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4화: 강남 사람
박인철에게 전화를 건 건 공연이 끝나고 두 시간 후였다.
열한 시 사십 분. 언더스코어에서 나와 한강 방향으로 걷다가 합정역 근처 편의점 앞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서. 세아는 핸드폰 화면에 저장된 이름을 오 분쯤 바라보다가 통화 버튼을 눌렀다.
두 번 울리고 받지 않았다. 세 번째 신호음이 끝나기 전에 끊겼다. 부재중.
세아는 핸드폰을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플라스틱 의자가 차가웠다. 목요일 밤의 합정역 앞은 아직 사람이 많았다 — 퇴근하는 사람들, 술자리가 끝난 사람들, 어디론가 향하는 사람들. 발목들이 지나갔다. 부츠, 운동화, 힐, 슬리퍼. 제주에서 고시원으로 처음 이사 왔을 때 창문을 통해 보던 그 발목들과 지금 이 발목들이 다르지 않다는 것을 세아는 알고 있었다. 서울의 발목은 항상 급했다.
카카오톡을 열었다. 박인철과의 대화창. 마지막 메시지는 이 달 초 세아가 보낸 것이었다. “혹시 진행 어떻게 됐는지 알 수 있을까요.” 읽음 표시가 뜨고 답장이 없었다.
세아는 새 메시지를 입력했다.
〈창가에서〉 들었어요. 멜론 차트에서요.
전송. 읽음 표시가 바로 떴다.
그리고 아무것도 오지 않았다.
세아는 핸드폰을 가방에 넣었다. 의자에서 일어섰다. 걸었다.
걸으면서 계산했다. 박소진, 〈창가에서〉, 이번 주 스트리밍 차트 4위. 일주일이 지나면 차트에서 내려갈 수도 있고 올라갈 수도 있다. 스트리밍 수익은 아티스트와 기획사가 나눈다. 작곡 수익은 별도다. 작곡 크레딧이 없으면 — 없으면 그 수익은 없다.
세아가 받아야 할 금액을 정확하게 계산할 수 없었다. 스트리밍 단가, 저작권 분배율, 계약 조건. 모르는 게 너무 많았다. 그러나 하나는 알았다.
크레딧에 자신의 이름이 없으면, 아무것도 없다.
그것만 알았다.
다음 날은 금요일이었다.
세아는 오후 두 시에 편의점 낮 알바를 시작했다. 야간 담당 알바생이 급하게 빠졌고, 점장 김 씨가 세아에게 전화를 했다. “나세아 씨, 오늘 낮 두 시에 나올 수 있어요? 시급 백 원 더 드릴게요.” 세아는 알겠다고 했다. 시급 백 원이 아니라 시급이 그대로였어도 알겠다고 했을 것이다. 점장 김 씨는 그것을 알고 있었다. 세아도 알고 있었다.
낮 편의점은 밤과 달랐다. 손님이 많았다. 물건을 계산하고, 택배를 받고, 복권을 사는 사람들. 세아는 기계처럼 움직였다. 스캔, 계산, 봉투, 감사합니다. 스캔, 계산, 봉투, 감사합니다. 이 리듬이 싫지 않은 날도 있었다. 생각을 안 해도 되는 리듬이었으니까. 오늘은 싫은 날이었다.
오후 네 시쯤, 손님이 뜸해진 틈에 세아는 핸드폰을 확인했다.
박인철에게서 메시지가 와 있었다.
나세아 씨, 저도 이렇게 될 줄은 몰랐어요. 기획사에서 편곡하는 과정에서 크레딧 정리가 그렇게 됐는데, 제가 뭐라고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어요. 나중에 만나서 얘기해요.
세아는 메시지를 세 번 읽었다.
나중에 만나서 얘기해요.
이 문장이 뭘 의미하는지 세아는 알고 있었다. 만나지 않겠다는 말이었다. 또는, 만나더라도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을 것이라는 말이었다. 기획사에서 그렇게 됐다는 말은 자신은 잘못이 없다는 말이었다. 제가 뭐라고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어요는 — 그러니까 나한테 따지지 말라는 말이었다.
세아는 답장을 치지 않았다.
가방에 핸드폰을 넣고 카운터 앞에 섰다. 다음 손님이 들어왔다. 스캔, 계산, 봉투, 감사합니다.
목이 조금 아팠다. 어젯밤 반음 올라간 세트 때문이었다. 마지막 곡에서 세아는 고음 부분에서 소리를 약간 눌렀다 — 목이 버텨주는지 확인하면서 조심스럽게.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 정호도, 하늘도, 관객도. 세아는 소리를 누르는 법을 잘 알았다. 티 안 나게 누르는 법을.
이 멜로디, 2절에서 반음 올리면 더 아플 것 같은데요.
어젯밤 공연 중에 세아가 혼자 생각한 것이었다. 정호의 세트 리스트에 있는 곡을 들으면서. 말하지 않았다. 말할 필요가 없었다. 정호의 곡이었고, 정호가 정한 키였고, 세아는 그 안에서 노래하는 사람이었다.
자신의 이름으로 된 것이 하나도 없었다.
박인철에게 다시 연락이 온 건 그날 저녁 일곱 시였다.
세아가 알바를 끝내고 고시원으로 돌아가는 길, 합정역 2번 출구 계단을 올라오는데 전화가 왔다. 모르는 번호였다.
“여보세요.”
“나세아 씨 맞죠?”
남자 목소리였다. 또렷하고 낮고 서두르지 않는 목소리. 세아는 계단을 멈추고 벽에 등을 기댔다.
“누구세요?”
“아, 소개가 먼저였어야 했는데. 저 JYA 엔터테인먼트 A&R 팀에 있는 강리우라고 합니다. 나세아 씨 연락처는 박인철 프로듀서한테 받았어요.”
세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지금 통화 괜찮으세요?”
“…괜찮아요.”
“〈창가에서〉 아시죠. 박소진 곡.”
“알아요.”
“그 곡 작곡하신 거 맞죠?”
세아는 잠깐 침묵했다. 계단 아래에서 지하철 출구로 올라오는 사람들의 발소리가 들렸다. 합정역 특유의 냄새 — 지하의 습기와 철 냄새가 섞인 것.
“크레딧에 제 이름은 없어요.”
“알고 있어요. 그래서 전화드린 거예요.”
세아는 그 말을 다시 들었다. 알고 있어요. 그래서 전화드린 거예요. 이 두 문장이 어떤 방향으로 뻗을 수 있는지 세아는 빠르게 계산했다. JYA 엔터테인먼트. 강민준 대표의 회사. 박소진의 소속사.
“만나서 얘기할 수 있을까요? 제가 홍대 쪽으로 가도 되고, 편하신 데 맞춰드릴게요.”
“무슨 얘기요.”
“〈창가에서〉 크레딧 문제하고, 그것 말고도 — 나세아 씨 작업물에 대해서 좀 더 얘기하고 싶어요.”
세아는 다시 침묵했다. 이런 전화를 받아본 적이 없었다. 정확히는 — 이런 방식으로 자신의 작업물에 대해 먼저 말을 꺼내는 사람을 만난 적이 없었다. 보통은 세아가 먼저 가져갔다. 가져가서 설명하고, 들려주고, 괜찮다는 말을 기다렸다.
“내일 시간 되세요?” 그가 물었다.
세아는 내일 일정을 머릿속으로 훑었다. 오전에 편의점 알바, 오후에 없음, 저녁에 언더스코어 공연.
“오후에요.”
“몇 시가 편하세요?”
“세 시.”
“그럼 세 시에 홍대 근처로 맞춰드릴게요. 카페나 — 편하신 데로요.”
“아무 데나요.”
“아무 데나는 제가 결정하기 어렵네요.” 잠깐의 멈춤. “홍대 입구역 근처에 ‘오후 세 시’ 라는 카페 있어요. 이름이 약속 시간이랑 같네요.”
세아는 그 말에 반응하지 않았다. “알겠어요.”
“내일 세 시에 뵐게요.”
전화가 끊겼다.
세아는 핸드폰을 내리고 계단 벽에 등을 기댄 채로 잠깐 서 있었다. 지하철 출구 바람이 올라왔다. 3월의 서울 바람은 아직 차가웠다. 세아는 재킷 지퍼를 올렸다.
JYA 엔터테인먼트. 〈창가에서〉를 발매한 기획사. 박소진의 소속사. 크레딧에 세아의 이름이 없게 된 경위와 직결된 곳.
그리고 거기서 일하는 누군가가 세아에게 전화를 했다.
알고 있어요. 그래서 전화드린 거예요.
세아는 그 목소리를 다시 한번 들었다. 머릿속에서. 서두르지 않는, 낮고 또렷한. 강남 사람 특유의 여유. 세아는 그런 목소리를 가진 사람들을 잘 알지 못했지만 — 텔레비전에서 봤다. 인터뷰에서. 좋은 옷을 입고 카메라 앞에서 천천히 말하는 사람들.
가야 하는지 고민하지 않았다. 가야 했다.
가야 하는 이유는 단순했다. 〈창가에서〉는 세아가 쓴 곡이었다. 그리고 그 곡의 크레딧에 세아의 이름이 없었다. 그것이 전부였다.
두려운 게 없다는 건 아니었다. 그러나 두려움보다 — 지금은 다른 것이 더 컸다.
세아는 계단을 올라갔다.
하늘에게 카카오톡을 보낸 건 고시원에 돌아와서였다.
야. 내일 오후에 시간 돼?
답장이 삼 분 만에 왔다.
왜? 무슨 일임?
JYA에서 연락 왔어.
이 번에는 삼십 초 만에 답장이 왔다.
미친 JYA??? 강민준 그 XXX 회사? 왜?
창가에서 때문에.
ㅅㅂ 진짜로? 어떻게 알았대?
내일 만나서 얘기하자고 했어.
야 나세아 너 혼자 가지 마. 나도 같이 갈게.
세아는 잠깐 생각했다.
괜찮아. 나 혼자 가도 돼.
야!! 그 회사가 얼마나 큰 데인지 알아? 변호사도 있고 계약서 함정도 있고 걔네 방식이 있다고. 어린 애들 데려다가 계약서 사인시키고 나중에 고소하는 거 뉴스에 났잖아.
나 어리지 않아.
아 그게 문제가 아니잖아 씨. 야, 나 오후에 예약 없어. 같이 갈게.
세아는 핸드폰을 내려놓고 천장을 봤다. 창문 없는 방의 천장은 항상 똑같았다. 흰색, 약간 누렇게 바랜, 형광등 하나. 하늘이 맞는 말을 하고 있다는 건 세아도 알았다.
내일 오후 세 시에 홍대 입구역 쪽 오후 세 시 카페.
ㅋㅋㅋ카페 이름이 오후 세 시임? 레전드네. 알겠어 갈게.
혼자 가는 거야.
???
넌 근처 다른 카페에 있어. 내가 연락하면 와.
짧은 침묵.
…야 나세아 이거 왜 혼자 하려는 거야 진짜로
내가 가야 해.
왜.
세아는 답장을 보내지 않았다. 하늘이 두 번 더 카톡을 보냈는데 세아는 핸드폰을 엎어놓고 노트북을 켰다.
화면에 멜론 차트가 떴다. 〈창가에서〉는 이제 2위였다.
이틀 사이에 두 계단이 올라갔다.
세아는 그 숫자를 보면서 아무것도 느끼지 않으려고 했다. 그러나 뭔가가 느껴졌다. 손가락 끝이 저리는 것. 이 멜로디가 자신의 것이라는 사실이 차트 숫자와 함께 다시 피부로 왔다. 세아가 새벽 세 시에 고시원 방에서 혼자 만든 것이 지금 몇십만 명의 귀에 들어가고 있었다.
크레딧에 이름이 없어도, 그 곡은 세아의 것이었다.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이 이제 한 명 더 생겼다.
강리우.
토요일 오후 두 시 오십 분.
세아는 홍대 입구역 근처 골목에 서 있었다. ‘오후 세 시’라는 카페는 간판이 작고 낮았다 — 아는 사람만 아는 것처럼. 통유리 안으로 내부가 보였다. 나무 테이블, 간접 조명, 손님이 몇 명 없었다. 평일 오후의 홍대 소규모 카페 특유의 조용함.
하늘에게서 카톡이 왔다.
야 나 지금 맞은편 이디야에 있어. 뭔 일 생기면 바로 연락해.
세아는 짧게 답했다.
응.
카페 문을 열었다. 벨 소리가 낮게 울렸다. 카운터에서 직원이 고개를 들었다. 세아는 안쪽을 훑었다.
창가 자리. 남자가 앉아 있었다.
스물일곱쯤 됐을까. 키가 컸다 — 앉아 있어도 알 수 있었다. 짙은 회색 코트, 안에 흰 셔츠. 비싼 옷이었지만 코트가 약간 구겨져 있었다. 손이 테이블 위에 올라와 있었는데, 커피잔을 감싸고 있는 그 손이 — 세아는 이유 없이 그 손을 먼저 봤다. 길고 마디가 굵었다. 악기를 다루는 사람의 손이었다.
그가 고개를 들었다. 눈 밑에 다크서클이 있었다. 눈이 세아와 마주쳤다.
세아는 테이블 쪽으로 걸어갔다.
“나세아 씨.”
“네.”
“앉으세요.”
세아는 맞은편에 앉았다. 가방을 무릎 위에 올렸다.
강리우는 세아를 한 번 봤다. 빠르게, 그러나 정확하게 보는 눈이었다. 세아는 그 시선이 무엇을 보고 있는지 알 것 같았다. 이런 눈을 가진 사람들을 세아는 알았다 — 무언가를 평가하는 눈. 음악을 들으면서 곡의 구조를 분석하는 것처럼 사람을 보는 눈.
세아도 그를 봤다. 같은 방식으로.
“뭐 드실래요?”
“아메리카노요.”
그가 직원을 불러 주문을 했다. 세아는 그 틈에 테이블 위를 봤다. 그의 앞에 놓인 것은 커피잔 하나와 얇은 서류 봉투였다.
서류 봉투.
세아의 시선이 잠깐 거기 머물렀다.
“연락드린 이유부터 말씀드릴게요.”
강리우의 목소리가 어제 전화에서 들은 것과 같았다. 낮고, 서두르지 않고, 또렷했다. 그러나 직접 앞에서 들으니 조금 달랐다. 약간 — 신중한 것. 말을 뱉기 전에 한 번 더 생각하는 사람의 속도였다.
“〈창가에서〉 작업 과정에서 크레딧 정리가 잘못됐다는 걸 저도 최근에 알았어요. 박인철 프로듀서가 나세아 씨 데모를 가져왔을 때 A&R 팀이 그걸 처리하는 과정에서 — 솔직히 말하면, 저희 팀 실수가 있었어요.”
세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크레딧 정정은 가능해요. 기술적으로는요. 멜론이나 스트리밍 플랫폼에 정정 신청을 하면 되고, 저작권 협회에도 등록 수정이 가능하고. 그 부분은 제가 진행할 수 있어요.”
“그럼 왜 아직 안 됐어요?”
세아가 말했다.
강리우가 잠깐 멈췄다. 커피잔을 내려놓는 속도가 조금 느려졌다.
“확인이 필요한 절차들이 있어서요.”
“확인이 필요한 절차.”
세아는 그 말을 그대로 돌려줬다. 따지는 게 아니었다. 그냥 그 말이 어떤 의미인지 소리로 들어보고 싶었다.
강리우는 세아를 다시 봤다.
“나세아 씨, 저희가 크레딧 정정하는 것 외에 — 다른 제안도 있어요.”
“어떤 제안이요.”
“나세아 씨가 쓴 곡들, 더 있죠?”
세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박인철한테 들었어요. 〈창가에서〉 말고도 최소 두 곡을 더 써서 줬다고. 그 곡들 지금 어디 있어요?”
“박인철한테 물어보세요.”
“이미 물어봤어요. 없다고 하더라고요.”
세아의 손이 무릎 위 가방을 잡았다. 조용하게. 손가락에 힘이 들어간 것을 세아는 느꼈다.
없다고.
박인철이 없다고 했다.
세아는 그 두 곡을 기억했다. 하나는 제목도 붙였다. 〈파도가 오기 전에〉. 어머니가 물질 나가기 전에 부르던 노래의 리듬에서 가져온 것이었다. 그것도 없다고 했다.
“나세아 씨.”
강리우의 목소리가 조금 달라졌다. 낮아진 것이 아니라 — 무게가 생긴 것처럼.
“솔직하게 말씀드릴게요. 저희 회사가 이 과정에서 잘한 것 없어요. 박인철이 데모를 가져왔을 때 출처 확인을 제대로 안 했고, 크레딧 정리도 엉망이었어요. 그건 사실이에요.”
세아는 그의 말을 들으면서 한 가지를 관찰했다. 이 사람은 변명을 먼저 하지 않는다. 상황 설명을 먼저 한다. 그게 다른지 같은지 세아는 아직 판단하지 않았다.
“그래서 제안이 뭐예요.”
“나세아 씨가 직접 JYA 아티스트에게 곡을 쓰는 작업을 하는 거예요. 정식으로. 크레딧도 정식으로 붙고, 저작권도 나세아 씨 앞으로 등록되고.”
세아는 잠시 침묵했다.
“박소진한테요?”
“포함해서요. 박소진 말고도 저희가 준비 중인 아티스트들이 있어요.”
“조건이 어떻게 돼요.”
강리우는 서류 봉투를 세아 쪽으로 밀었다.
“초안이에요. 아직 확정된 건 아니고 — 나세아 씨가 보시고 의견 주시면 조정할 수 있어요.”
세아는 봉투를 집지 않았다.
“저 지금 여기서 읽어도 돼요?”
“물론이죠.”
세아는 봉투를 열었다. 종이 두 장. 타이핑된 한국어 텍스트. 세아는 처음부터 읽기 시작했다.
조용한 카페였다. 아메리카노가 왔다. 강리우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세아가 읽는 동안 그는 자기 커피를 마셨다. 말을 걸지 않았다. 그 침묵이 — 세아는 이상하게 그 침묵이 불편하지 않았다. 재촉하지 않는 침묵이었다.
계약서를 읽으면서 세아는 몇 가지를 봤다.
곡당 작곡료. 저작권 귀속 조항. 독점 계약 여부. 계약 기간.
독점 조항이 있었다. 계약 기간 동안은 JYA 이외의 기획사 아티스트에게 곡을 제공할 수 없다는 항목. 계약 기간은 이 년이었다.
세아는 그 부분에서 잠깐 멈췄다.
“3페이지가 없어요.”
강리우가 고개를 들었다.
“초안이라 아직 전체 조항이 다 들어가지 않았어요.”
“독점 조항 있어요.”
“있어요.”
“이 년이요.”
“그렇게 초안을 잡았는데, 조정 가능해요.”
세아는 계약서를 덮었다. 봉투에 다시 넣지 않고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강리우 씨.”
처음으로 이름을 불렀다. 강리우가 세아를 봤다.
“이 계약서 사인하면 〈창가에서〉 크레딧 정정이 같이 진행되는 거예요?”
“그건 별개예요. 크레딧 정정은 이 계약 여부와 관계없이 진행할 거예요.”
“그 말 믿어도 돼요?”
강리우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세아는 그 멈춤을 봤다. 빠르게 답하지 않는 것 — 그것이 거짓말을 준비하는 것인지, 아니면 거짓말을 안 하려고 신중한 것인지. 세아는 아직 알 수 없었다.
“신뢰는 한 번에 쌓이지 않죠.”
강리우가 말했다.
“그러니까 지금 당장 믿으라는 게 아니에요. 제가 크레딧 정정 진행하는 거 확인하시고, 그다음에 이 제안에 대해 결정하셔도 돼요.”
세아는 그 말을 들었다.
신뢰는 한 번에 쌓이지 않죠.
이상하게도 이 말이 마음에 걸렸다. 좋은 의미에서가 아니었다. 이 말을 너무 자연스럽게 하는 사람은 — 신뢰를 쌓는 방법을 잘 아는 사람이라는 뜻이기도 했다. 그리고 신뢰를 쌓는 방법을 잘 아는 사람은, 그 반대도 잘 안다.
세아는 아메리카노를 한 모금 마셨다.
“하나 물어봐도 돼요.”
“물론이죠.”
“저 왜 찾은 거예요. 진짜로요.”
강리우가 잠깐 세아를 봤다. 그 눈빛이 — 처음과 약간 달랐다. 무언가를 재조정하는 것처럼.
“〈창가에서〉 들었을 때요. 처음 데모를 들었을 때 — 그게 어디서 왔는지 알고 싶었어요. 이 사람이 누군지. 편곡이 입혀지고 박소진 보컬이 들어가도 뼈대가 살아있는 곡이 있거든요. 뼈대가 좋은 곡.”
“그래서요.”
“그래서 찾았어요.”
세아는 그 말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나 부정하지도 않았다.
“더 물어볼 거 있어요?”
강리우가 말했다.
세아는 테이블 위의 계약서 초안을 봤다. 그리고 다시 강리우를 봤다.
“나머지 두 곡은 어떻게 됐어요. 박인철한테 준 거.”
강리우의 표정이 미세하게 움직였다. 눈 아래가 약간 좁아지는 것. 이 사람도 그 곡들에 대해 알고 있다는 것이 — 아니면 모른다는 것이 더 이상하다는 걸 알고 있다는 것이.
“그건 제가 확인이 더 필요해요.”
“확인이 필요하다는 말 두 번째 들어요.”
“…그렇네요.”
강리우는 커피잔을 두 손으로 감쌌다. 세아는 그 손을 다시 봤다. 마디가 굵은 손. 피아노를 오래 친 손의 굳은살이 있었다. 그러나 최근에 친 것 같지는 않았다. 굳은살이 오래된 것이었다.
“강리우 씨 피아노 쳤어요?”
강리우가 세아를 봤다. 이 번에는 처음과 다른 눈빛이었다. 놀란 것이 아니라 — 예상치 못한 방향에서 무언가가 온 것 같은 표정이었다.
“어떻게 알았어요.”
“손이요.”
강리우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봤다. 그리고 테이블 아래로 내렸다. 주머니는 없었지만 — 코트 아래로 손을 감추려는 것 같은 동작이었다.
“오래전에요.”
“지금은 안 쳐요?”
“…지금은 안 쳐요.”
세아는 더 묻지 않았다. 그 안 쳐요가 어떤 무게인지 세아는 모른다. 그러나 그 말이 나올 때 그의 목소리에서 뭔가가 빠졌다. 낮고 서두르지 않는 그 목소리에서 잠깐 무게가 사라진 것 같았다. 가벼워진 게 아니라 — 비어버린 것처럼.
세아는 그 공백을 음악으로 번역하지 않으려고 했다.
번역하면 안 되는 공백이 있다.
“계약서는 가져가서 보세요.”
강리우가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세아도 일어섰다. 계약서 초안을 봉투에 넣어 가방에 넣었다.
카페 밖으로 나오니 오후 햇살이 낮게 깔려 있었다. 3월의 오후. 바람이 불었다.
“크레딧 정정은 이번 주 안에 진행할게요.”
강리우가 말했다.
세아는 고개를 끄덕이지도 않았다. 그냥 들었다.
“연락처 교환하죠.”
둘이 핸드폰을 꺼내서 번호를 교환했다. 강리우의 카카오톡 프로필 사진이 없었다. 그냥 기본 회색이었다. 세아는 그것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 사람들이 있었다.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방식으로 연결되어 있는 사람들.
“그럼.”
강리우가 먼저 말했다.
“생각해보세요. 서두르지 않아도 되니까.”
그는 코트를 여미고 걸어갔다. 합정 방향이 아니라 — 홍대 입구역 쪽. 세아는 그가 멀어지는 것을 봤다. 등이 컸다. 키에 비해 어깨가 약간 좁아 보였다.
강남 사람이었다. 비싼 코트가 구겨져 있는 강남 사람.
세아는 그 뒷모습을 오래 보지 않았다.
핸드폰이 울렸다.
야 나세아. 끝났어? 창문으로 봤는데 꽤 오래 있었잖아. 괜찮아?
하늘이었다.
세아는 핸드폰을 들고 이디야 쪽을 봤다. 통유리 너머로 하늘이 손을 흔들고 있었다. 머리에 후드를 뒤집어쓰고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들고.
세아는 이디야로 걸어갔다.
하늘이 문을 열고 나왔다.
“어때? 걔 어때? 뭐래?”
세아는 잠깐 생각했다.
“모르겠어.”
“모르겠다는 게 나쁜 건지 좋은 건지.”
“…모르겠어.”
하늘이 세아의 얼굴을 봤다. 그 눈빛 — 하늘만의 눈빛이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척하면서 전부 보는 눈. 세아가 제주에서 서울로 올라와서 처음으로 사람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한 게 하늘이었다. 시끄럽고, 직설적이고, 웃기고 — 그러나 세아 앞에서만 가끔 조용해지는 사람. 조용해지는 타이밍을 알고 있는 사람.
“밥 먹었어?”
세아는 잠깐 생각했다.
“아니.”
“ㅋㅋ역시. 가자. 나 마라탕 먹고 싶어서 아까부터 참고 있었는데 너 때문에.”
“너 때문이 아니잖아.”
“맞아 내가 먹고 싶어서. 가자.”
하늘이 세아의 팔을 잡아당겼다. 세아는 끌려가면서 가방 안의 계약서 초안을 생각했다.
독점 조항. 이 년. 크레딧 정정.
그리고 — 피아노를 그만 뒀다는 사람의 텅 빈 목소리.
지금은 안 쳐요.
마라탕 집 안은 뜨겁고 시끄러웠다. 마라 향이 진하게 났다. 하늘이 이것저것 집어넣으면서 설명을 요구했다. 세아는 짧게 대답했다. 크레딧 문제, 계약 제안, 독점 조항.
“독점 조항 있으면 걸러야 해.” 하늘이 단호하게 말했다. “그거 함정이야. 이 년 동안 다른 데 못 팔면 너 인질이 되는 거잖아.”
“알아.”
“아는데 왜 계약서 가져왔어.”
“버리지 않은 거야. 읽어보려고.”
하늘이 세아를 봤다.
“걔 어떤 사람이야. 느낌이.”
세아는 마라탕 국물을 한 숟가락 떴다. 뜨거웠다. 입안이 얼얼해졌다.
“모르겠어.”
“아까도 그 말 했잖아.”
“진짜 모르겠어서.”
하늘이 잠깐 침묵했다. 젓가락으로 두부를 집으면서.
“세아야.”
“응.”
“그 사람이 JYA 아들이래. 강민준 아들. 나 아까 검색해봤거든.”
세아는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강리우. 강민준 대표 외아들. 베를린 유학 갔다가 3년 전에 돌아왔대. 원래 피아니스트였대.”
피아니스트.
세아는 그 단어를 들었다.
지금은 안 쳐요. 라고 말할 때 그 목소리의 무게. 비어버린 것 같은 무게.
“그게 뭐가 달라져요.”
“어떻게 달라지지 않아. 강민준 아들이잖아. 아버지 회사에서 일하는 거잖아. 걔가 너한테 좋은 조건 제안해도 — 결국 위에 있는 사람은 강민준이라고.”
세아는 그것을 알고 있었다. 이미 알고 있었다.
“그래서 가야 하는 거야. 강민준한테 직접 가면 나는 아무것도 아니잖아. 저 사람이 중간에 있으면 — 적어도 대화는 되는 거잖아.”
하늘이 세아를 봤다. 그 눈이 — 뭔가를 더 말하고 싶어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하늘은 그것을 말하지 않았다. 대신 젓가락으로 떡볶이 떡을 세아 그릇에 올려줬다.
“먹어.”
세아는 먹었다.
마라탕 집 창밖으로 홍대 밤거리가 보였다. 금요일 밤의 홍대는 사람들로 차 있었다. 불빛이 많았다. 편의점 간판, 클럽 간판, 노래방 간판. 세아는 그 불빛들을 보면서 가방 안에 있는 계약서를 생각했다.
〈창가에서〉가 차트 2위에 있다.
그 곡을 만든 사람은 세아다.
그리고 그 사실을 아는 사람이 — 오늘, 한 명 더 생겼다.
세아는 숟가락을 다시 들었다.
뜨거운 국물이 목을 타고 내려갔다. 반음 올라간 세트에서 눌렀던 목이 얼얼하게 풀렸다. 세아는 그것을 느끼면서 오늘 강리우가 한 말을 다시 떠올렸다.
뼈대가 좋은 곡.
뼈대.
세아는 뼈대를 만드는 사람이었다. 뼈대를 만들고, 뼈대를 다른 사람에게 주었다. 그 위에 살이 붙고 이름이 붙고 목소리가 입혀지면 — 세아의 뼈대는 세아의 것이 아닌 것이 됐다.
언제부터 그렇게 됐는지 세아는 생각해봤다.
제주에서 처음 서울로 올 때, 뱃전에서 섬이 사라지는 것을 봤을 때 — 그때 가슴 안에 자리를 잡은 그 돌멩이 같은 것. 그것이 지금도 있었다.
세아는 그게 무엇인지 아직도 정확하게 몰랐다.
그러나 오늘, 처음으로 — 그것이 돌멩이가 아닐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다른 무언가일 수도 있다.
불씨 같은 것.
아직 불이 붙지 않은, 그러나 불이 붙을 수 있는 무언가.
세아는 마라탕을 다 먹었다. 하늘이 계산을 먼저 해버렸다.
“야.”
“내가 먹자고 했잖아. 됐어.”
“다음에 내가.”
“응응. 근데 세아야.” 하늘이 코트를 입으면서 말했다. “그 계약서, 변호사한테 보여줘. 내 언니 친구가 엔터 계약 전문이거든. 무료로 봐준대.”
세아는 잠깐 생각했다.
“연결해줄 수 있어?”
“그럼.”
“…고마워.”
“어우 고맙다는 말 또 어색하게 한다. 됐어 가자.”
홍대 밤 거리를 걸었다. 하늘이 떠들었다. 세아는 들으면서 걸었다. 합정역 방향으로 걸어가면서 세아는 핸드폰을 꺼냈다.
카카오톡에 강리우라는 이름이 새로 생겨 있었다. 프로필 사진은 없었다. 회색 기본 이미지.
세아는 그 이름을 한 번 봤다.
그리고 핸드폰을 넣었다.
3월의 홍대 밤 바람이 불었다. 세아는 재킷 지퍼를 끝까지 올렸다. 목이 아직 조금 얼얼했다.
언더스코어 공연이 두 시간 후였다.
세아는 걸었다. 발목이 바쁘지 않았다. 서두르지 않는 발걸음으로. 이것이 오늘 세아가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속도였다.
가방 안에 계약서가 있었다.
핸드폰에 강리우의 번호가 있었다.
그리고 세아의 가슴 안에, 오래된 돌멩이 자리에 — 뭔가 다른 것이 있었다.
아직 이름을 붙이지 않은 무언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