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15화: 왼쪽 파일
파일 두 개가 테이블 위에 놓여 있었다.
왼쪽은 JYA 전속 계약서. 오른쪽은 — 세아는 아직 몰랐다.
박인철이 오른쪽 파일에 손을 올렸다.
“이건 다른 거예요.”
그가 파일을 세아 쪽으로 밀었다. 세아는 그것을 받지 않았다. 그냥 봤다. 파일 표지가 하얬다. 아무 글씨도 없는 하얀 표지. 안에 뭐가 들었는지 알 수 없는 것. 세아는 그런 종류의 것들을 본능적으로 조심했다 — 내용물이 보이지 않는 것들.
“뭐예요.”
“열어봐요.”
카페 안에서 재즈가 계속 흘렀다. 베이스 라인이 낮고 느렸다. 세아는 그 리듬을 들으면서 파일을 집었다.
첫 페이지가 나왔다.
세아는 읽었다.
두 번 읽었다.
서류 상단에 JYA 엔터테인먼트 로고가 있었다. 그 아래에 제목이 있었다. 음악 저작물 양도 확인 및 권리 귀속에 관한 합의서. 세아는 그 제목을 읽고 다음 줄로 내려갔다. 이름이 있었다. 세아의 이름이 아니었다 — 다른 이름이었다. 세 개의 기획사 이름과 각각의 대표자 이름. 그리고 맨 아래에, 굵게 표시된 항목 하나.
저작물 목록: 별첨 A 참조.
세아는 별첨 A를 찾았다. 두 번째 페이지였다.
세 곡이었다.
곡명이 나란히 있었다. 세아는 그것들을 봤다. 첫 번째 곡. 두 번째 곡. 세 번째 곡. 제목이 조금씩 바뀌어 있었다 — 원래 세아가 붙인 제목이 아니었다. 세아가 파도가 없는 날에라고 불렀던 것이 Still Water가 됐다. 세아가 겨울 기도라고 불렀던 것이 December Hymn이 됐다. 세아가 제목을 붙이지 못했던 세 번째 곡 — 그것은 그냥 숫자로 표기됐다. Track 3.
세아는 파일을 덮었다.
손이 파일 표지 위에 있었다. 세아는 그것을 느꼈다 — 손이 약간 차갑다는 것을. 아까 한강 난간을 잡았을 때보다 더 차가웠다. 커피를 쥐었는데도.
“이게 뭐예요.” 세아가 물었다. 질문이 아니라 확인이었다.
박인철이 말했다.
“나세아 씨 곡들을 현재 보유하고 있는 기획사들이 JYA에 저작권을 넘기는 합의서예요.”
세아는 그 말을 들었다.
“왜요.”
“JYA가 인수하면 관리가 통합돼요. 그리고 그 과정에서 — 원저작자 확인 절차를 다시 밟을 수 있어요.”
“원저작자가요.”
“나세아 씨요.” 박인철이 잠깐 멈췄다. “이름을 되찾을 수 있다는 뜻이에요.”
카페 재즈가 코러스로 올라갔다. 누군가 문을 열고 들어오면서 찬 공기가 잠깐 들어왔다가 닫혔다. 세아는 그것을 느꼈다 — 추위가 들어왔다가 나가는 것을.
이름을 되찾을 수 있다.
그 말이 세아의 어딘가에 걸렸다. 갈고리처럼. 박인철이 그것을 노리고 말했다는 것을 세아는 알고 있었다. 알면서도 걸렸다.
“조건이 뭐예요.” 세아가 물었다.
박인철이 왼쪽 파일로 손을 옮겼다.
“전속 계약이에요.”
세아가 고시원에 돌아온 것은 여섯 시가 조금 넘었을 때였다.
합정역에서 걸어오는 길에 편의점에 들렀다. 삼각김밥 하나와 따뜻한 캔 옥수수 수프. 계산하면서 카드 잔액이 얼마인지 생각했다. 이번 달 편의점 알바 급여가 들어오기까지 사흘이 남아 있었다. 세션 일은 다음 주 금요일이었다. 그 사이에 써야 할 돈들 — 도현 생활비, 어머니 약값, 고시원 월세 — 이 머릿속에서 줄을 섰다.
삼각김밥 포장을 뜯으면서 고시원 복도를 걸었다.
옆방에서 드라마 소리가 났다. 누군가 전화 통화를 하는 목소리가 벽을 통해 들렸다. 화장실 쪽에서 물 내려가는 소리. 고시원 복도는 항상 이런 소리들로 가득했다 — 각자의 삶이 얇은 벽 너머에서 제각각 진행되는 소리. 세아는 그 소리들이 싫지 않았다. 적어도 자신이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방에 들어가서 가방을 바닥에 내려놨다.
파일 두 개가 가방 안에 있었다. 박인철이 “가져가서 읽어봐요”라고 했다. 세아는 가져왔다. 읽을 것이었다 — 그러나 지금 당장은 아니었다.
침대 가장자리에 앉았다. 삼각김밥을 먹었다. 참치마요 맛이었다. 맛이 있는지 없는지 잘 몰랐다. 먹는 동안 창문 너머를 봤다 — 반지하라서 바깥이 보이지 않았다. 지나가는 사람들의 발만 보였다. 구두 두 켤레가 지나갔다. 운동화 하나. 그 다음에 한동안 아무것도 없었다.
캔 수프를 열었다. 따뜻했다. 옥수수 냄새가 방 안에 퍼졌다.
핸드폰을 꺼냈다.
하늘에게 문자를 보낼까 생각했다가 그만뒀다. 하늘은 지금 가게에 있을 시간이었다. 오후 여섯 시는 홍대 타투샵의 예약이 몰리는 시간대였다. 도현에게는 더 보낼 것이 없었다 — 오늘 아침에 생활비를 송금했다. 어머니에게는 일주일에 한 번 전화했다. 이번 주는 아직이었지만 오늘은 아니었다.
세아는 핸드폰을 내려놓고 수프를 마저 마셨다.
그리고 가방에서 파일 두 개를 꺼냈다.
전속 계약서는 열다섯 페이지였다.
세아는 첫 페이지부터 읽었다. 천천히 읽었다.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에서 멈췄다가 다시 읽었다. 핸드폰 메모장에 모르는 법률 용어를 적어가면서 읽었다.
저작인격권 불행사 특약.
전속 기간 내 독립 발매 금지.
계약 해지 시 위약금 산정 기준 — 잔여 계약 기간 × 예상 수익의 30%.
세아는 예상 수익 항목을 봤다. 숫자가 적혀 있었다. 세아는 그 숫자를 보면서 잠깐 손이 멈췄다 — 그 숫자가 크다는 것이 아니라, 그 숫자를 기준으로 위약금이 계산된다는 것이 문제였다. 계약이 좋게 끝나지 않을 경우, 세아는 그 숫자의 30%를 물어야 했다. 지금 세아의 통장 잔액을 기준으로 하면, 세아는 그것을 갚는 데 — 세아는 계산을 멈췄다.
계속 읽었다.
일곱 번째 페이지에서 멈췄다.
제7조 (음악 저작물의 귀속)
계약 기간 중 작성된 모든 음악 저작물 (작사, 작곡, 편곡 포함)의 저작재산권은 회사에 귀속된다. 단, 저작인격권은 아티스트에게 잔존한다.
세아는 그 조항을 두 번 읽었다.
저작재산권은 회사에.
저작인격권은 아티스트에게.
저작인격권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세아는 알고 있었다 — 자신의 작품이라고 주장할 권리. 이름을 달 권리. 그러나 저작재산권이 회사에 있다는 것은 — 그 이름이 달린 작품으로 돈을 버는 권리가 회사에 있다는 뜻이었다.
이름은 있되, 돈은 없는.
세아는 파일을 내려놨다.
방 천장을 봤다. 형광등이 하나였다. 왼쪽 끝이 가끔 깜빡였다 — 고쳐달라고 말한 지 두 달이 됐는데 아직이었다. 세아는 그것에 익숙해져 있었다. 깜빡임의 주기까지 알고 있었다. 삼십 초에 한 번, 두 번 깜빡이고 멈추는 패턴.
핸드폰이 울렸다.
세아는 화면을 봤다.
강리우.
세아는 세 번째 진동이 울릴 때 받았다.
“여보세요.”
“나세아 씨예요?”
목소리가 낮고 조용했다. 카페에서 들었을 때와 달랐다 — 아니, 다르지 않았다. 주변 소음이 없으니 목소리 자체가 더 명확하게 들렸다. 세아는 그것을 들으면서 침대 가장자리에서 자세를 고쳐 앉았다.
“네.”
“강리우예요. 어제 클럽에서 — 기억해요?”
“기억해요.”
“늦게 연락해서 미안해요. 번호를 박인철 씨한테 받았어요. 괜찮아요?”
세아는 괜찮냐는 질문을 들었다. 대답하기 전에 잠깐 그 질문이 무엇을 묻는 것인지 생각했다 — 번호를 넘긴 것에 대한 괜찮냐인지, 지금 이 순간의 괜찮냐인지. 두 가지 다인 것 같았다. 세아는 두 가지 다 괜찮지 않았지만 어느 쪽도 말할 이유가 없었다.
“괜찮아요.”
“박인철 씨 만났어요? 오늘.”
“네.”
“어떻게 됐어요.”
세아는 테이블 위에 놓인 파일 두 개를 봤다.
“계약서 받아왔어요.”
“읽었어요?”
“읽고 있었어요.”
전화기 너머에서 잠깐 침묵이 있었다. 그 침묵의 질감이 이상했다 — 말을 고르는 침묵이었다. 세아는 그것을 느꼈다. 강리우가 뭔가를 말하려다가 멈춘 것을.
“나세아 씨, 지금 시간 있어요?”
“있어요.”
“만날 수 있어요? 지금.”
세아는 방 안을 봤다. 반지하 고시원. 형광등이 깜빡였다. 파일 두 개. 삼각김밥 포장지. 빈 캔 수프.
“어디서요.”
강리우가 말한 장소는 한강이었다.
정확히는 망원 한강공원. 세아가 오후에 있었던 곳에서 자전거 도로를 따라 십 분 정도 더 가면 나오는 곳. 세아는 그것을 이상하게 여겼다 — 한강에서 만나자는 제안은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강남에서 오는 사람이 망원 한강을 지정하는 것도 이상했다. 그런데 이상하다고 말하지 않았다. 그냥 갔다.
일곱 시가 넘어서 한강은 어두웠다.
가로등이 자전거 도로를 따라 주황색으로 켜져 있었다. 강물 위에 반사된 불빛이 흔들렸다. 겨울 강바람이 세아의 귀를 때렸다. 귀가 아팠다. 세아는 후드 끈을 당겼다 — 패딩 후드가 얼굴을 반쯤 가렸다.
강리우는 난간 근처에 서 있었다.
코트 깃을 세운 채였다. 손을 코트 주머니에 넣고 있었다. 세아가 가까이 오는 것을 보고 고개를 돌렸다. 눈 밑의 다크서클이 가로등 불빛에서 더 짙어 보였다.
“왔어요.”
“네.”
세아는 강리우에게서 두 걸음 정도 떨어진 자리에 섰다. 난간에 기대지 않았다. 바람이 왔다. 세아의 머리카락이 후드 안에서 흔들렸다.
강리우가 세아를 봤다.
“추워요?”
“괜찮아요.”
“…옷이 얇다.”
그것은 물음이 아니었다. 관찰이었다. 세아는 그것에 대답하지 않았다.
“할 말 있어서 불렀잖아요.” 세아가 말했다.
강리우가 잠깐 입을 다물었다가 열었다.
“박인철 씨한테 뭐 들었어요?”
“뭘 들었는지 먼저 물어요?”
“순서가 있으니까요.” 강리우가 말했다. “내가 알고 있는 것과 나세아 씨가 들은 것이 같은지 확인하고 싶어요.”
세아는 그것을 들었다.
“강리우 씨가 제 곡에 관심 가졌다고 했어요. 발매된 곡들요. 그리고 그 곡들의 크레딧 문제. 저작권이 제 이름이 아니라는 것.”
“그리고요?”
“전속 계약 하면 이름 되찾는 걸 도와준다고 했어요. JYA가 기획사들한테서 저작권을 인수하면서 원저작자 확인 절차를 다시 밟는다고.”
강리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다예요?”
“그게 다예요.”
강리우가 강물 쪽을 봤다. 잠깐. 그러다가 다시 세아를 봤다.
“박인철 씨가 말 안 한 게 있어요.”
세아는 기다렸다.
“그 합의서 — 저작권 인수 합의서요. 그걸 진행하는 데 시간이 얼마나 걸리는지.”
“얼마나 걸려요.”
“빠르면 육 개월. 보통은 일 년 이상이에요. 기획사들이 순순히 넘기지 않을 거거든요. 특히 세 번째 곡은 — 계약서가 없잖아요.”
세아는 그것을 알고 있었다. 알고 있었는데 박인철이 그 부분을 얼버무렸다는 것을 — 지금 강리우가 말하기 전까지는 명확하게 인식하지 못했다.
“그게 문제예요?”
“전속 계약 기간이 삼 년이에요.” 강리우가 말했다. “일 년 동안 이름 찾는 싸움을 하는 동안 나세아 씨는 JYA 전속 작곡가로 곡을 쓰고 있어야 해요. 그리고 그 계약 조건 읽었어요?”
“읽었어요.”
“7조요.”
“읽었어요.”
강리우가 잠깐 멈췄다.
“저작재산권이 JYA에 귀속돼요. 이름은 돌려받아도 — 그 이름으로 번 돈은 회사 거예요.”
세아는 그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런데 강리우의 입에서 그 말이 나오자 처음 읽었을 때와 다른 무게로 들렸다. 이름을 찾는 대신 돈을 잃는 것. 아니, 정확히는 — 이름을 빌미로 더 오래, 더 단단하게 묶이는 것.
“왜 나한테 말해요.” 세아가 물었다.
강리우가 세아를 봤다.
“어떤 의미예요.”
“JYA 아들이잖아요.” 세아가 말했다. 직접적으로. “그 회사 A&R팀이잖아요. 전속 계약 안 하는 게 유리하다고 말하는 게 이상하잖아요.”
강리우가 입을 다물었다.
바람이 왔다. 강물 위에서 파문이 번졌다가 사라졌다.
“맞아요.” 강리우가 말했다. “이상하죠.”
“그러니까 왜요.”
강리우가 주머니에서 손을 꺼냈다. 손이 차 보였다. 그가 손가락을 한 번 폈다가 다시 쥐었다.
“나세아 씨 곡 들었어요.” 그가 말했다. “어젯밤에 클럽에서. 그리고 발매된 것들도 다 찾아 들었어요.”
세아는 그것을 들었다. 다 찾아 들었다는 말을.
“그래서요.”
“그 곡들이 박소진 씨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어요.” 강리우가 말했다. “처음 들었을 때부터. 박소진 씨 보이스에 맞게 편곡됐는데, 그 밑에 있는 뼈대가 — 그건 박소진 씨가 만들 수 있는 게 아니었어요. 물론 내 직감이 틀릴 수도 있지만.”
세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리고 어제 세아 씨가 무대에서 노래하는 것 봤어요.” 강리우가 계속 말했다. “그 두 가지가 — 같은 사람이라는 걸 알았어요. 그 곡들을 쓴 사람이 어제 그 클럽에서 노래한 사람이라는 걸.”
세아의 손가락이 후드 끈을 잡고 있었다.
“그래서요.” 세아가 다시 물었다. 목소리가 낮아지지 않으려고 했다. 낮아졌다.
“그래서 계약서 사인하기 전에 말해주고 싶었어요.” 강리우가 말했다. “그 계약서가 나세아 씨한테 좋은 거라고 생각하지 않아서.”
“JYA 아들이 JYA 계약서가 나쁘다고 해요.”
“JYA 아들이라서 JYA 계약서가 어떤지 알아요.”
세아는 그 말을 들었다.
강물이 흘렀다. 가로등이 강물 위에서 흔들렸다. 세아는 난간을 잡지 않은 채 서 있었다. 바람이 계속 왔다. 귀가 더 아팠다.
“그럼 어떻게 하라는 거예요.” 세아가 물었다.
강리우가 세아를 봤다.
“아직 몰라요.” 그가 솔직하게 말했다. “지금 당장 방법이 있는 건 아니에요. 그냥 — 서두르지 말라는 거예요.”
“박인철 씨가 일주일 안에 결정해달라고 했어요.”
강리우의 눈썹이 움직였다. 세아는 그것을 봤다. 그가 그 사실을 몰랐다는 것을. 아니면 알았는데 예상보다 짧다는 것을.
“일주일이요.”
“네.”
강리우가 강물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잠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세아는 그 침묵 동안 강리우의 턱 근육이 움직이는 것을 봤다.
“나세아 씨.” 그가 말했다. 강물을 보면서.
“네.”
“그 세 곡 말고 — 다른 곡들 있어요?”
세아는 잠깐 멈췄다.
“왜요.”
“있어요, 없어요.”
“…있어요.”
“몇 곡이요.”
세아는 머릿속으로 세봤다. 고시원 서랍 안에 있는 노트들. 핸드폰 메모장에 저장된 멜로디 조각들. 완성된 것과 반쯤 완성된 것과 아직 시작만 한 것들.
“완성된 것만요?”
“완성된 것만요.”
“…아홉 곡.”
강리우가 세아를 봤다.
아홉 곡.
그 눈빛이 무엇인지 세아는 정확히 알 수 없었다. 놀란 것 같기도 했고, 놀라지 않은 것 같기도 했다. 강리우가 잠깐 입을 다물었다가 말했다.
“들을 수 있어요?”
“지금요?”
“지금은 아니고. 언제든.”
세아는 그 질문을 들었다. 들을 수 있어요. 그 질문이 얼마나 간단한 문장인지 — 그리고 그 간단한 문장이 세아에게 얼마나 이상한 무게로 들리는지. 세아는 자신이 쓴 곡을 누군가에게 들려준 적이 없었다. 하늘에게도. 도현에게도. 어머니에게도. 곡을 팔 때는 파일로 넘겼다. 직접 앉아서 누군가에게 들려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왜요.” 세아가 물었다. 또.
강리우가 세아를 봤다. 세아는 그것을 피하지 않았다.
“나세아 씨 곡이 어떤 것들인지 알고 싶어요.” 강리우가 말했다. “JYA 때문도 아니고 박인철 씨 때문도 아니고. 그냥 — 알고 싶어요.”
그냥 알고 싶다.
세아는 그 말이 어떤 언어로 된 것인지 잠깐 몰랐다. 세아가 살아온 방식에서 그냥이라는 말은 자주 없었다. 이유가 없는 것에는 대가가 없었다. 대가가 없는 것에는 함정이 있었다. 그것이 세아가 배운 방식이었다.
그런데 강리우가 그냥 알고 싶다고 했다.
세아는 그것을 믿어야 할지 몰랐다. 믿고 싶은지도 몰랐다.
“생각해볼게요.” 세아가 말했다.
강리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더 밀지 않았다.
두 사람은 잠깐 그 자리에 서 있었다.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헤어져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아직 그 순간이 오지 않은 것처럼. 강바람이 계속 불었다. 세아의 코가 차가워졌다. 강리우의 코트가 바람에 펄럭였다.
“한강 자주 와요?” 강리우가 물었다.
“네.”
“왜요.”
“넓으니까요.”
강리우가 그 말을 들었다. 세아는 그것이 이상한 대답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바꾸지 않았다. 이상한 대답이지만 틀리지 않았다.
“저도 이상한 이유로 여기 오게 됐어요.” 강리우가 말했다.
“뭔데요.”
“오늘 오전에 아버지랑 싸웠어요.” 강리우가 별거 아닌 것처럼 말했다. “회사 일로요. 그러고 나서 드라이브하다가 — 어쩌다 여기까지 왔어요. 강남에서 여기까지 차로 오면 이십 분 정도 걸려요.”
세아는 그것을 들었다. 아버지랑 싸웠다. 회사 일로. 드라이브하다가 어쩌다 여기까지.
“어떤 싸움이에요.”
“…나세아 씨 이야기 했어요.” 강리우가 말했다.
세아는 그것을 들었다.
“저 이야기요.”
“네.”
“뭐라고 했어요.”
강리우가 잠깐 멈췄다. 강물을 봤다. 세아도 강물을 봤다. 두 사람이 나란히 강물을 보면서 서 있었다. 가로등이 흔들렸다.
“그 계약서 조건이 너무 불리하다고 했어요.” 강리우가 말했다. “원저작자 확인 절차가 일 년 걸리는 동안 나세아 씨가 일방적으로 묶이는 거라고.”
“아버지가 뭐라고 했어요.”
“그게 업계 표준 계약이라고 했어요.”
“맞잖아요.”
강리우가 세아를 봤다. 세아가 그것을 말한 톤이 — 체념인지 인정인지 알 수 없는 톤이어서인지, 강리우가 잠깐 말을 잃었다.
“맞는다고 생각해요?” 강리우가 물었다.
“업계 표준이라는 것 자체가 틀렸다고 생각해요.” 세아가 말했다. “근데 그게 틀렸다고 해서 제가 선택할 수 있는 게 많아지는 건 아니잖아요.”
강리우가 그 말을 들었다.
세아는 계속 말하지 않았다. 더 말하면 말이 다른 방향으로 갈 것 같았다. 세아가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나세아 씨.” 강리우가 말했다.
“네.”
“내가 도울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볼게요.”
세아는 그 말을 들었다.
도울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볼게요.
그것도 쉽게 믿어야 할 말이 아니었다. 강리우는 JYA의 아들이었다. A&R팀이었다. 아버지와 싸웠다고 했지만 그것이 아버지와 다른 편에 서겠다는 뜻은 아니었다. 세아는 그것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세아는 강리우를 봤다.
강리우의 손이 코트 주머니 밖에 있었다. 차가운 공기 속에서. 세아는 그 손을 봤다 — 길고 마디가 굵은 손. 피아니스트의 손이라고 하늘이 어젯밤에 말했다. 손이 차 보였다.
“왜요.” 세아가 물었다. 오늘 그 질문을 몇 번째 하는지 몰랐다.
“그냥이요.” 강리우가 말했다.
또 그냥이었다.
세아는 그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할 수 없었다. 그냥이라는 말에 어떻게 대답하는지 세아는 몰랐다. 그냥이라는 말에 익숙하지 않았다.
바람이 강하게 왔다. 세아가 발을 반 걸음 뒤로 옮겼다. 중심을 잡기 위해서였다.
강리우가 그것을 봤다.
“들어가요.” 그가 말했다. “너무 추워요.”
“괜찮아요.”
“코가 빨개요.”
세아는 자신의 코를 만졌다. 손가락 끝이 코에 닿았을 때 차가웠다. 강리우 말이 맞았다. 세아는 손을 내렸다.
“가요.” 강리우가 다시 말했다.
이번에는 명령이 아니라 — 제안 같았다. 세아는 그 차이를 느꼈다.
망원 한강공원 주차장에 강리우의 차가 있었다.
검은 SUV였다. 세아는 그것을 봤다. 자신이 타야 하는 차인지 아닌지 몰랐다. 강리우가 당연히 태워줄 것처럼 차 쪽으로 걸어갔다.
“합정이에요?”
“네.”
“태워줄게요.”
“걸어가도 돼요.”
“알아요.” 강리우가 차 문을 열면서 말했다. “그래도 태워줄게요.”
세아는 잠깐 서 있었다. 걸어갈 수 있었다. 걸어가는 것이 더 익숙했다. 그런데 바람이 계속 불었고, 귀가 아팠고, 코가 빨갰고 — 세아는 조수석 문을 열었다.
차 안이 따뜻했다.
히터가 켜져 있었다. 세아는 의자에 앉으면서 그 온기를 느꼈다. 차 안에서 커피 냄새가 났다 — 오래된 커피 냄새. 컵홀더에 반쯤 마신 아메리카노가 있었다. 조수석 쪽 바닥에 악보가 몇 장 있었다. 세아는 그것을 발밑에 밀어두지 않으려고 발을 조금 옮겼다.
강리우가 운전석에 앉으면서 그것을 봤다.
“아, 그거 그냥 밟아도 돼요.”
“악보잖아요.”
“어차피 못 쓰는 거예요.”
세아는 악보를 집었다. 봤다. 피아노 악보였다. 위에 제목이 없었다. 아래에 날짜가 있었다 — 세아가 알아볼 수 있는 필체가 아니었지만 숫자는 알아볼 수 있었다. 삼 년 전 날짜였다.
“이거 직접 쓴 거예요?”
강리우가 시동을 켰다.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 대신 네비게이션을 켰다.
“합정동 주소요?”
세아는 악보를 내려놓고 주소를 말했다.
차가 출발했다. 강변북로로 올라가는 길에 서울의 야경이 보였다. 한강 위로 다리들이 불을 켜고 있었다. 세아는 그것을 봤다 — 다리 위를 달리는 차들의 불빛이 물 위에 길게 늘어졌다가 끊겼다가 했다.
“베를린에서 왔다고 했죠.” 세아가 말했다.
강리우가 핸들을 잡은 채 세아를 봤다가 도로로 시선을 돌렸다.
“하늘 씨한테 들었어요?”
“네.”
“거기서 피아노 했어요?”
“했어요.”
“왜 그만뒀어요.”
강리우가 대답하지 않았다. 세아는 그것을 기다리지 않았다. 대답이 나올 것 같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그런데 침묵이 대답이었다 — 대답할 수 없는 이유가 있다는 것.
“이 악보요.” 세아가 말했다. 악보를 들었다. “이게 왜 못 쓰는 거예요.”
“…완성을 못 했어요.”
“완성하면 되잖아요.”
“그게 안 돼요.”
세아는 그 말을 들었다. 그게 안 돼요. 강리우가 그 말을 할 때 목소리의 질감이 달라졌다. 평소의 부드럽고 여유 있는 목소리가 아니었다. 무언가가 걸린 것처럼 잠깐 막혔다가 나온 목소리였다.
세아는 악보를 봤다. 멜로디를 읽으려고 했다. 악보를 읽을 수는 있었다 — 기초 이론은 알았다. 하지만 차 안의 조명이 어두워서 세세하게 보이지 않았다. 대신 구조가 보였다. 1부, 2부, 3부로 나뉜 것 같았다. 그리고 3부가 거의 비어 있었다.
“3부에서 막혔군요.” 세아가 말했다.
강리우가 핸들을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세아는 그것을 봤다.
“어떻게 알아요.”
“여기가 비어 있으니까요.” 세아가 악보의 3부 부분을 가리켰다.
“…봐요?”
“구조만요. 악보 읽는 건 잘 못 해요.”
강리우가 잠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차가 강변북로를 달렸다. 한강이 오른쪽으로 흘렀다. 불빛이 흔들렸다. 히터 소리가 낮게 났다.
“베를린에서 연주 중에 손이 멈췄어요.” 강리우가 말했다. 천천히. 말하기로 결정한 것처럼.
세아는 기다렸다.
“리사이틀이었어요. 준비를 많이 했는데. 무대에 올라가서 피아노 앞에 앉았는데 — 손이 안 움직였어요. 기억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냥.”
그냥.
세아는 그 단어를 들었다. 오늘 강리우가 그냥이라는 말을 세 번 쓴 것 같았다. 세 번 다 다른 의미였다.
“얼마나요.”
“사 분이요.”
“사 분 동안 아무것도 안 쳤어요?”
“네.”
세아는 그것을 상상했다. 무대 위에서 피아노 앞에 앉아 사 분 동안. 청중이 있는 공연장에서. 사 분은 — 일상에서는 짧지만 무대 위에서는 영원이었다. 세아는 무대 위에서 시간이 다르게 흐른다는 것을 알았다. 세션 일을 하면서 알게 된 것이었다.
“그리고 귀국했어요?”
“그 다음 날요.”
세아는 더 묻지 않았다.
강리우도 더 말하지 않았다.
차가 합정 방면 출구로 빠져나갔다. 골목이 좁아졌다. 세아는 창밖을 봤다. 익숙한 거리였다. 편의점 불빛. 골목 라면집. 항상 문 앞에 화분을 내놓는 꽃집.
“여기 세워줘요.” 세아가 말했다.
강리우가 차를 세웠다. 고시원 바로 앞이 아닌 한 블록 전이었다. 세아는 고시원 앞에 내리고 싶지 않았다. 이유를 설명할 수 없었다. 그냥 그랬다.
세아가 차 문을 열었다.
“나세아 씨.”
돌아봤다.
강리우가 세아를 봤다.
“그 아홉 곡이요.” 그가 말했다. “언제든 준비되면 연락해요.”
세아는 그 말을 들었다. 언제든 준비되면. 준비되면. 자신이 준비되는 순간이 언제일지 — 세아는 몰랐다. 준비라는 것이 어떤 상태인지 몰랐다. 자신의 곡을 누군가에게 들려주는 것이 준비가 필요한 일인지도 몰랐다.
“생각해볼게요.” 세아가 말했다. 아까와 같은 말이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아까와 조금 달랐다. 세아 자신도 그것을 느꼈다.
차 문을 닫았다.
차가 떠났다. 세아는 그것을 봤다. 빨간 후미등이 골목을 돌아서 사라졌다.
고시원에 돌아와서 세아는 가방을 내려놓지 않고 바로 서랍을 열었다.
노트들이 있었다. 크기가 다른 세 권. 세아는 그것들을 꺼냈다. 침대 위에 놓았다. 노트 표지에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았다 — 세아는 제목을 붙이는 습관이 없었다. 곡에도 제목을 나중에 붙였다. 먼저 멜로디가 있고 가사가 있고 구조가 있었다. 제목은 마지막이었다.
세아는 노트를 폈다.
첫 번째 노트. 두 번째 노트. 세 번째 노트.
아홉 곡이 거기 있었다. 완성된 것들. 반쯤 완성된 것들도 있었지만 — 강리우에게 말한 것은 완성된 아홉 곡이었다. 세아는 그것들을 봤다.
이것들을 들려줄 수 있을까.
세아는 그 생각을 했다. 처음으로 진지하게. 이것들이 세상에 나갈 수 있을까. 자신의 이름으로. 나세아라는 이름이 달린 채로.
형광등이 깜빡였다. 세 번.
세아는 노트를 닫았다.
핸드폰을 꺼냈다. 메모장을 열었다. 오늘 박인철의 계약서를 읽으면서 적어뒀던 법률 용어들이 있었다. 세아는 그것들을 하나씩 검색했다.
저작인격권 불행사 특약.
검색 결과가 나왔다. 세아는 읽었다. 읽으면서 이해했다. 이해하면서 — 뭔가가 가슴 안에서 낮게 타기 시작했다. 불꽃이 아니었다. 불꽃보다 낮고 조용한 것. 숯이 달아오르는 것처럼.
저작인격권 불행사 특약은 — 쉽게 말하면, 자신의 이름이 달려 있어도 그 이름의 권리를 주장하지 않겠다는 서약이었다. 이름은 있되 목소리는 없는 것. 세아는 그것을 인어공주라고 부르지 않았다 — 그것은 세아가 배운 동화가 아니었다. 세아가 알고 있는 언어로는 그것이 — 그냥 다시 이십오만 원이었다.
이름을 파는 것이었다.
다른 형태로.
세아는 핸드폰을 내려놨다.
창문 너머로 사람들의 발이 지나갔다. 운동화. 하이힐. 롱부츠 한 켤레. 세아는 그것들을 봤다. 사람들은 다들 어딘가에서 오고 어딘가로 갔다. 그 어딘가들이 무엇인지 세아는 알 수 없었다. 자신도 마찬가지였다 — 어딘가에서 와서 어딘가로 가고 있었지만 그 어딘가가 어디인지 몰랐다.
노트를 다시 폈다.
아홉 번째 곡이 있는 페이지로 넘어갔다.
이것은 가장 최근에 쓴 것이었다. 제목이 없었다. 오늘 오후 한강에서 머릿속에서 시작된 멜로디 — 미, 파, 파플랫. 그것이 여기에 없었다. 세아는 연필을 찾았다. 서랍에서 짧은 연필 하나를 꺼냈다. 노트 여백에 음표를 그렸다.
미. 파. 파플랫.
그 세 음이 기다리는 속도였다. 숨을 참는 속도. 어머니가 물에서 올라오는 것을 기다리는 것. 도현이 학원비 이야기를 꺼내지 않기로 결정하는 것을 세아가 기다리는 것. 강리우가 피아노 앞에서 사 분 동안 앉아 있는 것.
기다림의 멜로디.
세아는 그것을 조금 더 썼다.
파플랫 다음에 레가 왔다. 레는 길게. 그다음 도. 도에서 한 박자 쉬고. 다시 미.
선율이 원을 그렸다. 끝이 처음으로 돌아오는 것처럼. 해결되지 않는 것처럼. 기다림은 원래 그렇게 생겼다 — 끝나지 않는 원.
세아는 연필을 내려놨다.
핸드폰을 봤다. 시간이 밤 열 시였다. 내일 편의점 알바는 오전 여섯 시였다. 잠을 자야 했다.
그런데 잠이 오지 않을 것을 알았다.
세아는 파일 두 개를 가방에서 꺼내 서랍 안에 넣었다. 보이지 않는 곳에 넣었다. 일주일 안에 결정해야 했다. 오늘이 첫 날이었다. 아직 엿새가 남아 있었다.
엿새.
세아는 형광등을 껐다. 어두워졌다. 창문 너머로 가로등 빛이 들어왔다. 사람들의 발이 여전히 지나갔다. 세아는 침대에 누웠다.
눈을 감았다.
미. 파. 파플랫.
그 멜로디가 계속 울렸다.
다음 날 오전 열한 시.
편의점 알바가 끝나고 세아가 핸드폰을 켰을 때 문자가 와 있었다.
박인철이 아니었다.
강리우였다.
어젯밤에 생각했는데요. 나세아 씨 곡을 들을 수 있는 방법이 하나 있어요. 전속 계약이랑 관계없이. 관심 있으면 연락해요.
세아는 그것을 읽었다. 세 번 읽었다. 편의점 앞 주차장에 서서, 앞치마를 아직 들고 있는 채로.
전속 계약이랑 관계없이.
세아는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그리고 다시 꺼냈다.
답장을 쓰려고 했다. 뭐라고 써야 할지 몰랐다. 무슨 방법이에요. 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