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아닌 것을 위해 불탄 소녀 – 제89화: 불이 꺼지는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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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89화: 불이 꺼지는 시간

GS25의 자동문이 열렸을 때, 세아의 심장이 멈췄다. 아니, 정확히는 한 박자 느려졌다. 그 느린 박자 안에 세상이 들어갔다. 형광등의 하얀 빛, 냉장고의 윙윙거리는 소음, 그리고 계산대 뒤의 점장 이형준의 얼굴.

그 얼굴은 놀라움과 뭔가 다른 감정이 뒤섞여 있었다. 세아를 보는 것만으로도 뭔가를 깨달았다는 듯한.

“나세아?”

점장의 목소리가 낮았다. 질문이라기보다는 확인에 가까웠다. 마치 죽은 사람을 보는 것 같은 톤으로.

“안녕하세요.”

세아가 말했다. 목소리가 더 작아졌다. 편의점에 들어서는 순간, 세아는 다시 그 세아가 되었다. 검은 조끼를 입은 그 세아. 밤 10시부터 새벽 6시까지 여기 서 있는 그 세아. 이름표를 달고 다니는 그 세아.

“야, 넌 어디 있었어? 한 달을 안 나왔네. 연락도 없고.”

점장이 계산대에서 일어섰다. 그는 50대 초반의 남자였다. 담배를 많이 피웠고, 커피를 많이 마셨고, 밤새 서 있으면서 발이 부었다. 세아는 그를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그의 일과, 그의 한숨, 그의 피로.

하늘이가 문 옆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팔짱을 끼고, 담배를 물고, 마치 자신이 이곳의 소유자인 것처럼 당당하게.

“개인적인 일이 있었어요. 죄송합니다.”

세아가 말했다. 그것은 진실의 일부였다. 모든 것이 개인적이었다. 강리우도, 제주도, 비행기도, 자신의 사라지는 목소리도.

“개인적인 일? 니가?”

점장이 웃음을 참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것은 웃음이 아니라 한숨에 가까웠다.

“네. 가족 일이었어요.”

거짓이었다. 하지만 필요한 거짓이었다. 세아는 이제 거짓말을 할 줄 알았다. 필요할 때. 살아남기 위해. 자신을 지키기 위해.

“가족? 엄마? 형?”

“아뇨. 개인적인.”

점장이 한 발 물러섰다. 세아의 얼굴을 더 자세히 보려고 하는 것처럼. 마치 뭔가 숨겨진 것을 찾아내려고 하는 것처럼.

“너… 정신은 괜찮아? 얼굴색이 좀…”

“괜찮습니다.”

세아가 말했다. 그것도 거짓이었다. 거짓과 진실이 섞여서, 이제는 뭐가 뭔지 모르겠었다. 자신의 몸도, 자신의 목소리도, 자신의 결정도. 모든 것이 누군가 다른 사람의 것처럼 느껴졌다.

“암튼, 일이 있어. 알바 생을 못 찾았거든. 넌 밤 11시부터 새벽 6시까지 할 수 있어?”

점장이 물었다. 거의 부탁에 가까운 톤으로.

“네. 가능합니다.”

세아가 말했다. 하늘이가 옆에서 한숨을 쉬었지만, 세아는 그것을 무시했다.

“그래. 내일부터 나와. 월급은 최저임금에 야간수당. 넌 이전에 받던 대로.”

점장이 다시 앉았다. 계산대 뒤에서, 다시 그 자리로 돌아갔다. 마치 세아가 지금 이곳에 없는 것처럼.

“알겠습니다.”

세아가 말했다. 그리고 돌아섰다. 문을 향해. 하늘이를 향해.

차에 탄 후, 한동안 아무도 말을 하지 않았다. 하늘이는 담배를 피웠고, 세아는 창밖을 봤다. 합정역의 밤. 토요일 밤. 젊은 사람들이 홍대로 가는 길. 술취한 목소리들이 거리를 채우고 있었다.

“너 진짜 그 일을 할 거야? 밤 11시부터 아침 6시까지?”

하늘이가 물었다. 신호등을 기다리면서.

“네.”

“근데 너 음악 스튜디오는? 작곡은? 그게 넌 꿈이 아니었어?”

하늘이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화난 것이 아니라, 답답한 것 같았다.

“음악은… 나중에 할 수 있어요.”

세아가 말했다. 그것은 거짓이었다. 음악은 나중이 없었다. 음악은 지금, 이 순간이었다. 아니면 영원히 없었다. 세아는 그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말할 수 없었다.

“나중? 야, 넌 지금 24살이야. 너 모를 수도 있지만, 이 나이가 마지막이야. 음악을 시작할 수 있는 마지막 나이. 넘으면 안 돼. 나이가.”

하늘이가 말했다. 손을 놨다. 악셀에서. 신호등이 빨간색이었다. 길게 기다려야 하는 신호.

“알아요.”

세아가 말했다. 그리고 덧붙였다.

“근데 돈이 없어요.”

“돈? 나한테 빌려. 내가 줄 수 있어.”

하늘이가 말했다. 간단하게. 마치 당연한 것처럼.

“뭔가를 빚지면 안 돼요.”

세아가 말했다. 그것은 진실이었다. 이미 너무 많은 것을 빚고 있었다. 강리우에게, 어머니에게, 도현에게. 그리고 자신의 목소리에게도. 자신의 음악에게도.

“그럼 강리우 그 새끼한테는 뭐 빌려 줄 거야? 왜 나한테는 안 빌려?”

하늘이가 물었다. 시뻘겋게 화난 톤으로.

세아가 대답하지 않았다. 답할 말이 없었다. 하늘이는 맞았다. 하늘이는 항상 맞았다. 세아가 알고 있는 가장 정확한 사람. 그런데 왜 세아는 그 정확함을 피했을까. 그 정확한 말들이 자신을 너무 깊게 찌르기 때문일까.

신호등이 파란색으로 바뀌었다. 차가 다시 움직였다.

“너 강리우 그 새끼가 경찰에 실종신고 했다는 거 알아?”

하늘이가 물었다. 신호등을 보면서.

“알았어요.”

“그럼 그 사람이 그런 짓을 할 정도로, 넌 너무 소중한 사람이야. 이 사람에게는. 왜 다른 사람한테는 그렇게 거리를 두지?”

하늘이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이제는 화난 것이 아니라, 정말로 이해할 수 없다는 톤으로.

세아의 눈이 뜨거워졌다. 하지만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눈물을 흘릴 수 있는 부분이 이미 말라 있었나보다.

“강리우는… 위험해요. 나한테 좋은 사람이 아니야.”

세아가 말했다. 그것은 진실이었다.

“그래. 그 사람 위험한 거 알아. 그런데 너는? 넌 왜 위험하지 않아? 넌 왜 내가 믿어도 돼?”

하늘이가 물었다. 가장 중요한 질문을.

세아가 대답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것도 답이 없었기 때문이다. 세아는 하늘이를 믿어도 되는가? 그렇게 물으면, 그 답은 ‘아뇨’였다. 세아는 아무도 믿어서는 안 되었다. 자신도 포함해서. 자신을 믿어서도 안 되었다.

차는 계속 움직였다. 강남에서 강북으로. 밤의 서울을 가로질러.

“일단 밥을 먹자. 네가 너무 말랐어.”

하늘이가 결국 말했다. 화를 삭혀가면서. 그것은 하늘이의 방식이었다. 말이 통하지 않을 때, 밥을 먹는 것. 다시 시작하는 것.

세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말 없이.


강북 쪽의 작은 국밥집. 이름은 ‘할머니국밥’이었다. 서울 곳곳에 있는 그런 집. 늦은 밤 술 취한 사람들과 밤샘하는 사람들이 가는 그런 집.

세아와 하늘이가 앉을 때, 밤은 이미 10시 45분이었다. 새벽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우육국밥 하나, 소막국밥 하나. 계란말이도.”

하늘이가 주문했다. 큰 목소리로. 마치 누구나 자신의 선택에 따라가야 한다는 듯이.

“음식이 안 내려가요.”

세아가 작게 말했다.

“그럼 국물만 먹어. 국물이라도 뭔가가 되어야 해. 너 지금 유령 같아.”

하늘이가 말했다. 담배를 피우면서. 음식점 안에서. 실은 금지인데, 점장이 하늘이를 보고 뭐라 하지 않았다. 하늘이는 그런 사람이었다. 규칙이 자신에게 적용되지 않는 사람. 아니, 자신이 규칙을 만드는 사람.

음식이 나왔다. 김이 피어오르는 국밥. 세아는 숟가락을 들었다. 손이 떨렸다. 세 번. 딸깍, 딸깍, 딸깍. 그 음성이 자신의 것이 아닌 것처럼.

“너 손 떨려. 왜?”

하늘이가 물었다.

“모르겠어요.”

세아가 말했다. 그리고 국물을 한 숟가락 마셨다. 따뜻했다. 어머니의 밥처럼.

“너 강리우 그 새끼 때문에 그런 거야? 그놈이 뭘 한 거야? 진짜로.”

하늘이가 물었다. 더 깊게.

세아가 국물을 다시 마셨다. 대답하지 않고.

“말해 봐. 뭘 한 거야?”

“모르겠어요.”

“뭘 몰라?”

“뭔가를 한 건 알아요. 근데 그게 뭐였는지는… 몰라요.”

세아가 말했다. 그것은 진실이었다. 강리우가 무엇을 했는지 세아는 정확하게 모르고 있었다. 그것이 사랑이었는지, 통제였는지, 아니면 그 둘의 혼합인지. 그것이 자신을 지켜주는 것이었는지, 아니면 자신을 가두는 것이었는지.

“그 사람이 너한테 뭔가를 했어? 신체적으로?”

하늘이가 물었다. 목소리가 낮아졌다. 더 진지해졌다.

“아뇨.”

세아가 말했다. 그것도 거짓이었다. 신체적인 것도 있었다. 손을 잡는 것, 어깨에 얹는 것, 얼굴을 그의 가슴에 묻는 것. 그 모든 것이 신체적이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이 상처였다.

“그럼 정신적으로? 말로?”

“…네.”

세아가 말했다. 처음으로 진실을 말했다.

하늘이가 한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국밥도 먹지 않고. 담배도 피우지 않고. 그냥 세아를 봤다. 긴 침묵 속에서.

“너 지금 뭐가 필요해?”

하늘이가 결국 물었다.

“모르겠어요.”

세아가 말했다.

“잠? 밥? 음악? 뭐?”

“…음악 같아요.”

세아가 말했다. 처음으로 그것을 입 밖에 냈다. 음악. 자신의 가장 깊은 욕망.

하늘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마치 그것을 처음 들은 것처럼. 아니, 처음 들은 것이었다. 이렇게 직접 세아 입에서 나온 것은.

“그럼 음악을 해. 편의점 일하면서 음악을 해. 시간은 있어. 새벽에 곡을 쓰던 넌 어디 갔어?”

“새벽에 쓸 에너지가…”

“없으면 만들어. 에너지는 만드는 거야. 밥을 먹으니까 나오는 게 아니라, 필요하니까 나오는 거야.”

하늘이가 말했다. 정확하게. 그리고 자신의 국밥을 먹기 시작했다. 큰 숟가락으로. 거침없이.

세아도 먹기 시작했다. 천천히. 하지만 먹기 시작했다.


밤 11시 30분. 세아는 GS25로 돌아갔다. 하늘이가 데려가지 않았다. 자신이 걸어갔다. 강냉이 아스팔트 위에서. 밤의 바람이 자신의 얼굴을 스쳤다.

점장은 벌써 나가고 없었다. 세아가 와야 할 시간까지 기다릴 필요는 없었다. 세아는 조끼를 입고, 이름표를 달았다. 나세아. 그 이름이 자신의 것인지 누군가 다른 사람의 것인지 구분이 안 가지만, 일단 그것을 달았다.

형광등 아래에서. 밤 11시 30분의 편의점 안에서. 세아는 다시 시작했다.

첫 손님은 밤 11시 45분에 들어왔다. 중년 남자. 담배와 라면을 샀다. 세아는 계산을 했다. 그의 눈도 마주치지 않았다. 아무도 자신을 보지 않는 것처럼.

밤은 깊어가고 있었다.

새벽 1시. 취한 여자 대학생들이 들어왔다. 웃고, 떠들고, 떠났다. 세아는 계산했다.

새벽 2시. 조용했다. 거리도 조용했다. 오직 형광등의 윙윙거리는 소음만 있었다.

새벽 2시 45분. 세아는 계산대 뒤에서, 그 형광등들을 봤다. 밝은 불빛들이. 그리고 생각했다. 이 불빛들이 꺼지면 어떻게 될까. 이 밝음이 없어지면 무엇이 남을까.

그 순간, 휴대전화가 울렸다. 세아의 것이 아니라, 계산대 아래의 점장의 전화.

자동응답으로 설정되어 있었다.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이건 JYA 엔터테인먼트 강리우 부사장실입니다. 나세아씨를 찾고 있습니다. 혹시 나세아씨가 거기 있으십니까?”

세아의 몸이 얼었다. 강리우. 그 이름. 그 목소리. 아니, 그의 목소리는 아니었다. 그의 비서의 목소리였다.

세아는 움직이지 않았다.

“혹시 나세아씨가 거기서 일하고 있다면, 강리우 부사장이 직접 만나고 싶다고 합니다. 긴급한 일입니다.”

그 목소리는 계속되었다.

세아는 그 목소리를 들으면서, 자신이 무언가를 결정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제 도망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강리우는 찾았다. 그리고 자신을 계속 추적할 것이다.

세아의 손가락이 움직였다. 세 번. 딸깍, 딸깍, 딸깍.

그리고 세아는 점장의 전화를 들었다. 한 손으로. 그리고 말했다.

“네. 저 나세아입니다.”

목소리가 작았지만, 이제는 떨리지 않았다. 이미 모든 것이 끝났기 때문이었다. 도망은 끝. 이제는 돌아서서 마주할 시간이 되었다.

전화 너머의 비서가 놀란 목소리로 반복했다.

“나세아씨께서 응답하셨습니다. 부사장님.”

그리고 목소리가 바뀌었다. 더 낮은 목소리로. 더 따뜻한 목소리로. 강리우의 목소리로.

“세아. 넌 어디 있어?”

그 목소리를 들은 순간, 세아는 알았다. 자신이 이미 불타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이 불은 아무것도 남기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편의점에 있어요.”

세아가 말했다.

“나 지금 가. 기다려.”

“…”

“기다려. 제발.”

강리우의 목소리가 부서지고 있었다.

세아는 전화를 끝냈다. 그리고 다시 형광등을 봤다. 밝은 불빛들이. 곧 꺼질 불빛들.

새벽 2시 47분. 세아는 편의점 계산대 뒤에서, 자신의 불을 기다리고 있었다.

# 밤의 불빛

## 첫 번째 손님

밤 11시 45분.

편의점의 자동문이 열렸을 때, 세아는 계산대 뒤에서 스마트폰을 내려놨다. 화면에 떠 있던 채용 공고 페이지가 어두워졌다. 최저임금. 주 5일 근무. 숙식 제공 없음. 그런 것들이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이미 여기서 일한 지 3개월이 되었으니까.

들어온 것은 중년 남자였다. 얼굴이 거칠었고, 눈가에 피로가 깊게 패여 있었다. 흡연자의 냄새가 진동했다—담배와 오래된 커피, 그리고 뭔가 달콤한 향수 냄새가 섞여 있었다. 세아는 그의 발걸음 소리로 그가 어디를 향하는지 알 수 있었다. 편의점의 어두운 복도를 따라 담배 코너로. 그 다음 라면 코너로.

남자는 얼굴을 들지 않았다. 계산대로 다가오면서도 눈을 떨어뜨렸다.

“담배 하나, 라면 하나네요.”

세아의 목소리는 기계음처럼 나왔다. 이런 목소리를 내는 데 3개월이 걸렸다. 감정을 빼낸 목소리. 손님도 자신을 보지 않고, 자신도 손님을 보지 않는 그런 목소리. 마치 투명인간처럼 일하는 것이 이 일의 핵심이었다. 남자는 돈을 내밀었다. 세아는 거스름돈을 건넸다. 그들의 손가락이 닿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남자는 떠났다. 자동문이 닫혔다. 형광등의 윙윙거리는 소음이 다시 세상을 지배했다.

세아는 다시 계산대에 기대앉았다. 휴대폰을 집어들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 채용 공고들은 모두 거짓이었다. 경력이 있다고 해도, 이력서를 내면 늘 같은 일이 기다렸다. 편의점. 카페. 식당 주방. 어두운 곳에서 눈에 띄지 않는 일들.

*이 불빛들이 나를 지켜주는 걸까, 아니면 나를 가두는 걸까.*

세아는 천장의 형광등들을 바라봤다. 네 개의 긴 불빛들이 차갑게 계산대 위를 비추고 있었다. 그 불빛 아래에서라면 적어도 아무도 자신을 정확히 볼 수 없었다. 너무 밝아서 오히려 구체적인 얼굴이 희미해졌다. 모두가 편의점 직원으로만 보았다. 이름표 없이.

## 깊어가는 밤

새벽 1시.

자동문이 다시 열렸다. 이번에는 여대생들이었다. 셋이었다. 아니, 넷이었나. 세아는 정확히 세지 않았다. 그들은 웃고 있었다—크고, 날카롭고, 취한 웃음이었다. 한 명은 다른 친구의 팔을 감싸고 있었고, 또 다른 친구는 편의점 진열대를 따라 춤을 추고 있었다.

“야, 여기 라면 있어? 라면!”

세아는 손가락으로 방향을 가리켰다. 말을 하지 않았다. 말할 필요가 없었다. 이들은 자신을 사람으로 보지 않았다. 공기처럼 투명한 존재로 보았다. 하나의 여자 친구가 계산대 쪽으로 왔다. 손에는 라면 3개, 떡볶이, 치킨 너겟, 음료수 몇 개.

“이거 다 먹어야 해. 우리 세은이 기분 풀어야 되니까.”

그 여자 친구는 자신의 친구들을 향해 외쳤다. 세아는 계산을 시작했다. 손가락이 기계처럼 움직였다. 버튼을 누르고, 금액을 읽고, 거스름돈을 세는 것. 반복의 마법이었다. 반복하다 보면 시간이 빨리 지나간다. 반복하다 보면 자신이 누구인지 잊어버린다.

“얘, 잠깐. 아, 근데 너 학생이야?”

세아가 얼굴을 들었다. 그 여자 친구는 자신을 보고 있었다. 처음으로, 실제로 보고 있었다.

“네.”

거짓이었다. 세아는 학생이 아니었다. 2년 전에 학교를 그만두었다. 하지만 거짓이 더 쉬웠다.

“와, 진짜? 뭐 하는 학생이야?”

“그냥… 대학교.”

“어디?”

세아는 입을 다물었다. 대답할 수 없었다. 대답하면 거짓이 너무 구체적이 되어버릴 것 같았다. 그 여자 친구는 기다렸지만, 세아가 입을 열지 않자 웃음을 터뜨렸다.

“아, 뭐 어쨌든 너도 열심히 해야지. 우리도 힘들잖아. 화이팅!”

여자 친구가 엄지를 들었다. 세아도 웃음을 지었다. 기계적인 웃음이었지만, 그것으로 충분했다. 그들은 떠났다. 웃음과 함께. 자동문이 닫혔을 때, 그 웃음소리는 이미 거리에 흩어지고 있었다.

세아는 계산대를 닦았다. 사실 닦을 것도 없었다. 하지만 닦아야 했다. 손을 움직여야 했다. 움직이지 않으면 생각하게 되기 때문이었다.

*그들처럼 살고 싶다. 누군가를 팔로 감싸고 웃을 수 있는 사람들처럼. 하지만 나는… 나는 누구를 안을 수 있을까.*

## 새벽의 고요

새벽 2시.

편의점은 조용했다. 너무 조용해서 무섭기도 했다. 바깥 거리도 마찬가지였다. 가로등만 희미하게 켜져 있고, 아무 자동차도 지나가지 않았다. 이 시간대 이 거리는 세아의 것이었다. 누구도 자신을 방해하지 않는 공간. 누구도 자신을 추적할 수 없는 시간.

세아는 계산대 뒤의 작은 의자에 앉았다. 편의점 점장이 사용하는 의자였지만, 이 시간에는 점장이 없었다. 밤 11시부터 새벽 7시까지는 세아 혼자였다. 혼자라는 것이 처음에는 무서웠다. 하지만 지금은 자유로웠다.

세아는 천장을 바라봤다. 네 개의 형광등이 여전히 빛나고 있었다. 그 빛은 어디에서 오는가. 전선을 통해 먼 곳의 발전소에서. 누군가가 켜놓은 이 불빛은 며칠이고 꺼지지 않았다. 새벽 2시든 낮 12시든, 항상 같은 밝기로.

*만약 이 불빛이 꺼진다면?*

세아는 생각에 빠졌다. 형광등이 꺼진다면, 이 편의점은 어떻게 될까. 검은색으로 물들어갈 것이다. 그럼 자신은? 자신도 검은색에 묻혀 사라질까. 아니면 비로소 진짜 나타날까. 불빛이 없으면 누구도 자신을 보지 못할 테니까.

“세아.”

세아는 자신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나세아. 본명이었다. 하지만 누구도 이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 편의점 사람들은 “거기 직원” 또는 “그 여자”라고 부를 뿐. 가족들도… 가족들도 오래전부터 자신을 부르지 않았다.

형광등의 윙윙거리는 소음이 더 크게 들렸다. 마치 그 불빛이 계속 울부짖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여기 있다. 나는 계속 켜져 있다. 내 빛을 외면하지 말아라.* 하지만 세아는 외면했다. 외면하지 않으면 자신이 무너질 것 같았다.

새벽 2시 45분.

세아는 계산대에서 일어났다. 편의점을 한 바퀴 돌았다. 라면 코너, 음료수 코너, 간식 코너, 냉동식품 코너. 모든 것이 제 자리에 있었다. 누군가는 이것들을 정렬한 사람이 있을 것이다. 아마도 세아 자신이었을 것이다. 지난 몇 일간, 지난 몇 주간, 지난 몇 개월간 반복된 작업들.

세아는 다시 계산대로 돌아왔다. 그리고 다시 천장을 봤다.

*이 불빛들이 꺼지면 무엇이 남을까. 어둠? 아니면… 무엇이든 남지 않을까. 정말로 아무것도.*

형광등은 계속 울었다. 윙윙. 윙윙.

## 전화

새벽 2시 47분.

세아는 계산대 아래의 서랍을 열었다. 점장의 전화기가 있었다. 구식의 검은색 전화였다. 이 전화기는 거의 울지 않았다. 배달 주문이나 본사의 통보 정도가 전부였다. 세아는 이 전화기가 가장 싫었다. 울린다는 것 자체가 이 조용한 세계를 파괴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 전화기가 울렸다.

윙윙 윙윙. 형광등 소리와는 다른, 더 날카로운 울음이었다.

세아는 놀라서 손을 뒤로 물렸다. 전화기는 계속 울었다. 윙윙 윙윙. 누군가는 계속 자신을 찾고 있었다. 세아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점장도 없고, 자신도 받을 이유가 없었다. 형광등이 울고 있고, 전화기도 울고 있었다. 이 밤은 너무 시끄러웠다.

그 순간, 전화기의 울음이 멈췄다. 대신 자동응답이 켜졌다. 스피커에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이건 JYA 엔터테인먼트 강리우 부사장실입니다.”

세아의 몸이 경직되었다. JYA. 그 이름만으로도 시간이 멈춰 버린 것 같았다.

“나세아씨를 찾고 있습니다. 혹시 나세아씨가 거기 있으십니까?”

나세아. 자신의 본명이었다. 누군가가 자신을 찾고 있었다. 그 누군가는… 강리우.

세아는 움직이지 않았다. 마치 동물이 포식자를 피하듯 숨을 죽였다. 형광등의 윙윙거리는 소음만 들렸다. 그것과 자동응답의 목소리. 차가운 여성의 목소리였다.

“혹시 나세아씨가 거기서 일하고 있다면, 강리우 부사장이 직접 만나고 싶다고 합니다. 긴급한 일입니다.”

긴급한 일. 세아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 말은 자신이 더 이상 숨을 수 없다는 뜻이었다. 강리우가 자신을 찾았다. 그 거대한 엔터테인먼트 회사의 부사장이, 자신을 찾았다. 어떻게 찾았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이미 찾았다는 것이 전부였다.

세아는 천천히 손을 움직였다.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한 번. 두 번. 세 번. 딸깍. 딸깍. 딸깍.

손가락이 자신을 따르고 있었다. 마치 다른 누군가가 자신의 몸을 조종하고 있는 것 같았다.

“나세아씨. 혹은 그곳의 담당자께서 이 메시지를 들으신다면, 가능한 한 빨리 연락 주시기 바랍니다.”

세아는 그 목소리를 들으면서 깨달았다. 자신이 더 이상 도망칠 수 없다는 것을. 2년 전 그 밤, 자신이 선택한 것들이 모두 실패했다는 것을. 새로운 이름, 새로운 직업, 새로운 삶. 모든 것이 환상이었다.

세아는 천천히 계산대 아래의 서랍에서 전화기를 꺼냈다. 손이 떨렸다. 아니, 떨리지 않았다. 오히려 너무 차갑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치 누군가 다른 사람의 손을 사용하고 있는 것 같았다.

손가락이 전화기의 수화기를 집었다.

“네.”

목소리가 나왔다. 누구의 목소리인지 모르겠지만, 자신의 입에서 나온 것은 확실했다.

“저 나세아입니다.”

침묵이 흐르고 있었다. 자동응답은 이미 끝났다. 이제 실제 사람이 있을 것이다. 비서일 것이다. 아니면…

“나세아씨께서 응답하셨습니다. 부사장님.”

비서의 목소리였다. 그리고 그 순간, 목소리가 바뀌었다. 더 낮은 음역대로. 더 따뜻한 톤으로. 세아는 그 목소리를 알았다. 잊으려고 얼마나 많이 노력했는데도, 잊을 수 없는 목소리였다.

“세아. 넌 어디 있어?”

강리우의 목소리였다.

## 불타는 밤

세아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하지만 울지 않았다. 울 에너지도 없었다. 너무 오래 도망쳤다. 너무 오래 숨었다. 이제는 모든 것이 타버렸다.

“편의점에 있어요.”

세아의 목소리는 작았지만 흔들리지 않았다. 이미 모든 것이 끝났기 때문이었다. 도망은 끝이었다. 더 이상 달아날 곳이 없었다.

“아, 세아. 정말이야? 정말 네가 맞아?”

강리우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세아는 처음 들었다. 그 사람의 목소리가 떨리는 것을. 강리우는 항상 확신에 찬 목소리였다. 절대 주저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의 목소리는 부서질 것처럼 갈라져 있었다.

“네.”

한 글자로 답했다.

“나 지금 가. 기다려. 제발.”

강리우의 목소리가 더 높아졌다. 거의 울먹이는 수준이었다.

“…어디 편의점이야?”

세아는 주소를 말했다. 자신이 지난 3개월간 일했던 그곳의 정확한 주소를.

“알았어. 나 지금 출발할 거야. 한 20분이면 될 것 같아. 기다려. 제발… 다시 가지 말고.”

전화가 끝났다. 강리우는 기다리지 않고 끊었다. 아마도 이미 움직이고 있을 것이다. 자신의 비서에게 명령을 내리고, 자동차를 불러내고, 이 편의점을 향해 달려올 것이다.

세아는 전화기를 내려놨다. 손이 더 이상 떨리지 않았다. 마치 자신의 감정이 모두 타버린 것처럼.

세아는 다시 천장의 형광등을 봤다. 네 개의 밝은 불빛들. 곧 꺼질 불빛들이 아니었다. 이 불빛들은 항상 켜져 있을 것이다. 새벽 3시에도, 새벽 4시에도, 새벽 5시에도. 아무도 이 불빛을 끄지 않을 것이다.

*이 불빛들이 나를 지켜줬을까, 아니면 나를 가둬뒀을까.*

세아는 더 이상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생각은 자신을 파괴할 뿐이었다.

새벽 2시 47분. 세아는 편의점 계산대 뒤에 서 있었다. 형광등의 밝은 불빛 아래에서. 자신의 불을 기다리고 있었다.

얼마나 기다렸을까. 10분이었나, 20분이었나. 시간은 의미를 잃었다. 세아는 계산대를 닦았다. 이미 닦은 곳을 또 닦았다. 움직여야 했다. 움직이지 않으면 자신이 무너질 것 같았다.

그 순간, 검은색 고급 자동차가 편의점 앞에 멈췄다. 창문이 내려갔다. 강리우가 얼굴을 내밀었다.

“세아!”

그 목소리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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