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92화: 녹음된 것들의 증거
준호의 헤드폰이 목에 걸린 채로, 그는 모니터 화면을 가리켰다. 파형(waveform)이 초록색 산맥처럼 솟아 있었다. 세아의 목소리였다. 아니, 더 정확하게는 세아의 목소리가 디지털로 번역된 것이었다. 숫자로, 데이터로, 저장 가능한 증거로.
“이거 봐.”
준호가 클릭했다. 파형의 한 부분이 확대되었다. 작은 진동들이 더 명확하게 보였다. 마치 심장박동처럼. 아니, 심장박동보다 더 복잡했다. 수백 개의 주파수가 겹쳐 있었다.
“뭐예요?”
세아가 물었다. 자신이 본 것이 무엇인지 모르면서도, 본능적으로 그것이 중요하다는 걸 알았다.
“네 목소리야. 이 부분.”
준호가 또 다른 부분을 가리켰다. “여기서 음정이 진동해. 미세하게. 0.3헤르츠 정도? 이게 감정이야. 네가 그 멜로디를 부를 때 느낀 감정이 파형에 찍혀 있다는 거지.”
하늘이가 옆에 서서 화면을 봤다. 그녀의 얼굴에 무언가가 스쳤다. 인식이라고 할 수 있는 것. 깨달음이라고 할 수 있는 것.
“그러니까 이거는… 세아가 정말로 느낀 거라는 뜻이네?”
하늘이가 물었다.
“그렇지. 목소리는 거짓말을 못 해. 아무리 연기해도, 이 파형은 진짜 감정을 담아낸다. 신경계의 미세한 떨림이 성대를 통해 나오고, 그게 음파로 변환되고, 마이크가 그걸 캐치하는 거야. 거짓을 끼워 넣을 수 없는 지점이 여기 있다.”
준호가 설명했다. 마치 과학 교사처럼. 아니, 마치 자신의 신앙을 설파하는 사람처럼.
세아는 그 파형을 봤다. 자신의 감정이 그렇게 객관화될 수 있다는 생각이 낯설었다. 자신이 느낀 것, 자신이 감추려던 것, 자신의 가장 깊은 부분이 이렇게 눈에 보이는 형태로 존재한다는 것이.
“저장할 수 있어요?”
세아가 물었다. 갑자기.
“뭘?”
준호가 되물었다.
“이거. 내 목소리.”
준호는 웃음이 나온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웃음을 참고 있었다.
“당연하지. 이미 저장돼 있어. 여기 하드드라이브에. 그리고 클라우드에도 백업했고.”
준호가 말했다.
세아는 그 말을 들으면서 무언가가 풀렸다고 느껴졌다. 물론 그것은 환각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 환각이 필요했다는 것이었다. 자신의 것이 어딘가에 남아 있다는 환상이. 자신이 정말로 존재했다는 증거가.
“녹음 파일을 WAV로 출력해줄 수 있어요?”
세아가 다시 물었다.
“당연하지. 근데 왜?”
준호가 궁금해하는 것처럼 물었다.
세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왜인지 자신도 몰랐다. 다만, 필요했다. 자신의 목소리를 파일로 가지고 있는 것이. 내 것이 내 것이라는 증거를 종이나 계약서가 아니라, 음파의 기록으로 가지고 있는 것이.
하늘이가 세아의 팔을 잡았다. 부드럽게. 걱정하는 것처럼.
“너 뭐해? 갑자기 이상한데.”
하늘이가 속삭였다. 마치 비밀을 나누는 것처럼.
세아는 그녀를 봤다. 하늘이의 눈은 항상 정확했다. 세아가 무엇을 느끼고 있는지, 세아가 어디로 가려고 하는지를 읽어내는 눈.
“강리우가 저를 찾고 있어요.”
세아가 말했다. 갑자기.
하늘이가 손을 놨다. 마치 화상을 입은 것처럼.
“뭐?”
하늘이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위협적으로.
“경찰에 신고했다고 했어요. 실종자로.”
세아가 계속했다. “저는 그게… 어떤 의미인지 모르겠어요. 그게 사랑인지, 소유인지. 그냥 제 안에 있는 게 뭐든지, 그걸 다시 돌려받으려는 것 같아요.”
준호가 화면을 끄고 있었다. 불편한 것처럼. 이 대화가 자신의 영역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차린 것처럼.
“세아야.”
하늘이가 말했다. 매우 천천히. “너 지금 뭐 하려는 거야?”
“모르겠어요.”
세아가 솔직하게 대답했다.
“이 파일을 어디에 쓸 건데?”
하늘이가 물었다.
“증거로.”
세아가 말했다. 그리고 덧붙였다. “제가 존재했다는 증거로.”
하늘이는 한동안 말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천천히 자신의 팔을 풀었다. 마치 무언가를 놓아주는 것처럼. 마치 세아가 이미 어딘가 다른 곳에 있다는 걸 깨달은 것처럼.
밤 1시가 되었을 때, 세아는 편의점 앞의 버스 정류장에 서 있었다. USB 드라이브가 주머니에 있었다. 준호가 건네줬다. 직사각형의 검은색 플라스틱. 아주 작지만, 무거움을 느껴졌다.
“너 정말 괜찮아?”
하늘이가 차에서 내렸다. 아직도 우려하는 것처럼.
“네.”
세아가 말했다. 그리고 덧붙였다. “감사해요. 하늘이가.”
“감사? 이게 뭔 감사냐고. 너 뭔가 이상한데. 진짜. 평소 너처럼 안 보여.”
하늘이가 말했다.
“평소 저는 누구예요?”
세아가 물었다.
하늘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마도 그것도 몰랐을 것이다. 그 누구도 세아가 누구인지 정확하게 알지 못했다. 세아 자신도 모르는데.
편의점의 형광등 아래서, 세아는 자신의 손을 봤다. 여전히 떨리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 떨림이 두려움이 아니라 뭔가 다른 것처럼 느껴졌다. 결정. 또는 반란.
점장이 계산대 뒤에서 세아를 봤다. 밤 11시 정각. 그녀가 약속한 시간. 세아는 조끼를 입고 이름표를 달았다. “나세아”. 그것만으로 이름표가 완성되었다. 성과 이름. 하지만 그 아래에는 파일이 있었다. USB 드라이브 속의 파일. 자신의 목소리가 담긴 파일. 자신이 증명되는 파일.
점장이 뭔가를 말하려는 것처럼 입을 열었다. 하지만 세아의 눈을 만난 후 닫았다. 무언가를 느껴차린 것 같았다. 그 눈에 있는 어떤 강도를. 어떤 결심을.
“안녕하세요.”
세아가 인사했다. 그리고 카운터로 걸어갔다. 처음으로 자신의 움직임을 느끼면서. 자신의 몸이 정말로 자신의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밤 2시 30분. 편의점은 조용했다. 술 취한 사람 두 명이 들어왔다가 나갔다. 라면을 끓이는 사람이 있었다. 카운터 옆의 좌석에서. 세아는 그들을 관찰했다. 마치 영화를 보듯이. 마치 자신이 그들의 세계에 속하지 않은 것처럼.
휴대폰이 울렸다. 발신자: 도현.
세아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대신 화면을 봤다. 도현의 프로필 사진. 고등학생 때 찍은 사진. 이제는 더 커있을 것이다. 세아가 본 것도 벌써 3개월 전이었다. 아니, 더 오래됐을 수도 있었다. 시간의 감각이 이미 망가져 있었다.
문자가 들어왔다. 도현에게서.
“누나. 엄마가 자꾸 누나 얘기하고 있어. 엄마가 또 아파. 병원 가야 하는데 돈이 없대.”
세아는 그 문자를 읽고, 읽고, 또 읽었다. 마치 해석이 필요한 외국어인 것처럼. 하지만 한국어였다. 명확하고, 직설적이고, 무거웠다.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USB 드라이브를 주머니에서 꺼냈다. 검은색 플라스틱. 자신의 목소리가 담긴 것.
이것이 증거였다. 자신이 존재했다는 증거. 자신이 뭔가를 만들 수 있다는 증거. 자신이 선택할 수 있다는 증거.
하지만 그 증거가 도현의 엄마, 즉 세아의 어머니의 의료비가 될 수는 없었다.
그 순간, 편의점의 자동문이 열렸다. 세아는 고개를 들었다. 새벽 2시 45분에 누가 들어올까 궁금했다.
강리우였다.
검은색 코트. 수심 깊은 눈. 그리고 그 눈이 세아를 찾았을 때의 그 표정. 마치 죽은 사람이 살아났을 때의 표정처럼.
“세아.”
그가 말했다. 그것은 호출이었다. 마치 그녀가 물건인 것처럼. 마치 그녀가 잃어버린 것이고, 지금 찾은 것처럼.
세아는 움직이지 않았다. 카운터 뒤에서. 형광등 아래에서. 편의점 직원으로서.
“왜 연락이 없었어?”
강리우가 계산대 앞에 섰다. 다른 고객들처럼. 하지만 아무것도 들고 있지 않았다. 그는 상품을 사러 온 것이 아니었다.
“고객이세요?”
세아가 물었다. 직업의 톤으로. 거리감 있게.
강리우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마치 뭔가가 부러진 것처럼.
“나야. 리우야. 넌 누구를 기다리고 있어?”
그가 말했다. 목소리가 부서져 있었다. 마치 파손된 악기처럼.
“고객이라고 불러주세요.”
세아가 말했다.
강리우는 한 발 물러섰다. 마치 세아가 그를 밀어낸 것처럼. 실제로는 단어로 밀어낸 것이었지만, 그에게는 물리적인 충격처럼 느껴졌을 것이다.
“경찰에 신고했어. 실종자로. 너 몇 주 동안 어디 있었어?”
그가 물었다. 목소리가 점점 높아졌다. “내가 찾았어. 너 여기 있다는 거. 편의점에서 일하고 있다는 거. 왜 숨었어? 뭐가 두려워?”
세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USB 드라이브를 꺼냈다. 그리고 카운터 위에 놓았다.
“이건 뭐야?”
강리우가 물었다.
“제 목소리예요.”
세아가 말했다.
“목소리? 그게 뭐하는…”
강리우가 말을 완성하지 못했다.
“증거예요.”
세아가 말했다. “제가 존재했다는 증거. 제가 뭔가를 만들 수 있다는 증거. 제가 선택할 수 있다는 증거.”
강리우는 그 USB를 봤다. 검은색 플라스틱. 아주 작은 것. 하지만 세아의 눈은 그것이 아주 크다고 말하고 있었다.
“넌 내 것이야.”
강리우가 말했다. 갑자기. 마치 공식을 선언하는 것처럼. “넌 내가 구했고, 내가 만들었고, 내가 소유한 거야. 그 USB가 뭐든 상관없어.”
세아는 한 발 물러섰다. 카운터를 사이에 두고. 강리우는 한 발 나아왔다.
“넌 내 죄책감을 해소해줄 사람이야.”
강리우가 계속했다. 목소리가 점점 낮아지고 있었다. “내 친구가 죽었어. 베를린에서. 내가 그걸 만들었어. 내 손이 그걸 했어. 근데 넌 날 구했어. 넌 내게 다시 살아갈 이유를 줬어. 그런데 넌 떠나? 넌 내게서 떠나?”
세아는 그 말을 들으면서, 처음으로 강리우를 동정했다. 진심으로. 그는 자신을 사랑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을 필요했다. 그것도 자신이 아니라, 자신 안에 있는 것을 필요했다. 자신의 목소리, 자신의 음악, 자신의 능력을.
“고객님.”
세아가 말했다. 가장 전문적인 톤으로.
강리우가 계산대를 넘어갔다. 직원들만 들어갈 수 있는 공간으로. 세아는 뒤로 물러섰다. 냉장고 쪽으로. 추위가 그녀의 등을 향해 확산되었다.
“나한테 안 돼.”
강리우가 말했다. 손을 뻗었다. 세아의 팔을 잡으려고. “넌 나한테 살아가야 돼. 내 안에서만 살아가야 돼.”
세아는 그 순간, 편의점의 비상벨을 눌렀다. 그것은 작은 버튼이었다. 카운터 아래. 마치 총알처럼 작은. 하지만 그것이 누군가를 부르는 것이었다.
경찰이 도착했을 때는 5분이 걸렸다. 그 5분 동안, 강리우는 세아의 앞에서 울었다. 마치 아이처럼. 마치 자신이 방금 깨달은 것에 대해 울었다. 자신이 사랑이라고 부른 것이 실제로는 감옥이었다는 것을.
“넌 정말 나한테 없어.”
강리우가 울면서 말했다. “그게 뭐야? 넌 진짜 나한테 없어?”
세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USB 드라이브를 들었다. 경찰이 들어오자, 그것을 경찰 옆에 놓았다.
“이건 제 것이에요.”
세아가 말했다. 가장 명확한 톤으로.
새벽 4시. 경찰서의 조사실. 세아는 창밖을 봤다. 서울의 새벽은 검었다. 아무것도 안 보였다. 다만, 가로등의 빛만 있었다. 고립된 빛들. 서로를 비추지 못하는 빛들.
담당 경찰관이 들어왔다.
“나세아씨. 당신이 신고한 게 맞나요?”
경찰관이 물었다.
“네.”
세아가 대답했다.
“상대방은 협박이라고 주장했어요. 당신이 자신을 협박했다고. 그리고 자신의 물건을 훔쳤다고.”
경찰관이 말했다.
“저는 아무것도 훔친 게 없어요.”
세아가 말했다.
“그분이 말하길, 당신이 정신적으로 불안정하다고.”
경찰관이 계속했다. “당신이 그분 없이 살 수 없다고. 당신이 스스로를 해칠 수 있다고.”
세아는 그 말을 들으면서, 마치 자신을 보는 것 같았다. 거울을 통해. 아니, 왜곡된 거울을 통해. 자신이 강리우의 눈에는 어떻게 보이는지 알 수 있었다. 무능한 것으로. 의존적인 것으로. 구원받아야 하는 것으로.
“저는 정상이에요.”
세아가 말했다.
“우리가 결정할 거 아니에요. 일단, 당신 집에 가봐야겠어요. 당신이 정말로 그곳에 살고 있는지 확인해야 해요.”
경찰관이 말했다.
세아는 따라갔다. 경찰 차에. 합정동 고시원으로. 새벽 5시가 되고 있었다.
고시원의 문을 열었을 때, 세아는 한동안 움직이지 못했다. 자신의 방. 2주일 이상 안 온 방. 햇빛이 들어오고 있었다. 동쪽 창에서. 새벽의 황금빛.
책상 위에는 먼지가 앉아 있었다. 연필이 굴러다니고 있었다. 그리고 나무 판자로 만든 침대. 그 위에는 흰색 시트가 있었다. 무언가를 기다리는 것처럼.
경찰관이 주변을 둘러봤다.
“당신이 정말로 여기 살고 있네요.”
경찰관이 말했다. 마치 확인하듯.
“네.”
세아가 대답했다.
고시원 주인이 나타났다. 70대 할머니. 항상 세아를 무시했던 할머니.
“이 아이? 맞아, 이 아이가 여기 살고 있어. 근데 요즘 안 봤어. 어디 아파?”
할머니가 물었다.
“안 아파요.”
세아가 말했다.
경찰관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돌아갔다. 세아가 정말로 여기에 살고 있다는 증거를 얻었으니까.
경찰서에서 나올 때는 아침 7시였다. 태양이 떴다. 완전하게. 서울 하늘에.
세아는 GS25 앞에서 섰다. 자신의 직장. 자신의 형광등 아래로 돌아갈 차례였다. 점장은 이미 일을 시작하고 있었다.
“세아? 넌 밤 11시부터 일하는 거 아니었어?”
점장이 물었다.
“네. 미안합니다.”
세아가 말했다. 그리고 덧붙였다. “내일부터 나오겠습니다.”
“개인적인 일이 있었나?”
점장이 물었다.
세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주머니를 확인했다. USB 드라이브가 여전히 거기 있었다. 자신의 증거. 자신의 기록.
“네.”
세아가 마침내 말했다. “있었어요.”
합정역의 아침 햇빛이 세아의 얼굴을 비추고 있었다. 그리고 그 햇빛 안에서, 세아는 자신이 누구인지 조금 더 명확하게 알 수 있었다. 누군가의 구원 대상이 아닌. 누군가의 소유물이 아닌. 그저 자신의 목소리를 가진, 자신의 선택을 할 수 있는 사람으로.
화 마무리 (다음 화로 떡밥)
USB 드라이브 안의 파일은 여전히 세아의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그것을 누군가 들어줄 사람이 필요했다. 그것을 증명해줄 사람이 필요했다. 그리고 그 사람은 누구일까. 하늘이? 아니면 준호? 아니면 지금까지 세아가 외면해온 사람들 중 누군가?
도현의 문자가 아직도 읽혀지지 않은 채로 휴대폰에 남아 있었다. “엄마가 아파. 병원 가야 해.”
세아는 그 문자를 보면서, 자신의 선택 앞에 또 다른 선택이 기다리고 있다는 걸 알았다. 자신의 음악과 자신의 가족. 자신의 증거와 자신의 책임. 그 두 가지를 동시에 잡을 수 있을까. 아니면 하나를 포기해야 할까.
그 답은 아직도 불타고 있었다. 내부에서. 성냥불처럼. 꺼지기 직전까지.
# 세아, 증거와 선택 사이에서
## 제1장: 고시원의 침묵
천장에서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가 세아를 깨웠다. 똑, 똑, 똑. 마치 시계 초침처럼 규칙적이었다. 세아는 눈을 떠서 천장을 바라봤다. 어두운 갈색 얼룩이 여러 곳에 번져 있었다. 빗이 올 때마다 새로운 얼룩이 생겼고, 오래된 얼룩은 더 짙어졌다. 세아는 이 천장을 매일 본다. 자기 침대에 누워서. 천장을 보는 것 말고는 할 일이 없을 때.
고시원 방은 3평도 채 되지 않았다. 창문은 골목을 바라보고 있었고, 골목의 밤거리 조명이 새어 들어왔다. 낮에도 어두웠다. 햇빛은 건물과 건물 사이의 좁은 틈으로 들어오는데, 그나마도 오후 2시에서 3시 사이 잠깐일 뿐이었다.
세아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어제 밤 경찰서에 있었던 일들이 떠올랐다. 그들의 질문들, 그들의 의심의 눈초리, 그리고 그 모든 것 위에 드리워진 회색빛 같은 절망감. 세아의 팔뚝에는 여전히 멍이 남아 있었다. 어제 누군가가 팔을 잡을 때 생긴 상처였다. 아니, 어제가 아니었다. 어제는 경찰서였다. 그 전날이었나? 시간이 마치 젤리 같아서 흘러다니는 것 같았다.
세아가 일어나 앉으면서 침대가 삐그럭거렸다. 나무 판자로 만든 침대였다. 누군가 버린 침대를 주워다가 이 방에 뒀을 것 같았다. 그 위에는 흰색 시트가 펼쳐져 있었다. 하얀색도 이제는 회색이 되어 버렸다. 얼마나 오래된 것일까. 세아는 시트의 한 귀퉁이를 들었다. 냄새가 났다. 습기와 먼지와 시간이 섞인 냄새였다.
방의 한구석에는 옷이 쌓여 있었다. 입은 옷들이었다. 세아는 매일 같은 옷을 입었다. GS25 점장이 정해준 검은색 조끼와 흰색 셔츠. 그 옷들은 이제 기름때가 묻어 있었고, 냄새가 났다. 하지만 세아는 신경 쓰지 않았다. 누가 자신을 봐주겠는가. 고시원 할머니는 자신의 존재를 무시했고, 일반인들은 편의점 직원을 사람으로 보지 않았다. 그저 기계의 일부처럼. 돈을 받고 물건을 주는 기계처럼.
세아는 방 안을 천천히 둘러봤다. 책상은 없었다. 의자도 없었다. 침대와 짐, 그리고 벽뿐이었다. 벽에는 몇 장의 포스터가 붙어 있었다. 한 장은 피아노였다. 세아가 음악학원에서 떼어온 포스터였다. 다른 한 장은 어떤 밴드의 포스터였다. 세아는 그 포스터를 언제 붙였는지 기억하지 못했다. 기억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리고 또 다른 한 장이 있었다. 사진이었다. 세아가 열다섯 살일 때 찍은 사진. 어머니 옆에 서 있는 사진. 어머니의 손이 세아의 어깨를 감싸고 있었다. 그 사진 속의 세아는 웃고 있었다. 진짜 웃음이었을까, 아니면 카메라 때문의 웃음이었을까. 세아는 더 이상 그 차이를 구분할 수 없었다.
침대 위에 무언가 굴러다니고 있었다. 동전이었다. 몇 개의 동전이 침대 위를 정처 없이 굴러다니고 있었다. 세아는 한 손으로 동전들을 모아서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100원짜리 동전들이었다. 어제 경찰서에 가기 전에 레지에서 받은 거스름돈이었을 것이다.
천장의 물방울 소리가 계속되고 있었다. 똑, 똑, 똑. 세아는 그 소리를 듣다가 생각했다. 이 방에서 얼마나 더 있어야 할까.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할까. 대답은 없었다. 대답은 절대 없을 것 같았다.
세아가 침대에서 완전히 일어나 앉았다. 다리가 저렸다. 오래 누워 있었나 보다. 세아는 다리를 두드렸다. 핏기가 돌아오면서 따끔거리는 감각이 전해졌다. 살아 있다는 증거였다.
그때였다. 복도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여러 발소리였다. 세아의 몸이 경직되었다. 심장이 빨리 뛰기 시작했다. 발소리가 자신의 문 앞에서 멈췄다.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세아? 여기 있나?”
경찰관의 목소리였다. 어제와는 다른 경찰관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세아의 입장에서는 모두 같은 목소리였다. 의심의 목소리. 조사의 목소리.
“네.”
세아가 대답했다. 목소리가 떨렸다. 자신도 느낄 수 있을 정도로.
경찰관이 들어왔다. 경찰관은 방을 천천히 둘러봤다. 마치 어떤 범죄 현장을 조사하듯이. 세아는 경찰관의 얼굴을 읽으려고 했다. 무언가 새로운 것을 알아차렸을까. 무언가 위협적인 것을 찾았을까. 하지만 경찰관의 얼굴은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았다.
“당신이 정말로 여기 살고 있네요.”
경찰관이 마치 무언가를 확인하듯이 말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약간의 동정심이 섞여 있었다. 아, 그것도 세아가 겪어야 할 또 다른 감정이구나. 동정심. 자존심보다 더 상처가 되는 감정.
“네.”
세아가 대답했다. 더 이상 말할 것이 없었다.
경찰관은 침대를 보았다. 그리고 벽의 포스터들을 보았다. 그리고 방의 어둠을 보았다. 경찰관의 표정이 조금 변했다. 불쌍하다는 표정이었다.
그때 문이 다시 열렸다. 고시원의 할머니가 들어왔다. 70대 할머니였다. 항상 세아를 무시했던 할머니였다.
“이 아이? 맞아, 이 아이가 여기 살고 있어.”
할머니가 말했다. 경찰관을 보면서 마치 자신이 뭔가 중요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는 듯이.
“근데 요즘 안 봤어. 어디 아파?”
할머니가 물었다. 그 물음에는 진정한 관심이 없었다. 그것은 세아가 이미 알고 있었다. 할머니는 단지 경찰관에게 도움이 되고 싶었을 뿐이다. 자신이 무언가를 알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을 뿐이다.
“안 아파요.”
세아가 말했다. 목소리가 더 작아졌다. 이 방 안에서 자신의 목소리는 점점 더 작아지는 것 같았다. 마치 방 자체가 자신의 목소리를 빨아들이는 것처럼.
경찰관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할머니에게 몇 가지 질문을 더 했다. 할머니는 대답했다. “네, 이 아이가 맞아요. 월세는 제때 내고 있어요. 조용한 아이 같은데…” 할머니의 목소리가 점점 멀어졌다. 세아는 더 이상 듣지 않았다.
경찰관이 나갔다. 세아가 정말로 여기에 살고 있다는 증거를 얻었으니까. 주소 확인이 필요했을 것이다. 어떤 절차를 진행하기 위해서. 세아는 그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고 싶지 않았다.
할머니도 나갔다. 그리고 세아는 다시 혼자 남았다.
## 제2장: 아침 햇빛
경찰서에서 나올 때는 아침 7시였다. 세아는 그 시간을 정확히 알았다. 경찰서 출입문 위의 시계를 봤으니까. 손가락으로 가리킨 시계. 7시. 그리고 10분.
태양이 떴다. 완전하게. 서울 하늘에. 세아는 햇빛을 얼굴에 받았다. 따뜻했다. 하지만 따뜻함이 별로 좋지 않았다. 따뜻함은 너무 오랫동안 느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따뜻함이 낯설었다. 거의 불편할 정도로.
세아는 GS25 앞에서 섰다. 자신의 직장. 합정역 근처의 작은 편의점이었다. 자신의 형광등 아래로 돌아갈 차례였다. 그 형광등 아래에서 얼마나 많은 시간을 보냈을까. 세아는 센 적이 없었다. 세기 싫었다.
점장은 이미 일을 시작하고 있었다. 세아를 보고 깜짝 놀랐다.
“세아? 넌 밤 11시부터 일하는 거 아니었어?”
점장이 물었다. 점장의 목소리에는 짜증이 있었다. 늦은 것에 대한 짜증이었다. 세아는 이미 점장의 짜증 톤을 여러 번 들어본 적이 있었다. 항상 세아의 실수나 부족함에 대해서였다.
“네. 미안합니다.”
세아가 말했다. 그 말이 자동으로 나왔다. 자신이 살아온 방식이 이것이었다. 미안해하는 것. 그리고 자신의 잘못이 아닌 것까지도 자신의 탓으로 돌리는 것.
“내일부터 나오겠습니다.”
세아가 덧붙였다. 하지만 내일이 올 것인지, 그리고 자신이 정말 나올 수 있을지에 대한 확신은 없었다.
점장이 세아를 자세히 봤다. 세아의 얼굴을 보고, 세아의 옷을 보고, 세아의 손을 봤다.
“개인적인 일이 있었나?”
점장이 물었다. 그 질문에는 진정한 관심이 아니라, 일단 상황을 파악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세아는 그것을 알았다. 점장은 세아를 사람으로 보지 않았다. 단지 자신의 편의점을 돌리는 데 필요한 노동력으로 봤을 뿐이다.
세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주머니를 확인했다. USB 드라이브가 여전히 거기 있었다. 검은색의 작은 USB였다. 세아의 증거. 세아의 기록. 이것이 없으면 자신은 아무것도 증명할 수 없었다.
“네.”
세아가 마침내 말했다.
“있었어요.”
세아의 목소리가 조금 더 커졌다. 아주 조금만. 마치 자신이 뭔가를 발견했을 때의 목소리처럼. 희미하지만 확실한 그런 목소리.
점장은 세아의 답변에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그리고 세아는 점장 뒤의 유니폼을 입고 일을 시작했다.
합정역의 아침 햇빛이 세아의 얼굴을 비추고 있었다. 편의점의 유리문을 통해서. GS25의 파란 로고가 세아의 얼굴에 그림자를 만들었다. 그 그림자 안에서, 세아는 자신이 누구인지 조금 더 명확하게 알 수 있었다.
누군가의 구원 대상이 아닌. 누군가의 소유물이 아닌. 그저 자신의 목소리를 가진, 자신의 선택을 할 수 있는 사람으로.
하지만 그 깨달음도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손님이 들어왔다. 세아는 자동으로 고개를 들었다.
“어서오세요.”
기계적인 목소리로.
## 제3장: 무게
일이 끝난 것은 오전 10시였다. 세아는 3시간을 일했다. 침대에서 나온 후 경찰서에 있었던 시간을 제외하고. 세아의 몸은 피곤했다. 하지만 마음은 더 피곤했다.
점장은 세아에게 돈을 줬다. 어제 밤에 못한 일에 대한 손해배상 같은 것은 없었다. 단지 일한 만큼만. 그것이 세아의 시급이었다.
“조심해서 가.”
점장이 말했다. 동정의 말투였다. 세아는 그 동정이 더 무거웠다. 미안하다는 말보다. 죄송하다는 말보다.
세아는 편의점을 나왔다. 아침 햇빛이 더 강해졌다. 햇빛이 세아의 눈을 찔렀다. 세아는 눈을 좁혔다. 마치 무언가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듯이.
세아는 이제 어디로 가야 할까. 집으로? 고시원으로? 아니면 다른 어딘가로? 세아는 서서히 걸었다. 길을 정하지 않은 채로. 발이 가는 대로. 마치 자신의 몸이 자신의 의지와는 별개로 움직이는 것처럼.
합정역의 거리는 아침이었다. 사람들이 많았다. 직장으로 가는 사람들. 학교로 가는 학생들. 모두가 어딘가로 가고 있었다. 모두가 자신의 목적지를 알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세아는 몰랐다. 자신이 어디로 가야 하는지. 그리고 왜 가야 하는지.
세아는 거리의 한구석에 앉았다. 어떤 건물의 입구 앞이었다. 사람들은 세아를 지나갔다. 아무도 세아를 보지 않았다. 아무도 세아에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 세아는 공기처럼 투명했다.
세아의 주머니에서 휴대폰이 울었다. 문자였다. 도현에게서. 세아는 메시지를 읽었다.
“엄마가 아파. 병원 가야 해.”
세아의 손이 떨렸다. 휴대폰이 손에서 빠질 뻔했다. 도현. 세아의 아들. 다섯 살의 도현.
세아는 일어났다. 그리고 다시 걸었다. 이번에는 방향이 있었다. 종로구의 아파트. 도현과 어머니가 있는 곳으로.
## 제4장: 선택의 분기점
지하철에 탈 때, 세아는 자신의 주머니에 돈이 거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오늘 일한 돈은 고시원 월세의 일부로 써야 했다. 그리고 음식비도 필요했다. 세아는 교통카드를 꺼냈다. 여기에 남은 돈이 얼마나 있을까.
지하철 안에서, 세아는 거울처럼 작용하는 유리창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봤다. 누가 봐도 피곤해 보였다. 눈 아래의 다크서클, 창백한 피부, 그리고 어깨가 구부러진 모습. 세아는 자신의 모습을 인식했다. 그리고 외면했다.
종로구의 아파트에 도착했을 때는 오전 11시였다. 세아는 계단을 뛰어올랐다. 가슴이 철렁했다. 어머니가 아프다니. 또 다른 문제. 또 다른 책임. 또 다른 무게.
세아는 아파트 문을 열었다. 열쇠는 여전히 자신이 가지고 있었다.
“도현?”
세아가 불렀다.
“엄마!”
도현이 나타났다. 다섯 살의 도현. 세아가 지난 3개월간 제대로 본 적이 없었던 아들.
도현은 세아에게 달려왔다. 세아는 도현을 안았다. 도현의 몸의 무게가 느껴졌다. 따뜻함이 느껴졌다. 그리고 책임감이 느껴졌다.
“할머니는?”
세아가 물었다.
“침실에 있어. 배 아프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