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99화: 불타는 것들을 놓는 법
병원 현관 앞에서 세아는 햇빛을 느꼈다. 정오가 가까운 시간이었다. 햇빛은 차가웠다. 겨울 햇빛은 따뜻하지 않다는 것을 세아는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빛일 뿐 열이 아닌 것. 눈을 속이는 것. 마치 강리우의 손길처럼.
하늘이는 택시를 부르고 있었다. 손가락이 화면 위를 빠르게 움직였다. 하늘이는 느린 일과 빠른 일을 정확하게 구분하는 사람이었다. 감정에는 인내심을 쓰지만, 행동에는 신속함을 쓴다. 그것이 하늘이가 살아가는 방식이었다.
“집에 가?”
하늘이가 물었다.
세아는 택시가 나타나길 기다리면서 하늘이의 질문을 들었다. 집이란 무엇인가? 합정동의 반지하 고시원? 제주의 어린 시절 집? 아니면 강리우의 집—아, 그건 이제 자신의 집이 아니었다. 그 어느 것도 집이 아니었다. 하지만 어디가 되어야 할까? 어디로 가야 할까?
“경찰서에 먼저 가야 돼요.”
세아가 말했다.
하늘이가 고개를 들었다. 그 얼굴에는 무언가가 떠올랐다. 승인? 아니다. 확인. 세아가 옳은 일을 하고 있다는 확인.
“그리고?”
하늘이가 물었다.
“그리고 변호사를 만나요.”
세아가 말했다.
“그 다음?”
하늘이가 계속 물었다.
세아는 그 질문들을 들으면서 자신의 인생이 이제 단계적인 것이라는 걸 깨달았다. 각 단계를 끝내야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는 것. 그것은 게임 같았다. 하지만 게임이 아니었다. 단지 살아가는 것이었다. 살아가는 다른 방식.
“제주에 가요.”
세아가 말했다.
하늘이는 그 말을 들으면서 눈을 감았다. 아주 천천히. 마치 그것이 물리적인 휴식을 필요로 하는 것처럼.
“언제?”
하늘이가 물었다.
“모든 절차가 끝나면.”
세아가 말했다.
택시가 나타났다. 검은색 현대 쏘나타. 번호판은 07아로 시작했다. 택시 기사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창밖이 너무 어두웠다. 아니면 자신의 눈이 너무 피곤했나. 햇빛 속에서도 어두움을 보고 있었다.
차 안으로 들어가면서 세아는 자신이 얼마나 피곤한지를 깨달았다. 피곤함이 무게였다. 자신의 뼈 속까지 침투한 무게. 마치 자신이 물 속에 있는 것처럼. 깊은 바다 속. 햇빛이 닿지 않는 곳.
기사가 목적지를 물었다.
“강남경찰서.”
하늘이가 말했다.
기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단지 차를 출발시켰다. 강남으로 향하는 길. 세아는 창밖을 봤다. 서울의 거리들이 흐르고 있었다. 사람들이 걸어다니고 있었다. 모두 살아있었다. 모두 자신의 목적지가 있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세아는 알고 있었다. 그들도 헤매고 있다는 것을. 그들도 자신이 어디로 가는지 모르고 있다는 것을. 단지 움직이고 있을 뿐이었다. 그것이 살아가는 것이었다.
“넌 어떻게 할 거야?”
세아가 하늘이에게 물었다.
“뭘?”
하늘이가 물었다.
“제가 제주에 가면, 당신은 어떻게 할 거예요?”
세아가 물었다.
하늘이는 그 질문을 들으면서 웃음을 흘렸다. 슬픈 웃음이 아니었다. 그냥 웃음이었다. 순수한 웃음. 마치 세아의 질문이 우스꽝스러웠던 것처럼.
“나는 가만히 있지. 여기서. 타투 샵에서. 아, 그리고 너가 제주에서 뭘 할 건지 생각할 거고. 그리고 언제쯤 다시 돌아올 건지 기다릴 거야.”
하늘이가 말했다.
세아는 그 말을 들으면서 자신이 얼마나 혼자가 아닌지를 깨달았다. 혼자라고 생각했는데, 혼자가 아니었다. 하늘이가 있었다. 항상 있었다. 자신이 떠나갈 때도, 자신이 돌아올 때도.
“감사해요.”
세아가 말했다.
“뭐가?”
하늘이가 물었다.
“존재해 줘서요.”
세아가 말했다.
하늘이는 그 말을 들으면서 창밖을 봤다. 그리고 말했다.
“넌 이상한 인간이야. 진짜로. 사람한테 감사한다고? 그냥 당연한 건데.”
하늘이가 말했다.
“당연한 게 아니에요.”
세아가 말했다.
“알았어. 그럼 상호 감사하자. 넌 내한테 고마워. 나는 너한테 고마워. 끝.”
하늘이가 말했다.
차는 계속 나아가고 있었다. 서울의 거리를 헤치고. 강남을 향해. 세아는 창밖의 풍경을 봤다. 건물들이 높아지고 있었다. 돈이 높아지는 것처럼. 힘이 높아지는 것처럼.
강남경찰서 앞에 도착했을 때, 세아는 자신의 손이 떨리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그 떨림은 강리우의 떨림과는 달랐다. 강리우의 떨림은 두려움이었다. 자신의 떨림은 결의였다.
경찰서 안으로 들어갔을 때, 냄새가 났다. 강한 냄새. 소독약과 금속. 그리고 무언가 더. 절망? 아니다. 절망보다는 복잡함.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섞여있는 냄새.
담당 형사는 이미 세아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름은 박 형사였다. 나이는 오십 대 초반. 얼굴은 많은 것을 봐온 얼굴이었다. 무관심해 보였지만, 실제로는 매우 관심 있어 보였다. 그것은 위험한 조합이었다.
“나세아씨, 다시 만나네요.”
박 형사가 말했다.
세아는 그 형사와 이전에 만난 적이 있었다. 강리우를 신고한 후에. 그때의 기억은 흐렸다. 마치 다른 사람의 기억인 것처럼. 마치 영화를 본 것처럼.
“네. 안녕하세요.”
세아가 말했다.
박 형사는 세아를 조사실로 이끌었다. 작은 방이었다. 테이블 하나, 의자 두 개. 그리고 작은 녹음기. 이미 켜져 있었다. 마치 세아의 말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일단 지난번 사건 이후로 어떻게 지내셨는지를 듣고 싶어요.”
박 형사가 말했다.
세아는 그 질문을 들으면서 자신이 어떻게 지냈는지를 생각해봤다. 병원에 있었다. 강리우를 봤다. 강리우와 대화했다. 그리고 강리우를 놓았다. 그것이 전부였다. 하지만 그것을 어떻게 설명할까?
“강리우를 만났어요.”
세아가 말했다.
박 형사는 그 말을 들으면서 메모를 시작했다. 손으로. 펜을 사용해서. 옛날 방식이었다. 하지만 더 정확했다. 손글씨는 거짓말을 할 수 없었다. 손의 움직임은 마음의 움직임을 반영했다.
“어디서?”
박 형사가 물었다.
“병원이에요. 강남의료원. 정신과 병동.”
세아가 말했다.
“혼자?”
박 형사가 물었다.
“아니요. 친구가 함께했어요.”
세아가 말했다.
박 형사는 메모를 계속했다. 그리고 물었다.
“무슨 말을 했어요?”
박 형사가 물었다.
세아는 그 질문을 들으면서 자신과 강리우의 대화를 다시 떠올렸다. 하지만 그것을 말하기는 어려웠다. 그것은 너무 개인적이었다. 너무 깊었다. 너무 진실이었다.
“그냥… 확인했어요.”
세아가 말했다.
“뭘 확인했어요?”
박 형사가 물었다.
“그 사람이 미쳤다는 걸.”
세아가 말했다. “그 사람이 자신이 뭘 하려고 했는지 알고 있다는 걸. 그리고 후회한다는 걸.”
박 형사는 그 말을 들으면서 펜을 놓았다. 메모를 멈추고. 세아를 바라봤다. 그 눈빛은 무엇이었나? 동정? 아니다. 확인. 세아가 진실을 말하고 있다는 확인.
“강리우씨가 자신의 행동을 인정했어요?”
박 형사가 물었다.
“네.”
세아가 말했다.
“그리고 당신은 그것으로 충분했어요?”
박 형사가 물었다.
세아는 그 질문을 들으면서 자신이 왜 경찰서에 왔는지를 다시 생각했다. 복수? 아니다. 정의? 그것도 아니었다. 단지… 마무리였다. 어떤 이야기의 끝. 어떤 불꽃의 소멸.
“아니요.”
세아가 말했다.
“그럼 뭐가 필요해요?”
박 형사가 물었다.
세아는 그 질문에 대해 생각했다. 오래. 아주 오래. 그리고 답을 찾았다.
“기록이 필요해요. 그 사람이 뭘 했는지의 기록. 그리고 그것이 법적으로 처벌받는다는 기록. 그것이 필요해요.”
세아가 말했다.
박 형사는 그 말을 들으면서 다시 메모를 시작했다. 더 빠르게. 더 명확하게. 마치 세아의 말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처럼.
“고소장을 제출하시겠다는 뜻이죠?”
박 형사가 물었다.
“네.”
세아가 말했다.
“혐의는요?”
박 형사가 물었다.
세아는 그 질문을 들으면서 강리우가 무엇을 했는지를 정확하게 나열했다. 살인 미수. 폭력. 협박. 감금. 그리고…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진 모든 것들.
박 형사는 그것들을 모두 메모했다. 그리고 물었다.
“증거는요?”
박 형사가 물었다.
하늘이가 나섰다. 그녀는 세아의 옆에서 손가락으로 자신의 팔을 가리켰다. 타투 아래에. 세아가 그 자리에 닿았을 때 느껴지는 것. 상처. 타투. 그리고 그 아래의 흔적들.
“의료 기록도 있어요.”
하늘이가 말했다. “병원에 다 기록되어 있을 거예요. 응급실 기록. 입원 기록. 모든 것.”
박 형사는 그 말을 들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물었다.
“당신은 나세아씨의 친구신가요?”
박 형사가 물었다.
“네. 오하늘이라고 합니다.”
하늘이가 말했다.
“오하늘씨, 당신도 증인이 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박 형사가 말했다.
“네. 되겠습니다.”
하늘이가 말했다.
세아는 이 모든 것을 지켜봤다. 자신의 삶이 공식적으로 기록되고 있다는 것을. 자신의 고통이 법적으로 인정되고 있다는 것을. 그것은 이상한 기분이었다. 마치 자신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증명을 받는 것처럼. 마치 자신의 이야기가 비로소 실재가 되는 것처럼.
조사는 3시간 동안 계속되었다. 세아는 모든 것을 말했다. 강리우와의 만남부터 시작해서. 강리우의 집에서의 일들. 강리우의 통제. 강리우의 폭력. 그리고 마지막 날밤. 차 안에서. 한강 다리 위에서.
박 형사는 모든 것을 들었다. 그리고 물었다.
“당신이 강리우씨를 멈춘 거예요?”
박 형사가 물었다.
“네.”
세아가 말했다.
“어떻게?”
박 형사가 물었다.
세아는 그 질문을 들으면서 그 순간을 다시 생생하게 떠올렸다. 차가 달리고 있었다. 강리우의 손이 핸들을 돌리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이 앞으로 몸을 던졌다. 자신의 몸. 자신의 무게. 그것으로 차를 멈췄다.
“제 몸으로요.”
세아가 말했다.
박 형사는 그 말을 들으면서 펜을 내려놨다. 그리고 세아를 봤다. 오래. 아주 오래. 마치 세아가 다른 종류의 인간인 것처럼.
“당신은 용감한 사람이네요.”
박 형사가 말했다.
“아니에요.”
세아가 말했다.
“그럼 뭐예요?”
박 형사가 물었다.
세아는 그 질문에 대해 생각했다. 용감함? 아니다. 두려움? 맞다. 절망? 그것도 맞다. 그리고…
“살고 싶었어요.”
세아가 말했다.
박 형사는 그 말을 들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메모를 닫았다.
“좋아요. 당신의 고소장을 접수하겠습니다. 그리고 변호사를 소개해 드릴 텐데요. 당신이 필요로 하는 변호사를.”
박 형사가 말했다.
세아는 그 말을 들으면서 자신의 어깨에서 무언가가 내려간다는 것을 느꼈다. 무게. 그것이 내려갔다. 완전히는 아니었지만, 조금은. 아주 조금.
경찰서를 나왔을 때는 이미 저녁이었다. 해가 지고 있었다. 서쪽 하늘이 주황색으로 변했다. 불타고 있었다. 마치 누군가의 가슴처럼.
하늘이는 택시를 다시 불렀다. 이번엔 목적지를 묻지 않고. 마치 어디든 될 것 같은 표정으로.
“어디 갈 거야?”
세아가 물었다.
“음식 먹어야지. 넌 밥을 먹은 지 언제야?”
하늘이가 물었다.
세아는 그 질문을 들으면서 자신이 언제 밥을 먹었는지를 생각해봤다. 어제? 그 전날? 기억이 명확하지 않았다. 마치 자신이 먹지 않았던 것처럼. 마치 자신이 생명이 아니었던 것처럼.
“모르겠어요.”
세아가 말했다.
“그럼 이제부터 먹어야 해.”
하늘이가 말했다.
택시 안에서 하늘이는 강남역 근처의 작은 국밥 집으로 가자고 말했다. 세아는 그 말을 들었다. 하지만 자신이 정말로 가는 것은 어딘지 몰랐다. 자신의 몸이 어디로 가는 것인지를 몰랐다. 마치 자신이 자신의 몸과 분리되어 있는 것처럼. 마치 자신이 영혼이 되어 위에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것처럼.
국밥 집에 도착했을 때, 세아는 냄새를 맡았다. 소금. 고기. 밥. 그리고 무언가 더. 따뜻함? 아니다. 살아있음. 이 곳이 살아있다는 냄새.
하늘이는 메뉴를 보지 않고 주문했다.
“국밥 둘. 그리고 계란말이. 그리고…”
하늘이가 말했다. “세아는 뭐 먹을 거야?”
“아무거나 괜찮아요.”
세아가 말했다.
“아무거나라고 하지 마. 뭐를 먹고 싶어?”
하늘이가 물었다.
세아는 그 질문을 들으면서 자신이 뭔가를 원한다는 것이 얼마나 이상한지를 깨달았다. 원한다는 것. 선택한다는 것. 자신의 것을 가진다는 것.
“국밥이 좋아요.”
세아가 말했다.
“그걸 말이지. 계란말이도 먹어.”
하늘이가 말했다.
그들이 밥을 먹고 있을 때, 세아의 휴대폰이 울렸다. 번호는 알 수 없는 번호였다. 하지만 세아는 그것이 누구인지를 알았다. 변호사였다. 박 형사가 소개해준 변호사. 조순미. 이름만으로도 강인해 보이는 이름.
세아는 전화를 받았다.
“안녕하세요. 나세아씨인가요?”
목소리가 들렸다. 여성의 목소리. 명확하고, 따뜻하고, 어떤 선의도 없이 직설적인 목소리.
“네. 안녕하세요.”
세아가 말했다.
“박 형사로부터 당신의 사건에 대해 들었습니다. 제가 당신의 변호사가 되고 싶은데, 괜찮으신가요?”
변호사가 물었다.
“네. 괜찮습니다.”
세아가 말했다.
“좋습니다. 그럼 내일 오후 2시에 제 사무실에서 만나요. 주소는 문자로 보낼 텐데요. 질문 있으세요?”
변호사가 물었다.
세아는 그 질문을 들으면서 자신이 뭔가를 물어봐야 하는 건 아닌지를 생각했다. 비용? 기간? 결과?
“이 사건이 이길 수 있을까요?”
세아가 물었다.
변호사는 잠시 침묵했다. 그리고 말했다.
“이기고 지는 게 중요한 게 아니에요. 당신의 이야기가 법정에 기록되는 것이 중요해요. 당신이 존재했다는 것이 기록되는 것이 중요해요. 나머지는 그 다음이에요.”
변호사가 말했다.
그 말이 끝났을 때, 세아는 자신의 눈이 젖어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눈물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슬픈 눈물이 아니었다. 그냥 눈물이었다. 마치 자신의 몸이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고 있는 것처럼.
전화를 끊은 후, 하늘이가 물었다.
“뭐래?”
하늘이가 물었다.
“변호사예요.”
세아가 말했다.
“좋은 말씀 하셨어?”
하늘이가 물었다.
“네.”
세아가 말했다.
하늘이는 그 말을 들으면서 국밥을 계속 마셨다. 그리고 말했다.
“그럼 우리가 이겨.”
하늘이가 말했다. “당신이 존재한다는 걸 증명하는 거야. 그게 이기는 거야.”
밤이 되었을 때, 세아와 하늘이는 택시 안에 있었다. 이번엔 합정동으로 향하고 있었다. 세아의 고시원. 그곳이 집인지는 모르겠지만, 최소한 그곳이 자신이 있어야 할 곳이었다.
차창 밖으로 서울의 야경이 흐르고 있었다. 불빛들. 수백만 개의 불빛들. 각각의 불빛 뒤에는 누군가가 있었다. 누군가의 삶이 있었다. 누군가의 불타는 것이 있었다.
고시원 앞에 도착했을 때, 세아는 차에서 내리지 않았다.
“근데 넌 어떻게 할 거야?”
세아가 하늘이에게 물었다.
“나? 나는 집에 가. 내일도 일이 있거든.”
하늘이가 말했다.
“아니요. 제가 제주에 간 후에 무엇을 할 거냐고 물어봤었잖아요.”
세아가 말했다.
하늘이는 그 말을 들으면서 창밖을 봤다. 합정동의 밤거리. 그곳이 자신들의 집이었다. 홍대와 가장 가까운 곳. 음악과 예술이 흐르는 곳.
“나는 계속 여기 있을 거야. 타투 샵에서. 그리고 누구든 올 수 있는 문을 열어두고 있을 거야. 특히 너처럼 타 버린 사람들을 위해서.”
하늘이가 말했다.
세아는 그 말을 들었다. 그리고 자신이 얼마나 운이 좋은 사람인지를 깨달았다. 절망 속에서도 누군가가 손을 내밀어주는 것. 자신이 타 버렸을 때도 누군가가 자신을 데워주는 것. 그것이 얼마나 드문 것인지를.
“감사해요.”
세아가 말했다.
“또 그거? 상호 감사라고 했잖아.”
하늘이가 말했다.
“그래도요.”
세아가 말했다.
하늘이는 웃음을 흘렸다. 진짜 웃음. 그 웃음이 차 안에 가득 찼다. 마치 빛처럼.
고시원으로 들어갔을 때, 세아는 자신의 방이 얼마나 작은지를 다시 느꼈다. 하지만 그것도 처음 왔을 때처럼 절망적이지는 않았다. 이제 그것은 그냥 작은 방이었다. 자신의 방. 자신이 있는 곳.
문을 열고 들어가면서, 세아는 무언가를 느꼈다. 변화. 아주 작은 변화. 마치 공기가 다르게 흐르고 있는 것처럼. 마치 자신이 다른 사람이 되어 있는 것처럼.
침대에 누웠을 때, 세아는 천장을 봤다. 그 천장 위에는 무엇이 있을까? 또 다른 누군가? 또 다른 고시원 거주자? 아니면 그냥 하늘?
자신의 손가락을 세었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왼쪽 손. 그리고 오른쪽 손. 열 개의 손가락. 열 개의 기회. 열 개의 선택.
이제 자신은 뭘 할 거였나? 법정에 나갈 거였다. 변호사를 만날 거였다. 그리고 모든 절차를 끝낼 거였다. 그 다음에는 제주로 갈 거였다. 어머니를 볼 거였다. 도현이를 볼 거였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을 끝낸 후에는?
그 질문이 천장에 남겨져 있었다. 대답 없이. 마치 불꽃처럼. 아직도 타고 있는 불꽃처럼. 아직도 꺼지지 않은 불꽃처럼.
새벽 2시에 세아는 일어났다. 꿈을 꿨다. 강리우의 꿈. 아니, 강리우가 나오는 꿈이 아니었다. 강리우가 없는 꿈이었다. 자신이 혼자 어딘가를 헤매는 꿈. 하지만 그것도 무서운 꿈이 아니었다. 단지 길을 잃은 꿈이었다. 그리고 길을 잃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걸 아는 꿈이었다.
휴대폰을 들었다. 메시지가 하나 있었다.
‘내일 뵙겠습니다. 화이팅. – 조순미 변호사’
세아는 그 메시지를 봤다. 그리고 천천히 웃음을 지었다. 작은 웃음. 하지만 진짜 웃음.
자신은 여전히 타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 그것은 다른 종류의 불이었다. 자신을 소멸시키는 불이 아니라, 자신을 밝히는 불. 자신을 살리는 불.
그 불은 꺼지지 않을 것이다.
# 불의 언어
## 1부: 창밖의 도시
하늘이의 말이 공기 중에서 맴돌고 있었다. 세아는 그 말을 온몸으로 받아내면서 천천히 창밖으로 눈을 돌렸다.
합정동의 밤거리가 펼쳐져 있었다.
네온사인들이 반짝이고 있었다. 골목 어디선가 희미한 음악이 흘러나왔다. 아마도 어떤 바에서, 어떤 클럽에서, 또는 어떤 카페에서 나오는 소리일 것이었다. 이곳은 그런 곳이었다. 밤이 되면 깨어나는 곳. 낮에는 조용하던 골목들이 밤이 되면 색깔을 입는 곳.
그곳이 자신들의 집이었다.
세아는 이 사실을 다시 한 번 되새겨 보았다. 그저 ‘머물러 있는 곳’이 아니라, ‘집’이라고 부를 수 있는 곳. 예전에는 이런 말이 가능했을까?
창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이 보였다. 회색으로 물든 얼굴. 눈이 움푹 들어간 얼굴. 하지만 그 얼굴에는 지금, 며칠 전과는 다른 무언가가 있었다. 희미하지만 분명한 무언가.
“나는 계속 여기 있을 거야.”
하늘이가 말했다. 그 목소리는 약속처럼 들렸다. 아니, 서약처럼 들렸다. 마치 신성한 맹세처럼.
“타투 샵에서. 그리고 누구든 올 수 있는 문을 열어두고 있을 거야.”
세아는 하늘이의 옆얼굴을 바라봤다. 조명이 하늘이의 얼굴에 어떻게 떨어지는지 살펴봤다. 네온사인의 파란 빛이 하늘이의 광대뼈를 스쳤다. 주황색 빛이 이마를 비췄다. 그 얼굴은 단순한 얼굴이 아니었다. 어떤 결심이 서린 얼굴이었다.
“특히 너처럼 타 버린 사람들을 위해서.”
그 말이 떨어지는 순간, 세아의 가슴 깊숙한 곳에서 무언가가 울렸다. 마치 종소리처럼. 오랫동안 울리지 않던 종이 다시 울리는 소리처럼.
타 버린 사람.
그렇다. 자신은 타 버렸다. 강리우라는 불에 의해, 자신의 선택에 의해, 자신의 실수에 의해. 그 불은 자신의 피부를 태웠다. 자신의 정신을 태웠다. 자신의 모든 것을 태웠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누군가가 자신을 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자신의 타버린 모습을 보고도 외면하지 않는 누군가가. 오히려 손을 내밀어주는 누군가가.
“감사해요.”
세아가 말했다. 그 말이 나올 때, 자신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다는 걸 느꼈다.
“또 그거?”
하늘이가 웃으면서 말했다.
“상호 감사라고 했잖아. 내가 너한테 받은 게 있으니까, 넌 나한테 감사하지 말고.”
하늘이의 말이 맞았다. 논리적으로도, 감정적으로도. 하지만 세아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사를 멈출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 감사는 단순한 정중함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생명에 대한 감사였다. 다시 숨을 쉬게 해준 것에 대한 감사였다.
“그래도요.”
세아가 조용히 말했다.
하늘이는 그 말을 들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웃음을 흘렸다.
그것은 억지 웃음이 아니었다. 위로를 위한 웃음도 아니었다. 그것은 진짜 웃음이었다. 배에서 올라오는, 자신도 멈출 수 없는 종류의 웃음.
그 웃음이 자동차 안에 가득 찼다. 좁은 공간을 가득 채웠다. 마치 빛처럼 퍼져나갔다.
세아도 함께 웃었다. 처음으로, 정말로, 마음 깊숙한 곳에서 우러나오는 웃음으로.
그렇게 두 사람은 합정동의 밤거리를 바라보며 웃음을 나눴다.
## 2부: 작은 방
고시원으로 돌아갔을 때는 새벽 3시였다.
계단을 올라가면서 세아는 발걸음 소리를 들었다. 자신의 발걸음이 만드는 소리. 나무 계단이 신음하는 소리. 그리고 위층 어디선가 누군가의 코골이 소리.
이곳은 여전히 고시원이었다. 그 냄새도, 그 감촉도, 그 분위기도.
하지만 뭔가 달랐다.
자신의 방 문을 열었을 때, 세아는 그 작음을 다시 느꼈다. 창문 하나. 침대 하나. 책상 하나. 그리고 옷 한두 벌이 걸려 있는 철사.
이 방이 얼마나 작은지를 처음 느꼈던 때가 있었다. 도시에 처음 왔을 때. 강리우를 피해 달아났을 때. 절망 속에서 이 작은 방에 누웠을 때.
그때 이 방은 무덤처럼 느껴졌었다. 자신을 집어삼킬 것 같은 깜깜한 무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이제 이것은 단순히 ‘작은 방’이었다. 더 이상 무덤이 아니었다. 그저 자신의 공간. 자신의 영역. 자신이 있을 수 있는 곳.
문을 열고 들어가면서, 세아는 무언가를 느꼈다.
변화.
아주 작은 변화. 눈에 띄지 않을 정도로 작은 변화. 하지만 분명한 변화.
마치 공기가 다르게 흐르고 있는 것처럼. 마치 자신이 다른 사람이 되어 있는 것처럼.
침대에 누웠다.
천장을 바라봤다. 낡은 천장. 그 위에는 어떤 자국들이 있었다. 옛날 누군가가 떨어뜨린 물의 자국. 습기로 인한 곰팡이의 얼룩. 누군가가 던진 담배재의 흔적.
그 천장 위에는 무엇이 있을까?
또 다른 누군가? 또 다른 고시원 거주자? 아니면 그냥 하늘?
세아는 손가락을 세기 시작했다. 아무 이유 없이. 그냥 뭔가를 해야 할 것 같아서.
“하나.”
왼손의 엄지가 보였다.
“둘.”
검지.
“셋.”
중지.
“넷.”
약지.
“다섯.”
새끼손가락.
그리고 오른손.
“여섯. 일곱. 여덟. 아홉. 열.”
열 개의 손가락. 열 개의 기회. 열 개의 선택.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상한 논리였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그것이 맞는 것 같았다.
이제 자신은 뭘 할 거였나?
법정에 나갈 거였다. 조순미 변호사를 만날 거였다. 자신의 이야기를 다시 한 번 말할 거였다. 강리우가 무엇을 했는지, 자신이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를.
그리고 모든 절차를 끝낼 거였다.
그 다음에는 제주로 갈 거였다. 버스를 타고, 또는 비행기를 타고. 어머니를 만날 거였다. 얼마나 변했을 어머니의 얼굴을 볼 거였다. 어머니는 자신을 어떤 눈으로 볼까?
도현이도 만날 거였다. 도현이는 지금 몇 살이 되었을까? 자신을 기억하고 있을까? 아니면 자신을 모르는 낯선 사람으로 볼까?
이 모든 것들을 생각하면, 세아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을 끝낸 후에는?
그 질문이 천장에 남겨져 있었다. 대답 없이. 마치 불꽃처럼. 아직도 타고 있는 불꽃처럼. 아직도 꺼지지 않은 불꽃처럼.
자신은 어디로 갈 거였나? 뭘 할 거였나? 어떻게 살아갈 거였나?
그런 질문들이 계속 떠올랐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세아는 그 질문들을 피하지 않기로 했다. 대신 그것들을 마주하기로 했다. 천천히. 차근차근히.
## 3부: 꿈과 깨어남
새벽 2시에 세아는 일어났다.
꿈을 꿨다.
그 꿈의 내용은 명확하지 않았다. 꿈은 대부분 그렇다. 깨어나는 순간, 구체적인 형태를 잃는다. 마치 물 위의 거품처럼.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그 꿈 속에 강리우가 없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강리우가 나오는 꿈이 아니었다. 강리우의 얼굴을 보는 꿈도 아니었다. 강리우의 손에 잡히는 꿈도 아니었다.
자신이 혼자 어딘가를 헤매는 꿈이었다.
미로 같은 골목. 어두운 지하도. 끝이 없을 것 같은 계단. 자신은 그 속에서 길을 잃었다.
하지만 그것도 무서운 꿈이 아니었다.
단지 길을 잃은 꿈이었다. 그리고 길을 잃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걸 아는 꿈이었다.
아, 맞다. 그 꿈 속에서 누군가가 자신을 부르고 있었다. 목소리는 들렸지만, 그 사람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괜찮았다. 그 목소리만으로도 충분했다.
세아는 침대에서 일어났다.
몸이 축축했다. 땀에 젖어 있었다. 하지만 불쾌한 종류의 땀이 아니었다. 마치 운동을 한 후의 건강한 피로감처럼 느껴졌다.
휴대폰을 들었다.
화면에 불이 들어왔다. 시간은 새벽 2시 17분이었다.
그리고 메시지가 하나 있었다.
‘내일 뵙겠습니다. 화이팅. – 조순미 변호사’
세아는 그 메시지를 봤다.
몇 번을 읽었다.
처음에는 빠르게, 그 다음에는 천천히, 마지막에는 각 글자를 하나하나 따라가며.
그리고 천천히 웃음을 지었다.
작은 웃음.
침대에 누워서, 새벽의 고요함을 깨지 않을 정도의 작은 웃음.
하지만 진짜 웃음.
배에서 올라오는 웃음.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웃음.
세아는 그 웃음을 멈추려고 하지 않았다. 대신 그것을 느꼈다. 그것이 자신의 몸을 통과하는 방식을. 그것이 자신의 가슴에서 떨리는 방식을.
## 4부: 불의 변화
자신은 여전히 타고 있었다.
이것은 사실이었다. 거부할 수 없는 사실.
강리우에 의한 상처. 자신의 선택에 의한 죄책감. 법정에서 받을 판결에 대한 두려움.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
이 모든 것들이 자신을 계속 태우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 그것은 다른 종류의 불이었다.
자신을 소멸시키는 불이 아니라, 자신을 밝히는 불.
자신을 태우지만, 동시에 자신을 정제하는 불.
자신을 삼키지만, 동시에 자신을 살리는 불.
그 불의 이름은 무엇일까?
희망?
아니, 아직은 그렇게 부르기 힘들었다. 희망은 너무 큰 말이었다. 희망은 완전한 확신을 요구했다.
그렇다면 가능성?
그것이 더 맞는 말인 것 같았다. 가능성. 아주 작은 가능성. 하지만 분명한 가능성.
내일 법정에 나갈 것이다. 그리고 그곳에서 무언가가 일어날 것이다. 좋은 결과가 나올 수도 있고, 나쁜 결과가 나올 수도 있다. 하지만 어느 쪽이든, 자신의 인생은 계속될 것이다.
그리고 제주로 갈 것이다. 어머니를 만날 것이다. 도현이를 만날 것이다. 그것이 얼마나 힘든 만남이 될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그 만남은 일어날 것이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이 끝난 후에는?
그 질문은 여전히 대답이 없었다. 하지만 이제 그 질문이 무서운 질문이 아니었다. 그것은 단순한 질문이었다. 아직 답이 없는, 하지만 답을 찾을 수 있는 질문.
세아는 다시 누웠다. 천장을 바라봤다.
그리고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 불은 꺼지지 않을 것이다.”
마치 주문처럼. 마치 서약처럼.
“그 불은 꺼지지 않을 것이다.”
한 번 더.
“그 불은… 꺼지지 않을 것이다.”
그 말이 떨어지는 순간, 세아의 눈이 감겨졌다.
그리고 이번엔 꿈을 꾸지 않았다. 대신 깊은 수면에 빠져들었다.
새벽의 고요함 속에서, 한 사람이 천천히 숨을 쉬고 있었다.
그 숨은 얕지도, 깊지도 않은 자연스러운 숨이었다.
마치 누군가가 자신을 다시 데워주었을 때의 숨처럼.
마치 누군가가 자신의 손을 잡아주었을 때의 숨처럼.
새벽이 물러가고 아침이 올 것이다.
그리고 그 아침에는 새로운 하루가 시작될 것이다.
불에 타면서도, 동시에 빛나는 새로운 하루가.
—
**에필로그: 그 후**
조순미 변호사와의 만남은 예상보다 길었다. 세아는 자신의 모든 것을 말했다. 강리우와의 만남부터 시작해서, 그 어두운 시간들을 거쳐, 마지막으로 자신이 그를 떠난 이유까지.
변호사는 끝까지 세아를 바라봤다. 판단하지 않는 눈으로. 단지 듣는 눈으로.
“힘내세요, 세아님. 우리가 함께 하겠습니다.”
그 말이 세아를 다시 한 번 데웠다.
법정 날은 회색이었다. 서울의 하늘도 회색이었다. 하지만 세아는 그 회색을 받아냈다. 더 이상 그것이 자신을 압도하지 않았다.
그리고 제주로 가는 버스 위에서, 세아는 창밖을 봤다.
도로가 흘러가고 있었다. 도시가 사라지고 있었다. 그리고 어딘가 다른 곳으로 향해 가고 있었다.
어머니는 버스 터미널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세아는 버스에서 내렸다. 천천히. 마치 새로운 세상으로 한 발씩 내딛듯이.
그리고 어머니의 눈을 만났다.
그 순간, 모든 것이 멈췄다. 세상이 멈췄다. 시간이 멈췄다.
그리고 다시 시작되었다.
이번에는 다른 속도로. 다른 방향으로. 다른 의미로.
세아는 어머니를 향해 걸어갔다.
그 걸음이 얼마나 힘든 것인지, 그것만은 아무도 모를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상관없었다.
왜냐하면 세아는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타 버린 것도 살아낼 수 있다는 것을.
불 속에서도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을.
그리고 누군가가 자신의 손을 잡아주면, 어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