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아닌 것을 위해 불탄 소녀 – 제21화: 이름과 침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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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21화: 이름과 침묵

세아가 고시원 방을 나간 것은 새벽 세 시였다.

하늘이가 떠난 지 한 시간 후였다. 하늘이는 두 파일을 다 본 뒤 말이 없었다. 계약서의 함정들을 하나씩 짚어주려다가 중간에 멈췄다. 세아의 얼굴을 봤기 때문이었다. 세아의 얼굴은 이미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다 — 무엇이 잘못됐는지를. 그래서 하늘이는 그냥 가만히 앉아서 세아를 봤다. 그리고 손을 내밀었다. “가자”고 말했다. 어디로 가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이 방에서 나가는 것이 중요했다.

두 사람은 밤새 돌아다녔다. 한강을 따라 산책했다. 불빛이 물에 반사되는 모습을 봤다. 편의점에 들어갔다 — 세아가 일하지 않는 지점이었다 — 카페인 음료를 마셨다. 아무것도 말하지 않으면서. 하늘이의 침묵과 세아의 침묵이 다른 종류의 침묵이었다. 하늘이의 침묵은 옆에 있겠다는 뜻이었다. 세아의 침묵은 무언가를 정리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새벽 두 시, 홍대 거리에서 하늘이가 말했다.

“뭐 할 거야.”

세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진심으로 물어보는 거야. 뭐 할 거니까.”

세아가 한 발 앞으로 나아갔다. 거리의 네온사인이 그녀의 얼굴을 비췄다 — 보라색으로. 그리고 파란색으로. 한 초 단위로 색이 바뀌었다.

“모르겠어요.”

그게 세아의 대답이었다.

하늘이는 세아의 어깨를 두드렸다. “좋아. 그럼 집에 가.”

“네.”

그리고 새벽 세 시. 세아는 고시원 방을 나왔다.

옷을 여분으로 챙기지 않았다. 핸드폰도 들지 않았다. 지갑만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현금이 오만 원 들어 있었다. 편의점 알바 급여였다. 아직 통장에 입금되지 않은 돈. 현물로 받은 돈.

새벽 거리는 조용했다. 서울이 다른 도시처럼 느껴졌다 — 밤의 서울과 새벽의 서울은 다른 나라였다. 밤에는 사람들이 있었다. 새벽에는 건설 장비와 청소차와 배달 오토바이만 있었다. 세아는 합정역 방향으로 걸었다. 특정한 곳을 향해서가 아니라, 그냥 걸었다. 발이 가는 대로.

거리를 세다가 멈췄다. 삼십 번쯤 거리를 센 것 같았다. 자신이 어디쯤 있는지 몰랐다. 익숙한 골목이었지만, 새벽이라는 것이 모든 것을 낯설게 만들었다.

세아는 편의점을 찾았다. CU 마크가 보였다. 그곳으로 들어갔다. 알바생이 계산대에 앉아 있었다. 남자였다. 아마 서른 살 정도. 세아를 보고 고개를 들었다가 다시 핸드폰을 봤다. 손님이 많지 않은 새벽에 편의점에 오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

세아는 카페인 음료 섹션으로 갔다. 손을 뻗어서 콜드브루를 집었다. 돌려놨다. 다시 집었다. 돌려놨다. 세 번을 반복했다. 음료를 고르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끄는 것이었다.

결국 아무것도 고르지 않고 나왔다. 돈을 쓰지 않았다.

새벽 거리를 더 걸었다. 이번에는 방향이 있었다. 강쪽으로. 한강이 보이는 곳으로.

한강 옆 벤치에 앉았을 때, 하늘이 없다는 게 처음으로 실감났다. 혼자라는 게 아니라, 누군가에게 말을 해야 하는데 할 수 없다는 게. 하늘이는 이미 집에 갔을 것이다. 자신의 타투숍 위의 작은 원룸으로. 세아는 핸드폰이 없었다. 카톡을 할 수 없었다. 문자를 할 수 없었다. 걸 수도 없었다.

벤치의 페인트가 벗겨져 있었다. 회색 금속이 드러났다. 세아는 그것을 손가락으로 만졌다. 차가웠다. 겨울 새벽의 벤치는 항상 차가웠다.

강물이 흘러갔다. 소리를 내지 않으면서. 세아는 그 흐름을 봤다. 물이 움직이고 있는데 음성 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그게 이상했다. 물이 흐르는데 물 소리가 없다니. 새벽이라서 그런 건가. 아니면 원래 물은 그런 건가. 세아가 항상 놓치고 있던 것들이 있을까.

핸드폰을 들고 있었다면 지금쯤 강리우에게 문자를 했을 것이다.

“계약서 못 사인할 것 같아요.”

그리고 그 다음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게 세아의 방식이었다 — 폭탄을 떨어뜨리고 침묵하기.

그런데 핸드폰이 없으니 문자도 할 수 없었다.

강변을 따라 더 걸었다. 발이 기계적으로 움직였다. 왼발, 오른발. 호흡을 맞추지 않았다. 호흡과 발걸음이 따로 놀았다. 그것도 세아가 느끼는 이상한 것들 중 하나였다. 자기가 분리되어 있는 것 같은 느낌. 다리는 걷고 있는데 머리는 계약서를 읽고 있었다.

45페이지.

14페이지.

제5조.

제8조.

“최선의 노력을 다한다.”

“을이 전속 계약을 체결한 경우.”

강리우의 목소리도 들렸다.

“당신 음악은 설명을 듣고 싶게 만드네요. 그게 더 드문 거예요.”

그 말이 정말이었을까. 아니면 계약을 체결하기 전에 세아를 안심시키기 위한 말이었을까. 세아는 알 수 없었다. 지금은 모든 말이 의심스러웠다. 강리우의 말도. 박인철이의 말도. 강민준의 말도. 전부 계약서를 사인하도록 유도하기 위한 말이었을 수도 있었다.

아니면 진심이었을 수도 있었다.

“둘 다일 수도 있고.”

하늘이가 한 말이었다. 약 여섯 시간 전. 타투숍에서. “그 사람이 너한테 진심일 수도 있고, 그리고 너를 이용할 수도 있고. 둘 다일 수도 있어.”

세아는 벤치를 떠났다. 더 이상 앉아 있을 수 없었다. 앉아 있으면 생각만 했다. 걸어야 했다.

새벽 다섯 시, 세아는 홍대 라이브 클럽 거리로 왔다.

밤에는 사람들로 가득했던 거리가 새벽에는 텅 비어 있었다. 클럽 문들이 모두 닫혀 있었다. 간판들만 켜져 있었다. 어제 밤의 잔향이 공중에 떠 있었다 — 담배 연기, 맥주, 땀. 낮에는 씻겨 나가겠지만, 새벽에는 아직도 그 냄새가 있었다.

세아가 일하는 클럽은 “Velvet”이었다. 문이 잠겨 있었다. 세아는 옆 골목으로 돌아갔다. 뒷문이 있었다. 알바생들이 들어가는 문. 그곳도 잠겨 있었다. 세아는 핸드폰이 없으니 문자를 할 수도, 전화를 할 수도 없었다. 그냥 기다려야 했다.

아니면 집에 가야 했다.

세아는 클럽 앞 좁은 골목의 벤치에 앉았다. 이 벤치는 낮에 클럽 손님들이 쉬는 자리였다. 지금은 누도 없었다. 세아는 거기 앉아서 하늘을 봤다. 새벽 여섯 시의 하늘. 완전히 어두운 것도 아니고 밝은 것도 아닌 회색.

휴대폰이 울렸다.

세아가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울음이 자신의 휴대폰에서 난 게 아니었다. 누군가의 휴대폰이 골목에서 울렸다. 세아는 사방을 둘러봤다. 아무도 없었다. 울음은 계속됐다. 진동음. 누군가 전화를 받지 않고 있었다.

울음이 멈췄다.

그리고 이십 초 뒤에 다시 울렸다.

세아는 일어났다.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가봤다. 골목 안쪽. 쓰레기 더미 옆. 휴대폰이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화면이 빛나고 있었다. 누군가의 이름이 떴다. 하지만 세아는 그 이름을 읽을 수 없었다 — 한글이 아니라 영문 이름이었다. “RIWOO”라고 떴다.

세아는 그 휴대폰을 집었다.

## 그것은 강리우의 휴대폰이었다.

## 화면에는 “MOM”이라고 뜨고 있었다.

세아는 버튼을 누르지 않았다. 울음이 멈출 때까지 기다렸다. 그리고 휴대폰을 들고 있는 것만 해도 이상했다. 남의 휴대폰을 집는 것. 그것도 울고 있는 휴대폰을.

화면이 꺼졌다. 어두워졌다.

세아는 주변을 살펴봤다. 강리우가 있을 법한 장소는 없었다. 그냥 쓰레기 더미와 골목뿐이었다. 휴대폰은 어떻게 여기에 떨어져 있었을까. 강리우가 여기에 왔었던 걸까. 이 시간에. 이 장소에.

세아가 방향을 돌렸을 때,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세아.”

세아가 고개를 들었다.

강리우가 골목 입구에 서 있었다. 한 손에는 담배. 다른 손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셔츠 소매가 걷혀 있었다. 손목에 시계가 없었다. 어깨에는 자켓이 없었다. 밤새 뭔가를 한 사람의 모습이었다. 얼굴이 창백했다. 눈 밑의 다크서클이 더 짙어 보였다.

“휴대폰.”

세아가 말했다.

강리우가 담배를 내려놨다. 아직 피우지 않은 담배. 단순히 손에 들고만 있었던 것이었다. 그가 휴대폰을 가져가려 했을 때, 세아가 먼저 말했다.

“어제 밤 내내 뭐 하셨어요.”

그것은 질문이었다.

강리우가 멈췄다. 손이 공중에서 멈췄다.

“계약서 다 읽으셨어요. 제가.”

세아가 말했다. 목소리가 떨리지 않았다. “전속 계약서 45페이지. 저작권 양도 합의서 14페이지. 다 읽었어요.”

“세아.”

“제5조 봤어요. 최선의 노력을 다한다고. 그게 무슨 뜻인지 알아요. 노력하겠다는 뜻이에요. 한다는 뜻이 아니라.”

“들어가자.”

강리우가 말했다. “여기서 하는 얘기 아니야.”

“어디로요.”

“클럽.”

“클럽은 안 열었어요.”

강리우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손을 주머니에 넣었다. 그리고 자신의 휴대폰이 세아의 손에 있다는 걸 완전히 무시했다.

“내 엄마가 전화했어. 방금.” 그가 말했다. 목소리가 작았다. “베를린에서. 시간대가 다르니까 저런 시간에 전화하는 거지. 엄마가 말했어. 아버지가 어제 심근경색으로 병원에 입원했대. 수술이 필요해.”

세아의 손이 떨렸다. 휴대폰을 들었다는 사실이 아니라, 그 말을 들었다는 사실에.

“그래서 어제 밤 내내 뭐 했는지 알아? 아버지 담당 의사한테 전화했어. 병원비 얘기했어. 보험 처리 얘기했어. 그리고 아버지가 지금 깨어 있는지, 언제 수술할 건지 물어봤어.”

강리우가 세아의 눈을 봤다.

“그리고 너한테 계약서 사인하라고 말한 게 뭔지도 생각했어.”

세아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너한테 ‘이게 너를 지켜줄 거야’라고 말했는데. 진짜로는 아버지를 지키기 위한 거였어. 아버지가 내 통장에 얼마나 의존하고 있는지 몰랐거든. 심근경색 같은 게 생기기 전까진.”

강리우가 손을 펼쳤다.

“휴대폰 줄래.”

세아가 휴대폰을 건넸다.

강리우는 그것을 받아 화면을 봤다. 엄마로부터 아홉 개의 부재중 전화. 그리고 세 개의 메시지. 강리우는 메시지를 읽지 않았다. 그냥 화면을 껐다.

“계약서는.”

“네.”

“사인했어?”

“아니요.”

“왜.”

세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왜 안 했어.”

“계약서에서 그런 말이 없어서요. 제5조에는 ‘최선의 노력을 다한다’고만 써 있어요. 저작권을 돌려받을 보장이 없어요. 그리고 제가 쓴 곡들을 JYA가 가지고 있어요. JYA가 그걸 산다는 말도 계약서 어디에도 없어요. 저는 제 곡을 위해 돈을 받지 못하고 저작권도 잃고 이름도 못 찾는 거예요.”

“맞아.”

강리우가 말했다.

“다 맞아.”

그리고 그가 웃었다. 새벽 여섯 시, 홍대 골목에서. 강리우가 웃었다. 그것은 쾌활한 웃음이 아니었다. 포기한 웃음이었다. 모든 것이 이미 정해져 있다는 걸 아는 사람의 웃음.

“아버지는 내가 JYA에서 이 정도 성과를 내지 못하면 실망할 거야. 신인 한 명 영입하는 것도 아버지 기준으로는 작아. 아버지는 내가 회사를 더 크게 키우길 원해. 그래서 너한테 계약서를 주고 사인하라고 한 거고, 그래서 아버지 병원비를 낼 돈이 생기는 거고.”

세아가 움직임을 멈췄다.

“그래서 너는 사인해야 한다고 생각했어. 너를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위해서.”

“그런데 지금은.”

강리우가 천천히 말했다.

“그럴 필요가 없다는 걸 알았어.”

그가 휴대폰을 다시 봤다. 화면이 어두웠다.

“아버지 병원비는 내가 낼 거야. 너하테 너를 포기하게 할 수는 없어.”

세아의 목이 메었다.

“그런데 난 어떻게 해. 난 너한테 뭐라고 말해. 계약서가 필요한데 너는 못 사인한다고? 아버지한테는?”

강리우가 세아의 얼굴을 봤다.

“너는 지금 뭐하고 있어. 새벽에. 핸드폰도 안 들고.”

세아가 대답했다.

“몰라요.”

“생각이 있었어?”

“아니요.”

“그럼 지금부터라도 생각해봐. 계약서 안 사인하면 어떻게 할 건데. 아르바이트만으로 엄마랑 도현이한테 뭘 해줄 건데.”

세아는 그 질문에 대한 답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강리우는 세아의 옆에 섰다. 함께 골목을 봤다. 쓰레기 더미. 닫힌 클럽 문들. 아무것도 움직이지 않는 새벽 거리.

“내일 낮에 아버지 병원에 가. 내가 주소 알려줄게. 그리고 그 다음에 우리 뭐 할지 생각해보자.”

“네.”

“그리고 세아.”

강리우가 말했다.

“미안해.”

그의 목소리는 정말로 미안한 목소리였다. 또는 이미 포기한 목소리였다. 둘 다였다.

세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그녀는 한강 방향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강리우는 뒤에 서서 그녀를 봤다. 세아의 머리카락이 바람에 흔들렸다. 그녀가 사라질 때까지 강리우는 거기 섰다.

그리고 혼자 남겨진 강리우는 담배를 다시 꺼냈다. 이번에는 피웠다.


세아가 고시원으로 돌아간 것은 아침 여덟 시였다.

하늘이가 이미 와 있었다. 세아의 고시원 열쇠를 가지고 있었다. 어떻게 얻었는지는 설명하지 않았다. 타투숍 일찍 문을 닫고 왔다고만 했다.

“너 어디 갔어.”

“몰라요. 그냥 걸었어요.”

하늘이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대신 라면을 끓였다. 고시원 방 한 구석의 핫플레이트에서. 라면에 계란을 넣고 스팸을 올렸다. 세아는 그것을 먹지 않았다. 그냥 봤다.

“강리우가 왔어.”

하늘이가 말했다. “아까. 타투숍에. 너 핸드폰이 없다니까.”

“뭐래요.”

“너 계약서 못 사인한다고 하니까 ‘알겠다’고 했어. 그리고 진짜로 알겠다는 표정이었어.”

세아가 하늘이를 봤다.

“그리고는 뭐라고 했어.”

“뭐라고 했어는 뭐… 자기가 할 수 있는 게 뭔지 생각해보겠다고.”

세아는 라면을 집었다. 국수가 맛있었다. 스팸 기름이 입에 남았다. 계란 노른자가 부드러웠다. 하늘이가 잘 끓였다.

“세아.”

“네.”

“계약서 정말 안 사인할 거야?”

세아는 라면을 씹으면서 생각했다. 계약서. 45페이지. 14페이지. 제5조. 제8조. “최선의 노력을 다한다.” 강민준의 얼굴. 박인철이의 친절함. 강리우의 눈.

“모르겠어요.”

“진짜?”

“네. 진짜 몰라요. 사인하면 안 될 것 같은데 사인 안 하면 또 다른 문제가 생기는 거 같고.”

하늘이가 세아의 옆에 앉았다.

“그럼 일단은 사인 안 하는 거다. 문제가 생기면 그때 생각하고.”

세아는 라면을 먹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불이 꺼지지 않았다. 아직도 세아 안에는 불이 있었다. 그것이 무엇을 태우고 있는지는 몰랐지만, 꺼지지 않았다.


[다음 화로의 떡밥]

— 강리우는 정말로 “할 수 있는 게 뭔지 생각해보겠다”고만 했을까?

— 강민준의 심근경색과 병원비는 이후 스토리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

— 세아가 “사인 안 하면 또 다른 문제”라고 생각한 그 문제는 무엇일까?

— 강리우가 택한 해결책은 무엇일까?

# 강리우와 세아

## 1부: 이별의 순간

강리우는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세아의 머리카락이 바람에 흔들렸다. 그녀가 사라질 때까지 강리우는 거기 섰다. 강바람이 불어오는 강변 산책로에서, 그는 움직이지 않았다. 세아가 돌아가는 뒷모습이 점점 작아지다가 결국 어둠 속으로 사라져도, 그는 한 발자국도 옮기지 않았다.

밤공기가 차가웠다. 팔월의 밤이었지만, 강변에 불어오는 바람은 이미 가을의 냉기를 품고 있었다. 강리우의 목덜미에 소름이 돋았다. 아니, 그것은 바람 때문만은 아니었다.

*이게 뭐 하는 짓이야.*

강리우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가슴 한가운데가 철렁 내려앉았다. 손을 펼쳐보니 떨리고 있었다. 주머니 안 담배 갑이 자꾸만 손가락을 자극했다.

세아가 완전히 사라진 지 정확히 몇 분이 지났을 때, 강리우는 비로소 몸을 움직였다.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집으로. 아니, 어디든 지금 이 자리가 아닌 곳으로. 하지만 다리가 말을 듣지 않았다.

그는 강변의 벤치에 몸을 내려놨다. 낡은 목재 벤치는 물기를 머금고 있었다. 바지가 젖을 텐데, 강리우는 신경 쓰지 않았다.

주머니에서 담배 갑을 꺼냈다. 필터가 살짝 구부러진 담배들이 다섯 개 남아 있었다. 손가락으로 하나를 뽑았다. 라이터를 찾기 위해 주머니를 뒤졌다. 없었다. 언제 잃어버렸는지 몰랐다.

*뭐, 상관없지.*

강리우는 담배를 입에 물고 있었다. 피우지는 않았다. 그냥 입가에 물고만 있었다. 세아와 함께한 지난 몇 시간을 다시 생각했다.

그녀가 처음 자신을 찾아왔을 때의 표정. 타투숍의 조명 아래에서 본 그 어린 얼굴. 계약서 때문에 고민하는 모습이 얼마나 간절했는지. 그리고 지금, 강변에서 자신을 떠나던 그 뒷모습.

강리우는 눈을 감았다.

바다 소리 같은 강물의 흐름이 들렸다. 물이 흐르는 소리는 언제나 같은 음정이었다. 변하지 않았다. 그것이 강리우를 더 슬프게 만들었다. 세상은 이렇게 무관심하게 흘러가는데, 자신은 여기 앉아 한 여자 때문에 마음을 졸이고 있다니.

담배가 입에서 떨어졌다.

강리우는 다시 담배를 집었다. 이번에는 피웠다.

라이터가 없으니 어떻게 피웠을까. 그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냥 피웠다. 담배는 스스로 불이 붙었다. 강리우가 원했으니까.

연기가 코로 들어갔다. 목을 타고 폐로 들어갔다. 담배의 맛은 쓰고 거칠었다. 그것이 좋았다. 쓰고 거칠수록 현실적이었다. 달콤한 환상은 필요 없었다.

*너는 뭐하는 거야, 강리우.*

강리우는 자신에게 물었다. 대답이 없었다. 오직 강물의 흐르는 소리와 담배 연기가 피어오르는 소리뿐이었다.

## 2부: 고시원으로의 귀환

세아가 고시원으로 돌아간 것은 아침 여덟 시였다.

밤새 강변을 걸었다. 방향 없이, 목적지 없이. 종로에서 남대문까지, 광화문에서 청계천까지. 서울의 밤은 생각보다 길었다. 그 긴 밤 동안 세아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냥 걸었다.

발이 아팠다. 신발 안에서 발가락이 땀에 젖어 미끄러졌다. 하지만 멈출 수 없었다. 멈추면 생각해야 했다. 강리우의 말, 강민준의 얼굴, 계약서, 자신의 미래. 멈출 수 없었다.

새벽 다섯 시쯤 고시원으로 향했다. 너무 피곤했다. 다리가 자동으로 움직이는 것 같았다.

고시원 방에 들어섰을 때, 세아는 깜짝 놀랐다.

하늘이가 이미 와 있었다.

하늘이는 침대 위에 앉아 있었다. 손에는 세아의 고시원 열쇠가 들려 있었다. 그것도 낡은 열쇠. 세아가 어딘가에 두고 잃어버렸던 열쇠였다.

“너 어디 갔어.”

하늘이의 목소리는 차갑지 않았다. 오히려 걱정이 배어 있었다. 하지만 세아는 설명할 마음이 없었다.

“몰라요. 그냥 걸었어요.”

“밤새?”

세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늘이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대신 움직였다. 침대에서 내려와 핫플레이트를 켰다. 고시원 방 한 구석에 놓인 그 작은 전열기구는 세아와 하늘이의 유일한 조리 도구였다.

라면을 끓였다.

물을 붓고, 면을 넣고, 스프를 풀었다. 계란을 깨뜨려 넣었다. 스팸을 꺼내 몇 조각 잘라 올렸다. 하늘이의 손놀림은 정확했다. 타투숍에서 일한 손이었다. 미세한 움직임에 능했다.

라면이 끓어올랐다. 거품이 국물 위에서 하얀 꽃을 피웠다. 하늘이는 조심스럽게 거품을 걷어냈다.

“다 됐어.”

하늘이가 말했다.

세아는 앉았다. 방바닥에 앉아 라면 그릇을 받았다. 국물 위에 떠 있는 계란 흰자와 노른자가 보였다. 스팸은 옅은 갈색으로 변해 있었다. 하늘이가 잘 끓였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세아는 먹지 않았다. 그냥 봤다.

젓가락을 들 힘이 없었다. 손이 너무 떨렸다. 팔뚝이 경직되어 있었다. 밤새 걷느라 모든 근육이 경직되어 있었다.

“강리우가 왔어.”

하늘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세아가 고개를 들었다.

“아까. 타투숍에. 너 핸드폰이 없다니까.”

“뭐래요.”

“너 계약서 못 사인한다고 하니까 ‘알겠다’고 했어.”

하늘이는 라면을 먹으면서 말했다. 입에 물고 있는 면 때문에 발음이 정확하지 않았지만, 세아는 들었다.

“그리고는?”

“그리고는 진짜로 알겠다는 표정이었어. 진짜로. 내가 본 강리우는 항상 냉소적이었는데, 어제는… 뭔가 달랐어.”

세아는 라면을 집었다.

국수가 맛있었다. 스팸 기름이 입안에 퍼졌다. 짠맛이 혀를 자극했다. 계란 노른자가 부드럽게 흘러나왔다. 하늘이가 잘 끓였다.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것이 정성들여 만들어진 라면이었다.

세아는 계속 먹었다. 아무 생각 없이. 그냥 먹었다.

“세아.”

하늘이가 다시 불렀다.

“네.”

“계약서 정말 안 사인할 거야?”

젓가락을 놨다.

계약서. 세아는 그것을 수백 번 생각했다. 밤새 강변을 걸으며 생각했다.

45페이지. 작은 글씨로 빼곡하게 채워진 45페이지. 법률용어들. 조항들. 위반 시 배상금. 부당 해지 시 수수료. 이용자의 의무. 플랫폼의 책임. 아니, 책임이 아니라 면책.

그리고 14페이지. 서명란이 있던 14페이지. 그곳에는 이미 강민준의 서명이 있었다. 깔끔한 글씨체로 쓰여진 이름. 강민준. 그리고 그 옆에는 세아가 사인할 자리가 비어 있었다.

“계약서. 45페이지. 14페이지. 제5조. 제8조. ‘최선의 노력을 다한다.’”

세아는 중얼거렸다.

강민준의 얼굴이 떠올랐다. 심근경색으로 쓰러진 그 노인의 얼굴. 병원 침대에 누워 있던 모습. 그리고 박인철이의 친절함. 강리우의 눈. 그 검은 눈동자 안에 담긴 무엇.

“모르겠어요.”

세아가 말했다.

“진짜?”

“네. 진짜 몰라요.”

하늘이가 기다렸다. 세아가 계속할 때까지.

“사인하면 안 될 것 같은데 사인 안 하면 또 다른 문제가 생기는 거 같고.”

세아의 목소리는 작았다. 마치 자신을 설득하려는 듯했다.

하늘이가 세아의 옆에 앉았다. 핫플레이트 옆, 라면 냄새가 풍기는 그 자리에.

“그럼 일단은 사인 안 하는 거다.”

하늘이가 말했다.

“그냥… 일단은.”

“문제가 생기면?”

“그때 생각하고.”

세아는 라면을 다시 들었다. 국물이 식고 있었다. 면이 불어서 너무 부드러워지고 있었다. 하지만 세아는 상관하지 않았다. 그냥 먹었다.

하늘이도 함께 먹었다. 둘은 라면을 먹으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강변을 걷던 밤, 타투숍에서의 만남, 계약서, 미래. 그 모든 것이 이 작은 방 안에 떠 있었지만, 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고시원의 벽은 얇았다. 옆방의 수험생이 책장을 넘기는 소리가 들렸다. 아래층 누군가가 밥을 먹는 소리. 세상은 계속 움직였다. 세아도, 하늘이도 정지된 채로.

## 3부: 불 꺼지지 않다

불이 꺼지지 않았다.

아직도 세아 안에는 불이 있었다. 그것이 무엇을 태우고 있는지는 몰랐지만, 꺼지지 않았다.

밤이 되자, 세아는 침대에 누웠다. 하늘이는 이미 자고 있었다. 옆방에서 수험생의 선택지 마킹음이 들렸다. 밤 열 시가 넘었는데도.

세아는 천장을 봤다.

고시원의 천장은 담황색이었다. 오래 묵은 담배 연기의 색이었다. 그곳에는 무수한 얼룩이 있었다. 이전 세입자들의 흔적이었을까. 아니면 처음부터 있던 얼룩일까.

*사인하면 안 될 것 같은데.*

세아는 생각했다.

강민준을 만났을 때의 느낌을 다시 떠올렸다. 그 남자의 눈빛. 자신의 얼굴을 보는 그 방식. 마치 자신을 상품으로 보는 것 같았다. 아니, 상품이 아니었다. 그보다 더 깊은 뭔가. 강민준은 자신을 보면서 무언가를 계산하고 있었다. 수익성을 계산했다.

그리고 강리우.

강리우의 눈은 달랐다. 차갑지만, 계산적이지는 않았다. 오히려 혼란스러워 보였다. 마치 자신도 모르는 무언가를 하고 있는 듯한 표정이었다.

*사인 안 하면 또 다른 문제가 생긴다는 게 뭐지?*

세아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강민준이 심근경색으로 쓰러진 것. 그것이 자신과 무슨 관련이 있을까. 아무도 명시적으로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모두가 알고 있었다. 세아가 계약서에 서명하지 않으면, 모든 것이 무너질 것이라는 것을.

강리우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내가 할 수 있는 게 뭔지 생각해보겠다고.”

하늘이가 전해준 그 말.

*강리우는 뭐를 생각하고 있을까.*

세아는 눈을 감았다.

강변에서의 그 마지막 순간. 강리우가 서 있던 모습. 그의 담배 연기. 그의 침묵.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세아의 가슴 안에서 불이 타올랐다.

그것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했다. 이 불은 자신을 어디론가 데려갈 것이다. 예상과는 다른 방향으로.

밤은 깊었고, 고시원은 조용했다. 하늘이의 곯아떨어진 숨소리. 옆방의 수험생이 이제 자기 시작한 듯 고요해진 침음. 아래층에서 들리던 음악도 끝났다.

세아는 여전히 눈을 감고 있었다.

천장을 보지 않으려고.

불을 직시하지 않으려고.

## 4부: 강리우의 밤

강리우는 담배를 피우지 않았다.

라이터를 찾았으니까. 주머니를 뒤져서 결국 찾았다. 낡은 라이터였다. 불이 잘 붙지 않았다. 몇 번을 튕겨야만 불이 붙었다.

담배에 불을 붙였다.

강변은 여전히 어두웠다. 밤하늘은 서울의 야간조명 때문에 검은색이 아니라 회색이었다. 마치 오래 빨아진 연기처럼 뿌옇게 흐려져 있었다.

강리우는 담배를 피웠다.

연기가 코로 들어갔다. 익숙한 감각이었다. 혀에 퍼지는 니코틴의 맛. 폐에 들어올 때의 그 따끔거림. 담배는 자신을 현실로 돌려놨다.

*너는 뭐 하는 거야.*

강리우는 자신에게 물었다.

세아를 놓아주었다. 그것이 맞는 결정이었을까. 아니다. 강리우는 알고 있었다. 그것이 맞는 결정이 아니었다는 것을. 그것은 도망친 것이었다. 마주해야 할 현실에서 도망친 것이었다.

강민준은 지금 병원에 누워 있었다. 심근경색. 의사들은 그것이 스트레스 때문이라고 말했다. 과로. 그리고 무언가 더.

강리우는 알고 있었다. 강민준의 무언가 더가 무엇인지.

그것은 자신이었다.

자신이 강민준에게 준 압박감. 자신이 해야 한다고 생각한 결정들. 자신이 강민준에게 강요한 욕망들. 그 모든 것이 그 남자의 심장을 짓눌렀다.

그리고 지금, 세아.

강리우는 담배를 깊게 빨아들였다.

세아가 계약서에 서명하지 않으면, 모든 것이 무너진다. 강민준의 회사는 자금난에 빠질 것이다. 세아의 커리어는 시작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강리우 자신은… 뭔가를 잃을 것이다. 무엇을 잃을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히 뭔가를 잃을 것이다.

*할 수 있는 게 뭔지 생각해보겠다고?*

강리우는 웃음이 나왔다. 쓸쓸한 웃음.

자신이 한 말이었다. 하늘이 타투숍에서 했던 말. 그것이 무슨 의미였을까.

강리우는 담배를 내려놨다. 발 아래 콘크리트 바닥에 떨어진 담배는 불이 꺼졌다.

그는 새로운 담배를 꺼냈다.

밤은 계속 깊어졌다.

강변의 벤치 위에서, 강리우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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