껴지지 않으니까.”

## 6부: 돌아가는 길

차 안은 조용했다. 라디오도 켜지 않았다. 그냥 엔진음과 도로의 소음만 있었다.

하늘이는 운전했다. 시선을 정면에 두고. 세아를 보지 않으면서도, 세아를 느끼고 있었다.

세아는 창밖을 봤다. 새벽의 도시. 아직도 깨어 있는 것들. 아직도 일하고 있는 것들. 아직도 살아가려고 하는 것들.

휴대폰이 울렸다. 강리우였다.

세아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왜 안 받아?”

하늘이가 물었다.

“나중에.”

세아가 말했다.

“뭐라고 할 거야?”

“모르겠어. 하지만 적어도 지금은 아니야. 지금은… 이 시간이 끝나가는 것을 보고 싶어.”

하늘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차는 계속 나아갔다. 새벽 3시. 어느 순간부터 하늘이 검은색에서 남색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곧 날이 밝을 것이었다.

세아는 그것을 봤다. 천천히, 그리고 확실하게 변해가는 하늘. 그 변화는 거대했지만, 폭력적이지 않았다. 그저 일어났다. 매일처럼.

“괜찮아?”

하늘이가 다시 물었다.

“응. 이제… 괜찮아.”

세아가 말했다. 그리고 그것은 거짓이 아니었다.

## 7부: 새로운 시작

새벽 4시. 하늘이는 세아를 집 앞에 내려줬다.

“고마워.”

세아가 말했다.

“괜찮아.”

하늘이가 대답했다.

그리고 웃음을 지었다. 그것은 따뜻한 웃음이었다.

세아는 차에서 내렸다. 하늘이가 떠나갈 때까지 봤다. 차의 뒷불이 멀어져 간다. 그리고 사라진다.

세아는 집의 열쇠를 들었다. 손이 떨리지 않았다.

문을 열었다. 안은 조용했다. 도현이는 깊은 잠에 들어 있을 것이었다.

세아는 도현이의 방 앞에 섰다. 문을 열지 않고, 그냥 문 앞에 섰다.

*“나는 누나가 행복했으면 좋겠어.”*

그 말이 계속 울렸다. 세아의 귀 속에서. 세아의 가슴 속에서.

세아는 깨달았다. 자신이 도현이를 위해 산다는 것은, 실제로는 도현이를 자신의 감옥에 가두는 것이었다는 것을. 그리고 도현이가 원하는 것은 그게 아니라, 자신이 행복하기를 원한다는 것을.

세아는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침대에 누웠다. 천장을 봤다. 어둠 속에서.

그리고 생각했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도현이를 위해서도 아니고, 강리우의 약속을 위해서도 아니고, 누군가의 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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