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아닌 것을 위해 불탄 소녀 – 제14화: 이십오만 원짜리 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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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4화: 이십오만 원

세아는 계약서를 찍어둔 사진이 없었다.

두 장짜리 A4. 볼펜으로 사인한 것. 기획사 담당자의 이름이 아래에 있었고, 세아의 이름이 그 옆에 있었다. 그것을 스캔해두거나 사진을 찍어두는 것이 상식이라는 것을 세아는 몰랐다 — 정확히는, 그것이 필요한 상황이 올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스물두 살이었고, 이십오만 원이 그 달의 교복 구입비였고, 세아는 그 계약서를 서명하는 순간부터 잊고 싶었다.

잊고 싶었기 때문에 사진을 찍지 않았다.

지금 박인철의 앞에서 그것이 문제가 됐다.

“계약서 원본은요?” 박인철이 물었다.

“없어요.”

“없다는 게 분실이에요, 아니면 처음부터 못 받은 거예요.”

세아는 잠깐 생각했다. 기획사 담당자가 서명된 계약서를 이메일로 보내준다고 했다. 그 이메일이 왔는지 안 왔는지 — 세아는 기억하지 못했다. 확인을 안 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확인하는 것이 두려웠을 가능성이 더 높았다.

“이메일로 받기로 했는데 확인을 못 했어요.”

박인철이 커피 잔을 내려놨다. 소리가 없었다. 카페 안에 재즈가 여전히 흘렀다. 창문 너머로 홍대 골목에 조명이 켜지기 시작했다. 오후 네 시 반이 넘어가면서 하늘이 빠르게 어두워지고 있었다.

“나머지 두 곡은요.”

“두 번째 곡은 작년 초에요. 그쪽은 계약서 사본을 받았어요. 있어요.”

“가지고 있어요?”

“고시원에요.”

“세 번째 곡은.”

세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박인철이 세아를 봤다.

“세 번째 곡은요, 나세아 씨.”

“…그건 계약서가 없어요.”

카페 음악이 한 소절 지나갔다.

“계약서 없이 곡을 줬어요?”

“구두로 했어요.” 세아가 말했다. 자신의 목소리가 작다는 것을 알면서 말했다. “담당자가 급하다고 했고, 나중에 서류 정리하자고 했어요.”

“그 나중이 안 왔군요.”

“안 왔어요.”

박인철이 잠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세아는 그 침묵이 판단인지 계산인지 알 수 없었다. 어느 쪽이든 세아에게 불리한 방향이었다.

“나세아 씨.” 박인철이 말했다. “지금 상황이 어떤지 알아요?”

세아는 알았다. 말하지 않아도.

박인철이 말했다.

“공식적으로 그 세 곡은 나세아 씨 곡이 아니에요. 첫 번째 곡은 계약서 원본도 없고, 저작권 등록 명의도 그쪽 기획사로 돼 있을 거예요. 세 번째 곡은 계약서 자체가 없어요. 두 번째 곡만 계약서 사본이 있는데, 그 계약서에 저작권 귀속 조항이 어떻게 돼 있느냐에 따라 달라져요.”

세아는 두 번째 곡의 계약서를 기억했다.

기억하려고 했다. 저작권 귀속 조항. A4 한 장 반쯤 됐을 때 나오는 조항. 글씨가 작았다. 세아는 읽었다 — 읽었지만 이해하지 못한 채로 넘어갔다. 법률 용어로 가득했고, 세아는 그것이 표준 계약서라고 생각했다. 표준이면 괜찮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계약서 가져오면 돼요?”

“가져오면 확인해줄게요. 근데 나세아 씨.”

박인철이 커피 잔을 손가락으로 천천히 돌렸다.

“강리우 씨가 관심을 가진 건 좋은 기회예요. 실제로 좋은 기회예요. 근데 지금 상황에서 나세아 씨가 ‘이 곡들은 내가 쓴 겁니다’라고 나서면, 반대로 그쪽 기획사들이 가만히 있지 않을 수 있어요. 본인들 이름으로 등록된 곡에 누군가 이의를 제기하면 — 어떻게 되는지 알죠?”

세아는 알았다.

“법적 분쟁이요.”

“시간도 돈도 에너지도 엄청나게 들어요. 그쪽은 법무팀이 있고, 나세아 씨는…” 박인철이 말을 끊었다.

세아는 끊어진 자리를 채우지 않았다. 채울 것이 없었다. 세아에게는 법무팀이 없었다. 돈도 없었다. 시간은 편의점 알바와 세션 일과 도현의 학원비 사이에 끼워 넣어야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요.” 세아가 물었다. “추가로 드릴 말씀이 그거예요?”

박인철이 세아를 봤다.

“아니에요.”

그가 가방을 열었다.


서류는 두 종류였다.

박인철이 테이블 위에 꺼내 놓은 것은 얇은 파일 두 개였다. 세아는 그것을 봤다. 파일 표지에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았다. 안을 봐야 알 수 있는 것들이었다.

“하나는 JYA의 전속 계약서예요. 어제 대표님이 말씀하신 거.” 박인철이 왼쪽 파일을 가리켰다. “기본 조건이에요. 아직 협의 전이라 수정 가능해요.”

세아는 왼쪽 파일을 보지 않았다.

“다른 하나는요.”

박인철이 오른쪽 파일을 가리켰다. 잠깐 멈췄다.

“JYA에서 준비한 또 다른 제안이에요. 전속이 아니라, 작곡 라이선스 계약이에요.”

“라이선스요.”

“나세아 씨가 쓴 곡들을, JYA가 사용권을 가져가는 계약이에요. 전속은 아니에요 — 다른 활동은 자유롭게 할 수 있어요. 근데 나세아 씨가 앞으로 쓰는 곡들에 대해 JYA에 우선 사용권이 생기는 구조예요.”

세아는 오른쪽 파일을 봤다.

“그게 어떻게 다른 거예요. 전속이랑.”

“전속은 나세아 씨라는 사람을 묶는 거고, 라이선스는 곡만 묶는 거예요. 이론적으로는요.” 박인철이 덧붙였다. “이론적으로는.”

세아는 그 ‘이론적으로는’을 들었다.

“그리고.” 박인철이 말했다. “이 두 번째 계약에는 조건이 하나 더 있어요.”

세아는 기다렸다.

“나세아 씨가 그동안 쓴 곡들 — 지금 다른 기획사들 이름으로 등록된 것들 — 그 분쟁 처리를 JYA가 대신해줘요. 법무팀이 나서서.”

카페 음악이 바뀌었다. 재즈에서 인디 팝으로. 세아는 그것을 들으면서 박인철의 말의 무게를 쟀다.

JYA가 법무팀을 써서 분쟁을 처리해준다.

그것은 세아가 가진 가장 큰 문제를 해결해준다는 뜻이었다. 계약서 없는 곡, 저작권 귀속된 곡들. 그것들을 되찾아주겠다는 것.

그 대신 앞으로 쓸 곡들을 JYA에 먼저 준다.

“…크레딧은요.”

“크레딧?”

“내 이름이 나와요? 곡 쓴 사람으로.”

박인철이 잠깐 멈췄다. 그 멈춤이 세아에게 무언가를 알려줬다.

“그 부분은 협의 사항이에요.”

세아는 ‘협의 사항’이 무슨 뜻인지 알았다. 협의 사항은 협의가 안 될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 협의 사항은 지금 이 자리에서 확답을 줄 수 없다는 뜻이었다. 협의 사항은 — 아마도, 그 이름이 나오지 않을 가능성이 있다는 완곡한 표현이었다.

“박인철 씨.” 세아가 말했다.

“응, 말해요.”

“저 지금까지 크레딧 없이 세 곡을 줬어요. 이름이 없어요. 그 곡들 발매됐고, 그 곡들로 아티스트들이 차트에 올라갔어요. 저는 없어요.” 세아가 말했다. 목소리가 흔들리지 않았다. 흔들리지 않으려고 한 것이 아니라 — 이미 너무 많이 생각한 것들이어서 흔들릴 에너지가 없었다. “근데 지금 제안은 그 분쟁을 처리해주는 대신 앞으로 쓸 곡도 내 이름이 안 나올 수 있다는 거잖아요.”

박인철이 대답하지 않았다.

“그게 무슨 해결이에요.”

카페 안이 잠깐 조용해진 것 같았다. 음악은 흘렀지만 세아의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박인철이 커피 잔을 내려다봤다.

“나세아 씨.” 그가 말했다. “음악 산업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잖아요.”

“알아요.”

“이름이 없어도 곡비는 나와요. 고정 수입이 생겨요. 지금보다 훨씬 안정적으로.”

“알아요.”

“그게 나쁜 조건이 아니에요. 많은 작곡가들이 그 방식으로 일해요.”

“알아요.” 세아가 말했다. “그 사람들이 그 방식으로 일하는 게 나쁘다는 게 아니에요. 그 사람들이 선택한 거면 괜찮아요.” 세아가 박인철을 봤다. “근데 저는 그 방식을 선택한 적이 없어요. 선택지가 있었는지도 몰랐어요. 지금도 선택지가 있는 건지 모르겠어요.”

박인철이 세아를 봤다.

잠깐이었다. 길지 않은 시간 동안 박인철의 표정에서 무언가가 움직였다 — 계산이 아닌 다른 것. 세아는 그것이 뭔지 파악하기 전에 그것이 사라지는 것을 봤다.

“계약서 가져가요.” 박인철이 말했다. “읽어보고 생각해요. 강리우 씨가 직접 만나고 싶다고 했는데, 그것도 고려해봐요.”

“강리우 씨가요?”

“나세아 씨 곡을 쓴 사람을 만나고 싶다고 했어요.” 박인철이 파일을 세아 쪽으로 밀었다. “어제 오 대표님이 만남을 주선하기로 했어요.”


세아는 파일을 가방에 넣었다.

카페를 나오면서 계단을 내려가는데 핸드폰이 울렸다. 하늘이었다.

— 야 오늘 클럽 세션 있어? 잊은 거 아니지

세아는 걸으면서 답장을 보냈다.

— 있어

— 오케 나 오늘 손님 없어서 일찍 끊음 나도 갈게. 밥은

— 됐어

— 야 나세아 편의점 삼각김밥으로 버티지 마 진짜. 오늘 클럽 가기 전에 국밥 먹자

세아는 화면을 봤다.

— 돈 있어?

— 야 내가 쏜다고 인마

세아는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홍대 골목로 걸어 나왔다. 저녁 다섯 시가 되면서 홍대는 다른 시간대로 전환되는 중이었다. 카페들의 조명이 더 따뜻해졌고, 클럽 앞에 스태프들이 나오기 시작했고, 대학생들이 삼삼오오 모여 어디로 갈지 상의하는 소리가 들렸다.

세아는 그 소리들 사이를 걸었다.

가방 안에 파일이 있었다. 두 개. 전속 계약서와 라이선스 계약서. 세아는 그것들의 무게가 실제로 느껴지는 것 같았다 — 종이의 물리적 무게가 아니라 그것이 담고 있는 것의 무게.

이름.

크레딧.

자신의 이름이 나올 것인가 아닌가.

이십오만 원을 받고 첫 곡을 넘겼을 때, 세아는 이름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사인했다. 그달 도현의 교복값이 필요했다. 두 번째 곡도 마찬가지였다. 세 번째 곡은 계약서조차 없이 넘겼다 — 담당자가 급하다고 했고, 세아는 거절하지 못했다. 거절하면 다음 기회가 없을 것 같았다. 이미 두 번 이름 없이 줬으니 세 번째도 괜찮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것이 세아가 자신에게 한 거짓말이었다.

괜찮지 않았다. 한 번도.

세아는 골목을 꺾었다. 하늘이 약속한 국밥집이 어디인지 물어봐야 했다. 핸드폰을 꺼내려는데 —

“나세아 씨.”

세아는 멈췄다.

목소리가 어디서 나왔는지 파악하는 데 0.5초가 걸렸다. 카페 골목 입구. 세아가 나온 방향과 다른 쪽에서 누군가 서 있었다.

강리우였다.


그는 코트 주머니에 두 손을 넣고 있었다.

홍대 골목이 어울리지 않는 옷차림이었다 — 잘 재단된 검은 코트, 구겨지지 않은 흰 셔츠. 눈 밑에 다크서클이 있었다. 세아는 어제 회의실에서 멀리서 봤던 것과 같은 사람이 지금 두 걸음 거리에 있다는 것을 파악했다.

“어떻게 여기.” 세아가 말했다.

“박인철 씨한테 물었어요.” 강리우가 말했다. “카페 위치를.”

세아는 그 말을 들었다. 박인철이 알려줬다. 그것은 — 박인철이 강리우에게 세아가 이 카페에 온다는 것을 미리 알려줬다는 뜻이었다. 오늘 이 만남이 우연이 아니라는 뜻이었다.

“기다린 거예요?”

“조금요.” 강리우가 말했다. 미안하다는 어조가 없었다. 사실을 말하는 어조였다. “박인철 씨가 나세아 씨 만나는 시간에 저도 근처 있었어요. 끝나고 잠깐 얘기할 수 있을까 싶어서.”

“무슨 얘기요.”

강리우는 대답하기 전에 세아를 봤다. 세아는 그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피할 이유가 없었다 — 세아가 먼저 물었다.

“나세아 씨 곡 얘기요.”

“들으셨어요, 제 곡.”

“어제 회의실에서 박인철 씨가 설명해줬어요. 직접 듣지는 않았어요.”

“그럼 왜요.” 세아가 물었다. “직접 듣지도 않고 만나고 싶다고 했어요?”

강리우가 잠깐 멈췄다.

“박인철 씨가 설명하는 방식이 있어요.” 강리우가 말했다. “곡이 어떤 구조인지, 어떤 구성인지, 시장에서 어떤 포지션인지. 그 설명을 다 듣고 나서도 궁금한 게 남으면 — 그 곡은 들을 가치가 있는 곡이에요.”

세아는 그 말을 들었다.

“궁금한 게 뭔데요.”

강리우가 세아를 봤다. 이번에는 조금 더 길게.

“박인철 씨가 말했어요. 그 세 곡 다 같은 작곡가가 쓴 거라고. 근데 세 곡이 장르도 다르고, 톤도 다르고, 구성 방식도 달라요. 그러면 보통 여러 명이 쓴 것처럼 들려야 하는데 — 박인철 씨 설명 들으니까 그게 아닌 것 같았어요.”

“뭐가 같은데요.”

“그건 직접 들어야 알아요.”

골목에 바람이 불었다. 세아의 머리카락이 날렸다. 세아는 손을 올려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겼다. 항상 묶고 다니는데 오늘은 묶지 않았다 — 편의점 퇴근 후 한강에 갔다가 그냥 온 것이었다.

“지금 들으러 어디 가자는 거예요?”

“아니요.” 강리우가 말했다. “나세아 씨가 원할 때요.”

“원하면 연락하라고요?”

“아니면 안 해도 돼요. 강요는 아니에요.”

세아는 강리우를 봤다. 어제 회의실에서 잠깐 지나쳐서 봤을 때와 달리 지금은 얼굴을 제대로 볼 수 있었다. 잘생겼다기보다는 — 눈이 예상보다 깊었다. 피곤한 것처럼 보이면서도 보고 있는 것에 집중하고 있는 눈. 손을 코트 주머니에서 꺼내지 않았다.

“강리우 씨는 JYA A&R이에요.” 세아가 말했다.

“맞아요.”

“아버지 회사예요.”

강리우가 잠깐 멈췄다.

“맞아요.”

“그럼 저한테 관심 갖는 게 업무예요, 아니면 개인적인 거예요.”

강리우가 세아를 봤다. 세아는 그 시선이 당황한 것인지 생각하는 것인지 파악하려고 했다. 두 가지가 섞인 것 같았다.

“솔직히 말해도 돼요?”

“그래야 하는 거 아니에요?”

“업무로 시작한 건 맞아요.” 강리우가 말했다. “박인철 씨가 보고를 했고, 저는 A&R로서 확인해야 했어요. 근데 —” 그가 잠깐 멈췄다. “박인철 씨 설명 듣고 나서 그게 달라졌어요. 업무였으면 그냥 박인철 씨한테 처리 맡기면 됐는데.”

“달라진 게 뭔데요.”

강리우가 대답하지 않았다. 잠깐이었다. 대답이 없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말해야 할지 선택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 세 곡이 다 다른 감정에서 시작한 것 같다고 했어요, 박인철 씨가. 근데 전부 같은 사람이 썼어요.” 강리우가 말했다.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궁금했어요.”

세아는 그 말을 들었다.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세아는 곡을 쓸 때 자신을 넣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의뢰받은 아티스트의 감정을 번역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강리우가 지금 한 말은 — 세 곡이 다 다른 감정이면서 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봤다는 말이었다.

아무도 그런 말을 한 적이 없었다.

세아는 그 사실을 잠깐 어디다 둬야 할지 몰랐다.

“카카오톡 주세요.” 세아가 말했다.

강리우가 핸드폰을 꺼냈다. QR 코드를 띄웠다. 세아는 스캔했다. 강리우 이름이 뜨고, 프로필 사진이 없었다. 세아는 그것을 확인하고 핸드폰을 넣었다.

“연락할게요.” 세아가 말했다. “들을 준비가 됐을 때.”

“됐어요.”

세아는 걸어가려고 몸을 돌렸다.

“나세아 씨.”

세아가 멈췄다.

강리우가 말했다.

“계약서 읽을 때, 3페이지 7항 먼저 읽어요.”

세아는 돌아보지 않았다. 걸었다.


국밥집은 합정동 골목 안쪽에 있었다.

하늘이 먼저 와 있었다. 팔에 문신이 있어서 겨울에도 오버사이즈 후드를 입는 하늘이 국밥 두 그릇을 시켜놓고 핸드폰을 보고 있었다. 세아가 들어서자 고개를 들었다.

“야 왜 이렇게 늦어.”

“미안.”

“미안은. 빨리 앉아. 식는다.”

세아는 앉았다. 국밥 냄새가 났다. 뼈 우린 국물 냄새. 따뜻했다. 세아는 숟가락을 들었다.

하늘이 세아를 봤다.

“뭔 일 있어?”

“없어.”

“야 나세아. 나 너 20년 알아. 없어 할 때 있다는 거 알아.”

세아는 국물을 한 숟가락 마셨다. 뜨거웠다. 목을 타고 내려가면서 몸이 조금 풀리는 것 같았다. 세아는 오늘 하루 물 말고 커피 한 잔만 마셨다는 것을 그제야 인식했다.

“JYA에서 계약 제안 왔어.”

하늘이 숟가락을 내려놨다.

“JYA.”

“응.”

“강민준 대표 그 회사?”

“응.”

하늘이 세아를 봤다. 세아는 국밥을 먹었다. 고기가 부드러웠다. 편의점 도시락과 다른 것은 — 이것은 실제로 오래 끓인 것이라는 것이었다. 시간이 들어간 음식은 달랐다. 세아는 그것을 먹으면서 오늘 있었던 일들을 정리했다. 박인철의 파일. 강리우의 말. 계약서 3페이지 7항.

“어떤 제안인데.”

“전속이랑 라이선스 두 가지.” 세아가 말했다. “전속은 그냥 묶이는 거고. 라이선스는 내 곡들 법적 분쟁 처리해주는 대신 앞으로 쓸 곡에 우선 사용권 주는 거.”

“크레딧은.”

“협의 사항이래.”

하늘이 잠깐 눈을 감았다가 떴다.

“야.” 하늘이 말했다. “협의 사항이 뭔 뜻인지 알지.”

“알아.”

“그게 안 준다는 말이잖아.”

“그럴 수도 있어.”

“그럴 수도 있어?” 하늘이 세아를 봤다. “야 나세아. 너 지금 그 제안 고려하는 거야?”

세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국밥을 먹었다.

하늘이 팔짱을 꼈다.

“세아야.”

세아는 숟가락을 내려놨다.

“고려 안 하면 뭐가 달라져.” 세아가 말했다. “지금 이 순간 내 이름으로 등록된 곡이 없어. 내가 쓴 곡이 세 개 있는데 전부 다른 사람 이름이야. 법적으로 분쟁 걸면 돈이 들고 시간이 들고 질 가능성이 높아. JYA가 그걸 처리해주겠다고 하면 — 뭔가 주는 거잖아.”

“이름이랑 바꾸는 거잖아.” 하늘이 말했다.

“이름을 찾는 대신 다음 이름을 포기하는 거야.”

“그게 같은 말이야.”

“달라.” 세아가 말했다. “지금 내 이름이 없는 것보다는 일단 돈이 나오는 게 —”

“세아야.” 하늘이 세아의 말을 끊었다. 조용하게 끊었다. 소리를 높인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낮아진 것이었다. “너 도현이 학원 포기한 거 알잖아.”

세아가 멈췄다.

“그거 때문에 그러는 거지.”

국밥집 안에 다른 손님들의 소리가 들렸다. 옆 테이블에서 두 사람이 소주를 따르는 소리. 주방에서 국물이 끓는 소리. 세아는 그것들을 들으면서 대답하지 않았다.

하늘이 한숨을 쉬었다. 짧고 조용한 한숨이었다.

“야.” 하늘이 말했다. “나 타투 한 자리에 두 번 새기면 피부 망가진다는 거 알지. 왜 그런지 알아?”

세아는 하늘을 봤다.

“처음에 바늘이 들어갈 때 피부가 어느 정도 버텨. 근데 같은 자리에 계속 들어오면 — 그다음부터는 버티는 게 아니라 그냥 받아들이는 거야. 감각이 없어지는 거거든. 처음에는 아팠는데 나중에는 안 아파. 근데 그게 괜찮아진 게 아니거든. 피부가 망가진 거야.”

세아는 그 말을 들었다.

“너.” 하늘이 말했다. “처음에 이십오만 원 받고 곡 줬을 때 아팠잖아. 두 번째도 아팠잖아. 세 번째는?”

세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하늘이 세아를 봤다.

“세 번째는 그냥 줬잖아. 아프지도 않았잖아.”

세아는 숟가락을 집었다. 내려놨다.

“그래서 뭐.” 세아가 말했다.

“그러니까 조심해야 한다고.” 하늘이 말했다. “JYA 계약이 또 그거일 수 있어. 처음엔 좋아 보이는데, 사인하고 나면 — 네가 또 감각 없어지는 거야. 그리고 그다음번엔 더 쉽게 줘버리는 거야.”

세아는 그 말이 자신에게 닿는 것을 느꼈다. 정확하게.

하늘은 세아가 모르는 것을 말하지 않았다. 세아가 알면서 외면하는 것을 말했다. 그것이 더 아팠다 — 새로운 정보가 아니라서. 이미 알고 있었으니까.

“근데.” 세아가 말했다. “계약서에 뭔가 있을 수도 있어.”

“뭔가가 뭔데.”

“강리우가. 3페이지 7항 먼저 읽으라고 했어.”

하늘이 세아를 봤다.

“강리우가 직접?”

“응.”

하늘이 팔짱을 풀었다. 잠깐 무언가를 생각하는 얼굴이었다.

“그 인간이 왜 그런 말을 해.”

“몰라.”

“JYA 아들이잖아. 자기 아버지 회사 계약서에서 유리한 조항 알려주는 거야?”

“그 조항이 내한테 유리한지 아닌지는 읽어봐야 알아.”

“근데 왜 알려줘.”

세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국밥을 먹었다. 뼈 국물이 식어가고 있었다. 하늘이 세아를 보다가 자신도 숟가락을 들었다.

“야.” 하늘이 말했다. “그 인간 눈이 좋다고 했잖아 내가.”

세아는 하늘을 봤다.

“눈이 좋으면 조심해야 해.” 하늘이 진지하게 말했다. “눈이 좋은 사람이 관심 보이면 진짜인지 이용하려는 건지 구분이 안 되거든. 특히 너 같은 타입.”

“내 같은 타입이 뭔데.”

“관심받으면 뭔가 줘버리는 타입.”

세아는 그 말에 반박하지 않았다. 반박할 말이 없어서가 아니라 — 반박하는 것이 에너지 낭비인 것들이 있었다. 정확한 것들은 반박이 안 됐다.

“계약서 읽어볼게.” 세아가 말했다.

“혼자 읽지 마.” 하늘이 말했다. “법 아는 사람한테 가져가.”

“아는 사람이 없어.”

“내가 찾아줄게. 타투 손님 중에 변호사 있어. 계약서 봐줄 수 있을 것 같아.”

세아는 하늘을 봤다. 하늘이 국밥을 먹으면서 핸드폰을 꺼내 카카오톡을 열었다.

“야 고맙다는 말 해.”

“…고마워.”

“됐어. 많이 먹어. 국물 다 마셔. 너 오늘 또 밥 제대로 안 먹었지.”

세아는 국물을 마셨다. 뜨거웠다. 국밥집 안이 따뜻했다. 창문에 김이 서려 있었다. 세아는 그것을 봤다 — 안과 밖의 온도 차이가 만드는 것. 안이 따뜻하고 밖이 차가울 때 생기는 것.

가방 안에 파일 두 개가 있었다.

세아는 식사를 마쳤다.


클럽 세션은 밤 아홉 시였다.

세아는 하늘과 국밥집에서 나와 고시원에 잠깐 들렀다. 세션용 이어모니터를 챙기고, 파일 두 개를 침대 위에 올려뒀다. 방이 좁았다 — 침대 하나, 책상 하나, 옷걸이 하나. 그것들이 다 있으면 문을 열면 바로 침대였다. 세아는 파일을 침대 위에 두고 책상 위에서 두 번째 곡 계약서를 찾았다.

서류들이 쌓여 있었다. 세아는 그것들을 한 장씩 넘겼다. 편의점 알바 계약서, 클럽 세션 계약서, 병원 영수증, 도현의 학원비 납입 확인서. 세아는 그것들을 다 보면서 두 번째 곡 계약서를 찾았다.

있었다.

A4 두 장. 세아는 그것을 꺼내 펼쳤다. 글씨가 작았다. 세아는 책상 위 스탠드를 켰다. 불빛 아래에서 조항들을 읽었다.

저작권 귀속 조항.

본 계약에 따라 창작된 저작물의 저작권은 저작권법에 따라 창작자에게 귀속되나, 저작재산권의 전부를 계약 상대방에게 양도하는 것으로 한다.

세아는 그 조항을 세 번 읽었다.

저작인격권은 자신에게 있었다. 그것은 빼앗을 수 없는 것이었다 — 법적으로. 하지만 저작재산권을 전부 양도했다. 그것은 경제적 권리였다. 그 곡으로 발생하는 수익, 그 곡을 사용할 권리, 그 곡을 배포할 권리. 전부.

그리고 크레딧에 관한 조항은 — 없었다.

세아는 그것을 확인했다. 한 줄도. 이름을 표시해야 한다는 조항이 없었다. 그것은 이름을 표시하지 않아도 계약 위반이 아니라는 뜻이었다.

세아는 계약서를 내려놨다.

스탠드 불빛이 책상 위를 비췄다. 세아는 그 빛 안에서 잠깐 앉아 있었다.

가방 안에 있는 JYA 파일의 3페이지 7항이 무엇인지 봐야 했다.

세아는 가방을 열었다. 파일을 꺼냈다. 라이선스 계약서를. 페이지를 넘겼다. 3페이지. 7항.

저작물 크레딧 표기에 관하여: 을이 본 계약에 따라 제공하는 저작물에 대하여, 갑은 해당 저작물 발매 시 을의 성명을 창작자로 표기하여야 한다. 단, 갑의 기획 상 불가피한 경우 을의 사전 서면 동의를 얻어 표기를 생략할 수 있다.

세아는 그 항목을 읽었다.

그리고 다시 읽었다.

크레딧 표기 의무가 있었다.

단서 조항이 있었다 — 갑의 기획 상 불가피한 경우. 그것이 얼마나 자주 쓰일 수 있는 단서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의무 자체가 있다는 것은 — 박인철이 ‘협의 사항’이라고 말한 것과 달랐다.

박인철은 크레딧이 협의 사항이라고 했다.

그런데 계약서 3페이지 7항에는 크레딧 표기 의무가 적혀 있었다.

세아는 계약서를 책상 위에 펼쳐 놓고 그것을 봤다. 스탠드 불빛이 흔들리지 않았다. 고시원 복도에서 누군가 지나가는 발소리가 들렸다. 얇은 벽 너머에서 텔레비전 소리가 들렸다.

세아는 핸드폰을 들었다.

강리우의 카카오톡을 열었다.

3페이지 7항 봤어요.

보냈다.

그리고 고시원 방에서 세아는 계속 앉아 있었다. 답장이 오기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었다. 그냥 — 지금 자신이 읽은 것이 무엇인지, 그것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것이 함정인지 아닌지를 생각했다.

박인철이 협의 사항이라고 말한 것.

강리우가 7항을 먼저 읽으라고 말한 것.

둘 중 누가 자신에게 진실을 말한 것인지.

아니면 둘 다 진실을 말하면서 서로 다른 의도를 가진 것인지.

세아는 계약서를 두 손으로 잡았다. 종이가 바스락거렸다.

핸드폰이 울렸다.

강리우였다.

읽으면서 어떤 느낌이었어요.

세아는 그 메시지를 봤다.

질문이 이상했다. 어떤 느낌이었어요. 내용을 물은 것이 아니었다. 느낌을 물었다. 세아는 잠깐 생각했다.

박인철 씨가 협의 사항이라고 했어요.

답장을 보냈다.

몇 초 후 답장이 왔다.

그 사람은 협의 사항이라고 했을 거예요. 대표님 지시대로 움직이니까. 계약서에 7항이 있다는 걸 몰랐거나, 알면서 말하지 않은 거예요.

세아는 그 메시지를 읽었다.

본인 아버지 회사 계약서에서 저한테 유리한 조항 알려주는 이유가 뭐예요.

답장을 보냈다.

이번에는 조금 오래 걸렸다. 세아는 기다렸다. 클럽 세션까지 두 시간이 있었다. 세아는 계약서를 책상 위에 두고 침대 끝에 걸터앉았다.

답장이 왔다.

나세아 씨가 그 계약서에 사인하게 되면, 제가 나세아 씨 음악을 제대로 들을 수 있어야 하니까요. 이름 없는 곡은 들어도 들은 게 아니에요.

세아는 그 메시지를 읽었다.

고시원 방이 조용했다. 스탠드 불빛이 따뜻했다. 세아는 핸드폰을 무릎 위에 올려놨다.

이름 없는 곡은 들어도 들은 게 아니에요.

세아는 그 문장을 다시 읽지 않았다. 한 번으로 충분했다.

방 안이 작았다. 침대, 책상, 옷걸이. 그 사이에 세아가 있었다. 가방 안에 계약서가 있었다. 침대 위에 두 번째 곡 계약서가 펼쳐져 있었다.

세아는 머릿속에서 한강 난간을 잡았을 때의 차가움을 떠올렸다. 그리고 국밥 국물이 목을 타고 내려갔을 때의 온기를. 그리고 지금 고시원 방 스탠드 불빛의 좁은 따뜻함을.

하나씩이었다.

클럽 세션이 두 시간 후였다.

세아는 일어나서 이어모니터를 가방에 챙겼다.

그리고 계약서를 가방에 넣었다. JYA 파일 두 개와 두 번째 곡 계약서. 하늘이 말한 변호사에게 내일 가져갈 것이었다. 오늘 밤은 노래를 할 것이었다. 노래를 하면서 — 오늘 읽은 것들이 어떻게 자리를 잡는지 볼 것이었다.

세아는 고시원 방 불을 껐다.

복도로 나오면서 핸드폰을 봤다. 강리우에게 아직 마지막 답장을 하지 않았다.

세아는 걸으면서 답장을 보냈다.

알겠어요. 조만간 연락할게요.

전송하고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계단을 내려가면서 고시원 현관문을 밀었다. 차가운 공기가 얼굴을 때렸다. 세아는 잠깐 멈췄다 — 한 발이 안에 있고 한 발이 밖에 있는 채로. 안과 밖의 온도 차이가 피부에서 느껴졌다.

그 경계를 넘어서 걸어 나갔다.

홍대 방향으로 걷기 시작했다. 밤이었다. 가로등이 켜져 있었다. 세아의 그림자가 발 앞에 길게 놓였다가, 가로등을 지나면서 뒤로 넘어갔다. 앞으로 놓이고, 뒤로 넘어지고, 또 앞으로.

세아는 걸었다.

가방 안에 계약서가 있었고, 핸드폰에 강리우의 메시지가 있었고, 내일 하늘이 찾아줄 변호사가 있었다.

그리고 두 시간 후에 클럽이 있었다.

세아는 걸으면서 이어모니터를 꺼내 귀에 꽂았다. 아무것도 틀지 않았다. 그냥 걸었다. 발소리가 들렸다. 바람 소리가 들렸다. 멀리서 클럽 음악이 새어 나오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세아의 머릿속에서 — 한강에서 시작했다가 끊겼던 멜로디가 다시 시작됐다.

미, 파, 파플랫.

이번에는 끊기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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