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아닌 것을 위해 불탄 소녀 – 제23화: 커피 위의 거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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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23화: 커피 위의 거짓

강남역 8번 출구 앞의 커피숍은 세아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작았다.

작고, 조용하고, 비싼 냄새가 났다. 에스프레소와 초콜릿의 향 아래로 뭔가 화학적인 냄새가 섞여 있었다. 향료인가. 아니면 그냥 돈이 타는 냄새인가. 세아는 문을 밀고 들어갔다. 오전 일곱 시 이십분. 아침 러시 시간이었지만 이 가게는 한산했다. 이곳에 오는 사람들은 이미 직장에 가 있거나, 아직 자고 있을 시간이었다.

강리우는 창가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세아가 그를 본 것은 문을 열고 들어온 지 0.5초 후였다. 하지만 그가 세아를 본 것은 그보다 먼저였다. 아마 세아가 지하철에서 내렸을 때부터 봤을 수도 있다. 창밖을 보고 있었으니까. 그의 얼굴은 창에 비친 서울의 이른 아침과 겹쳐 있었다. 차량 위로 떠오르는 햇빛, 건설 장비의 철거음, 그리고 그의 얼굴.

세아는 그의 테이블로 걸어갔다. 다리가 자신의 것이 아닌 것 같았다. 누군가 다른 사람의 다리를 차용해서 움직이고 있는 느낌. 왼발, 오른발. 타일 바닥 위의 다섯 걸음. 여섯 걸음. 테이블에 도착했다.

“앉아.”

강리우가 의자를 밀었다. 세아의 대각선에 있는 의자. 그는 자신의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블랙 커피. 거의 마셔서 잔에는 얼마 남지 않았다. 오래 기다렸다는 뜻이었다. 혹은 기다리면서 계속 마셨다는 뜻. 신경을 쓰기 위해.

세아가 앉았다.

“밤새 뭐 했어.”

질문이 아니었다. 확인이었다. 그의 목소리는 이미 회복되어 있었다. 강남역 근처의 밝은 햇빛 아래서, 그는 다시 자신의 모습을 갖추고 있었다. 느리고, 명확하고, 통제된 목소리. 하지만 눈은 다르지 않았다. 눈 아래의 다크서클이 더 짙어져 있었다. 또는 새벽 조명과 오전 햇빛의 차이 때문일 수도 있다. 세아는 자신도 같은 모습일 거라고 생각했다.

“걸었어요. 한강을 따라.”

“핸드폰은.”

“가지고 나가지 않았어요.”

강리우가 눈을 깜박였다. 한 번. 그것이 그의 모든 반응이었다.

“아버지가 계약서를 직접 준비했어.”

세아가 답하지 않았다.

“내가 모르는 사이에. 사실 알고 있었는데, 정확한 내용은 모르고 있었어. 아버지는 항상 그렇거든. 중요한 부분은 나중에 알려줘.”

강리우가 남은 커피를 마셨다. 잔이 비었다. 그는 잔을 내려놨다. 테이블 위에서 작은 소리가 났다. 세라믹 대 세라믹의 소리. 고통스러운 소리였다.

“너는 그걸 봤어.”

“네.”

“그리고 뭐라고 생각했어.”

세아는 그 질문에 대답하고 싶지 않았다. 대신 창밖을 봤다. 강남의 아침. 높은 건물들이 햇빛을 받고 있었다. 그 건물들 안에는 몇 천 명의 사람들이 앉아서 일을 하고 있을 것이다. 그들은 모두 계약서를 읽은 사람들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들은 그 계약서의 함정을 알고 있을 거라고. 혹은 알고도 무시했을 거라고.

“함정이 많다고 생각했어요.”

강리우가 웃음을 냈다. 아주 작은 웃음. 거의 숨 쉬는 소리 같은 웃음.

“그래. 함정이 많아. 내가 설계하지 않은 함정들이야. 아버지가 설계한. 그리고 내가 그걸 모르는 척 했어. 아니, 정확하게는 외면했어.”

그가 손을 들었다. 길고 마디 굵은 손. 세아는 그 손을 보면서 피아니스트의 손이라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그는 더 이상 피아노를 치지 않는다. 혹은 칠 수 없다. 세아는 그의 손이 떨리는 것을 본 적이 있다. 음악 얘기를 할 때. 처음에는 추위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렇지 않았다.

“내가 너를 회사로 데려가고 싶었어.”

“네.”

“너의 음악 때문에. 순수한 이유로. 그리고 나는 그게 맞다고 생각했어. 너는 묻혀서는 안 되는 사람이거든. 그런데 아버지는 다르게 봤어.”

강리우가 다시 웃음을 냈다. 이번엔 더 진짜 같은 웃음. 하지만 더 슬픈 웃음.

“아버지가 본 건 너의 음악이 아니었어. 너의 음악을 사용해서 누군가 다른 사람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거였어. 박소진 같은. 혹은 아직 나오지 않은 다른 아티스트들 같은.”

세아의 손이 테이블 위에 있었다. 강리우가 그것을 봤다. 그는 세아의 손을 자신의 손으로 덮었다. 웅크린 동작은 아니었다. 그냥 덮었다. 따뜻함을 주려는 것 같지도 않았다. 그냥 손을 덮었다.

“내가 너를 속였어. 의도하지 않았지만, 결과적으로는 속였어.”

“속이신 게 아니에요.”

“나세아.”

그가 자신의 이름을 불렀다. 처음으로. 지금까지 자신의 이름을 들을 때마다 세아는 누군가가 자신을 부르는 건지, 아니면 누군가 다른 사람을 부르는 건지 헷갈렸다. 이름이 자신의 것이 아닌 것처럼 들렸다. 마치 세아는 그 이름의 임시 보관자일 뿐인 것처럼.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지금은 자신의 이름이 자신의 것이라는 걸 느꼈다.

“사인할 거야.”

“네?”

“계약서. 사인할 거야.”

세아가 강리우를 봤다. 그의 눈은 창밖을 보고 있었다. 아침 햇빛이 그의 얼굴을 정확하게 비추고 있었다. 그의 눈 아래의 그림자가 보였다. 그리고 그 그림자 아래의 무언가. 결정이 아니라 포기. 아니, 그것도 아니다. 선택. 그것도 정확하지 않다.

“왜요.”

강리우가 세아를 봤다.

“왜냐하면, 너의 음악이 세상에 나와야 하니까. 어떤 방식이든. 어떤 대가를 치르든.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야.”

세아는 그 말을 두 번 반복해서 들었다. 한 번은 그의 입에서, 한 번은 자신의 머리 안에서. 그리고 두 번째 반복할 때, 그 말이 거짓이라는 걸 알았다. 완전한 거짓은 아니었지만, 절반의 거짓이었다. 아니, 거짓이 아니라 불완전한 진실이었다.

“그게 아니잖아요.”

강리우가 눈을 깜박였다. 두 번. 세아가 그를 꿰뚫어봤다는 신호였다.

“너는 이미 알고 있어.”

“네.”

“그럼.”

“당신이 하고 싶은 말을 해 주세요.”

강리우가 손을 떼었다. 세아의 손에서. 그는 손을 다시 자신의 무릎 위에 놨다. 세아는 그의 손이 떨리는 걸 봤다. 아주 약간. 거의 눈에 띄지 않는 정도로. 하지만 분명히 떨리고 있었다.

“베를린에 있을 때, 나는 피아니스트였어.”

세아가 몸을 기울였다. 강리우는 계속했다.

“쇼팽 콩쿠르에 참가하려고 준비 중이었어. 아버지가 돈을 대줬고, 최고의 선생님이 나를 가르쳤어. 모든 게 완벽했어. 아니, 완벽하려고 했어.”

그가 멈췄다. 커피를 마시고 싶었던 것 같지만, 잔은 이미 비어 있었다. 그는 빈 잔을 들었다. 그리고 내려놨다.

“그런데 어느 날 아침, 나는 피아노 앞에 앉을 수 없었어. 손이 안 움직였어. 아니, 정확하게는 움직였는데 음악이 나오지 않았어. 손가락은 건반을 찾았는데, 그 건반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겠더라. 키보드는 있는데 언어가 사라진 거야. 마치 네 목소리가 사라진 것처럼.”

세아가 숨을 참았다.

“그래서 나는 도망쳤어. 한국으로. 아버지에게 귀국했다고 했어. 그리고 아버지는 내게 음악을 강요하지 않았어. 대신 다른 걸 강요했어. 회사. 계약서. 아티스트들을 만드는 일. 그런데 알겠어? 그게 더 쉬웠어. 나는 피아노 앞에서는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사람이었는데, 계약서 앞에서는 말할 수 있었어. 계약서 같은 거는 거짓으로도 작동하니까.”

강리우가 세아를 봤다.

“그리고 너를 봤을 때, 나는 나를 봤어. 너의 음악이 나오고 있는데, 너는 그걸 억누르고 있었어. 나처럼. 그래서 나는 너를 구하고 싶었어. 내가 구원받지 못했던 방식으로. 그런데 나는 결국 너를 같은 길로 밀어넣었어. 아버지처럼. 아버지의 도구가 되어서.”

세아의 손이 다시 움직였다. 테이블 아래로. 자신의 무릎 위로. 그리고 주먹을 쥐었다. 손톱이 손바닥을 찔렀다. 아프지 않았다. 그 정도의 통증은 세아가 느끼지 못하는 종류의 것이었다.

“사인하면 뭐가 달라져요.”

“크레딧이 정정될 거야. 법적으로 보장되지는 않겠지만, 아버지가 하기로 약속했어. 그리고 너는 회사의 일원이 되고, 너의 곡들이 공식적으로 세상에 나올 거야. 아까는 다른 사람의 이름으로. 이제는 너의 이름으로.”

“하지만 그 다음에는요.”

강리우가 대답하지 않았다.

“그 다음에도 당신 아버지가 계속 나를 쓸 거잖아요.”

“맞아.”

강리우가 인정했다. 그게 세아가 원한 대답이었다. 거짓 없이. 약속 없이. 그냥 인정.

“내가 할 수 있는 건 여기까진데, 나는 그걸 해주고 싶어. 너를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위해서. 내가 도망친 것들을 직면하기 위해서. 너를 구하는 척하면서, 사실은 나 자신을 구하려고 하는 거야.”

세아가 창밖을 봤다. 강남의 아침은 이제 본격적으로 시작되고 있었다. 사람들이 길을 걷고 있었다. 모두 정해진 방향으로. 정해진 속도로. 아무도 옆을 보지 않고.

“당신은요.”

“뭐.”

“당신은 피아노를 다시 칠 수 없어요?”

강리우의 얼굴이 바뀌었다. 미세한 변화였다. 눈썹이 0.5도 올라갔다. 그것이 전부였다. 하지만 세아는 그것을 봤다.

“모르겠어.”

“시도해봤어요?”

“아니.”

“왜요.”

“두려워서. 그리고… 그게 내 음악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게 무서워서. 혹은 내 음악이 아니라는 걸 확인하는 게 무서워서. 아버지의 음악일 수도 있고, 선생님의 음악일 수도 있고, 아니면 그냥 내가 배운 음악일 수도 있어. 내가 만든 게 아니라 내가 복제한 음악.”

세아는 그 말을 이해했다. 그 두려움이 뭔지. 자신의 음악과 다른 사람의 영향 사이의 경계. 어디까지가 자신의 것이고, 어디부터가 빌린 것인지. 그 경계가 흐릿한 두려움.

“내가 사인할게요.”

강리우가 눈을 크게 떴다.

“계약서.”

“왜.”

세아가 강리우를 봤다. 그의 눈은 다시 창밖을 보고 있었다. 하지만 귀는 세아에게 향해 있었다. 모든 신경이 세아의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당신이 베를린에 가 있을 때, 당신은 자신의 음악을 찾고 있었어요. 그리고 못 찾았어요. 그래서 도망쳤어요. 그런데 나는 이미 도망친 사람이에요. 아무것도 찾고 있지 않아요. 이미 포기했어요. 그러니까 나는 사인해도 돼요. 당신이 하지 못한 선택을 내가 대신할 수 있어요.”

“나세아.”

“그 대신.”

세아가 강리우의 손을 잡았다. 테이블 위에서. 공개적으로. 이 커피숍의 주인이 볼 수 있게, 아침 거리의 사람들이 창밖을 통해 볼 수 있게.

“당신은 피아노를 다시 쳐야 해요.”

강리우가 움직이지 않았다.

“내가 사인하는 대신, 당신이 해야 할 일. 당신의 음악을 찾는 일. 내가 못 찾은 것. 당신이 찾아야 해요.”

“그건 거래가 아니야. 내가 강요할 수 있는 게 아니야.”

“네. 하지만 나는 지금 당신에게 부탁하고 있어요.”

강리우의 손이 떨렸다. 세아의 손 안에서. 선명하게. 더 이상 숨길 수 없을 정도로.

“약속할 수 없어.”

“그냥 시도해 주세요. 그게 다예요.”

강리우가 눈을 감았다. 오래. 마치 자신의 내부에서 뭔가를 정렬하려고 하는 것처럼. 세아는 그 시간 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냥 그의 손을 잡고 있었다. 떨리는 손을.

“내가 피아노를 쳐도, 너를 구할 수는 없어.”

“네.”

“너는 여전히 회사에 속할 거고, 아버지의 통제를 받을 거고, 너의 음악은 아버지의 음악이 될 거고.”

“네.”

“그걸 알면서도.”

“네.”

강리우가 눈을 떴다.

“그래도 사인할 거야.”

세아가 대답했다.

“네.”

창밖에서는 서울의 아침이 계속되고 있었다. 강남의 아침. 건설음, 자동차음, 누군가의 발걸음음. 그리고 그 모든 음 아래로 흐르는 어떤 음악. 세아는 그것을 들을 수 있었다. 아직도 아무도 듣지 못하는 음악을. 자신의 머리 안에서만 울리는 음악.

강리우가 손을 떼었다.

“계약서는 내일 가져올게. 그리고.”

“네.”

“너는 이제부터 나한테 물어봐도 돼. 뭐든. 거짓 없이.”

세아가 웃음을 냈다. 매우 작은 웃음.

“당신도 저한테 물어봐야 해요.”

강리우가 세아를 봤다.

“내가 뭘 물어봐야 해.”

“당신이 피아노를 칠 때, 그게 누구의 음악인지. 당신의 음악인지. 당신의 아버지 음악인지. 당신의 선생님 음악인지. 나한테 물어봐 주세요.”

강리우가 다시 웃음을 냈다. 이번엔 진짜 웃음이었다. 슬픈 웃음이지만, 진짜 웃음.

“넌 정말 기묘한 사람이야.”

“네.”

그들은 더 이상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다. 커피숍에 앉아서. 강남의 아침 햇빛 아래에서. 세아는 강리우의 손을 다시 잡지 않았고, 강리우도 세아의 손을 다시 잡지 않았다. 단지 앉아 있었다. 옆에. 침묵 속에서.

시간이 흘렀다. 얼마나 많이 흘렀는지는 모르겠지만, 햇빛의 각도가 조금 더 높아졌다. 강리우가 일어섰다.

“가자.”

“어디요.”

“회사. 계약서를 미리 봐야 할 것 같아.”

세아가 일어섰다. 강남역의 커피숍을 나갔다. 거리로 나왔을 때, 세아는 강리우의 옆에 있었다. 아주 가깝게. 거의 닿을 정도로. 하지만 닿지는 않았다. 아직은.

“나세아.”

“네.”

“미안해.”

세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한 발 더 가까워졌다. 강리우의 옷깃이 세아의 어깨에 닿았다. 그리고 멈췄다.

강남의 거리에서, 아침 햇빛 아래에서, 두 사람이 걸어갔다. 아무도 그들을 보지 않았다. 이곳은 강남이었고, 강남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목표를 보고 있었다. 앞으로. 위로. 절대 옆을 보지 않는다.

그들이 회사에 도착했을 때, 시간은 아홉 시였다.

JYA 엔터테인먼트 건물은 강남의 다른 건물들과 다르지 않았다. 높고, 검은색이고, 유리로 된. 강리우가 세아의 팔에 손을 얹었다. 엘리베이터로 향하면서.

“아버지가 너를 만나고 싶어 할 거야.”

“네.”

“거짓 없이.”

“네.”

엘리베이터가 올라갔다. 1층에서 26층으로. 숫자가 올라갈수록, 세아는 자신이 내려가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아니, 정확하게는 자신이 다른 사람이 되어가고 있다는 느낌. 마치 성냥팔이 소녀가 불꽃을 하나씩 켤 때마다 다른 세계로 빨려 들어가듯이.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26층. JYA 엔터테인먼트의 중심부. 강민준의 사무실이 있는 층.

그리고 강리우의 손을 놓치 않으면서, 세아는 한 발을 내디뎠다.

그 순간, 무언가가 꺼졌다.

세아의 목소리가.

아니, 더 정확하게는, 세아가 자신의 목소리를 끌어올렸다. 깊은 곳에서. 그리고 그것을 누군가 다른 사람의 것처럼 만들었다. 차갑게. 조용하게.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

강리우가 세아를 봤다.

“뭐해.”

세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앞을 봤다. 복도 끝의 사무실로. 그곳에 강민준이 있을 것이다. 창밖을 보고 있을 것이다. 아침의 서울을. 자신의 서울을.

강리우가 세아의 손을 잡았다.

“나세아. 뭐하는 거야.”

세아의 입이 열렸다. 하지만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그냥 열렸다. 닫혔다. 다시 열렸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조용하게,

“들을 준비가 됐어요.”

라고 말했다.

강리우는 세아의 손을 더 세게 잡았다.

그들은 함께 걸었다. 26층의 복도를 따라. 강민준의 사무실로. 그리고 세아는 생각했다.

이것이 타오르는 것의 시작인지, 아니면 꺼지는 것의 시작인지.

아직은 알 수 없었다.

다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더 이상 돌아갈 수 없다는 것.


제23화 끝

# 제23화: 돌아갈 수 없는 길

## 1부: 아침의 거리

강리우는 세아의 손을 잡으려고 했다. 손가락이 공중을 헤매며 그녀의 손목 근처까지 도달했지만, 결국 닿지 못했다. 세아는 자신도 모르게 한 발 물러서 있었다. 아주 작은 움직임이었지만, 그것은 분명한 거부였다. 강리우는 손을 내렸다. 여전히 그녀를 향해 뻗은 채로 잠깐 머물렀다가, 천천히 주머니 속으로 밀어 넣었다.

“나세아.”

그의 목소리는 조용했다. 새벽 공기를 자르는 칼처럼 날카로웠지만, 동시에 무언가를 청하는 듯한 부드러움도 담고 있었다. 서울의 도로는 아직도 깨어나는 중이었다. 택시들이 화물차를 밀어내며 거리를 점령했고, 편의점 알바생들은 진열대를 정리했다. 아침의 냄새—아스팔트의 습기와 어제의 먼지가 섞인—가 공기 속을 떠다녔다.

세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앞을 봤다. 강남역 방향으로 뻗어 있는 도로를. 그곳으로 향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등을. 그들은 모두 목표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살을 태우면서.

“미안해.”

강리우가 다시 말했다. 이번에는 더 낮은 목소리로. 마치 누군가에게 들릴까봐 두려운 듯이. 세아는 그 말을 받아내지 않았다. 대신, 그녀는 한 발을 더 내디뎠다. 강리우 쪽으로. 그들 사이의 거리가 좁혀졌다. 서로 팔 길이만큼의 거리에서 손 길이만큼의 거리로.

강리우의 옷깃이 세아의 어깨에 닿았다. 검은색 겨울 코트의 솔기가 그녀의 얇은 스웨터를 누눌 때, 세아는 그의 체온을 느낄 수 있었다. 따뜻했다. 너무나 따뜻했다. 그리고 그것이 더 무서웠다.

그녀는 멈췄다.

## 2부: 강남의 사람들

강남의 거리에서, 아침 햇빛이 유리 건물들을 뚫고 내려올 때, 두 사람이 나란히 걸어갔다. 강리우는 여전히 세아에게 가까웠다. 가깝지만 닿지 않았다. 마치 조각가가 대리석에서 거의 완성된 형상을 남기고 도구를 내려놓은 것처럼.

아무도 그들을 보지 않았다.

이것이 강남이었다. 세아는 이를 깨달았다. 이곳의 사람들은 옆을 보지 않는다. 그들의 눈은 항상 앞을 향했고, 더 높은 곳을 향했다. 위. 더 위. 절대 옆으로. 절대 누군가의 삶으로. 그들은 각자의 목표라는 목줄에 매달린 개처럼, 그것만을 응시하며 걸어간다.

세아가 이를 안다는 것은, 자신도 이곳의 사람이 되어버렸다는 뜻이었다.

그들이 회사에 도착했을 때, 시간은 정확히 아홉 시였다. 빌딩의 전자 시계가 깜박거렸다. 09:00. 정각. 강리우의 손목시계와도 정확히 일치했다.

JYA 엔터테인먼트 건물은 강남의 다른 건물들과 구별되지 않았다. 높고, 검은색이고, 유리로 된. 하지만 그것은 거짓이었다. 세아는 안다. 이 건물은 다르다. 이 건물 안에는 꿈이 만들어진다. 또는 부서진다. 둘 중 하나. 아니, 대부분은 부서진다. 꿈이 만들어지는 경우는 드물다.

강리우가 세아의 팔에 손을 얹었다. 엘리베이터로 향하면서. 그의 손가락이 그녀의 팔을 감쌌을 때, 세아는 그것을 소유의 신호로 느껴야 할지, 아니면 보호의 신호로 느껴야 할지 몰랐다. 아마도 둘 다였을 것이다. 아마도 그 차이는 없을 것이다.

## 3부: 엘리베이터의 상승

“아버지가 너를 만나고 싶어 할 거야.”

강리우가 엘리베이터의 문이 닫혀가면서 말했다.

“네.”

“거짓 없이.”

“네.”

그것은 질문이 아니라 명령이었다. 세아는 알고 있었다. 강리우는 자신의 아버지 앞에서 거짓말을 하지 않는 남자였다. 따라서 그는 자신의 여자도 거짓말을 하지 않기를 원했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이 거짓말을 하는 여자를 사귀는 남자가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강민준의 아들은 그런 남자가 될 수 없다.

엘리베이터가 올라갔다. 1층에서 26층으로. 각 층마다 그 숫자들이 천천히 올라갔다. 2층. 3층. 5층. 10층. 15층. 세아는 그 숫자들을 바라봤다. 빨간 LED 불빛이 하나씩 켜졌다 꺼졌다.

그리고 올라갈수록, 세아는 자신이 내려가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아니, 그것은 정확한 표현이 아니었다. 내려가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되어가고 있다는 느낌. 마치 성냥팔이 소녀가 추운 밤거리에서 성냥을 하나씩 켤 때마다 다른 세계로 빨려 들어가듯이. 성냥 1번 – 온난한 난로의 세계. 성냥 2번 – 호화로운 식탁의 세계. 성냥 3번 – 크리스마스 트리의 세계. 그리고 마지막 성냥 – 사망.

세아의 성냥은 몇 번째인가?

엘리베이터의 벽은 거울이었다. 그녀는 자신을 보았다. 검은 옷, 검은 머리, 검은 눈. 마치 그녀 자신이 이 건물의 일부인 것처럼. 강리우도 그 거울 속에 있었다. 그의 얼굴은 근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 또는 욕심. 또는 둘 다.

20층. 21층. 22층.

“26층에 뭐가 있는데?”

세아가 갑자기 물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낯설었다. 자신의 목소리가 아닌 것처럼 들렸다. 마치 누군가 다른 사람이 그녀의 입을 빌려 말하고 있는 것처럼.

“아버지의 사무실이 있어.”

강리우가 대답했다.

“그 외에는?”

“그 외엔… 없어.”

거짓이었다. 세아는 그것을 알았다. 강리우의 호흡이 변했다. 약간 빨라졌다. 엘리베이터 내부의 공기가 무거워졌다. 마치 물속으로 점점 깊어지는 것처럼.

25층. 거의 다 왔다.

## 4부: 26층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26층. JYA 엔터테인먼트의 중심부. 강민준의 사무실이 있는 층. 그리고 그 외 여러 것들이 있는 층. 세아는 이를 안다. 강리우와 만나기 전부터, 그녀는 이 건물에 대해 알아봤다. 조용히. 은밀하게.

26층에는 강민준의 사무실 외에도, 세 개의 대기실이 있다. 그 대기실들의 용도는 공식적으로는 ‘미팅실’이라고 불린다. 하지만 세아는 그것들을 뭐라고 부르는지 안다. 연습실. 아니, 더 정확하게는, 준비실.

그리고 강리우의 손을 놓치 않으면서, 세아는 한 발을 내디뎠다.

그 순간, 무언가가 꺼졌다.

그것은 불이 아니었다. 불은 여전히 켜져 있었다. 강한 형광등이 26층의 복도를 밝혔다. 것은 세아의 목소리였다. 아니, 더 정확하게는, 세아 자신이었다.

세아가 자신의 목소리를 끌어올렸다. 깊은 곳에서. 그녀의 가슴 밑바닥에서. 자신이 숨겨놓았던 곳에서. 그리고 그것을 누군가 다른 사람의 것처럼 만들었다.

차갑게. 조용하게.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

그것은 거의 기술이었다. 마치 배우가 역할을 입는 것처럼 자연스러웠다. 아니, 자연스러웠다기보다는, 너무나 완벽했다. 마치 그녀가 이 목소리를 평생 연습해온 것처럼.

강리우가 세아를 봤다. 거울처럼 맑은 눈으로.

“뭐해.”

그것은 질문이 아니었다.

세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앞을 봤다. 복도 끝의 사무실로. 그곳에 강민준이 있을 것이다. 창밖을 보고 있을 것이다. 아침의 서울을. 자신의 서울을. 모든 건물, 모든 사람, 모든 꿈이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버린 서울을.

복도는 길었다. 마치 영화 속의 그것처럼. 양옆으로 회색 벽이 이어져 있었다. 창문이 하나도 없었다. 오직 전방의 사무실만이 보였다. 그리고 그곳으로 향하는 길만이 존재했다.

강리우가 세아의 손을 잡았다. 더 세게.

“나세아. 뭐하는 거야.”

그의 목소리는 불안했다. 세아는 이 불안을 이해했다. 자신의 변화를 감지한 것이었다. 그것은 마치 누군가 당신이 알던 사람이 갑자기 다른 언어로 말하기 시작할 때의 그 느낌. 익숙한 것이 낯설어지는 그 순간.

세아의 입이 열렸다.

하지만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그저 열렸다. 닫혔다. 다시 열렸다. 마치 물고기처럼. 물 밖으로 나온 물고기처럼.

몇 초가 흘렀다. 아니, 몇 초가 아니라 몇 분처럼 느껴졌다. 강리우의 손이 점점 더 세어졌다. 더 이상 따뜻하지 않았다. 차가웠다. 거의 얼어붙을 정도로.

그리고 마지막으로, 조용하게,

“들을 준비가 됐어요.”

라고 말했다.

그것은 그녀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그것은 확실했다. 이는 세아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이것은 누군가 다른 사람의 목소리였다. 아니, 더 정확하게는, 세아가 되고 싶었던 사람의 목소리였다.

강리우는 세아의 손을 더 세게 잡았다.

그들은 함께 걸었다. 26층의 복도를 따라. 강민준의 사무실로. 각 발걸음이 마치 심장박동처럼 들렸다. 펄떡, 펄떡, 펄떡.

## 5부: 결정의 순간

그리고 세아는 생각했다.

이것이 타오르는 것의 시작인지, 아니면 꺼지는 것의 시작인지.

그녀는 자신의 인생 속에서 이 같은 순간들을 여러 번 겪었다. 항상 선택의 순간이었다. 항상 무언가가 끝나고 다른 것이 시작되는 경계였다. 하지만 이번은 달랐다. 이번은 돌아올 수 없는 선이었다. 이것을 넘으면, 세아는 영원히 다른 사람이 될 것이었다.

혹은 이미 그렇게 된 것은 아닐까?

그녀는 자신의 손을 바라봤다. 강리우가 잡고 있는 손. 그것은 여전히 그녀의 손이었다. 같은 피부색, 같은 모양. 하지만 그것은 낯설었다. 마치 다른 사람의 손을 보고 있는 것처럼.

“세아.”

강리우가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그것은 울부짖음이었다. 마지막 요청. 아직도 돌아올 기회가 있다는 신호. 아직도 멈출 수 있다는 신호.

하지만 세아는 멈추지 않았다.

그녀는 계속 걸었다.

복도는 여전히 길었다. 하지만 이제 그것은 더 이상 무서운 길이 아니었다. 그것은 그녀가 걸어야 할 길이었다. 그것은 그녀의 운명이었다.

아직은 알 수 없었다. 이 선택이 옳은 것인지 틀린 것인지. 이 길이 살아가는 길인지 죽음으로 가는 길인지.

다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더 이상 돌아갈 수 없다는 것.

뒤를 돌아보면, 엘리베이터는 이미 닫혀 있었다. 그곳으로 돌아가는 길은 존재하지 않았다. 전방만이 남겨져 있었다. 강민준의 사무실. 그 문. 그리고 그 너머.

강리우의 손은 여전히 따뜻했다. 아니, 뜨거웠다. 마치 불에 잡힌 손처럼.

세아는 그것을 견뎌냈다.

그리고 계속 걸었다.

**제23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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