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아닌 것을 위해 불탄 소녀 – 제22화: 강리우가 찾아올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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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22화: 강리우가 찾아올 때까지

새벽 여섯 시, 세아의 핸드폰에 열 개의 부재중 전화가 있었다.

강리우였다. 모두.

세아는 고시원 방에 돌아와 있었다. 한강을 따라 걷다가 해가 떠오르는 것을 봤다. 해가 뜨자 사람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조깅하는 사람들, 견공을 산책시키는 사람들. 그제서야 세아는 집에 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무엇을 할지는 몰랐지만, 집에 가야 한다고. 핸드폰을 들었을 때 그 전화들이 쌓여 있었다.

화면에 이름이 떴다. 강리우. 강리우. 강리우.

마지막 전화는 다섯 분 전이었다.

세아는 핸드폰을 들고 앉았다. 침대 끝에 앉았다. 부재중 전화들을 하나씩 눌러보지는 않았다. 다만 목록을 봤다. 시간이 촘촘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새벽 세 시 십분. 세 시 이십오분. 세 시 삼십분. 그 사이에 몇 분의 간격이 있었다. 마치 강리우가 전화를 걸고, 받지 않으니까 기다리고, 다시 거는 식으로. 아니면 누군가에게 말하고, 다시 생각하고, 또 전화를 거는 식으로.

새벽 다섯 시 오십분. 마지막 전화.

“뭐 하는 거야.”

세아가 핸드폰을 들었을 때, 강리우의 목소리는 최악이었다. 최악이라는 표현이 맞는 말인지 모르겠지만 — 그의 목소리에는 뭔가가 부러져 있었다. 통제력이. 그의 목소리는 항상 통제되어 있었다. 느리고, 명확하고, 감정을 싣되 절대 흘러넘치지 않게. 그런데 지금은 그게 없었다.

“네.”

“어디야.”

“방에.”

“언제 들어왔어.”

“방금.”

침묵이 왔다. 세아는 강리우의 숨소리를 들었다. 빠르지 않은 속도로. 그러나 깊은 숨. 마치 누군가 자신을 진정시키려고 하는 식의. 그 숨소리가 들렸다는 것은 전화기 가까이에 입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었다. 매우 가깝게.

“계약서는.”

“못 봤어요.”

거짓이었다. 세아는 계약서를 봤다. 45페이지와 14페이지를 전부 봤다. 그리고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알았다. 하늘이 설명해주지 않아도 알았다. 어쩌면 처음부터 알고 있었을 수도 있다. 자신이 모른 척하고 있었을 뿐.

“나세아.”

그의 목소리가 다시 바뀌었다. 이번에는 통제력이 돌아온 것 같았다. 아니, 더 정확하게는 통제력으로 자신을 다시 누르고 있었다. 마치 물을 쏟으려는 순간 손가락으로 주전자 주둥이를 막는 식으로.

“내가 너를 속인 게 아니야.”

“알아요.”

“그래서 뭐.”

세아는 그 질문에 대답할 수 없었다. 그래서 뭐. 그래서 뭐라는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겠다. 당신이 나를 속이지 않았다는 걸 알면 어떻게 해야 한다는 건지. 계약서에 서명해야 한다는 건지. 아니면 당신을 믿어야 한다는 건지.

“만나자.”

“지금.”

“응.”

세아가 시간을 봤다. 새벽 여섯 시 오분. 서울에서 새벽 여섯 시라는 것은 이미 아침인 것처럼 느껴지는 시간이었다. 버스가 다니고 있을 것이다. 지하철도. 사람들이 출근 준비를 하고 있을 것이다.

“어디서.”

“우리 회사 근처. 강남역.”

강남. 세아는 강남에 가본 적이 거의 없었다. 홍대에서 강남이라는 건 마치 다른 나라를 가는 것처럼 느껴졌다. 지하철로 이십 분이 채 안 걸리지만, 그 거리는 멀었다. 음악이 다르고, 사람들이 다르고, 심지어 공기도 다르다고 생각했다. 강남의 공기는 얼마나 깨끗할까. 돈 냄새가 나지 않을까.

“네. 어디요.”

“강남역 8번 출구. 앞. 커피숍이 있을 거야. 들어가 있어.”

“몇 분?”

“오십 분. 한 시간.”

전화가 끊겼다.


지하철을 탈 때, 세아는 거울을 마주했다. 지하철 차량의 어두운 창에 비친 자신의 모습. 얼굴이 창백했다. 어쩌면 새벽 조명 때문일 수도 있다. 혹은 이틀을 거의 자지 않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세아는 자신의 얼굴을 만져봤다. 따뜻한 손으로 찬 뺨을 눌렀다. 그리고 다시 손을 내렸다. 손에 얼굴의 열이 전해지지 않았다. 마치 자신의 얼굴이 다른 사람의 것인 것처럼.

강남역에 도착했을 때 시간은 일곱 시 십오분이었다. 세아는 8번 출구로 나왔다. 지상에 나온 순간, 공기가 달랐다. 아니, 공기라기보다는 냄새였다. 강남의 냄새. 아침부터 떠오르는 커피 향. 그리고 그 아래에 깔린 다른 냄새. 돈. 정확하게는 돈을 쓰는 일의 냄새. 계산과 거래와 승리와 패배의 냄새.

커피숍을 찾는 데 이 분이 걸리지 않았다. 강남역 앞에는 커피숍이 여러 개 있었다. 스타벅스, 투썸플레이스, 그리고 이름 모를 고급 카페들. 세아는 가장 가까운 곳을 택했다. 스타벅스였다. 이미 사람들이 들어차 있었다. 아침 시간이었다. 직장인들이 미팅을 하고, 학생들이 공부를 하고, 누군가는 노트북을 켜고 있었다.

세아는 창가 자리를 찾지 않았다. 안쪽 코너에 앉았다. 주문을 하지도 않았다. 그냥 앉았다. 사람들이 어떤 눈으로 봤을 수도 있지만, 세아는 신경 쓰지 않았다. 머리를 묶은 얼굴, 입지 않은 화장, 어제 입었던 옷. 강남의 카페에서 그런 모습은 이질적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세아는 신경 쓰지 않았다.

강리우가 들어온 것은 칠 시 이십오분이었다.

그는 달려오지 않았다. 단지 들어왔을 뿐이다. 그러나 그의 걸음걸이에는 뭔가가 있었다. 세아는 그것을 느꼈다. 평소와 다른 것. 그의 옷도 달랐다. 정장이 아니었다. 회색 후드와 검은색 바지. 마치 밤새 집에서 그것을 입고 있었던 것처럼 보였다. 아니면 집에서 나올 때 대충 집어 입은 것처럼.

강리우가 세아의 맞은편에 앉았다.

“밥을 먹어야 할 것 같아.”

그게 강리우의 첫 말이었다. 인사도 없이. 세아를 보는 것도 없이. 단지 앉아서 그 말을 했다.

“네.”

“넌 뭘 먹어.”

“아무것도.”

강리우가 세아의 얼굴을 처음으로 봤다. 눈과 눈이 마주쳤다. 그의 눈은 빨갛지 않았다. 울지는 않았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그의 눈에는 뭔가가 있었다. 마치 밤새 무언가를 깨물고만 있었던 것처럼. 이를 악물고 있는 느낌이 눈에도 드러나 있었다.

“너 몇 시간을 자지 않은 거야.”

“모르겠어요.”

“너무 심하다.”

강리우가 일어나서 카운터로 갔다. 세아는 그의 뒷모습을 봤다. 그의 어깨가 내려갔다가 올라갔다. 깊게 숨을 쉬는 모습이었다. 아니면 스스로를 진정시키려는 움직임이었다.

그가 돌아왔을 때, 손에는 음식이 들려 있었다. 샌드위치 두 개. 우유. 그리고 아메리카노 한 잔.

“너는 샌드위치. 나는 샌드위치.”

그는 하나를 세아 앞에 밀어놨다.

세아가 샌드위치를 집었다. 터키 슬라이스와 아보카도와 토마토. 강남 카페의 샌드위치였다. 가격이 꽤 비쌀 것 같았다. 세아는 한 입을 깨물었다. 맛있었다. 하지만 세아는 맛을 느끼지 못했다. 입 안에 무언가가 들어있다는 것만 알았다.

강리우도 먹지 않았다. 단지 앞에 놨다. 그리고 세아를 봤다.

“내가 그 계약서를 만들지 않았어.”

“알아요.”

“내가 그 조건들을 정한 게 아니야.”

“알아요.”

“그래도 너는.”

강리우가 말을 멈췄다. 마치 다음 말을 찾을 수 없는 것처럼.

“난 너를 지키고 싶었어. 너의 음악을 지키고 싶었어. 근데 어떻게 하는 게 너를 지키는 건지 모르겠어. 그 계약서를 읽으면 내가 너한테 독이 든 우물을 보여준 것 같아. 그리고 마시라고 권한 것 같아.”

세아는 샌드위치를 다시 깨물었다. 이번에는 맛을 느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씹었다. 더 천천히.

“당신은 독이라고 알려줬어요.”

“그래도 넌 마시기 전에 생각하고 있었어.”

“당신이 아니었으면 더 빨리 마셨을 거예요.”

강리우가 눈을 감았다. 그리고 다시 떴다.

“내 아버지한테서 전화가 왔어. 새벽 네 시에.”

세아가 손을 멈췄다.

“넌 계약서를 봤다고 했어. 근데 아직 사인하지 않은 거 맞지.”

“네.”

“그래서 아버지가 나한테 물었어. 왜 아직도 안 됐냐고. 넌 뭔가를 하고 있는 거 아니냐고.”

강리우가 샌드위치를 집었다. 그리고 내려놨다. 한 입을 하지 않았다.

“내가 뭐라고 했냐면. 너가 결정하는 중이라고 했어. 그럼 아버지가 뭐라고 했냐면. ‘결정? 그건 결정이 아니라 시간 끌기야. 그 계약서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우리는 다른 사람을 찾아야 한다. 그리고 그러면 넌 JYA의 작곡가가 될 수 없어.’라고 했어.”

세아가 샌드위치를 놨다.

“그리고 나한테 이렇게 말했어. ‘리우, 내 뜻을 봐. 내가 지금 뭔가를 주려고 하는 건 너를 위해서다. 너는 미쳤어. 그 여자 때문에.’ 라고.”

강리우가 세아의 눈을 봤다.

“내 아버지는 너를 미쳤다고 했어. 그리고 나를 미쳤다고 했어. 넌 그 조건들을 받아들이면 돼. 그리고 난 그걸 받아들이게 할 사람을 찾으면 돼. 그게 우리 일이야. 그게 음악 산업이야.”

세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너를 지키려고 했어. 근데 내가 할 수 있는 게 뭔지 모르겠어. 내가 그 계약서를 거부하면 아버지가 다른 작곡가를 찾아. 그리고 너는 영원히 이름도 없는 세션 보컬이 돼. 내가 너를 받아들이면 너는 JYA의 소속 아티스트가 돼. 하지만 새장 안에.”

강리우가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그리고 천천히 내렸다.

“더 나은 새장이 있을 거야. 내가 찾아줄게. 약속할게. 근데 그 전까지는 넌 이 새장을 받아들여야 할 것 같아.”

세아가 말했다.

“그럼 나는.”

“응.”

“어디로든 갈 수 있어요?”

“뭐.”

“새장 안에서. 당신이 말한 대로 더 나은 새장을 찾기 전까지. 나는 어디로든 갈 수 있어요?”

강리우가 생각했다.

“네.”

“그럼.”

세아가 샌드위치를 다시 들었다. 이번에는 제대로 먹었다. 한 입. 또 한 입. 타액이 나왔다. 몸이 반응했다.

“당신이 저를 여기까지 데려왔어요. 그럼 당신이 저를 어디까지 데려갈 수 있는지도 봐야겠어요.”

강리우가 세아를 봤다. 마치 처음 보는 사람을 보는 것처럼.

“너 지금.”

“네.”

“계약서를 사인할 거야.”

세아가 입을 삼켰다.

“아직 모르겠어요. 근데 당신이 맞다면, 나는 어디로든 갈 수 있으니까. 먼저 가보는 거예요. 새장을 받아들이고, 그 안에서 새처럼 날아보는 거예요. 그러다가 문이 열리면 나가는 거고. 열리지 않으면.”

세아가 다시 샌드위치를 깨물었다.

“그때가 되면 제가 할 수 있는 게 뭔지 알겠겠죠.”

강리우가 손을 뻗었다. 테이블 위에. 세아의 손 앞에. 하지만 만지지는 않았다. 단지 거기에 있었다. 선택의 권리를 남겨두듯이.

“나는.”

그의 목소리가 다시 부러졌다. 하지만 이번에는 다른 종류의 부러짐이었다.

“널 지킬 거야. 약속할게. 그 새장이 아무리 좁아도. 내가 있을 거야. 그 안에. 너랑 같이.”

세아가 강리우의 손을 봤다. 손가락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마치 피아노를 연주하다가 멈춘 손처럼. 음악을 기억하면서 동시에 잊으려고 하는 손처럼.

세아는 자신의 손을 그의 손 위에 놨다. 손가락을 맞댔다. 따뜻함이 전해졌다. 아침 강남 카페의 따뜻함이 아니라, 사람의 따뜻함이.

“좋아요.”

그게 세아의 대답이었다.

창밖으로 강남의 아침이 밝아오고 있었다. 사람들이 더 많아졌다.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세아와 강리우는 테이블에 앉아 손을 맞댄 채로 있었다. 샌드위치는 식고 있었다. 우유는 마시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들은 중요하지 않았다.

세아는 생각했다. 이 순간을 어떻게 음악으로 번역할까. 이 손과 손의 만남을, 이 침묵을, 이 새벽을. 멜로디는 어디서 시작할까. 화음은 몇 개여야 할까.

그리고 그 생각이 들었을 때, 처음으로 세아는 자신이 이 순간을 무언가로 남기고 싶다고 느꼈다. 누군가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위해서.

강리우가 손을 놨다. 천천히.

“이제 집에 가자. 자고 와. 그리고 계약서를 다시 읽어봐. 이번엔 나랑 함께. 그러면 뭐가 뭔지 더 명확할 거야.”

“네.”

세아가 일어났다. 강리우도 일어났다. 그들은 카페를 나왔다. 강남역 앞의 아침 거리로. 햇빛이 강했다. 겨울 햇빛이 강했다.

지하철역으로 가는 길, 강리우가 세아의 손을 잡았다. 손을 잡는 것이 아니라, 팔꿈치 근처를 가볍게 잡았다. 마치 누군가를 길을 잃지 않도록 가이드하는 식으로.

“넌 정말 대단한 사람이야.”

강리우가 그렇게 말했다. 아무것도 아닌 목소리로.

세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그 손을 느꼈다. 그리고 걸었다. 강남의 아침을 통과하면서, 지하철역으로, 다시 집으로.

가는 길 내내, 세아의 머리 속에는 음악이 차오르고 있었다.

불꽃이 아니라, 다른 무언가. 아직 이름을 모르는 무언가가.


[제23화 예고]

계약서에 서명하기 전, 세아는 마지막으로 한 가지를 해야 한다. 자신의 어머니에게 말하기. 그리고 동생에게. 그들은 어떻게 반응할까. 세아가 새장 안으로 들어가려 할 때, 세아가 지켜야 할 것들은 무엇일까.

# 새장 속의 음악 – 제22화 확장판

## 1부: 약속의 무게

카페의 조명이 점점 밝아지고 있었다. 새벽 5시 30분. 강남역 근처의 한 카페는 이미 아침 손님들로 북적이기 시작했다. 세아는 테이블 위의 샌드위치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한 입도 먹지 않은 채로. 우유도 마찬가지였다. 차갑게 식어가는 우유 표면에는 얇은 막이 생기고 있었다.

강리우는 세아의 맞은편에 앉아 있었다. 검은 셔츠를 입은 채로. 그의 얼굴은 피로로 가득했다. 밤을 새운 피로가 아니라, 인생을 짓누르는 무언가에 의한 피로였다. 눈가의 주름이 깊었다. 언제부터 이렇게 늙어 보였나, 세아는 생각했다.

강리우가 입을 열었다. 그리고 닫았다. 그리고 다시 열었다. 마치 말을 찾는 사람처럼. 아니, 말을 찾는 게 아니라 용기를 찾는 사람처럼 보였다.

“그때가 되면 제가 할 수 있는 게 뭔지 알겠죠.”

그의 목소리는 낮았다. 거의 중얼거리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세아는 모든 단어를 들었다. 그 단어들이 공중에 떠다니면서 자신을 향해 천천히 내려오는 것을 느꼈다. 마치 눈송이처럼.

세아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때, 그 단어를 그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새로운 계약으로 들어간 그 순간? 아니면 그 이후의 모든 시간들?

강리우는 손을 뻗었다. 천천히. 마치 어떤 거대한 힘에 저항하면서 팔을 들어올리는 듯한 속도로. 그의 손은 테이블 위에 놓였다. 세아의 손 앞에. 하지만 만지지는 않았다. 단지 거기에 있었다. 하얀 테이블 위에서 약간 떨리면서. 그것은 마치 선택의 권리를 남겨두는 것처럼 보였다. 손을 잡거나 잡지 않거나. 받아들이거나 거부하거나.

“나는.”

그의 목소리가 다시 나왔다. 이번에는 더 작았다. 거의 속삭임에 가까웠다. 세아는 귀를 쫑긋 세워야 했다. 카페의 배경음악—현대적인 재즈 피아노—이 방해가 될 정도로.

“널 지킬 거야.”

강리우의 목소리가 부러졌다. 마치 오래된 악기의 현이 끊어지는 것처럼. 그리고 그 부러짐이 세아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강리우 강리우라는 남자가 누군가를 “지킨다”고 말하다니. 그 단어는 그의 입에서 나올 수 있는 가장 약한 단어였다. 가장 취약한 단어였다.

“약속할게. 그 새장이 아무리 좁아도. 내가 있을 거야. 그 안에. 너랑 같이.”

침묵이 떨어졌다. 카페의 소음이 갑자기 매우 크게 들렸다. 누군가가 카푸치노를 주문하는 목소리. 그룹 채팅이 울리는 소리. 밖의 거리에서 들려오는 자동차 소리.

세아의 눈이 강리우의 손을 향했다. 손가락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세아는 그것을 본 순간 무언가를 이해했다. 이것은 강리우가 보여줄 수 있는 가장 큰 약함이었다. 이 떨림. 이 진동. 마치 피아노를 오래 연주하다가 갑자기 멈춘 손처럼. 음악을 기억하면서 동시에 그 음악을 잊으려고 하는 손처럼.

세아의 손이 움직였다. 의식적인 결정이 아니었다. 신체의 본능이었다. 마치 음악을 듣고 자동으로 리듬을 타는 것처럼. 자신의 손을 그의 손 위에 놨다. 손가락을 맞댔다.

따뜻함이 전해졌다.

아침 강남 카페의 따뜻함이 아니었다. 그것은 무생물의 따뜻함이었다. 이것은 다른 것이었다. 사람의 따뜻함이었다. 누군가의 체온. 누군가의 맥박. 누군가의 생명이 그 손 안에 담겨 있었다.

“좋아요.”

그게 세아의 대답이었다. 단순한 두 글자. 하지만 그 두 글자가 의미하는 바는 거대했다. 나는 당신과 함께 그 새장 안으로 들어갑니다. 나는 당신을 믿습니다. 나는 이 선택을 합니다.

## 2부: 시간의 흐름

창밖으로 강남의 아침이 점점 더 밝아지고 있었다. 아직 해는 완전히 떠오르지 않았지만, 하늘이 검은색에서 진청색으로, 그리고 파란색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계속해서 흐르고 있었다.

카페의 인파가 늘어났다. 9시까지 몇 시간 남았지만, 이미 회사원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헐레벌떡 들어오는 직장인들. 커피를 빠르게 마시고 나가는 사람들. 세아와 강리우는 그 모든 움직임 속에서 오직 자신들의 손만을 보고 있었다.

샌드위치는 식고 있었다. 처음에는 따뜻했던 식빵이 이제는 실온이 되어가고 있었다. 우유도 마찬가지였다. 아까 전해 받은 따뜻함도 이제는 실온이 되어가고 있었을까? 아니다, 세아는 생각했다. 손이 계속 따뜻하다.

하지만 그것들—샌드위치도, 우유도—은 중요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이것이 더 중요했기 때문이다. 이 손과 손의 만남. 이 침묵. 이 순간.

세아의 머리가 빠르게 돌아가고 있었다. 음악가의 뇌는 항상 작동 중이었다. 세아는 생각했다. 이 순간을 어떻게 음악으로 번역할까. 이 손과 손의 만남을, 이 침묵을, 이 새벽을.

멜로디는 어디서 시작할까? 낮은 음자리표에서? 아니면 높은 음자리표에서? 마이너 키일까, 메이저 키일까? 세아의 음악은 지금까지 항상 누군가를 위한 것이었다. 대중을 위한 것. 제작사를 위한 것. 홍보 담당자를 위한 것.

하지만 이 순간을 음악으로 만든다면, 그것은 누구를 위한 것일까?

그리고 그 생각이 들었을 때, 뭔가가 바뀌었다. 세아는 처음으로—정말 처음으로—자신이 이 순간을 무언가로 남기고 싶다고 느꼈다. 누군가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위해서. 자신의 영혼을 위해서. 자신의 기억을 위해서.

이것이 예술인가? 세아는 자문했다. 예술이란 이런 것인가? 누군가를 위한 공연이 아니라, 자신의 영혼을 구하기 위한 행위인가?

강리우가 손을 놨다. 천천히. 마치 그것이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인 것처럼. 손가락 하나하나가 분리되는 것을 세아는 느꼈다. 따뜻함이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그 순간, 세아는 알았다. 강리우가 얼마나 힘든지. 이 모든 것이 얼마나 무거운지.

## 3부: 결정과 출발

“이제 집에 가자. 자고 와. 그리고 계약서를 다시 읽어봐. 이번엔 나랑 함께. 그러면 뭐가 뭔지 더 명확할 거야.”

강리우의 목소리는 다시 일상적이 되었다. 마치 아까의 모든 것이 없었던 것처럼. 하지만 세아는 알았다. 그것은 보호장치였다. 자신의 취약함을 숨기기 위한 것.

“네.”

세아가 대답했다. 한 음절. 하지만 그것으로 충분했다.

그들은 일어났다. 강리우가 먼저 일어났고, 세아가 따라서 일어났다. 세아의 다리가 조금 떨렸다. 얼마나 오래 앉아 있었는지 깨닫지 못했던 것이다. 시간이 그렇게 빨리 흘렀나?

카페를 나왔다. 강남역 앞의 아침 거리로. 햇빛이 강했다. 겨울 햇빛이었지만 강했다. 마치 무언가를 태워버리려는 듯한 강한 햇빛. 세아는 눈을 좁혔다. 너무 밝았다. 아까 카페 안에 있을 때는 느끼지 못했던 밝음이었다.

지하철역으로 가는 길, 강리우가 세아의 손을 잡았다. 하지만 그것은 로맨틱한 손잡음이 아니었다. 손을 잡는 것이 아니라, 팔꿈치 근처를 가볍게 잡았다. 마치 누군가를 길을 잃지 않도록 가이드하는 식으로. 아니면 누군가를 지탱하는 식으로.

거리는 점점 더 붐비고 있었다. 직장에 늦지 않으려고 서두르는 사람들. 조깅을 나온 노인들. 아기 유모차를 밀고 있는 엄마들. 모두가 자신의 삶을 살고 있었다. 자신의 새장 안에서.

“넌 정말 대단한 사람이야.”

강리우가 그렇게 말했다. 아무것도 아닌 목소리로. 마치 날씨 얘기를 하는 것처럼. 하지만 세아는 알았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당신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나는 당신을 지킬 거야. 당신이 평범한 사람이라는 걸 알면서도 나는 당신을 대단하다고 생각할 거야. 왜냐하면 당신은 이 선택을 했기 때문이다. 이 불가능해 보이는 선택을.

세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그 손을 느꼈다. 팔꿈치 근처의 가벼운 터치. 그리고 걸었다. 강남의 아침을 통과하면서, 사람들 사이를 지나면서, 지하철역으로, 다시 집으로.

## 4부: 음악이 차오르다

가는 길 내내, 세아의 머리 속에는 음악이 차오르고 있었다.

불꽃이 아니었다. 세아의 음악은 항상 불꽃이었다. 열정적이고 폭발적이고 소비적인. 누군가를 향해 던져지는 불꽃. 청중을 태우는 불꽃.

하지만 지금 차오르는 음악은 다른 무언가였다. 아직 이름을 모르는 무언가가.

그것은 물처럼 흐르지만 물은 아니었다. 바람처럼 움직이지만 바람도 아니었다. 별빛처럼 부드럽지만 별빛도 아니었다.

세아는 지하철 계단을 내려가면서 그 음악을 따라갔다. 마치 자신이 그 음악의 악보를 읽고 있는 것처럼. 아니, 악보를 만들고 있는 것처럼.

낮은 현악기의 음. 바이올린이 아니라 첼로의 음. 깊고 진하고 따뜻한. 그리고 그 위에 피아노의 고음. 날카롭지 않은 고음. 부드럽고 조심스러운 고음.

그것은 무언가를 기억하는 음악이었다. 동시에 무언가를 잊으려고 하는 음악이었다.

지하철 열차가 도착했다. 세아는 탔다. 강리우도 탔다. 아침 출근 열차는 이미 꽤 차 있었다. 그들은 서 있어야 했다. 세아는 손잡이를 잡았다. 강리우는 그 옆에 섰다. 말하지 않고. 단지 거기에 있으면서.

지하철이 움직였다. 흔들렸다. 세아는 거의 넘어질 뻔했다. 하지만 강리우가 세아의 팔을 잡았다. 다시 한 번. 강하게. 마치 세아가 절대 떨어지지 않도록 하려는 것처럼.

세아는 그 손을 느꼈다. 이번에는 카페에서의 따뜻함이 아니었다. 이것은 보호였다. 안전함이었다. 누군가가 자신을 붙들어주고 있다는 감각.

음악이 더 선명해졌다. 세아의 뇌 속에서 그 음악은 거의 완성 단계에 다다르고 있었다. 아직 제목은 없었지만, 그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제목보다는 본질이 중요했다.

이것은 무엇인가? 희망인가? 아니다. 희망은 너무 약한 단어였다. 희망은 ‘혹시 모를 가능성’이지만, 이것은 그 이상이었다.

사랑인가? 세아는 자신에게 물었다. 이것이 사랑인가?

아마도. 아니, 틀림없이.

하지만 그것도 중요하지 않았다. 이름이 무엇이든 간에, 그것은 세아의 영혼 속에 울려 퍼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울림은 음악이 되고 있었다. 아직 연주되지 않은 음악. 아직 누구에게도 들려주지 않은 음악.

하지만 언젠가는 연주될 음악이었다.

지하철이 역에 도착했다. 사람들이 내렸다가 탔다. 세아와 강리우는 계속 서 있었다. 손잡이를 잡고. 팔을 잡고.

세아는 창밖을 봤다. 강남의 지하철 터널. 불을 켜진 역 이름. 그리고 다시 어두운 터널.

음악이 계속 흐르고 있었다.

## 5부: 마지막 역

지하철이 세아의 역에 도착했다. 강리우가 세아의 팔을 놨다. 이번에는 천천히. 마치 그것도 어려운 결정인 것처럼.

“집에 가. 자. 그리고 오늘 오후에 연락할 거야. 계약서 얘기하려고.”

“네.”

세아가 대답했다. 그리고 열차에서 내렸다.

플랫폼에 서서 세아는 열차를 봤다. 강리우는 창가에 서 있었다. 세아와 눈이 마주쳤다. 어떤 표정도 짓지 않은 얼굴로.

열차가 움직였다. 강리우가 점점 멀어졌다. 그리고 터널 속으로 사라졌다.

세아는 홀로 남았다. 플랫폼에. 아침의 지하철역에.

그리고 그제야 깨달았다. 자신의 손이 여전히 따뜻하다는 것을. 강리우의 체온이 남아 있다는 것을.

세아는 자신의 손을 봤다. 특별한 것은 없었다. 그저 평범한 손. 하지만 그 손이 만든 음악의 기억이 세아의 뇌에는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계단을 올라갔다. 지하철역을 빠져나왔다. 아침의 거리로.

하늘은 이제 완전히 밝았다. 새로운 날이 시작되었다. 세아의 새로운 삶이 시작되고 있었다.

## 에필로그: 집으로 가는 길

택시를 탔다. 집으로 가는 길.

창밖으로 서울의 아침이 흘러갔다. 한강. 강남의 고층빌딩들. 그리고 마침내 세아의 거주지역.

집에 도착했을 때, 세아의 어머니는 아직 자고 있었다. 다행이었다. 지금은 설명할 에너지가 없었다.

세아는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피아노가 있는 방. 하지만 세아는 피아노에 앉지 않았다. 침대에 누웠다.

눈을 감았다.

그리고 음악이 계속 흐르고 있었다. 세아의 뇌 속에서. 세아의 심장 속에서.

아직 이름을 모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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