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아닌 것을 위해 불탄 소녀 – 제87화: 강남역의 첫 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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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87화: 강남역의 첫 손

강남역 지하 1층. 승강장 끝의 자판기 앞에서 세아는 하늘이를 기다리고 있었다. 손에는 아무것도 들려 있지 않았다. 제주에서 가져온 짐이 그것뿐이었다. 작은 캐리어 하나. 어머니가 챙겨준 옷 몇 벌과 약간의 현금. 그게 전부였다. 강리우가 살던 호텔에서 가져온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세아는 그곳에서 입은 옷들도 모두 두고 왔다. 그것들은 다른 누군가의 세아였다. 허약하고, 의존적이고, 계속해서 태워지고 있던 그 세아의 것들이었다.

강남역은 밤이었다. 밤 8시 35분. 출근길이 끝나고 퇴근길도 끝난 그 사이의 시간. 역사는 반쯤 비어 있었다. 그 빈 공간이 세아에게는 낯설었다. 지하철역이 이렇게 조용할 수 있다는 게 신기했다. 합정역은 항상 사람이 많았다. 홍대와 강남을 연결하는 노선이었고, 늦은 밤에도 술 취한 사람들이 어슬렁거렸다. 하지만 강남역은 달랐다. 강남역은 시간이 정확했다. 사람들도 정확했다. 모든 움직임이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자판기 옆의 벤치에 앉은 사람이 있었다. 회사원 같은 중년 남자. 넥타이를 풀고 있었고, 핸드폰을 보고 있었고,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 그 남자는 세아를 보지 않았다. 강남역의 벤치에 앉은 젊은 여자는 보기에 너무 흔했다. 모두가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모두가 어딘가로 가고 있었다.

세아의 핸드폰이 울렸다. 문자였다. 하늘이였다.

“5분이야. 강남역 1번 출구 앞에서 만날까?”

세아는 짐을 들었다. 그리고 일어섰다. 벤치의 따뜻함이 다리 뒤에 남았다. 그것도 이상한 감각이었다. 누군가가 앉아 있던 자리의 온기가 자신에게 전달되는 것. 마치 누군가와 손을 잡고 있는 것처럼. 하지만 손을 잡지는 않았다.

1번 출구를 향해 가는 길에 에스컬레이터가 있었다. 세아는 에스컬레이터에 섰다. 그리고 한 계단씩 올라갔다. 에스컬레이터 위에서 걷는 것. 그것은 마치 시간을 두 배로 빠르게 진행하는 것 같았다. 움직이면서 동시에 움직이지 않고. 가면서 동시에 가지 않고.

지상으로 나왔을 때, 강남역 1번 출구 앞은 밤하늘이었다. 밝은 밤하늘. 서울의 밤은 늘 밝았다. 가로등, 건물의 조명, 간판의 불빛. 모든 것이 밤을 밝혀 놓았다. 제주의 밤은 이렇지 않았다. 제주의 밤은 검었다. 진짜 검었다. 어머니와 함께 있을 때도, 혼자 있을 때도.

“야!”

하늘이가 차 옆에서 손을 흔들었다. 회색 포르쉐. 예쁜 차였다. 세아가 제주에 있던 동안 하늘이가 새로 산 것 같았다. 하늘이는 항상 차를 샀다. 번 돈을 차에 투자했다. “돈은 모아 놓으면 썩어. 차는 타면 행복해진다”는 게 하늘이의 철학이었다.

세아가 차에 탔다. 문을 닫을 때 서울이 완전히 닫혔다. 유리창 너머의 모든 것이 차단되었다. 그제야 세아는 숨을 쉴 수 있었다.

“헐, 넌 진짜. 왜 이렇게 말랐어? 제주에 가서 더 말랐네?”

하늘이가 세아를 한 번 쭉 봤다. 운전대를 손에 들기 전에. 하늘이의 눈은 항상 정확했다. 세아가 무엇을 했는지, 어디를 갔다 왔는지, 지금 어떤 상태인지. 모든 것을 읽어냈다.

“음식을 많이 못 먹었어요.”

세아가 말했다. 그것은 반은 진실이었다. 반은 거짓이었다. 세아는 제주에서 충분히 먹었다. 어머니가 챙겨줬다. 아침마다 미역국이 있었고, 점심에는 생선이 있었다. 어머니의 손이 만든 모든 음식이 있었다. 하지만 세아의 몸은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모든 것이 목을 통과할 때 가시가 되었다.

“그래, 일단 밥부터 먹자. 내가 너한테 많은 걸 챙겨야 하는데.”

하늘이가 차를 출발시켰다. 강남역 앞의 거리로. 밤 8시 45분. 아직도 사람들이 많은 시간이었다.

“제가 일단 편의점 알바를 다시 시작해야 할 것 같아요.”

세아가 말했다. 창밖을 보면서.

“GS25? 그 합정동?”

“네.”

“야, 너 진짜. 그 점장이 너를 받아줄까? 너 그냥 사라졌잖아. 연락도 없이.”

하늘이가 말했다. 신호등에서 멈춰 있는 동안. 빨간 신호. 강남역을 뒤로하면서.

“알 수 없어요. 근데 한 번 가봐야죠.”

세아가 말했다. 그것은 용기 같은 것이 아니었다. 그냥 필요했을 뿐이었다. 돈이. 음악 스튜디오가. 자신의 음악을. 어머니의 말이 맞다면.

“음악 스튜디오? 너 진짜 할 거야?”

하늘이가 다시 물었다. 이번엔 신호가 바뀌고 차가 움직이고 있었다.

“하려고 해요.”

“어떤 음악?”

“제 음악. 제 이름으로.”

이 말을 꺼낼 때, 세아의 목이 아팠다. 하지만 이번엔 강리우 때문이 아니었다. 이것은 다른 종류의 아픔이었다. 두려움의 아픔. 그것을 말했으니 이제 그것은 현실이 되었다. 현실이 되었으니 이제 실패할 수 있게 되었다.

“좋아. 그럼 일단 밥을 먹고, 너가 지낼 곳을 구해야 해. 그 고시원은?”

“아직 있어요. 월세를 내고 있으니까.”

“고시원. 진짜. 그 좁은 곳에서 음악을 할 건가?”

하늘이가 웃었다. 하지만 그것은 놀림이 아니었다. 그것은 깨달음의 웃음이었다. 세아의 삶이 얼마나 불가능해 보이는지에 대한 그 깨달음의 웃음.

차는 명동을 지나가고 있었다. 강남역에서 출발한 지 약 20분. 거리는 사람으로 가득했다. 관광객들. 쇼핑객들. 데이트하는 사람들. 모두가 뭔가를 구매하고 있었다. 옷, 신발, 화장품, 음식. 모든 것을 구매하고 있었다. 그 과정 속에서 세아는 자신이 무엇을 구매해야 하는지 생각했다. 음악 스튜디오의 시간? 마이크? 헤드폰? 아니면 그냥 자신감?

“하늘아, 강리우가 정말로 날 찾으려고 했어?”

세아가 물었다. 갑자기. 전화에서 하늘이가 한 말을 다시 생각하면서.

하늘이의 손이 핸들을 조금 더 세게 잡았다. 지금 신호를 기다리고 있었고, 차는 정지해 있었다.

“응. 처음엔 너한테 전화했는데, 넌 안 받았잖아. 그래서 나한테 전화했어. 너가 어디 있냐고. 나라고 모른다고 했지. 그럼 그 새끼가 직접 와서 내 가게를 돌아다녔어. 너가 있던 골목들을 다니면서. 마치 뭔가를 잃어버린 거처럼. 마치 너를 찾아야만 살 수 있는 거처럼.”

하늘이가 말했다. 목소리는 평탄했지만, 그 안에는 분노가 있었다. 세아를 향한 분노가 아니라, 강리우를 향한 분노가.

“그런데 왜 포기했어요?”

“몰라. 한 일주일 정도 다니다가 그냥 안 보였어. 넌?”

“제주에 있었어요.”

“그래, 알아. 근데 너 이번엔 진짜로 그 새끼한테 가면 안 돼. 알겠지?”

하늘이가 세아를 한 번 바라봤다. 신호가 아직도 빨간 신호였고, 차는 여전히 정지해 있었다. 명동의 밤은 계속해서 밝았다.

“네. 이번엔 안 갈 거예요.”

세아가 말했다. 목소리는 작았지만, 그것은 거짓이 아니었다.

신호가 바뀌었다. 초록불. 차가 다시 움직였다.

하늘이는 강남으로 향했다. 신논현. 역시 강남. 하지만 이번엔 다른 강남이었다. 식당과 술집이 많은 강남. 젊은 사람들이 몰려 있는 강남. 세아가 일하던 편의점의 강남이 아니라, 누군가가 즐기는 강남.

“여기 우육탕 맛있어. 내가 자주 와.”

하늘이가 말했다. 차를 주차하면서. 아파트 지하 주차장 같은 곳.

그들이 들어간 식당은 작았다. 테이블 4개. 그중 2개만 차 있었다. 한 테이블에는 회사원 두 명이 술을 마시고 있었고, 다른 테이블에는 여자 셋이 밥을 먹고 있었다. 세아와 하늘이가 앉자 주인이 나왔다. 중년 여자. 앞치마를 입고 있었다.

“아, 하늘이 왔네. 오늘은 친구 데려왔어?”

“응. 이 친구 오래전부터 알던 친구야. 요즘 힘든 시간을 보냈어서, 좋은 음식으로 달래주려고.”

하늘이가 말했다. 마치 세아의 어머니처럼. 마치 세아의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사람처럼.

“그래? 그럼 우육탕 끓여줄게. 한 그릇?”

“두 그릇. 우리 둘 다.”

하늘이가 말했다. 그리고 세아를 봤다. 세아가 반대할 기회를 주지 않으면서.

식당은 침묵했다. 주인이 부엌으로 들어갔고, 나머지는 각자의 밥에 집중했다. 그 침묵 속에서 세아는 숨을 쉴 수 있었다. 처음으로, 제주를 떠난 후 처음으로, 자신의 숨이 자신의 것이라고 느껴졌다.

“너 강리우 그 새끼가 진짜 어떤 인간이었어?”

하늘이가 갑자기 물었다. 다른 테이블의 사람들이 있는데도.

“그건… 말하기 힘들어요.”

세아가 말했다.

“왜? 너를 때렸어?”

“아니요.”

“그럼 뭐? 돈 뜯었어? 약물? 뭐야?”

하늘이가 물었다. 각각의 질문이 하나의 칼 같았다. 정확하고, 빠르고, 치명적이었다.

“그냥… 자신이 날 구원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나는 그걸 받아들였어요. 그런데 그건… 그건 사랑이 아니었어요. 그건 통제였어요.”

세아가 말했다. 목이 또 아팠다. 하지만 계속했다. 말해야 했다.

“그리고 내가 그걸 깨달았을 때, 걔는… 우리 둘 다 죽으려고 했어요. 한강 다리에서.”

하늘이가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꽤 크게. 소리가 났다. 다른 테이블의 사람들이 잠깐 고개를 돌렸다가 다시 자신들의 일에 집중했다.

“그 새끼가…”

하늘이가 말했다. 하지만 그 이상은 말하지 않았다. 말할 수 없었다. 분노가 말을 집어삼켜 버렸을 것이다.

식탁에 우육탕이 나왔다. 뜨거웠다. 김이 나고 있었다. 그 안에는 소고기 조각들이 떠 있었고, 국물은 진했다. 마치 누군가의 피를 끓여낸 것 같았다. 하지만 냄새는 따뜻했다. 그리고 맛있었다.

“먹어.”

하늘이가 세아를 봤다. 눈은 여전히 분노로 가득했지만,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세아가 숟가락을 들었다. 국을 한 숟가락. 입에 넣었다. 뜨거웠다. 혀가 화상을 입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것도 좋았다. 뜨거운 것은 실재했다. 뜨거운 것은 죽어 있는 혀를 깨웠다.

“너 강리우가 뭐하는 사람이야? 진짜로?”

하늘이가 다시 물었다.

“JYA 엔터테인먼트의… 아들이에요. 음악 회사.”

“재벌 새끼네. 진짜 한심한 새끼다. 그런데 왜 그런 새끼가 너한테 집착했어?”

“그건… 제 음악 때문인 것 같아요. 근데 제 음악이 좋아서가 아니라, 자신이 저를 구원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어요. 그게 자존감의 문제였던 것 같아요.”

세아가 말했다. 이번엔 목이 안 아팠다. 이미 모든 걸 말했기 때문이었을 수도 있고, 강리우가 이제는 더 이상 그렇게 중요하지 않았기 때문일 수도 있었다.

하늘이가 우육탕을 먹었다. 깊게. 그리고 고개를 들었다. 눈은 여전히 분노로 가득했지만, 이제 그것은 다른 곳을 향했다. 강리우를 향한 분노. 세아를 향한 것이 아니라.

“알겠어. 그럼 이제부터는 그 새끼가 날 건드릴 수 없게 해야 해.”

“어떻게요?”

“음악. 넌 너의 음악으로 그 새끼를 이겨야 해. 그 새끼가 가진 돈이나 권력으로가 아니라, 넌 네 목소리로. 알겠지?”

하늘이가 말했다. 마치 세아의 어머니처럼. 마치 누군가 큰 것을 보고 있는 사람처럼.

세아는 하늘이의 말을 듣고 있었지만, 동시에 다른 것도 들었다. 음악이었다. 식당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 팝송이었다. 영어였다. 누군가의 목소리였다. 그것은 아무 감정도 없이 흘러나왔다. 그냥 소비되는 음악이었다. 배경음악이었다. 아무도 들으려고 하지 않는 음악이었다.

세아는 자신의 음악이 그렇게 되고 싶지 않았다. 자신의 음악이 배경이 되고 싶지 않았다. 자신의 음악이 소비되고 싶지 않았다. 자신의 음악이 누군가의 이윤이 되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자신의 음악이 뭔지도 모르면서?

“하늘아, 질문이 있어요.”

세아가 말했다. 우육탕을 먹으면서.

“뭐?”

“내가 작곡한 곡들이 있잖아요. JYA에서 제 이름 없이 팔린 곡들. 그걸 어떻게 해야 하나요?”

하늘이가 숟가락을 멈췄다.

“그 곡들이 몇 개야?”

“모르겠어요. 제가 센 건 12개인데, 더 있을 수도 있어요.”

“12개? 12개나? 그리고 다 팔렸다고?”

“네.”

“어떻게 팔렸는데?”

“다른 가수 이름으로. 아마 박소진이라는 가수가 제 곡들을 부른 것 같아요.”

하늘이가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이번엔 더 크게. 스푼이 그릇에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야. 나 네이버 검색 좀 할게.”

하늘이가 핸드폰을 꺼냈다. 손가락으로 빠르게 뭔가를 치기 시작했다. 박소진. 그 이름을 검색했다. 결과가 나왔다. 그 이름은 꽤 유명했다. 신인상을 받았고, 차트 1위를 했고, 앨범도 나왔다. 모두 세아의 곡으로.

“이 여자가 너한테서 곡을 훔친 거야?”

“네. 아마.”

“아마? 너 확실하지 않아?”

“네. 저랑 만난 적도 없고. 회사에서 그렇게 했던 것 같아요. 저는 크레딧 없이 곡을 썼고, 회사는 그 곡을 다른 가수한테 줬어요. 그리고 그 가수가 유명해졌어요. 그 가수의 이름으로.”

세아가 말했다. 차분하게. 마치 뉴스를 읽는 것처럼.

“이건… 이건 소송감인데?”

“네. 근데 저는 돈이 없어요. 변호사도 없고.”

“그래. 알겠어. 일단 나중에 생각해보자. 너 지금은 음악에 집중해. 그리고 그 회사에 대해서는 이따가 생각해.”

하늘이가 말했다. 손가락이 자꾸만 핸드폰 화면을 누르고 있었다. 박소진의 사진을 계속 보면서.

밤은 더 깊어지고 있었다. 9시 30분. 강남의 밤은 여전히 밝았다. 식당의 불빛, 거리의 불빛, 건물의 불빛. 모든 것이 밝았다. 제주의 밤처럼 검지 않았다.

“오늘은 내 집에서 자. 고시원엔 내일 가.”

하늘이가 말했다.

“괜찮아요?”

“뭐가 괜찮냐고. 넌 지금 혼자면 안 돼.”

하늘이가 말했다. 마치 그것이 당연한 일인 것처럼.

세아는 하늘이를 봤다. 타투 아티스트. 홍대 지하에서 살고 있는. 돈도 많지 않고, 자신의 일도 바쁜. 하지만 지금 세아를 자신의 집으로 데려가려고 하는. 그런 사람.

“감사해요, 하늘아.”

세아가 말했다.

“감사는 뭐하고, 음악 해. 그게 내가 너한테서 받을 수 있는 유일한 보상이야.”

하늘이가 말했다. 웃으면서.

그들은 식당을 나갔다. 밤하늘은 여전히 밝았고, 거리는 여전히 가득했다. 하지만 세아의 눈에는 다르게 보였다. 이것은 더 이상 강리우를 향한 길이 아니었다. 이것은 자신을 향한 길이었다. 자신의 음악을 향한 길이었다.

차 안에서, 하늘이가 음악을 틀었다. 클래식이었다. 피아노 곡이었다. 쇼팽의 야상곡. 그 음악은 강남의 밤 속에서 흘러나왔다. 마치 다른 세계에서 온 것처럼. 마치 누군가의 영혼이 울고 있는 것처럼.

세아는 그 음악을 들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강리우의 손가락들이 피아노 위를 움직였을 때, 아마도 이런 소리가 났을 것이다. 이런 슬픔이 흘러나왔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그 손가락들은 움직일 수 없다고 했다. 떨린다고 했다. 더 이상 피아노를 칠 수 없다고.

그렇다면 세아는? 세아는 아직도 노래할 수 있다. 세아는 아직도 자신의 목소리를 가지고 있다. 그것을 누군가에게 빼앗겼지만, 그것을 다시 찾을 수 있다.

어머니가 말했다.

너는 가서 노래를 해. 너의 이름으로. 너의 목소리로.

그 말이 자동차 안에서 다시 울렸다. 쇼팽의 야상곡과 함께. 강남의 밤과 함께.

세아는 창밖을 봤다. 강남이 지나가고 있었다. 강남역에서 출발한 지 거의 한 시간. 이제 홍대에 거의 다 왔을 것이다. 하늘이의 집이 있는 곳. 세아가 처음 하늘이를 만난 고등학교 시절 이후로, 가장 안전하다고 느껴지는 곳.

음악이 계속 흘러나왔다. 그리고 세아의 가슴 속에서도 음악이 시작되었다. 아직은 형태가 없었다. 아직은 말이 없었다. 하지만 그것은 거기 있었다. 타오르고 있었다. 천천히. 하지만 확실하게.

나는 버닝이 아니라, 이제 불을 켜는 거야.

세아가 생각했다.

나는 타버리는 성냥이 아니라, 영원한 불꽃이 되는 거야.

자동차는 홍대로 계속 달리고 있었다. 밤은 여전히 밝았고, 강남역의 첫 손은 이제 하늘이의 손으로 바뀌어 있었다.

# 강남의 밤, 홍대로 향하는 길

## 1부: 식당의 불빛

식당의 불빛이 세아의 얼굴을 비추고 있었다. 따뜻하고도 차가운 LED 조명이 그녀의 눈썹 위를 스치고 지나갔다. 창밖으로는 강남역 주변의 네온사인들이 거리를 물들이고 있었다. 빨강, 파랑, 노랑. 모든 색깔이 한 곳에 모여 있었다. 마치 무지개가 폭발한 것처럼.

세아는 밥을 집어 올렸다. 젓가락이 떨렸다. 손이 떨렸다. 아니, 정확히는 마음이 떨리고 있었고, 그 떨림이 손으로 전해지고 있었다. 밥알이 밥그릇으로 떨어졌다. 다시 집어 올렸다. 이번에는 성공했다. 입속으로 들어갔다. 씹었다. 맛이 없었다. 마치 모래를 씹는 것 같았다.

“너 밥 먹는 거 봤어? 진짜 말이 안 돼.”

하늘이가 수저를 놓고 세아를 바라봤다. 검은 선글라스를 벗은 얼굴이 드러났다. 너무 밝은 식당의 불빛 때문에 하늘이가 눈을 찡긋했다. 눈가에 주름이 졌다. 서른을 훨씬 넘은 나이. 하지만 그 눈빛은 여전히 젊었다. 뭔가를 향해 타오르고 있는 눈빛. 마치 불타는 숯처럼.

“죄송해요. 저…”

세아가 입을 열었다. 목소리가 작았다. 식당의 소음에 거의 묻혀갈 정도로.

“뭐해? 자존심 상한 거야? 아니면 그냥 자책하는 거야?”

하늘이가 물었다. 하지만 세아가 대답할 시간을 주지 않았다. 하늘이는 계속 말했다.

“너 지금 뭐 생각하고 있는지 알아. 강리우 말이지. 항상 그 남자 생각만 해. 그 남자 손가락, 그 남자 피아노, 그 남자 음악. 그 남자 말고는 뭐 없어?”

하늘이의 목소리가 커졌다. 식당의 다른 손님들이 잠깐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금방 다시 자신들의 밥에 집중했다. 강남의 이 식당에서는 모두가 자신의 세계에만 빠져 있었다.

세아는 답변 대신 국을 마셨다. 뜨거운 국물이 목을 타고 내려갔다. 그 온기가 가슴까지 도달했다. 잠깐이나마 마음을 데울 수 있었다.

“너 좀 봐. 세아. 제일 중요한 게 뭔지 알아?”

하늘이가 다시 물었다. 이번에는 목소리가 낮았다. 거의 속삭이는 수준으로.

세아가 고개를 들었다. 하늘이의 눈을 만났다. 그곳에는 분노가 아니라 걱정이 있었다. 깊은 걱정. 마치 친구를 물 위에서 찾고 있는 사람의 눈빛 같은 걱정.

“너야. 세아. 너 자신이 제일 중요해.”

하늘이가 말했다. 손을 뻗어 세아의 손을 잡았다. 손가락에는 문신이 있었다. 작은 별들과 음표들. 하늘이 자신이 그린 문신들이었다. 온기가 세아의 손으로 전해졌다.

## 2부: 결정의 순간

“오늘은 내 집에서 자. 고시원엔 내일 가.”

하늘이가 갑자기 말했다. 마치 세아가 이미 동의한 것처럼. 마치 그것이 당연한 일인 것처럼.

세아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아니, 더 창백해졌다. 이미 창백한 얼굴이 더욱 투명해지는 것 같았다.

“괜찮아요? 그런 건…”

세아가 말했다. 하지만 말이 끝나지 않았다.

“뭐가 괜찮냐고. 넌 지금 혼자면 안 돼.”

하늘이가 잘라냈다. 이 문장은 마치 법칙처럼 들렸다. 세아가 거부할 수 없는 절대적인 명제처럼. 물리학의 법칙처럼.

세아는 하늘이를 봤다. 정말로 봤다. 처음으로 온전히 집중해서.

타투 아티스트. 홍대 지하 작은 스튜디오에서 혼자 일하는 사람. 돈도 많지 않았다. 세아는 몇 번 하늘이의 스튜디오를 방문했다. 벽은 어두웠고, 천장은 낮았고, 환풍기는 시끄러웠다. 하지만 거기에 가면 뭔가 안전했다. 마치 모든 것이 멈춘 공간 같았다. 시간이 흐르지 않는 곳.

그런 사람이 지금 자신을 자신의 집으로 데려가려고 하고 있었다. 자신의 자리를 내어주려고 하고 있었다. 자신의 밤을 공유하려고 하고 있었다.

“감사해요, 하늘아.”

세아가 말했다. 목소리가 떨렸다.

“감사는 뭐하고, 음악 해. 그게 내가 너한테서 받을 수 있는 유일한 보상이야.”

하늘이가 웃으며 말했다. 웃음이 주름을 깊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 웃음은 진정했다. 부정함이 없었다. 계산이 없었다.

“음악이요?”

세아가 물었다.

“응. 너 목소리 있잖아. 그 목소리로 뭐든 할 수 있어. 근데 지금 넌 그걸 잊고 있어. 한 남자를 따라다니느라 자기 목소리를 잃어버렸어. 그게 내가 제일 싫어하는 거야.”

하늘이가 밥을 한 입 먹으며 말했다. 입 주변에 쌀알이 묻었다. 하지만 하늘이는 신경 쓰지 않았다.

세아는 그 모습을 봤다. 그리고 처음으로 하늘이가 몇 년 동안 자신을 얼마나 주의 깊게 바라보고 있었는지를 깨달았다. 자신이 어떻게 변했는지를, 어떻게 작아졌는지를 보고 있었다는 것을.

## 3부: 밤거리로 나서다

그들은 식당을 나갔다.

강남역 주변의 밤거리가 그들을 맞이했다. 네온사인의 불빛이 더욱 선명하게 드러났다. 식당의 실내 조명에서 밖으로 나오니, 세아의 눈이 한순간 어둠을 감지했다. 하지만 그것은 진정한 어둠이 아니었다. 강남의 밤은 낮처럼 밝았다. 아니, 낮보다 더 밝았다.

거리를 가로지르는 자동차들의 헤드라이트. 건물의 창들에서 새어 나오는 불빛들. 가로등들이 일렬로 선을 그었다. 식당의 불빛, 거리의 불빛, 건물의 불빛. 모든 것이 밝았다.

세아는 한 번 제주도에 가본 적이 있었다. 대학교 1학년 때. 강리우가 콘서트 투어로 제주에 가는 것을 따라갔었다. 그때의 밤은 달랐다. 제주의 밤은 검었다. 정말로 검었다. 별이 무한히 많이 떠 있었고, 그 별들 사이의 어둠이 더욱 깊었다. 마치 우주 속에 떠 있는 것처럼 느껴졌었다.

하지만 강남의 밤은 다였다. 강남의 밤은 낮의 연장선이었다. 인간이 만든 불빛으로 어둠을 완전히 지배한 곳이었다. 그곳에서는 별을 볼 수 없었다. 하늘을 올려다봤지만, 하늘이 없었다. 대신 건물들이 있었고, 간판들이 있었고, 무한한 빛들이 있었다.

세아는 하늘이의 옆에서 걸었다. 하늘이의 발걸음이 빨랐다. 마치 어딘가 가야 할 곳이 있는 것처럼. 마치 누군가를 구해야 하는 것처럼.

“이 거리 봐. 진짜 미쳤지? 이 모든 불빛들.”

하늘이가 말했다.

“네. 밝네요.”

세아가 대답했다. 목소리는 여전히 작았다.

“밝다는 게 아니라, 이 불빛들이 모두 누군가의 욕망이라는 거야. 돈을 벌고 싶은 욕망, 더 좋은 삶을 살고 싶은 욕망, 누군가에게 보이고 싶은 욕망. 그 모든 게 이 불빛을 만들었어. 제주도는 달랐지? 제주도는 자연의 불빛이 있었어.”

하늘이가 철학자처럼 말했다. 하지만 하늘이는 철학자가 아니었다. 그저 타투 아티스트였다. 오직 예술을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세아는 다시 하늘이를 봤다. 이 사람이 정말로 자신을 알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제주도 여행의 이야기를 한 번도 한 적이 없었는데, 하늘이는 알고 있었다. 혹은 세아의 눈빛을 보고 알아냈을지도 모른다. 슬픔의 눈빛. 그리움의 눈빛. 무언가를 잃어버린 사람의 눈빛.

“하늘아. 왜 이렇게 날 챙겨주세요?”

세아가 물었다. 이건 오래전부터 물어보고 싶었던 질문이었다.

하늘이가 걸음을 멈췄다. 강남역 교차로의 신호등에서. 신호등이 빨간색으로 변했다. 사람들이 멈췄다. 수십 명의 사람들이 신호등 앞에서 기다렸다. 모두가 스마트폰을 보고 있었다. 누구도 서로를 보지 않았다.

“넌 내 동생 같아서.”

하늘이가 말했다. 신호등의 빨간 불빛이 하늘이의 얼굴을 비추고 있었다.

“동생이요?”

“응. 내 여동생이 있었어. 너 나이 정도였어. 근데…”

하늘이가 말을 멈췄다.

“근데요?”

“자살했어. 15년 전에.”

신호등이 파란색으로 변했다. 사람들이 움직였다. 하늘이도 움직였다. 하지만 세아는 몇 초 동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 짧은 문장이 귀에 계속 울렸다. 15년. 그렇다면 하늘이는 그 이후로 계속 누군가를 찾고 있었던 것이다. 자신의 여동생을 찾고 있었던 것이다.

세아가 빨리 걸었다. 신호가 다시 바뀌기 전에 건널목을 건넜다.

## 4부: 자동차 안의 음악

그들은 하늘이의 자동차에 탔다. 구형 마티즈였다. 이십 년은 넘은 것 같은 낡은 자동차. 하지만 안쪽은 깨끗했다. 시트가 빨간색으로 덮여 있었고, 대시보드에는 여러 개의 향수 병들이 놓여 있었다. 라벤더 향. 사과 향. 그리고 무언가 달콤한 향.

하늘이가 시동을 걸었다. 엔진음이 울렸다. 그다음 음악이 나왔다.

클래식이었다. 피아노 곡이었다. 쇼팽의 야상곡. 야상곡 제2번 내림마장조. 세아는 그 곡을 알았다. 강리우가 자주 연주하던 곡이었다.

음악이 자동차 안에 가득 찼다. 스피커가 좋지 않아서 음질이 그리 좋지는 않았지만, 그것은 상관없었다. 쇼팽의 선율이 계속 흘러나왔다. 마치 다른 세계에서 온 것처럼. 마치 누군가의 영혼이 울고 있는 것처럼.

강남의 밤이 자동차의 창문을 통해 흐르고 있었다. 빨간 신호등. 초록색 신호등. 가로등. 건물의 창들. 모든 것이 흐르고 있었다. 마치 영화의 장면처럼.

세아는 그 음악을 들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강리우의 손가락들이 피아노 위를 움직였을 때, 아마도 이런 소리가 났을 것이다. 이런 슬픔이 흘러나왔을 것이다. 피아노의 검은 건반과 하얀 건반들 위를 움직이는 그 손가락들. 그 손가락들이 만들어내는 음악.

하지만 지금 강리우는 어디에 있는가. 세아는 몇 일 전에 그를 만났다. 카페에서. 강리우는 손을 떨고 있었다. 미세한 진동. 아주 작은 떨림. 하지만 그것이 점점 커지고 있다고 했다.

“손가락이 더 이상 말을 듣지 않아. 뇌가 신호를 보내는데, 손가락이 반응을 안 해. 정말 이상하지? 내 손가락인데…”

강리우가 말했다. 그의 눈빛은 이미 죽어 있었다. 마치 살인자의 눈빛처럼. 아니, 자살자의 눈빛처럼.

“그렇다면 세아는? 세아는 아직도 노래할 수 있다.”

세아가 자신에게 말했다. 내면의 목소리로. 그것은 자신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어머니의 목소리였다.

어머니가 말했다. 세아가 강리우를 따라 대학을 포기하고 싶다고 했을 때.

“너는 가서 노래를 해. 너의 이름으로. 너의 목소리로. 누군가를 따라가면서 노래하는 건 진정한 노래가 아니야. 누군가의 그림자가 되는 건 진정한 음악이 아니야.”

그 말이 자동차 안에서 다시 울렸다. 쇼팽의 야상곡과 함께. 강남의 밤과 함께.

하늘이가 자동차를 조종했다. 강남역을 떠났다. 압구정로를 지났다. 언덕을 올랐다. 그리고 강남에서 서쪽으로 향했다. 홍대로. 젊은이들의 도시로. 예술가들의 도시로.

## 5부: 강남에서 홍대로

자동차가 한강을 건넜다. 한강 위의 다리 위에서 세아는 밤의 강을 봤다. 강의 물이 불빛을 반사하고 있었다. 마치 액체 금속 같았다. 마치 흐르는 은색 같았다.

“저 강이 흐르고 있어. 계속.”

하늘이가 말했다.

“네.”

세아가 대답했다.

“우린 그 강처럼 흘러가야 해. 계속 흘러가야 해. 멈추면 안 돼.”

하늘이가 말했다.

세아는 자신의 손을 봤다. 손가락들을 펼쳤다. 다섯 개의 손가락. 모두 정상이었다. 떨리지 않았다. 움직였다. 생명이 있었다.

“내가 강리우한테 뭐라고 말해야 할까요?”

세아가 물었다.

“아무것도. 그냥 뒤돌아서 가.”

하늘이가 대답했다.

“정말요?”

“응. 그게 가장 좋은 말이야. 말 없는 작별. 그것만으로 충분해.”

자동차가 계속 달렸다. 강남의 밝은 불빛에서 벗어났다. 서초동. 동작구. 그리고 마포구로.

“너 아직도 기억해? 고등학교 때 음악실?”

하늘이가 물었다.

세아가 미소를 지었다. 처음으로 진정한 미소를.

“네. 기억해요. 하늘이가 내 노래를 처음 들어줬을 때.”

“그때 넌 뭐라고 했어?”

“제가 뭐라고 했죠?”

“’이 노래가 내 노래가 되도록 도와줘’라고 했어.”

하늘이가 말했다.

“맞아요. 그런데 이제 알았어요. 처음부터 내 노래였어요. 누가 도와줄 필요가 없었어요. 그냥… 부르면 됐어요.”

세아가 말했다. 목소리가 조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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