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37화: 불탈 준비
하늘이는 라면 국물을 마시지 않았다. 대신 플라스틱 의자에 앉은 채로 세아를 바라보고 있었다. 세아가 젓가락으로 면을 집어올릴 때마다 하늘이의 눈이 따라갔다. 그것은 먹이를 주는 사람이 동물을 관찰하는 방식 같았다. 걱정의 시선. 진단의 시선.
“넌 정말로 이게 사랑이라고 생각해?”
하늘이가 물었다. 세아는 면을 씹으면서 대답했다.
“누가 사랑이라고 했어?”
“넌 안 했지. 근데 그 사람이 했어. 강리우가. ‘너를 지키겠다’ ‘너를 내가 만들고 싶다’—이건 사랑의 언어야, 세아. 하지만 내가 봤을 때는 다른 것 같거든.”
세아는 국물을 마셨다. 너무 뜨거웠다. 입안이 화끈거렸다. 그 통증이 오늘 하루의 모든 것을 덮어버렸다. 감각이 단순해지는 순간. 어떤 생각도 할 수 없는 순간.
“뭐라고 생각해?”
“통제. 그리고 그것을 사랑이라고 부르려는 시도. 강남에서 많이 봤거든. 아버지들이 아들을 그렇게 만들어. ‘너를 위해서야’라면서. 그리고 그 아들들이 나중에 어떻게 되는지도 알아.”
휴게실의 형광등이 윙윙거렸다. 오래된 형광등. 세아는 그 윙윙거리는 소리를 들으면서 생각했다. 이 형광등도 누군가의 선택일까. 이 건물의 주인이 ‘이 형광등이 좋다’고 선택한 것일까. 아니면 그냥 저렴했기 때문일까.
“도현이가 뭐라고 했어? 정확하게.”
하늘이가 물었다. 세아는 도현이의 카톡을 생각해봤다. 도현이는 카톡을 자주 보냈다. 자주, 하지만 항상 짧게. MZ 세대의 말투로. 하지만 그 짧은 말 안에는 정확한 관찰이 있었다.
“’누나 요즘 왜 그래. 표정이 없어. 그리고 그 사람이 자꾸만 전화하는데, 누나는 왜 항상 받아. 좋으면 좋다고 하면 되지, 왜 자꾸 피해. 피하면서 받아. 그게 뭐야.’”
세아가 따옴표 안에서 도현이의 목소리를 복제했다. 정확하게. 도현이의 억양까지. 하늘이는 그것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17살이 맞네. 이미 다 알고 있네. 그리고 넌?”
“뭐가?”
“넌 뭐라고 했어? 도현이한테.”
세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라면을 계속 먹었다. 국물이 점점 식고 있었다. 식은 국물은 기름기가 보였다. 그것이 라면의 본모습이었다. 뜨거울 때는 맛있지만, 식으면 보기만 해도 질리는 것. 모든 음식이 그런 것은 아니었다. 어떤 음식은 식어도 맛이 있었다. 하지만 라면은 아니었다.
“세아야. 진심으로 물어볼게. 넌 지금 뭐를 하고 있어?”
하늘이의 목소리가 변했다. 조용해졌다. 조용한 목소리는 강한 목소리보다 더 위험했다. 그것은 최후통첩의 목소리였다.
“내가 뭐를 하고 있는 것 같아?”
“자해. 천천히 하는 자해. 손가락부터 시작해서, 나중에는 전부. 그리고 그 과정에서 그 사람(강리우)에게 완벽하게 의존하게 되는 거야. 그럼 강리우도 행복할 거고. 그 사람의 아버지(강민준)도 행복할 거고. 그리고 넌… 넌 사라질 거야. 천천히, 조용하게.”
세아는 라면 그릇을 내려놨다. 플라스틱 그릇이 테이블에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작은 소리였지만, 휴게실에서는 크게 들렸다.
“내가 선택한 거야.”
“그게 이유가 돼? 자신이 선택한 감옥은 감옥이 아니라고? 세아, 넌 도현이를 먹여 살려야 하고, 엄마를 돌봐야 하고, 그래서 계약서에 사인했어. 근데 이제는? 이제는 뭐야?”
세아는 하늘이의 얼굴을 봤다. 타투이스트의 얼굴. 언제나 웃고 있는 얼굴. 하지만 지금은 웃지 않고 있었다. 그것이 얼마나 드문 표정인지를 세아는 알고 있었다.
“강리우가 나한테 뭐라고 했는지 알아? 베를린에서 피아노를 그만둔 이유를 말했어. 아버지 때문에 3위를 받았고, 그 3위가 인생을 망쳤대. 그리고 그 일 때문에 자신이 없어졌대. 그래서 이제 내가 그런 일을 겪지 않도록 지키려고 한다고. 나를 통해서 자신의 트라우마를 치유하려고.”
하늘이가 한숨을 쉬었다.
“그건 치유가 아니라 복제야. 자신이 받은 상처를 남한테 주지 않기 위해 남을 가두는 거. 그게 뭘까? 사랑? 아니, 그건 두려움이야. 그리고 그 두려움이 타인을 옭아매는 거지.”
세아는 손가락을 봤다. 자신의 손가락. 세션 보컬의 손가락. 타인의 곡을 부르는 손가락. 손가락이 떨리고 있었다. 언제부터였을까.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손가락이 떨리기 시작했다. 강리우처럼. 그 피아니스트처럼.
“난 뭐를 해야 해?”
세아가 물었다. 그것은 진정한 질문이었다. 답을 모르는 사람의 질문. 옵션이 없는 사람의 질문.
“먼저 넌 JYA와의 계약을 다시 읽어봐야 해. 그 45페이지를 처음부터 끝까지. 그리고 그 안에서 넌 뭘 잃었고, 뭘 얻었는지를 정확하게 알아야 해. 그 다음에, 넌 강리우한테 거리를 둬야 해.”
“거리?”
“응. 그 사람이 너를 감시하고 있는데, 넌 왜 계속 연락받아? 왜 계속 만나? 왜?”
세아는 대답할 수 없었다. 왜인지를 모르고 있었다. 그것이 진짜 문제였다. 자신이 왜 강리우를 필요로 하는지를 정확하게 모르고 있었다. 사랑? 의존? 두려움? 희망? 모든 것이 섞여 있었다. 그리고 그 혼합물 속에서 세아는 천천히 용해되고 있었다.
“하늘이, 난…”
“뭐?”
“난 혼자일 수 없어. 혼자면 두려워. 그 회사도 두려워. 그 계약서도 두려워. 그래서 누군가 옆에 있어야 해. 누군가가 나를 지켜줘야 해.”
하늘이는 세아의 손을 잡았다. 타투이스트의 손. 따뜻했다. 강리우의 손처럼 따뜻했다. 하지만 다른 종류의 따뜻함이었다. 그것은 지배의 따뜻함이 아니라, 함께함의 따뜻함이었다.
“그럼 내가 옆에 있을게. 혼자가 아니야. 절대로. 그리고 넌 그 회사랑도 계약 조건을 다시 협상해야 해. 혼자가 아니라, 누군가와 함께. 아니면 법률 자문가와 함께.”
“법률 자문가? 난 그런 돈이…”
“있어. 내가 도와줄게. 아, 그리고…”
하늘이가 세아의 쇄골 아래, 타투가 있는 부분을 손가락으로 톡 건드렸다. 성냥의 모양. 세아가 며칠 전에 한 것.
“이거. 이게 뭐야? 왜 성냥?”
세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자신도 모르고 있었다. 왜 성냥이었는지. 왜 하늘이에게 “성냥 모양으로 해줄 수 있어?”라고 물었는지. 그냥 그 순간의 충동이었다. 무언가 타는 것처럼 느껴지는 감정. 그것을 표현하고 싶었다. 그래서 성냥. 불꽃이 아니라 성냥. 타기 직전의 것.
“그거… 다른 의미가 있어?”
“글쎄. 내가 마음대로 한 거야.”
“성냥은 혼자는 못 태워. 성냥은 다른 것을 태워야 의미가 있어. 그런데 넌? 넌 자신을 태우려고 하고 있어. 다른 것을 위해서. 그게 성냥의 본질이야. 다른 것을 밝히기 위해 자신을 소모하는 것. 그런데 넌, 세아, 넌 다른 것들을 위해 타고 있어. 도현이를 위해. 엄마를 위해. 강리우를 위해. 그리고 이제는 JYA를 위해. 언제 너 자신을 위해 탈 거야?”
세아는 하늘이의 말을 들으면서 깨달았다. 자신이 얼마나 많은 것들을 버텨왔는지를. 그리고 그것들을 모두 타인을 위해서만 버텨왔다는 것을.
휴게실의 형광등이 계속 윙윙거렸다. 세아는 그 소리를 듣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자신의 심장음 같았다. 계속 뛰지만, 결국 언젠가는 멈출 음. 그 멈춤이 언제일까. 아직 멀까. 아니면 가까울까.
“내일 뭐해?”
하늘이가 물었다. 평범한 질문. 하지만 지금 세아에게는 무거운 질문이었다.
“편의점. 그 다음에…”
“그 다음에 뭐?”
“강리우한테 전화받을 거야. 아마.”
“받지 마. 내일은 받지 마.”
“근데…”
“’근데’ 없어. 하루만. 하루만 시간을 가져. 그리고 그 하루 동안 계약서를 다시 읽어봐. 그리고 넌 이게 뭘 의미하는지를 정확하게 알아야 해. 그래야 다음 단계로 나갈 수 있어.”
세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끄덕이면서도 알고 있었다. 자신이 내일 강리우의 전화를 받을 것이라는 것을. 받지 않을 수 없을 것이라는 것을. 왜냐하면 그 전화가 없으면 자신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느껴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느낌이 가장 두렵기 때문이다.
하늘이는 일어났다.
“이따 저녁은? 편의점?”
“응. 저녁 6시부터 새벽 2시까지.”
“그럼 내가 저녁 10시쯤에 와줄게. 그리고 넌 내가 올 때까지 그 계약서 페이지를 읽고 있어야 해. 최소한 20페이지는.”
“알겠어.”
세아가 대답했다. 하지만 그 대답은 거짓이었다. 세아는 저녁에 계약서를 읽지 않을 것이다. 대신 강리우의 전화를 기다릴 것이다. 그리고 강리우가 전화를 할 때, 자신이 받을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늘이는 휴게실을 나갔다. 세아는 혼자 남았다. 라면 그릇이 테이블 위에 있었다. 이미 식은 라면. 기름기가 떠 있었다. 세아는 그것을 보면서 생각했다. 모든 따뜻한 것도 결국은 식는다. 그리고 식으면 다시 데워야 한다. 하지만 다시 데워진 것은 처음만큼 맛있지 않다. 그래도 먹어야 한다. 왜냐하면 살아가려면 먹어야 하기 때문이다.
오후 3시 15분. 세아는 계산대로 돌아갔다. 편의점 계산대. 평일 오후의 GS25. 아무것도 변하지 않은 곳. 하지만 세아는 이미 변해버렸다. 아무도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천천히.
저녁 6시. 세아는 유니폼을 입었다. GS25의 파란색 유니폼. 그 색깔은 세아를 투명하게 만들었다. 고객들은 세아를 보지 않았다. 그들은 계산을 했고, 돈을 내고, 나갔다. 세아는 그들의 일부였을 뿐이다. 편의점의 일부. 시스템의 일부.
오후 7시 42분. 강리우의 첫 번째 전화가 왔다.
세아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하늘이의 말을 기억했다. “받지 마. 하루만.”
하지만 전화는 계속 울렸다. 울렸다가 끊겼다. 그리고 5분 후 다시 울렸다.
세아는 손을 주머니에 넣었다. 휴대폰이 울리는 것을 느꼈다. 진동. 그것은 마치 자신의 심장이 가슴 밖에서 울리는 것 같았다.
오후 8시 15분. 강리우의 여덟 번째 전화.
계산대에는 손님이 많아졌다. 저녁 시간. 사무직 직원들이 들어왔다. 그들은 편의점 도시락을 사갔다. 혼자 먹을 도시락. 세아는 그들의 얼굴을 보면서 생각했다. 저들도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을까. 아니면 혼자인 것에 익숙해졌을까.
오후 10시. 하늘이가 도착했다.
세아는 하늘이를 봤다. 타투이스트의 얼굴. 여전히 웃고 있지 않았다.
“몇 통이야?”
“뭐?”
“전화. 그 사람이.”
“많아.”
“몇 통?”
“세지 않았어.”
하늘이는 한숨을 쉬었다.
“계약서 읽었어?”
“못했어. 손님이 많았고…”
“거짓말. 이 시간에는 손님이 별로 없어. 그럼 넌 뭘 했어?”
세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자신이 뭘 했는지를 정확하게 말할 수 없었다. 그냥 시간이 지났다. 강리우의 전화를 받지 않으면서 시간이 지났다. 그리고 그 시간들이 고통스러웠다. 마치 숨을 참고 있는 것 같은 고통.
“좋아. 그럼 이제부터 읽어. 내가 옆에 있을 테니까.”
하늘이는 세아 옆에 앉았다. 계산대 의자. 불편한 의자. 하지만 하늘이는 거기 앉아서 세아를 지켜봤다. 마치 세아가 도망갈 수도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처럼.
세아는 휴대폰을 꺼냈다. 클라우드에 저장된 계약서. PDF 파일. 45페이지. 세아는 1페이지부터 읽기 시작했다.
“주계약당사자 강민준(이하 ‘회사’라 칭함) 및 나세아(이하 ‘계약자’라 칭함) 간의 전속계약(Exclusive Artist Contract)에 관한 조항”
세아는 읽었다. 그리고 읽으면서 깨달았다. 자신이 뭘 서명했는지를.
조항 3. 저작권 이전. “계약자가 계약 기간 동안 창작한 모든 음악 저작물의 저작권은 회사에 귀속된다.”
조항 5. 배타적 권리. “계약자는 회사의 사전 승인 없이 타 회사와의 음악 활동을 금지한다.”
조항 7. 보수 규정. “계약자는 앨범 발매 시 판매량의 5%를 보수로 받는다. 단, 제작비, 마케팅비 등의 비용은 계약자가 부담한다.”
세아는 계속 읽었다. 페이지가 넘어갔다. 2페이지. 3페이지. 5페이지. 10페이지.
그리고 10페이지에서 세아는 멈췄다.
조항 15. 계약 해지 조건. “계약자가 계약을 해지하고자 할 경우, 회사에 10억 원의 위약금을 지불해야 한다.”
10억 원. 세아는 그 숫자를 읽고 다시 읽었다. 10억. 자신의 평생 연봉. 자신의 부모의 평생 연봉. 10억 원.
“봤지?”
하늘이가 물었다.
“응.”
“이게 뭐라고 생각해?”
“감옥.”
세아가 대답했다. 그리고 그 순간, 자신이 얼마나 깊이 빠져 있었는지를 깨달았다. 그것은 사랑의 함정이 아니라, 법률의 함정이었다. 그리고 그 함정 속에서 세아는 천천히 죽어가고 있었다.
강리우의 또 다른 전화가 울렸다.
이번에는 세아가 받지 않으려고 했다. 하지만 손이 저절로 움직였다.
“여보세요?”
“세아. 넌 왜 안 받아?”
강리우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 목소리는 따뜻했다. 하지만 세아는 이제 알고 있었다. 그 따뜻함이 뭔지를. 그것은 갇혀 있는 사람을 따뜻하게 데워주는 불. 그래서 더 이상 탈출할 수 없게 만드는 불.
“그냥… 바빴어.”
“뭐가 그렇게 바빠? 편의점 알바?”
“응.”
“세아. 너 지금 뭐 하고 있어?”
세아는 창밖을 봤다. 합정동의 밤. 네온사인들. 사람들의 그림자. 모두가 자신의 길을 가고 있었다. 그리고 세아도 자신의 길을 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 길이 자신의 선택인지, 누군가의 강요인지를 더 이상 알 수 없었다.
“계약서를 읽고 있어.”
세아가 대답했다.
침묵. 전화선 너머에서 침묵이 흘렀다.
“뭘 봤어?”
강리우의 목소리가 변했다. 더 조심스러워졌다.
“10억 원. 위약금.”
또 다른 침묵.
“세아, 그건…”
“뭐가?”
“그건 너를 보호하기 위한 거야. 혹시 나쁜 회사가 너를 빼가지 않도록.”
“아, 그래. 그럼 난 안전해. 완벽하게.”
세아의 목소리에는 비꼼이 있었다. 처음으로. 강리우는 그것을 감지했다.
“누가 그 얘기를 해줬어? 하늘이?”
“상관없지.”
“상관이 있어. 세아, 너 지금 다른 사람한테 영향받고 있어. 내가 너를 보호하려고 하는데…”
“보호가 아니라 가두는 거 아니야?”
세아가 말했다. 그리고 그 말이 끝난 순간, 세아는 강리우의 침묵을 느꼈다. 깊은 침묵. 상처의 침묵.
“내일 만나자. 제대로 얘기하자.”
“싫어.”
“뭐?”
“내가 싫어. 내일은 못 만나.”
“그럼 언제?”
“모르겠어.”
세아는 전화를 끊었다. 손이 떨리고 있었다. 강리우처럼. 그 피아니스트처럼.
하늘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세아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그 따뜻함 속에서, 세아는 처음으로 깨달았다.
자신이 타기 위해 준비되고 있었다는 것을.
성냥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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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의 온기 – 확장판
## 1부: 전화
손가락이 화면을 향해 움직이고 있었다. 세아는 자신의 손을 바라봤다. 마치 다른 누군가의 것처럼. 누군가 다른 사람이 그녀의 몸을 조종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손가락은 거부했지만, 손은 이미 수화기를 들고 있었다. 뇌가 명령하기 전에 신체가 먼저 움직였다. 이것이 습관의 힘인가, 아니면 더 깊은 무언가의 영향력인가.
핸드폰 화면이 밝아졌다. 강리우의 이름이 떴다. 그 이름을 보는 것만으로도 세아의 가슴이 철렁했다. 자신도 모르게 손가락이 수신 버튼을 눌렀다. 거부할 수 없는 무언가가 그녀를 움직이게 했다. 혹은 거부하려는 의지가 너무나 약했던 것일 수도 있다.
“여보세요?”
세아의 목소리는 작았다. 마치 자신이 아닌 누군가의 목소리를 내뱉는 것처럼 느껴졌다. 휴대폰 너머로 들려오는 숨소리. 강리우가 안도의 숨을 쉬는 소리였다.
“세아. 넌 왜 안 받아?”
강리우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 목소리는 따뜻했다. 마치 겨울 밤 모닥불 앞에 앉아 있을 때 느끼는 그런 온기. 음성에는 걱정과 사랑이 섞여 있었다. 하지만 세아는 이제 알고 있었다. 그 따뜻함이 정확히 무엇인지를.
그것은 우아한 감옥의 벽이었다. 그것은 갇혀 있는 사람을 따뜻하게 데워주는 불. 그래서 더 이상 탈출하고 싶지 않게 만드는 불. 점차 그 불이 커질수록 밖의 세상은 더욱 차갑고 위험해 보였다. 그리고 세아는 자신도 모르게 더욱 그 불빛 속으로 깊이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그냥… 바빴어.”
세아가 대답했다. 거짓이었다. 편의점 알바를 마친 지 벌써 2시간가 지났다. 그동안 그녀는 자신의 원룸에 누워만 있었다. 천장을 바라보며. 무언가를 기다리면서. 아니면 무언가에서 도망치면서.
“뭐가 그렇게 바빠? 편의점 알바?”
“응.”
세아의 대답은 짧았다. 강리우와의 대화는 항상 이렇게 짧았다. 마치 대화를 길게 끌수록 더 많이 노출될까봐 무서운 것처럼. 강리우는 그런 세아의 태도를 모를 리가 없었다. 그는 언제나 한 발 더 들어왔다.
“세아. 너 지금 뭐 하고 있어?”
이 질문이 함정이라는 것을 세아는 알고 있었다. 강리우는 그녀의 행동만 묻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그녀의 마음, 생각, 감정을 읽으려고 했다. 이것이 그의 방식이었다. 부드럽지만 확실한 통제.
세아는 창밖을 봤다. 합정동의 밤이 펼쳐져 있었다. 네온사인들이 어두운 하늘을 밝히고 있었다. 빨강, 파랑, 노랑 – 각각의 색깔이 서로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거리의 사람들은 모두 자신의 길을 가고 있었다. 누군가는 빠르게, 누군가는 느리게. 하지만 모두가 어딘가로 향하고 있었다.
세아도 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 길이 자신의 선택인지, 누군가의 강요인지를 더 이상 알 수 없었다. 아니, 그것을 인정하기가 너무나 두려웠다.
“계약서를 읽고 있어.”
세아가 대답했다. 이것은 사실이었다. 책상 위에는 수십 장의 계약서가 놓여 있었다. 그녀는 지난 한 시간 동안 그것들을 읽으려고 시도했다. 하지만 글자들이 자꾸만 흐릿해졌다. 마치 그것들이 의도적으로 이해되지 않기 위해 적혀 있는 것처럼.
침묵이 흘렀다. 전화선 너머에서. 마치 시간이 멈춘 것 같은 침묵. 세아는 강리우가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그의 침묵의 패턴을 이미 충분히 학습했으니까.
“뭘 봤어?”
강리우의 목소리가 변했다. 더 조심스러워졌다. 그 변화는 거의 감지할 수 없을 정도지만, 세아는 감지했다. 그것은 위험신호였다. 마치 동물이 포식자의 냄새를 맡을 때처럼.
“10억 원. 위약금.”
세아가 천천히 말했다. 계약서에 명시된 그 숫자. 10억. 그 숫자 앞에서 세아는 작아졌다. 자신의 실제 가치를 깨닫는 순간이었다. 10억 원. 그것이 자신의 가격이었다.
또 다른 침묵. 더 길고, 더 무거운 침묵.
“세아, 그건…”
강리우가 말을 꺼냈다. 그의 목소리에는 설명하려는 간절함이 있었다. 마치 자신이 저지른 실수를 정당화하려는 것처럼.
“뭐가?”
세아가 물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차가웠다. 자신도 놀랄 정도로.
“그건 너를 보호하기 위한 거야. 혹시 나쁜 회사가 너를 빼가지 않도록. 이 업계는 더럽거든. 넌 모르겠지만 정말 위험해. 그래서 난…”
강리우의 설명이 이어졌다. 그는 항상 이렇게 설명했다. 모든 것이 그녀를 위한 것이라고. 하지만 세아는 이제 그 말의 다른 면을 보고 있었다.
“아, 그래. 그럼 난 안전해. 완벽하게.”
세아의 목소리에는 처음으로 비꼼이 명확하게 드러났다. 그것은 날카로운 칼날처럼. 강리우는 그것을 즉시 감지했다. 마치 그가 기다렸던 것처럼.
“누가 그 얘기를 해줬어? 하늘이?”
강리우의 목소리가 경고음을 내고 있었다. 세아는 하늘이의 이름이 나오는 순간 자신의 심장이 철렁했음을 느꼈다. 하늘이. 그 이름 하나만으로도 복잡한 감정이 피어올랐다.
“상관없지.”
세아가 차갑게 대답했다.
“상관이 있어. 세아, 너 지금 다른 사람한테 영향받고 있어. 내가 너를 보호하려고 하는데, 넌 그걸 모르는 거야. 그 사람은 너한테 뭐라고 했어? 내가 너를 가뒀다고? 그런 식으로 꼬였거지?”
강리우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처음이었다. 그가 이렇게 감정을 드러내는 것을 세아는 처음 봤다. 아니, 처음 들었다. 이것이 그의 진정한 모습인가. 아니면 이것도 그녀를 조종하기 위한 한 가지 방법인가.
“보호가 아니라 가두는 거 아니야?”
세아가 말했다. 그 말이 나오는 순간, 세아는 후회했다. 아니, 후회하지 않았다. 오히려 통쾌했다. 그리고 그 통쾌함이 죄책감으로 변했다.
강리우의 침묵이 흘렀다. 깊은 침묵. 상처의 침묵. 마치 세아가 그의 가슴에 칼을 찔렀을 때의 그 침묵.
“내일 만나자. 제대로 얘기하자.”
강리우가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다시 차분해졌다. 하지만 그 차분함 아래에는 무언가 깨진 것이 있었다.
“싫어.”
세아가 말했다. 자신도 놀랄 정도로 즉각적인 거부였다.
“뭐?”
강리우가 물었다. 마치 자신이 들은 것이 거짓일 수도 있다고 희망하는 것처럼.
“내가 싫어. 내일은 못 만나.”
세아의 목소리는 분명했다. 하지만 그 분명함 아래에는 두려움이 있었다. 강리우를 만나면, 그는 다시 그녀를 자신의 불빛 속으로 끌어당길 것이다. 그리고 세아는 다시 그 따뜻함에 항복할 것이다. 그것을 알고 있었다.
“그럼 언제?”
강리우가 물었다. 그의 질문에는 절박함이 있었다.
“모르겠어.”
세아가 대답했다. 그것이 모든 것의 끝이었다. 그녀는 전화를 끊었다. 손이 떨리고 있었다. 마치 강리우의 손처럼. 그 유명한 피아니스트의 손처럼. 무대 위에서 자신의 감정을 모두 쏟아내는 그의 손처럼.
## 2부: 하늘이
방의 문이 열렸다. 하늘이가 들어섰다. 그는 세아의 손을 봤다. 그 떨리는 손.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세아에게 다가갔다. 느리지만 확실하게. 마치 놀란 새를 진정시키듯이.
하늘이의 손이 세아의 손을 감쌌다. 그의 손은 따뜻했다. 하지만 강리우의 따뜻함과는 달랐다. 이것은 강요하지 않는 따뜻함이었다. 누군가를 가두는 불이 아니라, 단순히 함께 밤을 견디는 불이었다.
“괜찮아?”
하늘이가 물었다. 그의 목소리는 낮고 부드러웠다. 마치 그녀의 상처에 직접 닿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응.”
세아가 대답했다. 거짓이었지만, 이것이 그녀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하늘이는 세아를 자신의 옆에 앉히고, 함께 창밖을 봤다. 합정동의 밤이 여전히 펼쳐져 있었다. 그 밤 속에서, 세아는 처음으로 깨달았다.
자신이 뭔가를 타기 위해 준비되고 있었다는 것을.
마치 성냥처럼.
누군가의 손이 자신을 꺼내들었다. 마찰시키고, 불을 붙이고, 사용했다. 그리고 그 불이 다 타면, 검게 탄 줄기가 바닥에 떨어질 것이다.
“세아.”
하늘이가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응?”
“넌 성냥이 아니야.”
하늘이가 말했다. 마치 그녀의 마음을 읽은 것처럼.
세아는 하늘이를 봤다. 그의 얼굴은 어두웠지만, 그의 눈은 밝았다. 그 눈 속에는 확신이 있었다. 그것이 거짓인지 진실인지 세아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것을 믿고 싶었다. 아니, 믿어야 했다.
왜냐하면 자신이 성냥이라는 것을 받아들일 수는 없었으니까.
## 3부: 밤의 질문들
밤이 깊어가고 있었다. 세아와 하늘이는 여전히 창가에 앉아 있었다. 손을 맞잡은 채로. 밖의 네온사인들이 점차 꺼져가고 있었다. 사람들이 잠자리에 들고, 세상이 조용해지고 있었다.
세아의 마음속에는 여러 질문들이 떠다니고 있었다.
강리우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까. 여전히 자신의 전화를 기다리고 있을까. 아니면 이미 포기했을까. 아니, 강리우는 절대 포기하지 않는다. 그것이 그의 방식이었다. 포기하지 않고, 계속 추격하고, 결국 자신을 다시 자신의 불빛 속으로 끌어당길 것이다.
“뭐 생각해?”
하늘이가 물었다.
“아무것도.”
세아가 거짓말을 했다.
“거짓말하지 마. 넌 얼굴에 다 나타나.”
하늘이가 웃으며 말했다. 그 웃음은 따뜻했다. 하지만 애처로웠다. 마치 그가 이미 세아가 거짓말을 할 것을 알고 있던 것처럼.
“강리우 생각 중이야?”
세아가 답하지 않았다. 그것이 곧 긍정이었다.
“그 사람이 널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아?”
하늘이가 물었다.
“그걸 뭐라고 부르는 거에요?”
세아가 되물었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비꼼이 있었다.
“통제. 소유욕. 편집증.”
하늘이가 차분하게 대답했다.
“그건 사랑이 아니라고?”
“사랑도 있겠지. 하지만 그 사람의 사랑은 독이야. 달콤하지만 독.”
세아는 하늘이의 말을 들었다. 그것은 옳았다. 하지만 옳은 말이 항상 도움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세아는 이미 그 독에 중독되어 있었으니까.
“내가 그 사람한테서 벗어날 수 있을까?”
세아가 물었다. 이것이 가장 중요한 질문이었다.
“모르겠어. 넌 벗어나고 싶어?”
하늘이가 되물었다.
세아는 답하지 않았다. 그것은 너무 복잡한 질문이었다. 벗어나고 싶은가. 그렇다. 하지만 동시에 벗어나고 싶지 않은가. 그것도 그렇다.
## 4부: 새벽의 깨달음
새벽이 오고 있었다. 밤이 점차 가시고, 동쪽 하늘이 밝아지고 있었다. 검은색에서 파란색으로, 파란색에서 회색으로, 회색에서 빨간색으로 변하고 있는 하늘.
세아는 이 변화를 보면서 깨달았다. 모든 것이 변한다는 것을. 밤도 변하고, 낮도 변한다. 그리고 사람도 변한다. 자신도 변할 수 있다는 것을.
“하늘이.”
세아가 불렀다.
“응?”
“나 뭐 해야 해?”
세아가 물었다. 이것은 직접적인 조언을 구하는 질문이었다.
“넌 뭐 하고 싶어?”
하늘이가 되물었다.
“그게… 잘 모르겠어.”
세아가 솔직하게 대답했다.
“그럼 일단 계약서를 찢어.”
하늘이가 말했다.
“못 해.”
세아가 즉시 대답했다.
“왜?”
“10억이…”
세아가 말했다.
“10억이 뭐해. 그 돈은 너를 파는 돈이야. 그런 돈은 가질 가치가 없어.”
하늘이의 목소리가 단호했다.
세아는 그의 말을 듣고 있었다. 논리적으로는 옳았다. 하지만 감정적으로는… 그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그는 모르고 있었다. 강리우를 떠나는 것. 그 따뜻한 불을 떠나는 것. 그것은 자살과 같았다. 적어도 지금의 세아에게는.
“시간이 걸려. 제발.”
세아가 간청했다.
하늘이는 세아를 바라봤다. 오랫동안. 마치 그녀를 정확히 파악하려는 것처럼.
“알았어. 시간을 줄게. 하지만 기억해. 넌 성냥이 아니야. 그리고 난 너를 태우지 않을 거야.”
하늘이가 약속했다.
세아는 그 약속이 지켜질까봐 두려웠다. 왜냐하면 약속이란 깨질 수도 있으니까. 모든 사람들이 깨뜨린다. 심지어 사랑한다고 하는 사람들도.
하지만 지금은 이 약속을 믿어야 했다. 그것이 살아가는 방법이었다.
## 5부: 새로운 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